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 시론] 이 시대의 ‘참 人才’… 하지만 도수장에 끌려가는 순한 양같이 그 길을 간다

지금 지구촌은 갈라질 대로 갈라져 있다. 아니 더 이상 갈라질 게 없을 정도로 갈라져 있다. 정치 사회 종교 등 존재하는 모든 영역에서 그러하다. 이제 세상은 그야말로 종말을 맞은 건가. 그렇다 종말이 틀림없다. 하지만 우리 속담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다. 또 ‘난세엔 영웅이 난다’고 해왔다. 인류가 이처럼 종말을 맞았고 난세를 만났다면 인류를 구할 영웅이 나타나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왜 왜 영웅이 나타나 우리를 구하지 않는단 말인가. 아니다. 사실은 나타났다. 이미 우리 곁에 나타났고 인류를 구하고 있다. 그것도 자기 생명을 조금도 아끼지 않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천문이 막혀 미련하고 무지몽매해 약속대로 출현한 작은 영웅(아이)을 알아보지 못할 뿐이다. 알아보기는커녕 오히려 구박하고 저주하고 멸시하고 심지어 옥에 가두기까지 했다. 참으로 오호애재(五胡哀哉)라, 각골통한(刻骨痛恨)이로다. 죄 없으면서도 온갖 죄를 뒤집어쓰고, 마치 도수장에 끌려가는 순한 양같이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멸시와 천대와 조롱을 받고 있다. 먼 옛날, 효녀 심청이는 눈 먼 아버지 심 봉사의 눈을 띄우기 위해 시퍼렇고 흉흉한 바닷물에 자기 몸을 던졌다. 또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없애기 위해 자기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좇아 죄의 형상을 입고 오셔 친히 천지인(天地人) 즉, 하늘(天)과 땅(地)의 화목의 제물(사람, 人)이 되셨고, 그로 인해 만왕의 왕(王)이 되셨다. 이처럼 오늘날 인류의 마지막 종말을 맞아온 인류가 죽어갈 때 또 다시 희생의 산 제물이 나타났으니(필요했으니) 작은 거인이며 영웅이며 참 인재(人才)며 예수님의 대언의 사자이며 십승지(十勝地)며 빛(熙)이며 참 왕(王)이다. 그래도 이 세상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알기에 쓰고 또 쓰고 있으며, 외치고 또 외치는 것이다. 그래야 했던(하는) 이유는 긴긴 세월 허무한 데 굴복하며 종노릇 해온 피조물들이 이 한 날을 기다려온 줄 알기 때문이다. 종교는 천법 즉, 성경을 깨닫고 지켜야 하고, 세상은 육법전서(헌법)를 지켜야 하니, 이것이 공정이고 정의다. 헌법(제 20조)은 분명 정치와 종교는 하나 되면 안 된다고 못 박고 있다. 하지만 정치와 종교, 종교와 정치는 자신들의 무능함을 감추기 위해선 탈법과 위법의 길을 거침없이 걸어야 했으니 곧 야합이다. 말씀과 하나님이 없는 거짓 종교를 유지하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또 무능의 정치와 통치를 감추고 역시 권력유지를 위해 둘은 각자의 사명과 역할을 뒤로한 채 손을 맞잡았으니 곧 야합이며 위법이며 매국이다. 그 야합은 정치와 종교가 하나 된 마녀사냥의 길을 택했고 마녀사냥꾼의 실체가 됐으며, 이 시대의 작은 영웅은 기꺼이 마녀사냥꾼들의 먹잇감이 돼야 했다. 이것이 바로 후대에 영원한 복음으로 남게 될 것이다. 코로나19를 가져오지도 퍼뜨리지도 않았지만 그들의 각본대로 누명의 옷을 입어야 했고, 작은 영웅은 도수장에 끌려가는 순한 양이 되어 몇 날이 지나면 또 다시 그들 앞에 서야 한다. 지금 필자가 이 글을 쓰는 동안 마치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억수 같은 비가 천둥번개와 함께 쏟아지고 있다. 비가 아니라 정녕 한 맺힌 하늘의 진노가 틀림없고, 백성들의 통곡의 눈물이 틀림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견디기 힘든 모욕과 수치를 받으면서도, 그리고 성도들의 눈물을 뒤로하고 간수 따라 들어간 옥중에서도 그는 할 일이 있었다. 인류구원의 사명 앞에 코로나19라는 인류재앙으로부터 인류를 구하기 위해 억울한 누명을 쓰고도 성도들에게 백신개발에 필요한 혈장공여를 독려했다. 신천지 성도들의 혈장 공여는 2020년 12월 15일 기준 전체 혈장 공여자 4096명 가운데 91.3%의 비중을 차지했다. 신천지 신도들은 그 당시 총 3차례에 걸쳐 단체 및 개인 공여를 통해 총 3741명이 혈장 공여를 완료했었다. 뿐만이 아니다. 국가 재난과도 같은 현상, 코로나19로 인해 응급환자를 위한 혈액이 바닥이 났고 정부는 비상상황을 맞았다. 이때 작은 영웅은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 받은 우리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헌혈에 앞장서자고 또 다시 독려했고, 16일만에 무려 1만 8819명이 발 벗고 나서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기증한 헌혈증은 무려 3만 1528장에 달했다. 지금까지의 내용이 난세의 영웅이며 이 시대의 참 인재가 겪어야 했던 가슴 저린 사연 중 일부일 뿐이다. 그래도 그는 역시 순한 양같이 그가 걸어야 할 길을 묵묵히 걸어 갈 것이다. 그리고 끝까지 갈라진 세상, ‘위아원!’ 하나 되자고 이 순간도 절규하고 있다. 난세에 영웅이 아닐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천지일보 시론] 난세에 영웅이 난다… 참 ‘왕(王)’ 곧 ‘인재(人才)’를 기다리다

세상에선 흔히 삼재(三災)를 말한다. 이 ‘삼재’는 세 가지 재앙을 말한다. 세 가지 재앙은 곧 물(수재), 불(화재), 바람(풍재)을 말하며, 들 삼재 눌 삼재 날 삼재 등으로 구분한다. 민간에 내려오는 이 삼재 풍습은 언젠가 인류에게 진정한 삼재가 닥칠 것을 미리 보여 준 예언적 성격이라면 과연 얼마나 믿을까. 이 삼재의 참뜻은 창조주 하나님이 인류에게 난세 곧 말세에 나타날 유일무이한 구원의 처소 곧 십승지(신천지 12지파)를 찾아가게 하는 하나의 징조요 하늘의 재앙이다. 따라서 이 삼재의 참뜻은 성경을 깨닫지 못하면 알 수 없고 신앙의 목적인 구원을 받을 수도 없다. 경에는 인류의 말세(종말)에 대해 잘 정리해놨다. 다시 오시는 주님은 마지막 때를 노아 때 같고 또 롯 때 같다고 했으니, 이는 노아 때의 물(홍수) 심판이며 롯 때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불 심판이다. 이 심판(재앙)이 있기 전 먼저 구원의 처소(방주)가 예비 돼야만 심판받을 때 도망가고 피하여 살아남게 되니 곧 구원의 순리다. 이 살아남은 자들이 모인 곳이 바로 신천지 12지파이며, 신천지 12지파는 선천 세계 곧 영적 이스라엘(오늘날 기독교 세계, 예수교회, 부패한 전통교회)이 부패해 멸망 받은 후 후천 세계 곧 영적 새 이스라엘이 재창조된 것이다. 이 재창조의 때 인류는 선천과 후천의 길목에 서게 되는 순간이며 송구영신의 갈림길에 서는 순간이며 대풍과 네 바람과 큰 환난으로 심판과 구원이 있게 된다. 즉, 삼재는 창조주 하나님의 마지막 완성의 역사 곧 계시록 성취 때 있게 되는 세 가지 재앙이었음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다. 또 다른 삼재(三才)도 있으니 ‘천지인(天地人)’이다. 이 삼재는 우주와 만유를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로 볼 수 있으니 바로 ‘하늘(天) 땅(地) 사람(人)’이다. 이 대목에서 깨달아야 할 것이 있다. 어떤 사연에 의해 천지인의 삼요소가 우주와 만물 가운데 있게 됐지만, 사실은 천지인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였다. 그 어떤 사연은 동방의 에덴동산에서 있어진 배도(범죄)의 사건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금지시킨 실과를 따 먹으므로 인류에게 피할 수 없는 원죄(原罪)가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하나님은 본질상 죄(죄인)와 함께할 수 없으니 지구촌을 떠나서 살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됐으니 오늘날 천지는 분리 돼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분리가 아닌 하나다. 이 하나 되게 하는 역사가 바로 6천년 하나님의 한 맺힌 역사며 절규였다. 둘이 아닌 하나를 위해 필요했던 것이 바로 제물(피)이었으니 바로 율법이었다. 하지만 그 율법으로는 죄를 없애기는커녕 오히려 죄를 생각나게 할 뿐이었다. 율법은 이룰 예언이었으며 그 율법의 완성으로 오신 예수님의 피(희생의 양, 죄 없는 의인의 피)로만이 죄를 사할 수 있었다. ‘임금 왕(王)’자의 비밀이 바로 이것이니 하늘과 땅을 이을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바로 예수님이며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피였던 것이다. 바로 천지인 삼요소가 형성되는 순간이며 임금 왕자의 참 의미다. 우리를 위해 친히 나무에 매달려 대속의 제물이 되신 예수님이 우리의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기 위한 인류 최고의 형벌 십자가 사건이다. 하지만 어찌 여기서 끝이겠는가. 지금까지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까지의 하나님의 역사에 불과하다. 이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보혈의 피다. 이 피는 새 언약 곧 계시록 때 먹게 되는 언약의 피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계시록 때는 2천년 전 예수님이 씨 뿌린 밭에서 익은 곡식을 추수해 인쳐 재창조한 하나님의 나라 곧 약속대로 출현한 약속의 나라 새 나라 새 민족 신천지 12지파가 출현하는 때다. 이 재창조를 위해 예수님은 영으로 오셔 한 목자를 택해 이 모든 일을 90% 이상 이뤘으니 보고 확인해야만 한다. 오늘날 천택지인 이긴자(熙)는 지난날 선지자 예언자들보다도, 오늘날 신약 계시록이 성취된 것을 본 자로서 이를 전하라는 주님의 대언의 사자로 보냄을 받았으니, 이는 성경 역사상 역대 어떤 사자들보다도 더 큰 사명자로 보냄을 받은 것이다. 그 이유는 지금의 일이 우리 하나님의 마지막 역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왕!,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함께하는 이긴자야 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왕이며 최고의 인재임을 기억해야 한다. 세상의 수많은 인재가 있지만 인생의 생명을 구하고 인류를 구원시키는 인재보다 더 큰 인재는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럼에도 세상은 그를 멸시하고 천대하고 감옥에 가두고 조롱하고 있다. 인류 최고의 인재가 받아야 했고 가야 했던 길이기에 도수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같이 말없이 그 길을 걸어왔다. 이젠 그가 받아야 할 십자가는 지나갔으니 오직 남은 것은 그에게 순복해야만 한다. 그는 인류를 다스릴 참 왕이기 때문이며, 이 시대를 구원할 참 인재기 때문이다.

