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저서 ‘신앙·진리·관용’ 번역가 전남대학교 법학과 정종휴 교수 인터뷰

▲ 교황 저서 ‘신앙‧진리‧관용’을 번역한 전남대학교 정종휴 교수.
최근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67인’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종교 지도자로는 유일하게 11위에 올랐다. 이러한 세계적 ‘파워 맨’의 자서전 ‘신앙‧진리‧관용’이 국내의 한 법학자에 의해 한국어로 번역됐다.

바로 20년간 베네딕토 16세와 친분을 이어온 전남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정종휴 교수다. 벌써 교황 서적을 5번째로 번역한 정종휴 교수. 그가 만난 베네딕토 16세와 ‘신앙‧진리‧관용’이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들어 봤다.

교황과의 첫 만남, 추기경 시절부터 지혜롭고 겸손해

‘신앙‧진리‧관용’으로 교황 서적을 5번째 한국어로 번역한 정종휴 교수. 그는 1990년 7월 알렉산더 폰 훔볼트 재단의 초청으로 독일에서 연구할 당시를 떠올리며 교황과의 첫 만남을 이야기했다.

그는 어느 한 논문에서 소개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교회의 상황을 쓴 요셉 라칭거(현 교황의 본명) 추기경의 ‘라칭거 리포트’라는 책을 우연히 알게 됐고, 이후 독일 서점에 진열된 이탈리아 저널리스트와의 대담집에서 교황을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대담집에서 추기경은 잃어버린 것의 회복을 주장했고, 변화 그 자체가 좋은 것이 아님을 선명히 했습니다. 당시 주류를 이룬 진보사상의 실체를 잘 드러내고 모두가 납득할 만한 논거를 통해 비판했죠. 지혜롭고 겸손한 분이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 교수는 1960년대 후반의 가톨릭 문화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감추지 않고 원칙을 분명히 한 교황의 모습이 좋았다고 한다. 또 상황에 맞는 구체적인 처방과 어휘선택, 설명 방식 등이 그에게는 아름답게 느껴졌다고 했다.

이에 정 교수는 91년 여름, 독일 뮌헨 중심가에 자리잡은 성 미카엘 대성당에서 ‘라칭거 추기경 서품 40주년 기념미사와 환영행사’에 참석했다.

그는 “행사에 참석해 그 자리에서 추기경님을 뵙고 책의 번역 허가를 청해도 되는지, 한국독자를 위한 서문을 청해도 되는지 여쭌 것이 운명의 시작이었다”며 교황과의 운명적인 첫 만남을 털어놨다.

▲ 지난 8월 교황을 직접 만나 한국어 번역본을 전달하고 있다.

교황, 변화를 부정하지 않는 정통주의자

낯선 법학자가 자신의 책을 번역하겠다는 말에 당장은 허락을 할 수 없었던 교황은 “당장은 허락할 수 없으니 로마로 편지를 보내라”고 정 교수에게 말했다고 한다.

이후 정 교수는 서툰 독일어로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 라칭거 추기경(현 교황)님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고 했다.

그는 편지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교회의 상황을 놓고 어떤 사람들은 발전을 위한 진통이라 하고, 어떤 이들은 교회의 쇠퇴라고 하며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마당에 추기경님의 책자는 가톨릭교회의 현상에 대한 진단과 나아갈 방향에 대한 정확한 지침을 일러주시는 점에서 심금을 울립니다. 한국어로 번역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시고, 가급적이면 한국독자들을 위한 인사말도 써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썼다.

그로부터 1년여 뒤 정 교수는 다시 교황을 만나 한국어판 번역 허가와 한국 독자들을 위한 서문을 써줄 것을 요청했고, 한국어판 번역이 끝난 이후 교황은 약속대로 한국 독자들을 위한 서문을 보내 줬다.

당시 상황에 대해 정 교수는 “이 때의 서문은 추기경님 자신의 첫 번째 대담집에 대한 비판이 일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이에 대한 답을 한 것과 마찬가지”라며 “이게 얼마나 훌륭한 명문인지, 간단한 인사말 수준을 뛰어넘어 한국어판에 실린 특별서문은 그 후 독일의 저명한 신학 잡지에 그대로 실렸을 정도”라고 말했다.

제265대 교황 베네딕토 16세. 현재도 진보진영에서는 그를 보수주의자라며 가톨릭의 현대화와 대중화를 막는 시대착오적 인물로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소신과 원칙은 철저한 가톨릭 신앙 아래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교황의 저서를 번역한 한 사람으로서 정종휴 교수는 교황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교황님의 신앙을 놓고 진보 혹은 보수라고 구별 짓는 것은 당치 못합니다. 그분은 좋은 것은 뭐든지 다 평가하시고 받아들이십니다. 그분에게는 공의회의 전과 후를 통하여 변하지 않는 하나의 가톨릭 신앙만 있을 뿐입니다. 굳이 말하면 교황님은 ‘변화를 부정하지 않는 정통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내와 집중이 요구되는 ‘신앙‧진리‧관용’

▲ 한국어로 번역된 ‘신앙‧진리‧관용’.
최근 정종휴 교수가 번역한 ‘신앙‧진리‧관용’은 그가 번역한 교황 저서의 5번째 작품이다.

