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

조말선(1965~  )
 

오븐의 채널이 정각에서 멎었다
늦은 아침이 다 구워졌다
꽃나무 밑에서 놀던 적막은 바싹 익었다
밀가루에 버무려진 세상이 거짓말같이 부풀어 오르는 시각
우체부가
벌겋게 달아오른 우체통을 열고
뜨거운 편지를 꺼낸다
삼십 분 전에 넣은 편지가 벌써 익다니!
생의 한나절을 다 읽기도 전에
나는 또 숙성되었다.
 

[시평] 

대부분 오븐에는 타이머가 장착되어 있고, 사람들은 타이머를 이용하여 시간을 정해놓고 무엇을 굽거나 익히곤 한다. 무엇을 굽는다는 것은 그 물건을 보다 잘 먹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리라. 그래서 보다 맛있게 먹기 위하여 우리는 오븐에 빵을 넣기도 하고, 또 다른 종류의 음식물들을 넣어 익힌다.
세상사 모든 일을 오븐에 넣어 구을 수 있다면, 그래서 익히거나 숙성을 시킬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어떠할까.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늦은 아침도 오븐에 넣어 구어서 느긋이 즐길 수 있고, 우체부 아저씨가 우체통에 배달해 준 편지를 오븐에 넣고 일정한 시간이 지난 뒤에 열어보면, 그저 밋밋했던 사연이 뜨겁게 익은 사랑의 사연으로 바뀔 수도 있으니, 이 얼마나 신나는 일이겠는가.

밀가루에 버무려진 듯한, 아무러한 긴장도 또 재미도 없는 펑퍼짐한 세상을 오븐에 넣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한껏 꿈과 이상으로 부푼 세상이 되고 마니, 그래서 내 생의 한나절이 지난 정오, 한낮의 그 가운데, 나 역시 숙성이 되어, 그렇게 서 있다면, 아! 이 세상 얼마나 살만한 것이겠는가. 요술 같은 삶의 오븐 하나쯤 우리 가지고 산다면, 우리네 삶 그래도 조금은 살맛나는, 활기로운 삶이 되지 않겠는가.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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