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3세기 로마 황제 카라칼라는 분노조절이 안 됐던 다혈질의 소유자였다. 그는 법과 원칙에는 충실했지만 자신을 비난하는 시민들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하고 감옥에 잡아 가두는 등 폭정을 일삼았다. 문제를 일으킨 병사를 훈계한다고 발가벗겨 다중 앞에서 모욕을 주기도 했다.

병사들은 카라칼라의 근위대장을 압박, 역모를 꾀했다. 결국 카라칼라는 자신이 제일 믿은 근위대장의 배신으로 목숨을 잃었으며 그에게 황제 자리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카라칼라 고사는 고대 중국 초한지의 유방과 항우를 떠올리게 한다. 유방은 매우 유한 성품이었던 반면에 항우는 정반대의 성격이었다.

항우는 초(楚)나라 명문 귀족 출신이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숙부 밑에서 자랐다. 강동에서 거병하여 함양을 장악하게 된 항우는 강함을 과시하기 위해 무서운 정복자로 군림했다. 강한 분노의 표출만이 제왕의 위엄이며 천하를 지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정복지의 궁궐을 불살랐으며 왕릉을 파헤쳐 값진 보물들을 약탈했다. 이에 반해 유방은 인자한 성품으로 부하들을 대하는 등 덕치를 베풀었다. 적장도 항복하면 충성스러운 자신의 부하로 만들었다.

해하 전투에서 패한 항우는 자신을 돌이켜 보며 후회했다. “유방처럼 관용을 베풀었으면 조국 초나라도 자신을 버리지 않았을 것을….” 영웅은 고향을 지척에 두고 자결로 인생을 끝맺는다. 사랑하는 우 미인을 두고 죽어야 하는 처절한 심경을 눈물로 적었다. “…추(愛馬의 이름)가 달리지 않으니 내 어찌하랴(騶不逝兮可奈何)/ 우여, 우여, 너를 어찌 한단 말인가(虞兮憂兮奈若何)”

조선 역사에서 분노조절이 안돼 비극적 결말을 맺은 군주는 바로 연산군이 아닌가. 연산은 젊은 시절에는 원로대신을 존중하고 문학을 사랑하는 등 덕목을 보였으나 모친 윤비의 죽음이 모함에 의한 것임을 알고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 연산의 성격은 마치 사이코패스처럼 광폭으로 치달았다.

연산의 곁에서 여러번 충언을 해온 원로 내시 김처선마저 혀를 자르는 등 잔인하게 죽이고 말았다. 연산의 일탈행동은 결국 중종반정을 불러일으켰으며 자신과 아들 비빈마저 강화도에 유배되어 모두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연산의 실각을 거울삼은 탓이었을까. 이후 임금들은 조회석상에서도 얼굴 표정관리에 신경을 썼다. 율곡 이이는 임금이 갖추어야 할 덕목을 정리한 ‘성학집요(聖學輯要)’라는 책까지 지어 바쳤다.

어느 날 어전에서 선조가 분노조절이 안되자 율곡은 제왕의 안색이 변하고 화가 나타나는 것을 강력히 경계했다. ‘제왕의 분노가 얼굴에 나타나면 조정의 분위기가 경색되며 신하들은 올바른 진언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분노는 정의의 출발이다. 불의에 대한 뜨거운 분노가 있어야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당내 대권 경쟁자인 안희정 지사가 모 대학에서 열린 행사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 대통령에 대해 “그분들도 선한 의지로 없는 사람들과 국민을 위해 좋은 정치하시려고 그랬다”는 말에 대한 반박이었다.

최근 촛불 시위현장에서 ‘탄핵이 용인 안되면 혁명이다’ ‘탄핵순간까지 촛불을 들어야 한다’는 등 발언을 쏟아냈던 그가 자신의 지지층을 겨냥한 멘트로 해석된다. 그러나 야당의 가장 유력한 대권 후보가 국론분열로 나라의 장래마저 불투명한 현 상황에서 ‘분노는 정의의 출발’이란 표현은 적절치 않은 것 같다.

지금 가장 긴요한 것은 탄핵심판 이후의 정치안정이다. 고질적인 동-서 갈등의 해소와 세대 간 이해와 소통이 중요하다. 그런데 여야 차기 대통령 후보들 가운데 화합과 단합을 얘기하는 이가 없다. 야권에서는 분노와 저주가 섞인 혁명적인 외침만이 난무하고 있다.

선각자들은 한결같이 분노를 경계했다. ‘분노는 또 다른 분노를 낳고 분노는 다툼의 시발이 된다’고 정의 했다. 법구경은 ‘분노의 족쇄에서 벗어나라! 이 세상에서 원한은 원한에 의해서는 결코 풀어지지 않는다. 원한을 버릴 때만 풀리나니, 이것은 변치 않을 진리다’라고 가르쳤다. 정치인들이 동서고금 분노의 역사와 고언을 되씹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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