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전통등연구원 백창호(47) 원장이 전통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한국전통등연구원 백창호 대표 인터뷰

프로젝트 사업 참여 계기로
등 복원·보급 뛰어든 지 20여년
지원 부족해 신용불량자 되기도

빛 비추는 도구이자 염원 담긴 등
고려시대, 국가 주도 축제로 발전
조선시대부터 민간으로 전해지다
일제강점기 때 쇠퇴의 길 걸어

[천지일보=차은경 기자] “처음부터 등 문화에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지인에게 등 프로젝트 사업을 제안 받고 재미있겠다 싶어 시작했죠. 프로젝트 기간 참 고생했어요. 전통자체가 끊기다시피 했으니 말이죠. 대나무 깎는 건 담양 가서 배우고, 한지 붙이는 건 전주 가서 배우고 이렇게 일일이 배우면서 거의 1년 반 이상을 여기에 매달렸어요. 그런데 프로젝트를 마치고 막상 등 사업을 끝내려 하니 ‘내가 여기서 그만두면 또 (등 문화가) 사장되는구나’ 싶은 거 에요. 그래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 보니 10년이 되고 20년이 됐죠.”

그 자체로도 예쁘지만 어두워지는 밤이 되면 매력이 한층 더하는 전통 등. 한지의 질감과 빛이 만나 내뿜는 은은한 빛깔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각종 형형색색의 화려한 등이 거리를 가득 메운 모습을 보면 그야말로 빛의 향연이 따로 없다. 요즘은 관련 축제가 많아 등의 매력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지만 20여년 전만 해도 전통 등이라는 이름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옛 문헌에 이름만 남아있을 뿐 몇몇 학자들 외에는 관심을 갖는 이가 적었다. 이렇게 사라져 가던 전통 등을 새롭게 복원하고 보급한 곳이 한국전통등연구원이다. 올해로 21주년을 맞은 한국전통등연구원의 백창호(47) 원장은 명맥만 유지하던 우리의 등을 재현하고 새롭게 만드는 일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사람 키를 훌쩍 넘는 대형 등이 마당에 한가득 쌓인 경기도 양주동 광적면 한국전통등연구원에서 백 원장을 만나 등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 의식주(衣食住) 등 조선시대의 생활습관이나 세태 등을 표현한 ‘조선의 풍습’ 작품. (제공: 한국전통등연구원)

전기가 없던 시절 우리 조상들에게 생활 등은 필수품이었다. 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어둠을 밝히는 등을 생활도구로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밝음과 빛을 상징하는 희망의 존재로, 나아가 인간들의 소망을 들어주는 희원의 대상으로 여겼다. 그래서 등에는 민중의 소망과 염원이 담겨 있다.

등에는 40여 종류가 있는데, 혼례식에 사용됐던 청사초롱은 청색과 홍색의 등이 반반씩 해서 달려있다. 이는 음과 양의 조합을 표현한 것으로, 음양에 의해 부부가 조화를 이루며 잘 살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씨가 많은 과일을 형상화한 수박등, 마늘등, 참외등에는 자식을 많이 낳길 바라는 소망이 담겨있다. 넝쿨등 같은 경우는 풍요를 상징하고 거북등, 학등에는 무병장수의 염원이 담겨있다. 그 외에 호랑이나, 사자등은 척살 즉 액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좋은 집에서 살고 싶어 하는 욕구가 담긴 기와집등, 신분상승을 바라는 가마등도 있다. 백 원장은 “등에는 농경사회의 생로병사나 희로애락이 그대로 드러난다”며 “농경사회라는 제한된 환경이지만 지금과 똑같이 기원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①자식을 많이 낳길 바라는 소망이 담겨있는 ‘수박등’ ②무병장수의 염원이 담겨있는 ‘거북등’ ③액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의미가 내포돼 있는 ‘호랑이등’ ④신분상승을 바라는 ‘가마등’. (제공: 한국전통등연구원)