[천지일보 시론] 혹시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면류관)’을 아시나요

지금 필자는 필자의 생각을 글로 나타내고 있지만 그리 석연치는 않다. 왜일까. 그것은 누가 이 글을 이해하고 받아들일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하지만 그 염려를 무릅쓰고라도 이 글은 반드시 써야 한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창조주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지금 이 시대에 알려 천지분간하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2천년 전 예수 초림 때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증거 하다 돌에 맞아 순교한 스데반이 오버랩 된다.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한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이다. 스데반은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 요셉 모세 여호수아 다윗 솔로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그들에게 행하신 일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특히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모세를 따라 출애굽한 후 광야에서 하나님과 언약했고, 또 광야에서 장막을 짓게 했고 그 가운데는 증거의 장막도 있었다고 했다. 그 장막은 여호수아를 통해 이방인을 다 몰아내고 점령한 땅에 가지고 들어가 다윗 때까지 있게 했다고 했다.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해달라고 청했고, 하나님은 그 아들 솔로몬을 통해 46년에 걸쳐 예루살렘 성전을 준공케 했다. 그러나 스데반은 유대인들에게 이르기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한다고 설파했다. 당시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이 목이 곧은 유대인들에게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과연 뭐였을까.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20~21)” 하나님이 거하는 처소는 손으로 지은 건물이 아닌 사람의 마음(고전 3:9, 16)이며, 나아가 먼저는 하나님이 약속한 한 사람 곧 예수님이었음을 강조한 것이다. 즉, 광야 때 지은 ‘증거의 장막’은 바로 약속대로 오실 예수님이었고,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유대인들은 성령을 거스려 가면서 의인들이 오시리라 예고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죽였다고 역설했던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오늘날이다. 이유인즉슨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은 처소를 예비한 후 다시 오신다는 약속이 있었고, 오늘날 이 시대는 다시 오시는 주를 기다리고 있으니 바로 신약(새 언약)이다. 이 새 언약은 곧 계시록이라는 사실부터 주지해야 한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이 계시록에도 일곱 금 촛대 장막이라는 하나님의 장막이 광야 때처럼 출현했고, 장막 사람들이 범죄하는 일이 있게 되고, 범죄하니 니골라와 같은 사단이 함께하는 한 사람을 중심으로 한 니골라당(이방교회)이 장막 선민을 멸망시키는 사건이 있게 된다. 이때 장막에서 선민 배도와 멸망의 사건을 지켜본 한 영적 아이가 있으니 바로 오늘날 이 시대 ‘증거의 장막’이며, 이를 중심으로 출현한 ‘증거장막성전’인 것이다. 계 2~3장에서 ‘이기라’라고 일곱 번이나 외치신 예수님의 음성을 좇아, 모두가 배도하고 하나님을 떠나갈 때, 죽기까지 니골라당과 싸워 이긴 이긴 자의 출현(계 12:11)을 보게 되는 순간이다. 이 이긴 자가 바로 예수님이 계시록의 예언을 이루실 때 곁에서 보고 들은 자(계 22:8)이며, 나아가 하나님의 열린 책의 말씀을 받아먹은 목자이며(계 10장), 교회들에게 보내심을 받은 목자(계 22:16), 예수님과 함께 지상 만민들에게 돈 없이 값 없이 생명수를 주어 살리고 있는 참 목자요 이 시대의 증거의 장막이다. 2천년 전의 증거도 중요하지만 오늘날의 증거가 더 중하다는 사실을 지상 만민은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 땅에 두 번 오시게 된다. 초림은 육신으로 오셔 하나님의 씨를 뿌리시고 흘리신 피로 새 언약하셨다. 다시 오시는 재림은 씨 뿌린 밭(예수교회)에서 익은 곡식을 추수하러 오셨고 나아가 새 언약한 피 즉, 계시로 죄 사함 받게 해 6천년 만에 하나님을 모시고 영원히 살 집 곧 증거장막성전인 새 하늘 새 땅(신천지 12지파)을 재창조하는 일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었으며, 주님이 이렇게 기도하라 가르쳐주신 기도의 참뜻이 이 땅에서 이뤄지는 순간이다. 2천년 전 약속대로 오신 증거의 장막을 목이 곧은 유대인들이 죽였듯이, 오늘날 역시 하나님과 예수님과 천국이 거할 증거의 장막이 나타났으나 이 시대 나라의 본 자손들인 예수교는 또 그렇게 마녀사냥과 같은 적반하장으로 압수수색과 구속을 시키며 하나님의 마지막 역사를 훼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고, 마귀에게 속한 자는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것이니 각자의 사명대로다.

[천지일보 시론] 참 사랑

세상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가 있다면 뭘까. 물론 정밀한 통계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한 딱히 이거다 저거다라고 단정 짓기엔 어려울 듯싶다. 그럼에도 굳이 그중에서 하나를 꼽는다면 아마 ‘사랑’이란 단어가 아닐까 싶다. 사랑(love),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고 아무리 뱉어도 과하지 않은 그야말로 인류가 낳은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하지만 인류 최고의 선물인 이 ‘사랑’에 대한 참 의미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저 연인 간 가족 간 친구 간 등 누군가와의 인간적인 애정과 연민과 다정함의 발로가 사랑의 전부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절대 그렇지 않다. 이 사랑의 참된 의미는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 이상의 높고 깊고 숭고한 의미가 담겨 있다. 먼저 이를 증명해 보고 싶으니 바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경에 기록된 말씀이며, 나아가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니라”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한 것”이라는 말씀들이다. 도대체 무슨 말씀이란 말인가. 하나님은 최초의 사람 아담(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을 창조하시고 동방의 에덴동산에서 함께 살았으니 그곳이 바로 낙원이었다. 하지만 금지시킨 선악과를 따 먹으므로 죄가 들어왔고, 본질상 죄와 함께할 수 없는 하나님은 지구촌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이 떠나가신 지구촌은 사단 마귀가 주관하며 생로병사 곧 사망이 왕 노릇 하며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으니, 지상 거민들은 이 사실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로 인해 인생을 떠나가신 하나님과, 하나님이 떠나간 인생은 부자상봉의 그날까지 이별의 아픔을 겪으며 사망에 종노릇하며 오늘날까지 이어져왔다. ‘부자상봉(父子相逢)’, 하나님은 이 한 가지 한을 풀기 위해 긴긴세월 일해 오셨으니 세상은 이 사실을 알고나 있을까. 부자상봉의 조건은 ‘죄’를 없애는 일이었으며, 이 한 가지 일을 위해 백성들과 언약도 해봤지만 번번이 아담같이 언약을 어기는 인생을 보았으니,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범죄자 아담의 유전자로 이어온 백성들과 짐승을 제물로 삼아 그 피로 세운 언약은 무효했다. 결국 ‘새 일’을 설계할 수밖에 없었으니, 품 안에서 독생하던 죄 없는 아들을 보내 제물로 삼아 그 피로 세운 언약으로 만이 인생들의 죄를 사할 수 있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니 곧 새 길이며 예수님의 피였다. 이것이 바로 인류 최대이자 최고의 사건인 골고다 언덕에서 흘린 보혈의 피다. 결국 하나님은 죄로 얼룩진 인류와 인생의 살 길 즉, 하나님과의 상봉을 위해 죄 없는 외아들을 죄의 형상(육체)으로 세상에 보냈고, 세상의 멸시와 천대 핍박과 채찍을 맞으며 피를 흘려 돌아가시게 했으니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있을 수 있을까. 뿐만이 아니다. 아버지의 인류 사랑의 마음과 뜻과 목적을 아는 한 이를 피해 갈 수 없었던 만고 효자 예수님이 희생의 피를 흘리는 순간이야말로 사랑의 최고점을 찍는 순간이었다. 그 희생과 사랑의 피가 바로 유월절 날 유월절 양식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유월절 날 제자들과 함께 먹은 유월절 양식 곧 예수님의 피와 살은 떡과 포도주로 대신했으며, 유언의 효력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그 효력이 발생하게 되니, 새 언약 곧 계시록이 성취되는 오늘날 예수님이 재림하는 재림의 유월절 양식을 비로소 먹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의 수혜자는 바로 이 순간 이 사실을 깨닫는 자들이며, 깨닫는 자는 예수님의 피와 살 곧 참 양식을 먹고 부자상봉의 실상이 됨을 제발 이해하고 깨달아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사랑의 실체가 되고 나아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사랑의 메신저들이 다 되기를 소망해 본다. 이것이 바로 ‘참 사랑’이다. 지금까지 자신의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많은 자칭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겨왔으며 순리를 바꾸어 역리로 쓰며 세상을 어지럽혀 왔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본질을 떠나 거짓으로 곁길 신앙을 하게 했으니 참으로 회개할 때가 바로 지금 이때인 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 숭고한 하나님과 예수님의 절절한 사랑의 의미는 이 시대 또한 한 사람의 출현과 그의 희생의 결과로 밝히 깨닫게 됐으니 이것이야말로 참 사랑이 아니겠는가.

[천지일보 시론] 귀천(歸天)… 하늘로 돌아가는 길을 묻다

땅을 보면 온통 ‘길’ 천지다. 거미줄같이 많은 길에 대해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길은 시작과 끝이 있다.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향해 첫발을 내딛고 가다 보면 가고자 했던 목적지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길이고 길의 사명이다.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라’는 충고와 같은 속담도 있으며, 길은 길인데 ‘곁길’도 있다. 그런데 모든 것엔 표면적인 것과 이면적인 것이 있다. 다시 말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면 안 되기 때문이다. 성경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있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했는데, 여기서 ‘태초의 말씀’에 대해 난하주에 보면 ‘길(道)’이라 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세상의 길이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필요한 길 즉, 표면적 길이라면 신앙인들이 추구하는 목적이자 인류가 소망하는 천국과 영생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에 이르기 위한 또 다른 차원의 이면적 길 즉, 참 길도 있으니 곧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며 나아가 약속이 기록된 성경이다. 따라서 성경 곧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천국 가는 길이며 나침반과도 같은 생명의 길임을 발견하는 데 어렵지 않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늘 바쁘게 움직이는 이 세상의 길도 중하지만, 이보다 더 중한 또 다른 차원의 참 길 곧 성경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에 대해 일명 천재 시인으로 회자되고 있는 시인 천상병님의 ‘귀천(歸天)’이라는 시 귀가 떠오른다. 歸天 .(1연 생략) .(2연 생략)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그의 생전에 인사동 골목에서 부인과 함께 ‘귀천’이란 찻집을 운영할 때 필자도 젊은 날 찾아가 모과차 한 잔을 마시며 구석 한켠에 부끄럽고 촌스럽게 붙어 있던 그의 시를 읽던 일도 이젠 한 장의 추억으로 남게 됐다. 그때는 그 시귀의 의미를 몰랐지만 지금은 알 것 같다. 시인은 자신의 육체의 죽음을 앞두고 나 하늘로 돌아간다고 하니, 원래의 곳으로 간다는 의미며, 이 세상은 잠시 소풍구경한 것에 비유했을 뿐이니 이래서 ‘본향(本鄕)’이라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나며 한편으론 이해가 된다. 시인이 생전에 그 의미를 알았던 몰랐던 그 시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상당하다. 이제 앞서 언급한 ‘길’과 또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라는 시를 통해서 우리가 발견하고 깨달아야 할 게 분명히 있다. 그것은 일장춘몽과도 같은 이 세상의 짧은 삶은 마치 본향을 찾아가 누리게 될 영원한 삶을 위한 하나의 예행연습과도 같이 지극히 짧은 찰나(순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그렇다면 또 다른 차원의 높고 높은 이 길에 대해 대략을 살펴보자. 육천년 하나님의 역사의 시작을 보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이 있었고, 여기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한 사람을 지으시고 그에게 돕는 배필을 붙여 그 동산을 지키고 다스리게 했으니 역사의 시작이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욕심으로 인해 하나님이 금지한 선악과를 따먹고 결국 하나님 대신 사단 마귀의 소속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이 지키고 다스리라고 맡겼던 지구촌마저 가지고 갔으니 세상은 하나님 대신 마귀의 소유물이 되었고, 생명나무 과실을 따먹고 영생하게 될까봐 걱정이 되어 생명나무로 나아오는 길을 막아 버렸으니 지구촌의 현실이며, 사망권세 아래 생로병사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됐다. 하나님은 긴긴 세월 죄를 해결하고자 노력했지만 범죄한 아담의 유전자로는 죄만 가중할 뿐 하나님의 뜻과 목적은 이룰 수가 없었다. 이에 하나님은 ‘새 일’을 설계해야 했고, 예수님이 그 새 일의 주인공으로 오심으로 이 땅엔 하나님(생명나무)에게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잠시 열렸다. 하지만 자기 땅 자기 백성에게 왔지만 그 시대는 오늘날과 같이 범죄자 아담의 유전자로 난 자들로서 역시 영접하지 않았고 대신 십자가를 지고 피 흘려 돌아가시며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해야 했으니 곧 새 언약 계시록이다. 이제 이천년이 지나 새 언약 계시록은 성취시대를 맞아 약속대로 다시 오신 예수님은 계시록을 다 이루셨다. 새 언약 계시록을 이루신 예수님은 약속한 목자와 하나되어 성취된 계시록의 사건을 증거하고 있으니 아담 범죄로 막혔던 길은 비로소 육천년 만에 완전히 열리게 된 것이다. 이천년 전 하나님에게로 나아오는 길이 예수님이었듯이, 오늘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완성되는 이때 하나님과 예수님에게 나아오는 길은 곧 이 시대 약속한 목자(이긴 자 새요한, 희: 熙)다. 인류는 지금까지 길을 잃고 방황하며 살아왔지만, 이젠 거리마다 표목이 서고 안내하는 길표가 나부끼고 있으니 길을 모른다 핑계할 수는 없게 된 것이다. 오늘도 길을 물어 본향을 찾아가기를…

[천지일보 시론] 서기동래(西氣東來)… 동성서행(東成西行)

