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추사 김정희 ‘靜偈(정게)’ 두루마리 유묵 발굴

추사 김정희가 남북조시대 유행한 육조체(六朝體) 행서로 쓴 정게(靜偈, 고요히 게송을 외움) 두루마리 유묵이 발굴됐다. 그동안 한중 고대 묵서경과 고대 글자를 연구해 온 한국역사문화연구회 이재준 고문(전 충청북도 문화재 위원)은 최근 추사의 진묵을 발굴하고 이를 고증한 내용을 본지에 단독 공개했다. 이 고문은 이 유묵에 대해 글자 자체연구는 물론 시의 내용을 분석, 추사가 존경하고 배움을 잊지 않은 청나라 학자 옹방강(1733~1818)과의 사제간 유대를 더욱 살필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이 고문이 공개한 추사 정게는 고요히 앉아 게송(부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찬탄하는 노래)하는 선학의 경지를 노래한 것으로, 초의선사에게 준 정게가 유명하다. 이 두루마리 유묵은 청나라 산 홍지(紅紙)에 일행 3자씩 모두 28행을 쓴 1축으로 크기는 335x21㎝다. 이 유묵이 주목을 끄는 것은 추사가 생존할 당시 이 글씨가 중국에 전달돼 당대 청나라 유명한 서법가들이 배관기(拜觀記)를 썼다는 점이다. 추사 작품이 당대 청나라에 전달돼 유명 인사들이 배관한 것은 국보 제189호로 지정된 세한도 뿐이다. 이 고문은 배관기를 쓴 청나라 서법가는 자청(子靑) 장지만(張之萬, 1811~1897)과 명필이며 민국시대 교육자였던 망부도화(茫父姚華, 1876~1930)로 이들은 추사의 글씨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밝혔다. 장지만은 당대의 서화가로 존경을 받은 인물로 1846(병오)년 35세에 쓴 배관기에는 추사의 글이 기묘하며 평사낙안(平沙落雁, 모래펄에 와서 앉은 기러기. 글씨나 문장이 대단히 잘 쓰는 것을 나타낸 사자성어)에 비유했으며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글씨라고 평가했다. 배관기를 쓴 망부도화(茫父姚華)는 이 유묵의 소장자이기도 했으며 첫머리 완당김정희진적이라고 제전(題篆)을 썼다. 그는 전서와 예서를 잘 썼으며 많은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망부도화는 1931년까지 이 유묵을 소장하고 있다가 사후에 유족들이 장춘 문관회에 이관했으며, 이들은 동북박물관에 기증한 것으로 두루마리 외면에 기재해 놓았다. 동북박물관은 문화혁명당시 폐관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글씨는 오래전 중국에서 한국으로 회류됐으며 소장자가 이 고문에게 고증을 의뢰함으로써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게송은 칠언(七言)으로 구성돼 있으며 시 안에는 추사가 존경해왔던 옹방강이 편찬한 복초재시집(复初斋诗集)에서 4련을 인용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복초재시집은 추사가 연경에 갔을 때 옹방강으로부터 받은 귀중한 책 선물이며 송원대 많은 시인들의 시를 모은 것이다. 추사는 이 책으로 역대 중국의 수많은 한시를 공부했으며 옹방강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1829년 전남 대둔사에 책을 보관토록 했다. 그런데 이 시집은 대둔사에서 유실돼 서예가 소전 손재형 등이 수장하고 있다가 2011년 7월 서울의 한 옥션에서 발견돼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이 고문은 이 게송의 첫 구절인 道心靜欲添香篆 詩味深扵浴內丹는 복초재시집 卷67(石畫軒艸十)에서 7, 8련인 山翠染將螺子色 湖光點出美人晴은 방강과 동년인 여류 심청임(沈清任.清畫家詩史)의 시에서 따온 것이라고 밝혔다. 정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道心靜欲添香篆 조용한 가운데 깨달음을 위해 향을 피우니 詩味深扵浴內丹 수련에 빠지면 시의 맛도 깊네 背郭忽聞銀色界 홀연히 뒤에서 보살의 은색계가 들리고 諸峯枚白齊豪光 여러 봉우리가 흰 머리털 같이 빛나오리다 夢羅偶愁餘薄冷 꿈속에 남은 수심 차갑기만 한데 意中何處得春陰 마음 속 어디서 봄 기운을 얻을까 山翠染將螺子色 산의 빛나는 색은 장차 자개색이 되리 湖光點出美人晴 반짝이는 호수 빛은 맑은 미인일세 儘饒泉聲供浴如 산간의 물 소리는 몸을 씻는 것 같네 許松陰可少僧千 소나무 그늘은 가히 천명의 승려로세 (見)佛光明皆石翠 부처의 광명으로 모든 돌은 비취색 됐네 六朝文字盡松靑 육조글로 극진히 적다 勝蓮老人 승련노인(의역 이재준 고문) 한편 배관기를 쓴 장지만(张之萬, 1811~1897)은 자 자청(子青),호 난파(銮坡),직례남피(直隶南皮) 사람으로 하북성에서 출생했다. 1847년 중 진사 일등장원, 1876년 임 하난 순무,1882년 병부상서, 1884년 이부상서, 체인각 대학사를 지냈으며 1896년에 낙향했다. 저명 서화가로 이름을 날렸으며 많은 작품이 전해지고 있다. 1897년 87세의 일기로 사망했으며증(贈) 태보(太保), 시호는 문달(文達)이다.

[지역사 이야기7-서울] “2명의 임금을 모실 수 없다”… 목숨 바쳐 충절 지킨 사육신 (3)

◆ 논란의 사육신 공원 수양대군이 불러온 피바람 그렇지만 세조의 피바람 뒤에 우리는 의(義)를 알았다. 사육신이 죽지 않았던들 우리가 의를 알았겠는가. 이것도 고난의 뜻이지 않을까. 고난 뒤에는 배울 것이 있다. -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사육신 공원은 노량진역에서 1번 출구로 나와 공무원 입시생들이 다니는 학원 숲을 지나면 나온다. 조금 가파른 언덕을 오르면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사당과 그 뒤편으로 묘가 있다. 또 조금 더 올라가면 사육신 역사관을 만날 수 있다. 사육신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사당에 들어가면 위패가 7개가 나온다. 묘 또한 7기로 조성되어 있다. 여태 우리는 사육신을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6명으로 알고 있었지만 사칠신이었다는 말일까. 위패를 나란히 보면 낯익은 듯 낯선 인물의 위패가 보인다. 이름은 김문기. 그는 누구일까. 김문기는 세종대에 예문관검열, 병조참의 등을 거쳐 1453(단종 1)년에 형조참판에 올랐던 인물로 단종 복위 운동에도 함께했다. 단종 복위 운동이 발각되어 군기감 앞에서 처형된 김문기였지만 남효온이 쓴 추강집에사육신의명단으로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1731(영조 7)년에 복관됐고 정조 때 편정한 어정배식록에 삼중신(三重臣)으로 민신, 조극관과 함께 명단에 올랐다. 앞서 말했던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6명은 추강집의 기록대로 사육신으로 기록됐다. 그렇다면 삼중신 중 하나인 김문기는 왜 사육신 묘에 함께 있게 된 것일까. 사육신 공원이 조성되던 1977년의 기록을 봐야한다. 당시 서울시는 사육신 공원을 재정비 하면서 묘역에 없던 하위지와 유성원의 묘를 새로 만들어 모시려 했다. 그러자 김문기의 집안인 김녕 김씨 종친회가 사육신에는 유응부 대신 김문기가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이에 서울시는 문교부를 통해 국사편찬위원회에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의뢰하자 국사편찬위원회는 특별위원회를 구성했고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결정했다. 서울시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이 결정에 따라 사육신 묘역에 김문기의 가묘를 추가로 설치했다. 다만 유응부의 묘도 그대로 두었다. 결국 이러한 결정은 사육신 논쟁이 됐다. 유응부의 천녕 유씨 종친회와 ㈔사육신현창회 모두 반발했다. 그러자 국사편찬위원회는 결국 1982년 종래 사육신을 변경한 적이 없다고 다시 말했다. 분명 정조 때 어정배식록에서 사육신과 삼중신을 구분했음에도 이런 논란이 발생했다. 우리가 생각할 것은 사육신 공원에 위패와 묘를 모신다고 해서 충신이고, 뺀다고 해서 충신이 아닌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당시 사육신과 삼중신 모두 2명의 임금을 모실 수 없다는 신념 아래 목숨을 바친 충절을 지킨 충신들이었다. 이 충신들의 충절을 우리가 감히 더하다, 덜하다 논할 수 있는 문제인 것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노량진은 나라의 일을 하기 위해 준비 중인 공시생들이 모인 곳이다. 점심시간이 되면 공시생들이 휴식을 하기 위해 사육신 공원에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위로 올라가면 탁 트인 한강을 볼 수 있고 공원 조성도 잘 해놨기 때문이다. 불꽃 축제 때 명소로 꼽히기도 한다. 그렇다면 공원을 찾는 이들이 바라볼 때 사육신의 충절을 흐리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공원을 예쁘게만 조성할 것이 아니라 그 의미가 퇴색되지 않도록 지키는 것도 공원 조성의 일부분이라 할 것이다. 더 이상 그들의 충절이 퇴색되지 않도록 올바른 역사 전달은 분명히 필요하다.

