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사진으로 보는 역사] 남녀 벽을 허문 ‘교육’… 구한말 교육의 변천사

[천지일보=김현진 기자] 우리나라 구한말(조선 말기~대한제국 시기로)에는 서당, 향교, 사학, 성균관 등이 전통적으로 학교로서의 기능을 대신해 교육을 해왔는데, 이때는 대부분이 남성들만 교육하고 여성에게는 배움의 기회가 없었다. 이는 1876년 강화도 불평등 조약을 시작으로 우리나라에 서양문물이 유입되고 외국인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교육에도 본격적인 변화의 바람이 일어났다. 서당에서도 외국인 기독교 선교사들의 신식교육 영향을 받아 한학뿐 아니라 영어까지 필수과목으로 가르치는 등 다양한 교육을 했다. 그러면서 서당에 개방의 문이 열렸다. 여성의 교육 진출은 1886년 이화학당이 세워지면서 활발해졌다. 이화학당은 메리 스크랜튼이 세운 최초의 사립 여자 교육기관으로 고종황제가 외아문을 통해 교명과 현판을 하사했을 정도로 임금도 여성의 교육 진출을 반기고 장려했던 것이다. 1886년 5월 31일 고관집 소실 김부인이라는 여인이 첫 학생으로 입학 후 1887년 학생이 7명으로 늘어나자 명성황후는 스크랜튼 부인의 노고를 치하하며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교명을 지어줬다. 1898년에는 초·중등 과정의 근대여학교인 배화학당이 여자선교사인 조세핀 필 캠벨에 세워져 여성의 교육열기는 점점 더 확대됐다. 1900년대에 들어서는 서당도 많이 개방되면서 여학생들도 함께 듣게 되고 인원도 대폭 늘었다. 일제 치하에서는 서당이 초등교육뿐 아니라 민족교육까지 가르치는 등 개량서당으로 바뀌어 항일정신도 심었다. 이에 일제는 1918년 서당교육을 감독하고 통제하는 ‘서당규칙’을 제정했다. 그럼에도 전국적으로 서당이 점점 많아지자 1929년 서당규칙을 개정해 서당 설립을 인가제로 바꾸며 사실상 더 이상 설립하지 못하게 하면서 서당은 점점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 서당은 퇴색해 갔어도 학당 등이 생겨나면서 여학생들은 빠르게 늘었다. 이화학당 학생이 교사로도 아이들을 가르치는가 하면 여학생들과 남학생들이 같은 공간에서 교육을 받는 일도 있어 여성들에게 가로 막힌 벽이 허물어지고 교육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됐다. 본지가 공개하는 이번 사진을 통해 이 같은 변화의 흐름을 확인할 수 있다. 서당에서는 나이가 지긋한 훈장이 서양문물을 사용하는 모습, 젊은 훈장으로 바뀌어 가는 모습, 여성들의 교육의 장이 열려 가는 모습 등의 ‘구한말 교육의 변천사’를 한 편의 파노라마처럼 한눈에 볼 수 있다.

[천지일보-문화단독-강우방의 도자기 이야기] (32) 거룩한 고려 상감청자 보주문(寶珠文) 주자(注子)

글, 사진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은 구석기 이래 300만년 동안 이뤄진 조형예술품의 문양을 독자 개발한 ‘채색분석법’으로 해독한 세계 최초의 학자다. 고구려 옛 무덤 벽화를 해독하기 시작해 지금은 세계의 문화를 새롭게 밝혀나가고 있다. 남다른 관찰력과 통찰력을 통해 풀어내는 독창적인 조형언어의 세계를 천지일보가 단독 연재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이건희 소장품전을 다시 보러 가서 촬영해야 할 작품을 사진기에 담아서 돌아와 모니터에서 살펴보며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우선 그 주자(注子, 주전자라 부르면 모두 알아듣지만 술만 담는 그릇은 아닐 것이다)를 모든 학자가 이른바 표형병(瓢形甁)이라 부르고 있지만, 도자기 모양도 표주박이라는 현실에서 보는 것에 빗대어 보면 옳지 않다고 거듭 강조해 왔다(도 1-1). 모든 오류가 그런 습관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크게 팽창한 아랫부분은 마음껏 부픈 둥근 보주여서 마치 우주를 압축하여 만든 듯하다(도 1-2). 그 위의 작은 둥근 보주 역시 팽창하여 있다. 두 개의 보주를 잇는 가는 허리는 최대한으로 잘록하여 더이상 가늘게 만들 수 없을 만큼 조형을 극적으로 빚어냈다. 가는 허리로 이어진 두 보주는 표주박 모양이 아니라 큰 보주에서 작은 보주가 나오는 형상임을 잊지 말자. 보주라는 것을 알면 곧 이해할 수 있다. 보주의 본질을 누누이 설명해 왔거니와 <보주에서 무량한 보주가 나온다>는 진리는 일체 조형들에 통한다. 조각이나 그림에서 여래의 머리는 보주이며 그 정수리에서 무량한 보주가 솟아 나옴을 불상이 원래 전공이라 처음으로 일찍이 이미 증명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표면 전체에 보주문을 상감으로 표현하여 보주가 가득 찬 만병에서 무량한 ‘보주 영기문’이 솟아 나옴을 웅변하고 있지 않은가. 그 한 줄기만 도해하여 보았다(도 1-3). 맨 밑부분의 연잎 모양에 주어진 보주들에서 우주의 기운이 가득 찬 듯 연이어 마음껏 팽창한 병이 말 그대로 만병(滿甁)이 아닌가. 표면에 줄줄이 이어진 보주문은 이제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국화문이 아니다. 그 하나하나가 어찌하여 국화로 보이는가. 다양한 모양의 국화를 실제로 살펴본 일이 있는가. 이런 모양의 국화는 없다. 이미 앞서 모란이 아니라 영화(靈花)라고 이름 지은 것처럼 이것도 영화(靈花)인데 좀 더 구체적으로 보주문(寶珠文)이라 부르고 있을 뿐이다. 연이어 이어 올라간 보주문은 이 만병 전체를 골의 등을 따라 올라가 표면 전체를 장엄하여 감격할 뿐이다. 참으로 천하제일 고려청자는 이런 작품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맨 위는 제1영기싹으로 매듭짓고 있다. 그와 비슷한 청자로 손잡이만 없는 병을 함께 싣는다(도 1-4). 그다음 국보인 청자상감 보주문(寶珠文) 혹은 영화문(靈花文) 병이 있다(도 2-1). 흔히 오이 모양이라 하여 과형병(瓜形甁)이라 부르지만 단면을 보면 둥근 모양에 붕긋붕긋한 형태로 역시 둥근 형태를 영화시킨 것임을 고구려 벽화에서 깨친 바 있다. 이 문제는 매우 긴 설명이 필요하므로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이런 고차원의 형태와 문양을 바라보고 왔다. 국화문과 모란문이 엇갈려 상감하여 있다고 말하지만 두 가지 다른 모양의 영화문이 엇갈려 배치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좋다. 국화문이라 부르는 것을 채색분석해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도 2-2). 중앙에 작은 보주들이 있는 보주에서 사방으로 기운이 뻗어나가는데 그 잎같이 뻗어나가는 것들의 정체는 다음 회에서 자세히 풀려고 한다. 그것 또한 발산하는 기운을 조형화한 것임을 보주에서 발산하는 모양에서 알 수 있다. 만병과 보주라는 개념을 ‘세계 도자사’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그 보편적 원류와 상징을 처음으로 밝혀나가다 보니 문양에 대한 이해에 오류가 너무 많음을 알고 하나하나 고쳐 나가고 있다. 제32회는 국화문에 대한 두 번째 글로 이른바 국화문이라는 모양은 보주를 직설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중앙의 작은 둥근 보주에서 사방으로 기운이 발산하는 가장 간단한 조형이다. 조선시대 분청사기의 인화문(印花文)이 지배적인 문양으로 이어져서 국화문 모양이 아닌 보주문으로 압도적으로 많다고 할 수 있는데 보주를 이렇게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음에 놀라울 뿐이다. 도자기에는 작은 점 하나라도 무의미하게 표현한 것은 없으며 모두 고차원의 상징을 띤다. 그런데 그나저나 보주의 모양이 하나이면 좋으련만 모양과 그 안의 영기문들의 구성이 천변만화하여 도무지 종잡을 수 없어 당황스럽지만 알고 보면 환희심에 가슴이 뛴다. 고려 불화와 조선불화에서 보주의 본질을 파악해 볼 수 있다. 기회를 보아 다루어 보려고 한다. 보주 안에는 물이 가득 차 있음을 알아냈으며, 그 만물생성의 근원인 물은 또한 갖가지 모양의 영기문으로 무한히 나타내고 있으나 명칭이 없으니 필자가 만들어 써야 한다. 보주에서 그 안에 가득 찬 물이 갖가지 모양의 영기문으로 나타나지만 보주의 외형적 둥근 모양에서 사방으로 기운이 발산하는 모습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 우리가 ‘국화문’이라 부르는 모양인데, 그런 안식에 이르는 것조차도 그리 쉽지 않다. 가운데 단순한 원형이 그리도 심원한 상징과 의미를 지닌 친타마니란 것이냐. 그리고 그런 것을 역사적으로 처음 밝혔다니 과연 그러한가. 보주란 그리도 파악하기 어렵단 말인가. 조형예술품들에서 그릇들이 모두 만병이고 보주라고 단정하여오고 있는데 과연 그러한가. 예수도 보주이고 여래와 보살이 모두 보주이고 이슬람의 알라신도 보주라니 과연 그러한가. 그것을 어찌 알 수 있단 말인가. 모든 신전들을 갖가지 문양들로 장엄하고 있으며 필자는 일찍이 ‘문양은 神’이라 설파하고 있으며 그 진리를 증명하고 있다. 그 모든 특정한 신전(神殿)에 갖가지 문양들이 화려하게 묘사된 까닭을 알고 있는가. 이때 신(神)이란 어떤 특정한 신이 아니요, 신적(神的)인 것 즉 신성(神性)을 의미한다. 보이지 않는 신성(神性)을 보이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문양이다. 세계의 모든 신전 건축을 연구하여 각 나라에 가서 발표하기도 하고 강연도 하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아무도 관심 없이 지나쳐서 그 중대함을 모르고 있는 그 문양의 세계를 개척해나가고 있으며 인류의 의식 세계를 날로 크게 넓게 확장해 나가고 있다. 도자기를 그 누가 감히 보주라고 말한 적이 있는가. 감히 누가 만병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던가. 더구나 누가 만병을 보주라고 인식한 적이 있었던가. 필자는 도자기의 주체는 우리가 단순한 장식으로 알고 있었던 문양이 주체라고 역설하며 하나하나 증명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그런 진리를 터득하여 표현해낸 예술가들이 존재해왔던, 우리가 무시해 왔던 예술가들이 바로 이름 없는 ‘장인’들이었다! 이 연재는 바로 장인들이 창조하여 전승해온 문양을 처음으로 추체험해오고 있는 과정을 기록하여 두고 있다. 구석기시대 이래 지금까지 존재해 왔던 장인들은 조형언어로 표현해 왔으므로 구태여 문자언어로 기록할 필요도 없으며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런 작업을 바로 필자가 감행하고 있다. 국화라고 부르는 문양은 가장 기본적인 보주의 표현이지만 병 모양에서는 위아래로 보주문을 길게 표현해야 하므로 우리에게 익숙한 수평적인 영기문(세상 사람들이 덩굴문이라 부르는 것, 만물생성의 근원으로 보주에서 생겨난다)이 아니어서 낯설기도 하다. 이미 설명한 청자상감 보주문 주자(높이 27.5㎝), 두 가지 영화문으로 장엄한 청자상감 영화문 붕긋붕긋한 병(고려 12세기, 높이 25㎝, 국보 제114호, 도 2-1, 도 2-2), 청자상감 보주문 장경호(도 3-1, 도 3-2. 이건희 소장, 높이 38㎝) 등 모두 다르게 영화를 세로로 표현하고 있으나 보주 주변의 검은 색 또한 영기문이다. 흑백 두 가지 색으로 표현하고자 한 목적을 모두 이루어내는 이름 없는 장인의 솜씨에 감탄할 뿐이다. 천하제일 고려청자를 우리 조상이 창조했다면 우리 또한 천하제일 민족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수직으로 표현된 영화문의 구성 원리를 명료하게 표현한 예를 보면 더욱 분명한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도 4). 모든 것(Ding)에는 신성이 내재되어 있다. 모든 도자기에도 신성(神性)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 만병이며 보주인 항아리에서 신들이 생겨나고 신전이 생겨난다.

[단독❘사진으로 보는 역사] 130여년 전 男중심 접대문화 민낯 그대로… 그 DNA는 사라지지 않아

[천지일보=김현진 기자] 장자연 사건·빅뱅 출신 승리의 버닝썬 사태 등은 여러 유명인사가 연루된 성접대 의혹으로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하며 큰 파문을 일으킨 사건이다. 최근에는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 등이 의혹을 받고 있어 정치권에서도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 접대문화다. 이 접대문화가 130여년 전에도 있어졌던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2점의 사진을 본지가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로부터 제공받아 단독 공개한다. 1890년대 구한말 찍은 사진으로 한 독일인 여행가가 조선을 여행하며 곳곳의 생활상을 촬영한 사진 중 일부다. 외국인 여행가는 우리네 서민들의 모습도 담았으나 선비나 관료들의 생활상도 담았다. 사진에는 젊은 기생으로부터 술을 따른 술잔을 건네받고 또 음식을 작은 접시에 받아 식사하는 모습이 담겼다. 4명의 남성이 있는 사진은 모두 상투를 틀고 탕건(宕巾)을 썼다는 점이나 여유 있는 모습 등의 행색을 봐도 관직에 있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탕건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망건(網巾) 위에 쓰거나 다른 관모(冠帽) 안에 썼던 것으로 간편하게 쓰는 모자의 일종이다. 관직자가 평상시에 관을 대신해 쓰면서 속칭 ‘감투’라고 부른다. 그래서 벼슬에 오르는 것을 일컬어 ‘감투 쓴다’라는 표현이 여기에서 유래됐다. 곧 관직자만이 쓸 수 있는 탕건을 썼다는 점에서 나름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으로 추측된다. 술을 따른 잔을 건네고 있는 기생은 몸집이나 얼굴을 봐도 나이가 무척 어려 보인다. 당시 외국인은 이 모습 또한 신기해서 사진에 담았을 법하지만 결국 이 사진은 안타깝게도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보여주는 사진인 셈이다. 남성 2명과 같이 있는 사진 또한 탕건을 쓰고 있는데, 가운데 남성은 사진을 찍는 것이 어색한 것인지 혹은 현재 앉아 있는 장소가 자랑할 만한 곳이 아니라는 생각에 불편했던 것인지, 다소 표정이 경직돼 있고 자세 또한 제대로 앉아 있지 못한 듯하다. 옆에 편하게 앉아서 아무렇지 않은 듯 음식을 먹고 있는 남성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옆의 남성은 얼굴에 안경을 착용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문헌에서는 16세기부터 우리나라에서 안경을 착용한 것으로 나오는데 특히 17세기부터 양반들이 즐겨 착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에서는 수정으로 안경을 만들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경주 ‘옥돌안경’ 혹은 ‘남석안경’으로 불리는 안경이다. 18세기에는 양반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까지도 사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가격이 만만치 않아 양반들이 주로 사용했고 서민들은 정밀한 세공작업을 해야 하는 장인들이나 침을 놓는 의원들 중심으로 착용했다고 한다. 탕건을 쓰고 안경을 쓰고 있는 점을 미뤄 신분이 낮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기생으로 보이는 여성 앞에 큰 그릇이 놓여 있는데 여기 음식을 작은 그릇에 담아서 이 남성들에게 전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표정이나 자세가 비교적 여유로워 나름 노련한 기생으로 추측된다. 이 모습은 오늘날에도 장소는 달라졌으나 그대로 이어져 우리네 민낯이 되고 있다. 2019년 버닝썬 사태 당시에도 일본의 한 매체는 ‘성 접대는 조선의 오래된 문화’라고 보도한 적이 있었다. 130여년 전의 모습이 그대로 사진기록에 남겨져 있어 부끄럽지만 부인할 수 없는 모습이다. 세월이 흘렀으나 정치권이나 높은 관료 출신, 대기업 총수까지 끊임없이 ‘성 접대’ 의혹과 연루돼 그 DNA(유전자의 본체)는 사라지지 않고 이어져 온 셈이다. 본지가 이번에 공개하는 사진은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가진 이들의 ‘접대문화’는 사라지지 않고 이어져 오히려 더 변질돼 왔다는 것을 고발하고 지적하는 사진인 것이다. 우리 한민족이 분명 예부터 우수하고 높은 문화를 꽃피워왔고, 현재는 K팝과 K드라마와 영화, K푸드 등의 우리 문화가 한류 열풍을 일으켜 세계에 위상을 떨치고 있는 것은 자랑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고치고 버려야 할 나쁜 습관 문화들도 적지 않다. 그중 마치 DNA가 된 ‘접대문화’는 이제 청산해야 할 문화 중 하나가 아닐까. 특히 정치권이나 관료 등의 유명인들 중에서는 더이상 ‘성 접대’와 관련된 의혹사건이 발생하지 않고 오로지 국민들을 위한 올바른 정치를 펼치길 국민들은 진정으로 바라고 있을 것이다.

