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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 벽을 허문 ‘교육’… 구한말 교육의 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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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사진으로 보는 역사] 남녀 벽을 허문 ‘교육’… 구한말 교육의 변천사

男만 허락했다가 女에게도 점점 문이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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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인 1917년 사진이다. 여성이 교사로도 가르치고 있어 여성 입장에서는 상당한 발전을 이룬 모습이다. 하지만 남학생들은 학교를 다니려면 전부 머리를 짧게 깎도록 했고, 여학생과도 따로 구분해서 앉도록 일제가 엄격한 기준을 정했다. 앞줄 일렬로 앉은 학생들이 여성이며, 뒤쪽 남학생들은 머리가 모두 짧다. 칠판에는 한글과 한자가 혼용돼 쓰여 있다. 일제에 의해 옛 서당의 풍경이 사라져 버린 가슴 아픈 사진이기도 하다. 인화하기 전 흑백필름에 색깔을 입힌 채색칼라 사진이다. (제공: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 ⓒ천지일보 2022.07.26

[천지일보=김현진 기자] 우리나라 구한말(조선 말기~대한제국 시기로)에는 서당, 향교, 사학, 성균관 등이 전통적으로 학교로서의 기능을 대신해 교육을 해왔는데, 이때는 대부분이 남성들만 교육하고 여성에게는 배움의 기회가 없었다.

이는 1876년 강화도 불평등 조약을 시작으로 우리나라에 서양문물이 유입되고 외국인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교육에도 본격적인 변화의 바람이 일어났다. 서당에서도 외국인 기독교 선교사들의 신식교육 영향을 받아 한학뿐 아니라 영어까지 필수과목으로 가르치는 등 다양한 교육을 했다. 그러면서 서당에 개방의 문이 열렸다.

여성의 교육 진출은 1886년 이화학당이 세워지면서 활발해졌다. 이화학당은 메리 스크랜튼이 세운 최초의 사립 여자 교육기관으로 고종황제가 외아문을 통해 교명과 현판을 하사했을 정도로 임금도 여성의 교육 진출을 반기고 장려했던 것이다. 1886년 5월 31일 고관집 소실 김부인이라는 여인이 첫 학생으로 입학 후 1887년 학생이 7명으로 늘어나자 명성황후는 스크랜튼 부인의 노고를 치하하며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교명을 지어줬다.

1898년에는 초·중등 과정의 근대여학교인 배화학당이 여자선교사인 조세핀 필 캠벨에 세워져 여성의 교육열기는 점점 더 확대됐다. 1900년대에 들어서는 서당도 많이 개방되면서 여학생들도 함께 듣게 되고 인원도 대폭 늘었다. 일제 치하에서는 서당이 초등교육뿐 아니라 민족교육까지 가르치는 등 개량서당으로 바뀌어 항일정신도 심었다. 이에 일제는 1918년 서당교육을 감독하고 통제하는 ‘서당규칙’을 제정했다. 그럼에도 전국적으로 서당이 점점 많아지자 1929년 서당규칙을 개정해 서당 설립을 인가제로 바꾸며 사실상 더 이상 설립하지 못하게 하면서 서당은 점점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

서당은 퇴색해 갔어도 학당 등이 생겨나면서 여학생들은 빠르게 늘었다. 이화학당 학생이 교사로도 아이들을 가르치는가 하면 여학생들과 남학생들이 같은 공간에서 교육을 받는 일도 있어 여성들에게 가로 막힌 벽이 허물어지고 교육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됐다.

