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곳간] 무더위 다스리는 옛 선조들의 여름나기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지난 3일 올여름 첫 폭염경보가 발령됐다. 7일은 ‘작은 더위’라 불리는 ‘소서(小暑)’다. 절기상으로나 계절상으로나 본격적인 여름이 찾아온 것이다. 무더위가 지속되면 낮뿐 아니라 밤에도 잠 못 이루는 열대야가 찾아온다. 몸이 축축 늘어져 일상 생활에도 지장을 준다. 이젠 시원한 음료수와 선풍기, 에어컨이 없으면 견디기가 힘들다. 그렇다면 이마저도 없던 시절, 선조들은 여름철 더위를 어떻게 지혜롭게 이겨냈을까. ◆습도 높고 더운 바람 불고 ‘소서’는 1년을 24개로 구분한 24절기 중 열한 번째 절기다. 소서는 하지(夏至)와 대서(大暑) 사이에 들었다. 소서는 ‘작은 더위’라는 뜻으로 ‘큰 더위’를 뜻하는 ‘대서’에 앞서는 절기다. ‘고려사(高麗史)’에 보면 소서는 15일간을 5일씩 3후(三侯)로 나눠, 더운 바람이 불어오고, 귀뚜라미가 벽에 기어 다니고, 매가 비로소 사나워진다고 했다. 이 기간에 장마전선이 한반도에 머물고 있어 습도가 높고 비가 많이 내린다. 소서가 시작되면 하지 무렵에 끝낸 모내기의 모들이 뿌리를 내려 논매기했다. 또한 퇴비 장만과 논두렁의 잡초 깎기도 시작했다.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는 계절이므로 온갖 과일과 소채도 점점 풍성해지고 밀과 보리도 먹게 된다. ◆산·계곡은 최고의 피서지 무더위가 시작 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곳은 산과 계곡이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의 ‘유월조(六月條)’에 보면 “서울 풍속에는 남산과 북악 계곡물에 발 담그기를 하는 놀이(濯足之遊)가 있다”고 했다. 지금도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피서를 즐기니 여름철 풍속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했다. 조선 후기 문신이자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은 63세에 ‘소서팔사(消暑八事)’라는 시를 지었다. 그해 1824(순조 24)년의 조선은 유난히 더웠다. 더위를 없애는 8가지 방법인 소서팔사는 소나무 숲에서 활쏘기, 홰나무 그늘에서 그네 타기, 빈 누각에서 투호놀이 하기, 시원한 대나무에서 바둑두기, 서쪽 연못에 핀 연꽃 구경하기, 숲속에서 매미 소리 듣기 등이 포함됐다. 선비들은 이른 새벽 말을 타고 서대문 옆 서련지(西蓮池)를 찾았다. 서련지는 연꽃이 많고 꽃송이가 큰 것으로 유명했다. 선비들은 동틀 무렵 연못에 배를 띄우고 연꽃잎이 활짝 터지는 소리를 감상했다. 그리고 술을 마시며 풍류를 만끽했다. ◆‘얼음’ 활용법도 다양 조선 임금들의 여름 피서법은 대체로 소박했다. 경복궁 경회루, 창덕궁 후원에서 더위를 피했고, 여름철 최고 피서 음식인 과일도 즐겼다. 기록에 따르면, 양력 6월부터 8월 초에 수라간에서는 임금님 수라상에 수박 1개와 참외 2개를 올렸는데, 과일을 차갑게 하려고 얼음물을 사용했다고 한다. 조선 영조(제21대 왕)는 가을보리로 만든 미숫가루를 여름철 건강식으로 먹었다. 미숫가루는 섬유질이 풍부해 소화기관이 약했던 영조에게는 안성맞춤인 피서 음식이다. 반면 연산군의 피서법은 다른 왕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는 여름철 궁궐 뜰에서 잔치가 열릴 때 1000근(600㎏) 짜리 얼음 쟁반 4개를 동서남북으로 깔고 에어컨처럼 사용했다고 한다. 조선의 세종(제4대 왕) 때인 1434년 여름에는 열병을 앓는 사람이 잇따랐다. 양반들은 그나마 열병 치료 약을 지어 먹었지만 백성의 사정은 심각했다. 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다 죽기까지 할 정도였다. 백성들을 치료하던 활인원에는 열병으로 고통받던 사람이 몰려들었다. 이때 “백성들에게 부순 얼음을 주도록 하옵소서”라고 아뢴 예조의 건의에 따라 세종은 얼음을 내려준다. 또한 ‘경국대전’에는 매년 여름철 끝 달, 즉 음력 6월에 관청과 종친, 정3품 이상 관리, 의금부, 전옥서의 죄수들에게 얼음을 나눠줬다고 한다.