[지역사 이야기7-서울] “2명의 임금을 모실 수 없다”… 목숨 바쳐 충절 지킨 사육신 (2)

◆ 생육신과 사육신 사육신은 단종 복위를 주도한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를 가리킨다. 생육신 중 한명으로 불리는 남효온이추강집에 이들에 대한 기록을 상세히 적으면서 이들의 충절을 기리게 됐다. 세조 이후 사대부들이 이들의 신원을 요구하자 성종(成宗)은 이들의 후손이 관직에 오를 수 있도록 금고(禁錮)를 풀어줬고, 숙종(肅宗)은 6명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서원을 지어 위패를 안치할 수 있도록 했다. 영정조 대에는 사육신 외의 인물들도 관작을 회복시키고 어정배식록을 작성하도록 해 계유정난과 단종 복위 운동으로 희생된 이들의 위패 또한 안치하도록 하여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사육신 중 한명인 박팽년은 1434(세종 16)년에 급제해 집현전 학자로 활동했던 인물이었다. 이후 단종 때 우승지를 거쳐 형조참판이 됐으나 세조가 즉위하자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했다. 박팽년은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그의 재능을 아낀 세조가 회유를 했으나 끝까지 거절하다 고문으로 죽고 말았다. 박팽년과 함께 단종 복위를 주도했던 성삼문도 집현전 학사 출신이다. 정인지, 박팽년, 신숙주 등과 함께 훈민정음을 만드는데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할 당시 예방승지였던 성삼문은 단종의 옥새를 수양대군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었다. 양위식을 담당했던 그는 옥새를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목숨을 바쳐 충절을 지켰던 사육신이 있다면 함께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했지만 목숨을 잃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았던 이들도 있다. 바로 생육신(生六臣)이다. 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이 이에 속한다. 김시습은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3일간 통곡을 하다 공부하던 책을 다 불태우고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됐다. 이후 방랑 생활을 하며 시와 글을 쓰며 지냈는데 그는 청빈하게 뜻을 지키는 것이 포부였다며 하루는 홀연히 감개한 일(계유정난)을 당하여 남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도(道)를 행할 수 있는데도 출사하지 않음은 부끄러운 일이며, 도를 행할 수 없는 경우에는 홀로 그 몸이라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고 밝히면서 방랑 생활의 이유를 설명했다. 또 김시습은 거열형으로 찢어진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해 노량진에 임시 매장하기도 했다. 육신전을 쓴 남효온은 단종 복위 운동 당시의 인물은 아니다. 1454(단종 2)년에 태어난 남효온은 김종직의 문인으로 김굉필, 정여창 등과 함께 수학했다. 그가 생육신 중 한명으로 꼽힌 것은 성종에게 올린 장문의 소와 육신전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당시 25세였던 남효온은 성종에게 올린 소에서 문종의 비 현덕왕후의 능인 소릉을 복위해달라고 요구했다. 소릉 복위는 세조와 함께 공신에 오른 이들의 명분을 부정한 것으로 매우 위험한 발언이었다. 이후 남효온은 1480년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더 이상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당시 계유정난의 공신이었던 훈구파가 집권하고 있었고 이에 남효온은 소릉이 복위된 뒤에 과거를 보겠다고 말했다. 결국 남효온은 벼슬을 단념하고 김시습처럼 유랑을 하면서 추강집을 저술했다. 육신전은 추강집에 있는 내용이다. 그가 죽은 뒤 갑자사화 때 생전에 소릉 복위를 상소한 것을 이유로 부관참시 당했으며 중종 때 소릉 복위가 되자 신원된 후 정조대에 이조판서로 추증됐다.

[지역사 이야기7-서울] “2명의 임금을 모실 수 없다”… 목숨 바쳐 충절 지킨 사육신 (1)

줄지어 세워진 공무원 학원들과 서울 최대 수산물 전문 도매시장인 수산시장, 허기진 공시생들의 배를 채워주는 컵밥까지. 노량진의 대표적인 이미지들이다. 하지만 이곳은 충절(忠節)이 함께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바로 단종의 복위를 꿈꾸다 스러져 가버린 사육신의 정신을 기리는 사육신 공원이 있다. ◆ 실패한 단종 복위 운동 계유정난(1453년)으로 수양대군은 왕권에 한 발 더 다가갔다. 수양대군은 문종이 어린 세자(단종)를부탁했던 김종서황보인을 왕위를 빼앗으려 했다고 거짓으로 꾸며 죽였고 병권을 쥔 채 요직을 겸직하면서 조정을 장악했다. 계유정난 이후 1년이 되던 1455년수양대군은 조카인 단종을 겁박해 상왕으로 앉히며 자신이 왕위를 받아 조선 제7대 왕 세조(世祖)가 됐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고1456년 세종대 집현전 출신의 유학자들이 단종 복위를 논하다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병자사화(丙子士禍)라고도 불리는 이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처형되고 유배됐다.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은 명나라 사신들을 초대해 창덕궁에서 연회를 베풀 때 별운검으로 유응부와 성승을 세우고 그 자리에서 세조를 죽이고 단종을 다시 왕위에 앉히기로 계획했다. 하지만 세조가 별운검을 세우지 않도록 명령을 한데다 세자도 병으로 연회장에 나오지 않자 거사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당시 유응부는 거사를 단행하고자 했으나 성삼문과 박팽년이 지금 세자가 경복궁에 있고, 공(유응부)의 운검을 쓰지 못하게 한 것은 하늘의 뜻이다. 만약 이곳 창덕궁에서 거사하더라도 혹시 세자가 변고를 듣고서 경복궁에서 군사를 동원해 온다면 일의 성패를 알 수 없으니 뒷날을 기다리는 것만 못하다고 말하며 말렸다. 이에 유응부는 이런 일은 빨리 할수록 좋은데 만약 늦춘다면 누설될까 염려가 된다. 지금 세자가 비록 이곳에 오지 않았지만 왕의 우익이 모두 이곳에 있으니 오늘 이들을 죽이고 단종을 호위하고 호령한다면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니 놓치면 안 될 것이라고 말했으나 성삼문과 박팽년의 만류로 거사는 중지됐다. 하지만 유응부의 염려는 현실이 됐다. 함께 일을 도모하던 김질이 거사가 성공되지 않자 장인인 정창손에게 알려 함께 반역을 밀고한 것이다. 세조는 주모자 6명을 당장 잡아들였다. 유응부는 세조의 국문 중에도 자복하지 않은 채 성삼문과 박팽년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이 서생과는 함께 일을 모의할 수 없다고 하더니 과연 그렇다. 지난번 사신을 초청 연회하던 날 내가 칼을 사용하려고 했는데 그대들이 굳이 말리면서 만전의 계책이 아니오 하더니 오늘의 화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대들처럼 꾀와 수단이 없으면 무엇에 쓰겠는가!하면서 세조에게 만약 이 사실 밖의 일을 묻고자 한다면 저 쓸모없는 선비에게 물어보라고 외쳤다. 이후 단종 복위를 주도한 성삼문이개하위지박중림김문기 등은 1456년 7월 10일 수레로 찢겨 죽는 거열형을 당했고, 연좌제로 이들의 가솔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노비가 됐다.

