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실장/시인

 

최근 며칠간 나라 안 정치권 이슈 중 하나는 사법부 수장에 관한 것이었다. 지난주중만 하더라도 제16대 대법원장 후보로 지명된 김명수 내정자가 21일 국회 본회의에서의 인준안 통과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지난번 무난히 국회통과를 예상했던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임명동의안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자 여권에서는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말처럼 이번에는 김명수 내정자 인준안도 낙관할 수 없어 노심초사했었다. 사정이 그쯤에 이르자 문재인 대통령이 유엔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방미 길에 오르면서도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에게 전화를 해 ‘국회통과’ 협조를 당부했을 정도였다. 다행히 인준안이 통과돼 사법부 수장의 공석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으나 우여곡절을 겪은 만큼 정치 풍파는 컸던 것이다.

전후 사정을 이야기한다면,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1년 9월 25일 제15대 대법원장에 부임했으니 임기는 올해 9월 24일까지였다. 그렇지만 신임 김명수 대법원장 인준안을 두고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 등 두 보수야당이 반대 당론을 정했으니 정부·여당은 속앓이가 심했다.

자연히 인준안 통과의 헤게모니를 국민의당이 쥐게 됐고, 집권여당은 국민의당에 구애의 손짓을 할 수밖에 없었다. 헌정사상 한 번도 사법부 수장의 공석이 없었던지라 여당은 더욱 곤경에 처해졌고, 사법부 구성의 정점은 정치의 격랑 속에 휘둘릴 판이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삼권분립(三權分立)은 기본이자 최고 가치라 할 수 있다. 한 국가에서 입법, 사법, 행정이 각각 독립된 상태로 존재하면서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일이니 국회가 법원을 강제해서도 안 되고, 행정부가 사법부에 압력 등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됨은 철칙인 것이다. 그럼에도 지난 22일, 임기를 마치고 물러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퇴임사에서 쓴소리를 남겼다. “정치세력 등의 부당한 영향력으로부터 사법부 독립을 지켜야 한다”는 고언의 말이었다.

42년간 법관생활을 마감하는 날에 삼권분립의 한 축인 사법부의 수장이 남긴 이 한마디는 의미심장하다. 대한민국의 가치요, 헌법에서 명시된 삼권분립주의, 그 가운데서도 엄격히 준수돼야 할 사법부의 독립이 어느 특정 세력들의 부당한 영향력으로 인해 무너질 수 있다는 해석을 낳을 수도 있는 것이다. 퇴임사 핵심 구절인즉 ‘그간에 사법부의 독립을 저해하는 일이 있었다’ ‘그 일에 영향력을 행사한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 대개는 정치세력 등이다’는 전임 대법원장의 충직과 고언이 담긴 말은 국민의 자유 보호 차원에서도 가볍게 볼 일은 아닌 것이다.

물론 사법부 수장을 지내고 물러나는 전 대법원장 입장에서는 법원조직에 관한 애착과 후배 법관들에 대해 민주주의 지켜내기와 동시에 사법부 독립을 지켜내기 위한 당연한 당부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보수와 진보의 이념 확산이 심화되고 고착된 상태에서 그 이념을 신봉하거나 가담한 사회 구성원들은 자신 입장만 내세우고, 상대를 적으로 몰아가려는 특이한 경우가 허다하다. 사회분열과 갈등의 위험성이 지나쳐 사법부 판결마저 부정하려드는 현실이니 비단 사법부 수장만이 아니라 법관 모두가 우려하고 있으며, 난관에 처해진 것도 사실이다.

새 정부가 들어선 뒤 사회 각 부분에서 이전 정부가 잘못한 점에 대한 적폐청산 움직임이 활발한 추세다. 정부에서는 각 부처에 적폐청산 기구를 만들었고 특히 국정원, 검찰, 군사 조직에까지 구성해 적폐를 도려낼 작정인데, 그 여파가 사법부에 파고들고 있다. 그 첫 단추로 진보 인사로 알려진 김명수 대법원장에 거는 정치권력의 기대다. 대법원 기존 판례를 비롯해 행여 잘못 전개된 사법적 결정물이 있으면 정의로운 결과물로 치유하겠다는 의도로 엿보인다.

현 정권과 코드가 맞아떨어지는 김명수 체제를 우려해 인준안에 반대했던 보수야당에서는 앞으로 진보 대법원장 체제에서 자칫하면 사법부가 정치권력의 옹호자가 될 게 아니냐는 우려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와중에서 신임 대법원장의 첫 일성은 “국민을 위한 사법을 구현하겠다”는 것이다. 사법부가 당면한 도전과 어려움을 슬기롭게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사법부 수장으로서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진보정권과 보수정권에서 배출한 진보신·구 대법원장의 메시지는 사법부의 책무를 두고 같은 듯 다른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퇴임사에서 “재판 결과가 자신이 원하는 방향과 다르기만 하면 극언을 마다치 않는 도를 넘은 비난이 다반사로 있고, 폭력에 가까운 집단적인 공격조차 빈발하고 있다”고 한 비난은 아무래도 여당 대표가 끄집어냈던 한명숙 전 총리 재판에 대한 정치권의 불복 움직임을 우려하는 대목과 법원의 정당한 조치 등에 대한 특정 계층의 비난 등을 염두에 둔 것으로 풀이된다.

이런 시기에 시작되는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를 맞아 사법부가 삼권분립의 존엄을 지켜주고, ‘국민을 위한 사법’이 구현되기를 바라는 바다. 어떤 상황에서든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정치세력의 부당한 영향력을 받지 않았으면 하는 게 국민 기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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