[문화곳간] 조선시대 회식은 중요한 업무였다

사회와 직장 생활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게 있다. 바로 회식(會食) 문화다. 친목과 사기 도모가 목적이겠지만, 또 다른 근무로 여겨 심각한 스트레스와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 그나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의무적인 회식이 감소하고 가정을 돌보는 문화가 조금씩 생겨났었다. 하지만 코로나19 거리두기 해제와 함께 회식문화가 부활하면서 직장인들의 고충이 다시 커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역사 속에 담긴 회식문화를 살펴봤다. ◆국가가 모임 주도하다 우리나라는 세계 어느 국가보다 조직과 집단주의를 강조하고 있기에 회식문화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조선의 경우 궁중에서는 매해 정기적인 연향(宴饗)이 실시됐다. 경국대전에 보면, 연향은 국가에서 실시하는 각종의 대소연향(大小燕享)과 외국 사신의 접대를 위한 연회(宴會)로 구분된다. 또 사대부들의 술자리인 계회(契會), 아회(雅會), 기로회(耆老會) 등이 이뤄져 왔다. 정례적으로 행한 연향 가운데 가장 성대한 것은 회례연이었다. 이는 설날과 동지(冬至)에 임금이 신하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베푼 연회로, 왕세자와 문무백관이 모두 참석했다. 중궁전(中宮殿)에서도 내외명부를 위한 회례연이 열렸다. 세종실록(세종 15년 1월 1일)에 보면, 임금이 근정전으로 나아가서 회례연을 베풀었는데, 처음으로 아악(雅樂)을 사용하였다. 중궁(中宮)이 내전에서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이 공식 행사에서 아악을 사용한 것은 의미가 크다. 중국의 음악인들 어찌 다 바르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세종 12년 12월 7일)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 세종은 유교 문화권인 조선이 주변국보다 더욱 우월한 문명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이 같은 의지를 반영해 아악을 발전시켰고, 회례연에서 그 결과물을 선보여 조선의 높은 정신문화를 알렸다. ◆모두가 풍요로운 삶 원해 개혁군주인 정조대왕(조선 제22대 왕)에 얽힌 이야기도 전해진다. 오늘날 수원 남문시장에는 정조대왕이 술을 따르고 있는 모습을 한 불취무귀(不醉無歸)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는 정조대왕의 일화에 나온 사자성어로,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정조 16년 3월 성균관 제술 시험 합격자들과 희정당에서 연회가 베풀어진다. 이 자리에서 정조는 합격자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려주면서 이같이 말한다. 옛사람의 말에 술로 취하게 하고 그의 덕을 살펴본다고 하였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을 생각하고 각자 양껏 마셔라. 정조대왕이 애주가로 알려져 있긴 하지만, 이는 실제로 술 취해서 돌아가라는 의미보다는 모두가 풍요로운 삶을 살면서 술에 흠뻑 취할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중요한 모임은 그림으로 남겨졌다. 조선시대에는 문인들의 모임인 계회(契會)를 그림으로 담아냈다. 또 신미(1631)년에 태어난 관리의 친목모임 무인(1758)년에 태어난 것을 기념하는 친목 모임을 담은 그림은 시대적인 결속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생각해보면 예나 지금이나 회식의 대부분 권위 있는 계층에 의해서 이뤄져 왔다. 맨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통제하는 형태가 대표적인 회식의 이미지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다 코로나19로 회식문화가 감소했고, 개인과 가정을 챙기는 문화가 형성돼왔다. 현재는 사회적 거리두기 해소로 친목 모임이 다시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중요한 것은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선 강요는 오히려 근무환경에 고통을 더할 수 있다. 이에 건강도 챙기면서 주변과 소통하는 회식문화가 하루빨리 정착되기를 기대해본다.