지구촌을 살아가는 지상만민들은 꼭 한 가지 확인해야 할 때가 왔다. 이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고 창조한 만물을 다스려 오신 창조주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확인해도 되고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법이요, 명령이다. 더욱이 그래야 하는 이유는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며, 삶과 죽음보다 더 크고 중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운행돼 온 인류는 지금 바로 그 기로에 서 있으며, 그 옛날 옛적부터 ‘천지분간’ 할 때가 있음을 알려온 이유이기도 하다. 천지를 분간해야 할 것에 대해 가장 정확하고 이치와 순리대로 기록된 예언(약속)서가 있다면 바로 기독교 경서인 성경(聖經)이다. 그래서 이 성경은 오늘의 이 한때를 약속해 놨으니 ‘언약서(言約書)’라 했고, 하나님(神)과 백성(選民) 간에 맺은 약속이기에 ‘신서(神書)’라 했고, 신서라 함은 반드시 언약을 지켜야 한다는 절대성을 담보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약속은 한 번이면 족할 텐데 왜 구약이 있고 신약 곧 새 언약이 있단 말인가. 또 이 약속 안엔 무엇이 이뤄졌고 또 무엇이 약속돼 있단 말인가. 이에 대해 지면 관계상 소상하게 다 말하긴 어렵지만 대신 조선시대 유학자이자 천문‧지리학자였던 격암 남사고 선생의 말을 인용해 그 답을 찾아가 보자. 남사고 선생이 남긴 ‘서기동래’다. 성경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생기(말씀)를 넣어 창조했으니 최초의 사람 아담이며, 그에게 돕는 배필을 붙여줬으니 하와다. 이들을 동방의 에덴(낙원)에 두고 지으신 만물을 그에게 주어 다스리게 했다. 하지만 뱀(사단, 마귀, 용)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금지시킨 선악과를 따 먹으므로 지구촌엔 죄가 들어왔고, “범죄하면 영혼이 죽는다”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었던 인생에겐 생로병사가 찾아왔고, 하나님은 본질상 죄와 함께할 수 없어 지구촌과 인생을 떠나고 말았다. 인생의 나약함과 배도로 우주만물을 창조한 하나님은 지으신 만물을 마귀에게 내어 주고 말았으니 지구촌은 하나님 대신 사단 마귀가 오늘날까지 주관하며 인생으로 하여금 허무한 데 굴복하며 종노릇하며 살아오게 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으로부터 약 육천년 전 지구촌 동방에서 벌어졌던 하나님의 기막힌 사연이다. 하나님은 인생을 사랑하사 일순간도 쉬지 않고 죄를 없애고 다시 하나님과 인생이 함께하는 지상낙원을 이루기 위해 달려왔으니 바로 지금 이 순간까지다. 하지만 범죄자 아담의 유전자로 난 인생으로는 도무지 죄를 없앨 방법이 없었으니 예수 초림 이전까지의 역사가 이를 잘 증명해주고 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사람(혈통)의 씨가 아닌 하나님의 씨를 통한 새 시대를 설계해야만 했으니 바로 ‘새일 창조’의 역사다. 이 새 일은 곧 ‘두 가지 씨를 뿌리는 일’이며 ‘새 언약’하는 것이었다. 새 일의 주인공으로 오신 초림 예수님은 하나님의 씨 곧 좋은 씨를 뿌렸고, 좋은 씨가 뿌려진 밭에 마귀도 가라지 씨를 함께 뿌렸으니 약속대로 예수교회(밭)엔 하나님의 씨와 마귀의 씨가 뿌려지게 됐다. 또 예수님은 재림하실 것을 약속하고, 다시 와서는 씨 뿌린 밭에서 가라지는 먼저 단에 묶어 불사르고, 익은 곡식은 추수하고 인쳐서 약속의 새 나라 새 민족 12지파를 창조할 것을 새 언약했으니 곧 ‘요한 계시록’의 예언이다. 바로 이 사실 즉, 천국복음을 제자들에게 ‘땅끝’까지 전하라 했고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면 그제야 끝이 온다고 일렀으니, 이를 일컬어 ‘서기동래’라 했던 것이다. 이제 예수 재림을 기다려 온 인류가 바로 들어먹어야 할 것은 약속대로 땅끝은 동방이며 해 돋는 곳으로서 하나님의 역사 곧 새 언약 계시록대로 이 모든 역사가 성취됐으니 확인해야만 한다. 신천지(총회장 이만희) 12지파가 천국비밀인 계시록이 성취된 성취 사건을 예언에 담아 지상만민에게 마지막 일곱째 나팔소리며 새 노래로 천지를 진동시켰으니 이제 듣지 못했다 핑계할 수 없게 됐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약속 곧 사복음서와 계시록의 예언이 서기동래한 후, 동방에서 성취된 동방의 회복의 역사를 다시 서쪽과 지상만민에게 역으로 나팔 불어 알리고 있으니 ‘동성서행’의 역사다. 이제 지상만민은 이 나팔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 회복의 역사에 참여해야만 한다.

[천지일보 시론] 실낙원(失樂園)이 회복되는 참 광복의 시대… ‘道 닦으러 山으로 가자’

이상면 천지일보 편집인. 우리 민족은 예부터 도(道)를 중시 여겨온 민족이다. 뿌리 깊은 민족종교 가운데 도교(道敎)가 있는 이유다. 그래서인지 예부터 세인들은 한결같이 도(道) 닦으러 산(山)으로 간다고 했다. 한자의 뜻을 보면 이 도는 길 도다. 요즘은 높고 깊은 산에 산불 예방을 위해 임도(林道)가 필요하겠지만, 옛날엔 굳이 산에다 길을 낼 필요가 있었을까. 그 산도 아니며 그 도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산은 도대체 어떤 산이며, 그 도는 도대체 어떤 도일까. 성인들이 일찌감치 알려온 그 산에서는 도통군자(道通君子)들이 출현한다고 했으니 정녕 그 산은 저 산이 아니라 이 산이 분명하다. 도통군자란 진리를 통달한 사람을 일컫는다면, 인산인해(人山人海) 비산비야(非山非野)라 했으니, 이 산은 흙과 돌과 나무로 구성된 저 산이 아니라 이 산, 곧 진리를 통달한 도통군자들이 있는 진리의 성읍이 틀림없다. 따라서 도 닦으러 산으로 간다는 의미는 바다 같은 세상 즉, 비진리가 난무한 혼탁한 세상에서 자유를 찾아 사선을 넘듯, 진리를 찾아 진리가 나오는 교회로 옮겨간다는 뜻이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는 예수님의 가르침이자 명령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알 것은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롬 8:19~20)고 했고,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벧후 2:19)고 하신 바와 같이, 천하 만물은 자기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에 속한 것이 아니요, 아담 범죄로 천하 만물은 마귀(뱀 용 사단)의 소속이 돼 생로병사의 굴레 속에서 신음하고 있으며 오직 하나님의 아들들 곧 도통군자들이 출현하기만을 학수고대해왔다는 사실이다. 즉, 도 닦으러 산으로 간다는 말은 언젠가 이 땅에 도통군자들이 출현할 산이 나타날 것을 예고해온 예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 같은 예언이 필요했을까를 생각해보게 된다. 언급했듯이 약 육천년 전 창조주 하나님은 생기(말씀)로 생령 즉,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했으니 아담이었고 그에게 돕는 배필을 허락했으니 하와였다. 이들을 동방의 에덴동산 두고 지으신 만물을 지키고 다스리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금지한 선악과를 먹고 선에서 악이 됐고, 하나님이 맡긴 지구촌을 가지고 사단 마귀에게로 가고 말았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죄 지은 인생들이 생명나무 과실을 따먹고 영생하는 일이 생길까봐 염려돼 생명나무로 나아오는 그 길을 아예 막아 버렸으니, 육천년 긴긴 세월 생명 대신 악의 소굴 즉 사망이 왕 노릇 하며 오늘까지 지구촌을 식민지 삼아 왔던 것이다. 이천년 전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심같이, 나는 참 포도나무요...(요 15:1)고 하심같이, 잠깐 생명나무로 나아가는 길이 열렸으나, 그들(유대인)은 자기 땅에 온 메시아를 받아주지 않고 십자가에 메 달아 죽이므로 다시 그 길은 막힐 수밖에 없었고 오늘까지 이어져 왔던 것이다. 구약 성경대로 오신 예수님(요 5장)이 하나님과 구원의 길이요 문이었듯이, 오늘날 새 언약(계시록)의 약속대로 오신 이긴 자(새요한)가 또한 이 시대 지상 만민이 찾아야 할 구원의 길이요 문이다(계 2, 3장, 12장). 그 증거는 다음과 같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계 2:7)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계 22:2) 그렇다. 육천년 만에 아담 하와의 범죄로 막혔던 그 길이 열리고 잃었던 낙원(실낙원)이 회복되는 그 순간이니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이 없고 기쁜 일이 없다. 이천년 전 십자가 지시고 가신 예수님은 처소를 예비하러 가셨고, 처소가 예비 되면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으며, 인류와 신앙인들은 이 약속을 믿고 기다려왔다. 이제 땅끝 동방에서 이 약속이 이뤄져 나타났다. 새 언약의 약속대로 용의 무리와의 전쟁에서 진리 곧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로 싸워 이긴 자가 출현하므로 지상낙원 곧 잃었던 하나님의 나라 새 나라 새 민족 신천지 12지파가 창설된 것이다. 이는 하나님도 예수님도 태초의 말씀이고 빛이라 했으니 곧 진리다. 진리와 빛으로 창조했으니 오늘날의 신천지 창조는 잃었던 에덴동산의 회복(回復)이며 참 광복(光復)이다. 바로 이곳, 이천년 전 유대 땅의 시온산에 예수님이 육체로 오셨듯이, 다시 오시는 예수님은 오늘날 이긴 자(시온)와 함께 모인 영적 시온들이 모인 영적 시온산(진리의 성읍)에 오시게 되니 이것이 새 언약 계시록의 약속이다. 이제 이 산에서 도가 나오니 지상 만민들은 도를 닦으러 저 산이 아닌 이 산 바로 영적 시온산인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으로 나아와야 하며 올라와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이 시대가 반드시 지켜야 할 계명이며 약속이며 양식임을 절대 잊지 말라.

[천지일보 시론] 거짓 위력의 시대는 가고 도의 곧 진리의 시대가 왔다

이상면 천지일보 편집인. 인간에게 있어 가장 가치 있는 게 있다면 과연 뭘까. 그것은 아마 약속이 아닐까 싶다. 창조주께서 지으신 만물 가운데 유독 우리 인간에게만 허락된 가치일 게다. 본능으로 살아가는 짐승과 달리 이성을 허락한 이유도 어쩌면 여기에 있지 않을까. 이제 생각해 보자. 인간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 만약 약속이 없다면 어떤 세상이 될 것이며, 나아가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또 어떻게 될까. 이 글을 읽으면서 고개 돌려 나와 내 주위와 사회와 나라와 지구촌을 한번 보자. 그렇다 온통 약속이고 약속으로 인해 세상은 어지럽지만 그래도 움직여지고 돌아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생각해 볼 것은 약속은 작게는 인간관계며 크게는 규범이며 법이다. 약속은 약속한 내용이 있어야 하며, 약속한 내용을 지킨다는 전제를 가진 게 바로 약속이니 곧 법이 되는 것이다. 지구촌 모든 나라는 자기 나라의 법이 있고, 세계는 지구촌이라는 공동체가 어우러져 움직여가야 하기에 국제법이 존재하는 이유다. 우리나라 역시 육법전서가 있으니 곧 약속이며, 약속이기에 지켜야 한다. 만약 지키지 않거나 못했다면 법에 기록된 대로 죄로 인정돼 벌을 받게 된다. 이제 살펴본 내용을 생각하며 한번 세상을 보자. 세상은 돌아가는 것 같지만 아비규환 그 자체다. 왜일까. 원인 없는 결과가 없다 했으니, 그 답을 찾아보자. 그 답은 약속이 지켜지지 않기 때문이니 정답이다. 자신과의 약속에서부터 시작해 개인 단체 나라 국제 간의 모든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니 분명한 현실이며, 존재하는 것은 약속보다 상위에 있는 힘의 논리뿐이다. 사회와 나라와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툼과 분쟁과 전쟁 등의 분탕질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면 틀림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소결론 하나를 도출해 낼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의 약속(개인, 나라, 정치 외교 군사 등)은 불변이 아닌 가변성을 가진 믿지 못할 약속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동서고금의 성인들을 통해 송구영신이란 말을 간혹 듣곤 한다. 이는 한 시대가 가고 새로운 한 시대가 온다는 의미다. 여기서 가는 세상은 어떤 것이고 오는 세상은 어떤 것이기에 그 오랜 세월 송구영신할 것을 외쳐 왔을까. 그것은 바로 인생들의 허무하고 믿지 못할 생각과 약속으로 인해 온통 분탕질하며 아비규환인 이 어지럽고 더러운 세상 곧 사람 간의 약속으로 버텨 온 끈질긴 세상이 끝난다는 것이며, 나아가 거기엔 진리(약속한 것은 지켜지는 것)가 없기에 곧 생명이 없었고 그저 생로병사의 굴레에 얽매여 살아왔을 뿐이다. 그렇다면 찾아오는 새 시대는 어떠한 시대기에 그 오랜 세월 참고 견뎌야 했던 걸까. 그것은 바로 진리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 진리의 시대는 사람 간의 약속 즉, 지켜지지도 지킬 수도 없었기에 오직 힘의 논리 곧 위력의 시대가 아닌 도의의 시대가 왔다는 의미다. 도(道)는 곧 태초부터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는 곧 진리인 것이다. 진리는 가변성이 아닌 불변의 원리를 가졌으니 곧 약속한 것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의 약속은 믿을 수 없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곧 약속의 말씀이며 이 약속은 반드시 성취되니 곧 진리인 것이다. 이는 이 말씀 안에 생명 곧 창조력이 있으므로 살아 역사하게 되니 기록된 대로 또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는 것이다. 성경이 구약과 신약으로 기록된 이유며,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있는 근거는 이미 약속한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이뤄져 나타났기 때문이니 불변의 약속 곧 진리다. 세상은 하나님 대신 지구촌을 온갖 거짓으로 다스려 온 불법자 용의 통치시대 곧 사람의 말(약속)로 점철돼온 시대는 끝이 나고, 창조주 하나님이 진리로 통치하는 도의의 시대가 그야말로 긴긴 세월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약속돼왔었고, 그 약속하신 대로 찾아 왔으니 그야말로 진리의 시대다. 이제 지구촌은 위선과 거짓 힘의 논리가 아닌 자유와 사랑과 평화와 진리가 충만한 세상으로 변화될 것이니, 이 좋은 세상을 위해 지구촌은 하나 돼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천지일보 시론] “진자는 이긴 자의 종” 곧 ‘승자 독식’의 시대가 무너지고 있다

