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0년 역사 품은 ‘경주 옥산서원 무변루’ 보물됐다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조선 중기 서원인 ‘경주 옥산서원 무변루(慶州 玉山書院 無邊樓)’가 보물로 지정됐다. 28일 문화재청(청장 최응천)에 따르면 ‘경주 옥산서원 무변루’는 2019년 ‘한국의 서원’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사적 ‘옥산서원(玉山書院)’ 안에 자리하고 있으며, 옥산서원 외삼문을 지나면 나타나는 중층으로 된 문루이다. 무변루는 1572년 옥산서원이 창건됐을 때 함께 세워졌다. 주변의 훌륭한 자연경관을 잘 조망할 수 있도록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규모는 정면 7칸, 옆면 2칸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좌·우 측면에는 가적지붕을 설치했다. 건물의 아래층은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위층은 온돌방과 누마루(다락처럼 높게 만든 마루)로 구성돼 있는데, 위층은 가운데에 대청마루를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둔 뒤 다시 좌우에 누마루를 구성하는 매우 독특한 평면을 이루고 있다. 또한 지붕에는 숭정(崇禎), 건륭(乾隆), 도광(道光) 등의 중국 연호가 기록된 명문기와가 남아있어 수리 이력을 정확하게 알게 해 준다. 관련 기록에 의하면, 무변루는 영의정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이 이름을 짓고, 석봉 한호(韓濩, 1543~1605)가 현판을 썼다. 무변루의 ‘무변’은 북송(北宋)의 유학자인 주돈이(周敦頤)의 ‘풍월무변(風月無邊)’에서 유래한 것으로, 해석하면 ‘서원 밖 계곡과 산이 한눈에 들어오게 해 그 경계를 없애는 곳’이 된다. 이는 무변루가 주변의 자연경관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음을 의미한다.

어보 담는 함 ‘보록’의 귀환… “조선 왕실 정통·역사성 상징”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어보(御寶)’를 보관하는 상자인 ‘보록(寶盝)’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목재로 제작된 보록의 모서리는 모싸개가 장식했다. 뚜껑과 몸통을 연결하는 경첩의 아래쪽은 길다. 가로 23㎝, 세로 23㎝, 높이는 27.5㎝다. 외부에는 잠금장치도 달려있다. 보록의 내부는 무문 명주를 사용해 만들어졌다. 문화재청(청장 최응천)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사무총장 김계식)은 27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의 집에서 언론공개회를 열고 환수된 보록을 공개했다. 이는 라이엇 게임즈 후원으로 올해 7월 환수된 것이다. 보통 왕과 왕비에게 존호(尊號), 시호(諡號) 등을 올리며 제작된 어보를 보관할 때는 내함과 외함이 사용된다. 내함은 ‘보통(寶筒)’이라고 하고, 외함은 ‘보록’이라 부른다. 내함과 외함에 담겨진 어보는 종묘 또는 외규장각 등에 보관된다. 어보 제작 시 보록을 함께 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이전에 만들어 둔 것을 수보(修補: 낡은 곳을 고치고 갖추지 못한 데를 기움)해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제작시기를 알기는 어렵다. 서준 문화재전문위원은 “환수된 보록은 어보를 보관하는 상자로서, 왕과 왕비를 위해 왕실 의례에 따라 제작됐다”며 “조선 왕실의 정통성과 역사성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보록은 임진왜란 이후 1600년대부터 순종 대까지 300여 년에 걸쳐 같은 형태로 꾸준하게 제작된 공예품으로, 궁중 공예품의 양식과 재질 변화, 발전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어 가치가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환수된 보록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보록에 담겨져 있는 어보 자체가 보록을 설명하는 ‘프로비넌스(provenance)’인데, 이번처럼 보록만 발견된 경우는 보록의 주인을 밝히기 위한 추가적인 조사와 연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환수한 ‘보록’은 재단이 지난해 정보를 입수, 소장자를 설득하는 과정을 거쳐 전문가들의 평가와 실견을 통해 매입에 성공했다. 재단이 정보를 입수했을 당시 동 유물은 영국 법인이 경매를 통해 구입한 후 판매를 위해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재단은 조선왕실의 문화재인 보록의 국내 귀환을 위해 문화재청과 긴밀히 협의하고 관련 검토를 거쳐 매입을 추진했다. 소장자에게 한국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당위성을 전달하고 설득한 끝에 국내로 들여올 수 있었다. 특히 보록은 라이엇 게임즈의 6번째 환수문화재다. 문화재청과 라이엇 게임즈는 2012년부터 협약을 통해 문화재 환수·활용을 위한 지속적인 지원을 해왔다. 조선시대 불화 ‘석가삼존도(2013년 12월 환수)’를 시작으로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2018년 1월 환수)’, 항일의병장 척암 김도화의 ‘척암선생문집(拓菴先生文集) 책판(2019년 4월 환수)’, 조선시대 왕실 관련 유물인 ‘백자이동궁명사각호(白磁履洞宮銘四角壺, 2019년 6월 환수)’, ‘중화궁인(重華宮印, 2019년 6월 환수)’ 환수에 도움을 줬고 이번 보록의 환수 지원으로 또다시 의미 있는 환수 사례를 남겼다. 한편 환수된 보록은 국립고궁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진행되고 있는 ‘나라 밖 문화재의 여정’ 전시를 통해 8월 중 국민에게 공개될 예정이다.