[문화곳간] 조선의 결혼정책… 가난으로 시기 놓치면 돈도 줬다

5월을 가정의 달이라고 부른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까지 가족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날이 많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혼인한 부부가 있다. 사실 오늘날 한국은 연애는 선호 결혼은 선택인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과거에는 자식을 낳아 대(代)를 잇고, 노동력도 확보해야만 했기에 누구에게나 결혼은 필요했다. 이와 관련해서 조선의 역사 속에 담긴 특별한 결혼 이야기를 소개해봤다. ◆국가에서 혼인을 장려하다 우리는 흔히 시집간다, 장가간다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는 우리 조상들의 결혼 풍습이 담긴 말이기도 하다. 조선은 농경사회였고, 인력은 항상 필요했다. 하지만 백성들 사이에서는 돈이 없어 결혼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에 국가에서는 혼인장려 정책을 펼쳤다. 법전인 경국대전에 보면, 자녀가 13세가 차면 의혼(議婚, 혼사를 의논함)을 허락하되 혼인은 남자 15세 이상, 여자는 14세 이상이 되면 허락한다고 했다. 중국 송나라 주자가 가정의 예의범절에 대해 기록한 책인 주자가례(朱子家禮)에서도 혼인할 수 있는 나이는 남성 16세 이상, 여성 14세 이상이었다. 또 경국대전에 보면 사대부 집안의 딸이 30세가 되어도 가난해 시집을 못 가는 사람이 있으면 예조에서 왕에게 아뢰어 혼수 물건과 돈을 지원한다고 규정했다. 만약 그다지 빈곤하지 않음에도 30살이 넘도록 시집보내지 않으면 그 가장은 중죄로 다스린다고 했다.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도 과년하도록 결혼하지 못한 자는 관에서 마땅히 성혼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덕무(李德懋)가 쓴 김신부부전(金申夫婦傳)도 있다. 이 책은 김씨와 신씨 부부의 전기라는 뜻이다. 재밌는 것은 이덕무가 이 책을 정조(조선 제22대 왕)의 명을 받고 썼다는 것이다. 이 문헌에 보면, 1791(정조 15)년에 서울 사람 가운데 혼인 적령기가 지났어도 가난 때문에 혼인하지 못한 백성들에게 혼인자금을 하사해 150명이 결혼했다고 한다. 하층민 사이에서는 결혼을 전제로 어린 여자아이를 데려다가 남자 집에서 키우고 성인이 되면 혼인시키는 예부제(豫婦制)도 있었다. 여자아이가 성인이 되면 친정으로 다시 보내고, 친정집에 예물을 준 후 다시 맞이하는 방식이다. 그럼 당시에 국가에서는 왜 결혼에 관여했을까. 성종실록에서 그 답을 찾아볼 수 있다. 성종 22년 1월 6일자 기록에는 인륜의 도리는 혼인보다 중한 것이 없고, 제왕의 정사는 원녀(怨女)광부(曠夫)가 없게 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했다. 이어 저 옛날 나라 다스리는 큰 법도도 모두 이를 중히 여겨 중춘(仲春) 시절에 남녀를 모이게 해 적시에 혼인하게 했으니, 만물이 모두 성장을 이뤄 사람도 화목하고 기운이 화평해 풍속이 순박하고 아름다웠으며 음양이 그 질서를 따르매 재앙도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라고 전했다. 