이상면 천지일보 편집인. 흔히들 진리를 말한다. 과연 진리가 뭔지 알고 말하기나 하는 걸까. 이를테면 밭에 콩씨를 심었으면 콩이 열리니 이것이 진리며,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넘어가니 이것이 곧 진리며 만고의 이치다. 이처럼 진리는 원인과 결과가 분명하고, 나아가 원인 없는 결과는 존재할 수 없다. 세상적 차원뿐만 아니라 종교적 차원에서도 들여다보자. 종교마다 경서가 있고, 자기 종교가 주장하는 경서(약속)가 없다면 애초부터 그 종교는 종교가 아니었다. 어쨌든 경서에 기록된 말씀(약속)을 일컬어 진리라 한다. 기독교에서도 불교(眞理=金剛)에서도 공히 진리라 한다. 앞서 세상의 진리를 언급했듯이, 진리란 변하지 않는다(불변)는 절대적 원칙을 지니고 있다. 믿음이라는 게 가변성이 있어 그럴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으니, 이 자체가 또한 이치며 진리다. 따라서 진리란 반드시 시작과 끝이 있어야 하니, 그것은 곧 예언과 성취다. 예언한 것이 성취된 것이 없다면 이 또한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없기에 반드시 예언했다면 이루어진 성취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기독교 경서에 보면 구약과 신약이 있으며 이는 약속의 말씀을 일컫는다. 물론 약속은 쌍방이 존재해야 성립되니 약속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선민과의 약속이다. 그런데 이 약속이 성경의 역사를 본 바 지켜지지 않았기에 예수님을 통해 새 언약 곧 다시 약속을 하게 됐으니 오늘날 신앙인들이 반드시 알고 깨달아 지켜야 할 계시록인 것이다. 이렇듯 종교는 진리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 진리 안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된다(벧후 2:19)는 말씀이며, 이 역시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이니 진리며, 진리기에 기록된 말씀대로 될 것이고 실제 종교사적으로나 인류사적으로나 그렇게 돼 왔다. 진리 그 자체인 기독교 성경에 보면, 창조주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시고, 그 지은 아담을 동방의 에덴동산에 두고 만물을 그에게 맡기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금지된 선악과를 먹은 후, 도리어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만물을 가지고 뱀에게로 가고 말았다. 이것이 지금으로부터 약 육천년 전 동방 에덴동산에서 벌어졌던 대 사건이다. 이로 인해 지구촌은 하나님 대신 뱀(사단, 용, 마귀)이 주관하고 통치하는 적반하장이 되고 말았다. 결국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된다는 말과 같이, 영생하는 하나님의 세계 곧 진리가 아닌 거짓의 왕 곧 마귀가 주관하는 생로병사의 종이 돼 지금까지 왔음을 지상만민들은 반드시 알고 깨달아야 한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는 말씀과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이 이를 두고 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 대목에서 깨달아야 할 것은 뱀이 한 유혹의 말은 곧 거짓말이었다는 사실이며, 지구촌은 지금까지 이 거짓의 영이 주관하는 거짓말로 점철돼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시 말해 거짓의 영(사단, 마귀)이 주관하는 종교세계가 가르쳐온 거짓말 곧 비진리로 이 세상까지 독차지 해왔으니 지구상에 이보다 더 큰 위력은 없는 것이다. 거짓 종교와 세상이 하나 된 지구촌의 현실을 지금 정확하게 읽고 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긴긴 세월 지구촌을 떠나가신 창조주 하나님은 지구촌을 다시 찾기 위해 육천년 만에 한 목자(이긴 자, 천택지인)를 통해 회복의 역사를 펼치고 계시니 지금 이때다. 거짓에 굴복당하고 조롱당하고 핍박당하며 살아온 긴긴 세월을 견뎌 온 것은 바로 오늘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지상만민들은 지금 이때가 어떤 때인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만물의 이치 곧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넘어가는 이치와 같이, 인류문명의 발상지 곧 동방문명(황하, 인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에서부터 그리스 헬라(모든 길은 로마로) 포르투칼 영국(해가 지지 않는 나라), 그리고 청교도들이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을 발견(인디안 등 원주민 살육)해 세운 나라 곧 미국이며 근대와 현대문명의 종주국으로 오늘날까지 군림하며 지구촌을 움직여 온 게 사실이다. 밝힌 바대로 인류사를 통해 가늠이 가능한 것은 시대마다 승자 독식 즉, 진자는 이긴 자의 종이 돼 살아왔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시대마다 늘 그랬듯이, 승자의 논리 의식 가치관에 적응해야 했으니 어쩌면 그들의 논리와 생각과 의식이 곧 진리 아닌 진리가 돼왔고, 만약 그들의 생각과 의식을 따라가지 못하면 뒤처지는 것이고 이단아가 돼야 했다. 지금 한창인 우크라 사태 역시 모든 지식과 정보는 미국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미국의 승자 논리로 지구촌 기자들은 받아쓰고 있고 또 그렇게 그것이 진리고 진실인양 세상은 따라가고 믿고 있고 인식돼 가고 있다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섭리에 따라 이제 동쪽에서 힘차게 떠오른 태양은 서쪽으로 와 온 지구촌을 석양빛으로 붉고 화려하게 물들이더니 서서히 태평양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있음을 이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이 가장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며 가라앉은 해는 서서히 다시 동방에서 힘차게 떠오를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육천년 전 그 찬란하고 화려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자 말이다. 이젠 지상 만민들은 거짓의 위력이 아닌 공의와 공도와 공평과 공정과 진실과 사실과 정의만이 위력이 되는 참된 세상을 앞둔 마지막 몸부림임을 생각하고 잠시만 견뎌보자.

[천지일보 시론] 어찌 우리 그날을 잊으랴… 55日간의 ‘다부동전투(八公山전투)’

이상면 천지일보 편집인. 6월 6일은 현충일이다. 6일 새벽 4시 45분 지대지미사일(애이태큼스) 8발이 새벽 공기를 가르며 동해상으로 날아올랐다. 이는 전날 북한의 8발의 단거리탄도미사일 도발에 대한 대응차원에서다. 우리 군이 7발, 미군이 1발해서 8발을 쏴 올렸다는 것은 철통같은 한미연합방위태세를 강조하기 위함일 게다. 왠지 70여년 전 그날이 오버랩 되는 것은 필자의 기우(杞憂)일까. 윤 대통령은 6일 현충일 추념사에서 과거 박근혜 정권에서도 피했던 공산세력이라는 표현을 거침없이 사용하는 등 대북 경고 메시지를 한층 고조시키고 있다. 이는 지난 문재인 정권의 대북관계를 급선회한 것으로 앞날의 대북관계를 예측 가능케 하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중국과 미국의 불편한 관계, 서방(나토)과 러시아와의 관계 등 복잡한 국제 정세와 함께 한미 공조체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미 핵전력 일부가 한반도로 움직이면서 한반도 상황은 또다시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닫는 모양새다. 과연 북한 김정은은 이같이 급선회한 남측 반응과 한미 공조태세를 지켜보면서 어떤 카드를 꺼낼 것인지 사뭇 궁금하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산화한 순국선열의 넋을 기리는 엄숙한 날을 맞이한 것이다. 그날에는 이름 모를 산하에서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수많은 젊은이들은 피를 흘려야 했다. 시산혈하(屍山血河)라 했던가. 시체가 산을 이루고 젊은 피는 하천을 이루었다는 가슴 먹먹한 그날을 절대 잊어선 안 된다. 우리에게 6월은 너무나 아픈 달이다. 우리 눈앞에 펼쳐진 조국의 산야에 흐드러지게 또는 싱그럽고 푸르게 뒤덮은 이 아름다운 연초록의 물결은 그날의 그 피로 만들어진 것임을 한시도 잊어선 안 된다. 필자는 6월을 맞아 그날의 그 아픈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았을 것만 같은 애국충정의 젊은이들의 한(恨)이 서린 역사의 현장을 찾았다. 그곳은 바로 대구 팔공산 기슭에서 처절하게 싸우다 산화한 피의 현장 다부동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몇 가지 사실들이 있다. 가끔 6.25전쟁은 북침인가 남침인가를 놓고 웃지 못할 논쟁이 있어져 왔다. 우리는 일제 식민지로부터 해방 후 6.25라는 동족상잔을 겪어야 했다. 그 후 잿더미 속에서 먹고 살아야 했기에 그 무엇보다 경제가 최우선이었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를 외친 끝에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한 경제 성장을 가져왔다. 이제 먹고 살만하니 또 다른 욕구가 터져 나왔으니 바로 민주화 요구였다. 자유 대한민국에서 민주화 요구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두 동강난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누가 보더라도 정상적인 민주화는 아니었다. 건전한 민주화의 이면엔 북한 공산 사회주의 사상에 세뇌된 젊은이들이 그들의 허무맹랑한 사상에 고무돼 대한민국 전복이라는 특수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선동의 장으로 변질되고 말았으니 불편한 진실이다. 이는 공안정국 즉, 기득권의 정권유지를 위한 명분을 제공하는 역기능적 현상으로 나타나고야 말았다. 이 같은 이념적 소용돌이 속에서 동족상잔의 비극도 모자라 남침이냐 북침이냐를 놓고 소모전을 벌였던 지난날이 부끄럽기 그지없다. 또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전쟁 기념이라는 표현이다. 아무리 적과 싸워 이겼다 해도 전쟁을 기념할 수는 없지 않은가. 특히 용산에는 전쟁기념관까지 서 있다. 물론 국군과 미군이 함께한 서울 수복(收復)과 북진(北進)을 기념한다고는 하나 그 표현만큼은 재고의 대상이 돼야 함이 옳다고 필자는 늘 강하게 주장해왔다. 특히 우리가 겪은 전쟁은 동족끼리의 전쟁이라고 한다면 도저히 전쟁기념이란 표현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으니, 전쟁이 남긴 상처와 흔적을 통해 반면교사 삼아 다시는 이 같은 전쟁이 없어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전쟁상흔관(戰爭傷痕館)이라 함이 정녕 옳을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6.25전쟁은 결단코 남침이다. 70여년 전 남과 북은 오늘의 남과 북의 경제력의 정반대로 보면 틀림없다. 당시 김일성은 약체 남한에 대한 적화야욕을 숨기지 않았고, 급기야 소련 스탈린을 찾아가 한반도 적화통일을 위한 사인(허락)을 받아냈다(처음 방문 시엔 스탈린이 미국과의 관계를 염려해 거부함). 김일성은 이어서 모택동마저 찾아가 승인을 받고 나아가 군사적 지원까지 약속을 받아낸 후,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를 기해 탱크를 앞세우고 3.8선을 넘어 남침을 감행했다. 당시 남한의 군사력은 북한의 군사력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으며, 더군다나 외출과 휴가로 전선은 그야말로 무방비상태였으며, 북한은 바로 이틈을 노려 물밀듯이 밀고 내려왔다. 남한은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북한군의 손에 넘겨줘야 했고, 임시 수도로 팔공산을 저지선으로 하는 대구로 옮겨야만 했다. 7월 20일, 김일성은 직접 수안보(충주)에 진을 치고 있는 북한군 본부를 전격 방문했고, 북한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 김일성은 사기충천한 북한군 수뇌부에 8월 15일까지 남한을 적화통일 시키라는 절대명령을 내렸다. 풍전등화(風前燈火), 이 말은 이때를 두고 생긴 게 아니었을까. 그러나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살아있었다. 대구 팔공산을 중심으로 국군은 1사단 등 주력부대를 대구 팔공산(다부동)에 놓고, 포항 영덕 다부동 왜관 창녕 마산을 잇는 한국군 최후의 보루이자 전선이 만들어졌으니 흔히 말하는 낙동강 최후 방어선 낙동강전선이다. 대한민국 지도 10%를 남겨 놓은 상태에서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으면서 선택한 대한민국 생존을 위한 마지막 생명선이었다. 72년 전 가장 뜨거웠던 여름, 8월 1일부터 9월 24일까지 55일간 전투, 팔공산 기슭에서 벌어졌던 바로 그 다부동 전투다. 가장 짧은 기간에 북한군 약 1만 5천여명과 국군 약 1만여명이 전사한 인류 최대이자 최고의 격전지, 팔공산 전투 또는 다부동전투를 잊어선 안 되는 이유가 있다. 그날 조국은 이 젊은이들만을 믿을 수밖에 없었고, 젊은이들은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심정으로 이 처절한 현실을 온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대한의 젊은이들은 그날 하나같이, 태어난 날은 다르지만 죽는 날은 같이 하자며 서로 다독이며 총과 대포 앞에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앞다퉈 싸웠고, 조국을 위해 하나밖에 없는 자기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졌으니 어찌 그 숭고한 영영들을 잊으랴! 시산혈하, 그날 그들의 고귀한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없었다. 그날의 그 피로 지연전이 없었다면 동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있을 수 없었으며, 9월 28일 서울 수복이 있을 수 없었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그날 그 현장에는 국군뿐만이 아니다. 당시 주력부대 제1사단 수색대대는 공부해야 할 어린 소년병과 학도의용군 500여명으로 편성돼 북한군과 결사항전 했다는 기록은 가슴을 더욱더 아프게 하고 있다. 이제 명심해야 할 것은 아직도 그 전쟁이 남긴 상흔을 간직한 채, 그날의 비극은 또다시 우리 앞에 더 참혹한 현실로 다가올 수 있다는 점을 절대 잊어선 안 된다. 참혹한 전쟁, 더 이상 지구상에 존재할 수 없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기존의 국제법으로도 정치와 외교로도, 군사적으로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오늘까지 이어온 인류역사가 잘 증명해 주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누가 무엇으로 어떻게 전쟁 없는 평화의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아니면 세계평화는 요원한 건가. 주지한 바 세상의 방법으로는 전쟁을 종식시킬 수 없음을 깨달았다. 전쟁종식과 세계평화는 이 땅과 세상의 방법이 아닌 하늘의 방법으로만이 가능하다는 진리를 분명 깨닫게 된다. 인류평화는 사람의 몫이 아닌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 하늘이 택한 한 사람, 대구(팔공산)가 낳은 한 사람, 팔공산 전투에 소년병으로 참전한 한 아이 곧 하늘문화세계평화광복(HWPL) 이만희 대표가 지구촌을 31바퀴나 돌면서 진행시켜온 지구촌전쟁종식을 위한 국제법은 온 세계 지도자와 전문가, 평화의 사자들이 인정하고 유엔에 상정을 눈앞에 두고 있다. 하늘이 허락한 전쟁종식과 세계평화를 위한 답을 가지고 말이다. 한반도 대한민국의 평화 통일은 인류세계의 평화를 가져오는 초석임을 알진데, 다 같이 조국 대한민국의 평화통일의 금자탑 쌓기를 힘쓸 때가 지금 이때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천지일보 시론] ‘WE ARE ONE’

