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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일보=이솜 기자] “쓰레기(난민)가 브라질에 들어오려고 한다.” “엄마가 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인간임을 포기하는 것.” “여자를 벌할 필요가 있다면 가벼운 구타는 허용돼야 한다.”

충격적인 내용의 이 발언은 일부 네티즌들이 싸우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한 나라의 대표 혹은 수장이 되려는 사람들의 말입니다. 현재 필리핀 대통령인 로드리고 두테르테는 시장인 시절 다바오 교도소 폭동사건 당시 집단 성폭행을 당한 뒤 살해된 호주 여성 선교사를 두고 “시장인 내가 먼저 (성폭행을) 했어야 했는데”라는 믿기 힘든 발언을 한 바 있습니다. 

이들은 이런 망언을 퍼붓고도 최고의 인기를 달리고 있습니다. 분노가 쌓여가는 현대들이 정치인들에 감정을 이입해 약자에게 분을 풀어낸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혐오의 시대’라는 타이틀도 요즘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국내 역시 해외에 뒤지지 않는 망언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정치인이나 유명인뿐 아니라 당장에 인터넷을 키면 쏟아지는 언어의 상당수가 이 ‘분노’를 부추기고 있습니다. 

사실 이 ‘차별의 언어’는 오랜 시간 우리의 삶 속에 당연하게 있었기 때문에 알아채기 힘들 때도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많은 갈등이 더욱 격화되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간 차별을 당했던 약자들이 기득권에 의문을 제기하고 차별에 저항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곪은 상처는 터뜨려야 나을 수 있고, 지금껏 이렇게 세계가 인권적으로 발전해오기도 했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입니다. 나는 차별적인 발언을 스스럼없이 하면서 막말하는 사람을 흉보진 않았나요? 내가 하고 있는 말이 혐오를, 차별을 불러일으키진 않나요?

‘차별이란 무엇인가’의 저자 데버러 헬민은 “사람들 사이에서 차별을 할 때 차별이 문제가 되기 시작하는 것은 우리가 몇몇 방식으로 그들을 좌절시키는 지점부터다”라고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합당한 이유 없이 약자를 좌절시키는 것. 차별의 시작이라는 설명이죠. 

나는 오늘 좌절을, 차별을, 혐오를, 분노를, 두려움을, 죽음을 부추기지 않았나 생각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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