즉, 자연 순리대로 자신의 짝을 찾아야 나라가 평안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던 것이다. ◆조강지처 버릴 수 없어 백년해로라는 말을 들어봤을 거다. 혼인한 부부가 일생을 함께 산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이혼하지 않겠지만, 평생 부부가 행복하게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이혼은 흔한 일이 됐다. 이혼한 커플을 주인공으로 한 프로그램까지 생겨날 정도다. 돌싱(돌아온 싱글) 등 신조어도 익숙하다. 조선시대는 남성 중심의 이혼제도가 존재했다. 조선 법률인 경국대전에는 이혼에 대한 조항은 없었기에, 명나라의 대명률(大明律)에 따라 이혼을 규정했다. 내용을 보면, 7가지 죄악 즉 칠거지악에 해당하면 이혼 사유가 됐다. 하지만 칠거지악에 속해도 삼불거(三不去), 즉 3가지 조건에 해당하면 아내를 쫓아낼 수 없었다. 삼불거에는 돌아갈 곳이 없을 때 부모의 3년 상을 함께 치른 경우 가난하게 살다가 부자가 됐을 경우에는 제외된다. 이는 어려움을 함께 극복한 조강지처는 버릴 수 없다는 것을 단단히 못 박은 조항이다. 시대가 변했어도 함께 기쁨, 슬픔을 함께 나눈 가족만큼 소중한 존재는 없을 것이다. 그 소중함을 너무 당연히 여겨 소홀히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나와 가족이라는 천륜이 무너진다면 세상 속에서 그 무엇을 잘해 낼 수 있겠는가. 이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거리두기가 해제된 현시점에 맞이하는 5월 가정의 달은 어느 때보다 더욱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주는 듯하다.

‘택견·강릉농악’… 일상서 만나는 국가무형문화재 공개행사

사회적 거리두기가 전면 해제된 가운데 국가무형문화재 공개행사가 5월에도 전국 각지에서 펼쳐진다. 28일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원장 이경훈)에 따르면, 2022년 국가무형문화재 공개행사와 전승자 주관 전승활동 기획행사가 5월부터 정상으로 운영될 예정이다. 다만 지자체별 방역상황으로 부득이하게 무관객으로 진행될 수 있으며, 이 경우 정부혁신의 하나로 공개행사에 한해 국민의 일상에서 문화를 누릴 수 있도록 행사 종료 후 약 한달 전후로 전승지원통합플랫폼에서 예능 종목 실연과정을 영상으로 공개된다. 대표적인 공개행사로는 서울 놀이마당에서 진행되는 송파산대놀이(5월 28일), 인천 화도진공원 내사마당에서 펼쳐지는 황해도평산소놀음굿(5월 5일) 그리고 충북 충주시 택견원에서 시연되는 택견(5월 28일) 등이 있으며 전라도와 경상도 등지에서도 총 30건의 다채로운 행사가 진행될 예정이다. 아울러 전승자 주관 기획행사로 경남 통제영 12공방에서는 5월 6일부터 8일까지 두석장(보유자 김극천) 소반장(보유자 추용호) 갓일(보유자 정춘모) 등 3인의 연합 기획행사가 펼쳐진다. 전북 임실 필봉마을에서는 신명나는 임실필봉농악(5월 7일), 강원 강릉오죽헌에서는 강릉농악(5월 21일)이 열리는 등 총 28건의 공연과 전시 등이 마련돼 있다. 5월에 열리는 국가무형문화재 공개행사 및 전승자 주관 기획행사의 상세일정은 국립무형유산원 누리소통망을 확인하거나, 한국문화재재단으로 문의하면 된다.