이상면 천지일보 편집인. 지구상엔 수많은 종교가 있다. 그런데 이 종교(宗敎)란 무엇일까. 우선 알기 쉽게 직역하면 하늘의 것(비밀)을 보고 들은 자가 가르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창조주 하나님은 자기의 뜻과 목적이 있다. 이 뜻과 목적은 이룰 때까지 알 수 없게 감춰져 있는 비밀이다. 또 이 예언(약속)은 성취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예언하는 때가 있고, 성취되는 때가 있다. 즉, 기한이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 기한이 차면 목적이 이루어지는데, 이룰 때는 먼저 봉한 책(예언)을 열어 이루어야 하고, 이룰 때는 그 이룬 것을 한 사람(천택지인)에게 보고 듣게 하니(계시), 하나님의 뜻을 몰라 방황하던 만민에겐 비로소 하나님과 예수님의 뜻을 가르쳐 주는 선생 즉, 보혜사(保惠師)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이때가 되기 전엔 지구촌엔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말해왔지만 실상은 종교는 없었다는 의미며, 이는 참말이다. 이제 봉한 책이 계시되는 때를 맞이하므로 말만 무성했던 종교의 시대 대신 참 종교의 새 시대를 맞이하여 종교를 가르칠 수 있는 선생이 출현해 창조주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대해 소상히 가르침을 받을 수 있으니 그야말로 새 시대요 구원의 때다. 그런데 문제는 지구촌엔 종교가 왜 그리 많단 말인가. 종교라는 이름만 가졌다고 다 종교가 아님을 위에 설명한 예언과 성취라는 대목에서 감을 잡았으리라. 그렇다. 참 종교의 전제 조건은 바로 예언과 성취 즉, 약속이 있어야 한다. 약속이 없다면 미신(迷信)과 같으며, 이는 아예 종교나 신앙의 대상이 되질 않는다. 또 약속이 있다 할지라도 약속이 이루어진(성취된) 실상과 실체가 없다면 그 또한 무엇을 믿는단 말인가. 이것이 바로 진리이자 만고의 이치다. 지구촌에 상존하는 수많은 종교, 그중에서 그나마 종교라 할 수 있는 것은 동양의 3대 종교 곧 유불선이며, 그 이유는 경서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앞서 밝혔듯이 약속이 있어야 하고, 약속이 이루어지는 성취 순리 즉, 배도와 멸망과 구원의 순리가 있어야 하고, 배도자 멸망자 구원자가 약속대로 때가 되어 출현해야만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眞理)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니 곧 예언과 성취가 있기 때문이다. 그 외는 종교라는 이름만 가졌을 뿐, 하나님의 진리를 도용(盜用)했거나 아니면 그 나라와 민족의 문화(文化)이자 사교(私敎)에 불과하다. 이쯤에서 더 분명한 사실을 예언과 성취가 있는 성경을 통해 고찰해 보자.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 4장). 이로 보아 종교의 주인도 진리도 뜻과 목적도 오직 하나임을 명백히 알 수 있다. 이제 이런 말과 글이 온 세상에 나타났고 전해지고 증거 되고 가르치는 일이 있다면 지금의 때가 과연 어떤 때일까를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지금의 때는 바로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롬 9:28)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는 중차대한 때임을 천지분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일을 약속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새 언약 곧 계시록을 이루신 예수님이 함께하는 한 사람인 보혜사 곧 인류의 스승이 출현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 그는 지금 하나님과 예수님의 명을 쫓아 흩어지고 갈기갈기 찢어진 지구촌을 진리 안에서 통일하고 하나 되자고 생명을 다해 외치고 있으니 듣지 못했다 핑계치 못하리라. we are one하고 말이다.

[천지일보 시론] 35번의 ‘自由’ 외침… 자유대한민국의 그날이 오기를

이상면 천지일보 편집인. 근래에 들어와서 자유라는 단어가 이처럼 강조된 적이 있나 싶다. 자유대한민국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줄로만 알았는데 뭔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윤 대통령의지난 10일 제20대 대통령취임식 취임사에서 자유라는 단어가 무려 35번 등장했다. 무엇이 그렇게 자유를 갈망하게 했을까. 취임사의 내용과 방향은 당연히 대한민국의 새로운 지도자로서 향후 5년간 꾸려 나갈 국정 철학과 기조가 녹아 있었을 터, 그렇다면 과거 정부 아니 지난 문재인 정부는 자유대한민국이 아니었단 말인지 국민들은 혼란스러울법한 대목이다. 자유, 이 자유는 민주주의의 그 자체며 가치며 심벌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민주주의의 정의와 가치는 퇴색돼 가기 시작했다. 우선 표면적으로 본다면 막스 레닌에 의한 사회민주주의가 등장하면서부터 상대적 개념으로 자유민주주의가 표방되기 시작했으며, 이는 하나의 이념(이데올로기, 신념) 논쟁의 도화선이 됐다. 이로 인해 지구촌엔 자유민주주의와 공산 사회민주주의라는 두 축이 형성됐고, 오늘날까지 분열과 대립의 원흉역할을 톡톡히 해 왔다. 진정한 자유는 근본적으로 평등과 공정의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여기서 평등의 개념부터 정리돼야 한다. 즉, 평등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다. 다시 말해 평등의 기준이 일한대로 갚아준다(대가를 받는다)는 것이냐 아니면 무조건 똑같은 대가를 받는 것이냐의 차이는 천지만큼이나 크다. 하지만 공산 사회민주주의에선 이같이 모순된 평등논리를 들고 나오면서 민주주의 가치관을 혼란케 해왔던 것이다. 인간의 이상적 추구를 파고들고 나아가 악용해 백성과 인민을 착취하는 구실로 삼아 왔으니 어찌 보면 천인공노할 대상일 따름이다. 문제는 아직까지도 우리 가운데 현실 불만세력의 출구 역할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은 여전하다. 해방 후 동족상잔의 상흔을 겪고 나서 산업화를 이루고, 그 후 민주화를 가져왔고, 그런 과정에서 특수계층은 산업화의 폐단을 교묘히 파고들어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이 강산 위에도 사회민주주의 건설을 기치로 수많은 조직이 우후죽순처럼 자라났고 그들이 뿌려 놓은 사상의 씨는 그동안 무럭무럭 자라 결국 오늘의 두 개의 진영으로 양분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소위 보수와 진보다. 보수(保守)는 말 그대로 국민과 국가를 지켜나간다는 의미다. 진보(進步)는 지키고만 있어선 안 되니 경쟁하고 받아들일 건 받아들여서 나라를 발전시킨다는 의미다. 이 말을 하고 보니 둘 중 하나라도 없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즉, 국가 경영을 수레에 비유하자면 두 개의 수레바퀴가 있어야 굴러가며, 바퀴 하나가 빠지면 제 자리에 주저앉아야 한다. 그렇다면 보수와 진보는 서로 죽여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니라 상호 경쟁하면서도 인정해야 하는 대상임을 이치를 통해 깨달을 수 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보수와 진보의 정의와 논리가 아닌 사람과 편을 모으는 패거리 내지는 모리배로 전락했다는 서글픈 사연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현실을 정확히 진단하고 분별할 때 진정 생각이 자유로워지고 나와 우리와 나라가 나아갈 방향이 선명해져 편견과 편향이 사라진 진정 자랑스런 자유대한민국으로 자리매김하지 않을까. 금번 윤석열 대통령의 자유의 외침은 지금까지 갇혀 있던 국민 의식에서 벗어나 모든 국민이 헤쳐모일 때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자유의 물결이 일어 자유대한민국의 새로운 이정표가 될 것이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최고지도자 윤석열의 자유 외침이 단순 진영논리에 갇혀 상대를 지적하고 폄훼하기 위한 발언은 아니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청와대를 국민의 품으로, 대통령실을 용산으로, 이는 역대 그 누구도 실행치 못하고 생각만으로 끝나야 했던 대 역사다. 그러나 무엇이든 시작하는 이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국민들에게 보여 준 결단력과 실행력은 진실했고 순수했고 솔직했고 과감했다. 그러한 큰 그릇의 기개로 분열된 대한민국이 아닌 하나의 자유대한민국 건설을 위한 35번의 자유 외침이었기를 다시 한 번 기대해 본다. 모순과 왜곡과 위선과 위장은 진영과 같은 방패막이를 앞세우게 되고, 그 뒤에 숨게 마련이다. 하지만 자유 또는 자유한 자는 솔직하고 순수하고 진실할 수밖에 없으니 곧 이치다. 진정한 자유인은 자기만의 생각과 고집과 아집과 틀과 형식과 진영을 무너트리고 그 틀 속에서 껍질을 깨고 나오게 돼 있다. 왜 그럴까. 자유하기에 굳이 갇혀 있고 숨어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진정한 자유대한민국에서 진정한 자유인이 되어 자유로운 세상에서 그야말로 자유의 날개를 펼치며 자유롭게 살아가면 어떨까.