송전철탑에 석산 개발까지… 수난당하는 충남도 문화재

[천지일보=백은영 기자] 문화 활동의 소산으로 가치가 있다고 인정되는 유․무형의 것을 문화재라고 한다. 문화재 보존․보호보다 경제성장과 도시개발 등이 우선시되던 때도 있었지만, 경제성장이 어느 정도 일정 수준에 이르면서 문화재 보호는 하나의 중요한 과제가 됐다. 이에 문화재보호법을 만들어 문화재를 보존하거나 지속적으로 전승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문화재의 종류나 관리 주체에 따라 보호받지 못하는 문화재가 많은 현실이다. 특히 시․도지정문화재나 문화재자료의 경우 국가지정문화재와는 달리 관리 주체에 따라 관리가 느슨해지기도 한다. ◆ 세계문화유산을 품은 고도(古都) 부여 백제의 세 번째 수도이자 마지막 수도였던 충청남도 부여(扶餘). 부여는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능산리 고분군(부여 왕릉원), 나성 등 4곳의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정도로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충남 공주시와 부여군, 전라북도 익산시 3개 지역에 분포된 8개 고고학 유적지로 이뤄져 있다. 이로써 문화재청이 지정한 4대 고도(경주, 부여, 익산, 공주) 모두 세계문화유산을 가진 도시가 됐고, 이들 4대 고도는 ‘고도 보존 및 육성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 이 특별법은 우리 민족의 문화적 자산인 고도(古都)의 역사문화환경을 효율적으로 보존․육성함으로써 고도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주민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고도의 역사문화환경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할 책무를 지닌다. ◆ 문화재자료 제119호 ‘조신의 묘’ 백제의 마지막 수도로서 이와 관련된 역사 탐방 등 문화관광이 주된 자원인 부여는 백제 유물 외에도 도지정문화재로 유형문화재 25점, 기념물 25점, 도문화재자료 40점 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한 지역이다. 고도(古都)의 옛 정취가 아직 남은 곳이지만 문화재 및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지역의 관리 미흡으로 수난당하는 문화재가 있다. 지난 4월 6일 본지가 단독 보도한 <“송전철탑 이전해달라”… 충남 문화재자료 제119호 ‘조신의 묘’ 수난>에 대한 기사를 보면 부여군의 지역 내 문화재 및 문화재자료에 대한 지자체의 관심 부족을 엿볼 수 있다. 부여는 조선 8대 명당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곳이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9호(지정일: 1984년 5월 17일)로 지정된 ‘조신 선생의 묘(趙愼의 墓)’와 그의 위패가 모셔진 덕림병사(德林丙舍)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덕림병사 역시 지난 1988년 8월 30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05호로 지정됐다. 조신(趙愼)은 고려 후기 학자로 공민왕(재위 1351∼1374) 때 회양부사를 지냈으나 고려 말 신돈의 섭정으로 조정이 문란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부여 임천에 은둔하면서 이름을 사겸(思兼)에서 신(愼)으로 고쳤다. 그는 당대 학자인 이색, 정몽주와도 교분이 두터웠으며 박팽년, 유서원 등의 학자를 길러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조선 태종의 어릴 적 스승이기도 했다. 조신이 사망하자 태종은 당대 최고의 선사(禪師)로 꼽히던 무학대사에게 묫자리를 부탁했다고 전해졌으니 바로 지금 ‘조신의 묘’가 있는 곳이다. 부여군 세도면 동사리에 있는 ‘동곡서원(東谷書院,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2호)’은 고려의 충신이자 조선 태종의 스승으로서 학자의 양심을 끝까지 지켰던 그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으며, 그의 묘소 아래 서 있는 수령이 200년 된 커다란 돌배나무는 현재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 ◆ 송전탑 이전 문제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9호로 지정된 ‘조신의 묘’에 수난이 시작된 것은 지난 1985년 한국전력공사에서 묘 바로 앞에 송전탑(철탑)을 설치하면서다.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조신 선생의 묘와는 불과 80여m 거리다. 이에 조신 선생의 후손인 풍양 조씨 희양공 종무회는 송전탑을 산소에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이전해줄 것을 오랜 시간 건의 및 진정해오고 있는 상황이다. 충남 부여군 장암면 점상리 산168-1번지(조신의 묘) 병사 문화재 제119호 및 제305호 송전철탑 이전 추진 대책위원회 추진위원장을 맡고 있는 손자 조맹연씨에 따르면 지난 1985년 5월 10일 풍양 조씨 희양공 휘신파 종중 대표와 한국전력공사(당시 박정기 사장)간 철탑 계약이 진행됐다. 이것만 놓고 보면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조맹연씨에 따르면 “계약 당시 종사를 돌보고 있던 70대 노인들은 산 너머에 철탑을 세운다는 것만 알았을 뿐 묘 바로 뒤에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높이 솟아오를 줄은 모르고 계약한 것 같다”며 “철탑의 정확한 위치와 높이 등 전문가가 아니고는 알 수 없는 취약점을 이용해 계약을 진행한 한전 측에 잘못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이어 “송전탑을 세울 때 영향평가서 작성을 비롯해 환경부 등 12개 행정기관의 심의 승인을 받은 후 진행해야 하는데 이런 절차 없이 당사자 계약으로 체결한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지방 문화재자료이지만 국가지정문화재와 같이 외곽 경계로부터 500m 이내의 지역에서 현상변경 행위를 할 수 없도록 규정돼 있는데 송전탑은 불과 80m 정도의 거리에 있다는 점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조신의 묘’가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것은 송전탑 계약일보다 한참 앞선 1984년 5월 17일이다. 이미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곳에 송전탑을 세운 것은 문화재 현상변경 허가 기준에도 적합하지 않을뿐더러 환경부 등 행정기관의 심의 승인 등의 과정 없이 진행된 것만으로도 문제의 소지가 크다. ◆ 석산 개발에 발목 잡혀 송전탑 이전을 위해 또 하나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으니 바로 석산 개발 문제다. 송전탑 이전이 확정된다고 해도 이전 장소로 거론되는 산에서 토석 채취가 이뤄지고 있어 난항을 겪고 있다. 석산 개발은 환경 문제로 많은 규제가 있는 사업이다. 환경보호 지역으로 규정된 곳은 개발 자체를 할 수 없으며, 주민들과도 원만한 합의가 돼야 한다. 과거에는 70~80%만 동의해도 개발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100% 동의를 구해야 사업을 시작할 수 있다. 현재 석산 개발이 이뤄지고 있는 곳은 문화재자료 제119호 및 305호로 지정된 조신의 묘와 덕림병사 뒤편이다. 송전철탑 이전 계획이 이뤄지게 되면 석산 개발 폐쇄 상태에서 한전과 충남도가 이전 부지로 보고 있는 곳이다. 석산 재개발 저지 투쟁위원회 위원장을 겸하고 있는 조맹연씨는 “풍양조가로 현재 충남 도의원인 조길연 당시 덕림 종무회장이 직위 및 직책 등을 이용해 조상의 문화재 가치를 손상시키고 있다”며 “풍양조가의 의견을 무시한 채 도의원이라는 신분을 남용하고 개인의 이익을 위해 석산 개발을 진행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해당 부지에 대한 석산 개발은 이미 약 20년 전에 취하된 적이 있었으나 지난 2020년 석산 개발 허가가 결정되면서 10년 임대를 주게 됐으며, 송전철탑 이전 계획에 또 한 번 차질을 빚게 됐다. 종중 재산은 거래 시에 문중총회를 거쳐만 진행할 수 있는 사항이지만 당시 문중 대표인 조길연 도의원이 독단적으로 진행한 부분, 해당 부지가 문화재 현상변경 행위를 할 수 없는 지역에 해당된다는 점 등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문화재는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것이자 정체성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다. 소유자가 누구인지를 떠나 지자체가 함께 관리하고 보존하는 데 힘써야 하는 것이 또한 문화재다. 송전철탑에 이어 석산 개발로 수난당하고 있는 충남도 문화재에 대한 지자체의 발 빠른 대응이 필요하다. 현재 조맹연 위원장을 필두로 풍양조씨 대종회는 점상리 산16801번지 밑 산730번지 조신의 묘(충남 문화재자료 제119호) 뒤편에 대한 석산 재개발 폐쇄 및 허가 철회를 위해 진정서를 제출한 상태다.

[단독❘사진으로 보는 역사] 1920년대 후반 서울 시가지 모습… 북악산 소나무 ‘굴곡진 한국史’ 대변

절벽 끝에 휘어진 소나무 인상적 끈질긴 생명력 한민족 상징하는 듯 소나무처럼 역경 이겨내길 기원하는 [천지일보=김현진 기자] 본지가 1920년대 후반 북악산에서 조선총독부 청사(중앙청 전신)를 중심으로 바라보이는 서울시가지 전경을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로부터 제공받아 단독 공개한다. 절벽 위에 굴곡진 소나무 뒤로 총독부 청사부터 태평로, 세종로 일대와 한양도성 안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또 멀리 용산구 일대와 한강, 그 너머까지 보인다. 이 사진은 정 기록연구가가 프랑스에서 구했다. 특이한 점은 절벽 낭떠러지 바로 위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란 소나무 한 그루의 모습을 촬영자가 포커스로 잡아서 그 뒤로 경성(서울) 중심지역의 모습을 카메라 앵글에 담았다. 일제는 1926년 경복궁 내에 그 일부를 헐고, 조선총독부 청사를 완공하면서 식민지 지배를 더욱 완고히 했다. 소나무는 굴곡진 한국사를 대변하듯 여기저기 구부러지고 휘어져 있다. 그러면서도 가지를 길게 뻗어 마치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다. 이러한 소나무의 모습과 바로 뒤에 보이는 조선총독부 청사,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서울 한강 중심일대가 사진 한 장에 담겼다. 소나무와 조선총독부 건물이 가장 또렷하게 보이는데, 그럼 이 둘을 같이 보여주고자 한 메시지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조선총독부 건물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은 당시 식민지배를 받는 조선인에 대한 고통과 안타까움을 표현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절벽 바로 위에 자라고 있는 굴곡진 소나무를 함께 보여준 것은 이런 모진 상황 속에서도 그래도 한민족이 꿋꿋이 이겨나가길 바라는 ‘희망’을 불어넣어주고자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지난 4월 6일부터 청와대와 경복궁 일대를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북악산 탐방로가 54년 만에 개방됐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특수 부대원이 침투한 일명 ‘김신조 사건’으로 인해 폐쇄됐던 북악산 탐방로다. 굳게 닫혔던 이곳 탐방로가 대통령 집무실의 용산 이전과 함께 54년 만에 개방됐다. 실제 북악산 탐방로를 통해 가본 결과 청와대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경복궁 일대가 약 100년 전 사진과 가장 흡사한 위치로 보인다. 현재는 많은 소나무들로 무성하고 굴곡진 소나무들도 여럿 보인다. 옛 사진에 등장한 실제 주인공 소나무가 어떤 것인지는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많은 굴곡진 소나무들이 조선총독부 청사가 헐리고 복원된 경복궁의 모습을 자랑스럽게 바라보며, 또 회복되고 많은 발전을 이룬 서울의 모습을 뿌듯하게 내다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나머지 사진은 경성일보 사옥(옛 서울시청사, 현 서울도서관)과 경성일보 별관(현 프레스센터)의 모습이다. 옛 서울시청사 터에 있는 경성일보 사옥 뒤로 광화문이 보이는데 조선총독부 청사가 없어 1910년대 찍은 사진이다. 경성일보 별관이 있는 사진에는 멀리 광화문 뒤로 조선총독부 청사가 보여 1926년 이후 찍은 사진임을 알 수 있다. 경성일보사는 초창기 경성부 대화정에 있다가 1914년 대한제국 경위원 터(현 서울도서관)로 옮겼다. 1923년 사옥이 화재로 절반 소실되자 신세계백화점 본점 터에 위치했던 경성부청(서울시청)을 이곳으로 옮기고 경성일보사는 지금의 프레스센터 터에 기존 건물을 철거한 후 1924년에 별관을 완공한다. 1926년은 일제가 식민지배에 있어 전환점이 되는 시기였다. 일제는 1910년 강제병합 후 1년 만인 1911년 조선총독부 청사를 계획했고, 1912년 경복궁을 개조해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을 본격화했다. 이 때문에 경복궁에서 흥례문과 주변 행각, 영제교 등이 철거됐다. 그리고 1926년 조선총독부 청사를 완공했다. 이 시기에 일제는 경성역(1925년, 현 서울역), 조선신궁(1925년, 남산 중턱에 세움), 경성부청(1926년, 현 서울시청) 등의 서울의 식민지 경관을 완성하는 핵심 건축물을 완공해 식민지배를 더욱 견고히 했던 것이다. 이같이 조선총독부 청사를 기준으로 경성부청, 경성역까지 연결되는 식민지 상징 건물들과 조선신궁이 있는 남산의 일부가 사진에 원경으로 담긴 것은 곧 일제강점기의 아픈 시절을 대변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 민족은 사진 속 소나무처럼 절벽 끝에 매달려 이리저리 휘어졌으나 절망하지 않고 끈질기게 잘 이겨내 지금의 대한민국을 이뤄냈다. 이 사진을 남긴 당시 외국인은 조선 곧 대한민국이 역경을 잘 이겨내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같은 구도로 사진 촬영한 것이 아닐까. 익명의 그가 남긴 사진에서 오늘날 우리는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읽게 된다.