[지역사 이야기6-의령] 난세(亂世)에 등장한 붉은 옷, 홍의장군 곽재우(3)

◆ 근심을 잊고 살겠다 평생토록 절개 의리를 사모했건만 오늘에야 산 속의 승려가 되었구나. 곡기를 끊어도 주림과 목마름이 없고, 마음을 비우니 호흡이 절로 이루어지네. - 영회(내 마음을 읊다) 임진왜란에서 이순신, 권율과 함께 휩쓸고 다녔던 곽재우는 노년의 시기를 영산현 남쪽 창암진(지금의 창녕군 도천면)에 망우정(忘憂亭)을 짓고 살았다. 망우정에 들어가기 전 그는 1600년 봄에 병을 이유로 경상좌도병마절도사를 사직했다. 사헌부는 이를 탄핵했고 그는 전라도 영암에 2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이후 비슬산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다 망우정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의병장 활동을 시작할 때부터 조정과의 마찰이 있었다. 거기다 선조는 그를 마뜩찮아 했고 그 또한 여러 번 벼슬길을 마다했다. 곽재우는 이순신의 투옥과 의병장 김덕령이 무고로 옥사를 당하자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노년은 매우 빈궁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1608년 광해군의 교지를 들고 갔던 금군은 인적이 아주 끊어진 영산의 산골에 두어 칸의 초가를 짓고 두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생계가 아주 초라했고 병들어 누워서 나오지도 못했다라고 보고했다. 원래 곽재우는 의병을 일으키기 전만 해도 꽤 큰 부를 갖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농업경영을 통해 꽤 큰 재산을 모았다고 알려졌다. 거기다 당시 의병에 참가한 양반들 대부분 수백~수천 마지기의 토지와 200~300명의 노비를 소유했던 것으로 보이며 곽재우 또한 그와 비슷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만우정 생활 중에도 조정의 부름은 여전히 있어서 1604(선조 37)년 찰리사에 임명돼 인동의 천생산성을 보수하고 가선대부용양위상호군에 임명되기도 했다. 이후 1610(광해군 2)년에도 오위도총부의 부총관과 함경도관찰사,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됐다. 하지만 광해군에게 영창대군 사사문제에 대해 옹호하는 상소를 올린 뒤로 더 이상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이후 곽재우는 만우정에서 여생을 보냈고 1617년 4월 10일 65세의 일기로 그의 삶을 마감했다. 그의 묘는 지금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신당리에 안장됐으며 1709(숙종 35)년에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로 추증됐다. 현재 의령에서는 곽재우 장군의 생가가 조성돼 있고 그의 넋을 위로하는 충익사와 의병의 삶을 보여주는 의령 의병박물관이 있다. 의령에서 활약한 그는 긴박했던 임진왜란 때 곡창지대인 호남을 지키는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전쟁의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어지러웠던 그 시대에 가장 먼저 일으킨 그의 의병은 난세의 영웅과도 같았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로 어지러운 이때에 영웅과도 같은 존재를 우리는 기다려본다.

[지역사 이야기6-의령] 난세(亂世)에 등장한 붉은 옷, 홍의장군 곽재우(2)

◆ 붉은 옷의 장군 왜적들이 이 지방(의령)에는 홍의장군이 있으니 조심하여 피해야 한다고 했다. - 선조실록 6월 기록 中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키자 김면조종도곽준 등이 거창성주에서, 조식의 수제자인 정인홍도 합천고령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판관 김시민과 함께 진주성을 방어하면서 활동을 이어갔다. 이후 김면이 사망하고 곽재우가 경상좌도 직책을 받으면서 경상우도의 의병을 통괄했고 구성인원도 의령 사람뿐만 아니라 창녕 인근의 인사들까지 포함했다. 임진왜란은 의병과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승기가 점점 조선쪽으로 옮겨졌다. 곽재우의 전술은 기본적으로위장매복 등을 통한 유격적으로적을 교란시켰다. 곽재우가 유격전을 통해일본군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고향 의령의 지리를 잘 알고 있었고 이를 잘 활용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 관군의 활약보다 의병의 활약이 두드러질 수 있었던 이유기도 했다. 곽재우는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칭했다. 그가 입고 있던 붉은 옷은 아버지 곽월이 명 사신으로 파견됐을 때 얻어 온 붉은 비단으로 만든 것이었다. 홍의장군으로 이름을 떨치던 곽재우는 전공을 인정받아 유곡찰방(幽谷察訪)형조정랑(刑曹正郎)절충장군(折衝將軍)조방장(助防將)에 이어 성주목사가 돼 정진을 방어하는 임무까지 맡는다. 이후 곽재우는 산성을 거점으로 하는 방어전을 전개할 것을 주장했고 조정은 이를 수용하여 곽재우에게 의령단성고령 등 주요 산성을 총괄하도록 했다. 명을 받은 곽재우는 악견산성용기산성구성산성 등을 정비했다.

[지역사 이야기6-의령] 난세(亂世)에 등장한 붉은 옷, 홍의장군 곽재우(1)

난세에 영웅이 난다 했다. 특히 한국인들은 국난(國難)이 생길 때마다 정부의 해결책보다 국민(백성)들 가운데 영웅처럼 나타나는 존재가 등장했었다. 특히 조선시대 가장 큰 국난이었던 임진왜란 때에는 수많은 영웅들이 나타났으니 바로 의병(義兵)이다. 그 중에서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가장 먼저 자신의 노비들을 데리고 등장한 이가 있으니 만우당 곽재우다. ◆ 10여 명의 노비와 일으킨 의병 곽재우는 1552년 8월에 경남 의령에서 태어났다. 의령은 그의 외가로 그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지만 의병장으로 활동한 주요 지역이다. 그는 13살에 숙부 곽규로부터 학문을 닦았고 15살에 김행의 둘째 딸과 혼인을 했다. 곽재우의 장인인 김행은 남명 조식의 사위였고 조식은 자신의 외손사위로 곽재우를 직접 택했다. 이후 문무를 갈고 닦던 그는 1585년 별시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하지만 답안이 불손하다는 이유로 선조는 그를 낙방시켰고 억울함이 다 가기도 전에 이듬해 8월 6일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삼년상에 들어갔다. 이후 곽재우는 고향 의령에서 낚시를 하면서 유유자적한 삶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1592년 4월 일본군이 부산에 나타났고 조선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갔다. 이를 본 곽재우는 임지왜란이 발발하고 열흘도 되지 않은 4월 22일 의병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그가 거느리고 있던 노비 10여명과 함께 했지만 이틀 뒤에는 50여명으로 늘었고 곧 2000명이 넘는 수로 확대됐다. 곽재우의 의병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활약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1592년 7월에 있었던 정암진 전투다. 정진강 전투라고도 불리는 이 전투에서 의병은 일본에게서 최초의승리를 거뒀다. 서울 한양까지 점령한 일본군은 조선 전체를 장악하기 위해 군대를 분산시켰는데 정암진 전투에서 패배한 부대는 제6번대로 전라도 지역을 공략하기 위해 의령으로 향했다. 정암진은 함안과 의령 경계로 남강 유역에 있는데 갈대와 수풀로 덮여 있는 습지가 넓게 분포해 있었다. 이에 일본군은 강을 건너기 전 정찰병을 미리 보내 푯말로 미리 안전한 길을 표시해뒀다. 그러자 곽재우의 의병은 푯말의 위치를 교묘하게 옮겼고 새벽에 남강을 건너고 있는 일본군을 기습했다. 기습에 성공하면서 전라도로 진격하던 일본군을 저지시켰고 그 결과 호남의 곡창지대를 지킬 수 있었다.

[지역사 이야기5-나주] 거북선의 고향, 나대용 장군을 기리다(3)

◆ 조선 최고의 조선기술자로 인정받다 나대용 장군은 일본과 마지막으로 싸운 노량해전까지 이순신 장군을 보필하며 전투에 참여했고이에 선조는 청룡도와 삼지창을 하사하며 공을 치하했다. 전란 이후 순찰사 한효순 휘하의 군관으로 있으면서 거북선의 불편함을 개량한 창선을 개발했다. 거북선은 덩치가 커서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단점이 있었는데, 창선은 적은 인원으로도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어진 중형 군선이었다. 선조 39년 12월에 나대용 장군은 신은 항상 노 젓는 병사가 덜 들어가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던 바, 기해년(1599년)에 일찍이 순찰사 한효순의 군관이 되어 전선 25척을 별도로 만들었고, 감조할 때 판옥선도 아니요, 거북선도 아닌 특별한 모양으로 만들어서, 칼과 창을 총총히 꽂아 이름을 창선이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노 젓는 병사 42명을 싣고 시험 삼아 바다 가운데로 저어 나가 보니 그 빠른 품이 나는 것 같사옵고 화살 쏘는 편의도 역시 판옥선 보다 나았습니다.라고 상소문을 올렸다. 사실 창선은 당대에 크게 각광을 받지는 못했으나 조선 후기에 나타난 방선 또는 방패선이라고 불리는 중형 전투함의 모형이 됐다. 창선 외에도 남해현령으로 재직했을 시절에는 쾌속선인 해추선을 발명했다. 이에 광해군은 오직 재력의 핍박이 극심하여 이에 네 손발로 노력해서 이루었도다. 고을 다스린 지 겨우 열 달 만에 공역을 끝내어 세 척을 만들었다니 이미 직책을 다 한 실효가 있는데 어찌 공을 보수하는 특전이 없을소냐 이러므로 벼슬을 통정대부로 올리고 남해현령을 이전과 같이 거행케 한다.고 교서를 내리기도 했다. ◆ 나대용 장군 기념사업 장군의 고향인 나주시 문평면 오륜리에 가면 그의 생가가 있다. 또 인근에는 그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된 소충사가 있다. 장군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77년에 건립됐다. 이 외에도 그의 공적을 기리는 기적비도 얼마 가지 않아서 볼 수 있다. 그의 후손들은 매년 과학의 날인 4월 21일에 추모제를 열고 있다. 사실 거북선이라고 하면 이순신 장군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또 나대용 장군이 거북선 건조에 참여한 것은 확실하나 제안을 했다고 할 수 있는 기록들이 아직 많지 않다. 하지만 그의 참여로 만들어진 거북선은 임진왜란을 승리로 견인한 주인공인 것은 확실하다. 또 조선 후기 호남의 유림들이 그의 공과 덕을 기리기 시작한 것을 보면 그의 공적 또한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제껏 임진왜란=거북선=이순신이라는 공식 아래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만 조명해왔다. 그러나 이순신장군이 길었던 임진왜란을 혼자만의 지략과 힘만으로는 승리로 이끌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옆에서 많은 이들이 보필하였고, 피와 땀을 흘리며 함께 조선을 지켰을 그들의역사를 조명하는 후대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지역사 이야기5-나주] 거북선의 고향, 나대용 장군을 기리다(2)

