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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흙수저’ 정주영, 농사꾼 장남에서 ‘한국 경제의 전설’ 되기까지
기획

[현대이야기<1>] ‘원조 흙수저’ 정주영, 농사꾼 장남에서 ‘한국 경제의 전설’ 되기까지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한국 산업 근대화의 주역’ ‘세기의 도전자’ ‘위기의 승부사’ 등 다양한 수식어가 방증하듯 현대경제사와 궤를 같이한 한국의 대표 기업가다. 아산이 일군 현대그룹은 자동차와 조선, 건설, 유통, 자재, 금융 등 주요 산업을 아우르는 글로벌 기업들로 성장해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정치적으로 한국 사회에 큰 족적을 남겼다. 1990년대 정몽헌 당시 현대전자 대표이사가 직접 스카우트해 현대전자에도 몸 담았던 박광수 칼럼니스트가 올해 75주년을 맞은 현대그룹을 파헤쳐본다.

박광수 한국과학기술원 자문위원은 학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삼성전자와 LG전자, 현대전자 등에서 40년간 근무했다. 연구개발·생산기술·기획·품질관리·영업·구매 관련 분야를 망라한 것은 물론 영어와 일어에 능통해 미국 일본 등 해외주재원으로도 활동했다. 현재 기업경영 컨설턴트, 기업초빙강의 전문가와 신문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천지일보 2022.5.12
박광수 한국과학기술원 자문위원은 학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삼성전자와 LG전자, 현대전자 등에서 40년간 근무했다. 연구개발·생산기술·기획·품질관리·영업·구매 관련 분야를 망라한 것은 물론 영어와 일어에 능통해 미국 일본 등 해외주재원으로도 활동했다. 현재 기업경영 컨설턴트, 기업초빙강의 전문가와 신문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천지일보 2022.5.12

 <1> 아산 정주영 회장 출생과 현대그룹 설립

한국 성공 기업가 이병철·정주영

대지주家 ‘금수저’ 이병철과 달리

빈농의 아들에서 재계 신화로

‘개천에서 용 난’ 대표적 경영인

 

소판 돈 들고 가출해 맨손 시작

쌀가게 주인, 아산에 사업 맡겨

車수리공장 화재에도 수습 철저

사업 확장하며 ‘현대왕국’ 건설

고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출처: 아산정주영닷컴, 뉴시스)
고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출처: 아산정주영닷컴, 뉴시스)

대한민국 현대 기업사를 볼 때 가장 위대한 기업가로 아산 정주영 회장과 삼성그룹을 창업한 호암 이병철 회장이 꼽힌다.

두 사업가의 성격이나 살아온 환경은 극과 극으로 다르다. 이병철 회장은 경남 대지주 갑부의 아들로 자란 금수저 출신이다. 그는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자녀들이 자는 모습을 보고 마음을 바꿔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창업하며 사업가의 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정주영 회장은 본래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말 그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경영자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속담처럼 최근 흔히 말하는 ‘흙수저’ 출신인 정주영 회장은 한국에서 100년에 한 번이나 나올만한 전설의 인물이라는 평이 나온다.

◆빈대에게 얻은 깨달음

정주영 회장은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벽지인 통천면 아산리 210번지에서 논과 밭 4000평을 소유한 부친 정봉식과 모친 한성실의 6남(주영, 인영, 세영, 신영, 상영), 1녀(희영) 중 장남이다. 서당을 다니다 뒤늦게 학교에 입학해 16세에 송전공립보통학교(현재의 초등학교)를 졸업한 것이 학력의 전부다. 그러나 2006년 기준 정주영 회장은 명예박사 학위 7개(경희대, 충남대, 연세대, 이화여대, 서강대, 고려대, 한국체육대)를 소유했는데 이는 국내 최대 명예박사 학위 수다.

정주영 회장의 어릴 적 꿈은 선생님과 변호사로 알려졌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통천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계에 도움을 주길 원했으나 정주영 회장은 어느 날 면사무소에 갔다가 우연히 신문을 보면서 세상에 눈을 뜨게 됐다. 신세상에 관심이 컸던 정주영 회장은 평생 농사일만 하다간 가족과 형제들의 생활을 책임질 수 없다고 판단해 네 차례나 가출을 감행했다고 전해졌다.

첫 번째는 송전보통학교를 졸업했던 늦여름으로, 당시 최초 목적지는 함경북도 청진시었으나 배고픔으로 인해 함경남도 원산시에 정착해 막일을 하다가 소문을 듣고 찾아온 부친에게 잡혀 다시 고향에 오게 됐다. 그러나 꿈을 접을 수 없었던 정주영 회장은 다시 집을 나왔는데 친절하게 접근한 사기꾼에게 노잣돈을 빼앗기고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세 번째는 소를 판 돈을 몰래 훔쳐 서울로 가출해 부기학원을 다녔으나 역시 부친이 서울까지 수소문해 찾아와 귀향하게 됐다. 마지막은 19세 봄으로 정주영 회장은 인천 부두에서 막노동에 뛰어들었다. 이 때 정주영 회장이 겪은 일화는 지금까지도 알려지고 있다.

당시 노동자 합숙소는 빈대 지옥이었다. 밤마다 빈대들이 달려들어 피곤한 와중에도 잠을 이룰 수가 없던 정주영 회장은 꾀를 내 탁자 위에서 잠을 청했다. 그러나 곧 빈대가 탁자 다리로 기어와 물어뜯었고, 이에 정주영 회장은 탁자 네 다리에 세숫대야를 놓고 물을 부어놓았다. 침상 다리를 타고 올라오던 빈대들이 물에 빠져 죽으면서 며칠간은 잠을 이룰 수 있었으나 곧 다시 빈대들에게 물린 정주영 회장은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빈대들이 벽을 타고 천장으로 올라간 다음 사람 위에서 뚝 떨어져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이를 목격한 정주영 회장은 하찮은 빈대도 살기 위해 장애물을 뛰어넘고 전심전력으로 방법을 찾는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최선을 다하면 무엇을 못하겠느냐는 깨달음을 얻었다.

