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흉노족 선우 묵돌이 한(韓)나라를 공격하자 한(漢)나라 고조가 군대를 이끌고 흉노족 토벌에 나섰다. 고조의 병사들은 전선에서 추위에 고전을 하고 있다가 설상가상 백등산에서 흉노족에게 포위돼 군량마저 끊어져 버렸다. 위기에 처한 고조는 묵돌의 후비에게 선물을 보내고 가까스로 탈출했다. 고조는 흉노와 정전협정을 맺었으나 별로 소용이 없었다.

흉노의 장군이 된 한(韓)왕 신은 자신의 부하인 조이, 왕황과 함께 때때로 협정을 무시하고 대나라와 운중에 침입해 약탈을 일삼았다. 그리고 얼마 뒤 한(漢)나라 장군 진희가 흉노에 항복하고 한(韓)왕 신과 공모하고 다시 대나라에 쳐들어 왔다.

한나라 고조는 장군 번쾌를 보내어 대나라와 안문, 운중의 여러 군과 현을 되찾았으나 요새 밖까지 나가지는 못했다. 그런 뒤에도 변경의 요새로 보낸 한나라 장군들이 부하들을 이끌고 흉노족에게 항복하는 일이 잇달아 생겨났다. 그 때문에 묵돌은 대나라 각지를 마음대로 침략해 한나라를 괴롭혔다.

고조는 그 사태를 회유책으로 나갔다. 또 다시 유경을 사자로 보내 황족의 딸을 공주라고 속이고 선우에게 보내고 매년 솜, 비단, 술, 곡식을 그들에게 주기로 하고 형제국이 되는 조약을 맺었다.

그렇게 되자 얼마 동안은 묵돌도 한나라에 대한 침략 행위를 삼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뒤 한나라를 배반한 연왕 노관이 부하 수천명을 이끌고 흉노에 항복해 가더니 상곡군 동쪽에 나타나 백성들을 괴롭혔다.

한나라 고조가 죽고 혜제, 여 태후의 시대가 열리자 한나라는 가까스로 안정이 됐으나 흉노는 여전히 한나라를 업신여기고 있었다.

어느 날 흉노 묵돌로부터 여 태후에게 한 통의 서신이 날아들었다. 그 내용은 폭언을 늘어놓은 것이었으므로 몹시 화가 난 여 태후는 흉노족 토벌군을 보내려 했다.

한나라 장군들이 나서서 모두 말렸다.

“고조께서는 평성에서 고생하셨습니다.”

그 의견에 여 태후는 계속 회유책으로 나갔다. 그 뒤 문제가 즉위하자 흉노와의 화친 조약을 새롭게 맺었다.

그러나 문제 3년(기원전 177) 5월에는 흉노의 우현 왕이 오르도스에 침입해 진영을 세우고 상군의 요새를 공격했다. 그런 다음 한나라 국경을 넘어와 변경 방위를 맡고 있던 한나라 소속 야만족을 죽였으며 인근의 백성들까지 죽이고 약탈을 일삼았다. 황제인 문제는 승상 관영에게 흉노 토벌을 명령했다. 관영은 전차대와 기마대 8만 5천을 이끌고 고노에 있는 흉노 우현 왕을 공격해 그들을 요새 밖으로 격퇴시켰다.

문제가 태원에 내려갔다. 그 사이를 틈타 제북왕 흥거가 반란을 일으켰다. 문제는 곧장 장안으로 되돌아갔다.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관영의 흉노 토벌도 중지됐다.

그 다음 해에 한나라 조정에 묵돌 선우로부터 서한이 날아들었다.

“천제가 세우신 흉노의 대선우가 정중히 황제에게 문안하노니 편안하신가? 일찍이 황제께서 여에게 화친 요청이 있었을 때 여는 기꺼이 화친을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귀국의 국경 수비대가 우리 우현 왕의 땅을 침범했으나 우리 우현 왕은 여에게 무엇 하나 청함이 없이 휘하의 장군 후의 노후, 난씨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귀국의 수비대와 일을 벌였다. 이들은 모두 양국의 군주의 약속을 어기고 형제국의 우애를 저버리게 하는 행위였다. 이 사건에 관해 황제로부터 매번 꾸짖음을 받았으므로 여는 사자를 보내 회답을 보냈다. 그런데 여의 사자는 귀국에 간 채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또한 귀국에서도 그 뒤 한 명의 사자도 오지 않았다. 그 뒤로 양국은 화친의 관계를 끊은 채 오늘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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