◆ 나대용 장군의 손에서 재탄생한 거북선 장군의 생가가 있는 오륜동은 현재 논이 펼쳐져있지만, 당시에는 방죽골이라고 해서 마을 입구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인근에는 고막천이 있는데 지금은 수량이 적지만 당시에는 수량도 많고 제법 깊어 큰 배들이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나대용 장군은 바다와 배에 친숙했고, 왜구들이 영산강까지 올라오자 이들을 무찌를 수 있는 전선을 고안하기 시작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렇다면 장군은 어떻게 거북선을 생각했을까? 먼저 거북선에 대한 기록은 태종실록에서 최초로 볼 수 있다. 태종이 임진 나루를 지나다가 거북선과 왜선이 서로 싸우는 상황을 봤다고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고려 말부터 조선 해안가에서 출몰하던 왜구들을 방어하기 위한 배로 보인다. 앞서 언급했듯이 당시 왜구의 수탈이 심화될 때였기에 정부는 여러 방법으로 다양한 전선을 만들었는데 그중 하나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크다. 하지만 태종실록에서 등장했던 거북선은 한동안 볼 수 없다가 약 180년이 지난 후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에 의해 다시 등장하게 됐다. 나대용 장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년 전 전라좌수사로 있던 이순신 장군에게 찾아가 거북선 제작에 대해 건의했다. 하지만 태종실록에 등장하는 거북선과 나대용 장군이 만든 거북선은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을 것이라 본다. 태종 때는 맹선 구조의 배가 주를 이뤘다면 나대용 장군 때에는 판옥선이 이미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전으로 전해져오는 물방개 노래를 통해 나대용 장군이 저수지에서 빙글 빙글 돌고 있는 물방개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빙글 빙글 돌아라 잘도 돈다 물방개야 비바람 거친 파도 걱정일랑 하지 마라 크게 쓰일 장수 나와 낙락장송 다듬어서 너 닮은 거북배 바다 오적 쓸어낸다 어허 둥둥 좋을시고 빙글 빙글 돌아라 잘도 돈다 물방개야 잘도 돈다 물방개야 ◆ 임진왜란의 일등공신, 거북선 거북선의 구조적 특징은 1592년 6월 14일 이순신 장군이 선조에게 올린 계본(조선시대 중앙지방 직계 관리가 국왕에게 담당 업무에 대해 올린 보고서)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신이 일찍이 왜적의 침입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별도로 거북선을 건조하였습니다. 앞에는 용의 머리를 만들어 붙이고 그 입으로 대포를 쏘며, 등에는 쇠목을 꽂았고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어도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습니다. 비록 적선 수백 척 속이라도 뚫고 들어가서 대포를 쏘게 되어 있습니다. 위 내용을 봤을 때 거북선의 선두는 용의 머리로 되어 있어 대포를 쏠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것과 선체에는 쇠목을 꽂아 왜구들이 쉽게 배 위로 접근하기 어려웠다는 것, 또 적선을 뚫고 들어가는 돌격대용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돌격대용 거북선이 필요했을까? 당시 일본은 칼을 잘 쓰고 백병전에 능했다. 반면 조선은 멀리서 대포나 화살을 쏘는 전술로 응대했다. 이에 일본은 속도가 빠른 배로 가까이 다가와 직접 조선의 배에 뛰어들었다. 그러다보니 조선은 일본이 배에 뛰어들 수 없도록 해야 했다. 나대용 장군은 일본이 뛰어들지 못하도록 뚜껑을 만들어 올렸고, 뚜껑에 쇠못까지 박았기에 일본군은 쉽사리 거북선에 뛰어들지 못했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은 다양한 전술 중에서도 거북선을 이용한 선제공격과 당파전술을 많이 보였다. 진주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리는 한산도대첩은 거북선의 역할이 두드러진 전투였다. 전투에서 조선 수군은 거제도와 고성 사이에 있는 한산도 앞바다에 왜군을 유인한 후 학익진을 펴고 일제히 왜군을 향해 진격했다. 이때 거북선은 선봉에 서서 화력을 한꺼번에 쏘아 적선 60여척을 격파시켰다. 이후 따라온 전선들이 합세해 화살로 적을 쏘거나 불화살로 적의 배를 전소시켰다. 이러한 전술이 먹힐 수 있었던 것은 철갑선이었던 거북선은 판옥선에 비해 일본군의 조총에 피해를 적게 입는 장점을 살렸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일본의 수군은 거의 전멸하다 시피 했고, 육지에서 계속 지고 있던 조선은 다시금 대열을 정비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한산도대첩에 앞서 통영 앞바다에서 있었던 당포해전에서도 거북선의 위력을 엿볼 수 있다. 왜선이 당포 선창에 정박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을 앞세워 접근했다. 왜군은 조총을 쏘며 맞섰지만 거북선은 대포를 쏘면서 뱃머리로 당시 왜장이었던 카메이 코레노리가 타고 있던 왜선을 들이받았다. 이어 수군은 화포와 화살을 왜장선에 집중적으로 발사했고 왜장은 중위장 권준이 쏜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왜장인 카메이 코레노리가 사망하자 왜군은 전의를 상실한 채 도망쳤고, 이 전투로 조선은 왜선 21척 모두 격침시키는 결과를 보였다.

[지역사 이야기5-나주] 거북선의 고향, 나대용 장군을 기리다(1)

조선시대 가장 큰 전란 중 하나였던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것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지략과 거북선의 등장이었다.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짝지와도 같아 보이지만, 사실 거북선을 만든 인물은 따로 있다. 바로 체암 나대용 장군이다. ◆ 나대용 장군, 그는 누구인가 1566년 나주에서 태어난 나대용 장군은 조선 중기 무신이다. 원래는 학문의 길을 걸었지만 영산강 유역에 나타나 행패를 부리는 왜구의 모습에 무예를 닦고 28세에 무과에 급제했다. 급제 후 훈련원 봉사(奉事)로 8년간 근무하면서 조정에 왜적이 들어올 것을 염려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다 1582년에 고향인 나주 문평으로 낙향한 그는 어렸을 때부터 생각해왔던 거북선 연구를 시작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591(선조 24)년에 나대용 장군은 이순신 장군 휘하로 들어가게 된다. 이순신 장군 휘하로 들어간 그는 거북선 건조 외에도 옥포해전, 사천해전 등에 참여해 공을 세웠다. 이후 정유재란에도 이순신 장군과 함께 참여해 명량해전과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길었던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대용 장군은 강진남해고성 등 일곱 곳의 현령(縣令)을 역임하면서 전란을 수습하고 민생안정을 시켰다. 특히 남해는 왜적이 계속 들끓던 곳이었지만 나대용 장군의 노력으로 안정을 시킨 곳이었다. 이후 광해군 3년에 경기 수군을 관할하는 교동수사로 승진됐으나 임진왜란 중 입은 부상이 덧나면서 부임하지 못하고 다음해에 향년 57세로 별세했다. 그의 묘는 고향인 나주시 문평면에 위치해있다. ◆ 화력은 좋았지만 속도가 느렸던 판옥선 임진왜란 때 등장했던 거북선. 그렇다면 거북선이 등장하기 전에 이용됐던 배는 어떤 것일까? 당시 수군의 주력 전함은 전선이라고도 불리는 판옥선이었다. 판옥선 이전에 있었던 맹선은 고려시대 때부터 이용됐던 배로, 조운을 겸할 수 있었다. 평소에는 조운선으로 이용되다가, 군용으로 쓰일 때는 적당한 수의 노를 설치해 병사들이 싸울 수 있도록 갑판을 깔았다. 하지만 왜적들이 왜선에 화포를 설치하고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평선 구조의 맹선만으로는 왜구 격퇴가 어려워졌다. 그래서 명종 대에 맹선의 단점을 보완해 만든 군용선이 판옥선이었다. 판옥선은 갑판 위에 상갑판을 올리고, 그 위에 사령탑을 설치한 형태의 2층 구조로 되어 있다. 1층은 노를 젓는 노군이 담당했고, 2층은 전투에 참여하는 전투원들이 담당했다. 이는 판옥선의 가장 큰 장점으로 내부에서 노를 젓는 노군들이 노출되지 않았다. 즉 전투에 참여하는 전투원들과 노만 젓는 노군과의 역할을 분리함으로써 각자의 역할에 충실히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판옥선은 거북선과 비교했을 때 구조는 비슷하나, 전투에 이용되는 역할이 달랐다. 거북선은 맨 앞에서 진격해 적의 진열을 흩뜨리는 돌격대의 역할이었다면 판옥선은 그 뒤를 따라 막강한 화력을 통해 적들을 소탕하는 역할이었다. 속도가 느렸기 때문이다.

