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산 정약용이 제작한 거중기 ⓒ천지일보(뉴스천지)

[정약용의 마지막 생이 담긴두물머리 남쪽 ‘마재마을’을 가다]

태어난 곳이자, 마지막 생 담긴 곳
전라도 강진 유배시절에도 그리워 해
마을 안 ‘다산유적지’, 관광객들 찾아와

마당 드넓은 정약용 생가 ‘여유당’
대홍수 유실된 것 복원… ‘ㅁ’자 뚜렷
책 든 동상, 부국강병 고민하는 듯 보여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다산 정약용의 마음은 늘 이곳에 있었다. 그가 태어난 곳이자, 그의 마지막 생이 담겨 있는 곳.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 갔을 때도 그는 이곳을 그리워했다. 이곳은 경기도 남양주시 두물머리 남쪽에 있는 마재(馬峴, 또는 마현) 마을이다.

서울역에서 약 3시간 거리에 있는 마재마을. 마재라는 이름은 마을 앞 철마산(鐵馬山)에서 무쇠로 만든 말이 나온 데서 유래됐다.

마을은 한강이 휘도는 곳에 위치한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가 지척이다.

다산 정약용은 1762년 마재에서 태어나 15년을 이곳에서 살았다. 성균관 유생시절과 과거에 급제해 벼슬살이를 할 때에도 마재마을을 수시로 다녔다. 강진에서 유배를 마친 후에도, 이곳에서 18년을 살았다. 마재마을은 그의 향기가 가득한 곳이었다.

▲ 다산 정약용 동상 ⓒ천지일보(뉴스천지)

◆다산이 남긴 유산

현재 마재마을 안에는 ‘다산유적지’가 조성돼 있다. 유적지에 오면 가장 먼저 다산문화관과 다산기념관을 만난다. 다산의 생애와 업적을 한눈에 보여주는 장소다.

정약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정약용은 자질이 영특해 4세 때부터 천자문을 배웠다. 5세 때 오언시(五言詩)를 지었는데 10세 이전의 저작을 모아 ‘삼미자집’을 냈다고 하나, 지금은 거의 남지 않았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으니/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네’

이것에 유일하게 남은 어린 시절 그의 시다.

 

다산은 1789년(정조 13)대과에 급제해 관직에 진출했다. 그리고 규장각에서 정조의 지우를 받았다. 같은 해, 그는 한강에 배를 잇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주교(배다리)를 만들었다. 정조는 부친 사도세자의 능을 화성의 융릉으로 옮긴 후, 봄·가을 능행차 때 이 배다리를 통해 한강을 건넜다. 배다리는 용산에서 노량진까지 설치됐다.

1792년(정조 16) 겨울, 정조의 특명으로 수원 화성의 설계에 참여했다. 지레와 도르래, 녹로의 원리 등을 연구해 거중기를 만들었다. 거중기 하나로 경비 4만냥을 절약하고 공사기간을 7년이나 단축했다. 이는 서학의 기술적 측면에 대한 다산의 깊은 이해와 연구를 보여주는 거다.

실물보다 축소된 거중기는 다산기념관 안과 유적지 내에 전시돼 있다. 과연 군신이 합심해 이룩한 실용적 성과물이라 할 수 있겠다.

정조가 서거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다산은 생애 최대의 전환기를 맞는다. 노론과 남인사이의 당쟁이 1801년 ‘신유사옥’이라는 천주교 탄압사건으로 비화하면서 다산은 천주교인으로 지목받아 유배형을 받게 된다. 그리고 강진으로 유배간다. 유배기간은 다산에게 고통의 세월이었지만, 학문적으로 매우 알찬 결실을 얻은 수확기였다. 이 시기 다산학의 두축을 이루는 경세학과 경학에 대한 연구가 이뤄졌다. 500여권에 달하는 저서 대부분도 유배지에서 이뤄졌다.

▲ 다산 정약용 생가인 여유당 현판

◆약점 치료하기 위한 당호 ‘여유’

유적지 한쪽에는 마당이 드넓은 정약용의 생가가 있다. 서재와 독서, 침잠하기에 적당히 알맞고 좋다 하여 ‘여유당(與猶堂)’이라 불렀다. 본래 생가는 1925년 대홍수로 유실됐고, 1986년에 복원한 것이다. 전통 한옥에 뚜렷한 ㅁ자 형태의 집이다.

‘여유(與猶)’는 다산의 당호(堂號)이기도 하다. 정조 24년인 1800년 모든 관직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은 여유를 당호로 지었다.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다산이건만, 당시 당파로 인한 노론의 공격에 밀려 고향 마재로 돌아온다. 그리고 형제들과 경전을 공부하며 그곳에서 ‘여유당’이란 편액을 걸었다.

여유란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신중하고, 사병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는 뜻으로,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에 나온다. 즉, 세상일과 자신에 대한 경계의 의미가 담겼다.

정약용이 당호를 ‘여유’로 사용한 이유는 ‘여유당기(與猶當記)’에 담겨 있다.

“이 두 마디의 말(여유)이 내 성격의 약점을 치유해 줄 치료제가 아니겠는가. 무릇 겨울에 내를 건너는 사람은 차가움이 파고들어와 뼈를 깎는 듯 할 터이니 몹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며, 온 사방이 두려운 사람은 자기를 감시하는 눈길이 몸에 닿을 것이니 참으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다(중략).”

유적지 한 가운데는 다산의 동상이 서 있다. 손에 책을 들고 있는 동상은 민생을 위한 부국강병을 고민하는 듯하다. 살아생전 다산도 이런 모습이었겠지.

▲ 여유당 뒷동산에 조성된 정약용 묘 ⓒ천지일보(뉴스천지)

◆뒷산에 고요히 자리한 다산의 묘

여유당 뒤편 동산에는 다산의 묘가 있다. 유배된 지 18년 만에 다시 마재로 돌아온다. 그리고 유배지 강진에서 미처 마무리가 덜된 ‘목민심서’와 ‘경세유포’를 완성한다. 61세 환갑 때에는 파란만장한 일생을 스스로 정리한 장문의 ‘자찬묘지명’을 찬술했다.

 

이렇듯 못 다한 학문을 조용히 갈무리짓던 그는 1836년 75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집의 동산에 매장하고 지사(地師: 풍수지리설에 따라 집터나 묏자리를 잡아 주는 사람)에게 물어보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여유당 뒷동산에 유해를 모셨다. 마지막까지도 정약용은 이곳 마재를 사랑했나보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 위로 자신의 모습을 무수히 비추던 정약용. 그가 떠나고 산하의 변천을 거듭한 오늘, 한강을 바라보며 다시 다산을 떠올려 본다. 한강에서 품었던 그의 삶과 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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