[천지일보 시론] 五月의 교훈, ‘君師父一體’... 우리에게 ‘保惠師’ 곧 스승이 있다

이상면 천지일보 편집인. 왠지 5월하면 마냥 기분이 좋다. 이렇게 좋기만 한 5월이 벌써 중반을 넘어간다. 푸른 초장에 육축(六畜)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목가적(牧歌的) 풍경은 사뭇 아름답다는 표현을 넘어 마치 천국의 모습이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게 한다. 물론 아주 더 많이 아름답겠지만 말이다. 이 5월이 좋은 이유는 또 있다.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스승의 날이 있기 때문이다. 1년 12달 중 경축일 등 공휴일도 많지만, 이 5월만큼은 그렇게 복잡하고 어렵고 격식 있는 기념일 보다 한번 쯤 내 가족과 부모와 스승의 소중함과 그 가치와 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느껴보고 성찰하고 고마워하고 감사히 여길 수 있어 좋다. 개인적으로는 필자 또한 이 아름답고 싱그러운 5월에 태어나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군사부일체라 했던가. 이는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부모)의 은혜는 같은 것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똑같이 충과 효를 다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이는 누구든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항시 지키고 간직해야 할 최고의 덕목 중 하나다. 이쯤에서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라는 말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군사부일체의 또 다른 차원의 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달았을 때 군사부일체의 참 의미가 더욱 선명하게 다가 올 것이다. 그것은 바로 표면적이 아닌 이면적 즉, 영적차원의 의미다. 이 영적 이치를 깨닫게 하는 학문이 바로 종교(宗敎, 으뜸의 가르침)이다. 하지만 아무 때나 종교 즉, 영적(하늘)교육을 가르칠 수도 받을 수도 있는 게 아니다. 참 종교의 때(예언이 성취되는 때)가 오기 전엔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으니 그저 종교라는 말만 무성할 따름이다. 참 종교의 때가 되기 전엔 모두가 선생이고 박사가 되어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곧 그럴듯한 거짓말로 온 세상을 물들여왔고, 그 끝은 오늘이라는 종교세상의 말세를 온 힘을 다해 견인해왔던 것이다. 이같이 말세(末世, 종교세상의 끝)를 맞게 되니, 이제 만유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참된 목적이 이루어지는 때가 된 것이고, 하늘의 교육을 받고 하늘의 참된 뜻을 깨닫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것이 만고(萬古)의 이치며, 천지분간 못하고 살다가 천지분간하며 살아 갈 수 있으니 이 보다 더 좋은 때가 어디에 또 있겠는가. 송구영신 호시절(送舊迎新 好時節)이란 말은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이에 대해 종교적 표현으로 다시 설명한다면, 묵시(黙示, 예언, 봉한 책)의 시대에 살다가 계시(啓示, 열린 책)의 시대를 살게 된 것이다. 또 다시 말해 눈 뜬 장님으로 살다가 영안(靈眼)이 열려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그 위대한 섭리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시대를 맞이했다는 의미다. 이를 일컬어 참 종교의 시대며 계시의 시대며 구원의 시대라 하는 것이다. 참 종교란 묵시(예언, 봉한 책, 천국비밀)가 정한 때가 되니 성취(계시)되고, 그 계시된 열린 책을 천택지인 곧 한 사람에게 보고 듣게 하고 먹여줌으로써 이제 세상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영원한 새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이제 우리가 정작 깨달아야 할 것은 따로 있다. 생로병사의 굴레속에서 방황하며 살아가던 인생들을 계시(진리)로 참 하나님의 생각과 뜻과 목적을 깨닫게 하기 위해 자기 희생의 터 위에서 은혜로 보호하고 가르치시는 우리의 참 스승이 있음을 온 세상은 반드시 알아야 하고 찾아야 하고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이 스승(보혜사, 천택지인, 이긴자)이야말로 군사부일체의 주인공임을 잊지 말자. 우리의 임금 되시는 하나님과 참 스승이신 예수님과 진리의 성령이 함께 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야 어찌 살았던 묵인해왔지만, 이젠 반드시 우리의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안되는 절체절명의 때를 맞이했으니 이는 하늘의 법이요 시대적 명령이다. 지금은 듣기 어려울 수도 있겠으나 언젠가는 오늘의 이 글이 무엇을 말했는지 알게 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이 5월에 우리에겐 스승이 있음을 잊지 말자. 이 땅의 철학(哲學)이 아닌 하늘의 명철(明哲)을 가르쳐 줄 스승 말이다. 세상이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니 지상 만민들은 하늘이 보낸 보혜사(保惠師)를 맞이하라.

[천지일보 시론] 지금은 지상 만민들이 ‘천지분간(天地分揀)’ 할 때

이상면 천지일보 편집인. 격물치지(格物致知)라 했다. 이는 중국의 사서 중 대학에 나오는 말로서 사물의 이치를 연구해 자기 지식을 확고히 한다는 의미다. 또 지즉위진간(知則爲眞看)이라 했다. 이는 내가 참으로 알 때 비로소 보인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도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 할 찌니라(롬 1:20)라고 했다. 이를 종합해보면,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며, 그 속에 담긴 참뜻이 따로 있음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인들은 지적하고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아무 때나 담긴 참뜻을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천하에 범사에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전 3:1)라고 했듯이, 모든 일에는 목적과 기한과 정한 때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 3:7)고 하신 바와 같이, 정하신 목적을 이룰 기한이 차 그 정한 때가 도래했다면, 이처럼 그 목적을 이룰 정한 사람(천택지인)을 통해 이루시게 되니 지극히 당연한 순리며 진리다. 그렇다면 궁금한 것은 그러한 때가 언제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지극히 간단명료하다. 이 같은 사실을 밝히 알리는 일이 있다면 그때 곧 오늘(날)이 바로 정한 사람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때임을 깨닫게 된다. 그날이 이르렀다 할지라도 경(經)에는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라는 경고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창조주 하나님의 약속한 목적이 이루어지는 때 천택지인을 통해 이룰 것을 또 다음과 같이도 설명하고 있으니 들어 보자.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렘 1:10)고 하셨으니, 너라고 지목 받은 사람은 정한 사람 곧 천택지인이며, 그 정한 사람은 농부의 입장이며 건축가의 입장으로 보내심을 받게 될 것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기록된 내용을 보아 먼저 심은 게 있고, 먼저 지은 게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그 심고 지은 것이 어떤 연유에서인지 잘못되어 뽑아 버려야 하고 파괴시키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처했음을 절절히 알게 하고 있다. 즉, 먼저 창조한 심령들이 부패해 낡고 쇠하여져 없애지 않으면 안 되니 창조주 하나님이 함께해 재창조 곧 다시 심고 건설할 농부와 건축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이제 눈을 돌려 영적 들판을 보라. 2천년 전 창조주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보내 자기 밭에 좋은 씨 곧 하나님의 씨를 뿌리고, 같은 밭에 마귀가 마귀 씨를 덧뿌렸으니, 오늘날 예수교회엔 하나님의 씨와 마귀의 씨가 함께 자라왔음을 분명히 알게 한다. 이제 2천년이 지나 약속대로 추수 때(세상 끝)가 되어 하나님의 씨가 자라 열매가 된 곡식은 당연히 추수 돼 곳간에 갈 것이고, 마귀 씨 곧 가라지는 그 밭(예수교회)에 남아 불 사름 당할 것이 불 보듯 훤하니 이는 곧 하나님과 예수님의 약속이고 변치 않는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제 밭 곧 예수님 밭(예수교회)의 사명은 이로써 끝이 나니 이를 두고 추수 때는 세상 끝(말세, 종말)이라 한 것이다. 여기서 어렵지 않은 아주 간단한 진리 하나를 발견하게 되니 잘 들어봐야만 할 것이다. 내 자신이 하나님의 씨로 난 하나님의 자녀 곧 열매(곡식)라면 하나님이 정한 사람을 통해 추수할 때 그 음성을 쫓아 추수돼 갈 것이고, 마귀 씨로 난 가라지라면 마귀의 자녀가 되어 밭에 남게 될 것이고 불 사름 될 것이니 만고의 이치가 분명하다. 귀신이 귀신같이 안다는 말과 같이, 교회마다 추숫꾼 출입금지라고 써 붙인 것은 자신들이 귀신의 소속임을 스스로 나타낸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지금의 때가 영적 추수 때임과 신천지인들이 하늘의 계시를 가져와 전하는 천사임을 스스로 인정한 꼴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제 지상 거민들은 천지를 분간할 때가 왔음을 잊지 말라.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3)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천지일보 시론] 혹시 해 돋는 곳 東方을 아시나요… 朝鮮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

이상면 천지일보 편집인. 조선은 곧 고요한 아침의 나라(일명 해가 일찍 뜨는 나라, 해 돋는 나라)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중요한 사실은 이성계가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세운 이씨 조선 이전에 이미 최초 고대국가 조선이 있었다. 후에 이성계에 의해 다시 조선이라 명명되므로 고대국가 조선은 고조선(古朝鮮)이라 부를 뿐이다. 어찌 됐든 이 같은 사실로 보아 분명 우리 민족은 조선으로 시작해 조선으로 이어져 왔음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이다. 그러한 의미를 담고 있는 조선을 조선인보다 더 아끼고 사랑한 푸른 눈의 외국인들이 의외로 많다. 그중 약 100년 전 독일인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가 있다. 그는 선교를 목적으로 1911년 1차 조선을 방문했고, 귀국 후 당시 한국은 일본의 식민치하에 있었고, 그로 인해 일본의 조선민족문화 말살 정책에 의해 고귀한 문화가 사라질 것만 같은 위기감에서 베버 신부는 1925년 2차 방문을 하게 된다. 그리고 조선반도 삼천리 금수강산 구석구석을 직접 찾아다니며 영상과 사진에 담았다. 촬영을 마친 신부는 귀국 후,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라는 116분짜리 장편 흑백무성영화를 제작해 조선의 고귀한 문화를 알렸고, 지금 우리가 접하고 있는 희귀한 자료의 원천이기도 하다. 또 경기도 과천(果川)이 있다. 이 과천은 삼국시대 백제영토였으나 고구려 장수왕 때 남하정책으로 한 수 이남까지 고구려 영토를 확장했으며, 이때 과천이 고구려에 흡수되고 동사 힐로 불리게 된다. 지명의 어원을 보면, 돋을 동, 고을 힐을 써서 해가 돋는 곳 곧 동방을 의미하고 있다. 어찌 됐든 조선은 동방이고, 동방은 곧 해가 돋는 곳이며, 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해 돋는 나라는 바로 지금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틀림없다. 또 경서에는 동방과 땅끝과 해 돋는 곳과 모퉁이를 한 뜻으로 정의하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다(이사야서 41장 2절과 9절과 25절에서 확인이 가능함). 그렇다면 이 동방과 땅끝과 해가 돋는 곳의 참된 의미는 뭘까. 문자 그대로의 표면적인 뜻을 넘어 이면적인 뜻(참된 뜻)을 알고 깨닫기 위해선 반드시 찾고 만나야 할 서책(書冊)이 있으니 바로 예언과 성취가 있는 성경(聖經)이다. 이 성경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66권으로 기록돼 있다. 그런데 창세기(창 2:8)에 동방이 등장하고 있고, 성경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계시록(계 7:2, 계 16:12)에 해 돋는 데 또는 동방이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이사야 41장을 비롯한 구약 선지서 곳곳에 이 같은 단어가 등장하고 있다. 이제 궁금한 것은 지구상에 동쪽 방향이 아닌 곳이 없고, 땅끝이 아닌 곳이 없으며, 해가 뜨지 않고 아침이 오지 않는 곳(나라)이 없는데 도대체 무슨 말인가. 성경은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해와 빛이 우주 만물에게 생명을 주듯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해(시 84:11)와 빛(요일 1:5)에 비유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은 태초의 말씀이며 생명이며 빛이라 했다(요 1:1~4). 이 대목에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태초의 말씀은 약속(예언)의 말씀이며, 말씀 안에는 창조력이 있으므로 예언하신 말씀은 반드시 성취 곧 이루시니 곧 진리(眞理)다. 정리하자면 동방(땅끝, 해 돋는 데)의 참뜻은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는 곳을 의미하며, 이는 새 언약 계시록이 성경 곧 하나님 육천년 역사의 결론이라면 계시록의 예언이 성취되는 하나님 마지막 회복의 역사 현장임을 알 수 있다. 이를 다시 말하면 서기동래라 하듯, 예수님을 통해 서쪽에서 시작된 역사 곧 천국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졌다. 이제 때가 되어 이사야 41장의 말씀같이, 동방에서 사람을 일으키며 (2절) 내가 땅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9절) 내가 한 사람을 일으켜 내 이름을 부르는 자를 해 돋는 곳에서 오게 하나니 (25절)라고 하심같이 땅끝 동방에서 육천년 한 맺힌 회복의 역사를 천택지인 한 사람을 통해 완성지어 가는 곳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한반도 대한민국 금수강산이 바로 하나님이 약속한 약속의 땅이며 회복의 땅 곧 땅끝 동방(과천) 해 돋는 고을이다. 그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슥 14:8)

[천지일보 시론] 혹시 예언서 ‘추배도(推背圖)’를 아시나요… ‘말(言)이 씨(氏)가 된다’