[지역사 이야기4-진도] 삼별초, 또 하나의 고려를 세우다(3)

강화에서 진도로, 진도에서 제주까지 옮겨가며 몽고에 항쟁한 삼별초항쟁은 약 3년에 걸쳐 일어났다. 결국은 여몽연합군의 수에 밀려 쓰러져버린 그들이었지만 그들이 지키고자 한 것은 자주적인 고려였다. 삼별초항쟁이 처음 알려진 것은 삼별초의 난이었다. 삼별초라는 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들의 항쟁을 살펴보면 그저 무신정권의 생명을 연장하고자 하는 삼별초만이 참여한 것은아니었다. 몽골의 침입으로 피폐해졌던 백성들 또한 나라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면서 오히려 삼별초를 지지하는 민중적인 성격까지 나타난다. 결국 삼별초항쟁은 단순히 무신정권의 연장선이아니라 나라를 핍박하고 있는 몽골에 대한 백성들의 대몽 의지가 나타남을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다. 고려의 백성들은 원에 의지하기만 했던 당시의 개경 정부를 신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를 통해 우리는 자주적인 나라가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라고 느껴진다. 원종의 개경정부는 반란이라고 하는 자기 나라의 일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보이며 몽골의 힘을 빌려야 했고, 이는 결국 왕의 자리마저 몽골(원나라)에게 허락을 받아야만 앉을 수 있는 나라로 전락해버렸다. 자주적인 나라를 위해 스러져가는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았던 그들이었지만 칼을 들고 싸웠던 진도의 현장에서, 이제는 터만 남아버린 용장산성을 바라보며 지금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과연 자주적인 대한민국에 살아가고 있는가. 아~ 진도는 또 하나의 고려였네 이 땅을 지켜온 이름 모를 사람들 아직도 들리는 저들의 함성 동백꽃 피고 해당화 피는 살기좋은 옥토강산 자자손손 번창하여 천년만년 살고지고 자자손손 번창하여 천년만년 살고지고 용맹한 군사들이여 늠름한 군사들이여 아름다운 금수강산 우리가 지키고 우리가 살리세 기름진 이 땅과 저 푸른 바다와 사시사철 변화하는 산과 들 우리 모두 힘을 모아 이 나라를 지키자 이 땅에 동이 튼다 새날이 온다 오랑캐를 물리치고 새 고려를 세우자 낫 들고 일어나세 호미 들고 일어나세 우리 백성 힘을 모아 새 나라를 만드세 아~ 진도는 또 하나 고려였네 -국악 오페라, 구국의 고려전사 삼별초 중 백성과 장군들의 노래 中

[지역사 이야기4-진도] 삼별초, 또 하나의 고려를 세우다(2)

◆ 여몽연합군 vs 삼별초 진도로 내려온 삼별초는 용장성(龍藏城)을 거점으로 삼고 자신들이 고려의 정통임을 주장했다. 용장성은 둘레 13㎞의 산성으로 개경의 궁궐과 비슷한 모습을 갖췄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원종을 고려의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다른 왕족이었던 승황후 온을 새 국왕으로 옹립했다. 결국 고려에는 원종의 개경정부와 삼별초의 진도정부가 세워져 대립하게 됐다. 정예부대였던 삼별초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남해안 일대를 장악해갔다. 전라도의 장흥보성나주전주 등을 점령해 무기와 곡식을 확보하고, 경상도까지 진출해 가장 큰 섬이었던 거제도를 점령하면서 동래까지 나아갔다. 또 후방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제주도까지 확보한다. 삼별초는 여몽연합군과의 싸움에서 여러 차례 이기면서 개경정부를 위협했다. 그러나 1271(원종 12)년 5월 홍다구와 몽골 장수 흔도가 이끄는 싸움에서 배중손이 전사하고 왕으로 옹립됐던 승화후 온이 참수되면서 진도정부는 붕괴되고 말았다. 하지만 일부의 삼별초는 김통정의 지휘 아래 진도를 빠져나와 제주도로 거점을 옮겨 항몽전쟁을 이어나갔다. ◆ 또 하나의 고려였던 진도 지난 1989년 일본 NHK는 수수께끼의 괴문서에서 고려첩장불심조조에 대해 방송했다. 고려첩장불심조조는 일본이 기록한 문서로 1268년과 1271년에 고려가 일본에게 보낸 문서 중 의문점이 있는 부분들을 정리한 내용이다. 이 내용을 보면 당시 일본은 개경정부와 진도정부를 구분하지 못하면서 나타난 이상한 부분들이 나타나는데, 1268년에 고려가 보낸 문서에 보면 몽골에 대한 사대 표현이 적혀있는 반면 1271년의 문서에는 몽골을 야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로써는 고려가 보낸 문서의 원본이 없어 정확한 내용의 확인은 불가하나 일본의 입장에서 정리한 내용을 봤을 때 진도정부가 국가의 형태를 갖춰 대외적인 활동까지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지역사 이야기4-진도] 삼별초, 또 하나의 고려를 세우다(1)

넓은 허허 벌판에 각 잡힌 층층의 계단과 주춧돌이 보인다. 바로 이곳은 고려시대 삼별초가 머무르며 또 다른 고려를 바라면서 성을 쌓았던 흔적이 남아있는 진도 용장산성이다. ◆ 삼별초는 무엇인가 1219(고종 6)년 무신정권기의 집권자였던 최우는 도성 안에 도둑이 많아지자 개성의 밤을 지키기 위해 야별초(夜別抄)를 만들어 성안을 순찰하게 했다. 도성에 도둑이 늘어나면서 야별초의 기능과 권한은 커졌고, 인원도 늘었다. 그러면서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누었고 이들은 잦은 몽고의 침입을 막기도 했다. 이후 몽골과 싸우다 포로로 잡혀갔던 이들이 탈출하여 돌아온 자들을 모아 신의군(神義軍)으로 편성했고, 좌별초우별초신의군을 합쳐 삼별초(三別抄)라고 했다. 사실 삼별초는 무신정권의 사병의 성격이 강하기도 했으나 국가의 녹봉을 받는 군인이었다. 이들은 별초라는 명칭이 붙을 정도로 정예부대로 조직됐고, 몽고가 고려를 침입했을 때 가장 크게 역할을 했다. ◆ 강화에서 진도로 몽골의 침입으로 무신정권은 1232(고종 19)년에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대몽항쟁을 시작한다. 당시 전투 병력으로 크게 능력을 발휘한 것은 삼별초였다. 특히 몽골에 잡혀갔다가 탈출한 신의군이 편제되어 있는 만큼 반몽 성향을 가장 잘 드러났다. 하지만 1259년 원종은 몽골에 복속하면서 30년의 전쟁을 끝을 낸다. 당시 무신정권은 세력이 약해졌어도 실권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무신정권 집권자였던 임유무가 1270년 죽자 원종은 개경 환도를 추진하고, 남아있던 무신들은 환도를 거부하게 된다. 친무신정권의 성격을 가졌던 삼별초는 원종과 몽골에게 있어 불편한 존재였다. 이에 원종은 삼별초 해산을 명령하게 되고 삼별초는 원종의 고려정부에 반기를 들면서 봉기하게 되는데 이것이 삼별초항쟁이다. 강화도에 있던 삼별초는 1270(원종 11)년에 장군 배중손과 야별초지유 노영희를 중심으로 진도로 향한다. 해상으로 이동한 이들의 규모는 약 1000척에 이르렀다고 하니 그 규모가 꽤 컸음을 알 수 있다. 삼별초가 진도를 택한 이유는 크게 3가지로 볼 수 있다. 개경에서부터 거리가 멀어 대비할 수 있는 기간을 확보할 수 있으면서 해군이 약한 몽골군을 대항하기에 용이했고, 경상전라도의 세곡을 실은 조운선이 다니는 길목이었기에 식량보충 하기에도 좋은 곳이었다. 또 진도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이었지만 땅이 비옥하고 기름졌기 때문에 자급자족도 가능했다. 이 외에도 진도 인근에 최씨 무신정권이 소유한 대규모 농장이 있다는 기록을 통해 이들이 지리적으로 잘 알고 있다는 점 등도 무시하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였다.

