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종교의 자유가 인정돼 수많은 종교가 한 데 어울려 살고 있는 다종교 국가다. 서양이나 중국에서 들어온 외래 종교부터 한국에서 자생한 종교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각 종단들은 정착하기까지 우리나라 곳곳에서 박해와 가난을 이기며 포교를 해왔고, 그 흔적은 곳곳에 남아 종단들의 성지가 됐다. 사실상 한반도는 여러 종교들의 성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에 본지는 ‘이웃 종교 알기’의 일환으로 각 종교의 성지들을 찾아가 탐방기를 연재한다.

▲ 영산성지 지도. ⓒ천지일보(뉴스천지)

교조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
태어나 도 닦고 깨달은 곳
원불교 제1의 근원성지

7세 때 인간 근원에 의문
산신령·도인 찾고자 치성
진리 깨우치고 제자 선택

[천지일보=차은경 기자]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

어려서부터 우주의 자연현상과 생로병사의 이치에 의구심을 품었던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의 깨달음이다. 이는 원불교 개교표어가 됐다. 여기서 정신개벽은 낡은 세상이 지나가고 새 세상이 돌아온다는 후천개벽 사상과 새 세상의 주인이 되고 낙원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정신개벽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소태산 대종사는 과연 어떤 배경에서 나고 자랐을까. 그의 발자취를 따라 영산성지를 찾았다. 원불교 제1의 성지라고 불리는 영산성지에는 대종사가 태어나서 깨닫고 교문을 열기까지의 모든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영산성지는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읍 길룡리에 위치해있다. 영광읍 중심부에서 약 10㎞ 떨어진 거리다. 봄기운이 도는 3월 중순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3시간 30분 남짓 달려 영광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여기서 차를 타고 10여분만 더 가면 영산성지가 나온다. 원불교의 근원성지이자 교단의 초석을 다진 곳이다.

▲ 1891년 5월 5일 태어난 대종사가 영촌마을에서 구호마을로 이사할 때까지 유년시절을 보낸 탄생가. ⓒ천지일보(뉴스천지)
▲ 대종사가 구도를 시작했던 옥녀봉. 원불교의 상징인 일원상(◯)이 그려져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대종사 탄생가… 유년시절 보낸 곳

원불교 교무의 안내를 받아 먼저 대종사의 탄생가를 찾았다. 이곳은 1891년 5월 5일 태어난 대종사가 영촌마을에서 구호마을로 이사할 때까지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다. 초가집 형태에 내부에는 대종사의 사진이 크게 걸려있다. 집 뒤편에는 대종사가 구도를 시작했던 옥녀봉이 자리하고 있는데, 원불교의 상징인 일원상(◯)이 그려져 있다.

그는 7세경부터 우주와 인간의 근원에 대한 의구심을 품고 옥녀봉에서 구도를 시작했다. 옥녀봉은 망성봉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성인이 오시길 바란다는 뜻을 담고 있다. 11세부터는 의구심을 풀어줄 산신령을 만나기 위해 구수산에 있는 삼밭재 마당바위에서 5년간 치성을 올렸다. 이곳에는 순례인들을 위한 ‘삼밭재기도실’이 있으며, 기도실 우측에는 소태산 대종사가 기도 당시 사용했던 ‘삼령정(參嶺井)’ 우물이 있다.

▲ 대종사가 산신령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의구심을 풀어줄 도사를 만나기 위해 구도역정을 한 구호동 집터. ⓒ천지일보(뉴스천지)
▲ 대종사가 결혼 후 21세부터 23세를 전후해 살았던 귀영바위 집터. ⓒ천지일보(뉴스천지)

◆구도정진에 힘쓰다

이어 삼밭재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구호동 집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은 대종사가 산신령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의구심을 풀어줄 도사를 만나기 위해 구도역정을 한 곳이다. 대종사는 이곳에서 십타원 양하운과 결혼했으며, 부친의 열반으로 슬픔을 겪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 소실돼 터에 비석만 세워져 있다.

대종사는 결혼 후 21세부터 23세를 전후해 귀영바위 집터에서 거주했으며, 인근 귀영바위굴에서 구도정진을 했다. 당시 대종사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돈을 벌고자 음식점을 운영하는 상황이었는데, 음식점 운영을 도와주며 뒷바라지에 힘쓴 이가 사타원 이봉순이다. 그는 여자 전무출신 제1호로, 대종사의 곁에서 시봉(侍奉, 부모나 법 높은 스승을 모셔 받듦)했다.