그는 이번 번역본에 있어 ‘농부가 총을 들고 전쟁에 나선 것’과 같았다며 ‘신앙‧진리‧관용’에서는 언어적인 문제도 작용했지만 신학적 지식이 모자라 번역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밝혔다.

스스로를 신학공부 경험이 없는 신학의 문외한이라며 특히, 20세기 후반 베일에 싸인 서구 교회 내부에 대한 배경 이해가 없어 혼이 났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현대의 사상적‧문학적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가치체계라면 진리와 사랑의 종교인 가톨릭 신앙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세속화와 불신앙에 의해 내부적으로 붕괴해 가는 가톨릭교회의 위기를 구한다는 일념으로 번역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

정 교수는 ‘신앙‧진리‧관용’을 신학의 범위를 넘어 철학의 오랜 물음들과 새로운 문제들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 놓은, 교황의 추기경 시절의 저서라고 소개했다.

그는 “이 책은 교회가 오늘날 부딪쳐야만 하는 문제들에 맞설 수 있는 건강하면서 현대적인 처방들을 모아놓은 작품으로, 인내와 집중이 필요한 책”이라고 설명하고 “망설이지 말고 책에 나오는 구절들에 연필로 밑줄을 치라”면서 “읽고 나면 진리에 대한 조용한 확신을 갖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세속화 되어지는 현대 교회들

정종휴 교수는 법학자이며 신앙인이다. 그에게 법과 신앙은 어떻게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정 교수는 결론부터 말했다.

“법과 신앙은 모순되지 않는 측면(가치론)과 모순되는 측면(현실론)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참된 신앙(진리)을 추구하고, 참된 법을 추구한다면 법은 신앙에 수렴될 것입니다.”

또 그는 현재 교회들이 안고 있는 여러 문제점 속에서도 불신앙과 세속화를 심도 있게 비판했다.

그는 “‘누구도 자기가 갖지 않은 것을 남에게 줄 수 없다’는 옛 로마 법상의 격언처럼 내가 신앙과 사랑이 없는 채 남에게 신앙과 사랑을 전달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특히, 교회의 세속화에 대해서는 ‘이 땅의 소금’과 같은 역할이 ‘이 땅의 설탕’으로 변해 가는 것이라고 비유했다.

세상이 소금을 싫어하고 설탕을 좋아한다고 해서 소금이기를 마다하고 설탕이 되어가는 한 교회의 미래는 없다고 정 교수는 말했다.

또 정 교수는 현대 교회가 ‘설계도를 분실한 공사판’과 같다며 아무리 가난하고 약한 이를 돕는다고 해도 신앙 자체가 없으면 언젠가는 이데올로기화 된 사회사업체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그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길은 잃어버린 설계도면을 찾는 것, 즉 신앙의 회복이라고 강조했다.

교회의 세속화가 본질적인 부분인 ‘신앙’까지 흔드는 일은 하루 이틀이 아니다. 그 중 정치와 종교를 연계시켜 교회의 세속화를 넘어서 권력까지 장악하는 사례들은 진정한 종교의 가치조차 무너뜨리고 있다.

이에 교황 저서인 ‘이 땅의 소금’ 한국어판에 실린 교황 서문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교회는 정치 체제에 봉사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훌륭하게 고안된 정치적 이상향이라 할지라도 언제나 정치적 영역에 속하는 이상 그것을 위해 일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정치가 절대적이라는 생각에 반대합니다.”

교황의 어록집 발간 계획 中

정 교수는 향후 교황의 말씀 중에서 생명윤리에 관련된 어록을 모아 한국적 시각으로 정리해 책을 출간할 예정이다.

그는 “교황님은 사랑의 전문가이자 생명의 전문가”라며 앞으로 교황의 생명사랑에 대한 생각과 마음을 책으로 출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정종휴 교수는 법학과 교수로 전공은 계약법이다. 그래서 항상 채무 불이행, 손해배상, 계약해제 등을 강의하면서 연구해야 했고 정신없는 혼란의 시기 속에 ‘라칭거 추기경’을 만나 신앙의 나침반을 찾은 안도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교황에 대한 정종휴 교수의 애정은 마치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과 열정이 묻어 나 가슴을 훈훈하게 만들어 주는 듯 하다.

어린아이 같은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듯이 가톨릭신앙의 절대 안내자 역할인 교황에 대한 어린아이 같이 순수한 마음, 하지만 학자다운 냉철함으로 현대 교회의 문제점들을 꼬집어 내고 변화시키려는 그의 열의. 이것이야말로 바로 신앙인이 가져야 하는 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며, 앞으로 정종휴 교수의 행보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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