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옛날부터 사람은 강에 의존하며 살아왔다. 오늘날 강 주변으로 옛 유적이 발견되는 것은 강이 식생활의 중요한 장소임을 보여준다. 서울의 한강도 마찬가지다. 한강 주변에서 발견된 유적은 여러 시대를 담고 있다. 이는 한민족의 인류사가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다. 이와 관련, 한강유적에 담긴 삶을 알아봤다.

 

▲ 도심 속에 남은 석촌동 고분군.이 일대에는 300기에 가까운 큰 무덤이 있었으나 잠실지구가 도시로 개발되면서 대부분 파괴됐다. 현재 석촌동 고분군과 방이동 고분군의 일부만 남아 있다. 사진은 석촌동 고분군 공원 내에 플래카드에 담겨 있는 고분군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고구려 무덤과 외형 비슷해 이주민에 의해 세워졌음을 뒷받침
축조 시기는 고대국가로서 기틀 잡기 시작한 ‘3세기’로 추정돼
큰 규모인 ‘3호기’ 백제 전성기 이룬 근초고왕 무덤으로 보기도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봄 햇살이 내리쬐는 20일 오후 서울 송파구 석촌동 고분군을 찾았다. 일전에 찾았던 ‘방이동 고분군’과 버스로 불과 10여분 거리에 있는 석촌동 고분군. 현재 이곳도 시민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공원으로 조성돼 있었다.

◆돌무지무덤 많아 ‘석촌’

석촌동 고분군은 백제의 수도가 한성(서울 송파)에 있을 때 백제 왕릉과 귀족들의 무덤이 있던 곳이다. 이곳에 커다란 돌무지무덤이 많아 마을 이름도 돌말, 돌마리, 석촌(石村)이라고 부르게 됐다.

석촌동 고분군은 100여 년 전부터 학술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1910년대에 만들어진 지도를 보면 석촌동, 가락동, 방이동 일대에 300기에 가까운 큰 무덤이 있었다. 그러나 잠실지구가 도시로 개발되면서 대부분 파괴되고 석촌동 고분군과 방이동 고분군의 일부만 남아 있다. 이곳은 현재 사적 제243호로 지정돼 있다.

▲ 석촌동 고분군 ⓒ천지일보(뉴스천지)

◆고구려∙백제 무덤 양식 모두 가져

백제 초기 돌무지무덤인 석촌동 고분군의 외형은 마치 고구려 고분군과 흡사하다. 이는 백제를 건국한 세력이 한강 유역의 토착 집단이 아니라, 북쪽의 고구려에서 남하한 이주민 집단이라는 것을 입증해주는 고고학적 증거다.

백제 건국설화인 비류 설화나 온조 설화의 내용을 뒷받침하기도 한다. 설화에 따르면, 고구려를 세운 ‘주몽’에게 아들 둘이 있었는데 첫째는 ‘비류’, 둘째는 ‘온조’였다. 이후 주몽은 부여의 여성과 혼인하는데, 그 사이에서 아들 ‘유리’를 낳는다.

주몽은 유리를 태자로 책봉했고, 위협을 느낀 비류와 온조는 어머니와 함께 도망친다. 남하한 비류는 바닷가 쪽에 나라를 세우고, 온조는 한강 쪽에 ‘십제’라는 나라를 세웠다. 하지만 비류가 세운 나라는 농사를 지을 수 없어 멸망하고 십제로 가서 백성이 됐다. 인구수가 점점 많아지자 온조는 나라 이름을 백제로 바꾸게 됐다.

▲ 출토된 금동귀걸이(출토 당시의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이와 관련, 석촌동 일대에 돌무지무덤이 축조되기 시작한 시기는 3세기 중엽 경으로 추정된다. 이는 백제가 본격적으로 고대국가로서 기틀을 잡기 시작한 시기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석촌동 고분군이 고구려 고분군과 모습이 완전히 똑같은 것만은 아니었다. 이곳의 돌무지무덤은 외형에서는 고구려의 발달된 기단식 돌무지무덤과 같지만, 내부 구조는 서로 다르다.

3호 돌무지무덤은 무덤 안팎을 모두 돌로 쌓은 고구려식이며, 2호와 4호 돌무지무덤은 기단과 계단 외부를 돌로 쌓았지만 내부를 흙으로 채웠다는 점에서 백제식이다. 기단부만 남은 1호 돌무지무덤은 두기의 무덤이 남북으로 서로 연결돼 있는데, 남쪽 무덤은 고구려식이고 북쪽 무덤은 백제식이다.

◆‘3호분’ 고구려 장군총보다 더 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3호분’이다. 한 변의 길이가 무려 50.8m에 이르는 돌무지무덤으로 고구려의 장군총보다 더 크다. 그래서 백제의 전성기를 이룬 근초고왕(4~5세기)의 무덤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 출토된 기와(출토 당시의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구체적으로 3호분은 산에서 가져온 큰 돌을 깨어 3단 이상 쌓았는데, 1980년대 중반까지 여러 채의 민가가 무덤 위에 있어 무덤의 높이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최소 4.5m 이상인 것으로 보인다.

무덤은 땅을 잘 고른 후 40~50㎝ 두께로 진흙을 깔아 다지고 그 위에 자갈돌과 지댓돌을 차례로 깔았다. 이후 대체로 40㎝가 넘는 크기의 깬 돌과 작은 판자 돌을 가로 누여서 층층이 쌓아 올렸다. 무덤이 훼손된 뒤에 발굴 조사를 했기 때문에 주검이 묻힌 곳은 찾지 못했으나, 무덤 주위에 중국 동진 시대의 도자기, 금으로 만든 얇은 장식 조각인 달개, 백제 토기 조각 등을 수습했다.

또 석촌동 4호분은 한 변의 길이가 24m로 3호분보다 작지만, 제일 윗단에서 남쪽에 입구를 둔 무덤방이 발견됐다. 특히 이 고분에서는 수막새와 함께 기와가 많이 출토됐다. 돌을 쌓은 모양으로 보아 돌방무덤을 만들려고 한 것으로, 4~5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석촌동 고분군은 도시 개발 속에서 그 모습을 완전히 잃지 않고 살아남아 백제의 문화를 알려주고 있었다. 그만큼 역사적으로도 소중한 장소였다. 앞으로도 이곳이 잘 보존돼 한성백제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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