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계천박물관의 ‘백악에서 혜정교까지 물길’ 삼청동천 展에 전시돼 있는 사진. 현재의 삼청동천(왼쪽)과 복개 공사 전 삼청동천(일제강점기, 오른쪽) ⓒ천지일보(뉴스천지)

백악에서 혜정교까지 물길
궁궐·관가·민가 나누는 경계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조선시대 한양은 백악산·인왕산·목멱산·타락산 등 내사산(內四山)에 둘러싸인 분지다. 북에서 남으로,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청계천으로 모여들었다. 이 물은 사람들의 삶에 깊은 영향을 줬다.

백악산 서쪽으로 흐르는 물은 ‘백운동천’, 동쪽으로 흐르는 물은 ‘삼청동천’, 북서쪽으로 흐르는 물은 ‘백석동천’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동쪽으로 흐르는 물인 삼청동천은 경복궁 동쪽 궁장(宮牆)을 따라 흘러 동십자각, 중학, 혜정교를 거쳐 개천(청계천)으로 흘러들어갔다.

명칭의 유래는 산청(山淸), 수청(水淸), 인청(人淸)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경복궁과 육조거리 동쪽으로 흘렀던 삼청동천은 궁궐, 관가와 민가의 경계로서 역할을 했다.

◆삼청동천 상류

13일 청계천박물관의 ‘백악에서 혜정교까지 물길’ 삼청동천 전시에 따르면, 삼청동천 상류는 현재 삼청동삼거리에서 발원지까지다. 조선시대에는 진장방(鎭長坊)에 속했다. 지명에 대한 유래는 2가지다. 이곳에 태청·산청·옥청의 도교 3위를 모신 삼청전이 있었다는 것과 산과 물이 맑은 수려한 자연환경으로 사람의 마음까지 맑아진다는 것이다.

삼청동은 도성 내에서 도교와 가장 관련 깊은 장소였다. 이곳에는 소격전과 삼청전이 있었기 때문.

조선은 유교 이념을 기반으로 건국됐다. 하지만 초기 왕실에서 기복이나 국가의 흥망과 관련된 제사는 도교적 초제로 지내는 경우도 많았다. 중기로 갈수록 조선사회는 성리학적 사회체계가 자리 잡히면서 도교 경시의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고 초제의 시행 빈도는 점차 감소했다.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소격서가 완전히 혁파될 때까지 지속됐다.

▲ 청계천박물관의 ‘백악에서 혜정교까지 물길’ 삼청동천 展에 전시돼 있는 사진. 복개공사 중인 삼청동천(위)과 복개 공사 후인 삼청동천 ⓒ천지일보(뉴스천지)

◆삼청동천 중류

중류는 경복궁 동십자각에서 삼청동 삼거리까지 해당되는 구역이다. 동십자각은 궁궐 동남쪽 모서리에 있는 망루였다. 지금의 동십자각은 1867년(고종4)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세워졌다.

삼청동천 중류는 궁궐과 관아, 민가를 구분해 주는 경계였다. 화동, 사간동이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 여러 관아가 위치했다. 사간원, 종친부와 숙종 때 규장각도 설치됐다.

일제강점기의 슬픈 역사도 묻어 있었다. 1916년 경복궁 내에 조선총독부 신청사 건립공사가 시작됐다. 당초 일제는 총독부 건물을 가리게 될 광화문을 헐어버릴 계획이었다. 하지만, 여론의 반대에 부딪혀 이전을 결정하게 됐다. 1926년에 신축 공사가 완료된 후 광화문은 1년의 공사를 거쳐 1927년에 현재 국립민속박물관의 정문 쪽으로 옮기게 됐다. 1929년 일제가 개최한 조선박람회의 정문으로 이용됐다. 해방 후 6.25 전쟁 중 폭격으로 소실됐다가 1968년 일부 복원과 2006~2010년에 걸친 복원, 이전공사로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삼청동천 하류

하류는 청계천에서 종로구청을 거쳐 경복궁 동십자각까지다. 조선시대에는 징청방(澄淸坊)과 수진방(壽進坊)에 속했다. 하류가 별도로 중학천으로 불린 이유는 조선시대에 한양의 사부학당 가운데 중부학당의 앞을 흘렀기 때문인데, 지금도 이 자리를 사용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육조와 시전이 자리해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였다. 또 한양에서 도시적 성격이 가장 짙은 지역 중 하나로 현재 비즈니스 타운이 형성돼 있다.

중학천의 첫 번째 다리는 ‘혜정교’였다. 이 다리는 종로대로와 삼청동천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했다. 한양에서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곳 중 하나여서 세종 대에 ‘앙부일구’를 설치했다. 또 혜정교 주위에 우포도청 등 여러 사법기관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팽행이라고 하여 부패 한 관료를 삶아 죽이는 흉내를 내는 형벌을 시행해 관리의 부정과 탐학을 경계했다.

중학천 주변 조선 관청 중에는 ‘사복시’가 있었다. 이곳은 조선시대 왕실과 국가의 ‘말’을 관리하던 곳이었다. 이 자리는 원래 조선의 개국 공신인 정도전의 집터였다.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이 제거되면서 그의 집 마구간 자리에 사복시가 들어섰다.

일제강점기 사복시터에는 군마대와 수송공립보통학교가 들어섰다. 해방 후에는 서울지방경찰청 기마대가 있었다. 현재는 이마(利馬)빌딩, 종로구청, 종로소방서 등이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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