‘환수문화재’ 고국 돌아온 길 달랐다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나라 밖을 떠돌다 국내로 돌아온 환수문화재. 그 시련의 세월을 어찌 다 설명할 수 있으랴. 100여년의 근현대사는 그야말로 혼란과 변화의 연속이었다. 그 속에서 해외로 유출된 문화재들은 언제고 다시 돌아오는 날을 꿈꿨을 것이다. 이런 가운데 환수된 40여점의 문화재는 대중에게 공개돼 역사적 가치를 전하고 있다. ◆해외 반출 경로 다양해 나라 밖을 떠돌다 국내로 돌아온 40여점의 문화재는 지난 7일 대중에게 공개됐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나라 밖 문화재의 여정’ 특별전에서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설립 10주년을 맞아 열린 전시는 9월 25일까지 진행된다. 전시에서는 지난해 일본에서 환수한 ‘나전 매화, 새, 대나무 상자’, 올해 3월 미국에서 환수한 ‘열성어필’과 ‘백자동채통형병’이 처음 공개됐다. ‘독서당계회도(2022년 환수, 미국)’ ‘면피갑(2018년 환수, 독일)’ ‘문인석(2019년 환수, 독일)’ 등 6건의 유물은 언론에 한차례 공개된 적이 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발표한 국외문화재 현황(2022년 1월 1일 기준)에 따르면, 해외로 반출된 한국문화재는 21만 4208점에 이른다. 아시아, 유럽, 아메리카 대륙 25개 나라에 흩어져 있다. 소장 정보가 온전히 공개되지 않은 것까지 포함하면 실제로 해외에 유출된 문화재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 문화재가 해외로 유출된 이유는 다양하다. 구한말 서구열강의 침탈, 일제강점기, 한국 전쟁 등으로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으면서 불법적이거나 부당한 이유로 해외에 유출됐다. 그런가 하면 합법적으로 구입, 기증, 외교 선물, 수출 교역 등으로 해외로 나간 문화재도 많다. 우리나라 문화재에 관심이 많은 개개인의 외국인에게도 수집됐다. ◆불법·합법적, 대응법 달라져 국외 문화재의 성격과 반출경로는 복잡하다. 이로 인해 국내에 들여오는 방법도 다르다. 전문가들은 불법적인 유출인지, 합법적인 유출인지가 문화재 관리와 대응 결정을 좌우한다고 말한다. 불법성을 확인한 문화재는 관계당국과 공조해 매입을 통해 국내에 들어온다. 국새 ‘황제지보’ ‘유서지보’ ‘준명지보’는 한국전쟁 때 도난당한 국새다. 미국과의 수사공조를 통해 불법 반출이 확인됐고 2014년 한미정상회담 때 반환됐다. ‘호조태환권’의 인쇄 원판도 한국전쟁 때 미국으로 불법 반출됐다가 수사공조로 환수됐다. 호조태환권은 비록 유통되지 못했지만 조선이 만든 최초의 근대적 화폐라는 상징적 의미가 크다. 소장자·소장 기관의 윤리적 판단과 선의를 바탕으로 기증받기도 한다. 1740년 어보인 ‘효종 추상존호 금보’는 1990년대 한 경매에서 거래된 후, 도난 문화재라는 사실을 인지한 재미교포 소장자가 2019년 대군주보와 함께 국내에 기증하면서 반환됐다. 조선시대 사대부묘에 세워졌던 ‘문인석’과 조선 후기 보병이 입었던 것으로 추정하는 ‘면피갑’도 소장자의 자발적인 기증 방식으로 들어왔다. 불법·부당성이 확인된 유물이 아니어도 소장 가치가 큰 유물은 환수된다. 가장 최근인 지난 3월 환수한 ‘백자동채통형병’은 미국인 수집가가 반출한 유물이다. 이는 우리 문화재 국외 반출 경위의 한 사례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녔다. 유물은 미국 경매에 출품된 후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구입했다. ◆소유권 이전 어렵다면 ‘영구대여’ 완전한 소유권 이전이 어렵다면 영구대여 방식을 사용한다. 겸재 정선(1676~1759)의 작품을 담은 화첩이 그렇다. 이는 독일 상트오틸리엔수도원의 초대 총아빠스(대수도원장)를 지낸 노르베르트 베버((Norbert Weber, 1876~1956)가 1911년, 1925년 선교를 위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수집했다. 1976년 유준영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유학 시절 ‘겸재정선화첩’을 처음 발견했고 국내에 알렸다. 이후 이 화첩은 영구대여 방식으로 왜관수도원에 반환했다. 카니시우스 퀴겔겐 신부가 1918년 쓴 근대 서양 양봉기술 교육 교재인 ‘양봉요지’도 영구대여 방식으로 반환된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문화재가 국내로 환수되는 것은 아니다. 국립고궁박물관 신재근 연구사는 “가치성을 고려해 꼭 필요한 문화재는 국내로 들어온다. 그 외의 문화재는 현지에서 활용하는 방법을 택한다”고 설명했다. 국외문화재가 우리만의 것이 아닌 현지인도 함께 가꾸고 보살피는 보편적 가치를 지닌 문화유산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여전히 나라 밖 문화재는 그 가치를 알지 못하거나 관리 보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우리의 문화재가 하루빨리 제자리를 찾아 역사적 빛을 발하길 기대해본다.

안중근 의사 순국 전 쓴 ‘유묵 5점’ 보물됐다

독립운동가인 안중근 의사(1879~1910)가 중국 여순(뤼순)감옥에서 순국하기 전에 쓴 유묵 5점이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했다. 23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보물로 지정된 안중근 의사가 순국하기 직전인 1910년 3월에 쓴 유묵 5점의 화면 왼쪽 아래 경술삼월 여순감옥에서 대한국인 안중근이 쓰다(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라는 문구와 안의사의 손도장이 있다.이는 일본인에게 주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보물로 지정된 첫 번째 유묵은 인무원려필유근우(人無遠慮必有近憂)이다. 이는 대련세관(大連稅關)에서 근무하던 카미무라 쥬덴이라는 일본인에게 쓴 것으로, 사람이 먼 생각이 없으면, 반드시 가까운 근심이 있다라는 의미다. 논어(論語)의 위령공(衛靈公)편에 사람이 깊은 사려가 없으면 반드시 가까운 근심이 생긴다(人無遠慮, 必有近憂)"에서 유래한 문구이다. 두 번째 유묵은 일통청화공(日通淸話公)은 일본인 간수과장 기요타에게 쓴 것이다. 내용은 날마다 고상하고 청아한 말을 소통하던 분으로 풀이된다. 세 번째 유묵은 황금백만냥불여일교자(黃金百萬兩 不如一敎子)이다. 는 일본인 경수계장(驚守係長) 나카무라에게 쓴 것으로, 황금 백만 냥은 하나의 아들을 가르침만 못하다라는 문구다. 네 번째 유묵인 지사인인살신성인(志士仁人殺身成仁)은 안중근 공판을 지켜봤던 일본인 기자 고마쓰 모토코에게 썼다. 뜻이 있는 선비와 어진 이는 몸을 죽여 인을 이룬다라는 내용이다. 논어의 위령공 편에 뜻이 있는 선비와 어진 이는 삶을 구하여 인을 해침이 없고, 몸을 죽여 인을 이룸이 있다(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것이다. 마지막 유묵은 세심대(洗心臺)다. 중앙에 세심대(洗心臺)라는 세 글자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썼고, 왼쪽에는 작은 글씨로 경술삼월 여순감옥에서 대한국인 안중근 쓰다(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라는 문구가 있다. 세심(洗心)은 마음을 씻는다는 말이다. 주역(周易)의 계사상(繫辭上)에 성인은 마음을 씻고 물러가 은밀하게 간직해 두며, 운수의 좋음과 나쁨을 백성과 더불어 같이 근심하였다(聖人以此洗心, 退藏於密, 吉凶與民同患)라는 문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문화재청은 안중근 의사 유묵 5점은 일제강점기 대표적 독립운동가였던 안중근 의사의 유묵이 가진 역사성과 상징성을 보여주는 유물이라며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제작시기가 분명해 보물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전했다. 또한 문화재청은 조선왕조의 법전 경국대전과 정조(正祖)의 한글편지, 천문도의 일종인 신‧구법천문도(新‧舊法天文圖) 등을 보물로 지정했다. 청양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 및 복장유물은 국가지정문화재(국보)로 지정됐다.

