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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외 다른 신을 섬길 수 없어 일제에 맞선 주기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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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외 다른 신을 섬길 수 없어 일제에 맞선 주기철 목사

“일사각오(一死覺悟)! 예수를 위해 일사각오! 이웃을 위해 일사각오!”

 

▲ 주기철 목사. ⓒ천지일보(뉴스천지)
소양(蘇羊) 주기철(朱基徹, 1897~1944) 목사는 한국교회사에서 가장 빛나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일제 말기, 일본 천황(天皇)주의 이념에 바탕한 군국주의 횡포에 저항하고 기독교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해방되기 1년 4개월 전 신사참배에 반대했다는 구실로 형고 끝에 순교한 교회사의 증인이다. 

 

한국교회사에 고귀한 정신적 유산을 남긴 인물이자 순교의 삶을 선택한 주기철 목사가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되새기는 시간을 가져본다.  

주기철 목사의 생애
주기철 목사는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황제즉위식을 거행한 직후에 태어났다. 광무(光武) 원년인 1897년 11월 25일 경남 창원군 웅천(熊川), 곧 웅읍면 북부리에서 주현성 장로와 조재선의 넷째아들로 출생했다.

주기철을 신앙의 용사로 성장하게 한 데는 교회장로이던 부친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어린 날의 주기철의 몸에 밴 엄격한 신앙생활은 훗날 신앙의 정열로 꽃피게 된다.

그는 을사조약 후 통감정치가 시작되던 첫해(1906) 고향의 개통학교에 입학, 초등교육을 받기 시작해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2년 뒤 그 학교를 졸업했다.

졸업(1912년) 후 그는 가까운 곳에 있는 상급학교를 굳이 마다하고 정주 오산(五山)학교에 진학한다.
주기철은 일제 강점기로 바뀌고 일제의 조선 지배체제가 착착 강화되던 시기,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가 남강 이승훈(李昇薰)이 세운 학교에서 고당(古堂) 조만식 선생과 학행(學行)이 겸비된 스승들로부터 신앙과 민족을 배우고 졸업한 때는 1916년 봄이다. 학교를 졸업한 주기철은 스승들의 권유에 따라 서울의 연희(延禧)전문학교 상과(商科)에 진학했다.

주기철은 1916년 여름부터 학업을 중단하고 귀향하여 몇 년간 뚜렷한 방향 없이 방황하다가 1920년 두 차례에 걸쳐 김익두 목사의 사경회에 참석하고 자신의 진로를 목회자로 정했다. 김익두 목사의 사경회는 주기철의 앞날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이 사경회를 통해 그는 평양신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주기철은 1921년 경남노회에서 목사후보생 시취(試取)에 합격하고 그 이듬해 3월 평양신학교에 입학, 공부하는 한편 졸업할 때까지 경남 양산읍교회의 전도사로 시무했다.

192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던 그 해 목사안수를 받은 주기철은 1931년 7월까지 초량교회 담임목사로, 1936년 7월까지는 경남 마산(문창)교회 담임목사로 봉사했다. 그는 마산교회 시절 교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 큰 시련을 겪게 된다. 이 과정을 이겨낸 주기철은 1936년 7월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불리는 평양 산정현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한다.

신사참배에 온몸으로 저항하며 순교의 길 걷다
주기철 목사는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해 1485㎡(450여 평)의 교회당을 짓기로 결정하고 추진하는 등 교회 부흥을 위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게 된다. 하지만 당시는 일제치하 말기로 일본정부가 궁성요배를 비롯한 국민시암송, 신사참배, 전시 총 동원력 등을 강요하는 시기였다. 이뿐 아니라 일제의 압력에 굴복해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신사참배 등 일본 정책을 대거 찬성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산정현교회 성전을 짓기 시작한 다음해인 1938년 2월 선천에서 평북 노회가 열렸는데 노회장 김일선 목사가 신사참배를 찬성한다는 결정을 자기 마음대로 내린다. 그는 본래 형사였는데 어물어물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된 사람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안 평양신학교 학생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평양신학교 학생들이 일어나 데모를 하며 아우성을 벌이자 경찰들은 한결같이 긴장을 하게 됐고, 그 불이 주기철 목사에게 튀었다. 1938년 2월 8일, 새로 지은 산정현교회당 헌당예배를 드리던 날 성도들을 뿌리치고 일본 순사들은 주 목사를 강제로 연행한다.

 

주기철 목사는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한 지 약 1년 6개월 만에 처음 체포된 후 순교의 날까지 고통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 1937년 평양 산정현교회 제직들.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 주기철 목사. ⓒ천지일보(뉴스천지)

이윽고 제27회 장로교 총회가 열리게 됐다. 장소는 평양 서문교회였고, 총회 날짜는 9월 10일로 정해졌다. 평양경찰서는 재빨리 움직여 우선 신사참배를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서는 이기선 목사, 주기철 목사, 채정민 목사 등 세 사람을 총회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감옥에 가뒀다. 장로교는 총회를 개최하고 신사참배를 가결하게 된다. 총회가 열리던 날 아침부터 서문교회 주변은 삼엄한 경비로 아무나 접근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1938년 9월 10일 총회에서 몇몇 선교사들이 불법이라고 소리를 지르자 감시하던 경찰들이 재빨리 붙잡아 밖으로 데리고 나갔으며, 급히 해산을 시켰다. 주기철 목사는 총회가 저지른 잘못을 알고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탄식했다. 그는 “한국교회가 일본의 흉계에 이처럼 무참히 무너지다니, 하나님 앞에 이 큰 죄를 어떻게 속죄할 것인가”라고 탄식했다.

일본정부는 주기철 목사의 절실한 친구 목사를 통해 목사직을 그만두고 조용한 생활을 하면 편하게 살게 해 주겠다고 회유하기도 했지만 주기철 목사의 중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구차한 방법으로 목숨을 구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주기철 목사는 농우회 사건 등 여러 사건으로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강단에 서기만 하면 신사참배는 하나님 앞에 죄요, 조선인이 일본 신상에 절하는 것은 나라를 버리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평양 경찰서는 평양노회장 최지화 목사를 앞세워 설득하다가 실패하자 노회를 열게 해 주기철 목사의 목사 파면을 결정하도록 했다.

주기철 목사는 목사파면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강단을 지키다가 1940년 7월 다섯 번째로 검속돼 ‘황실불경죄’ ‘치안유지법 위반’이란 죄목으로 10년 징역형을 선고 받은 후 평양 형무소에 재수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끊임없는 고문과 형편없는 옥중 음식에 병이 들어 병감으로 옮겨진 후 1주일 만에 그는 “내 영혼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붙들어 주시옵소서”라는 마지막 기도를 남기고 1944년 4월 21일 49세로 옥사했다. 국가에서는 1968년 7월 9일 주기철은 애국선열의 한 사람으로 후대해 동작동 국립묘지에 그의 유해를 안장했다.

주기철 목사는 비록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말은 후대에 큰 감동을 주고 있다. “‘일사각오(一死覺悟)’다. 예수를 위해 일사각오, 부활 진리를 위해 일사각오, 이웃을 위해 일사각오”가 그가 부르짖었던 외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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