(출처: 아산정주영닷컴)
(출처: 아산정주영닷컴)

이후 서울 신당동 복흥상회의 쌀가게 점원으로 취직한 정주영 회장은 근면 성실하게 배달 일을 했다. 이 쌀가게 주인은 노름으로 돈만 탕진하는 아들 대신 착실하게 배우고 일하는 정주영 회장에게 3년간 경영을 맡겼다. 이로 인해 23세의 정주영 회장은 독립해 쌀가게 이름을 경일상회로 변경해 사업자금의 근간을 마련했지만 일제 치하에서 일본의 쌀 배급제 시행으로 허무하게 쌀가게 사업을 접어야 했다.

정주영 회장은 이후 자동차 정비회사인 ‘아도서비스’를 1940년 설립하고 자동차 수리를 빠르게, 완벽하게 하면서 고비용을 받는 프리미엄 서비스로 사업 성공을 기반을 다졌다. 수리비는 다른 업체와 비교해 3배 이상 받았으나 아무리 큰 고장이라도 무조건 3일 내로 완벽히 고친다는 방침을 고수해 입소문을 탔고, 아도서비스에 차를 맡기기 위해 고객들이 줄을 설 정도였다.

그러나 어느 정도 사업 규모가 커진 와중에 정주영 회장이 잠시 외출한 사이 직원의 실수로 불이 나 공장 건물이 모두 전소되는 큰 사고가 발생했다. 정주영 회장은 모든 재산이 한 순간에 재가 돼 날아간 순간 정신을 차리고 “어차피 낡아서 폐기하려던 공장이 화재로 사라져 철거비를 오히려 벌었으니 이것으로 막걸리 파티나 열자”는 취지로 직원들을 격려했다. 또 화재로 전소된 수리 차량들의 주인들을 일일이 찾아가 양해를 구했는데 당시 조선 최대 부자인 화신백화점 경영자이자 차량 주인이었던 박흥식 회장은 과거 종로 화신백화점 화재로 어려움을 겪었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반드시 재기할 수 있다는 신념 하나로 일어났다”고 정주영 회장을 오히려 위로했다고 한다.

이어 정주영 회장은 사업자금 요구를 위해 회사 설립 시 자금을 대준 후원인 우윤근을 찾아갔다. 정주영의 성실함과 신용을 높게 평가한 그는 “나는 돈을 떼일 사람에게는 자금을 안준다. 그런데 자네는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며 거금을 담보 없이 흔쾌히 빌려줬다.

(출처: 아산정주영닷컴)
(출처: 아산정주영닷컴)

◆“車 산업은 선진 공업국 위해 필요”

이후 자동차 수리 사업이 안정화되자 정주영 회장은 빌린 돈을 다 갚고 새로운 사업으로 현대건설의 전신인 현대토건을 1947년 설립했다. 그리고 고속도로 사업으로 성공한 정주영 회장은 경부고속도로를 달릴 자동차를 개발하고, 생산·판매하고자 주변의 극구반대를 물리치고 1967년 12월 현대자동차 제조업을 설립하고, 미국의 포드자동차와 기술제휴를 체결했다. 1970년대 중후반에는 독일의 메르세데스 벤츠와 기술제휴를 맺었고 1974년 현대자동차서비스회사를 세워 자동차수리사업으로 확대했다.

이후 자동차를 자체 생산한다는 계획으로 영국 자동차회사인 브리티시 레일랜드 부사장 조지턴블을 스카우트하고 1974년 7월 울산시에 1억 달러의 공사비를 들여 연간 5만 6000대 규모의 자동차를 생산하는 공장을 1975년 완공한다. 현대자동차는 이듬해 고유 개발한 포니자동차 모델을 생산해 전 세계 자동차 업계 관계자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당시 미국 리처드 스나이더 미국대사는 정주영 회장을 만나 현대가 자동차 독자 개발을 포기하면 포드나 지엠 자동차의 원하는 모델의 현대자동차 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OEM)이 가능하도록 돕고 중동 건설시장에서도 현대건설을 지원 하겠다고 압박했다. 그러나 정주영 회장은 이를 단숨에 거절하며 “좋은 자동차를 제조해 값싸게 국민에 공급하는 것은 인체에 좋은 피를 공급하는 것과 같다. 자동차산업은 앞으로 대한민국이 선진 공업국가 대열에 진입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내가 일생동안 번 돈을 모두 쏟아 붓고 실패해도 후대에 자동차공업을 성공시킬 디딤돌을 놓는다면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언젠가는 미국 자동차 산업을 위협 할 것이라는 믿음 하나로 돌직구를 달리며 앞만 보고 달린 정주영식의 경영철학이라고 필자는 판단한다.

이를 기반으로 현재 현대자동차는 1998년 부도가 난 기아자동차를 인수하고 현재 국내시장 점유율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생산 모델도 경차(SUV캐스퍼)부터 중소형(아반떼), 중형(소나타), 대형자동차(제네시스)와 하이브리드자동차, 전기자동차, 수소자동차에 이르는 다양한 생산 라인업을 갖추고 올해 기준 세계 4위 자동차 회사로 성장했다.

한 번 더 강조하자면 정주영 회장은 오늘날의 현대자동차를 세계적인 자동차 왕국 반열로 이끌어 자동차 산업의 초석을 만든 장본인이라고 필자는 믿는다.

(정리 = 이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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