14세기 고려 ‘청양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 국보된다

14세기 불상조각 형식을 잘 담아낸 고려 청양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 및 복장유물이 국가지정문화재(국보)로 지정됐다. 23일 문화재청(청장 최응천)은 청양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 및 복장유물을 국보로 지정한다고 밝혔다. 국보 청양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 및 복장유물(靑陽 長谷寺 金銅藥師如來坐像 및 腹藏遺物)은 고려 후기의 유일한 금동약사불상이자 단아하고 정제된 당시 조각 경향을 잘 반영한 작품으로, 한국불교조각사 연구에 있어 중요하게 평가돼왔다. 특히 발원문에는 1346(고려 충목왕 2)년이라는 정확한 제작 시기가 적혀 있어 고려 후기 불상의 기준 연대를 제시해주고 있다. 고려 후기 불상조각 중 약합(藥盒)을 들고 있는 약사여래의 도상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온화하고 자비로운 표정, 비례감이 알맞은 신체, 섬세한 의복의 장식 표현 등 14세기 불상조각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어 이 시기 불상 중에서도 뛰어난 예술적 조형성을 지니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조각 기법적 측면에서 장곡사 불상이 지닌 예술적 가치 외에 조성발원문은 역사학술적 가치를 높여주는 자료로서 주목된다. 가로 10미터가 조금 넘는 긴 발원문에는 약 1117명에 달하는 시주자와 발원자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는 고려 시대 단일 복장발원문으로서는 가장 많은 인명을 담고 있다. 특히 발원문을 지은 승려 백운(白雲)은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자 직지로 잘 알려진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1377년)을 편찬한 백운경한(白雲景閑, 12981374)과 동일인물로 추정되고 있어, 그의 행적을 밝힐 수 있는 또 다른 자료로서 매우 의미가 깊다. 장곡사 불상 제작에는 왕전(王顓, 후에 공민왕) 등 왕족을 비롯해 군부인(郡夫人), 무관(武官), 일반 백성 등 지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했다. 아마도 몽골침탈기라는 어려운 시대 상황 속에서 자신과 가족의 무병장수, 전쟁 중에 죽은 친족의 극락왕생을 발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인명 중에는 공민왕의 몽고식 이름인 바얀테무르(伯顔帖木兒)를 비롯해 금타이지(金朶兒只), 도르지(都兒赤)처럼 몽고식 이름이 눈에 띄는데, 이는 역사기록 속에서 찾을 수 없는 14세기 중엽의 시대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문화재청은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은 미술사 뿐 아니라 불교사, 사회사적 측면에서도 고려 14세기 중반의 역사상을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국보로 지정하기에 예술역사학술 가치가 충분하다고 말했다.

조선 법전 ‘경국대전’, 정조 ‘한글편지’ 보물된다

조선왕조의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 등 10건이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 예고됐다. 3일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에 따르면 경국대전과 정조(正祖)의 한글편지, 천문도로 만들어진 신구법천문도 병풍(新舊法天文圖 屛風), 그리고 안중근의사 유묵 등 조선~근대기에 이르는 전적 및 회화, 서예작품 등 총 10건에 대해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고려 청양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 및 복장유물을 국가지정문화재(국보)로 지정 예고했다. 조선왕조의 기틀을 담은 법전인 경국대전의 총 3종이 보물로 지정 예고됐다. 경국대전 권1~2(삼성출판박물관 소장) 경국대전 권1~3(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경국대전 권4~6(수원화성박물관 소장)이 그것이다. 이번 예고 대상은 현존하는 경국대전 판본 중 인쇄 시기가 앞서고 내용서지학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자료이다. 경국대전 권1~2(經國大典 卷一~二)는 현존하는 경국대전 판본 중 가장 빠른 것으로, 1471(성종)년 신묘년에 간행된 신묘대전(辛卯大典)이다. 조선 초 금속활자인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로 인쇄한 권1~2의 이전(吏典)과 호전(戶典)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현존하는 경국대전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권1~2에 해당하는 전래본이 없다는 점에서 희소성이 있고 사료적 중요성이 크다. 아울러 이미 보물로 지정된 같은 신묘대전인 경국대전 권3을 보완해 준다는 점에서 법제사적 가치도 높다. 경국대전 권13(經國大典 卷一三)과 경국대전 권46(經國大典 卷四六)은 모두 1485(성종 16)년 완성된 소위 을사대전을 바탕으로 16세기에 간행된 초주갑인자혼입보자본(初鑄甲寅字混入補字本)이다. 신구법천문도 병풍(新舊法天文圖 屛風)은 전통적으로 동양에서 그려진 천문도(구법천문도)와 서양에서부터 도입된 새로운 천문도(신법천문도)를 좌우로 배치해 구성한 것으로, 비단에 채색으로 그려 8폭 병풍으로 제작한 별자리 그림이다. 19세기 후반 서양에서 수입한 합성안료인 짙은 초록색의 양록(洋綠, 에메랄드 그린)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제작시기 역시 이 시기 즈음으로 추정된다. 정조어필 한글편지첩(正祖御筆 한글簡札帖)은 정조(正祖, 1752~1800)가 원손시절부터 세손시절(1759년), 재위시절(1776~1800)에 걸쳐 외숙모 여흥민씨에게 한글로 쓴 편지 14통을 모은 편지첩이다. 원손시절에 쓴 편지와 예찰(睿札, 왕세자 시절 쓴 편지), 어찰(御札, 보위에 오른 후 쓴 편지)에 이르는 글씨 등 시기를 달리해 50여년에 이르는 정조의 한글서체 변화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국보 지정 예고된 청양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 및 복장유물(靑陽 長谷寺 金銅藥師如來坐像 및 腹藏遺物)은 1963년 보물로 지정됐다. 고려 후기의 유일한 금동약사불상이자 단아하고 정제된 당시 조각 경향을 잘 반영한 작품으로 중요하게 평가돼 왔다. 특히 발원문에는 1346(고려 충목왕 2)년이라는 정확한 제작시기가 있어 고려 후기 불상 연구의 기준 연대를 제시해주고 있다. 고려 후기 불상조각 중 약합(藥盒)을 들고 있는 약사여래의 도상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온화하고 자비로운 표정, 비례감이 알맞은 신체, 섬세한 의복의 장식 표현 등 14세기 불상조각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어 이 시기 불상 중에서도 뛰어난 예술적 조형성을 지니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미국·일본서 돌아온 고종의 국새 4점 보물됐다