이상면 천지일보 편집인. 약 1400년 전, 중국 당나라 태종 때의 예언서 추배도가 있다. 당시 관상학자 원천강과 천문학자 이순풍이 함께 지은 책으로 60가지가 예언돼 있으며, 매 내용마다 삽화와 참언으로 돼 있고 시기를 계산할 수 있는 육십갑자(六十甲子)까지 표시돼 있다. 하지만 이 추배도는 오랜 세월 금서(禁書)로 여겨져 왔으며, 금서가 된 이유가 예사롭지 않다. 한마디로 예언마다 너무 정확하게 이루어진다는 점에서다. 예를 들면, 당에서 금기시된 여 황제 등극(측천무후), 2차 세계대전과 일본의 패망, 덩샤오핑 등장 등 예언마다 적중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이 예언서가 두려운 대상이 됐고 금서가 된 이유가 됐다는 역설적 해석이다. 그 후 세월이 흘러 1990년대 중국 개혁개방 시기 느슨한 틈을 타 금서에서 풀려났으며, 홍콩, 대만, 마카오 등 중화권에서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로 인쇄돼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도 2011년 모 방송에서 소개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60가지 예언 중 55개가 적중했고, 이제 5가지 예언만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5가지 예언은 3차 세계대전과 인류를 구원할 인물 즉, 삼척동자(천택지인)의 출현과 전쟁종식과 세계평화와 다시는 악(惡)을 행하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예언은 마무리되고 있다. 예부터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있으며. 이는 그 말대로 이루어진다는 의미다. 입에서 입으로 구전돼 오는 온갖 이야기들이 괜스레 흘러오고 이어져 온 게 아니며, 정한 때가 되면 반드시 그 말대로 이루어져 나타날 것임을 암시해 온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약 77년이 지났다. 전쟁이 끝나자 세계는 다시는 전쟁과 죽음과 공포가 없는 지구촌을 만들어가자고 약속하고 다짐했다. 그 증표로 UN을 비롯한 수많은 평화단체가 등장했으며,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평화 운동가와 평화상(노벨평화상 등)이 난립했고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평화논리는 허구요, 모순이라면 틀리다고 항변할까. 소위 UN은 강대국(안보리 상임이사국과 거부권 행사 등)들의 힘의 논리를 적나라하게 펼치는 위선과 모순의 장이 돼 버린 지 오래다. 사람이 고안해 낸 평화논리 즉, 힘과 무기와 약속과 정치와 외교논리는 그저 허망한 속임수일 뿐 평화를 가져올 수는 없으며 오히려 전쟁과 죽음과 공포만 가중시킬 뿐이니 지금까지의 인류역사가 잘 증명해 주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 전쟁은 동서진영의 패권전쟁일 뿐이며, 어느 쪽이든 정의는 없다. 이유가 어찌 됐든 러시아의 영토침범과 무고한 민간인 학살은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행위며 용서해서도 안 된다. 심지어 유엔이 제노사이드(전쟁 범죄, 인종 민족 종교학살)로 규정할 수밖에 없는 러시아의 잔혹한 만행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 분명하다. 넓은 영토와 풍부한 농산물과 우수한 인적 자원을 가진 우크라이나라는 중립국을 한가운데 놓고 러시아와 서방(나토, EU)의 패권전쟁은 지금 이 순간도 수많은 목숨을 앗아가고 있다. 세계는 지금 분명히 목도하고 있다. 아름답고 행복하기만 하던 나라가 포성만이 들리는 아비규환의 피투성이로 전락했으며, 온 나라가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으니 이를 보고만 있어야 한단 말인가. 아니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더욱 기가 막힌 현실은 따로 있으니 이를 또한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러시아야 그렇다 치자. 서방진영을 대표한다는 미국 등 강대국들은 진정 전쟁을 멈추기 위한 노력을 얼마나 할까. 전쟁은 왜 장기전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이같이 참혹한 아비규환 속에서도 미국 등 소수의 강대국들은 자국의 이익(무기 판매 등)만을 위해 계산을 하고 있다면 지나친 진단일까. 우크라이나의 참혹한 상황을 지켜보는 인접 동유럽 국가들은 자국 방위를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강대국들의 무기판매시장이 돼 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심각한 것은 우크라이나 사태를 넘어 동서 급냉전시대로 회귀하면서, 태평양을 사이에 둔 두 대국(미국과 러시아)의 핵 위협은 위협의 수준을 넘어 실행까지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눈앞에서 현실로 펼쳐지고 있다. 이 같은 모순의 극치 속에서 우리는 냉정하게 앞서 언급한 예언서 추배도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60가지 예언 중 5가지를 남겨두고 지금까지 모든 예언이 적중했다고 한다. 그리고 5가지 남은 예언은 3차 세계대전과 인류를 구원할 한 아이의 출현과 전쟁종식과 세계평화와 다시는 악을 행하지 말라는 당부다. 이 대목에서 유독 한 사람에게 관심이 가는 이유가 뭘까. 90세가 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지구촌 전쟁종식과 세계평화를 위해 3회도 아니고 31회나 되는 길고 긴 여정에 몸을 실어야 했던 하늘문화세계평화광복(HWPL) 이만희 대표가 오버랩 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말이 씨가 된다고 했으니, 추배도의 57번째 예언으로 마무리 하고자 한다. 57번째 예언, 극악한 사태에서 키가 3척인 아이(삼척동자)가 모든 외국인들이 절을 하게 만든다. 파란 서양과 빨간 동양이 싸울 때 신(神)의 아들이 나타난다. 이 신사는 평화를 가져와 전쟁이 멈춘다. 이 믿을 수 없는 천재는 두 나라 사이에서 모든 전쟁을 끝낸다.

[천지일보 시론] 혹시 ‘무릉도원(武陵桃源)’을 아시나요?

이상면 천지일보 편집인. 누구를 막론하고 삶의 무게를 느낄 때마다 한번쯤은 생각해 보는 게 있다. 현실과 현세가 아닌 또 다른 이상의 세계(이상향, 유토피아, 낙원)를 꿈꿔 본 적이 있을 게다. 이 이상향을 다르게는 무릉도원이라 불러왔다. 삼천리 금수강산 아니 지구촌 그 어디를 가든 마치 선계(仙界)를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곳이면 의례히 무릉도원이라는 지명이 붙어있다. 그 유례를 살펴보면, 무릉도원은 중국 도연명(陶淵明, 시인)의 도화원기(桃花源記)라는 시(時)에 나오는 가상의 선경(仙境)으로서, 중국 후난성의 한 어부가 발견했으며, 복숭아꽃이 만발한 낙원이자 신천지(별천지, 이상향)를 비유하는 말로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다. 또 세종의 셋째아들 안평대군이 꿈에서 무릉도원을 봤고, 그 꿈 꾼 내용을 화가 안견에게 설명했으며, 안견은 들은 내용을 3일에 걸쳐 완성했으니 바로 우리나라 최고의 걸작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다. 그림의 내용인즉, 기암절벽위에 역시 복사꽃이 만발하고 띠 풀로 엮은 초막과 폭포수 아래 빈 배도 떠 있는 그야말로 꿈속의 낙원을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최고의 명 걸작 몽유도원도는 임진왜란 때(추정) 일본에게 소유권을 빼앗겼으며, 지금은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등재돼 덴리대학의 덴리 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하나 더 예를 들자면, 조선조 광해군 때 교산 허균의 홍길동전이 있다. 서자로 태어난 허균(누이 허난설헌)은 비범한 능력과 빼어난 지식과 문장가였으나 적서차별 등 사회의 모순과 당쟁으로 탐관오리가 들끓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고, 기득권만이 살아갈 수 있는 불평등 사회를 보면서 급기야 명작을 남겼으니 바로 홍길동전이다. 소설 속의 주인공 홍길동은 자신이 평소 이상으로 삼았던 가상의 인물 의적 홍길동을 통해 활빈당을 조직해 불쌍한 백성을 도와주는 의적(義賊)으로 묘사돼 있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현실을 피해 유토피아 곧 율도국(栗島國)이라는 이상세계를 건설하는 내용이다. 참고로 이 홍길동전은 내용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국문소설이라는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기도 하다. 어찌 됐거나 이제 하고 싶은 말은 인생은 누구나 고단한 삶 속에서 때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피안의 세계 곧 이상세계를 한 번쯤은 꿈꿔왔다면 아마 그것은 거짓 없는 진심일 게다. 그런데 우리가 꿈꿔온 무릉도원이 그저 꿈속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귀 기울여보자. 무릉도원이 우리의 염원이었다면, 그것은 언젠가 그 실체가 나타날 일이었으니 곧 미리 보여 준 예언과도 같았다. 범사(凡事)엔 미리 말하고 보여줄 때가 있고 그 기한이 차 나타날 때도 있으니, 지금 우리 눈앞에 그 실체가 현실로 나타나 우리가 목도하고 있다면 믿겠는가. 인류가 꿈꿔온 무릉도원은 아리령 고개를 넘고 또 넘어 부지불식간에 홀연히 우리 곁에 찾아왔다면 이 또한 믿겠는가. 그렇다. 믿기 싫어도 믿어야 하고, 믿기 어려워도 믿어야 한다. 하지만 무조건 믿어선 안되니 반드시 확인해 보고 믿을 만한 증거가 분명하다면 믿어야 한다. 조선의 유학자 격암 남사고선생은 천택지인 삼풍지곡 식자영생 화우로(天擇之人 三豊之穀 食者永生 火雨露), 세인하지 삼풍묘리 유지자포 무지기(世人何知 三豊妙理 有知者飽 無智飢), 천도경전 무릉도원 차거인민 무수려(天道耕田 武陵桃源 此居人民 無愁慮), 태고이후 초락도 사말생초 신천지(太古以後 初樂道 死末生初 新天地)라 했다. 그렇다. 이 무릉도원(武陵桃源)은 바로 신천지(新天地)다. 신천지는 창조주 하나님의 성경 속에 긴긴 세월 약속으로 있다가 이제 때가 되어 천택지인 곧 이긴자(약속의 목자, 예수님의 대언자)를 통해 육천 년간 하나님의 창조물을 빼앗아 주관해 오던 용(사단 마귀 뱀)과 예수님의 피로 싸워 이기고 세운 신천지 12지파다. 이 신천지는 인류가 환난 가운데서 피해 도망가야 할 산(시온산) 곧 십승지(十勝地, 비산비야 非山非野, 인산인해 人山人海)며 자유와 평화와 사랑만이 존재하는 영원한 나라임을 제발 믿으라. 온 인류가 방황하며 부지불식간에 나타나기를 그토록 바라고 원하던 동방의 에덴이 회복되는 순간이며, 사망 고통 애통 눈물 아닌 영원한 생명의 세계가 펼쳐지는 그야말로 무릉도원이다. 어쩌면 이 한 날을 위해 지구촌엔 희생의 역사가 점철 돼왔고, 이제 수고를 멈추고 창조주 하나님의 품 안에서 쉴 수 있는 그 날이 왔음을 확인해야 한다.

[천지일보 시론] 우크라이나의 비극… 새벽닭이 울기 전이 가장 어둡다

이상면 천지일보 편집인. 교착상태에 빠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군은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거점으로 동부지역(돈바스)을 선택했다. 두 나라 사이의 접경으로 일부 지역은 이미 친 러시아 진영으로 넘어간 곳이기도 하다. 세계 군사력 2위인 러시아는 25위의 약세 우크라이나로부터 자존심을 구긴 상태다. 푸틴의 입장에선 전쟁의 명분도 성과도 없는 전쟁에 그야말로 체면이 말이 아닐 것이다. 우크라이나 수도인 키이우 등 주요 도시 공략이 힘들어지자 전세 역전을 위한 고육지책(苦肉之策)으로 봐야 한다. 우크라이나 군은 수도 키이우를 완전 탈환했으며, 전열을 가다듬으며 재무장하고 있다. 어쨌거나 이 글을 쓸 때는 이미 우크라이나 동부전선엔 화염이 하늘을 뒤덮었을 것이며 전세는 오리무중이며 예단하기도 어렵다. 동서 패권놀음에서 기분이 나쁘다고 약속도 협약도 한순간에 종이쪽지가 되는 알 수 없는 세상, 예측 불가능한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지금 지구촌은 힘이 있다고 영토를 공격하고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은 민간인을 학살해도 속수무책이다. 수많은 생명이 이 순간에도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죽어가고 있다. 하지만 모두가 명분 논리에만 급급한 채, 선뜻 해결책을 못 내놓고 있는 게 현실이다. 아니 사람의 고안(考案)으로 해결책이 있기나 할까. 나만, 또는 우리만 괜찮으면 된다는 이기적 발상으로 세상은 그저 강 건너 불구경만 하고 있을 뿐이다. 지구촌에 세계평화를 위해 설립된 기구가 없지는 않다. 먼저 국제연맹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20년 미국 윌슨 대통령에 의해 국제평화유지와 협력촉진을 목적으로 설립된 최초 국제평화기구다. 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1945년 세계평화와 각국의 안전보장을 위해 오늘날 유엔(UN)이라 부르는 국제연합이 창설됐다. 하지만 한마디로 유명무실하다. 국제평화기구의 논리는 그야말로 이율배반적 논리로 전쟁을 막기 위해선 전쟁을 해야 한다는 모순의 극치를 보이며 오늘날까지 지속돼 왔으니, 그 실체는 바로 소위 말하는 평화유지군이다. 유엔평화유지군의 평화논리는 강대국(5개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이 세계 현안에 즉시 개입해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꼼수에서 비롯된 불균형적 권한 행사였으며, 그 같은 속임수로 지금까지 지구촌의 약소국들을 농락해왔다 해도 틀리지 않다. 한마디로 세계평화라는 미명 하에 지구촌 약소국들의 평화유지 대신 전쟁의 빌미를 제공해 왔을 뿐이다. 강대국 일방통행식 유엔 내지 상임이사국이 그대로 상존하는 한, 지구촌은 평화는커녕 악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말 것이다. 이미 예고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는 가운데 수많은 무고한 민간인들의 희생만 늘어나고 있지 않은가. 이제 유엔의 개혁요구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게 될 것이다. 유엔 상임이사국의 만능 거부권과 같은 초법적 일방주의와 아프리카 및 남미국가의 배제 등 지역적 불균형 등 안보리 개혁의 신호탄은 벌써 날아올랐다. 신의 뜻일까. 세계평화는 이미 사람의 생각과 약속과 무력과 정치와 외교로는 불가능함을 역사를 통해 알게 했고,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직접 확인했다. 이러한 때, 지구촌을 창조한 창조주 하나님은 평화의 사자(HWPL 이만희 대표)를 통해 지구촌 전쟁 종식과 평화를 위한 방안을 구속력 있는 법적 장치로 만들고자 작성된 법률 문서 곧 DPCW(지구촌 전쟁종식 평화 선언문)를 온 세계에 공표했다. HWPL은 권위 있는 세계 법률 전문가 21명을 국제법 제정 평화위원회로 구성, 총 10조 38항을 만들어 2016년 3월 14일 전 세계에 공표했다. DPCW 10조 38항은 세계 유수의 법학자들이 앞서 언급한 그동안의 평화기구와 협약 등의 모순점들을 분석 보완해 제정했다. 중요한 것은 신(新) 지구촌 전쟁 종식과 국제법 제정인 DPCW 10조 38항엔 사람의 뜻이라기보다 하늘의 뜻이며 정신이 담겨 있다는 사실에 방점이 있다. 이만희 대표는 예수님이 보내신 이 시대 대언의 사자며 평화의 사자라는 점이다. 이 대표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평화의 답은 지구촌 전쟁종식과 국제법 제정과 경서 비교작업을 통한 종교통일이다. 경서비교작업은 전 세계에 설립된 종교연합사무실에서 지금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특히 신천지 계시록세미나와 이어지는 후속 세미나들을 통해 지금 지구촌은 진리로 하나 돼 가고 있다는 점이다. 전쟁종식 국제법제정 또한 지구촌 각국의 지도자들이 공감하고 동참하고 있으며 지구촌 평화의 사자들에 의해 지구촌은 새 국제평화법안과 함께 평화의 물결로 뒤덮일 것이다. 참혹한 우크라이나 전쟁의 참상, 동이 트기 전이 가장 어둡고, 새벽닭이 울기 전이 가장 어둡다 한 말이 그래도 위로가 될 수 있을까. 힘들어도 조금만 더 참고 버텨 줬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천지일보 시론] 이 시대 관원들이 알았다면 조롱과 핍박과 옥에 가두는 일은 없었을 것을…