[단독❘ 사진으로 보는 역사] 70여년전 서울 시가지는 어땠나, 6.25 수복 직후 항공사진 최초 공개

서울 경제 중심 ‘소공로’ 모습 곳곳에 전쟁 상흔 투성이 발견 분수대 중심 근대건축물 명소 한국銀·중앙우체국 건물 손실 [천지일보=김현진 기자] 1950년 발발한 6.25전쟁에서 서울이 함락된 이후 9월 28일 3개월 만에 되찾은 직후 촬영한 서울 중심 시가지 항공사진을 본지가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로부터 제공받아 최초 단독 공개한다. 분수대를 중심으로 유서 깊은 근대건축물이 있는 동화백화점(옛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점, 현 신세계백화점 본점 명품관), 조선저축은행 사옥(옛 제일은행 본점), 한국은행 본관(현 화폐박물관), 서울중앙우체국(옛 경성우편국, 현 서울포스트타워), 한국상업은행 본점(현 한국은행 소공로 별관) 등의 소공로 일대가 중점적으로 보인다. 그 뒤로는 서울시청, 서울시의회는 물론 광화문과 경복궁 내 중앙청(옛 조선총독부 청사)이 또렷하게 보이며, 청와대까지 보인다. 그 위로 멀리 왼쪽부터 안산, 인왕산, 북악산, 북한산, 도봉산까지 산줄기가 뻗어있는 모습도 볼 수 있는 서울 시가지 전경사진이다. 소공로 일대 아래쪽에는 곳곳에 전쟁 폭격으로 인해 건물들이 파괴돼 폐허가 된 곳들이 보인다. 한국은행과 서울중앙우체국도 전쟁 상흔의 흔적을 피해갈 순 없었다. 한국은행 본점을 자세히 보면 왼쪽 뒤 상단 지붕은 통째로 심하게 파괴됐고, 양쪽 원형 지붕들도 없을 정도로 나머지 지붕모두 손상됐다. 서울중앙우체국도 창문이 깨지고 외벽도 손상된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6.25 전쟁에서 서울은 3일 만에 함락됐고, 9월 15일 전세를 뒤집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까지 진격해 함락된 지 정확히 3개월 만인 9월 28일 되찾았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전세가 밀려 1.4 후퇴로 서울은 다시 점령당했고, 2월 11일 되찾게 된다. 공개된 사진들은 처음 수복했을 직후의 서울시가지 모습이라 두 번째 수복 시점보다 조금 더 원형보전이 된 상태이거나 건물 파괴가 덜 된 사진이라 할 수 있다. 백화점 주변이나 소공로 일대는 물론 시청 주변까지 도로에는 차가 별로 다니지 않으며,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직 전쟁 중이라는 분위기를 다소 실감케 한다. 이 사진은 정 기록사진연구가가 호주에서 입수했다. 호주는 당시 유엔군으로 참전한 국가며 전쟁이 발발한 후 점령당한 서울시를 처음으로 수복한 기념으로 서울 시가지를 중심으로 서울 전경이 보이는 항공사진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전쟁 통에 촬영이 쉽지 않았을 텐데 서울시가 수복되자마자 이같이 서울시가지 전체를 볼 수 있는 기록물을 남겼다는 점에서 귀중한 가치가 있다. 특히 분수대를 중심으로 유서 깊은 근대건축물이 있는 곳이자 당시 금융과 경제중심지였던 소공로에 유독 비중을 두고 촬영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사람과 자동차로 한창 붐벼야 할 ‘금융과 경제중심 거리’지만 사람과 자동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다는 점을 부각시킴으로써 전쟁으로 인한 서울의 경기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고자 한 것은 아닐까 싶다. 일제강점기에는 청계천을 중심으로 북촌과 남촌으로 구분했다. 당시 경성(서울)의 대표적 근대백화점이 5개가 있었는데 남촌에만 4개가 있었을 정도로 남촌은 서울의 경제핵심으로 최신식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던 명소였다. 북촌에는 종로에 유일한 조선계인 화신백화점이 있었고, 남촌에는 특히 소공로 일대에만 미츠코시 백화점(현 신세계 본점)과 서울중앙우체국 밑에 히라타(현 대연각 빌딩), 미나카이(현 밀리오레 명동) 백화점이 있어 일본인 밀집지역이었고 경제와 금융 중심지였다. 히라타 백화점은 사진에 보면 폭격을 받았는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무너졌다. 이곳 일대에 분수대를 중심으로 길 건너마다 한국은행, 한국상업은행, 서울중앙우체국, 동화백화점과 조선저축은행은 유서 깊은 근대건축물이 있던 곳이다. 이곳은 영화 ‘암살’에서도 등장했던 일대다. 서울중앙우체국만 전쟁 때 손실돼 다시 지었으나 지금은 아예 20층이 넘는 대형빌딩으로 바뀌었다. 미츠코시 백화점은 해방 후인 1945년 동화백화점으로 명칭이 변경됐고, 1963년 7월 삼성그룹이 인수하면서 신세계백화점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전쟁 때는 건물 중앙 상단에 ‘PX’라는 간판이 보이는데 전쟁 때 미군을 중심으로 군인마트로 이용되기도 했다. 사진에 보이는 한국은행 본관은 1907년 착공, 1912년 조선은행 본점으로 준공된 건축물이며 1950년 6월 12일 한국은행 본관이 됐다. 전쟁 때 내부가 거의 파괴됐고 1958년 내부만 복구됐다. 1987년 건물 뒤에 한국은행 신관(현 본관)이 준공되면서 원형복원 공사에 착수했고 2001년에는 화폐박물관으로 개관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한국상업은행은 외환위기 이전까지 국내 대표 시중은행을 상징하던 ‘조상제한서(조흥·상업·제일·한일·서울)’의 한 곳으로 금융계를 주름잡았던 은행이다. 1899년 설립된 대한천일은행이 1911년 조선상업은행으로 변경된 후 1950년 한국상업은행(우리은행 전신)이 됐다. 한국상업은행 본점이 있던 자리는 한국은행이 사들여 소공별관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매각으로 나왔다. 서울중앙우체국은 전쟁 때 파괴돼 1957년 3층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들어섰다. 1981년에는 다시 13층 대형건물로 지어졌다가 2007년 지금은 포스트타워가 됐다. 동화백화점 왼쪽으로 붙어 있는 건물은 조선저축은행 사옥(옛 제일은행 본점)으로 현재는 SC제일은행 제일지점으로 사용되다가 신세계가 사들여 제2의 명품관 활용 준비를 위해 내부공사 중이다. 조선저축은행은 조선식산은행(한국산업은행 전신)의 업무를 승계해 1929년 창립됐다. 조선식산은행은 1918년 대한제국 말기에 설립된 한성농공은행 등 농공은행 6새가 합병해 설립된 곳으로 조선총독부의 산업정책을 뒷받침했던 핵심 금융기관 중 하나였으며, 조선저축은행도 조선식산은행의 업무를 승계한 태생적 한계로 일본자금을 중심으로 운용됐다. 현재는 신세계백화점을 중심으로 번화가가 된 소공로 일대 서울시가 과거 72년 전의 모습과 비교하면 놀라운 발전을 이뤄 상당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천지일보-문화단독-강우방의 도자기 이야기] (31) 고려청자 상감 국화문(菊花文)들은 국화가 아니다

글, 사진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은 구석기 이래 300만년 동안 이뤄진 조형예술품의 문양을 독자 개발한 ‘채색분석법’으로 해독한 세계 최초의 학자다. 고구려 옛 무덤 벽화를 해독하기 시작해 지금은 세계의 문화를 새롭게 밝혀나가고 있다. 남다른 관찰력과 통찰력을 통해 풀어내는 독창적인 조형언어의 세계를 천지일보가 단독 연재한다. (도 1-1) 청자 상감 보주문 병, 높이 30.3㎝,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천지일보 2022.07.01 ⓒ천지일보 2022.07.01고려청자에 상감기법으로 표현된 국화문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과연 우리가 현실에서 보는 그런 국화일까. 이미 강조해온 것처럼 도자기에서는 현실에서 보는 꽃은 일절 없다고 주장하면서 철저히 증명해왔다. 그렇다면 이른바 고려청자에 보이는 갖가지 국화문은 국화가 아닐 것이다. 우선 고려 상감청자 병에 보이는 문양을 살펴보기로 한다(도 1-1). 병의 표면 중심부에 한눈에 국화 절지문이 보이지만 국화가 아니다. 실제로 현실에서 보는 많은 꽃들을 두루 관찰해보면 대부분 모두 국화 모양으로 중심의 씨방으로부터 사방으로 꽃잎들이 발산하는 듯한 모양새다. 그렇다면 필자가 좋아하는 개망초꽃이나 달맞이꽃도 그러면 국화라 불러야 하는가(도 1-1-1). 개망초를 보고 국화라 부르지 않지만 많은 꽃들이 그런 모양이니 모두 국화라고 부를 수 없다. 영화(靈化)된 세계에서는 중심의 둥근 부분을 보주라고 부르고 사방으로 뻗친 꽃잎들은 보주로부터 발산하는 기운이라 말한다. 보주 표현에는 그 안에 아무것도 없는 단순한 원일 수도 있고, 작은 보주들이 고려청자 병에서처럼 점을 서너 개를 넣을 수도 있다(도 3-2). 이 단계도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다시 말하면, 중심의 보주로부터 강력한 영기문들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데 바로 그 영기문을 형상화시킨 것이 꽃잎 모양이다. 이렇게 해서 성립된 것이 우리가 이른바 국화라고 잘못 알고 있는 꽃 모양이다. 기본적으로 모든 꽃은 이러한 형상을 띠는데 어찌 항상 국화꽃이라고만 부르는가. 고려청자에 표현된 국화라는 것은 일체가 국화가 아니고 보주를 나타내고 있다. 다시 문양의 전체 구성을 살리면 제1영기싹 파상문 모양이 위로 솟구치고 좌우로 보주가 연이어 생겨나고 맨 위에는 봉오리 즉 보주들이 맺히고 있다(도 1-2). 그런데 보주 밖으로 추상적 모양의 녹색 잎 같은 것들이 몇 점들 있는데 이것은 보주에서 다시금 발산하는 기운을 가리킨다. 마치 모란 모양 영화(靈花)와 같은 원리다. 그러므로 국화문도 영화라 불러야 하며 역시 구태여 국화 모양 영화라고 말할 이유가 없다. 영화라 부르고 눈으로는 그 여러 가지 모양을 보면 되지 그 영화의 무한한 변주인 갖가지 모양에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고 붙일 수도 없다. 말하자면 만병에서 솟구치는 무량한 보주로 이것은 만병으로부터 무량하게 솟구치는 ‘도자기→만병→보주’의 본질을 이처럼 표현한 것이어서 필자의 보편적 이론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 위에 영기문 띠가 있다. 연이은 제1영기싹 영기문이다. 맨 밑부분에도 영기문 띠가 있다. 이미 설명한 것처럼 맨 밑부분의 영기문 띠에서 고려청자가 화생하고 이 중간 부분의 영기문 띠에서 그 윗부분이 화생한다. 그 띠 위에 구름이 있는 천공에 선학이 날고 있다. 그런데 구름 모양은 구름이 아니라 영기문이다. 한 번 모두 그려 보세요. 즉 선학이 영기화생하는 역동적 광경이다. 지속적으로 영기화생하는 과정이며 우주의 광대한 광경을 표면에 나타냈다. 그다음 작고 납작한 고려청자합을 살펴보자(도 2-1). 상감기법이란 청자라는 바탕 위에 흑백의 흙으로 문양을 파내고 메꾸어 문양을 돋보이게 한 기법으로 잘 보이게 했어도 이 역시 채색분석을 해보아야 분명히 파악할 수 있다. 필자는 채색분석 해보아야 작품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역설해 왔다. 혹시 독자들 가운데 채색분석을 한 번이라도 시도해 보신 분이 계신가요. 아마도 많은 분이 실천하여 작품을 채색분석해 보셨다면 그런 분은 역사상 문양을 원리에 따라 읽어보신 몇 분 안 되는 명예를 차지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역사적으로 보아서 아직 작품을 한 점도 읽은 적이 없는 불행한 경우일 것이다. 프린트하여 펜으로 투명지를 대고 밑그림을 그린 다음에 시작점을 찾아서 눈으로 파악하기 쉽게 단계적으로 여러 색으로 칠해가면 된다(도 2-2). 중심의 큰 원 안에 마치 연꽃문양 비슷한 문양이 있다. 가장 중심의 작은 붉은 원이 시작점이다. 그리고 사방으로 꽃잎 같은 모양들이 뻗어나가고 있으며 각각 그 안에 작은 보주가 3개씩 있으나 개수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주변에 연이은 보주들로 이어진 둥근 띠가 있다. 마치 수막새 같다. 그 밖으로 학계에서 흔히 부르는 국화당초문이 둥글게 표현되어 있다. 이미 언급한 대로 당초문이란 용어는 쓰지 않는 것이 좋다. 당초문이란 문양은 원래 연이은 제1영기싹 영기문으로 만물생성의 근원을 이룬다. 그 끝마다 둥근 보주에서 기운이 발산하는 형상들이 있다. 보주 영기문이다. 초록색들 점 같은 것은 제1영기싹들의 과감한 변형들이다. 그 둘레에 역시 연이은 보주띠를 이룬 것을 돌리고 그 밖에 역시 파악하기 어려우나 보주문 영기문을 둥글게 돌렸다. 그러므로 잘 살펴보면 중심의 작은 보주로부터 점차적으로 확장해 가는 형세다. 그 다음에 비슷한 작고 납작한 합을 한 점 더 살펴보자. 그 뚜껑 윗면에 매우 정교한 갖가지 보주문이 상감으로 표현되어 있다. 매우 아름답다(도 3-1). 위에서 본 문양을 그려서 채색분석해 보면 이 문양이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 비로소 알 수 있다(도 3-2). 중심부에 연이은 보주 띠 안에 보주 안에 4개의 작은 보주가 표현되어 있는데 개수는 3개건 4개건 5개건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 수많은 보주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방으로 추상적인 잎 같은 모양이 있는데 이 역시 보주로부터 발산하는 기운을 나타내고 있다. 그 밖으로 연장해보면 큰 원형 보주가 그려지는데 이것이 무량보주를 나타낸다. 이 조형은 설명하려면 매우 길므로 훗날을 도모한다. 각각 그 안에 중심의 보주문과 똑같은 것을 배치했다. 그 사이에 작은 보주를 5개씩 배치했다. 그 모든 것을 다시 작은 보주문 띠로 둘렸으며 그 밖에는 연꽃잎 모양들에 역시 3개씩 작은 보주를 부여하여 마치 불상 대좌를 보는 듯하다. 중심으로부터 점점 확장하여 가는 갖가지 보주문의 전개를 보면 마치 이 전체가 압축된 보주의 세계를 웅변하는 듯하다. 놀라운 ‘보주 만다라’다! 그런데 이런 정교하고 복잡하며 아름다운 문양 표현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바로 상감기법 덕분이다. 사람들은 단순히 금속기에서 보이는 상감기법을 채용했다고만 말하고 끝이다. 그러나 이런 상감기법이 아니면 이런 복잡하고 정교한 문양이 돋보일 리 만무하므로 고려 장인들은 문양의 중요성을 통감하여 상감기법을 썼다고 말해야 한다. 상감기법은 금속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나전칠기에도 있으니 구태여 금속기 예를 들 필요가 없다. 그렇게 생각한 고려장인들의 끊임없는 노력에 감탄할 뿐이다. 고려청자의 상감기법은 고려 장인들이 문양의 중요성을 크게 자각하여 흑백의 상감기법으로 절대적으로 중요한 문양을 돋보이게 하려고 창안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단순히 금속의 상감기법을 빌려온 것이 아니다. 고려청자는 천하제일이라 중국에서 찬탄 받았으나 현금의 연구성과는 천하제일이 아니다. 이 연재는 고려청자가 왜 천하제일인지 증명해 가고 있다. 지금까지 30회에 이르고 있다. 고려청자는 기형뿐만 아니라 문양(=영기문)도 매우 다양하다. 게다가 문양을 더 뚜렷하게 나타내려고 창조력을 발휘하여 상감기법으로 세계 도자사에서 매우 중대한 국면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송나라가 한국의 고려청자를 모방하지 않은 것은 그 까닭을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하나는 그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했거나 다른 또 하나는 자기의 종주국이 변방인 고려의 새로운 창조를 모방할 수 없다는 자존심 때문일 것이다. 고려청자의 문양은 모두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영기문으로 맨 밑 부분에서 화생한 기형으로 만병이며 보주임을 이미 증명해 보였으며, 그렇게 해서 화생한 만병 표면에 가득 찬 영기문들은 모두 만병 안에 가득 찬, 영기문들이 만병으로부터 솟아나오는 광경을 분명하게 표현해주고 있는 상상을 넘어서는 고차원의 상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것을 찾아가고 있다.

