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nu
고기국수
오피니언 칼럼

[걸공(乞空)의 음식칼럼] 고기국수

image

식생활문화연구가 김영복

국수는 우리 민족의 일생 의례 음식이다. 길게 이어진 가닥처럼 ‘수복(壽福)’과 ‘장수(長壽)’ 또는 ‘추모(追慕)’의 의미를 담고 있어서다.즉 출생·생일·돌·회갑 등 출생 의례에는 ‘국수’의 긴 가닥은 수명이 길기를 기원하는 ‘장수’의 뜻을 가지고 있다. 옛날에 어린애를 낳은 지 3일이나 만 1개월이 되는 날, 만 1년이 되는 날에 탕병(湯餠)으로 축하연(祝賀宴)을 베풀었던 데서 온 말인데, 이로 인해 이 축하연을 탕병회(湯餠會)라 하고 이때 찾아오는 손님을 축하하러 온 이들을 탕병객(湯餠客)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여기서 탕병(湯餠)은 온국수(溫麵)를 말한다.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매천집(梅泉集)’ ‘사가집(四佳集)’

고려 말의 중국어 회화책인 ‘노걸대(老乞大)’에 “우리 고려인은 습면(濕麵)을 먹는 습관이 있다”라고 했고 ‘노걸대언해(老乞大諺解)’에서는 ‘습면’을 ‘국슈’로 번역했다. 1798(정조22)년 이만영(李晩永, 1748~?)이 저술한 유서(類書) ‘재물보(才物譜)’ 탕병조(湯餠條)에는 ‘탕병(湯餠)’을 ‘국슈’라 했고 조선시대 실학의 태두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지은 ‘아언각비(雅言覺非)’는 면의 방언을 ‘국수(匊水)’, 조선 후기 실학자 풍석(楓石)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의 ‘금화경독기(金華耕讀記)’는 ‘국수(掬水)’라 기록했다. 

혼례에는 결연(結緣)이 길어지기를 바라는 ‘백년해로(百年偕老)’와 ‘수복(壽福)’의 뜻을, 제례(祭禮)에는 ‘추모(追慕)’의 뜻을 담았다. 이처럼 국수는 기원(祈願)이 담겨 있는 일생 의례 음식이었다.

국수가 혼인 잔치 음식으로 자주 쓰이면서, 국수 자체가 혼례를 상징하기도 했다. 민간에서 과년한 처녀총각에게 “너 국수를 언제 먹여줄래?”라는 것은 “결혼을 언제 하느냐?”는 말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 이는 혼인 잔치에 찾아온 손님들에게 국수를 대접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 되었기 때문에 생긴 식생활문화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잔치음식으로 ‘국수장국상’을 차린 이유에 대해 1924년 위관(韋觀) 이용기(李用基)가 지은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서는 “‘국수장국상’에는 편육 한 접시라도 놓으니 대접 중에 낫고 온갖 잔치나 아침, 점심으로 안 쓰는 데가 없다”고 했다. 즉 국수장국과 더불어 편육 등 다른 귀한 음식도 함께 대접할 수 있으므로 손님에게 더 나은 대접을 할 수 있는 손님 접대음식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용기(李用基) 선생이 위 책에 기록한 1900년대 초 ‘국수장국상’의 국수와 편육이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어 태생된 음식이 제주의 ‘돗괴기국수(돼지고기국수)’가 아닌가 생각한다.

특히 제주에서도 서귀포의 ‘돗괴기국수’는 돼지뼈 등으로 육수를 내고 마치 우동면과 같이 가닥이 굵은 국수와 부드럽고 납작한 수육을 위에 올려 혼례(婚禮) 때나 상례(喪禮) 때 먹는 음식이다.

그런데 일종의 고기국수인 경남 밀양 수산의 ‘선지국수’는 의례음식이 아니라 선술집 음식이다.

그럼에도 ‘선지국수’는 그 역사가 꽤 오래된 것 같다.

조선 중기 양명학(陽明學)에 조예가 깊은 서예가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은 ‘소재집(穌齋集)’에서 “이당사갱감(儞當思羹䘓)네가 응당 선짓국까지 먹기를 생각하여”라고 했다. 

당시도 이미 선짓국(䘓)이 있었다.

조선 숙종 임금 때 실학자인 유암(流巖) 홍만선(洪萬選, 1643∼1715)이 쓴 ‘산림경제(山林經濟)’에 토끼곰(煮兎)도 역시 일종의 선지국수다. 그 내용을 보면 ‘토끼곰(煮兎)은, 살진 토끼 한 마리를 7푼쯤 익혀, 갈라서 실같이 썰어 참기름 4냥을 넣어 일차 볶고 약간의 소금과 파채(蔥絲) 한 줌을 넣고 잠깐 볶는다. 다시 원 국물을 맑게 가라앉혀 솥에 붓고 살짝 두어 번 팔팔 끓여 간장을 조금 치고 또 살짝 한두 번 끓여 국수(麪絲)를 넣고, 거기다 날피(活血)를 두 국자 넣고 살짝 한 번 끓여, 소금과 초를 쳐서 간을 맞춘다’라고 되어 있다. 비록 소 피(牛血)가 아니지만 토끼 살로 육수를 내고 국수를 넣고 토끼의 피를 넣은 ‘선지국수’다.

특히 192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문학가 빙허(憑虛) 현진건(玄鎭健, 1900~1943)의 ‘운수 좋은 날’에 경성의 선술집에 ‘선짓국’이 등장한다. 어쩌면 선술집에서 ‘선짓국’이 술국의 하나로 먹게 된 것은 술을 마실 때 안주로 먹거나 술을 마신 후 해장하기에 적당한 음식이었을 것이다. 

일종에 술국이었던 ‘선짓국’에 국수를 말은 것이 ‘선지국수’다.

경남 밀양의 수산은 국수가 유명한 곳이다. 이곳의 ‘수산국수’는 무려 7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수산장(場)의 선술집 ‘선짓국’에 국수가 들어 갔다고 보는 것이 정설일 것이다. 

명대(明代) 말기에 고렴(高濂)이란 사람이 쓴 ‘준생팔전(遵生八牋)’ ‘음찬복식전(飮饌服食牋)’에 육병방(肉餅方)이나 조자육면방(臊子肉麵方)과 같은 ‘육면(肉麵)’이 등장한다.

대구, 경북에는 ‘육국수(肉麵)’가 있다. 대구를 비롯한 경산, 칠곡, 청도 등지에 가면 아직도 ‘육국수’라는 이름으로 ‘육면(肉麵)’을 맛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이 ‘육국수’의 뿌리인 ‘육면(肉麵)’은 16~17세기 안동 유학자 김유(金綏, 1491∼1555)와 그의 손자 김영(金坽, 1577∼1641)가 안동문화권의 음식조리서를 한문 필사본 저술한 ‘수운잡방(需雲雜方)’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럼에도 안동보다 대구를 비롯한 대구 인근이라 할 수 있는 경산, 칠곡, 청도에 ‘육국수’가 뿌리를 내린 것은 아마 대구가 전국 3대 우시장의 하나이며, 도축 시장이 활성화됐던 영향이 컸으며, 대구의 대표적인 국수 풍국면의 영향도 컷을 것이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 새 시대 희망언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지면구독신청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