2년 전 미국에서 환수한 19세기 국새(國璽) 대군주보 등 국새 4과가 보물로 지정됐다. 24일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은 국새 대군주보를 비롯해 1946년 일본에서 환수한 대한제국기 국새 제고지보, 국새 칙명지보 국새 대원수보 등 4과를 보물로 지정했다. 국새 대군주보 등 4과는 모두 국내로 돌아온 환수문화재로서, 보물로서의 역사적 상징성과 조형성을 인정받았다. 먼저 국새 대군주보(國璽 大君主寶)는 1882년(고종 19년) 7월 1일 제작된 것이다. 높이 7.9㎝, 길이 12.7㎝ 크기로 은색의 거북이 모양 손잡이(귀뉴 龜鈕)와 도장 몸체(인판 印板)로 구성된 정사각형 형태의 인장이다. 보면(寶面)에는 구첩전(九疊篆)으로 대조선국의 대군주라는 의미를 지닌 大君主寶(대군주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외교, 고위 관원 위임장, 사령장, 대군주의 명으로 반포되는 법령 등에 날인한 국새로, 2019년 12월 미국의 재미교포로부터 기증받아 환수됐으며, 지금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함께 지정된 국새 제고지보 국새 칙명지보 국새 대원수보는 모두 대한제국기(1897~1910)에 제작된 것으로, 한일강제병합이 이뤄진 6개월 후인 1911년 3월 약탈되어 일본 궁내청(宮內廳)으로 들어간 수모를 겪기도 했다. 광복 후 1946년 8월 15일 미군정이 궁내청에서 환수해 총무처(1940~1960년대 국무총리 소속 아래 설치됐던 중앙행정기관)에 인계한 후 1954년 6월 28일 총무처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다시 인계하면서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3과 중 시기가 가장 이른 국새 제고지보(國璽 制誥之寶)는 1897년 9월 19일 완성된 인장이다. 제고(制誥)는 황제의 명령을 뜻하기 때문에 이 국새는 조선왕실에서는 사용할 수 없고 황제로 칭한 대한제국에서만 사용한 국새이다. 국새 칙명지보(國璽 勅命之寶)는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등극하면서 문서에 사용하기 위해 제작된 대한제국 국새 10과 중 하나로, 1898년 윤3월 19일에 제작됐다.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황제의 나라에 걸맞은 새로운 국새를 제작했고 그 결과 1897년 9월 17일~19일 동안 대한국새(大韓國璽) 황제지새(皇帝之璽) 황제지보(皇帝之寶) 칙명지보(勅命之寶) 제고지보(制誥之寶) 시명지보(施命之寶) 명헌태후지보(明憲太后之寶) 황후지보(皇后之寶) 황태자보(皇太子寶) 황태자비지보(皇太子妃之寶) 10과를 완성했다. 국새 대원수보(國璽 大元帥寶)는 1899년(광무 3) 6월 22일 대한제국이 육해군을 통솔하는 원수부(元帥府)를 설치하고, 대원수보(大元帥寶) 1과, 원수지보(元帥之寶) 1과, 원수부인(元帥府印) 1과를 만든 것 중 하나이다. 대원수(大元帥)는 원수부의 우두머리로, 국가의 전군(全軍)을 통솔하는 최고 계급을 지칭한다. 군인 임명서 등에 날인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됐다. 또한 고려 시대 금속공예 기술의 절정을 보여주는 서울 영국사지 출토 의식공양구 일괄을 비롯해 조선 초기 음식조리서인 수운잡방, 불경 예념미타도량참법 권1~5 등 총 7건을 보물로 지정했다.

‘한국의 갯벌’, 삼수 끝에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국내 15번째

한국의 갯벌(Getbol, Korean Tidal Flats)이 세 번의 도전 끝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한국의 갯벌은 지난 2007년 등재된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에 이어 14년 만에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등재되는 세계자연유산이다. 문화유산을 포함하면 한국은 15건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26일 중국 푸저우에서 개최한 제44차 총회에서 한국의 갯벌(Getbol, Korean Tidal Flat) 등재를 21개 위원국 만장일치로 최종 결정했다. 한국의 갯벌은 ▲서천갯벌(충남 서천) ▲고창갯벌(전북 고창) ▲신안갯벌(전남 신안) ▲보성-순천갯벌(전남 보성순천) 등 총 4개로 구성된 연속유산이다. 5개 지자체에 걸쳐 있으며 모두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돼 있다. 신안 갯벌이 1100㎢로 가장 넓고, 나머지 갯벌 면적은 각각 60㎢ 안팎이다. 모두 습지보호지역이고, 일부가 람사르 습지이다. 한국의 갯벌 세계유산 등재추진단에 따르면 한국의 갯벌에는 멸종위기에 처한 물새 22종과 해양 무척추동물 5종이 서식하며, 범게를 포함해 고유종 47종이 있다. 대표적 멸종위기종은 검은머리물떼새, 황새, 흑두루미, 작은 돌고래인 상괭이 등이다. 또 한국의 갯벌은 동아시아와 대양주 철새 이동로에서 핵심 기착지이기도 하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문화유산과 자연유산, 두 유산의 성격을 모두 지닌 복합유산으로 구분되며, 한국의 갯벌은 자연유산에 등재됐다. 한국의 갯벌은 앞서 2010년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됐다. 문화재청은 2018년 1월 세계유산 등재신청서를 제출했으나 지도 수정이 필요하다는 검토 의견을 받았다. 이후 우리 정부는 등재신청서를 보완해 2019년 1월에 다시 제출했다. 그러나 국제자연보존연맹(IUCN)이 2019년 10월~2020년 3월 현장 실사를 거쳐 지난 5월 반려 의견을 제시하면서 등재 여부가 불투명했었다. 문화재청이 각 지자체와 해양수산부의 협조를 얻어 세계유산 구역의 확대 계획을 각 위원국에 설명하면서 두 달 만에 등재로 방향을 돌릴 수 있었다. 유네스코 자문기구가 당초 반려를 권고했는데도 불구하고 유네스코가 세계유산으로 등재한 건 우리나라가 세계유산 등재를 시작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한편 한국의 갯벌 등재 성공으로 한국이 보유한 세계유산은 15건으로 늘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가 보유한 세계유산은 석굴암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 창덕궁 수원 화성 경주역사유적지구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조선왕릉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 남한산성 백제역사유적지구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한국의 서원이다.

‘칠곡 송림사 대웅전’ 등 3개 불전 보물됐다

17~18세기 경북 팔공산 주변의 지역적 특색을 담은 3개의 불전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됐다. 21일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칠곡 송림사 대웅전(漆谷 松林寺 大雄殿),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대구 동화사 극락전(大邱 桐華寺 極樂殿)과 대구 동화사 수마제전(大邱 桐華寺 須摩提殿) 등 3건의 문화재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했다고 밝혔다. 송림사의 주불전인 칠곡 송림사 대웅전은 임진왜란의 전란을 겪은 후 1649년에 중수됐다. 이후 1755년, 1850년 두 차례의 중수를 거쳐 현재 모습으로 남아 있는 건물이다. 17세기 이후 재건한 불전들이 정면 3칸, 옆면 2칸을 채택했던 추세와 달리 정면 5칸, 옆면 3칸으로 이전의 규모를 지키고 있다. 실내구성도 당대 흐름인 중앙에 대형 불단을 설치하고 후불벽을 두어 예불공간을 확장하는 방식을 따르지 않고 옛 방식을 취하고 있다. 공포의 짜임은 비교적 시기가 올라가는 교두형 공포로 짰는데 이런 유형의 공포는 팔공산 일대 사찰 등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지역 특색이다. 송림사 대웅전은 17세기 중엽 중수된 이후 18세기 말, 19세기 중엽 두 차례의 중수를 거치면서 주칸의 크기를 재조정하고 외관이 달라지는 큰 변모가 일어났음에도 팔공산 일대 사찰건축의 특징이 반영된 옛 부재를 최대한 재사용하여 역사성을 잘 계승하고 있다. 대구 동화사 극락전은 1600(선조 33)년에 중건을 시작했고, 그중 금당(金堂)을 제일 먼저 건립했다. 지금의 극락전으로 판단된다. 이후 문헌기록을 통해 1622년에 중창된 것을 확인했다. 임진왜란 이후에 재건된 조선 후기 불전 중에서는 건립 시기가 빠른 편에 속하며, 처마와 창호, 단청 등에서 일제강점기 이후의 변화가 확인되지만, 전체적인 구조와 의장은 건립 당시의 상태를 잘 유지하고 있다. 또한 창건 당시(통일신라)의 위치, 기단과 초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상부에 17세기 전반의 목조건축을 세워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창건 당시 기단과 초석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에 감주나 이주 없이 동일한 기둥 간격의 평면을 구성하고 있다. 상부 목조가구의 기본틀 역시 고대기법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도 마룻바닥 하부에 방전(方塼, 네모난 벽돌)이 깔려있는 등 옛 기법이 많이 남아 있다. 극락전의 공포는 미세한 첨차 길이의 조정을 통해 공포 간의 간격을 일정한 비례로 구성하고 있으며, 제공의 내외부 끝을 교두형으로 처리하고 있다. 또 추녀와 선자연이 걸리는 모서리 부분 퇴칸의 공포에 병첨을 사용하는 방식에서 이 건물을 조영한 목수의 탁월한 실력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기법은 17~18세기 팔공산을 중심으로 영남지역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특정 지역에서 활동했던 기술자 집단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어 학술적으로도 매우 가치가 높다. 대구 동화사 수마제전은 극락전의 뒤쪽에 있으면서 고금당(古金堂)이라고 전한다. 1465(세종 11)년에 건립되었고, 임진왜란 뒤 1702(숙종 28)년에 중창됐다는 기록이 전하며, 현재의 건물도 17세기 이후의 기법과 옛 기법이 공존하고 있다. 수마제전의 공포 의장은 극락전과 마찬가지로 교두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러한 공포 의장 기법은 앞서 살핀 송림사 대웅전, 동화사 극락전 등과 함께 17~18세기에 걸쳐 팔공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 특징을 보여준다. 3건의 보물 지정 예고된 문화재는 17~18세기에 걸쳐 팔공산을 중심으로 영남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지역적 특성과 당시 이 일대에서 주로 활동했던 같은 계보의 기술자 집단에 의해 조영된 건축물이다. 시대적으로 앞서고 각각의 구조적 특징이 나타나 역사, 학술, 조형예술적인 면에서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하여 보존할 만한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판단했다.