우리나라 첫 시조집 ‘청구영언’ 보물됐다

국내 최초 시조집인 청구영언이 보물로 지정됐다. 26일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에 따르면, 우리나라 최초의 가곡집(歌曲集)인 청구영언과 사자모습을 본 뜬 고려 시대 상형청자(像形靑磁), 조선 시대 전적 및 불교조각 등 총 5건에 대해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했다. 또 1993년 국보 지정된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중 추가로 발견된 조선 시대 전적 2건을 국가지정문화재(국보)로 추가 지정했다. 보물 청구영언(靑丘永言)은 조선 후기까지 구비 전승된 총 580수의 노랫말을 수록한 우리나라 최초의 가집(歌集, 시조집)으로, 해동가요(海東歌謠) 가곡원류(歌曲源流)와 더불어 조선 3대 가집으로 불린다. 청구영언은 조선인들이 선호했던 곡을 중심으로 전체적인 틀을 짜고, 작가가 분명한 작품은 작가별로, 작자미상의 작품은 주제별로 분류한 체계적인 구성을 갖췄다. 또한 작가는 신분에 따라 구분해 시대순으로 수록해 전승내역을 최대한 밝히고 있다. 이러한 청구영언의 체제는 이후 가곡집 편찬의 기준이 돼 약 200종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발간됐을 정도로 후대에 끼친 영향이 매우 지대하다. 청구영언은 우리나라 최초의 가집이자, 2010년 유네스코 세계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된 가곡(歌曲)의 원천이 된 자료로서, 내용의 중요성 뿐 아니라 조선 후기까지 다양한 계층에서 사용한 언어와 유려한 한글서체 등 국어국문학사와 음악사, 한글서예사, 무형유산 등 여러 분야에서 의미가 지대하므로, 보물로 지정해 가치를 더욱 알릴 필요가 있다. 보물 청자 사자형뚜껑 향로(靑磁 獅子形蓋 香爐)는 사자의 모습을 한 뚜껑과 네 굽이 달린 받침으로 구성된 고려 시대 향로이다. 2007~2008년 동안 충청남도 태안군 대섬 앞바다에서 발견된 고려선박인 태안선(泰安船)을 조사하던 중 출수(出水)된 도자기다. 보물 서울 조계사 목조여래좌상(서울 曹溪寺 木造如來坐像)은 조선 15세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전라남도 영암 도갑사(道岬寺)에 봉안됐으나, 1938년 6월 조선불교 총본산(總本山) 건립에 맞춰 지금의 조계사 대웅전에 봉안하기 위해 이안(移安, 옮겨옴)된 상징적인 불상이다. 불상 이안은 일제강점기 왜색불교를 배척하고 조선불교의 자주성과 정통성 확보를 열망한 당시 불교계의 염원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 한국불교사와 불교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역사적 의의가 크다. 보물 달마대사관심론(達磨大師觀心論)은 불교의 한 종파인 선종(禪宗)의 창시자인 달마대사(?~528)가 설법한 교리를 정리한 불경이다. 이번에 지정된 대상은 1335년(고려 충숙왕 복위 4년) 경주 계림부에서 개찬된 목판에서 인출된 1책의 목판본이다. 보물 춘추경좌씨전구해 권1~9, 20~29, 40~70(春秋經左氏傳句解 卷一~九, 二十~二十九, 四十~七十)은 춘추시대 역사서인 춘추(春秋)의 주석서이다. 지정 대상은 1431년(세종 13) 경상도 청도에서 원판을 번각한 책이며, 지금까지 완질본은 알려져 있지 않다. 국보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1993.11.5. 지정)에 추가로 지정된 전적은 감지은니 묘법연화경 권4와 백지금니 묘법연화경 권5-변상도 2건으로, 조선 15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두 작품 모두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의 복장(腹藏)에서 추가로 발견됐다. 국보 감지은니 묘법연화경 권4는 이미 지정된 감지은니 묘법연화경 권2․3․5와 서지적 형태가 동일하고 국보 백지금니 묘법연화경 권5-변상도 역시 이미 지정된 백지금니 묘법연화경 권2-변상도와 형태적으로 동일해 같은 시기에 제작됐음을 알 수 있다. 두 건 모두 복장유물로서 일괄로 납입됐을 정황이 분명하므로 추가로 지정해 복장유물의 완전성을 높이고 체계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