[천지일보-문화단독-강우방의 도자기 이야기] (29) 조형예술에 표현된 모란 일체는 모란이 아니다

고려청자에 표현된 일체 모란은 모란이 아니라고 선언하면 모두가 당황할 것이다. 근대 문인화에서 모란을 그린 경우는 자연의 모란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 근현대의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모란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모란이 아니다. 고려청자뿐만 아니라 고려불화-조선불화-조선 궁중화-조선 청화백자-조선 건축-조선민화-민속품-복식 등에 폭 넓게 표현되어 있어서 모란이 아니라는 것을 결정적으로 충분히 증명해야 한다. 이미 거듭 강조해온 것처럼 조형예술품들에 문양으로서 표현한 작품들에는 현실에서 보는 것은 일체 없다. 앞서 고려청자 모란문 수막새를 분석하여 모란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지만 실은 고려 시대에는 모란문이라 부를만한 꽃조차 그리 없다. 그런데 모란문은 조선시대에 매우 많다. 특히 국립고궁박물관에 가면 조선시대 모란 병풍이 꽤 많이 남아있는데, 그 꽃을 보고 모란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부정하는 사람은 필자뿐일 것이다. 이미 궁중화를 연구하여온 교수들이 많은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 가운데 모란병풍을 다룬 논문들은 모두 모란으로 여기며 써왔기 때문에 반발이 있을 것이지만, 이제 더 이상의 오류의 축적을 막기 위하여 부득이 모란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갈 것이다. 필자는 민화를 연구하면서 민화에 표현된 모란은 모두 모란이 아니라는 것을 그 표현방법을 보고 알았다. 민화의 예는 매우 많으나 이 글에서는 생략하고 궁중 모란화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을 부정하며 올바른 꽃 이름을 밝히려는 필자의 여정은 10여년 간 매우 길고도 길다. 궁중화에서 보이는 모란꽃을 보면 우선 씨방을 자잘한 작은 점들이 피어오르는 모양으로 표현하고 있어서 자연의 모란과는 크게 달라서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우선 자연의 모란꽃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 즉 현실에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모란꽃잎 모양과 큰 씨방을 관찰해 둬야 한다(도 1-1, 1-2). 그런데 모란병풍에서는 또 잎들의 끝을 뒤집어서 즉 번엽으로 표현하며 빨간색으로 칠하기도 했다. 그리고 기암괴석에서 위로 길게 무수한 활짝 핀 꽃들이 무서운 기세로 그려져 있다. 모란은 나무이지만 길게 뻗어 오르지 않는다. 우선 이런 꽃들이 모란이 아니고 나의 영기화생론에 의해 영화(靈化)된 꽃, 영화(靈花)라 부르기로 한다. 국립고궁박물관에는 모란 병풍들이 많은데 이것들은 어디에 쓰였던 것일까. 필자는 오래전부터 이런 모란은 모란이 아니리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증명할만한 자료들을 갖추지 못하여 주저해왔다. 이제 비로소 완벽히 밝힐 수 있는 작품들을 확보해 놓았기 때문에 펜을 들기로 했다. 만일 병풍에서 충분히 증명된다면 고려시대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의 모란 문제가 풀려질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국왕이 붕어하면 장례 절차가 엄격한 예식을 갖추어 진행되었는데, 시신을 모신 관을 임시로 봉안했던 장소와 능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머무는 곳마다 관의 주변에 반드시 모란병풍을 설치했다. 신주를 모시는 곳에서도 병풍을 둘렸으며 신주를 모실 때 교의 뒤에 오봉병을 두고 그 뒤에 모란병풍을 두었다. 장례의 처음부터 끝까지 시신이 머무는 장소마다 설치했다. 정조의 국장의 경우는 무려 모란병풍 19좌를 사용했다고 한다(「조선후가 국장용 모란병의 사용과 그 의미」, 『고궁문화』 창간호, 이종숙, 2007). 저자는 국장에 사용된 모란병은 고인의 육신과 영혼이 머물러 계신 장소를 일상의 공간과 구분하고 그 공간을 조상신으로의 재탄생을 예비하는 신성하고 상서로운 공간으로 승화시키는 상징적 기능을 했던 의물로 판단된다(p. 87).고 말했다. 여기까지 정답 가까이 이르렀으나 모란이라는 이름의 큰 장애물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즉 정조의 장례절차를 꼼꼼하게 다루면서 저자는 6개월에 걸쳐 관을 조금도 떠나지 않고 하관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한 몸인 듯 따라다니는 것이 모란 병풍인 것을 보고 그 병풍이 둘려진 곳을 일상과 다른 성스런 공간임을 느꼈다. 그러나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을 그려 넣은 화려한 병풍이 그런 엄숙한 분위기에 조금도 걸맞지 않는 점에 무척 당황했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어느 누구도 모란이 아니라고 주장한 학자가 없었음에랴.필자는 항상 정답은 작품 자체에 있다고 주장하며 기록을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고 역설해 왔다. 궁중 기록이나 많은 교수들의 논문에서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모란이라고 부르고 있어서 모두가 그대로 따르지만 장례 절차에서 어울리지 않는 모란 병풍이라는 점조차 느끼지 않았단 말인가. 우선 모란 병풍에 그려진 모란의 표현방법을 살펴보고자 한다(도 2). 몇몇 활짝 핀 모란꽃과 피기 전의 봉오리와 모란꽃의 뒷면 등이 한 화폭에 모두 표현되어 있으므로 모란의 전모를 살펴볼 수 있다. 병풍을 한눈에 보면 시각적으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몇 가지를 취하여 그려보면 모란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알 수 있다. 먼저 위에서 본 꽃을 살펴보기로 한다(도 2-1). 꽃의 성격을 파악하려면 그려보아야 알 수 있다. 꽃잎을 붕긋붕긋하게 표한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는 고구려 벽화를 연구하면서 안 것인데 그 과정은 매우 길므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다만 조형을 영화시키는 하나의 방법이란 것을 기억해 두자. 붕긋붕긋한 부분에는 모두 제1영기싹이나 보주가 내재하여 있다. 그러므로 자연의 모란꽃과는 거리가 멀다. 특히 꽃 중심에 작은 점들로 씨앗을 표현했는데 중앙의 것이 좀 커서 필자가 발견한 보주의 무한 확산을 가리킨다. 꽃잎은 물론 씨방의 표현도 실제 모란꽃과 전혀 다르다(도 2-2). 평생 그림이라곤 한 점도 안 그린 분들이 허다할 것이다. 특히 미술사학자들은 그림을 자주 그려야 한다. 그려 봐야 위에서 말한 조형적 특성을 굳게 체험할 수 있다. 그 다음 모란을 살펴보자(도 3-1). 앞의 꽃과 같은 윤곽선을 가지고 있으며 색만 다를 뿐이다. 모란병에서는 두 폭만 다를 뿐 나머지 폭에서는 두 폭을 반복하고 있다. 역시 중심에 작은 점들로 씨앗이 사방으로 피어오르는 듯 표현했다. 꽃잎들도 영화세계에서 흔히 표현하는 붕긋붕긋한 표현 방법이다(도 3-2). 다음은 아직 활짝 피지 않은 봉오리에서 막 피어나려는 상태의 꽃으로 받침이 세 갈래로 풍성하게 나타냈다(도 4-1). 이것도 그려보면 붕긋붕긋한 꽃잎에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꽃받침이다(도 4-2). 다음 역시 활짝 핀 모양이지만 앞서서 본 활짝 핀 꽃과 다른 모습이다(5-1). 붕긋붕긋한 꽃잎들이며 중심의 씨방은 붕긋한 형태로 자연에서는 볼 수 없는 조형이다. 거기에 긴 제1영기싹이 솟아오르고 있다. 그리고 작은 점들로 역시 씨앗들을 나타냈다(도 5-2). 위의 활짝 핀 꽃을 뒤에서 본 모양도 있다. 꽃받침이라 할 부분이 매우 크게 나타냈으되 역시 자연에서는 볼 수 없는 모양이다(도 6-1, 6-2). 이처럼 모란 병풍에 그려진 모란은 모란이 아니다. 조금도 닮은 점이 없다. 다만 잎들이 풍성하다는 인상 이외에는 비슷한 점이 하나도 없다. 이제 우리는 조선 청화백자에서 같은 속성을 지닌 영화靈花를 찾아볼 수 있다. 모란병풍에 보이는 특성을 더욱 강조하여 문양화했다. 갖가지 영화들에게 하나하나 이름을 붙일 수 없어 그저 포괄적으로 영화라고 부를 것이다. 조선 청화 백자들에는 엄청나게 많은 영화가 표현되어 있으나 모두 모란이라 부르고 있다(도 7). 얼마 전에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안녕 모란전을 기획하여 모란과 관련된 그림-금속기-민속품-도자기 등을 전시한 적이 있다. 특히 조선 청화백자들에는 모두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영화들인데 모란이라고 부르니 안타깝다. 나는 앉아서 촬영하다가 벌떡 일어나 관람객들에게 이 모든 꽃은 모란이 아닙니다라고 소리쳤으나 아무도 응해주지 않았다. 그들은 설명판을 들여다보면서 모란이라 써있네요하고는 지나갔다. 조형예술품의 문양의 세계에서는 현실에서 보는 꽃은 하나도 없다. 이 낯선 갖가지 영화(靈花)들은 장인들의 창조물로 만물생성의 근원인 영화는 만물을 영기화생시킨다고 말할 수 있으므로, 모란병풍이 아닌 영화 병풍은 사자(死者)를 회생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어서 사자(死者)와 늘 함께 있는 것이다.

[단독] 한평생 고달픈 여성의 삶의 시작 ‘민며느리’를 아시나요… 美종군기자 컬러사진

미국 종군기자가 6.25전쟁 휴전 직후인 1954년 농촌 타작마당의 모습을 촬영한 컬러사진을 본지가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로부터 입수해 단독 공개한다. 미 종군기자는 전쟁 이후 우리나라의 경제와 생활상을 알 수 있는 모습을 컬러사진으로 촬영해 남겼다. 그 덕분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옛 과거를 향유할 수 있는 선물이 됐다. 보릿고개를 겪은 어른 세대들에게는 향수를 주고 젊은 세대와 함께 과거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사진들이다. 더구나 당시 컬러필름은 상당히 귀하던 때며 1950년대에 컬러사진으로 남긴 사진들은 극히 드물었던 시대라 희소가치가 있는 사진이다. 미 종군기자는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인천항을 통해 입국해 전쟁터를 오가며 수만장의 사진을 촬영했고, 휴전으로 전쟁이 끝나자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 경기도 일대를 다니며 촬영했다. 본지는 앞서 종군기자가 수원과 인천, 경기도 일대에서 찍은 컬러사진을 공개한 바 있다. 우선 종군기자가 촬영한 사진은 농촌 타작마당 모습으로 한쪽에는 지게가 놓여 있고 마당에는 볏짚이 깔린 채 성인 여성과 어린 소녀, 2명이 타작을 하고 있다. 담벼락에는 볏짚을 묶어 걸어놨으며 왼쪽에는 요강도 보인다. 눈여겨 볼 것은 어린 소녀의 모습이다. 딱 봐도 왜소한 체구인데, 몸집만 보면 이제 갓 10대가 됐을 법한 나이로 추정된다. 특이한 점은 머리에 쪽을 지고 있다는 것. 이는 남들에게 시집간 여성임을 알려주기 위한 표시였으며 시댁에서 시어머니와 어린아이 같은 며느리가 타작하고 있는 모습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얼핏 보면 모녀 관계임을 우선적으로 추측할 수 있겠으나, 머리에 쪽을 지고 있기 때문에 몸집이 작고 가녀린 꼬마 여성이 며느리의 입장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은 당시 우리나라 고유 풍습인 민며느리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나오게 된 풍경이다. 민며느리 제도는 장래 성인이 되면 아들과 혼인시키기 위해 어릴 적부터 우선 데려와서 기르는 여자아이를 일컫는다. 주로 빈민층에서 경제적인 이유에서 이뤄진 결혼 풍습이다. 당시 대가족이 대부분이라 처가에서는 식솔 하나라도 빨리 줄여 경제적 부담을 덜기 위한 이유였고, 시댁에서는 대신 먹여주고 재워주고 키워주면서 오로지 일을 시키기 위함이었다. 소 한 마리 사는 것보다 민며느리 하나 데려오는 것이 낫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밭을 갈거나 일을 하는 소 대신 여성이 그 일꾼의 입장으로 팔려 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예부터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이 강했던 우리나라 역사에서 민며느리 제도는 여성에게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선택권이 없는 존재로 평생을 살아가게 했음을 엿볼 수 있다. 사랑하는 남자를 직접 선택할 수도 없을뿐더러 남녀 간 사랑을 느낄 여유조차 없이 한평생을 소처럼 일만 하며 애기를 낳는 존재로만 살아야 했던 것이 민며느리 여성이었다. 어린나이에 뛰놀고 또 공부하며 보내야 할 학창시절을 소처럼 일만 하며 즐거움이나 행복한 추억거리조차 없이 평생을 살아야 했던 여성의 심정, 이를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불만 없이 묵묵히 살아야 했던 여성들의 고달픈 삶과 애환을 사진을 통해 느낄 수가 있다. 절구질을 하고 있는 모습의 또 다른 사진 역시 고통스런 민며느리 풍속을 알 수 있다. 사진은 1890년에 외국인 선교사가 찍은 것으로 유리원판 필름에 색을 덧칠한 채색컬러의 사진이다. 오른쪽 소녀 역시 머리에 쪽을 지고 있어 시집간 여성임을 알 수 있다. 맨발로 자신의 몸집보다 더 긴 절구공을 잡고 절구질을 하고 있다. 100년 훨씬 이전에도 우리 조상들이 당연하게 살아왔던 풍속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사진은 1910~1920년대에 외국인 선교사가 찍은 것으로 역시 유리원판에 색을 입힌 채색컬러 사진이다. 이번엔 어린아이 남성의 모습으로 나뭇가지나 볏짚 등을 잔뜩 싣고 지게를 지고 있는 모습이다. 발은 맨발이다. 선교사가 카메라로 찍는 순간 잠시 멈추고 포즈를 잡아 보고 있다. 어릴 적부터 여성이나 남성은 고된 일을 해야 했던 것이 지금으로부터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우리네 보통 서민들의 삶이었다. 한편 당시 미국 종군기자들은 8명이 인천상륙작전으로 열린 바닷길을 통해 입국했는데 이들은 전쟁과 피난민들의 참혹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특히 당시에는 컬러 사진이 귀했기 때문에 이들은 중요한 순간에만 컬러로 찍었다. 이들이 가장 많이 컬러에 담았던 사진은 휴전회담이 시작되면서 군사분계선에서 남북이 조금이라도 땅을 더 차지하기 위해 심리전을 펼치는 장면들이었다. 표정을 더 생동감 있게 담는 데에 컬러사진을 사용했다.

[천지일보-문화단독-강우방의 도자기 이야기] (28) 모란은 모란이 아니고 자연의 꽃을 영화시킨 영화(靈花)

제28회 글은 도자기에 표현된 모란꽃이 모란꽃이 아님을 증명하는 글이다. 아마도 세계 최초로 주장하며 그러함을 증명하는 최초의 글이다. 우리나라 용면와(龍面瓦)가 귀면와(鬼面瓦)가 아니듯이 모란 모양 영화(靈花)는 모란꽃이 아니다. 고려청자에는 그런 영화된 꽃의 문양은 그리 많지 않다. 꽃잎들이 많으면서 붕긋붕긋한 꽃이면 애매한 모양의 꽃이라도 무조건 모란꽃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자연의 모란꽃과는 매우 다르다. 4월은 모란의 계절이다. 그 풍성한 꽃잎을 매일 바라보며 그 변화상에 놀라면서 행복해하고 있으나, 동네 사람들은 시선 한번 주지 않는다. 본다고 해도 힐끗 볼뿐이다. 필자는 사람들도 관찰하고 심리를 분석하고 있다.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서 그에 맞추어 글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아파트 문을 나서자마자 그대로 아끼는 자가용으로 직진하여 간다. 운전하면서는 생각을 깊이 할 수도 없다. 그래서 한가하게 꽃을 열심히 볼 여유가 없으며 의무감은 더더욱 없다. 4월 한 달 동안은 모란꽃이 황홀하게 피어 가는데 실은 한 해 내내 관찰해야 한다. 그러면 우선 자연의 모란꽃을 세밀하게 관찰해 보기로 하자(도 1-1). 이 글에서는 활짝 핀 상태 한 장면만을 보여드릴 수밖에 없다. 봄에 피는 모란꽃과 조형예술품에 표현된 모란꽃은 전혀 다르다. 자연의 모란꽃은 중심의 씨방을 보호는 장치가 여러 겹이다. 그 가운데 겹겹이 넓은 꽃잎들이 씨방을 보호하고 있다가 처연하게 떨어진다. 그러면 시인들은 덧없는 세월이라고 탄식한다. 그러나 필자에게는 강력한 보호막을 걷어차며 독립하여 따가운 햇빛과 눈보라를 이겨내며 점점 더 무르익어가는 씨방을 보면서 그것이 자구 상에 생명이 지속하게끔 하는 보주임을 경이로운 눈빛으로 바라본다(도 1-2). 그러면 고려청자 가운데 모란꽃문양을 상감으로 표현한 것을 자연의 모란꽃과 비교해 가면서 살펴보자(2-1). 고려청자 모란문 호가 정식 명칭이다. 높이 20.1센티미터에 입지름은 20,7센티, 몸체 폭이 34,5센티인 국보 제98호인 이 작품은 고려청자의 대표작들 가운데 하나다. 항아리들 가운데 이렇게 높이보다 폭이 넓은 예는 흔하지 않다. 그 항아리에 큰 꽃이 상감기법으로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상감기법으로 표현해서 문양을 뚜렷하게 표현하고 있다. 흔히 고려 초의 고려청자들에서 보는 바와 같이 문양을 음각이나 양각으로 나타내면 잘 보이지 않는다. 고심 끝에 청자의 주체인 문양을 뚜렷하게 보이고자 고려 장인들은 금속기의 상감기법을 차용한 것이라 생각한 학자는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보일 듯 말 듯한 문양을 상감기법으로 나타내니 얼마나 뚜렷하게 보이는가. 청자에서 문양이 주체라는 것을 장인들은 알고 있었기에 상감기법을 채용했다고 생각한다. 항아리 표면에 나타냈지만 실은 항아리라는 만병에서 솟구쳐 나오는 영화다. 세계 도자사에서 최초로 새로운 시각으로 상감기법의 의도를 밝힌 학자는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필자는 세계 도자사 연구자다. 기회 있으면 학회에서 발표하려 한다. 비록 흑백상감으로 명료하게 나타내고 있으나 역시 채색분석 해보아야 분명히 알아볼 수 있다(도 2-2). 꽃잎들은 가능하면 모란꽃과 비슷하게 보이게 하려고 빨갛게 칠했고 중심에 보이지 않는 씨방을 보호는 듯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부분은 씨방 자리여서 실제 모란꽃의 수술이 노란 까닭에 역시 노랗게 칠했다. 그리고 잎은 줄기에서도 생기지만 꽃 둘레에서도 보인다. 실제에서도 모란꽃 주변에 잎들이 많지만 고려청자인 경우엔 꽃에서 발산하는, 즉 씨방, 더 나아가 씨방 안의 씨앗들을 영화시킨 보주에서 강력하게 발산하는 잎 모양 영기문이다. 그리고 잎들도 실제처럼 모두 연두색으로 칠했다. 이렇게 실제 모란꽃처럼 채색해도 청자의 꽃과 판이하게 다르지 않은가. 세계의 문양을 세계 최초로 심도 있게 연구하며 인류가 창조한 조형예술품들 일체를 모두 해독해 나가는 필자는, 이 꽃은 현실에서 볼 수 있는 그런 모란꽃이 아니라 장인들이 창조한 만물생성의 근원인 영화(靈花)임을 밝혀나가고 있다. 다시 소리 높이어 말하거니와 인류의 조형예술품들에는 현실에서 보는 것과 같은 것은 일체 없다. 비록 똑같이 보여도 전체적으로 보면 어딘가에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암시하는 바가 있다. 여러분이 직접 비교해 보시기 바란다. 그 조형적 특징은 영화시키는 방법인데 여러분들이 직접 그려보면서 찾아보기 바란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서로 비슷해도 전혀 다르다. 즉 차원이 다르다. 도자기에 표현된 일체의 문양은 도자기가 만병이고 보주이게끔 하는 위대한 조형이다. 지난 1년 동안 그것을 증명해오지 않았는가. 반드시 기억해 내시기 바란다. 글을 쓸 때마다 반복하여 설명할 수는 없다. 고려청자에서 실제에 가까운 모란 모양은 그릇이 아니라 청저로 만든 기와에서 만나볼 수 있다. 「고려사』에 고려 의종 11(1151)년에 양이정(養怡亭)을 짓고 지붕에 청기와를 얹었다는 기록이 있다. 문자기록에서는 역사적 사건에 관한 한 참고할 수 있는 것이 더러 있으나, 조형예술품의 상징에 관한 한은 100% 의지해서는 안 된다. 모든 혼란은 문자기록에 의지해왔기에 일어난 큰 재앙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고려 청자기와 한 세트를 볼 수 있다(도 3-1). 암수막새와 암막새를 모두 갖추고 있어서 중앙에 수막새와 양쪽에 암막새를 배치했다. 필자는 기와 역시 전공으로 삼아 기와 연구를 개척하여오고 있다. 10여년 전에 기와 연구로 특화된 일본 데쯔카야마대학(帝塚山大學)에 전화하여 자비로 가서 기와 전반에 대한 것을 강연하기를 자청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전혀 새로운 내용이라 역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일본이 고치면 한국도 따라서 변하리라는 염원을 가지고 강연했으나 필자의 간절한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면 고려 청자기와의 문양을 분석해 보자. 학계에서는 수막새의 돋을새김 청자의 문양을 모란꽃이라 부른다. 그리고 암막새 기와의 문양은 당초문이라 부른다. 모란꽃이라든가 당초문 혹은 덩굴문은 학계에서 추방해야 할 용어들이다. 우리의 올바른 연구를 가로막는 큰 장애물이다. 그러니 문양이 어떻게 전개하여 가는지 무엇을 상징하는지 모르므로 보기는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우선 암막새 문양은 초록색으로 칠한 부분을 중심으로 필자의 영기문의 전개 원리에 따르는 연이은 제1영기싹을 녹색으로 칠하고 그 외의 작은 부분들은 연두색과 노란색으로 칠해서 다양한 모양의 영기싹임이 잘 보이도록 했다. 즉 중앙의 수막새의 모란꽃 모양 영화(靈花)에서 양쪽으로 발산하는 강력한 영기문이다(도 3-2).만일 그렇다면 수막새의 문양은 용의 얼굴이나 연꽃으로 대체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모란꽃 모양 영화(靈花)가 있으므로 스스로 증명되지 않는가. 용의 얼굴이나 연꽃처럼 바로 만물생성의 근원인 영화(靈花)다.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의 수막새 문양은 대개 연꽃이나 용의 얼굴에서도 모두 보주들이 발산하여 나오므로 용과 연꽃은 같은 상징임을 가리키는 것임을 이미 필자의 저서들에서 밝힌 바다, 만일 수막새의 문양이 그리도 중요하다면 자연의 모란을 새길 리 만무하다. 불화에서는 갖가지 영화가 주존 주변에 배치되어 주존을 화생시키는 형국이다. 참으로 장엄한 장면이다.불화에 보이는 모란도 모란이 아니다. 현실에서 본 적이 없으므로 보이지 않으며, 현실에서 본 비슷한 꽃을 가져다가 설명하므로 모든 용어와 설명이 올바를 수 없으며 오류만 드높이 쌓일 뿐이다. 영화로부터 양쪽으로 영기문이 발산한다는 것을 이해하려면 통일신라시대의 추녀마루기와에서 보다시피 용의 입에서 양쪽으로 뻗어나가는 연이은 제1영기싹이나 제2영기싹이나 제3영기싹영기문들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영화(靈花)는 용과 연꽃과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암막새와 수막새의 상관관계와 같음을 알면 고려청자 기와를 더욱 분명히 파악할 수 있다(도 4). 필자가 정립한 영기화생론에 의하면, 필자가 그 개념을 정리한 것처럼 영수(靈獸)와 영조(靈鳥)와 영화(靈花)들은 모두 무량보주를 상징한다. 그래서 모란꽃 모양 영화(靈花)에서 발산하는 형상을 간략화하면 보주에서 양쪽으로 발산하는 연이은 제1영기싹으로 귀결한다(도 3-3). 영화(靈花)라는 용어를 쓸 때마다 한자를 계속 쓰는 까닭은 낯선 새로운 용어이기에 익숙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천지일보-문화단독] 원 청화․청대 최고급 법랑자기 찾아