300년된 ‘장성 백양사 아미타여래설법도’ 보물된다

300년 넘게 전래된 장성 백양사 아미타여래설법도를 보물로 지정 예고됐다. 25일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은 호남(湖南)을 대표하는 고찰(古刹) 백양사(白羊寺)의 장성 백양사 아미타여래설법도를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고 밝혔다. 장성 백양사 아미타여래설법도(長城 白羊寺 阿彌陀如來說法圖)(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91호)는 1994년 9월 도난됐으나, 2006년 9월 지금의 제자리로 환수된 특별한 의미가 있는 불화이다. 본존 아미타불이 여러 제자들에게 불교의 교리를 설법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1775년(영조 51) 백양사 극락전 아미타불상을 중수하면서 새롭게 조성한 작품이다. 1775년 수화승 색민(嗇敏)을 비롯해 계헌 등 총 11명의 화승들이 참여해 그린 작품으로, 승려 환월당(喚月堂) 민숙(旻肅)이 외조모 유씨 부부와 부모 봉씨 부부가 극락왕생하기를 기원하며 주문 제작한 것이다. 승려가 이처럼 직접 대시주자(大施主者)로 나선 사례는 매우 드물다. 장황(粧䌙)은 일부 개장되었으나 전반적으로 제작 당시의 원형에 큰 손상 없이 전래되고 있다. 본존인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8대 보살과 6위의 제자, 사천왕, 2위의 팔부중을 배치한 간략한 화면구성, 본존의 두광(頭光)에서부터 제자상과 팔대보살 등 권속들을 따라가며 화면을 꽉 채운 원형구도가 안정감을 주며, 2미터가 넘는 긴 화면에 압도적으로 그려진 본존불, 날씬한 협시보살의 표현 등에서 장중함과 상승감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이러한 특징은 색민이 그린 구례 화엄사 삼신불도(求禮 華嚴寺 三神佛圖)(1757년)와 해남 대흥사 괘불도(海南 大興寺 掛佛圖)(1764년)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비암사 극락보전’ 세종시 첫 보물 탄생했다

17세기 중엽 지방 사찰 불전의 시대특성과 지역색을 잘 간직한 세종 비암사 극락보전(碑巖寺 極樂寶殿)이 보물로 지정됐다. 세종시 건축문화재 중 첫 번째의 보물 지정이다. 23일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은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에 있는 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인 비암사 극락보전(碑巖寺 極樂寶殿)을 보물로 지정했다고 밝혔다. 세종특별자치시는 2012년 특별자치시 승격 이후 건축문화재로는 처음으로 비암사 극락보전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신청했고, 문화재위원회에서 가치가 충분하다는 판단에 따라 이번에 보물로 지정하는 경사를 맞게 됐다. 비암사는 통일신라 도선(道詵)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오고, 그 외에도 여러 창건설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673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碑像, 국보 제106호)이 비암사에서 출토됐고, 지금까지 이 고장에서 비암사를 삼한고찰(三韓古刹)로 부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찰의 창건 시기는 고대로 거슬러 볼 수 있다.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일반적인 측면 3칸형에서 벗어난 2칸형 불전으로, 전란 이후 사찰 경제가 축소된 사정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공포의 구성은 크기에 따른 대첨차, 중첨차, 소첨차를 모두 사용한 특징을 보이며, 첨차를 배열한 방식, 내외부의 살미 모양 등에는 조선 중기 이후 다포 건축물에 보이는 특징들이 잘 반영되어 있다. 극락보전의 가구 구조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중요한 요소는 옆면 규모라 할 수 있다. 옆면이 2칸이면서 팔작집을 지으려다 보니 일반적인 상부가구 구성으론 대응이 쉽지 않았다. 보통 건물에서는 충량 1본을 뒀으나, 극락보전은 충량을 좌우 협칸에 각각 3본씩 설치하는 방식으로 해결하였다. 옆면 주칸이 긴 편이어서 충량을 보조로 설치하여 추녀에 걸리는 하중을 감당하려는 의도로 추측된다. 창호는 일반적인 조선후기 불전 창호와는 차별성이 보인다. 앞쪽 창호는 문얼굴을 4분할하여 가운데 두 짝은 여닫이를 두고 문설주로 분리하고, 좌우에는 외짝 여닫이를 설치했다. 뒷쪽 창호는 이른바 영쌍창으로 분류되는 방식으로, 쌍여닫이창의 중간에 설주를 세운 형태이다. 건립 당시에 제작한 창호는 아니지만 뚜렷한 근거를 토대로 창호의 원형을 되살렸다는 점에서 극락보전의 건립시기에 걸 맞는 외관을 보여준다.

1500년 전 ‘금동신발’ 2건 보물됐다… “원형 모습 갖춰”