[지역사 이야기3-대구] 아이부터 여성까지 모두가 참여했던 나랏빚 갚기, 국채보상운동(3)

이후 베델은 여러 번의 재판 끝에 상하이 감옥에서 3주간 복역했고, 그동안 일제는 대한매일신보의 총무 양기탁을 국채보상의연금 횡령 혐의로 구속시켰다. 양기탁이 구속되자 영국은 베델 재판에 증언한 양기탁에 대한 일제의 보복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베델의 재판과 양기탁의 구속은 국내에서 신뢰를 잃게 만들었고 국채보상운동에 제동이 걸리게 됐다. 양기탁은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국민들에게 잃은 신뢰를 회복하기에는 힘든 지경에 이르렀고, 일제는 친일 단체인 일진회 등을 동원해 국채보상운동을 탄압했다. 결국 국채보상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국채보상운동에서 모인 금액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약 20만원으로 예상되며 이 돈을 처리하기 위해 1909년 11월 국채보상금처리회가 만들어졌다. 당시 황현이 쓴 매천야록에는 1910년 국채보상금처리회가 조사한 결과 금액이 15만 9253원 99전이라고 기록돼 있다. 1910년 4월 16일 전국대표자회의를 개최한 처리회는 보상금 처리 문제를 논의한 결과 토지를 매입하고 증식해 교육 사업에 투자하기로 했다. 하지만 8월에 한일병합조약으로 국권을 뺏기면서 국채보상금처리회는 교육기본금관리회로 바뀌었고 관리하던 약 15만원은 모두 경무총감부에 귀속돼 일제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우리나라 최초의 금연운동이자 국민적 기부운동이었으며 근대적 여성학생운동이었다. 또 동시에 최초의 언론캠페인 운동이었다. 최초라는 타이틀의의미를 파헤쳐보면 결국 당시 모든 국민이 동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이부터 노인 그리고 지식인과 관료 뿐 아니라 기생백정걸인이 동참했던 범국민적인 운동. 이 역사는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 때 금모으기 운동으로 다시 나타났다. 물질이라는 것은 각자가 끊임없이 모으면서 욕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라가 위급할 때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내는 국민성은 물질만능주의를 살아가는 현 실태를 다시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사상은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뽑힐 수 있도록 한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수기언론정부기록물 등 2457건으로 구성된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지난 2017년 10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으며 우리나라의 세계기록유산 중 유일한 근대기록물이다. 등재 당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는 제국주의 열강에 대응해 가장 앞선 시기에 범국민 기부운동을 바탕으로 나랏빚을 갚고자 했던 국권수호운동이라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역사는 돌고 돈다고 했다. 그것은 사건의 반복이 아니라 수많은 시간을 이어온 국민성의 연속성이 아닐까. 개인주의를 향해가는 지금 이 세태를 생각해보며 힘든 시간을 함께 이겨냈던 우리의 국민성을 다시 되돌아보면서 좀 더 나은 대한민국을 향해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지역사 이야기3-대구] 아이부터 여성까지 모두가 참여했던 나랏빚 갚기, 국채보상운동(2)

◆ 최초의 언론 캠페인 이렇게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언론의 힘이 컸다. 대한매일신보는 이번 국채보상운동에 대해서 황실과 고관들 그리고 각 학교 대다수가 단연에 동참하고 있어 본 사원도 일반 의무로 동맹 단연함이라고 광고에 올리며 신문사 사원들의 참여를 피력했고, 지면에 국채 보상에 대하여 우리 동포 여러분께 알립니다.라는 순 한글 기고문을 싣기도 했다. 또 다양한 계층의 참여 모습을 기사로 실어 운동에 참여하도록 독려했다. 1907년 4월 10일에 발행된 대한매일신보 제482호에는 도둑 의연 도둑도 오히려 의를 알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내용에는 국채의연금을 모집해 상경하던 사람이 도적떼를 만났는데 도적떼에게 이는 국채보상금이니 내가 비록 이 돈을 빼앗겼으나 너희는 불과 몇 십리에 죽음을 면하지 못하리라하니 도적떼가 놀라 다시 돌려주며 10원까지 더 보태줬다고 적혀있다. 이 외에도 1907년 3월 28일 대한매일신보 제473호에는 대구 기생 앵무가 국채보상금 100원을 냈다는 기사도 있다. 대한매일신보뿐 아니라 황성신문 제국신문 만세보 등에서도 다양한 기사를 실었으며 대한자강회월보 서우 야뢰 대동보 등의 잡지 또한 국민들의 의식을 깨우는 데 동참했다. 이를 통해 인천부산원산평양 등 전국에서 20여개의 국채보상운동단체가 설립이 됐고, 그 안에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됐다. ◆ 일제의 방해공작 그리고 와해 하지만 이를 가만히 지켜볼 일제가 아니었다. 일제는 운동이 시작될 때는 얼마 가지 않아 수그러들 것으로 예상했으나 점점 열기가 더해져 가는 것을 보고 탄압하기 시작했다. 특히 운동을 주체적으로 이끌고 있는 대한매일신보가 일제의 눈엣가시처럼 밟혔다.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국채보상운동을 이끌면서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었고 1907년 9월 무렵에는 국한문, 한글, 영문 세 가지 신문의 발행부수를 합쳐 1만 부가 넘는 신문을 배부하고 있었다. 이 부수는 당시 국내에서 발행되는 타 신문의 부수를 모두 합친 것보다 훨씬 많은 부수였다. 이에 일제 통감부는 신문사를 이끌고 있던 영국인 베델을 추방해달라고 영국 측에 요구했다. 또 신문지법을 개정해 외국에서 발행된 한국어 신문과 한국에서 외국인이 발행하는 한국어 신문도 발매반포를 금지압수할 수 있다는 조항을 삽입했다.

[지역사 이야기3-대구] 아이부터 여성까지 모두가 참여했던 나랏빚 갚기, 국채보상운동(1)