조선왕실 제사 ‘종묘대제’, 3년만에 공개 봉행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2년간 무관객으로 진행됐던 종묘대제(宗廟大祭)가 다시 공개된다. 24일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원장 이경훈)이 주최하고 한국문화재재단(이사장 최영창)과 종묘대제봉행위원회(종묘제례보존회ㆍ종묘제례악보존회)가 공동 주관하는 2022 종묘대제가5월 1일 종묘 영녕전에서 열린다. 종묘는 조선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셔 놓은 사당으로 장엄한 건축미를 자랑한다. 종묘대제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길례(吉禮)에 속하는 의례로, 왕이 직접 거행하는 가장 규모가 크고 중요한 제사다. 국조오례의는 길례(吉禮)흉례(凶禮)군례(軍禮)빈례(賓禮)가례(家禮)의 다섯 의례다. 제사는 길례에 속하며 효 실천의 근본으로 삼고 있다. 종묘대제는 1969년 복원된 이래 매년 개최돼 조선 시대부터 지금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 등 왕실의 품격 높은 의례와 음악, 무용이 어우러진 종묘대제는 2001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등 세계인의 관심을 받는 국제행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매년 5월 첫 번째 일요일에 개최되는 종묘대제는, 경복궁 광화문을 출발한 어가행렬(광화문세종로 4거리종로123가종묘)을 시작으로 오후 2시에 종묘 영녕전 제향으로 거행된다. 이번 행사는 종묘 정전 보수공사로 영녕전에서의 제향만 이뤄지며, 영녕전의 규모를 고려해 올해는 출연자를 포함해 최소 인원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영녕전 제향 관람은 온라인 사전 예약자 150명에 한해 참여 가능하며, 엄숙한 제향 준비를 위해 행사 시간 1시간 전인 오후 1시부터 영녕전 내부로 입장할 수 있다. 아울러 사전 예약 없이 종묘를 찾은 국민도 영녕전 제향을 관람할 수 있도록 경내에 대형 화면을 2개소(영녕전 앞, 정전 앞)를 설치해 실황을 중계한다. 다양한 방법으로 제향을 체험할 수 있도록 일무 증강현실(AR) 사진찍기와 편경 연주하기를 마련했다. 또한 종묘대제 현장 방문이 어려운 국민을 위해 다양한 온라인 채널을 통해 생중계가 진행된다.

‘역사의 산증인’ 인간문화재 소장품 1246건 기증된다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 소장자료 총 1246건이 국립무형유산원에 기증된다. 21일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은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 소장자료 기증식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날 오후 2시에 이번에 기증된 자료는 종묘제례악‧처용무 고(故) 김천흥 명예보유자의 유품과 제주칠머리당영등굿 보유자 김윤수의 소장자료로 총 1246건이다. 고(故) 김천흥(金千興, 1909~2007)은 조선왕조 마지막 임금인 순종황제의 50세 탄신 경축 연회에서 춤을 추었다 하여 조선의 마지막 무동(舞童)이라고도 불렸다. 친필로 쓴 처용무 무보(舞譜)와 공연 때 착용했던 복식과 가면 등 이번에 기증된 자료들은 근 한 세기 동안 무형문화재 역사의 산증인이었던 김천흥의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특히 국내‧외 공연사진과 신문 스크랩 등 990여 건의 자료들은 국가기록원 국가지정기록물로도 관리되고 있어 그 가치를 더한다. 이외에도 제주칠머리당영등굿 보유자 김윤수와 선대 심방 양금석의 손때가 묻은 울북, 설쇠 등의 무구(巫具)도 함께 기증됐다. 국립무형유산원은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와 보유단체 등으로부터 무형유산 관련 자료를 기증받고 있다. 기증자료는 작고(作故) 보유자의 유품이거나 보유자‧보유단체 소장품들로, 무형문화재 보전과 진흥에 기여하고 학술 연구 자료로 가치가 높다고 판단되면 수증(受贈, 증여를 받음)한다. 기증 받은 자료는 수장고에서 별도로 보존‧관리하며, 아카이브 운영과 기증자료집 발간, 전시 등을 통해 무형유산의 역사와 가치를 대중에게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