삼국시대 금동신발 2건이 보물로 지정됐다. 그동안 삼국 시대 고분 출토 유물 중 귀걸이, 목걸이, 팔찌 등은 국보나 보물로 상당수 지정됐지만 금동신발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 예고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6일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은 고창 봉덕리 1호분과 나주 정촌고분에서 출토된 백제 시대 '금동신발' 2건을 각각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고 밝혔다. 고창 봉덕리 1호분 출토 금동신발은 1500여년 전 한국 고대인들의 상장례(喪葬禮) 문화를, 나주 정촌고분 출토 금동신발(羅州 丁村古墳 出土 金銅飾履)은 5~6세기 백제 금속공예 기술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둘 다 각각 한 쌍으로 출토된 이들 금동신발들은 모두 백제 5세기에 제작됐으며, 삼국 시대 고분 출토 금동신발 중 가장 완전한 형태로 발견된 보기 드문 사례다. 금동신발은 고구려‧백제‧신라‧가야 등 삼국 시대 유적에서만 발견되는 우리나라 고유의 고대 금속공예품 중 하나다. 비슷한 시기의 중국 유적에서는 찾아보기 힘들고, 일본의 고분에서는 유사한 형태의 신발이 출토된 사례가 있으나, 이는 우리나라에서 전래된 것이다. 고창 봉덕리 1호분 출토 금동신발은 전라북도 고창 봉덕리에 위치한 4기의 대형 분구묘(墳丘墓, 분구를 조성한 다음 그 안에 매장시설을 설치하는 무덤양식) 중 규모가 가장 큰 1호분의 제4호 석실에서 2009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발굴했다. 고창 봉덕리 1호분 출토 금동신발은 백제 시대 의례용 금동신발로서, 보기 드물게 원형을 갖추어 출토된 중요한 고대 금속공예품이자, 다양하고 뛰어난 공예기법을 이용해 제작된 것으로, 5세기 중반 백제 미술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보물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 나주 정촌고분 출토 금동신발은 삼국 시대 대형 분구묘인 정촌고분의 1호 석실에서 2014년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한 것이다. 5~6세기 무렵 영산강유역에는 복암리고분군, 정촌고분, 영동리고분군 등 대형 고분이 축조되었는데, 그 중 정촌고분은 1500여 년 전 백제‧마한 문화를 가장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고분이면서 도굴 피해를 입지 않아 매장의 원형을 알 수 있어 고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무덤이다. 나주 정촌고분 출토 금동신발은 고창 봉덕리 금동신발에 비해 조금 늦은 5세기 후반 경에 제작돼 6세기 무령왕릉 출토 금동신발로 이어지는 과도기적 단계를 보여주는 공예품으로서, 5~6세기 백제의 사상과 미술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작품이다. 고창 봉덕리 1호분 출토 금동신발과 나주 정촌고분 출토 금동신발 2종은 국내 최초 원형 그대로 발굴된 유물이라는 점에서 고고학과 역사적으로 의미가 크다. 또한 같은 시기 중국이나 고구려, 신라의 미술품과 비교하여 문양의 기원과 변천, 상징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 지금까지 알려진 삼국 시대 금동신발과 비교하여 백제 공예문화의 독자성을 밝힐 수 있는 원천유물이라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 또한 매우 높다고 평가된다.

‘국보 1호 숭례문’ 이젠 ‘국보 숭례문’으로 불린다

앞으로 국보 1호 숭례문이 국보 숭례문으로, 보물 1호 흥인지문이 보물 흥인지문으로 바뀐다. 8일 문화재청은 문화재정책 60년, 국민과 함께 가꾸고 누리는 문화유산을 비전으로 하는 2021년 주요업무 추진 계획을 발표하면서, 문화재 지정번호로 문화재가 서열화되는 인식을 개선하고자 앞으로 관리번호만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그동안 60년간 정부에서 실시해 온 문화재 지정번호는 문화재 지정 시간 순서에 따라 정해져왔다. 국보 1호 숭례문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국보 348호가, 보물 제1호 흥인지문(동대문)을 시작으로 보물 2238호가 지정돼 왔다. 하지만 문화재정책 60주년인 올해 전면 개선에 들어서면서 국보 숭례문 보물 흥인지문 등으로 통칭하기로 했다. 이는 일부 시민단체가 조선총독부가 지정한 숭례문이 국보 1호로 유지되는 것은 부적절하다면서 훈민정음으로 국보 1호를 바꿔야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하자, 문화재청 내부의 논의 끝에 결정된 사항이다. 실제로 숭례문은 일제강점기인 1933년 조선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존령을 시행하면서 보물 제1호로 지정됐고, 해방 이후 1962년 문화재보호법 시행으로 국보 제1호로 승격됐다. 또한 지난 2008년 2월 숭례문 방화사건으로 숭례문의 88% 이상이 소실되고 이후 부실 복원 논란이 제기되면서 숭례문의 국보 1호 자격 논란이 제기된 바 있다. 한편 문화재청은 올해 주요 업무 4대 전략으로 문화유산의 미래가치 창출 문화유산의 온전한 보존과 전승 삶을 풍요롭게 하는 문화유산 세계와 함께 누리는 우리 유산 등을 꼽았다.

‘25m’의 조선왕실 문서 ‘20공신회맹축’ 국보된다

25m에 달하는 큰 규모를 갖춘 조선왕실의 문서인 보물 제1513호 20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이 국보로 지정 예고됐다. 상주 남장사 영산회 괘불도 및 복장유물과 구미 대둔사 경장을 보물로 지정예고됐다. 7일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에 따르면, 20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보물 제1513호, 2007.4.20. 지정)는 1680년(숙종 6) 8월 30일 열린 왕실의 의식인 회맹제(會盟祭, 임금이 공신들과 함께 천지신명에게 지내는 제사)를 기념하기 위해 1694년(숙종 20) 녹훈도감(復勳都監)에서 제작한 왕실 문서다. 이 의식에는 왕실에서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내린 이름인 공신(功臣) 중 개국공신(開國功臣)부터 보사공신(保社功臣)에 이르는 역대 20종의 공신이 된 인물들과 그 자손들이 참석해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회맹제가 거행된 시기와 이 회맹축을 조성한 시기가 15년 정도의 차이가 나는 것은 숙종 재위 기간(1674~1720년) 중 일어난 여러 정치적 변동 때문이었다. 20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는 1680년 회맹제 거행 당시의 회맹문(會盟文, 종묘사직에 고하는 제문)과 보사공신을 비롯한 역대 공신들, 그 후손들을 포함해 총 489명의 명단을 기록한 회맹록(會盟錄), 종묘에 올리는 축문(祝文, 제사 때 신에게 축원하는 글)과 제문(祭文)으로 구성됐으며, 축의 말미에 제작 사유와 제작 연대를 적었고 시명지보(施命之寶)라는 국새를 마지막으로 찍어 왕실 문서로서 완전한 형식을 갖췄다. 회맹축의 제목은 이십공신회맹축(二十功臣會盟軸)이며, 조밀하게 짠 옅은 황비단 위에 붉은 선을 가로 세로로 치고 그 안에 단정한 글씨로 써내려갔다. 가로 약 25m에 달하는 긴 문서의 양 끝은 붉은색과 파란색 비단을 덧대고 위‧아래를 옥(玉)으로 장식한 축으로 마무리해 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어람용(御覽用) 문서답게 매우 화려하면서도 정갈한 인상을 준다. 새롭게 보물로 이번에 지정 예고된 구미 대둔사 경장(龜尾 大芚寺 經欌)은 1630년(인조 8)에 조성된 경장(불교경전을 보관한 장)으로, 조선 시대 불교 목공예품 중 명문을 통해 제작 시기가 명확하게 파악된 매우 희소한 사례다. 경장으로서는 국보 제328호 예천 용문사 대장전과 윤장대(醴泉 龍門寺 大藏殿과 輪藏臺)을 제외하면 처음으로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 예고되는 것이다. 조선 후기 불교 목공예품으로 경장을 비롯해 목어(木魚), 불연(불연, 의식용 가마), 촛대, 업경대(業鏡臺, 생전에 지은 죄를 비추는 거울), 대좌(臺座, 불보살이 앉은 자리), 불단(佛壇) 등 다양한 종류가 제작되었으나, 구미 대둔사 경장처럼 제작 연대와 제작자를 알 수 있는 작품은 매우 드물다. 이러한 점에서 구미 대둔사 경장은 왼쪽 경장의 뒷면과 밑면에 제작 시기와 제작자, 용도 등을 두루 알려주는 기록이 남아 있어 조선 후기 목공예를 연구에 있어 중요한 기준이 된다. 상주 남장사 영산회 괘불도 및 복장유물(尙州 南長寺 靈山會 掛佛圖 및 腹藏遺物)은 높이 11m에 이르는 대형 불화 1폭과 각종 복장물을 넣은 복장낭(腹藏囊), 복장낭을 보관한 함을 포함한 복장유물로 구성되었다. 이처럼 불화와 함께 복장유물을 놓은 복장낭이 온전하게 일괄로 남아 있는 사례는 매우 드물다. 이 괘불도는 1776년(정조 1) 조선 후기 대표적 수화승 유성(有誠)을 비롯한 경상도 지역에서 활약한 화승 23여명이 참여하여 제작한 18세기 후반기 불화의 기준이 되는 작품이다. 또한 조선 17‧18세기 제작 괘불이 여러 번 보수를 거치는 동안 원래의 모습을 상실한 것과 달리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는 점은 이 괘불만의 독보적인 가치로 꼽을 수 있다. 지정예고와 더불어 불교문화재 3건도 보물로 지정됐다. 보물 제2108호 문경 봉암사 마애미륵여래좌상(聞慶 鳳巖寺 磨崖彌勒如來坐像), 보물 제2109호 미륵원명 청동북(彌勒院銘 金鼓), 보물 제2110호 고성 옥천사 영산회 괘불도 및 함(固城 玉泉寺 靈山會 掛佛圖 및 函) 등이다.