지금 국채 일천삼백만 원이 있은즉 우리 대한의 존망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갚으면 나라는 보존될 것이요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은 필연적인 사실입니다. 지금 국고로는 변제하기 어려운 형세이니 2천만 민중이 3개월 날짜를 정하여 담배 피우는 것을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각 사람이 매월 20전씩 거둔다면 일천삼백만 원은 모을 수 있으며, 만일 그 액수가 미달할 때는 1원, 10원, 100원, 1000원의 특별 출연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중략) 저희들이 여기서 감히 발기하여 취지를 알려 드리고 피눈물로 호소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우리 대한 신민 여러분은 보시는 대로 곧 말로 글로 서로 알리어 고해서 한 사람이라도 모르는 일이 없게 하고 기어이 실시되어 위로는 임금의 높고 밝은 덕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강토를 유지하게 된다면 이 이상 더 다행한 일이 없겠나이다. - 국채 일천삼백만원 보상취지문(1907년 2월 21일 대한매일신보) 中 ◆ 깨어있는 지식인의 결의부터 일제는 대한제국에 1906년 2월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정치경제적 침탈을 가속화시켰다. 청일전쟁부터 차관을 적극적으로 제공한 일제는 경제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고, 대한제국이 1907년까지 들인 차관은 1300만원에 달했다. 이는 당시 대한제국의 1년 예산과 맞먹는 금액이었고 현실적으로 갚기 어려운 큰 금액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 1907년 2월 대구의 광문사(廣文社) 사장 김광제와 부사장 서상돈은 나랏빚을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하게 될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광문사 사내 조직이었던 대구광문사문회는 대동광문회(大東光文會)로 개칭하는 자리에서 서상돈의 제안으로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했다. 국채보상의연금으로 800원을 먼저 냈던 서상돈이 국채 1300만원을 갚지 못하면 장차 국토라도 팔아서 갚아야 하므로 2000만 동포가 담배를 석달만 피우지 말고, 그 대금으로 국채를 갚자고 제의를 하자 김광제는 즉시 실현하자고 주장했고 회의에참석했던이들은 그 자리에서 담배를 끊기로 결의했다. 약 2000원이 모금된 그 자리에서 대동광문회 회장에 박해령, 부회장에 김광제를 선출하고 2월 21일 대구민의소에서 열린 총회 석상에서 단연회를 설립했다. 그리고 대구 서문시장 인근 북후정으로 자리를 옮긴 이들은 국채보상모금을 위한 대구군민대회를 열었고, 이 자리에서 국채보상운동 취지서를 낭독했다. 취지서는 국채 일천삼백만 원 보상 취지라는 제목으로 1907년 2월 21일자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됐고 전국적인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장지연은 대구군민대회를 보면서 대한자강회월보 제9호에 노소 신사와 청홍 부녀들과 술 파는 아낙과 차 파는 노파, 다리를 저는 걸인과 백정, 책을 낀 동자와 제기 차는 아이들까지도 원통하여 눈물을 흘리며 의기 분발하여 당일 수합한 돈이 수백 수십 원이라 하니 사람의 마음 감발이 이처럼 굳은 것인가.라며 논설 단연 상채 문제를 기재했다. ◆ 금연운동부터 여성운동까지 처음 국채보상운동의 실천 방안으로 나타난 것은 금연운동이었다. 그 당시 담배는 일본인들이 폭리를 취하는 물품 중에 하나였지만 없어서 못 팔정도로 인기 있는 품목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서상돈은 실천 방안 중 하나로 금연을 꼽았다. 하지만 국채보상운동의 가장 큰 특이점은 여성들의 참여였다. 처음 금연운동의 주체는 남성들이었다. 북후정에서 대구군민대회를 열고이틀 후인 2월 23일 대구 남일동에서 여성들은 남일동 패물폐지 부인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패물을 국채보상의연금으로 내어놓으면서 취지서를 발표했다. 우리가 아녀자의 몸으로 규문에 있으면서 삼종지의에 간섭할 마음이 없지만, 나라를 위한 마음과 백성된 도리에 어찌 남녀가 다를 수 있겠습니까? (중략) 본인들은 여자의 몸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패물 뿐입니다. 태산이 작은 흙덩이를 사양치 않고 바다가 작은 물줄기를 사양치 않아 저렇게 크게 이루어졌습니다. 뜻있는 부인 동포들은 많고 적음에 구애됨이 없이 진심으로 도와 국채를 완전히 보상한다면 천만다행한 일일 것입니다. - 경고 아 부인 동포라(대한매일신보 제457호) 中 여성들의 참여가 이어지고, 대구 서문시장의 영세 상인들 또한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분위기가 일어나자 참여를 하지 않고 있던 학자나 부자들은 부끄러워했고 국채보상운동에 함께했다. 이렇게 국채보상운동이 확산되자 서울에서는 국채보상기성회가 조직됐고 전국 각지에 수많은 단체들이 나타났다. 이렇게 대구에서 시작된 운동은 전국 운동으로 확산됐고, 국외에 있는 유학생이나 교포들도 의연금을 보내왔다. 또 조선인 뿐 아니라 외국인들도 이 광경에 감동하며 참여했고, 고종 황제 또한 금연을 하면서 국채보상운동에 힘을 보탰다.

[지역사 이야기2-부산] 사익(私益)보다 공익(公益)을 생각했던 기업인, 백산 안희제(3)

◆ 마지막 국외활동, 발해농장 이후 안희제는 1933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한다. 그는 발해의 고도인 영안현 동경성에서 발해농장을 만들어 국내의 농민을 이주시키고 정착시켰다. 발해농장은 표면적으로는 농지개간사업을 했으나 실제로는 국외 독립운동기지이자 대종교의 활동지였다. 국내에서는 더 이상 독립 운동이 불가하다 생각했고 자금 조달 또한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초반에는 안희제가 있었던 영남지역의 농민들이 대다수를 이뤄 농지를 개간하고 마을을 이뤘으나 이후에는 함경도평안도전라도 등 전국 각지에서 많은 농민들이 모여들었다. 이에 안희제는 이주농민과 그 2세들에게 민족정신과 자주독립사상을 교육하기 위해서 발해보통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이 됐다. 민중 계몽을 실천하는 그의 모습은 국내에서나 국외에서나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종교총본사를 동경성으로 이전시키면서 교주 윤세복과 아들 윤필한 등 대종교의 간부들은 대동청년당에 들어오도록 했다. 대종교는 나철이 만든 민족 종교로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는데 큰 공헌을 했으며 많은 민족지도자들이 관계가 되어 있는 종교였다. 그랬기에 일제는 대종교를 종교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국내에서는 대종교포교금지령이 내려지면서 활동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활동지를 옮긴 대종교는 만주에서 교세를 확장했고 1914년에는 교도수가 30만여 명에 달했다. 일제는 밀정을 통해 감시를 하다 1942년 임오교변을 일으켜 교주 윤세복을 비롯해 21명의 대종교 간부들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하고 대종교총본사의 각종 비품과 서적을 압수했다. 안희제도 이때 함께 검거가 되면서 고문을 받게 됐다. 일제의 고문으로 10명이 1943년 5월부터 1944년 1월 사이에 모두 순국하게 되는데 이를 임오십현이라고 불렀다. 안희제 또한 이 사이에 사망하면서 임오십현 중 하나에 속한다. 1942년 11월 19일에 잡힌 안희제는 1943년 8월 3일 병보석으로 풀려난 후 3시간 만에 숨을 거두면서 순국하게 됐다. 백산 안희제는 백범 김구, 백야 김좌진과 함께 3백으로 불렸다. 하지만 백범, 백야에 비해 알려진 바가 너무나 적다. 그 이유 중에는 그의 자료가 너무나 적은 탓도 있을 것이다. 백산기념관에서 만난 그의 후손인 백산 안희제 선생 기념 사업회 안경하 이사는 백범, 백야 선생과 함께 우리 할아버지는 매우 훌륭하신 분이라면서 이렇게 좁은 공간에 전시를 하고 있는 것이 죄송하다고 말했다. 지방의 전통적인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일찍부터 신문학에 깬 안희제. 그는 교육경제언론종교 등 다방면으로 많은 이들을 깨우치며 나라를 구하기 위해 활동을 했다. 특히 경제적으로 밝았던 그는 본인을 드러내서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 운동에 쓸 자금줄을 마련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써 일한 독립 운동가였다. 안경하 이사는 본인이 일제에 잡히면 자금줄이 끊겨 임시정부에 피해가 갈까하여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활동하신 분이라면서 망명하기 전 혹여나 일제에 책잡힐 것을 염려해 모든 것을 다 불태우고 가셔서 남아있는 자료가 많지 않은 것이 아쉽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어려서부터 총명해서 사리에 밝았던 안희제는 분명 자신을 드러내어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어떻게든 자신의 일을 드러내어 홍보를 하려고 하는 지금의 어떤 이들과는 전혀 다른 기업인의 행보였다. 이는 분명 개인의 이익보다는 나라를 위한 공익을 생각하는 마음이 컸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한 그의 기념관은 부산 중심에 있는 중구에 위치해 있다. 부산국제영화제를 하는 남포동과 바로 옆에 위치해 있으니 한 번 가보는 것을 추천한다. 다만 전시관이 협소해 지하에서 그를 기념하는 공간이 지하에 위치해 있어 조금 아쉽다.