한국 유일의 도자기 과학감정 업체인 고베과학감정원(원장 정세운)이 최근 1급의 중국 고(古) 도자기 3점을 찾았다. 비파괴 X-레이 첨단기기로 찾은 이들 도자기는 중국에서도 귀한 유물인 청건륭년제겹사법랑기룡수자문양이병(淸乾隆年製掐絲琺琅夔龍壽字紋兩耳甁)과 원청화백화정도양수대관(元靑花百花亭圖兩獸大罐), 원청화삼고모려도대관(元靑花三顧茅廬圖大罐) 등 모두 3점이다. 이로써 지난 3월 2점의 진품 원대(元代) 자기인 홍록채호형병(紅綠彩弧形甁)과 청화삼영웅전여포대관(靑花三英戰呂布圖大罐)에 이어 다시 진품을 찾은 것으로 한국에도 수장가들이 가지고 있는 중국 고 도자기 가운데 1급 자기가 다수 있는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번에 진품으로 검증된 청건륭연제법랑자기는 금과 은으로 기룡문(夔龍紋)과 수자문(壽字紋), 초엽문(蕉葉紋) 연화문(蓮花紋), 회문(回紋) 등을 화려하게 새기고 청색의 마노석(瑪瑙石)으로 장식한 황실도자기다. 감정을 의뢰한 소장자는 건륭연제법랑자기는 인도네시아 황실에서 비장해 오던 유물로 30년 전에 구매한 것이라고 밝혔다. 크기는 높이 39㎝ 입지름 8.5㎝, 굽지름 13.5㎝다. 또한 두 점의 원대 청화자기도 1급 유물로 판단되고 있다. 백화정도대관은 높이 38㎝, 입지름 16㎝, 굽지름 18.5㎝이며, 삼모고려도 대관은 높이 29㎝, 입지름 21㎝, 굽지름 21㎝다. 이를 육안감정한 이재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전 충북도 문화재 위원)은 건륭연제법랑자기는 고대 문양을 의장화해 묘금(描金.銀)으로 정교하게 번조한 관요 황실도자기라고 말했다. 이어 두 점의 원대 자기도 기형과 소마리청의 발색, 시대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활달한 화풍과 훈산현상, 철수반, 굽의 구태 등에서도 원대 자기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고 설명했다. 과학감정원 정세운 원장은 육안감정을 거친 세 점을 x-레이 비파괴 검사한 결과 현대 물질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며 원대 진품 자기의 성분과 청 건륭연제의 궁중법랑자기의 성분이 일치한다고 말했다. 또한 정 원장은 그동안 한국에는 진품 중국 고(古) 도자기가 없다는 것이 정설처럼 전해졌으나 최근 중국 신문의 보도처럼 실지는 좋은 도자기가 민간에 많이 소장돼 있을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한편 고베과학감정원의 x-레이 비파괴 분석 감정 방식은 현재 중국의 유명 박물관, 대학, 일급 경매사 등에서 채택하고 있으며 감정가의 육안감정에 의존하는 경우가 줄어들고 있다.

[단독] 전쟁 직후 美종군기자 촬영… ‘버스 안내양’은 극한직업, 최대한 태우고 밖에 매달려

6.25전쟁 휴전 직후 1954년 우리나라의 경제와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컬러사진 2점을 단독 공개한다. 이 사진은 미국 종군기자가 촬영한 것으로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로부터 본지가 입수했다. 미 종군기자는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인천항을 통해 입국해 전쟁터를 오가며 수만장의 사진을 촬영했고, 휴전으로 전쟁이 끝나자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 경기도 일대를 다니며 촬영했다. 특히 당시 컬러필름은 상당히 귀하던 때며 1950년대에 컬러사진으로 남긴 사진들은 극히 드물었던 시대라 희소가치가 있는 사진이다. 본지는 앞서 종군기자가 수원과 인천에서 찍은 컬러사진을 공개한 바 있다. 이번에도 보릿고개를 겪은 어른 세대들에게 향수를 자극할 사진이다. 시내버스가 비포장도로로 된 시골길을 달리고 있는 모습인데, 안에는 사람이 꽉 찼고 안내양이 문밖에 매달린 채 움직이는 만원(滿員) 버스다. 정류장에서 막 출발한 버스의 모습을 종군기자가 렌즈에 담은 것이다. 미군이 남기고 간 차량을 개조해 만든 버스로 차량정면에는 대한이라는 글자와 별4개 마크가 있다. 앞쪽에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이며 운전석 바로 옆까지 승객이 탔을 정도로 정원(定員)이 훨씬 초과된 상태로 버스가 달리고 있는 것이다. 당시에는 물론 정원 개념이 없었을 테고 버스도 배차가 많지 않았던 시대라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타려 했을 것이다. 안내양은 사람들을 몸으로 밀착시키며 최대한 안으로 밀어 넣고, 출입문 계단에 발을 올려놓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힘껏 창문을 붙잡고 있다. 한쪽 어깨에 메고 있는 건 버스표를 받아 넣는 지갑이다. 딱 봐도 위험천만한 모습이지만 당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이었다. 안내양은 대부분 여학생들이 학비를 벌기 위해 일했던 직업 명칭이었다. 여학생들이 많이 하다 보니 안내하는 사람의 호칭을 의미하는 안내양이 된 것이다. 안내양은 1961년 교통부가 여차장제를 본격 도입하면서 전국 어디서든 볼 수 있었고, 1980년대까지도 우리가 흔히 볼 수 있었던 버스 풍경이었다. 1990년대 이후 사라져 지금은 볼 순 없으나 1970~80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도 등장해 다소 익숙할 수 있다. 안내양이 사람을 다 태운 후 버스에 올라타며 옆 차체를 손으로 탕탕 치면서 오라이라고 외치는 모습은 이제는 추억이 됐다. 사진은 안내양이 본격 도입되기 전 모습으로 유니폼도 갖춰 입지 않던 시절이다. 안내양이 차밖에 매달려서 가는 모습만 봐도 이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생계를 위해 일해야 했던 당시의 고초가 어떠했는지 느껴진다. 1960~70년대에도 간혹 만원버스에 매달려 가는 안내양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종군기자가 사진을 남긴 이때는 전쟁 직후라 대중교통 수단이 버스 외에는 거의 없었던 데다가 버스차량도 크지 않다 보니 웬만하면 안내양은 매번 만원버스에서 일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더구나 도로상태도 좋지 않았다. 따라서 가장 극한의 직업 중 하나였던 셈이다. 또한 이들은 최대한 사람들을 많이 태우기 위해 자신의 몸을 밀착시켜 억지로 밀어 넣는 일도 다반사였다. 여성으로서 수치심을 느낄 겨를도 없이 보릿고개를 견뎌야 했던 일상이었다. 정원 이상을 태우고 차에 매달려 가는 모습이나 안내양이 온몸으로 승객들을 밀어 넣는 모습은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당시 모습조차 종군기자에는 생소한 풍경이었기에 사진에 담은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힘든 일을 해왔던 안내양은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누군가에겐 어머니나 할머니들이 겪었던 모습이다. 또 한 장의 사진은 시내 거리 풍경이다. 거리 도로가 포장이 돼 있지 않아 차가 지나간 자리는 바퀴자국이 선명하고 마치 진흙처럼 퍼져 있다. 사진관을 의미하는 예술사장 간판과 미장원이라고 써져 있는 간판이 보인다. 오른쪽은 버스정류장으로, 사람들이 버스에 줄지어 올라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버스의 뒷모습은 앞에서 본 사진과 같은 버스 차량이다. 버스 뒤에는 트렁크 역할을 하는 짐칸이 임시로 만들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번 사진 역시 기성세대에게는 공감과 향수를 느끼게 하고 젊은 세대에게는 생소한 옛날의 우리나라 생활상을 알게 해 준다. 이방인 종군기자가 사진 기록물로 남겨준 덕분에 우리가 힘들게 살아왔던 과거를 돌아보게 해주는 선물 같은 사진인 셈이다. 한편 당시 미국 종군기자들은 8명이 인천상륙작전으로 열린 바닷길을 통해 입국했는데 이들은 전쟁과 피난민들의 참혹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특히 당시에는 컬러 사진이 귀했기 때문에 이들은 중요한 순간에만 컬러로 찍었다. 이들이 가장 많이 컬러에 담았던 사진은 휴전회담이 시작되면서 군사분계선에서 남북이 조금이라도 땅을 더 차지하기 위해 심리전을 펼치는 장면들이었다. 표정을 더 생동감 있게 담는 데에 컬러사진을 사용했다.

[천지일보-문화단독-강우방의 도자기 이야기] (27) 영수(靈獸)로 이루어진 세계적 명품 정병(淨甁)

글, 사진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고려청자들 중에 용을 비롯하여 봉황이나 기린이나 어룡(魚龍) 등 영화된 동물들인 영수(靈獸) 모양으로 전체를 병이나 항아리로 만들거나, 봉황을 비롯하여 원앙새 등 영조(靈鳥)들의몸 전체로 고려청자를 만든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들이 많다. 이미 고려청자들의 문양이나 형태들은 현실에서 보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언명한 바 있다.비록 현실에서 본 것과 똑같다고 해도 어느 구석에 영화된 조형들이 있어서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아마도 도자기 전공자들은 이 말에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용은 동양의 신 가운데 최고의 신이어서 현실에서 볼 수 없음을 모두 알고 있지만 원앙새는 현실의 것과 똑같다. 그러나 그 받침 부분을 보면 연꽃의 씨방 위에 앉아 있어서 범상한 존재가 아니다(도 1). 즉 연꽃의 씨방 위에는 여래나 보살이나 용 같은 절대적 존재들만이 앉아 있을 수 있다. 즉여래나 용이 씨방 안의 씨앗이 영화된 보주들에서 화생하는 보주화생의 광경을 보여주고 있다. 여러분들은 보주화생이란 말을 처음 들을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여래나 보살이 연꽃 위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연꽃의 반구형의 평평한 위에서 보이는 씨앗들 위에 앉아 있는데, 이 때 씨앗들은 보주로 승화하여 보주에서 화생하는 광경임을 필자가 처음으로 밝힌 바 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연꽃은 연꽃이 아니라고 말하면 아마도 불교종단에서 항의할지도 모른다. 연꽃에서 꽃잎은 모양이 아름답고 색도 아름답지만 꽃잎은 허상이어서 얼마 가지 않아 시들어서 썩어 없어지지만, 반구형 혹은 원추형의 씨방 안의 씨앗들은 이듬해에 다시 싹을 틔워 꽃피며 생명을 영원히 이어가서 다른 꽃의 씨앗들과 함께 지구상에 생명을 영원히 이어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간단히 정리해 보고 앞으로 나아가자. 이 연재는 27회째이다. 그동안 관통하고 있는 핵심은 다음과 같다. ① 도자기를 본질적으로 파악하려면 용(龍)을 지속적으로 탐구해야 한다. ② 용을 탐구하는 동안 여의보주, 약하여 보주를 함께 탐구해야 한다. ③ 용의 입에서 제1영기싹, 제2영기싹. 제3영기싹 그리고 보주들이 무량하게 나온다. ④ 도자기는 만병(滿甁)이고 만병은 곧 보주(寶珠)임을 깨달아야 한다. ⑤ 도자기 표면의 문양은 용의 입에서 혹은 보주에서 생겨나는 만물생성의 근원들이 되는 조형언어들 즉 제1, 제2, 제3영기싹과 보주를 표현한 것이다. ⑥ 씨앗이 보주가 된다는 것은 필자가 불상이 원래 주 전공이어서 증명한 바 있다. 원앙새가 앉아있는 자리는 바로 씨방 위다. 그래서씨앗=보주를 보여주기 위해 보주들을 돌출시키고 있다. 그동안 한해에 걸쳐 이상의 중요한 개념들을 인식시키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왔다. 만일 그런 개념들을 숙지하지 못했다면 첫 회부터 다시 정독하기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하는 연재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청자 어룡형 향로의 명칭도 그저 청자 용 조각 향로이지 어룡이란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용이란 영수는 그 형태가 천변만화하여 그저 용이라 부르면 된다. 제26회에서 꼬리가 중요한 경우가 있다고 설파했는데 과연 꼬리가 제2영기싹으로 표현되어 있지 않느냐(도 2). 원앙새 조각 향로뚜껑도 아미도 이러한 연화 대좌형 위에 놓여 있었을 것이나 지금은 그 짝이 없다. 원앙새에서처럼 원앙새 모양 전체가 기형을 이루듯이 고려청자 어룡형 주자도 용 전체가 주자(注子)이지 주자의 장식이 아니다(도 3). 몸은 물론 꼬리나 손잡이 등 일체가 용이 아닌가. 손잡이의 두 줄이 꼬인 것은, 전체를 휘감은 연잎들과 연봉들이 현실에서 보는 것과 같지 않으며, 모두 영기문으로 연잎에서도 여래나 보살이 화생하고 봉오리는 그 자체로 보주가 되는데 말하자면 그 연잎과 봉오리들은 용의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실제는 그렇게 하면 복잡해지니까 턱 밑에서 나오게 했다. 그리고물고기와 용의 관계는 설명이 길므로 여기에선 생략하고 다만 같은 성격인 것만 지적해 둔다. 그러므로 어룡이란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번 연재의 주인공인 고려청자 구룡형 정병을 살펴보자(도 4-1). 학계에서는 아홉 마리 용으로 장식한 정병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용은 동양에서는 최고의 신적 존재(神的存在)이므로 한 마리 두 마리 등 동물을 가리키는 말은 삼가야 한다. 용의 아드님이지 용 새끼가 아니며 마리가 아니라 용 한분 두 분이라 불러야 한다. 용 이빨도 용납할 수 없어 치아라 불러야 한다. 용의 본질을 모르므로 이 정병 아홉 분이 모여 정병이라는 완전체를 이루고 있음을 인식할 수 없을 것이다. 윗부분에는 용신(龍神)의 머리 아홉을 예리하게 돌출시켜 표현하고, 정병의 몸은 아홉 분의 몸으로 구성되어졌음을 알 수 있다.복잡한 아홉 분의 용 몸들의 구성을 잘 어울리게 음각과 양각으로 절묘하게 표현했다. 그러니까 정병 표면을 아홉 분의 몸으로 장식한 것이 아니고 아홉 분의 용으로 만들어진 정병이란 말이다. 위부분의 용 아홉 분의 얼굴을 보면 날카로운 뿔이나 치아 등 세부가 조금도 손상이 없이 잘 보존된 것은 기적이라 할만하다(도 4-2). 그 아홉 분의 입이 크게 벌려져서 물이 나오게끔 되어 있다. 강진에서 발견되어 있다고 전해오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아, 모든 영수(靈獸)나 영조(靈鳥)의 형태가 그대로 정병이나 주자 등으로 변모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 모든 영수나 영조의 입에서는 보주가 나올 수 있으며, 모든 영기문이 나올 수 있음을 필자는 알아냈으므로 이런 해석이 가능하다. 그리고 모든 영수와 영조는 그 몸 자체가 보주이다. 이런 내용은 글로써 간단히 설명할 수 없다. 만일 그런 진리를 배우고 싶다면, 그래서 도자기의 본질을 알고 싶은 분들은 필자의 연구원인 무본당, 모든 것의 근본을 탐구하는 일향 한국 미술사 연구원으로 오시기 바란다. 그러면 이 청자 구룡 정병은 어디에서 사용한 의기였을까. 싯다르타 태자가 무우수 아래에서 탄생했을 때 아홉 용이 나타나 태자를 목욕시켰다고 한다. 필자의 이론으로는 아홉의 용신의 입에서 영수(靈水)가 나와 태자를 영화시켰다고 말해야 한다. 다른 차원의 탄생이니만큼 탄생이 아니라 화생(化生)이다. 그러므로 석가탄신일에 이런 청자 구룡 정병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자세한 것은 필자가 2007년에 발간한 『한국미술의 탄생(솔 출판)』이란 저서 제18장을 읽어주시기 바란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용은 물, 만물 생성의 근원을 상징한다. 무량한 용들고 구성된 정병이니 만큼, 구룡토수(九龍吐水)의 아이디어를 정병으로 구현한 것은 경탄스럽지 않은가.용과 마찬가지로 영조의 몸으로 병을 만들기도 한다(도 5). 새의 모양이지만 보지 못하던 날개도 있어서 그저 영조라고 불러야 한다. 바로 그 영조 몸 전체를 주자로 삼은 것도 경탄스럽다. 영조 자체가 큰 만병이 되고 보주가 되는 셈이다.