국내 최초 소방 헬기 ‘까치 2호’ 문화재 된다

삼풍백화점 붕괴 시 많은 인명을 구한국내 최초의 소방 헬기도 문화재로 등록 예고 됐다. 6.25전쟁 직후 신축한 성당의 건축과정이 상세히 담긴 군산 둔율동 성당 관련 문서는 문화재로 등록됐다. 31일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에 따르면, 군산 둔율동 성당 성당신축기 및 건축허가신청서 경상남도립 나전칠기 기술원 양성소 전남대학교 용봉관 등 3건이 문화재로 등록됐다. 소방 헬기 까치 2호, 국산 소방 완용 펌프 등 2건은 문화재로 등록 예고됐다. 이번에 등록되는 국가등록문화재 제677-2호 군산 둔율동 성당 성당신축기 및 건축허가신청서는 기존 국가등록문화재 제677호 군산 둔율동 성당의 건축공사와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는 2점의 자료로 성당신축기는 성당의 계획 수립, 착공, 완공, 건축기금 등 건축 전반의 과정을, 건축허가신청서는 당시의 허가신청서, 청사진 도면, 시방서 등을 담고 있다. 군산 둔율동 성당은 일제강점기 공소(본당보다 작은 교회)로 시작해 1955~1957년에 신축됐는데, 이번에 등록되는 유물은 6.25전쟁 직후 신축한 성당의 건축과정을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성당과 상호 연계된 통합적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으므로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한편 국가등록문화재 제801호 경상남도립 나전칠기 기술원 양성소는 조선 시대 통제영 12공방의 맥을 잇는 나전칠기 공예의 현장으로, 해방과 전쟁기를 거치며 나전칠기 전문 공예교육이 실시된 곳으로, 근현대 공예의 효시이자 산실로 역사적인 의미가 크다. 국가등록문화재 제802호 전남대학교 용봉관은 대학본부 건물로서 상징성 및 역사성이 있다. 건물 중앙부에 수직방향으로 높게 처리한 탑상형 구조물과 이를 중심으로 좌우 대칭의 입면과 평면을 처리한 수법 등은 1950~1960년대 공공건물에서 즐겨 채용하던 디자인적 요소로서 근대 건축사적 가치가 높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된 이들 3건을 해당 지방자치단체, 소유자(관리자) 등과 협력하여 체계적으로 보존‧관리해 나갈 것이다. 아울러 이번에 등록 예고되는 소방 헬기 까치 2호는 1980년 도입한 한국 최초의 소방 헬기로서, 2005년 퇴역 시까지 화재진압응급환자후송 등에 3천여 회 이상 출동하였고 9백여 명의 인명을 구조했다. 특히 성수대교 붕괴사고(1994), 삼풍백화점 붕괴사고(1995)와 같은 대형 사고에서 인명구조 작업 및 공중지휘 통제를 담당하였던 유물로, 함께 도입된 까치 1호가 1996년 추락 후 폐기되면서 현재로서는 유일하게 남은 최초의 소방 헬기이기도 하다. 헬기를 통해 핵심적인 인명구조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으며, 소방역사에 중요한 흔적을 남긴 역사적사회적 가치를 지닌 유물로 문화재 등록 가치가 있다. 국산 소방 완용 펌프는 1950년대 국내 생산된 수동식 소방펌프로, 수레에 싣고 인력으로 이동하는 소방 장비이다. 소방자동차와 분말소화기 같은 화재 진압기구가 보급되기 이전에 전국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된 유용한 소방기구로서, 우리나라의 소방 기구 역사의 초기 상황을 보여주는 역사적 유물이므로 문화재 등록 가치가 있다.

‘명륜당’ 등 서원·향교 20건 보물된다… “역사·예술 가치 커”