본지가 공개하는 이번 사진을 통해 이 같은 변화의 흐름을 확인할 수 있다. 서당에서는 나이가 지긋한 훈장이 서양문물을 사용하는 모습, 젊은 훈장으로 바뀌어 가는 모습, 여성들의 교육의 장이 열려 가는 모습 등의 ‘구한말 교육의 변천사’를 한 편의 파노라마처럼 한눈에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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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대 나이가 지긋한 훈장이 소규모 남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서당 풍경이다. 남학생 모두 댕기머리를 하고 있다. 어린 나이라도 장가들 경우 상투를 틀었는데, 그 전에는 사진과 같이 댕기머리를 했다. 오른쪽 끝에 학생은 머리에 당시 유행하는 피부병인 ‘버짐(피부의 표면이 헐지 않고 메마른 채로 번지는 피부병)’이 크게 있다. (제공: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 ⓒ천지일보 2022.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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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사진. 근엄한 표정의 서당 훈장이 손에는 두루마리 서지를 들고 있고, 안경 너머로 촬영자를 응시하고 있다. 바닥 카펫은 신식 문물을 받아 이미 수입해 깔은 모습니다. (제공: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천지일보 2022.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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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초 서당풍경이다.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 신식교육 영향을 받아 한학교육은 퇴색했고 서당에서도 신식교육을 하는 개량 서당으로 바뀌어 갔다. 학당과 소학교(초등학교 전신) 등이 들어섰지만 전국적으로 서당은 줄지 않았다. 사진 속 서당에서는 여전히 나이가 지긋한 훈장이 연령대가 다양한 학생들을 함께 가르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제공: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천지일보 2022.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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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대 서당 모습으로 카메라가 익숙하지 않았던 시대라 훈장과 아이들 모두 눈에 힘을 주고 있는 모습이 재미있다. 훈장의 나이가 역시 비교적 많진 않아 보이고 남학생들 위주의 서당이다. 학생 중에는 나이는 어리지만 갓을 쓰고 또 상투를 틀고 있다. 장가갔어도 배움은 계속 됐다. (제공: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 ⓒ천지일보 2022.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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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사진으로 훈장이 윗사진들과 비교할 때 나이가 많진 않고, 학생 중에는 여학생들도 섞여 있어 상당히 개방적인 서당 풍경이다. 소규모만 수용하던 서당과는 달리 규모를 대폭 늘렸고, 남학생 중에는 갓을 쓰고 있어 장가간 이들도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학교육과 더불어 선교사에게 영어도 필수과목으로 배웠다. (제공: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 ⓒ천지일보 2022.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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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서당 밖으로 나와 야외수업을 하는 학생들의 모습. 딱딱한 교실에서 잠시 나와 수업을 할 정도로 개방적인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새하얀 버선에 신을 신은 아이들과 맨발로 있는 아이들의 모습 속에서 빈부 격차를 가늠할 수 있다. 가난하더라도 배움을 잃지 않으려는 모습에서 짠한 감동을 준다. (제공: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 ⓒ천지일보 2022.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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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이화학당 입학 기념사진이다. 고종황제로부터 공식적인 학교로 인정받게 되자 규방에 갇혀 있던 상류층 여성들도 다니기 시작했으나 아직은 유교적 관습이 심해 양반가에서는 잘 보내지 않아 크게 늘지 않았다. (제공: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 ⓒ천지일보 2022.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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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언더우드가 찍은 선교 기념 사진으로 이화학당에 제법 학생들이 늘어난 모습이다. 처음에는 약 35명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한식 기와집으로 세웠으나 1904년 중학과가 설치되고 향후 학생수가 늘어나자 2층 건물을 새로 짓는 등 여성들의 교육 기회가 확대됐다. (제공: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 ⓒ천지일보 2022.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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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초 사진으로 전북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에 세워진 천주교 성당인 나바위성당에서 여학생들이 야외에서 음악수업을 받는 모습이다. 지방이라 교육의 기회가 더 많지 않았을 어린 여성들을 위해 성당에서 신식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집안에서 억눌렸던 여학생들이 풍금소리에 맞춰 율동을 하며 신세계를 경험하고 있다. (제공: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 ⓒ천지일보 2022.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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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이화학당 대학과 졸업사진이다. 이화학당은 중학과, 보통과에 이어 1910년 대학과를 신설하고 여성의 교육의 장을 확대했다. 대학과가 오늘날의 이화여대가 된다. 이들은 교사가 돼 학생들을 다시 가르치는 등 여성의 사회진출 계기가 된다. 인화하기 전 유리원판 필름에 색을 입힌 채색칼라다. 발그스레한 볼과 저고리색깔, 땅과 뒤에 볏집으로 쌓아올린 담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색칠한 기술이 매우 뛰어나다. (제공: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 ⓒ천지일보 2022.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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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맹인 여학교 졸업사진이다. 손에 인형을 선물 받고 졸업사진을 찍고 있는데 당시 신식교육을 받은 것은 선택받은 자녀들이며 선교사 주선으로 우선적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오면서 여성은 물론 맹인까지 교육의 기회가 넓혀졌다. (제공: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 ⓒ천지일보 2022.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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