▲ 새 세상 여는 진리를 깨친 노루목 대각터. ⓒ천지일보(뉴스천지)
▲ 대종사의 대각(大覺)을 기념하기 위해 1971년 9월 세운 ‘만고일월비’. ⓒ천지일보(뉴스천지)

◆새로운 세상 여는 진리 깨우쳐

그러다 1916년 4월 28일 이른 아침 대종사는 노루목 오두막에서 새 세상을 여는 ‘일원상(一圓相)’의 진리를 깨치게 된다. 일원상이란 우주만유의 본원이자 모든 성현과 모든 부처님이 마음속에서 증득한 궁극적 진리(제불제성의 심인(諸佛諸聖-心印)를 뜻한다.

이곳 ‘노루목 대각 터’는 원불교의 제1의 성적지다. 지형이 엎드린 노루의 목과 같다고 해 노루목이라 부른다. 이곳에는 대종사의 대각(大覺)을 기념하기 위해 1971년 9월 ‘만고일월비’를 세웠다. 비석정면에 ‘만고일월(萬古日月)’이라 새겨져 있는데, 소태산이 대각한 진리는 영원불변하며 그 공덕이 일월처럼 밝다는 뜻이다.

원불교에서는 대종사가 대각을 이룬 날을 실질적으로 개교한 날로 보고 이날을 경축일로 정했다. 원불교에서 시행하는 경축일은 신정절(1월 1일), 대각개교절(4월 28일), 석존성탄절(음 4월 8일), 법인절(8월 21일) 등 4대 경절이 있다. 대각개교절은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경절이다.

▲ 대종사와 구인제자. ⓒ천지일보(뉴스천지)

◆신심 굳은 구인제자 택해

대종사는 1916년 대각을 이루고 개교표어와 최초법어를 발표한 후 “도(道)를 얻기 전에는 도를 얻지 못함으로써 한(恨)이더니 도를 얻은 후에는 믿어주는 동지가 없음으로써 한이로다”라고 하며 때를 기다렸다. 그러다 대종사가 7일 치성을 올리니, 몇 달이 안 돼 인근 각처에서 믿고 따르는 사람이 40여명에 달했다. 대종사는 그 중에서도 특히 신심이 굳은 9인 이재철 이순순 김기천 오창건 박세철 박동국 유건 김광선 송도군을 제자로 택했다.

제자를 택한 뒤 1918년 12월에는 대종사 탄생가 옆 옥녀봉 아래에 최초의 교당인 ‘구간도실(九間道室)’이 준공된다. 이름은 아홉 칸의 방이 있는 데서 유래됐으며, 구인제자들의 모임장소와 방언공사 현장사무소, 그리고 기도장소로 사용됐다. 1923년 이 건물은 해체돼 현재의 영산원 건물로 옮겨졌다.

터 옆에는 구인제자가 겪은 ‘백지혈인(白指血印)’의 이적을 기념하는 동상도 세워져 있다. 구인제자는 1919년 3월 혈인기도를 시작해 8월 21일 일제히 도실에 모였다. 밤 8시가 되자 대종사는 청소를 도실 중앙에 진설해 놓고 각자의 칼을 청수상 위에 나열하게 했다. 이후 죽어도 여한이 없음을 확인한 후 모두 ‘사무여한(死無餘恨)’이라고 쓰여 있는 증서에 인주를 묻히지 않고 맨손으로 도장을 찍어 상위에 올리고 결사의 뜻으로 엎드려 고하니 도장이 핏빛으로 나타나는 이적이 나타났다. 대종사는 이를 보고 “구인제자의 정성이 지극해 천지신명이 감응했고, 새 회상 창립을 위한 음부공사가 판결이 났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영산성지에는 대종사와 제자들이 저축조합운동을 통해 만든 기금으로 1년간 갯벌을 막아 2만 6000여평의 농지로 만든 간척 답 ‘정관평’, 교단 초기 성지의 수호관리 및 교화를 담당했던 ‘영산원’, 교도의 증가로 1936년 건축한 ‘대각전’, 대종사 이하 역대 선진열위를 추모하기 위한 사당인 ‘영모전’, 1932년 원불교 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해 지어진 ‘영산선학대학교’ 등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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