강릉향교(江陵鄕校)의 명륜당(明倫堂) 등 20건의 서원(書院)향교(鄕校) 문화재가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됐다. 29일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에 따르면, 이번에 지정된 서원과 향교 문화재는 강원 2건, 경기도 3건, 경상도 11건, 충청도 1건, 전라도 3건이며, 서원이 3건, 향교가 14건, 서당이 3건이다. 이번 지정으로 보물로 지정된 서원은 총 10건이 됐고, 향교는 총 22건이 보물이 됐다. 서당은 이번 3건 지정이 첫 보물 지정 사례이다. 보물 제2088호 강릉향교 명륜당은 강학공간의 중심으로 유교 이념교육을 실현시키기 위해 건립된 건물이다. 정면 11칸, 옆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의 건물로, 전국 향교 명륜당 중 가장 큰 규모의 누각형 건물이다. 다른 일반 향교와는 달리 누각 문루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조선 초기 문루에서 명륜당으로 정착되는 과정의 과도기 형태로 남아있는 중요한 사례로 볼 수 있다. 보물 제2089호 강릉향교 동무서무전랑은 1963년에 보물로 지정된 강릉향교 대성전의 일곽에 해당하는 건물들로 이전이나 이축 없이 건립 당시의 제자리를 고수하고 있고, 대성전과 함께 향교건축의 전형을 담고 있다. 동무(東廡)서무(西廡)는 정면 5칸, 옆면 1칸 규모의 단층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동무에 홍유후, 설총 이하 58위, 서무에 최치원 이하 57위가 봉안돼 있다. 보물 제2090호 수원향교 대성전은 1789년(정조 13) 읍치 이전에 따라 현 위치로 이건했으며, 정조의 어명을 받아 1795년(정조 19) 2고주 7량가 20칸 규모로 다시 지은 건물이다. 대성전의 규모는 서울 문묘, 나주향교, 상주향교, 제주향교, 대정향교와 함께 규모가 큰 편에 속하며 경기도 내 향교 대성전 중에서는 가장 큰 규모다. 특히, 향교가 현 위치로 이건되고 대성전이 새로 지어지는 과정은 당시 공사보고서라 할 수 있는 『화성성역의궤』등의 문헌에 상세히 전한다. 보물 제2092호 안성향교 풍화루는 중층 누각형태의 정면 11칸, 옆면 1칸의 장대한 규모를 가지며, 유식(遊息)을 위한 누와 향교 출입구 역할의 외문을 겸하는 문루로서, 현존하는 조선 시대 향교 문루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 제한적으로 공급될 수밖에 없었던 목재를 경제적으로 사용하여 효율적으로 구조적 안정성을 확보하면서도 전체적인 시각적 안정감과 조화로운 비례를 갖춰 건축 조형미를 잘 구현하였다. 보물 제2093호 산청 단성향교 명륜당은 1725년(영조 1)에 중건된 이래로 여러 차례 수리과정을 거쳐 누각형식의 독특한 평면을 잘 유지하고 있다. 동서재가 명륜당 뒤쪽에 위치하는 경남지역 유일의 전당후재(前堂後齋)형 누(樓) 형식의 명륜당이라는 특징이 있다. 보물 제2094호 밀양향교 대성전은 1602년(선조 35)에 중건된 이후 1617년(광해군 9)과 1820년(순조 20, 현 위치로 이건) 이건을 통해 17세기와 19세기의 건축수법과 형식, 기술 등이 혼재된 상태로 남아 있어 시대적 건축 기술의 흐름과 특징을 하나의 건물에서 보여준다는 점에서 건축양식사 차원에서도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특히 대성전 정면과 배면에 사용된 익공(翼工)과 첨차(檐遮)의 초각수법이 다른데, 배면은 1602년 중건 당시의 수법이고 정면은 1820년 이건 이후의 것으로 다른 형식적 특징을 보여준다. 보물 제2095호 밀양향교 명륜당은 1618년(광해군 10)에 현 위치에 중건된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수리되었으나 건물의 구조와 평면형식, 공포 등의 세부기법, 배면 판문의 소박한 구성과 영쌍창(靈雙窓)에 사용된 중간설주의 흔적 등에서 중건 당시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어 조선 중기 명륜당의 건축 특성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보물 제2096호 상주향교 대성전동무서무는 임진왜란 후 1610~1612년 사이에 재건되었으며 이후 몇 차례의 수리과정이 있었지만 규모와 구조, 형태는 조선중기 건립 당시의 원형을 대체로 잘 간직하고 있다. 대성전은 1610년(광해군 2)과 1617년(광해군 9) 중건 이후 원 위치에서 큰 변형 없이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대설위(大設位) 향교의 평면과 구조형태, 세부수법을 잘 간직하고 있다. 보물 제2097호 경주향교 명륜당은 1614년(광해군 6) 중건 이래 18세기(1705년)와 19세기(1841년, 1873년, 1880년)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는 오래된 건축물로, 우리나라 현존하는 향교 명륜당 가운데 객사형 건물(성균관, 나주향교 명륜당)을 제외한 단일 건물로는 가장 규모가 큰 사례다. 보물 제2098호 경주향교 동무서무신삼문은 2011년에 보물로 지정된 경주향교 대성전의 제향공간을 구성하는 건물들로, 1604년(선조 37)에 중건된 동무․서무는 정면 12칸으로 우리나라 향교의 무(廡) 건축물(서울 문묘 동무서무 11칸, 상주향교 동무서무 10칸) 가운데 가장 길며, 큰 도리칸의 규모를 갖고 있고, 장식을 지극히 억제하고 있다. 보물 제2099호 담양 창평향교 대성전은 창건 이래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쳤으며, 현재의 모습은 중수기를 통해 1689년(숙종 15)에 갖추어 진 것을 알 수 있다. 창평향교의 배치 형식은 ㅁ 형으로 독특한 모습이며, 대성전 앞에 마당을 담장으로 구획하고 담장 밖 좌우에 동서재를 두고 중심축선에서 약간 치우쳐 명륜당을 두었다. 향교건축에서 이러한 배치는 보기 드문 형식이다. 보물 제2100호 담양 창평향교 명륜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우측면은 2칸) 규모의 맞배지붕이며, 양 박공 면에 풍판(風板)을 설치하지 않아 목구조가 잘 드러나 보인다. 대성전을 향하는 전면이 창호 없이 모두 개방되어 있는데, 이는 호남지방 향교에서는 극히 드문 사례이다. 보물 제2101호 순천향교 대성전은 정면 5칸, 옆면 3칸 규모의 건물로 전남지역에서는 나주향교 대성전(보물 제394호), 화순향교 대성전(전남 유형문화재 제63호) 다음으로 규모가 크고 웅장하다. 대성전의 공포와 가구구조 등의 세부형식과 종도리 밑면에서 1649년(인조 27)에 쓴 상량묵서가 확인되어 17세기 중엽의 건축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분명하다. 따라서 순천향교 대성전은 외2출목 삼익공의 특징적인 공포형식, 간결하고 소박한 가구수법 등에서 조선 후기 유교건축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 호남지방의 문묘건축이라 할 수 있다. 문화재청은 20건의 서원향교 문화재는 역사예술학술건축 가치가 뛰어나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밝혔다.

17세기 사찰 ‘세종 비암사 극락보전’ 보물된다

17세기 중엽 지방 사찰 불전의 시대특성이 잘 담긴 세종 비암사 극락보전(碑巖寺 極樂寶殿)이 보물로 지정예고됐다. 24일 문화재청(청장 정재숙)에 따르면,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에 있는 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 제1호 비암사 극락보전(碑巖寺 極樂寶殿)을 24일 보물로 지정 예고된다. 세종특별자치시는 2012년 특별자치시 승격 이후 건축문화재로는 처음으로 비암사 극락보전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신청했고, 문화재위원회에서 가치가 충분하다는 판단에 따라 이번에 보물 지정 예고를 하게 됐다. 비암사는 통일신라 도선(道詵)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오고 그 외에도 여러 창건설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673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碑像, 국보 제106호)이 비암사에서 출토되었고, 지금까지 이 고장에서 비암사를 삼한고찰(三韓古刹)로 부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찰의 창건 시기는 고대로 거슬러 볼 수 있다.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일반적인 측면 3칸형에서 벗어난 2칸형 불전으로, 전란 이후 사찰 경제가 축소된 사정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공포의 구성은 크기에 따른 대첨차, 중첨차, 소첨차를 모두 사용한 특징을 보이며, 첨차를 배열한 방식, 내외부의 살미 모양 등에는 조선 중기 이후 다포 건축물에 보이는 특징들이 잘 반영되어 있다. 극락보전의 가구 구조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중요한 요소는 측면 규모라 할 수 있다. 측면이 2칸이면서 팔작집을 지으려다 보니 일반적인 상부가구 구성으론 대응이 쉽지 않았다. 보통 건물에서는 충량 1본을 두었으나, 극락보전은 충량을 좌우 협칸에 각각 3본씩 설치하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측면 주칸이 긴 편이어서 충량을 보조로 설치하여 추녀에 걸리는 하중을 감당하려는 의도로 추측된다. 이처럼 세종 비암사 극락보전은 건물 조성연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찾을 수 없으나, 17세기 중엽 지방 사찰 불전의 시대특성과 지역색을 잘 간직한 점에서 국가지정문화재로의 가치가 지닌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