등의 역사에서 가장 기록이 오래된 것은 고구려벽화에 나오는 있는 등롱이다. 등 행사에 대한 기록은 신라시대 법흥왕 때 ‘간등을 했다’ 즉 등을 밝혔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등 문화가 특히 발전했던 때는 고려시대로, 당시에 국가주도로 팔관회나 연등회 같은 등 축제가 시행됐다.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는 숭유억불정책(유교를 숭배하고 불교를 억압하는 정책)으로 국가적인 등 축제가 사라지게 된다. 대신 상인이나 지역유지들 같은 민간인 주도의 등놀이가 이어진다. 그러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등 놀이문화는 일본의 영향을 받아 형식성·이벤트성이 가미되며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나마 일부 사찰에서만 초파일 연등행사로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었다.

“그러다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89년도에 조계종이 등 복원프로젝트 사업을 추진했어요. 동국대 서양화학과를 나온 제가 이 프로젝트에 참가하게 됐고, 그때부터 전공도 아닌 이상한 길을 걷게 됐죠.”

그가 전통 등을 다시금 제작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누군가는 “전통 등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다른 누군가는 “전통 등을 만들어서 생활이 되겠느냐”고 걱정도 했다. 그 당시만 해도 전통 등을 제작하는 것은 돈벌이가 되지 않는 쓸데없는 짓이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백 원장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서글프지는 않았다. 처음 등을 복원할 땐 어려워도 어려운 줄도 몰랐다. 그저 지원이 끊겨 경제적으로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것이 힘들었을 뿐이다. 경제적 뒷받침이 없어 홍보도, 등 작업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입소문이 나서 누군가 등을 전시하자고 하면 달려가서 전시하고, 가끔은 국가지원도 받아가며 계속해서 등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2000년도 초기엔 신용불량자도 됐다. 그렇지만 돈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그는 다시 등을 만들었다.

▲ 한국전통등연구원 백창호 원장이 ‘조족등(照足燈)’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조족등은 조선시대 암행하는 포졸들이 야경을 돌 때 길을 밝히기 위해 사용한 등기구다. ⓒ천지일보(뉴스천지)

한국전통등연구원 10주년 기념 국제학술세미나를 할 때도 상황은 변함이 없었다. 외국의 등 관련 전문가를 초대하느라 진땀을 뺐다. 백 원장은 “10주년 세미나를 할 때만 해도 거의 가랑이 찢어진다는 속담이 생각 날 정도로 외국의 선생님들을 초청하기가 쉽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돈도 많이 들어 예산을 초과했다”며 웃어 보였다.

등 사업이 조금씩 안정을 되찾기 시작한 것은 2009년부터 서울시와 서울등축제를 진행하면서부터다. 한국전통등연구원이 서울시에 낸 기획이 받아들여진 것. 고생을 해가며 대형 등들을 청계천에 전시했다. 청계천을 수놓은 커다란 등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서울등축제가 성공하면서 지자체들도 등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됐고, 등 작업은 조금씩 안정돼갔다.

작년에는 한국전통등연구원 20주년을 맞아 세미나와 전시회도 개최했다. 그땐 대형 등뿐 아니라 작은 소품들도 많이 전시했다. 단지 등이 축제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활공간에서도 더 많이 보급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등을 만들어 전시했을 때 시민들이 보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볼 때 가장 기분이 좋다는 백 원장은 한 가지 꿈이 있다. 바로 한국에는 없는 ‘등 테마파크’를 만드는 것이다.

“먼저는 같이 일하는 식구들이 오랫동안 같이 작업을 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더 크게 하면 등 마을을 만들어 보고 싶어요. 테마파크 식으로 등 마을을 하나 만드는 거죠. 그래서 일회적 행사로 끝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항상 등을 보고 즐길 수 있는 문화마을 그런 것들을 만들고 싶어요. 그것이 제 꿈이죠.”

▲ 한국전통등연구원 백창호 원장이 작업장에 전시된 대형 등을 바라보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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