미래의 빛은 도시축전이, 바다의 빛은 팔미도 등대가 최초로 밝혔다

인천 팔미도. (사진제공: 팔미도해운)

‘내일을 밝히다’는 주제로 인천세계도시축전이 지난 7일 개막했다. 개막식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인천은 우리나라의 관문이자 1903년 한국 최초로 팔미도 등대가 불을 밝힌 곳”이라며 축사의 운을 뗐다.

이번 축전이 미래도시로의 축제 현장이라면, 이 대통령이 소개한 ‘팔미도 등대’는 한국의 희로애락을 같이한 역사적인 현장이다.

최초 팔미도 등대(위), 현재 팔미도 등대 건물. (사진제공: 팔미도해운)

팔미도는 인천항에서 남쪽으로 15.7km 떨어진 작은 섬으로, 팔(八)자로 뻗어 내린 꼬리(尾) 같다는 의미에서 팔미도(八尾島)라 불렸다고 한다.

팔미도 등대는 옛 등대와 새 등대가 있는데 100년간 불을 밝혀오다 지금은 퇴역하고 유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된 7.3m 높이의 옛 등대와 바로 옆에 2003년 세워진 높이 26m 규모의 새 등대가 있다.

팔미도는 지리상 해상교통의 요충지로서 군사작전지역으로 묶여 100여 년 동안 민간인 출입이 통제돼 왔다. 그러다 올해 ‘2009 인천방문의 해’를 맞아 상시 개방하게 되면서 그 베일이 벗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개방 후 팔미도 등대에 대한 전 국민의 관심은 뜨거웠다. 지난 3월 인기리에 종영한 ‘꽃보다 남자’의 촬영지로 선택되면서 유명세를 날리기 시작했고 특히 도시축전과 연계 홍보를 통해 관광객 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인천지방해양항만청에 따르면 7월말까지 누적 방문객수는 10만 3천여 명에 달하고 하루에 최고 2천여 명이 찾을 때도 있다고 한다. 팔미도에선 인천항이 한눈에 들어올 뿐 아니라 100여 년 동안 사람들의 발길이 뜸했으니 천혜의 자연경관을 가지고 있어 관광하는 이마다 감탄을 자아낸다.

반면 팔미도가 여느 유흥관광지처럼 편의시설을 다 갖추고 손님맞을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면 큰 오산이다. 물과 전기, 화장실도 부족하고 매점도 없다. 그래서 다소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 세기 동안 금단의 섬이었던 곳을 밟는다는 것과 유서 깊은 역사의 채취를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하다.

팔미도 등대는 외로이 바다를 지킨 세월이 길었던 만큼 사연도 깊다.

설립배경부터가 그렇다.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는 국익을 위한 목적이 아닌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 침략을 위한 전략적 수단으로 만들어졌다. 1901년 개항되는 해 일본은 우리정부와 통상장정을 체결하고 ‘한국정부는 통상이후 각 항을 수리하고 등대와 초표를 설치한다’는 조항을 들어 등대건설을 강권했다. 팔미도 등대도 그러한 이유에서 최초로 만들어져 ‘제국의 불빛’으로 첫 사명을 수행했던 것이다.

하지만 등대는 한국전쟁 당시 전란을 반전시키는데 기여한 일화를 가지고 있다. 당시 UN군은 전황을 역전시키고자 인천상륙작전에 기대를 걸었는데 조수간만의 차가 심해 승리에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1950년 9월 14일 밤 팔미도 등대가 길잡이 역할을 제대로 해내면서 10만 병력과 수백 척의 함대가 무사히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할 수 있게 됐다.

팔미도는 인천세계도시축전이 열리는 송도국제업무지구에서 약 28km 떨어진 곳에 있는 섬이다. 송도에서 인천연안여객터미널옆 유람선 부두까지 자가용으로 30여분, 1시간여 배를 타면 팔미도에 도착한다. 

인천의 미래도시는 ‘인천세계도시축전’에서, 일제강점기부터 오늘날까지 한국 역사의 산 흔적은 ‘팔미도의 등대’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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