[단독] “송전철탑 이전해달라”… 충남 문화재자료 제119호 ‘조신의 묘’ 수난

수려한 자연경관과 함께 백제 문화의 유물과 유적이 산재해 있는 곳, 바로 충청남도 부여(扶餘)다. 관북리 유적부소산성과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와 부여 나성 등 4곳의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정도로 부여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곳이다. 백제의 마지막 수도로서 이와 관련한 역사 탐방 등 문화관광이 주된 자원인 부여는 백제의 유물 외에도 도지정문화재로 유형문화재 25점, 기념물 25점, 도문화재자료 40점 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조선태종의 어릴 적 스승인 조신 선생의 묘(趙愼의 墓)다. ◆고려 충신 조신 선생의 묘 부여는 풍수지리상 산세가 좋고 물이 맑아 예로부터 명당으로 불렸으며 내로라하는 조선시대 풍수 대가들도 산세를 보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조선 태종(재위 1400~1418)의 어릴 적 스승인 조신 선생의 묘도 바로 이곳 부여에 있다. 조신은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 때 회양부사를 지낸 인물로 고려 말 신돈이 정권을 장악하자 정치에서 물러나 이곳 부여 임천면에 은거하며, 이름을 사겸에서 신(愼)으로 고쳤다. 당대의 학자인 이색정몽주와도 교분이 두터웠으며 박팽년와 유성원 등의 학자를 길러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신이 사망하자 왕위에 오른 태종이 무학대사에게 부탁해 묘 자리를 정한 것으로 전해지며, 조신의 묘는 조선의 8대 명당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묘비와 조신의 행적 등을 기록한 묘표가 닳아 판독이 어려워지자 1734(영조 10)년과 1830(순조 30)년에 후손인 조현명, 조인영 등의 글씨로 다시 세워졌다. 한편 태종은 조신의 사후 그의 자손들에게 벼슬을 주며 후대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조신의 묘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9호(지정일: 1984년 5월 17일)로 지정돼 있으며, 그의 위패가 모셔진 덕림병사(德林丙舍)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05호(지정일: 1988년 8월 30일)로 지정돼 있다. 덕림병사는 조신 선생의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고려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전해지며 원래는 덕림사가 있던 터였다. 덕림병사는 정면 6칸, 측면 3칸의 규모가 비교적 큰 홀처마 팔작지붕집으로 오른쪽 4칸은 양쪽에 툇마루를 설치한 법당으로, 왼쪽의 2칸은 앞쪽에 누다락을 두고 뒤쪽에 부엌을 배치하고 있다. 정면에는 덕림병사 현판이 걸려있으며 병사 건물 뒤편에는 요사로 사용하던 건물이 있다. 바로 이 덕림병사 사당 왼쪽에 선생의 묘소가 자리 잡고 있다. 또한 부여군 세도면 동사리에는 조신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동곡서원(東谷書院,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2호)이 있다. 한편 조신 선생의 묘소 앞에 있는 석물 중 문인석은 고려시대 풍이 담긴 조선 전기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납작한 돌기둥 형태로 얼굴은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묘소 아래에는 수령이 200년 된 커다란 돌배나무가 서있으며 현재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 ◆80여m 뒤 흉물스런 송전탑 조선 태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먼저 찾았던 스승 조신. 태종은 그가 죽자 당대 최고의 선사(禪師)로 꼽히던 무학대사에게 부탁해 묘 자리를 잡았다. 조선 8대 명당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곳이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9호로 지정된 조신의 묘에 수난이 시작된 것은 지난 1985년이다. 한국전력공사에서 묘 바로 앞에 송전탑(철탑)을 설치한 것이다. 조신 선생의 묘와는 불과 80여m 거리다. 이에 조신 선생의 후선인 풍양 조씨 희양공 종무회는 송전탑을 산소에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이전해줄 것을 오랜 시간 건의 및 진정해오고 있는 상황이다. 충남 부여군 장암면 점상리 산168-1번지(조신의 묘) 병사 문화재 제119호 및 제305호 송전철탑 이전 추진 대책위원회 추진위원장을 맡고 있는 손자 조맹연씨에 따르면 지난 1985년 5월 10일 풍양 조씨 희양공 휘신파 종중 대표와 한국전력공사(당시 박정기 사장)간 철탑 계약이 진행됐다. 이와 관련 조맹연씨는 계약 당시 종사를 돌보고 있던 70대 노인들은 산 너머에 철탑을 세운다는 것뿐 묘 바로 뒤편에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높이 솟아오를 줄은 모르고 계약한 것 같다며 높이가 얼마나 되는지 산소 위에 얼마나 솟아오를 것인지 전문가가 아니고는 알 수 없다는 취약점을 이용해 계약을 진행한 한전 측에 잘못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송전탑을 세울 때 영향평가서 작성을 비롯해 환경부 등 12개 행정기관의 심의 승인을 받은 후 건설토록 돼 있는데 이런 절차 없이 당사자 계약으로 체결한 것과 지방 문화재자료이지만 국가지정문화재와 같이 외곽 경계로부터 500m 이내의 지역에서 현상변경 행위를 할 수 없도록 규정돼 있는데 송전탑은 불과 80m 정도의 거리에 있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충남 문화재자료 제119호로 지정된 조신의 묘가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것은 송전탑 계약일보다 한참 앞선 1984년 5월 17일이라는 점이다. 이미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곳임에도 송전탑을 세운 것이다. 이는 문화재 현상변경 허가 기준에도 적합하지 않을 뿐더러 더욱이 환경부 등 행정기관의 심의 승인 등의 과정 없이 진행된 것으로 문제의 소지가 크다. 이에 조맹연씨는 과거의 잘잘못을 서로 따질 필요는 없다며 예산관계 등으로 송전탑 이전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지금이라도 송전철탑을 산소에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이전해줄 것을 진정드리는 바라고 전했다. 오랜 세월 지역의 역사와 함께해오며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것을 문화재자료 혹은 문화재로 지정했다면 관리하고 보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록 많은 시간이 흘렀더라도 잘못된 일을 바로잡는 데 늦은 것은 없다.

[단독] 6.25전쟁 직후 인천시 생활상 알 수 있는 컬러사진… ‘보릿고개 세대’ 향수 자극

6.25전쟁 휴전 직후 1954년 우리나라의 경제와 생활상을 알 수 있고 보릿고개를 겪은 어른 세대들에겐 향수를 자극할 컬러사진 2점을 단독 공개한다. 이 사진은 천지일보가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로부터 입수했다. 미국 종군기자가 인천에서 찍은 사진으로, 본지는 앞서 수원에서 찍은 사진을 한 차례 공개한 바 있다. 우선 인천시의 거리 모습이 담긴 사진은 당시 생활상은 물론 경제상황도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사진이다. 사진 속 왼쪽에는 간판에 간장, 된장 부미식품가공이라 적혀 있다. 그 아래에는 말린 고추와 빻은 것을 팔기 위해 내놓은 듯하며 백의를 입고 있는 손님들이 물건을 보고 있는 모습으로 파악된다. 가운데 인천정육점라 적힌 곳에서는 고기가 걸려 있다. 오른쪽 광수상회라고 적힌 상점 안에는 4명의 남성들이 들어서 있다. 이들은 서있거나 걸터 앉아있는 채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가게 안에는 쌀가마니가 쌓여 있고, 길가에는 빈 수레가 나란히 위치해 있다. 남성들의 표정이 약간은 무료하거나 지친 기색이 보인다. 이를 보고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일거리를 찾기 위해 마을에 집합했지만 워낙 일거리가 없고 물건이 팔리지 않아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래도 정육점과 식품가게에 먹을거리가 진열돼 있는 것을 보면 비록 경기는 침체됐으나 경제는 제법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오른쪽 구석에는 어린 아이가 밖에 놓인 지게를 가지고 장난치며 올라타려고 하는 모습이 보인다. 가게들 뒤로 멀리 굴뚝이 보이는 것은 목욕탕이다. 인천지역은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가장 빨리 수복돼 수원과 서울지역보단 전쟁이 덜 치열했다. 일찍부터 상권이 형성돼 경제가 돌아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51년 7월부터 휴전회담이 시작되면서 전쟁은 고지전 양상으로 펼쳐졌다. 주로 동부와 중부전선에서 치열하게 전쟁을 벌이는 동안 서울과 경기, 인천 지역에서는 전시 중에도 경제가 돌아가고 있음을 엿볼 수가 있는 사진인 셈이다. 다만 사진으로도 느껴지는 당시 어려웠던 경제상황이 아직은 전쟁의 상처가 다 치유되지 못했음을 알려주는 듯하다. 또다른 사진은 5~6세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단발머리에 색동옷을 입고 맨발로 대문 앞에 앉아 있다. 양쪽 코에는 콧물이 나오고 있으며 실눈을 뜨고 해맑은 웃음을 짓고 있다. 한 손에는 초콜릿을 들고 있는데 아마도 종군기자가 사진을 찍기 위해 초콜릿을 주자 천진난만하게 웃음을 보인 듯하다. 다른 손 중지에는 돌반지를 끼고 있다. 색동옷까지 입고 있어 비교적 부잣집 아이였음을 알 수 있다. 동화나 아동문학에 등장하는 부잣집 아이와 흡사하다. 당시 이 같은 복장은 부유층에서 아이에게 입혔던 옷이다. 하지만 아이는 옷이 지저분하고 신발과 양말은 신지 않은 채 발이 시려 양발을 비비고 있다. 귀한 집 딸임을 알 수 있지만 당시 시대가 그만큼 어려웠던 시기였음도 느끼게 한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들에게는 머나먼 과거 같은 느낌으로 보이겠지만 전쟁과 보릿고개 가난을 겪은 어른들 세대에게는 당시 어려웠던 시대상황이 마음에 더 와닿는 향수를 줄 것으로 보인다. 당시 국내에는 카메라가 귀했기에 이런 모습을 남긴 사진들이 별로 없다. 더구나 1970년대에도 찍은 컬러사진이 드문데 1950년대에 컬러사진으로 남긴 것은 더 극히 드물어 희소가치가 있는 사진인 것이다. 사진 속에 보이는 아이는 현재 우리 시대에서 70~80대 어르신이 됐다. 이방인 종군기자가 사진 기록물로 남겨준 덕분에 우리가 돌아볼 겨를도 없이 살아온 힘들었던 과거와 아픈 역사를 다시금 돌아볼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젊은 세대에게는 대부분 말로만 접했던 모습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고, 기성세대에게는 공감과 향수를 느끼게 한다는 측면에서 종군기자가 우리국민에게 큰 선물을 남긴 셈이다.

[단독] 춘천 봉의산성 정상에서 고구려명문 바위 발견

춘천시 봉의산성 정상(해발 300m)에서 고구려 성지임을 입증하는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찾아졌다. 한국역사유적연구원(원장 배정임) 조사단은 글마루 취재반과 현지를 답사하는 과정에서 정상에 있는 암반에 음각된 명문을 발견해 이를 고구려 금석명문으로 공개했다. 지금까지 남한지역에서 고구려 성지임을 확인시켜주는 명문 바위가 찾아진 것은 처음이며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 고구려비와 더불어 고대사 연구의 중요 사료로서 국보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명문은 네모진 형태의 암반(가로 175㎝, 세로 70㎝) 중심에 종서 2행(글씨 크기 13㎝x13㎝)으로 새겨져 있으며, 고구려인들이 즐겨 썼던 정연한 예서체로 高句□□城(?) 王(혹은 五) 句, 守, 未 尸 뒷면에 王 등이 확인되고 있다. 조사단을 이끌고 있는 이재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전 충북도문화재위원, 고대사)은 암반의 금석문은 전형적인 고구려 예서체라며 이 가운데 여러 자(字)가 고구려 시기 각자한 글씨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특히 高자는 관구검비(毌丘儉碑)나 한나라 장천비(張遷碑)에 나오는 高자를 닮고 있다고 덧붙였다. 또한 이 고문은 춘천 봉의산성은 과거 춘천도호부의 진산으로 동국여지승람에 봉산(鳳山)으로 기록되고 있다며 봉산(鳳山)은 고대의 제사 유적으로 볼 수 있으며 정상에서 고구려 금석문이 찾아진 것은 고대사 연구에 획기적인 일이라고 밝혔다. 특히 그는 봉(鳳)자를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찾아보면 매우 중요한 의미로 해석되고 있으며, 봉은 신(神)의 새(鳥)이자 백조중(百鳥中) 왕(王)으로 날개가 미려하고 영웅적 자세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동방 군자의 나라에서 날아와 사해를 나는 새로, 천하의 대 안녕을 상징한다는 것이다(鳳, 神鳥也. 凤之象也 () 出於東方君子之國, 翺翔四海之外 () 見则天下大安寕). 특히 글씨 가운데 왕(王)자가 여러 군데 보이는 것은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왕의 집전을 알려주며 시(尸)는 중국 고대문헌인 사기(史記) 구책열전(龜策列傳)에 보이는 신주패(神主牌)로 해석되므로 춘천 봉의산에 구축한 고구려 신묘(神廟)일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즉 전국죽간(戰國竹簡)에는 尸가 묘(廟)로 나타나며 시묘(尸廟) 유시지묘(有尸之廟)로서 표기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고구려는 시조인 주몽대부터 천신에 제사를 지냈다. 후한서(後漢書)에는 고구려는 귀신과 사직과 영성(靈星)에 제사 지내기를 좋아하였다. 10월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려고 사람들이 많이 모였는데 이를 동맹(東盟)이라고 한다.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있는데 이를 수신(襚神)이라 부르고, 역시 10월에 그 신을 맞이하는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고문은 이런 제사 풍속이 주요한 점령지인 춘천 봉의산성에 제단을 마련하고 이뤄진 것임을 알려준다고 해석했다. 봉의산성은 봉의산 정상 중복에 협곡을 따라 테메식으로 석축한 1.2㎞의 고대 성으로 지금까지는 신라시대 축성으로만 알려져 왔다. 그런데 한국역사유적연구원 조사단은 이번 답사를 통해 성 곳곳에서 돌을 장방형으로 다듬어 들여쌓기로 한 고구려식 석축을 확인했으며, 장대 혹은 건물지에서 수없이 산란한 적색 와편을 확인했다. 와편들은 평양이나 중국 고구려 영토였던 요령, 지안 일대 고구려 성지 등에서 찾아지는 격자문, 사격자문, 승석문 와편으로 고구려식임을 확인했다. 이 고문은 고(古) 기록에 춘천은 고대 맥국(貊國)의 땅으로 나타나 있으며 이는 한반도에 진출한 말갈이나 고구려의 이칭으로 볼 수 있다며 봉의산 고대 유적에 대한 보다 확대된 조사가 이뤄져 고대 맥국의 비밀을 풀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 본문 중 □는 식별하기 어려운 글자를 표시한 것입니다. ※ 편집자주: 춘천 봉의산성에 대한 답사 글은 이번 달 말일에 발행되는 글마루 4월호에 게재됩니다.

