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nu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순국 90주년 추모 (18)
오피니언 칼럼

[문화칼럼]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순국 90주년 추모 (18)

image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이규창(李圭昌)으로부터 베이징(北京) 사건의 소식을 전해들은 이회영(李會榮)은 거처를 진탕차오장이란 빈민촌(貧民村)으로 옮겼으며 이를 베이징에 있는 동지들에게 알렸다. 이러한 소식을 알게 된 이을규를 비롯하여 백정기, 오면직, 장기준, 김성수, 김동우 등이 톈진(天津)으로 찾아와 근처에 큰 방을 구해 함께 기거하게 되었다.

한편 이회영을 비롯한 아나키스트들은 일제의 기습으로 인하여 국내에서 모집한 자금이 없어지게 되자 그에 대한 비상대책(非常對策)으로 일본 조계지 한복판에 위치한 중일 합작 은행(中日合作銀行)인 ‘정실은호’를 습격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에 대하여 이회영은 며칠 동안 고민하다가 결국은 그 계획에 찬성하기로 하였으며 이에 따라 장기준을 비롯하여 오면직, 송순보, 김동우, 김성수 등이 이 거사에 참여하여 3000원이 넘는 자금을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거사가 성공을 거둔 이후 아나키스트들은 만주로 향하였으나 이회영은 만주행보다는 푸지엔성(福建省)의 농민자치운동(農民自治運動)에 깊은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아들 이규창과 함께 상하이(上海)로 향하였다. 이와 관련해 당시 혼기가 찬 딸 이규숙은 아나키스트의 일원으로서 ‘정실은호’ 거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던 장기준과 혼인한 이후 남편이 동지들과 함께 만주로 떠날 때 동생 이현숙을 데리고 동행하였다.

여기서 모든 일행이 같은 날에 떠나는 것이 아무래도 보안상 문제가 발생할 수가 있기에 3진으로 나누어서 출발하였는데 1진으로 장기준·이규숙·이현숙, 2진으로 백정기·오면직, 3진으로 정화암 등 총 15인이 하루 간격을 두고 출발하였다.

한편 1931년 조선인 무정부주의 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결성하였으며 산하단체로 남화구락부를 두었으며 기관지로써 남화통신을 발간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중요한 변수가 발생하였는데 그것은 일제가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일제는 1931년 여름 만주 전역을 침략할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구체적으로 만주에 주둔하는 관동군의 일부 장교들이 선양(審陽) 북쪽 유조구의 만선철로를 폭파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사건을 일제는 중국군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면서 일방적으로 만주를 공격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1931년 9월 18일에 발생한 만주사변이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 새 시대 희망언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지면구독신청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