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탁 트인 동해와 해안단구의 절경을 볼 수 있는 정동 심곡 바다부채길. ⓒ천지일보(뉴스천지)

정동심곡바다부채길
탄생의 비밀 간직한 해안단구
옥빛바다·기암괴석 연출 비경
최근에서야 일반인에게 공개
총 길이 2.86㎞, 70분 거리

묵호 논골담길
‘장화 없인 못살아’ 논골 유래
오징어 손질, 명태 잡이 등
고단한 삶의 흔적 담은 담화
1960~70년대 풍경 오롯해

[천지일보=김민아 기자] 희뿌연 먼지와 고층빌딩에 싸인 답답한 도심을 떠나 눈부시게 푸르른 하늘과 바다가 끝없이 펼쳐진 동해로 떠났다. 동서울톨게이트를 기준으로 2시간 30여분을 달려 정동 심곡 바다부채길에 도착했다. 햇살에 반짝이며 출렁이는 바다와 절벽에 부딪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소리, 바다내음을 담은 바람이 온 몸을 휘감았다.

바다부채길은 동해 탄생의 비밀을 간직한 2300만년 전 지각변동을 관찰할 수 있는 국내 유일의 해안단구다. 해안단구는 땅이 솟아올라 해안선을 따라 형성된 계단 모양의 지형으로 정동진 해안단구는 한반도 지형 생성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과거에는 절벽이 험해 드나들 수 없었고 한국전쟁 이후 해안 경비를 위한 군 정찰로로 사용되면서 단 한 번도 일반인에게 개방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최근 바다부채길이라는 이름을 달고 문을 열면서 태고 이후 처음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바다부채길이라는 명칭은 줄지어선 바위의 행렬을 멀리서 바라보면 둥근 부채선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강릉 출신의 소설가 이순원씨는 예로부터 ‘부채끝’이라는 지명으로 불리던 이곳에 바다부채길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심곡항부터 정동 썬크루즈 주차장까지 약 2.86㎞ 탐방로를 걷다보면 바다를 향해 부채를 펼쳐놓은 듯한 기암괴석과 주상절리가 빚어낸 비경을 감상할 수 있다.

심곡항에 차를 세우고 나무데크 탐방로로 들어서자 카메라 프레임에는 온전히 담을 수 없는 광활한 바다가 펼쳐졌다. 발아래로는 거친 파도가 바위를 휘감으며 크고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투명한 에메랄드빛 물 아래로 바다 속이 훤히 보였다.

▲ 정동 심곡 바다부채길을 관람한는 관광객들. ⓒ천지일보(뉴스천지)

약 30분을 걸어 길의 중간지점인 ‘부채바위’에 이르렀다. 바다로 툭 튀어나온 부채바위를 두르는 전망대는 먼 바다와 걸어온 길을 되돌아 볼 수 있게 했다. 부채바위는 서낭당의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부채바위를 벗어나 다시 정동진으로 향하다보면 울창한 나무들이 숲을 이루면서 바닷바람을 막아준다. 산비탈에 아슬아슬 서있는 소나무와 향나무, 절벽에 핀 이름 모를 야생화가 시선을 끈다. 비탈을 따라 설치된 철조망과 바다를 향한 군 초소는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도 분단의 현실을 생각하게 했다.

800m쯤 더 걸었을까. 바다를 바라보며 투구를 쓰고 있는 비장한 모습의 투구바위를 마주했다. 투구바위 주변으로는 병사들이 줄지어 선 것처럼 기암괴석들의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투구바위에는 고려시대 명장인 강감찬 장군과 관련된 ‘육발호랑이(발가락이 여섯 개인 무서운 호랑이)의 내기두기’ 설화가 얽혀있다.

저 멀리 육지 위에 자리 잡은 범선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배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리조트 시설 썬크루즈다. 이제 도착이다 싶은데 반짝이는 옥빛 바다, 해송과 해국을 품은 절벽이 줄곧 이어진다. 30분쯤을 더 걷다보니 나무데크가 끊어지고 몽돌해변이 나타났다. 탁 트인 공간에 놓인 탐방객들은 바다를 바라보며 목을 축이거나, 아쉬운 듯 돌탑을 쌓았다. 해안 탐방로를 끝으로 정동 썬크루즈 주차장으로 올라가는 계단길이 시작된다. 가파른 경사가 500m 더 이어진다. 가장 난코스다. 그러나 뒤로 보이는 풍경을 위안삼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다보면 금방이다.

▲ 묵호 논골담길 ‘바람의 언덕’에서 바라본 묵호항의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이후 어민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묵호 논골담길로 향했다. 오전 내내 걸은 터라 시작점인 묵호항 수변공원이 아닌 도착점인 묵호등대에 차를 세웠다.

논골담길은 1960~1970년대 풍경이 오롯한 달동네다. 일제강점기 시절인 1941년 어업전진기지인 묵호항이 개항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주민들은 명태와 오징어를 담은 고무 함지박을 지게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고단한 육체를 이끌고 마을에서 가장 높은 묵호등대 주변 덕장을 오르내렸다. 흙길은 함지박에서 흘러넘친 물로 늘 질퍽거려 장화를 신고 다녀야 했다. ‘마누라나 남편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말도, 논골이라는 지명도 길이 논처럼 질퍽거린 데서 유래됐다.

묵호항 부근 바닷가 길에서 시작해 등대로 오르는 길은 등대오름길과 세 군데의 논골담길(논골 1, 2, 3길)로 나뉜다. 어느 길로 가든 모두 등대에서 만날 수 있다. 한때 동네 개도 만원짜리 지폐를 물고 돌아다닐 만큼 잘나가던 시절의 영화는 지금은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지만, 고단한 삶의 흔적을 담은 담화가 방문객들의 향수를 자극한다.

골목을 따라 조금만 내려가면 산비탈 모서리에 ‘바람의 언덕’이 자리하고 있다. ‘바람의 언덕’에 서면 동해안 어업의 최전방 전진기지인 묵호항이 한눈에 들어온다. 옆으로는 배가 들어오는 시간이 되면 바다에 나간 가장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모인 아낙네들을 표현한 ‘만복이네’ 동상이 바다를 바라보고 섰다.

마을주민 58명이 출자해서 만든 ‘논골담길 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카페에서 파란 바다를 담은 듯한 블루라떼 한 잔을 들고 논골 1, 2길 방향으로 발길을 옮겼다.

▲ 묵호등대마을의 일상이 담화로 그려진 논골담길. ⓒ천지일보(뉴스천지)

오징어를 손질하는 아낙을 그린 담화가 과거 논골담길 속으로 끌어들였다. 대왕문어를 든 아낙의 모습, 대야에 가득 담긴 오징어와 명태,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들의 모습, 술로 고단함을 달래는 가장과 잔소리하는 아낙의 모습, 사랑·꿈·행복을 담고 바다를 향하는 어부의 모습 등 골목길 담화는 산비탈 동네 사람들의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소변금지’라든가 ‘집 나간 개를 찾는다’는 내용 같은 해학적인 표현의 그림도 그려져 있었다. 낮은 담과 지붕 덕분에 ‘논골담길’을 걷는 내내 푸른 동해 바다도 함께 눈에 담겼다. 항구의 풍경과 항구를 드나드는 고깃배들의 뱃고동 소리가 풍취를 더했다. 골목길 탐방이 끝날 무렵 동네를 비추던 해도 뉘엿뉘엿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