이상면 천지일보 편집인. 이천년 전 유대 땅엔 성자(聖子) 예수님이 임해 오셨다. 이 일은 인류사이면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순간이며, 이 사건을 통해 종교를 넘어 인류의 기원이 바뀌었다. BC(기원전)에서 AD(기원후)로 말이다. 중요한 것은 이에 대해 하나님은 구약성경을 통해 자기 백성 곧 선민인 유대인(육적 이스라엘)들에게 철두철미하게 약속으로 미리 알려줬고, 선민 이스라엘은 오실 이(메시아)가 오시면 영접하겠노라고 이마에 붙이고 목에 걸면서까지 언약이행 할 것을 약속하고 다짐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약속대로 당연히 오실 이 곧 약속한 목자 예수님이 자기 땅에 왔지만 선민 이스라엘은 믿기는커녕 욕하고 저주하고 핍박하고 심지어 최고의 저주받을 자들이 받아야 하는 십자가 형벌까지 감내(堪耐)해야 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그렇게 모진 수모와 수욕을 받으며 피 흘리며 죽어야 했다. 이 대목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다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8~9) 라고 했듯이, 이천년 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지혜였고 비밀이었다. 이처럼 이천년 전 예수님의 오심과 십자가 지심은 하나님이 약 2600년 전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약속(렘 31장)하신 대로 하나님의 씨를 뿌리기 위함이었고(마 13장), 새 언약을 세우기 위함이었다(눅 22:14~20). 씨를 뿌렸으면 추수 때 추수하는 일이 있어야 하며, 언약을 했으면 언약이 이루어져 그 실상(실체)이 나타나야 하는 게 만고불변의 이치일 게다. 진리(眞理)는 곧 참 이치(理致)며, 하나님을 진리의 하나님이라 한다면 약속은 이치대로 이루어져야 함이 당연할 것이다. 신앙인들의 목적이 구원이라면, 구원은 하나님의 역사가 완성되어 끝이 나야 하나님이 안식하고 우리도 함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또한 당연하지 않은가. 이상의 내용으로 보아 하나님의 역사 완성은 예수님 초림의 씨 뿌림과 재림의 추수를 통해 모든 역사를 마무리 짓게 된다는 사실을 약속과 이치를 통해 깨닫게 하고 있다. 이 시대 신앙인들이여! 그러함에도 어찌 구원받았다 성령 받았다 정통이다라며 거짓말을 하며 온 천하를 미혹해왔단 말인가. 새 언약은 곧 계시록이니, 이천년 전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이 밧모섬에 유배 중인 제자 요한에게 환상으로 보여주고 기록하게 하신 요한계시록의 예언이 이루어져 그 실상(실체)이 나타나 계시돼야 만 하나님도 예수님도 그 보내신 구원자도 알 수 있게 됨으로 구원의 문이 열리게 될 것이 아닌가(요 17:3, 마 11:27). 종교(宗敎)라는 글자가 가진 참 뜻과 의미 또한 바로 이것이니, 지금이야말로 참 종교의 시대인 것이다. 또 세상 만물의 이치로 봐도, 기록된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봐도, 곡식과 가라지는 추수 때가 됨으로 비로소 그 실체(자기의 정체)를 드러내니 어느 것 하나 상관하시는 자 앞에서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게 됐다. 이제 이 같은 이치와 순리와 성경의 약속대로 예수님이 새 언약(계시록)으로 약속하신 약속의 목자(이긴 자, 새 요한, 천택지인)를 동방(東方) 땅 끝 한반도 대한민국에 보내어 추수의 역사를 이뤄가고 있으며 추수된 자들로 때에 따른 계시말씀으로 인(印) 쳐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지어 가고 있음을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단 2:44). 창조주 하나님은 지금까지는 각자 자기 지식과 자기식의 신앙을 해도 묵인(黙認)해 왔지만(행 14:16), 이제 믿을 만한 증거(신천지 열두 지파 창조, 신천지 계시록 세미나, 초등 중등 세미나, 십만 수료식, 만물 등)를 온 천하 만민들에게 보였으니 핑계치 못하게 됐다(요 15:22, 행 17:30~31, 롬 1:20). 이 세상에는 많은 말과 글이 있겠지만, 그 가운데서도 핑계치 못한다는 말처럼 무서운 말이 없음도 이 기회를 통해 깨달아야 한다. 지금의 때는 재림 예수님이 영(靈)으로 오셔서 약속한 목자(肉體)와 하나 되어(성령과 신부) 만민 곧 교회들을 위해 육천년 긴긴 세월 그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았던 오래 저장했고 골수가 가득한 맑은 포도주로 돈 없이 값없이 나눠주고 있으니 자존심도 고집도 버리고 와서 생명수를 받아먹어야만 살길이 열린다(사 25:6, 계 22:16, 17). 이천년 전, 구약대로 오신 예수님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 같이, 다시 오실 때도 내가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고 염려하신 대로 예수님이 함께하는 약속한 목자를 핍박하고 조롱하고 모욕주고 심지어 옥에 가두고 십자가 보다 더한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는 이 시대는 적어도 이젠 정신을 차리고 회개하고 진리 앞으로 나아와야 한다. 이천년 전 관원들이 알았다면 어찌 성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겠는가. 이 시대 또한 관원들이 알았다면 감춰져 있고 비밀로 해 두신 하나님의 지혜 곧 약속한 목자를 어찌 넘볼 수 있겠는가. 그래서 어떤 관원은 평화단체 법인을 없앤 후 몇날이 못 돼 변을 당했고, 어떤 관원은 코로나를 퍼뜨린 주범이니 체포해야 한다며 체포조장이 되어 급습을 했고, 그 측근(오른팔) 중에 측근 한 사람은 특별한 이유도 없이 같은 소속의 사람에게 망치로 사정없이 머리를 두들겨 맞고 병원에 입원해야 하는 해프닝들이 여기저기서 출몰하고 있으니 왠지 모든 게 예사롭지만은 않다. 가고 오는 시대의 길목에서 정신을 차리고 천지를 분간하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기를 간곡히 부탁해 본다.

[천지일보 시론] 한반도 平和… 기적같이 찾아올 神의 작품

이상면 천지일보 편집인. 2019년 7월 25일 군사분야남북합의, 일명 9.19 군사합의는 文정부 임기만료 약 50일을 앞두고 휴지조각이 되어 나뒹굴고 있다. 당시 이런저런 남과 북의 해빙무드는 마치 한반도 평화가 현실로 눈앞에서 펼쳐질 것만 같은 착각마저 들 정도로 환희와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하지만 몇 날이 지나면서 역시나 유명무실한 합의였음이 만천하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렵게 버티고 숨겨온 붉은 마수(魔手)를 여지없이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풍계리 핵 실험장의 복구 작업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남쪽 정권 이양기를 틈타 북한은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핵 실험장 3번 갱도를 복구하는 작업이 계속 포착되면서 핵실험 우려는 현실이 됐다. 처음엔 무너진 입구 쪽을 복구하는 정황이 포착됐지만 최근엔 새 통로를 뚫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2018년 5월 한국은 물론 미국 영국 러시아 중국 등 5개국 기자들을 초청한 가운데 풍계리 핵실험장 일부와 갱도 2번 4번 3번을 차례로 폭파하면서 나아가 관측소와 생활동 본부 등을 폭파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이 풍계리 핵실험장은 2006년부터 2017년까지 6번에 걸쳐 핵실험이 이뤄진 장소로서 이번에 핵실험을 재개한다면 7차 핵실험이 되는 셈이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역시 교훈이 되는 것은 정권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고 상황과 여건이 바뀌면 사람과의 약속 합의 조약 협약 등은 헌신짝이 돼 버려지고 만다. 지난 시론에서도 밝혔듯이 지금 한창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 사태 역시 다르지 않음을 현실이 증명해 주고 있지 않은가. 동서패권 즉, 사람의 욕심이 낳은 재앙, 명분도 거짓 명분이며 정의도 진실도 없는 오직 사람의 목숨이 파리 목숨이 돼야 하는 이 현실, 저 하늘은 다 보고 있을 거며 나아가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아니할 게 분명하다. 지금이 과거 그 어느 때와 특별히 다르지는 않겠지만, 지구촌에 존재하는 그 어떤 기구도 단체도 나라도 힘도 방법도 분쟁과 전쟁을 막을 수는 없으니, 그게 분명한 현실이다. 특히 유명무실한 유엔은 세인의 조롱거리로 전락했으니 모든 게 허무할 뿐이다. 그야말로 온 세상은 무법천지요 아비규환이니 이를 어쩐단 말인가. 거짓과 위력이 하늘을 찌르고, 하루아침에 집을 잃어야 하고 목숨을 잃어야 하니 그들은 자신들이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죽어야 했다. 이보다 더 억울한 일이 어디에 또 있을까. 지옥이 따로 있을까. 핵전력과 같은 살상무기 생산과 거래가 판을 치는 세상, 나라마다 무기 개발과 자국 방위를 위해 국방력과 국방비를 끌어올리니 설상가상(雪上加霜)이요, 갈수록 태산(泰山)이다. 그래도 이럴 때일 수록 정신을 차려야 한다. 정신을 차려 보니 진리(眞理)가 살아있다. 그 진리는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이 왔음을 깨닫는 것이다. 새벽과 함께 홀연히 찾아온 손님은 다름 아닌 새벽닭의 울음소리다. 새벽공기를 뚫고 울려 퍼지는 닭 울음소리로 칠흑같이 어두운 세상을 깨우고 있다. 그 깨우침은 바로 진리다. 그 진리는 정치 외교로는 전쟁을 끝낼 수 없음이다. 조약과 협약 그리고 사람의 욕심과 교만으로는 평화를 가져올 수 없음이다. 이것이 분명 진리가 아닌가. 지나온 역사와 오늘의 현실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으니 소경과 귀머거리가 아니라면 분별이 가능할 게다. 평화는 오직 신(神)의 영역이라는 진리부터 깨닫는 게 중요하다. 평화는 정한 때가 되어 정한 사람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진리를 깨닫는 게 중요하다. 진리는 불변의 약속이다. 그렇다면 평화의 답을 찾기 위해 신의 계획과 약속 안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 된 세상(신이 아닌 사람)의 철학과 헛된 속임수론 영원히 속고 속이는 일만 되풀이 되며 분쟁과 전쟁을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신의 약속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은 지구촌 평화를 위해 오직 한 분을 약속했으니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다. 그의 나심은 하늘엔 영광이요, 땅엔 평화였다. 하지만 이는 평화에 대한 약속이었으니, 예수님의 사역은 바로 초림과 재림의 역사로 시작과 끝을 알린 셈이다. 다시 말해 초림으로 평화의 씨를 뿌리셨고, 재림으로 평화를 완성 짓게 되니 오늘이 바로 그때며 그 날이다. 오늘날 예수님이 함께하시는 한 사람을 맞이해야 한다. 전쟁종식과 세계평화를 위한 그의 해외 평화순방을 통해 진정 평화를 사랑하는 지구촌 만민들은 이미 그를 인정했고 맞이했고 함께하고 있다. 지구촌 동서 냉전의 부활과 함께 냉전 최후의 보루(堡壘)인 한반도의 남과 북, 다시금 일촉즉발의 상황이 재연되지만, 모두가 평화의 사자를 인정하는 날 이 한반도는 기적같이 평화가 찾아올 것이며, 한반도 평화는 곧 세계평화의 시금석이 될 것이니 이를 믿어야 한다. 곧 그날이 기적같이 우리 곁에 찾아올 것이다. 칠흑(漆黑)같은 밤은 곧 새벽을 알리는 신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