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르신 우선 화장실’ 설치된 스타이발관. ⓒ천지일보(뉴스천지)

옛날 간판 등 복고풍 디자인으로 60~70년대 향수 자극 
변기일체형 화장실·생수 제공 등 노인 친화 서비스 눈길
“4000원 들고 나오면 2000원짜리 국밥 먹고 소주까지”

[천지일보=임문식 기자] 겨울철 새벽 냉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오전 10시쯤. 10층짜리 대형 석탑이 들여다보이는 돌담 주변으로 좌판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많이 팔았어?” 동료 상인이 묻는다.

“네 어제 좀 팔았어요.”

벙거지 비슷한 모자를 쓴 주인은 황토색 왕골 돗자리를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깔았다. 그 위로는 족제비 가죽 털, 염주, 조립용 완구 자동차 등 중고 골동품들을 가지런히 놓았다. 좌판이 다 펴질 때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 한 잔이 그에게 건네졌다.

뒤로는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있는 탑골공원. 앞으로는 ‘낙원 악기상가 간판’이 보이는 이곳은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북문이다. 서울시는 이곳에서부터 낙원상가 사이 100m 구간을 ‘락희(樂喜)거리’로 조성했다. 이른바 ‘노인 친화 거리’다. 노인이 많이 모이는 지역적 특색을 살려 ‘어르신들의 홍대 거리’로 특화하겠다는 것. 상점과 거리 주변을 60~70년대로 풍경으로 꾸미고 노인 친화적인 환경을 만든 것이 주요 내용이다. 실제로 거리 상점엔 옛날 글씨체로 된 복고풍 간판들로 꾸며졌다.

탑골공원 북문에서 낙원상가 방향으로 20여m 걸어가면 ‘락희거리7’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영어로 ‘ELDERLY FRIENDLY STREET’ 즉, 노인 친화 거리란 문구가 표시돼 있다. 화살표는 왼쪽으로 표시돼 있는데, 공교롭게도 그쪽 방향엔 폐지와 각종 고물이 잔뜩 쌓인 고물상이 자리잡고 있다. 고물상엔 폐지를 손수레로 실어 나르는 노인들이 쉴 새 없이 들락날락했다. 폐지 수집은 저소득층 노인들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다. 오른쪽 건물 벽면엔 ‘전국노래자랑’ MC로 유명한 송해 그림이 그려져 있다. ‘락희세븐7무대’라는 간판과 함께 송해가 마이크를 든 채 서 있는 모습이다. 벽 아래엔 소주병과 맥주병이 든 박스가 놓여 있어, 마치 송해가 술 박스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종로구 낙원동엔 송해의 ‘연예인 상록회’ 사무실이 있다. 유명인인 송해를 지역 활성화 마케팅에 활용하고자 한 노력의 결과물이 아닐까 했다.

▲ 60년대 영화 상영하는 할리우드 극장. ⓒ천지일보(뉴스천지)


락희거리 중간쯤 있는 ‘스타이발관’엔 이발 3500원, 염색 5000원이란 가격이 표시됐다. 이발관엔 ‘어르신 우선 화장실’과 ‘생수 제공’ 팻말이 붙어 있다. 어르신 우선 화장실은 노인들이 실금·실변 등을 처리할 수 있도록 변기와 세면대가 하나로 된 변기일체형 세면대를 설치한 곳이다. 생수는 약 복용을 돕기 위해 제공한다. 락희거리에선 이와 함께 고령화 서비스로 어르신 이정표, 지팡이거치대, 심장 응급소, 이심전심 매뉴얼, 큰글자 메뉴판 등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바로 옆엔 60년대 음악을 감상하며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는 ‘추억더하기’ 식당이 나란히 붙어 있다. 출입문 옆에 장식으로 붙은 오래된 레코드판이 눈길을 끈다. 입간판엔 ‘추억의 도시락과 음악이 있는 곳’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도시락은 3000원, 잔치국수는 3000원, 커피는 2000원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나이 지긋한 중년의 남자 종업원이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60년대 교복을 입은 채 서빙하는 모습이 특이했다. 식당 관계자는 “락희거리 조성 전보다 나아졌지만, 시국이 그래서…”라고 말끝을 흐린다.

같은 건물 4층엔 할리우드극장과 낭만극장이 있다. 각각 270석 규모, 주로 60년대 영화가 상영되는데, 하루 평균 500~600명이 찾는다고 한다. 관람비가 2000원으로 저렴해 주머니가 얇은 노인층에 인기다. 종업원은 “영화에 따라 관객 수가 달라지는데. 인기 있는 영화가 상영되면 입석을 해야 할 정도로 사람이 몰린다”고 귀띔했다.

강북구 수유동에 사는 박모(80)씨는 이곳 락희거리의 단골손님이다. 소일거리도 힘에 부친다는 그는 노인 일자리를 마다하고 매일 아침 10시면 락희거리로 나와 친구들과 시간을 보낸다. 박씨는 “락희거리 조성 이후 사람들이 늘긴 늘었다”면서도 “요즘 날씨도 춥고 하니까 평소보다 뜸한 건 사실”이라고 했다.

다소 한산했던 거리가 점심때가 되자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이곳 주변 식당엔 대부분 5000원 이하의 가격표가 붙었다. ‘고향집’이라는 식당은 순두부를 2500원, 선지 해장국을 2500원에 팔았다.

▲ 송해 단골 원조 ‘소문난집국밥전문’. ⓒ천지일보(뉴스천지)


기자의 선택을 받은 곳은 ‘60년 전통 송해의 집’이란 간판을 내건 해장국집. 커다란 통나무를 잘라 만든 탁자 위로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모여 식사하고 있었다. 가격은 2000원. 주인장은 여기가 송해의 단골집이라고 하는데, 확인할 길은 없다. 중간에 합석한 나이 지긋한 중년 남성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해장국에 고춧가루 착착 뿌리고, 소금 간을 맞춘다. 한 숟가락을 떠먹고는 “밥이 약간 덜 됐네”라며 훈수를 둔다. 그러면서도 금세 한 그릇을 뚝딱 비운다. 식사를 내오는 것 외엔 모든 게 셀프다. 빈 그릇과 반찬 그릇을 퇴식구에 직접 갖다 줘야 한다. 식단은 해장국과 깍두기 굵은 소금. 고춧가루가 전부다. 주인은 “우리 집이 제일 싼 곳”이라고 했다. 기자가 수중에 들고 간 현금은 5000원. 국밥 한 그릇을 먹고도 3000원이 남았다.

식당 가격이 저렴한 덕에 어르신들에게 휴식처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매일 필수코스로 락희거리 등 탑골공원을 찾고 있다는 김모(79)씨는 “4000원 가지고 여기 오면 2000원 국밥 먹고 소주 한잔 걸칠 수 있다”고 했다.

락희거리 사업은 서울시가 2013년 실시한 ‘종묘•탑골공원 주변 서비스디자인 기획설계’를 복지·교통·보도환경·디자인 등을 개선하는 ‘고령화 서비스 디자인’의 첫 시범사업으로 진행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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