[천지일보-문화단독-강우방의 도자기 이야기] (26) 천하제일 고려청자 향로는 사자 향로가 아니고 용 향로다

글. 사진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고려청자들 가운데는 병, 항아리, 접시, 사발 등 갖가지 용기들 이외에 용이나 기린 같은 영수(靈獸)나 봉황과 원앙 같은 영조(靈鳥)처럼 영화된 동물을 조각한 향로나 물주전자(水注子)류가 많다. 모두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존재들인데 현실에서 본 비슷한 것으로 빗대어 모두 올바르지 않게 설명하고 있다. 일종의 조각품이라고도 부를만한데 그 만든 솜씨가 비범하여 중국 것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필자는 이 작품들을 볼 때마다 그 예술성이 매우 뛰어나서 특히 천재적인 장인 몇 명이 이런 걸작품들을 고려청자가 최고조에 다다른 12세기에 만들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항상 감탄해왔다. 또 다른 작품은 널리 알려진 사자 향로(국보 60호)이다. 최근 문화재청에서 이런 작품을 청자 사자형 뚜껑 향로라는 명칭으로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이 경우에는 용이 아예 두 앞발로 각각 보주를 두 뒷발 위에 쥐고 있다(도 1-4). 국립중앙박물관 측은 큐레이터 추천 소장품으로 청자 사자 장식 향로라고 하여 모두 올바르지 않게 소개하고 있다. 주체적인 조각품을 장식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사자가 아니고 용이라고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미술은 용을 모르고는 조금도 풀릴 수 없다. 단 10분만이라도 용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있는가. 그리고 사자형 뚜껑이 아니라, 뚜껑 위에 조각하여 향로의 주체로써 다루어져야 한다(도 1-1). 향로에서 피운 향연이 용의 몸을 거쳐 용의 입을 통하여 밖으로 피어올라 여래나 보살을 화생시킨다. 용어 하나 올바로 고치는 데 이처럼 힘들구나. 중국 송나라 사신인 서긍은 이와 비슷한 고려청자 사자형 향로를 보고 산예출향(狻猊出香)이라고 불렀다. 즉 산예의 입에서 향연이 피어오른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산예란 무엇인가. 우리나라 옛 기록인 통일신라시대 최치원이 당시의 연희(演戲)를 보고 지은 시 향악잡영오수(鄕樂雜詠五首)에서 산예라는 사자춤이라 기록해 놓고 있으니 문헌 기록을 맹신하는 사람들이 산예가 사자인 줄 알고 그대로 따르니 이들로 인해 미술사학이 오류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다. 게다가 다리 끝의 동물 모양의 것을 귀면(鬼面)이라 부르니 불교의례에서 매우 중요한 향로에 웬 귀신을 표현한단 말인가. 이런 총체적 오류는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과 중국 더 나아가 서양에서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산예는 용의 다양한 변모들 가운데 하나로 사자 모양을 보고는 용이라 불러야 한다. 용은 천변만화하여 무한히 변모한다. 필자는 용을 연구한 지 20년째다. 그러면서 세계 모든 나라의 모든 장르를 풀어나가고 있는 만큼 미술사학 연구에서 용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필수적이나 동서양에서 용에 대한 이해가 매우 낮은 까닭은 용 연구를 조금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 명(明)대의 호승지(胡承之)가 편찬한 『진주선(眞珠船)』에 나오는 용생구자설(龍生九子說)의 상징적 구조에서처럼 용은 무한히 변신한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문헌을 믿지 않는 필자는 그래도 이 기록만큼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할 수 있는데 해석을 올바로 해야 한다. 용에 무슨 아들 아홉 명이 있겠는가. 아홉은 양수 가운데 가장 큰 수로 그만큼 용의 변주가 무한히 많다는 것을 웅변해주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사자모양 용이다. 그 이름은 산예(狻猊)라 하는데 이름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근거 없는 복잡한 한자는 쓰지 않고 한글로만 용의 아홉 아들과 그 역할을 간단히 설명하겠다. 첫째 비희는 힘이 세서 무거운 것을 지기를 좋아하여 비석 받침으로 쓰고 있다. 그러니 이른바 귀부(龜趺)는 그릇된 용어이고 용부(龍趺)라 불러야 한다. 둘째 이문은 멀리 보기를 좋아하여 지붕에 장식한다고 했으니 치미가 아니라 용미로 이해해야 한다. 셋째 포뢰는 울기를 좋아하여 종 고리로 삼았다. 넷째 폐안은 관아나 감옥의 문 위에 호랑이처럼 생긴 얼굴을 새겼다. 다섯째 도철은 쇠를 먹기를 좋아하여 그릇 특히 제기에 새겼다. 여섯째 공복은 물을 좋아하여 물가나 다리에 표현했다. 일곱째 애자는 싸우고 죽이기를 좋아하여 칼자루나 도끼에 표현한다. 여덟째 산예는 사자를 닮았는데 불과 연기를 좋아하여 향로나 화로에 표현했다. 아홉째 초도는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대문이나 문고리에 새겼다. 이상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진리는 용의 형상이 다양하여 우리 일상에서 흔히 보는 범상하지 않은 형상은 모두 용의 다양한 변주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용에 대한 무지는 인간이 창조한 예술품에 대한 무지로 이어진다. 무엇보다도 이 사자 향로에서 사자가 오른발로 보주를 뚜껑에 대고 움켜쥐고 있다(도 1-2).보주는 사자가 쥐고 있을 수 없다. 도자기 전공자들은 이 보주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여 언급이 전혀 없다. 연재를 써오면서 보주란 매우 중요한 고차원의 것으로 만물생성의 근원임을 밝히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보주를 지물로 삼고 있는 경우는, 여래로는 석가여래와 약사보살, 그리고 아기 예수가 지물로 삼고 있으며, 보살로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지물로 지니고 있으며, 용이나 해태 등 그리고 봉황과 영화된 새 등, 이런 존재들이 보주를 입에서 내거나 지물로 삼고 있다. 그만큼 보주는 아무나 지물로 삼을 수 없다. 사자 향로에서 사자는 큰 보주를 힘차게 움켜쥐고 있다. 그런데 사자는 보주를 지물로 삼을 수 없다. 산예가 용의 한 변모라고 하면 보주를 지물로 삼을 수 있으니 이 고려청자 사자형 향로는 고려청자 용 조각 향로라고 고쳐 불러야 한다. 그리고 향로 다리 끝의 얼굴은 귀신의 얼굴이 아니고 용의 얼굴이다. 우리나라 예술품에는 귀신의 얼굴은 없으며, 귀신을 우리발로 옮긴 도깨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영수나 영조의 조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꼬리이다. 우리는 흔히 동물의 꼬리가 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조형들을 분석하면서 꼬리가 시작이고, 영기문으로 된 꼬리로부터 영수와 영조가 탄생하는 것이라는 진리를 처음으로 알아냈다(도 1-3, 도 5). 다른 영수들의 꼬리를 분석해보면 모두 제3영기싹을 이루고 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필자가 고구려 무덤 벽화에서 알아낸 것은 영수나 영조의 꼬리가 제1영기싹이나 제2영기싹 혹은 제3영기싹을 취하고 있음을 보고 꼬리가 매우 중요함을 절감했는데 이 글에서 언급하는 영수나 영조들의 길게 솟구치는 꼬리들은 모두 연이은 제3영기싹으로 되어 있지 않은가(도 5). 다음 고려청자 용 조각 향로는 오른발로 투각 무량보주 만병을 힘차게 움켜쥐고 들어 올리고 있다(도 2). 투각한 무량보주는 제25회 글에서 매우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투각 무량보주에 별도로 넓은 입을 만들어 작은 항아리처럼 표현하여 만병(滿甁)으로 만들고 있어서 주목된다. 그다음 고려청자 기린 조각 향로 역시 걸작품이다. 기린 역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인간의 창작품이다(도 3-1). 영수들 가운데 하나로 예부터 끊임없이 표현되어 왔다.그 꼬리 역시 연이은 제3영기싹으로 솟구치고 있다(도 3-1. 도 5). 미국 시카고 미술연구소 소장 고려청자 영조 조각 수주자 역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영조이다(도 4-1). 이 역시 꼬리를 보면 연이은 제3영기싹 영기문으로 위로 솟구치고 있다(도 4-2, 도 5). 이들 영수와 영조의 꼬리들, 세 가지를 채색분석해 보면 이미 설명한 것처럼 모두 연이은 제3영기싹 영기문으로 위로 솟구치고 있어서 매우 역동적이다. 이미 누누이 설명한 것처럼 제1, 제2, 제3 영기싹 영기문은 만물생성의 근원이므로 이 꼬리에서 모든 영수와 영조가 화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청자는 모두 한 가지 색이므로 채색분석해 보아야 분명히 파악할 수 있다. 이처럼 여러 가지 형태의 향로를 살펴본 것처럼 처음에 사자 향로의 사자는 현실에서 본 사자가 결코 아니며 용의 다양한 변형 가운데 하나이며, 모든 영수이든 모든 영조이든 일체가 용성(龍性)을 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그런데 영조(도 4-1, 4-2)에서 영조 몸 자체가 만병이 되고 보주가 됨을 절감하는데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다음 제27회에서 놀라운 자기들을 만날 것이다.

[천지일보-문화단독-강우방의 도자기 이야기] (25) 고려청자 투각 무량보주 향로, 칠보문(七寶文)이 아니고 무량보주문(無量寶珠文)이다

글, 사진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중국 송대의 청자를 몇 점 살펴보았으나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려청자가 여러모로 출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청자로 다시 돌아가서 용어 문제로 인해 얼마나 우리가 고려청자를 잘못 알고 있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중국인들이 고려청자를 천하제일이라고 상찬한 것은 헛말이 아니다. 천하제일이라고 말한 것은 요즘 말로 하면 세계 제일이라는 말이다. 논리적으로 말하면 고려청자가 천하제일이라고 하면, 그것을 만든 고려의 후예인 우리 민족이 천하제일이어야 하며, 따라서 어찌하여 천하제일인지 밝혀낸 학자도 천하제일이어야 하고 세계 제일이어야 한다. 그런데 고려청자에 대한 연구 성과는 오류가 너무 많아서 필자가 엄격히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연재 25회에 이르기까지 도자기가 한갓 그릇이 아니요, 만병이며 보주임을 누차 증명하며 도자기의 본질을 세계 최초로 다루어 보았다. 도자기의 본질을 모르고 어떻게 도자기를 연구할 수 있단 말인가. 전 세계의 도자기 전공자들은 연구 경향이 같아서 이제는 더이상 연구할 주제를 찾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오랫동안 연구해오면서 필자가 마침내 도자기의 본질이 얼마나 위대한지 그리고 본질을 다루고 보니 과거의 연구 성과에 얼마나 오류가 많은지 알게 되어 우선 용어들부터 그 많은 오류를 지적하고자 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며 국보 제95호인 무량보주 향로를 학계에서는 칠보 무늬 향로, 한자로는 청자 투각 칠보문 향로(靑磁 透刻 七寶文 香爐)로 불리고 있다(12세가, 높이 15. 3센티미터, 도 1-1). 그렇다면 그 향로의 본질은 투각한 무량보주에 있는데 칠보라는 엉뚱한 이름으로 부르니 향로의 본질을 도저히 알 수 없다(도 1-2). 필자의 원래 주 전공이 불상인지라 무량보주 자리에 불상을 두면 영락없이 불상이 연화대좌 위에 계신 모습이 됨을 알았고, 이미 여래와 보살이 우선 그 얼굴이 보주로 표현되었음을 증명한 바 있어서 이 향로의 중요성을 이미 간파한 바 있다. 그러므로 무량보주는 곧 여래나 보살과 같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런 칠보라는 명칭은 어디에서 왔을까. 칠보문이란 용어를 만든 사람들은 일본 학자들이었고, 우리는 일본 용어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가 일본문화 식민지의 상태를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칠보란 무엇인가. 칠보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 금속 등의 재료에 유리질을 녹여 붙이는 과정을 거쳐 장식하는 공예품을 말하는데, 이때 부식을 방지하고 강도를 더해주어 마치 일곱 가지 보물(金銀瑠璃玻璃硨磲赤珠瑪瑙)과 같은 색상이 난다고 하여 칠보라 한다. 둘째, 경전에 따라 그 종류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무량수경》이나 《묘법연법연화경》에서 말하는 것보다 《아미타경》에서 말하는 7가지 보석, 즉 금은청옥수정진주마노호박을 가리킨다.극락에 있는 연못과 그 주변은 이들 7가지 보배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한편 전륜성왕이 갖고 있는 칠보는 나라를 통치를 하는 데 필요한 것들로서 윤보(輪寶)상보(象寶)마보(馬寶)여의주보(如意珠寶)여보(女寶)장보(將寶)주장신보(主藏臣寶)를 이른다. 일본이나 한국에서는 전자의 의미로 쓰고 있다. 어쨌든 보주라 하더라도 보석으로 모두 알고 있으니 어느 경우든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이 무량보주 투각 향로는 곧 밝혀지겠지만 불교미술 내지 불교사상에서 최고의 상징을 띠고 있어서 이런 걸작이 탄생한 것이다. 모두가 그 아름다운 표현과 정교한 기법에 찬탄을 아끼지 않고 있으나 그 상징을 알지 못하면 고려 장인에게 얼마나 큰 죄를 짓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보주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원래 여의보주이지만 보주라고 쓰려고 한다. 보주의 실상을 처음 밝힌 학자는 세계에서 필자가 최초이고 이 도자기 연재도 실은 보주의 실상을 밝히려고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 투각 무량보주란 무엇인가? 원으로 표현된 보주들이 중첩된 모양을 투각한 것은 중국과 한국을 통틀어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렵다. 금속으로는 더러 있어도 자기로 표현한 것이 이 고려청자 투각향로가 유일할 것이다. 이처럼 투각하여 둥글게 만든 무량보주를 설명하기 위하여 평면적으로 펼쳐보며 설명하려고 한다(도 1-3). 이 문양을 설명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지만 시도해 보겠다. 학계서는 꽃잎들이 네 개 모인 것이라 하여 사엽화문(四葉花文)이라 부르기도 한다(도 1-4).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 문양은 둥근 보주가 여러 개 중첩하면서 전개된 복잡한 구조를 띠고 있다(도 1-5). 매우 붉은 색을 띤 부분은 중첩된 부분인데 결국 모든 부분이 중첩되어 있는 셈이다. 이것을 향로에서처럼 둥근 구형으로 투각하여 만든다는 것은 기술적으로도 매우 어려운 작업이며 그런 만큼 상징성이 클 것이다. 마치 보주 안에 수많은 보주들이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포함되어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보주의 실상을 지금까지 단계적으로 설명하여 온 만큼, 보주를 새롭게 인식하고 계시다면 필자의 설명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 복잡한 구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작품이 바로 리움미술관 소장 고려청자 양각운룡문 매병이다(도 2-1). 보물 1385호이며 높이는 40.0센티미터로 크기로 보나 정교한 양각 솜씨나 아름다운 청자색으로 보아 고려청자들 가운데 대표적 걸작품이다. 처음 이 작품을 만났을 때 낮은 양각이나 음각으로 은은하게 표현하여 곧 알아보기 어려우나 두 용이 물에서 솟구치는데 그 사이에 보주가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잘 안 보여 확대하여 보니 놀라운 조형들이 보이지 않는가. 보주 안에 무량한 보주들이 들어있고 전체적으로 태극문양이 있지 않는가. 작은 보주의 조형을 분석해서 전개과정을 밟아보기로 한다. 첫 단계는 단순한 보주에서 영기문이 나오는 형태이다(도 2-2). 그다음 단계는 태극이 보주가 됨을 보여준다(도 2-3). 그러나 필자의 이론으로는 태극이라기보다 면으로 된 제1영기싹이 순환하는 형태이다. 그다음 단계는 보주 안에 무량한 보주들이 중중무진으로 들어있는 형태로 바로 무량보주 투각 향로의 무량보주들을 펼쳐 보인 것과 같은 형태이다(도 2-4). 그다음 태극과 무량보주가 겹친 형태다(도 2-5). 그러니까 이 네 가지 단계는 각각 모두 같은 값의 보주를 다르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을 모두 종합하여 고려청자에 표현하여 놓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에 이르러 필자가 왜 그토록 보주의 본질을 그처럼 추구하기를 치열하게 해왔는지 알 수 있다. 여래는 무량보주이다. 얼굴뿐만 아니라 손과 발을 보주처럼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온몸에 걸친 법의에 온통 갖가지 다른 보주들 표현으로 가득 차 있다. 보주는 필자가 찾은 조형언어의 네 가지 음소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보주에서 제1, 제2, 제3영가싹 영기문이 모두 나온다는 것은 일체의 조형예술품이 나온다는 놀라운 진리를 보여준다. 조형언어는 문자언어가 전해주는 진리와 다른 방법으로 더 본질인 진리를 역동적으로 웅변해 주고 있음을 알았다. 여래나 보살의 볼록한 정수리에서 보주가 나오고 그 보주에서 양쪽으로 영기문이 뻗어나가는데, 이것은 여래는 무량보주이므로 가능한 모습이다. 그런데 여래나 보살이 앉는 자리에 향로에서는 무량보주가 투각되어 그 투각한 무량보주에서 향연이 피어오르는 모습과 똑같다. 그러니 고려 장인들이 향로를 통해 고차원의 사상을 표현한 것은 참으로 슬기롭기 짝이 없다고 하겠다.

[단독] 70년전 美종군기자가 찍은 컬러사진, 이승만 ‘납세보국’운동·지게꾼 낮잠 사진이 의미하는 것은

6.25전쟁 휴전 직후 1954년 우리나라의 경제상황을 가늠할 수 있는 컬러사진을 천지일보가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로부터 입수해 공개한다. 정 연구가에 따르면 사진은 수원 관공서에 이승만 전 대통령의 80세 생일 기념과 함께 납세보국(納稅報國)을 독려하는 모습이며, 또 다른 사진은 미싱 가게 앞에서 건장한 남성의 지게꾼이 지게에 기댄 채 한가한 시간을 이기지 못해 낮잠을 자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은 미국 종군기자가 찍은 것으로 당시 미 종군기자들은 8명이 인천상륙작전으로 열린 바닷길을 통해 입국했다. 이들은 전쟁과 피난민들의 참혹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특히 당시에는 컬러 사진이 귀했기 때문에 이들은 중요한 순간에만 컬러로 찍었다. 이들이 가장 많이 컬러에 담았던 사진은 휴전회담이 시작되면서 군사분계선에서 남북이 조금이라도 땅을 더 차지하기 위해 심리전을 펼치는 장면들이었다. 표정을 더 생동감 있게 담는 데에 컬러사진을 사용했다. 이들 종군기자들은 전쟁 직후인 1954년에도 주요 격전지를 돌아다니며 대한민국의 모습을 담았는데, 그들 눈에는 관공서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납세보국을 강조하는 모습과 지게꾼의 피곤한 모습이 눈에 특이하게 들어와 컬러로 남겼던 것이다. 해당 사진은 경기도 수원 관공서 모습으로, 건물입구 상단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화가 걸려 있으며 제80회 탄신을 경축하고 납세보국(納稅報國)을 표현하고 있다. 그 앞으로는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다. 전쟁을 막 끝내고 국민들이 어려운 상황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이 납세를 통해 폐허가 된 국가경제를 일으키고자 국민들을 독려하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곧 전쟁을 입은 우리 고장 건설을 위해 납세로 충성하고 나라에 보답하자고 치하하고 있는 것이다. 납세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각인시켰고 나라를 살리기 위한 이 전 대통령의 의지가 보이는 사진이라 할 수 있겠다. 이는 나아가 향후 경제강국의 원동력이 된 새마을운동으로 이어지는 기틀을 마련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경제상황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는 지게꾼이 고단하게 잠을 청하는 모습만 봐도 가늠이 된다. 미싱가게 앞이자 길거리에서 지게에 몸을 기대고 고개는 하늘로 향한 채 잠을 자고 있다. 이는 잠시 피곤해서 자는 것이 아니라 일거리가 워낙 없다보니 힘겨워 잠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실업자나 다름없는 셈이다. 그 뒤로 보이는 미싱가게 입구 문턱에 앉은 남성의 뒷모습은 어깨가 축 처져 있다. 당시 실업자가 상당히 많았을 것으로 예상되는 사진이다. 이 모습이 종군기자에게는 안타깝고도 특이한 모습으로 비쳐져 컬러 사진에 담겼다. 이같이 힘든 시기를 보내는 상황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의 납세보국으로 국민들을 독려하는 모습이 깊은 울림을 준다.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화폐에도 등장했는데, 그의 초상화가 1954년 2월 1일 100환 지폐로도 발행돼 1962년 6월 10일 3차 통화조치로 발행정지 되기 전까지 약 8년간 사용됐다. 사진을 통해 이승만 전 대통령은 납세보국운동으로 나라를 살리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김원웅 전 광복회장은 2020년과 작년 광복절 경축식 기념사에서 이승만 정권을 친일정권으로 치부하는 편향된 역사관을 보여 이 전 대통령의 긍정적인 모습까지 희석시키고 있다. 그런데 김 전 광복회장이 최근 지난 1년간 광복회의 국회 카페 운영 수익금을 개인용도로 사용하고 횡령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국가보훈처가 국회 정무위원회에 보고한 감사 결과에 따르면 제보자 진술과 보훈처가 확인 내용을 합하면 김 전 광복회장의 비자금 사용액은 총 7256만 5천원에 달한다.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는 사진을 통해 이승만 전 대통령이 납세보국운동으로 나라를 살리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김원웅 전 광복회장은 친일 운운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행동이 반듯해야 할 광복회장이 자신은 횡령 등의 비리가 드러나 구속 위기에 처했으면서 과연 이승만 정권을 친일 운운할 자격이 되는지 묻고 싶다. 자꾸 우리 민족을 반으로 가르는 행동을 해선 안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 전 대통령은 화폐에도 등장했다. 그럼 당시 그 돈을 사용한 사람들은 친일파를 숭배했다는 것인가라고반문하며 화폐에 나올 정도 되면 그런 평가를 함부로 해선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종군기자가 찍은 이 사진은 그 당시의 우리나라 복식(服飾)과 생활모습도 알 수 있고 수원의 풍경은 물론 힘겨운 경제상황까지도 알게 하는 귀중한 사진이다. 지금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경제가 어려운 시기지만 70여년 전에는 전쟁의 폐허로 인해 지금보다 더 힘든 시절이 었었다. 그런 위기에서도 잘 이겨내 지금의 대한민국을 이뤄냈다. 그런 측면에서 현재 상황은 그리 비관적이지만은 않다. 이 사진이 코로나로 힘든 시기를 보내는 자영업자들에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가 되길 기대해본다.

[천지일보-문화단독-강우방의 도자기 이야기] (24) 세계의 모든 도자기 문양의 명칭은 100% 오류다

글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뒤돌아보면 필자가 문양에 관해 관심을 가진 것은 대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에 필자는 도서관에서 세계미술 전집을 열심히 펼쳐 보며 르네상스 미술에 열광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그리스의 도기 항아리에 그려진 卍 표시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한국에서 많이 보아온 그 표현이 어찌 그리스에도 그리 많단 말인가. 대학 시절을 자유분방하게 지냈던 그 시절에는 관심 분야도 넓었고, 의문이 많았고 호기심도 컸었다. 서양과 동양의 것은 그 조형과 상징이 똑같다는 것을 요즘 알게 되었다. 28세 때부터 고려청자에 새겨진 기하학적 문양에 관심을 가졌었다. 햇수를 기억하는 까닭은 1968년 겨울에 처음으로 강진 관요 발굴에 참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논둑에서 주운 천년 동안 진흙에 묻혔던 영롱한 청자 파편에 단순한 기하학적 무늬 띠가 새겨져 있었으며 그때부터 그 문양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러 분명하게 풀어내게 되었다. 35세 때 일본 연수의 기회가 왔으며, 그때 일본에서는 문양에 관한 서적이 여럿 있어서 주섬주섬 구입하여 공부한 적이 있었으며, 마침내 고구려 벽화에서 압도적 위상을 지닌 문양들을 해독한 이래 세계의 문양들로 확장하며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젊은 청년은 고려청자에 왜 이런 기하학적인 무늬가 새겨져 있을까 깊은 의문을 가졌었다. 그때의 상황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발굴을 끝내고 저녁에 따뜻한 온돌에 누어 상념에 빠져들었다. 그런 문양을 번개문양, 즉 뇌문(雷文)이라고 불리고 있었는데 왜 이런 번개 문양이 청자에 베풀어졌는지, 이런 문양이 왜 번개 문양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문양이 고려청자뿐만 아니라 북송 청자나 금나라 백자에도 있으니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런지 50여 년 후에 비로소 그것이 뇌문이 아니고 제1영기싹임를 알게 되어 감개무량하다. 비록 그릇 가장자리에 둘려져 있어서 지나치기 쉽지만 중대한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릇의 중요 문양들은 물론 그 당시에는 현실에서 본 것으로 바라보았다. 도자기 전공자들은 그렇게 지금도 알고 있지만, 최근 20여 년 동안 학문적 변화가 일어난 이래 예술의 모든 장르에 변혁이 일어났다. 도자기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먼저 금나라 백자를 살펴보자. 1115년 세워져 1234년에 멸망한 여진족이 북송을 밀어내고 동아시아에 세운 나라가 금나라인데, 몽골과 남송의 연합으로 금나라가 1234년 멸망했다. 그런 배경을 가진 금나라이니 북송의 문화를 바탕으로 지니고 있으므로 북송이 멸망했다고 해도 문화가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매우 질 좋은 자기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백자인화 화당초문 대접{白瓷印花 纏枝花文碗}을 살펴보기로 하자(도 1-1, 1-2). {12세기,중국 월요 越窯, 개성출토, 높이 12.2센티미터, 입지름 20.2센티미터} 도록에는 한글로 쓴 명칭과 한자로 쓴 명칭이 각각 달라서 그대로 옮겨둔다. 학계에서는 꽃가지들을 묶은 당초문양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무엇인지 모르면 아무 말이나 만들어 쓰고 있다. 분명히 꽃 당초문은 아니다. 용어라는 것은 조형의 핵심을 취하여 이름 지어야 하거늘 무책임하게 가볍게 짓고 있다. 도자기의 문양에는 당초문 용어가 많이 들어가 있는데. 그 용어들 일체가 오류임을 이미 이 연재를 정독한 분들은 알고 계실 것이다. 그 수많은 여러 가지 당초문이 단지 덩굴무늬가 아니고 영기문임을 알게 되면 도자기의 본질이 비로소 드러남을 알 것이다. 그런데 백자의 이 문양은 압인하여 만들었기도 했지만 전체가 흰색이어서 문양이 분명하게 보이지 않으므로 채색분석해 보아야 한다. 접시 가득히 표현한 문양은 당초문도 아니고 매우 복잡하여 무엇이라 이름 짓기 어렵다. 그러나 채색분석해 보면 시작과 끝이 있는 질서정연한 영기문임을 알 수 있다. 필자가 기적적으로 찾아낸 조형언어의 4가지 음소, 즉 제1영기싹, 제2영기싹, 제3영기싹 그리고 보주 등으로 이루어진 만물생성의 근원인 가장 강력한 영기문들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자리에는 이른 바 번개무늬라는 직선적 무늬가 둘려지고 있다(도 2-1). 중심의 둥근 원은 접시의 편평한 바닥에 해당하는데 원 안에 있는 문양은 매우 강력하다. 즉 꽃모양이 있고 중심에 다섯 개 붉은 둥근 점들은 무량보주를 상징하는데 두 곳에 배치하고 있다. 비록 작은 점에 불과하지만 가장 강력한 보주여서 접시 중심에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세 갈래 잎들에서 수많은 제1영기싹 영기문이 여러 개 뻗어 나오고 있다. 두 개의 작은 보주에서도 갖가지 제1영기싹들이 뻗어나가고 있다, 즉 중심의 둥근 보주 안에 강력한 영기문들을 압축하여 밀집시키고 있는 셈이다. 그 밖의 넓은 공간에 매우 복잡한 영기문들이 순환하고 있다. 시작점은 화살표한 빨간색으로 잠정적으로 삼았다(도 2-1의 화살표를 보기 바란다). 거기서부터 제1영기싹이 연이어 전개하여 가는데 4개의 큰 영화된 꽃, 즉 영화(靈花)를 피어가며 아래로 향해 왼쪽으로 순환하고 있다. 자세히 보면 필자가 찾아낸 4개의 음소인 제1영기싹, 제2영기싹, 제3영기싹 그리고 보주(매우 큰 영화가 곧 보주를 상징하고 있다) 등이 절묘하게 이어져서 전개하고 있다. 이 문양을 채색분석하면서 필자의 이론인 영기화생론과 채색분석이란 방법론이 틀림없이 올바르고 보편성을 띠고 있음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이 복잡한 영기문을 단순화시켜보았다(도 2-2). 과연 4가지 음소로 귀일하여 전개되는 놀라운 영기문이 아닌가. 이런 강력한 영기문이 만병이란 접시에서 솟아나고 있다. 항아리 모양에서만 솟구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접시도 만병이므로 이런 강력한 영기문이 솟구쳐 나올 수 있다. 문양은 대개 곡선적으로 표현하지만 그릇 가장자리 좁은 무늬 띠에는 직선으로 된 문양이 새겨져 있으나 그저 장식적인 것이 아니라 가장 근원적인 문양을 표현하고 있음도 알았다. 그 직선적인 이른바 번개문양을 곡선으로 바꾸면 바로 제1영기싹이 된다. 그러니 번개문양이 아님을 반증하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테두리의 그런 만물생성의 근원인 제1영기싹으로부터 그릇이 화생하는 것이라는 진리를 깨달았을 때 이제 대중에게 이 진리를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기 시작하여 현재 신문에 연재하기 시작하였다. 이제부터는 문양의 명칭도 함께 다룰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세계의 도자기 연구자들이 쓰고 있는 문양의 명칭은 100% 틀렸다는 것을 감히 선언하며 동시에 왜 그런지 증명해 보일 것이다. 용어들이 모두 틀렸다는 것은 도자기에 대한 지식도 모두 틀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다음 북송의 청자 타구를 살펴보자(도 3-1, 3-2). 청자 연판문 唾壺, 침 뱉는 항아리 즉 청자각화 연판문 타호{11세기, 중국 월요越窯. 개성 출토, 높이 12.2센티, 구경 20.2 양각}를 채색분석해보면 역시 학계에서 연화당초문이라 부를지도 모르지만, 세상에 이런 연꽃과 연잎은 없다(도 4-1). 크게 변화시켜서 연꽃 모양도 변형시키고 양쪽으로 제3영기싹이 발산하고 있다. 우리가 현실에서 보는 잘 아는 꽃이나 잎에서 필자가 찾아낸 제1영기싹이나 제1영기싹, 혹은 제3영기싹이 발산한다는 조형을 볼 때, 그 현실의 꽃이나 잎은 이미 현실의 꽃과 잎과는 차원이 다른 영화된 꽃과 잎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실제의 꽃이나 잎에서는 양쪽으로 발산하는 그런 영기문이 있을리 없다. 게다가 연꽃이나 연잎도 크게 변형시켜서 현실의 연잎과 크게 다르게 표현했지만 사람들은 현실의 연꽃이나 연잎을 보고 있다고 막연히 생각할 뿐이다. 줄기에는 면으로 된 갖가지 제1영기싹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것을 단순화시키면 연이는 제1영기싹으로 귀결한다(도 4-2 위의 것). 둥글게 전개시키던 것을 좌우로 펼쳐보면 가장 기본적인 연이은 영기싹 영기문이 된다(도 4-2 아래의 것). 이상 두 작품은 북송과 금나라 때 만들어졌지만 역시 같은 월요(越窯)에서 만들어지지 않았는가. 특히 금나라 때 만들어진 백자의 문양들은 필자가 찾아낸 조형언어의 모든 음소가 총동원되어 현란한 빛을 발하고 있다, 이에 이르러 필자의 영기화생론과 채색분석을 통하지 않으면 세계의 도자기의 참된 모습은 결코 영원히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리라는 것을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