[문화기획] 베토벤 탄생 250주년 기념… 악성(樂聖) 베토벤을 추억하다

내 머릿속은 항상 아름다운 소리로 가득 차 있다. 난 그것을 표현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었다. 귀가 잘 들리지 않게 된 베토벤은 죽을 결심을 하고 유서를 썼지만 머릿속에서 아직 완성하지 못한 음악들이 들리기 시작했고, 그 순간 소리가 안 들리는 고통보다 음악을 못하게 되는 고통이 더 큰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음악에 대한 열정이 장애의 괴로움을 뛰어넘은 것이다. 세기를 뛰어넘어 전 세계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 12. 17~1827. 3. 26). 그는 음악가로서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청각장애를 딛고 시대를 초월해 사랑받는 많은 명곡들을 탄생시켰다. 특히 올해는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맞아 전 세계적으로 굵직한 기념 공연들이 열리고 있거나, 출판을 통해 그를 추억하는 등 베토벤 열풍이 일고 있다. 비록 지구촌에 불어 닥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기념 공연들이 취소되거나 변동되기도 했지만, 무관중 연주회나 랜선 등을 통해 비대면으로 베토벤을 추억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악성(樂聖) 베토벤. 그는 위대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지휘자였다. 또한 고전주의 시대에서 낭만주의 시대로 옮겨가는 시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작곡가로서 시대를 초월해 가장 뛰어나고 영향력 있는 음악가로 인정받고 있다. 또한 베토벤은 자신의 확고한 가치관을 음악뿐 아니라 자신의 삶 전반에 걸쳐 일관되게 적용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그를 사상가이자 철학자로 보는 이유다. 프랑스대혁명 이후 1800년대 초 근대화와 자유화, 민중운동을 지지했던 그는 당시 자유․평등․박애 정신의 계몽주의 철학을 신봉한 인도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런 그의 철학과 가치관을 잘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나폴레옹을 진정한 영웅이라 생각했던 베토벤은 그가 시민혁명의 가치관을 저버리고 황제로 등극하자 그를 독재자로 규정하고 비판하기 시작했으며, 나폴레옹에게 헌정하려고 했던 교향곡을 즉시 철회했다. 이 교향곡이 바로 그 유명한 영웅 교향곡이다. 역사상의 모든 영웅에게 헌정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교향곡은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이 보기에도 엄청난 발전과 파격을 가져온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특히 베토벤은 교향곡, 현악 4중주곡(실내악곡)이나 독주 악기를 위한 소나타 등 기악곡 영역에서 탁월한 기량을 자랑했다. 베토벤은 청력 상실에도 불구하고 역사에 길이 남을 수많은 곡들을 탄생시켰는데 이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음악 속에서 살며, 그 음악을 포기하지 않았던 데 있을 것이다. 그대가 자신의 불행을 생각하지 않게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에 몰두하는 것이다.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힘든 가운데 있는 지금, 세월의 벽을 넘고 시공간을 넘어 우리에게 건네는 베토벤의 말이 들리는 듯하다. 나는 운명의 목을 죄어 주고 싶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운명에게 져서는 안 된다. 불굴의 의지로 장애를 이기고 세계 음악사에 길이 남을 곡들을 만든 베토벤. 그를 기억하며 세상에 처음 공개되는 월계관을 쓴 베토벤의 라이프마스크와 사진 몇 점을 소개한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이 라이프 마스크를 소장하게 된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은 전 세계적으로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기념해 많은 기념공연을 하고 있다며 적어도 그의 탄생과 그가 남긴 작품들을 기념한다면 연주 외에도 베토벤을 추억하거나 상징할 수 있는 유형의 물품이 공연장에 함께 전시됐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누군가를 기념함에 있어 보다 세심한 관심을 기울였으면 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안타까움이다. 이에 지면을 통해 베토벤을 한번 더 기념하길 바라며, 우리 또한 베토벤처럼 우리의 삶속에서 마주하는 고난과 환난을 이겨내는 영웅이 되길 소망한다. 월계관을 쓴 라이프 마스크와 악보 위에 올려진 또 다른 마스크 베토벤이 살아 있을 때 뜬 라이프 마스크로 유명인들이 죽은 뒤 남기는 데스 마스크와는 다르다. 생전에 라이프 마스크를 떴다는 것은 그의 남다른 자존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베토벤의 사후에 뜬 데스 마스크도 존재하지만 라이프 마스크와는 모습이 사뭇 다르다. 이번에 공개하는 라이프마스크는 통상적으로 알려진 베토벤의 데스마스크와는 다른 특별한 점이 있다. 바로 머리 위에 월계관을 쓰고 있는 모습인데, 월계관이 영광과 명예, 승리를 상징하듯 베토벤이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역경을 딛고 완성한 교향곡 9번(합창, 1822~1824) 혹은 바이올린 소나타 9번(1902~1803)을 기념하기 위해 장식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악보 위에 놓인 베토벤의 또 다른 마스크 위로 월계수 잎을 장식해 놓은 사진을 보아서도 추정할 수 있다. 한편 월계관을 쓴 라이프마스크를 잘 살펴보면 특유의 찡그린 표정은 물론 두창의 흉터까지 볼 수 있어 베토벤의 실제 얼굴 모습을 가장 가깝게 유추해볼 수 있다. 데스 마스크(death mask) 제작하는 방법 1900년대 초반 데스 마스크(death mask)를 제작하는 방법을 볼 수 있는 사진이다. 데스마스크는 죽은 사람 얼굴에 유토(油土)나 점토를 발라 모형을 만든 다음 석고로 뜨는 것으로 그 모습을 가장 정확하게 후세에 전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기원전 2400년 초 고대 이집트에서 행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에트루리아와 로마의 조상 숭배 및 가족 제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15세기 피렌체에서도 존재했다. 이후 유명인들의 데스 마스크를 뜨는 것이 유행했다. 사진은 1900년대 초 뉴욕에서 데스 마스크를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사람 얼굴 아래에 있는 나무판이 작업이 진행될수록 위쪽으로 올라온다. 목에서부터 이마까지 석고(석회)를 바를 때마다 나무판도 조금씩 따라 올라오는 방식이다. 데스마스크를 뜰 때는 이발소 의자와 같은 곳에 앉혀 뜨게 되는데, 이 작업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편 사람이 누워 있을 때와 앉아 있을 때의 눈동자의 위치가 달라 앉아서 뜨는 것이 원칙이었다. 마스크를 뜨는 과정이 어려웠던 탓에 베토벤이 라이프 마스크를 뜨기까지 그를 설득하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고 한다. 나팔형 보청기(소리증폭기) 베토벤의 청력에 문제가 생긴 것은 1796년쯤이다. 이제 스물여섯이 된 청년에게 그것도 음악가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명을 동반한 통증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1812년에는 청각이 빠른 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으며, 1816년부터는 보청기를 착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1817년에는 음악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청력이 악화됐으며, 일 년 후인 1818년부터는 필담으로 소통을 시작해야만 했다. 이때부터 1827년 사이 오른쪽 귀는 완전히 멀어버렸고, 청력이 아주 미약하게 남아 있어 큰 소리로 대화해야 했다. 한편 청력을 잃어가고 있던 베토벤은 입에 문 막대기를 피아노의 공명판에 대고 전해오는 진동으로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작곡했다고 한다. 사진에 보이는 보청기(소리증폭기)는 베토벤이 청력을 잃어가던 시기에 착용하던 것과 같은 나팔형 보청기다. 이 보청기는 소리를 한 곳으로 집중시켜주는 현재의 보청기와는 다르게 단순히 소리 수집기 역할을 했다. 보청기와 관련, 베토벤의 대화 수첩에는 누군가가 베토벤에게 남긴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너무 일찍 나팔형 보청기를 사용하지 마라. 그것들의 사용을 자제함으로써 나는 내 왼쪽 귀를 보존해 왔다.

[지역사 이야기2-부산] 사익(私益)보다 공익(公益)을 생각했던 기업인, 백산 안희제(2)

◆ 독립운동 자금줄 백산상회 지금 부산 중구에 있는 백산기념관이 있는 곳은 안희제가 설립했던 백산상회가 있던 자리다. 안희제는 1911년 만주와 시베리아를 다니면서 안창호, 이갑, 신채호 등 많은 독립 운동가를 만났다. 하지만 독립운동을 하던 그들의 모습은 너무나 안쓰러웠고 물질의 부족함으로 인해 독립운동조차 어려운 상황을 그는 보고야 말았다. 그래서 그는 안정적인 독립운동을 하려면 자금 조달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1914년 부산으로 귀국해 백산상회를 설립했다. 고향에 있던 논 2000마지기를 팔아 만든 자금으로 만들어진 백산상회는 곡물면포해산물 등을 위탁 판매하는 개인경영의 소규모 상회였다. 그러다 백산상회는 1917년 합자회사를 거쳐 1919년 자본금 100만원 규모의 주식회사로 전환됐다. 백산무역주식회사는 당시 영남지역 지주 출신의 청년 자산가들을 영입해 주주 32명, 주식 수 2만주로 설립됐다. 대표는 2000주를 보유한 최준이 맡았으며 안희제, 윤현태, 안익상 등이 함께했다. 최준은 교남교우회를 통해 알고 지냈고 남형우, 윤병호, 이우식, 최완 등은 대동청년당의 단원이었다. 또 부산에서 상업 활동을 하고 있던 윤현태, 최태욱, 전석준 등이 함께했으며 동향 출신의 이우식, 대구의 윤상태 등도 주주로 함께했다. 안희제는 백산무역주식회사를 경영하면서 지속적으로 상하이 임시정부에 독립 자금을 대고 있었다. 백범이 자금 조달 등 어려운 일이 있으면 백산을 어버이처럼 믿고 만나 도움을 받으라고 할 정도였다. 안희제는 믿고 있던 윤현진을 임시정부의 재정차장을 맡게 하면서 경비를 계속 조달했다. 그러다보니 회사의 손실은 계속 늘어났고 일제의 눈 또한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다. 일제는 백산무역이 독립운동의 자금줄이라는 것을 눈치 채고선 회사의 장부 검열, 임직원 수색, 조사를 집요하게 했다. 결국 회사는 1927년 문을 닫게 됐고 이후 안희제는 만주로 넘어갔다. ◆ 신문사를 경영하다 안희제는 1920년 동아일보 창립 발기인으로 언론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동아일보 부산지국장을 맡아 지국을 운영했다. 당시 1910년대 무단통치를 했던 일제는 31운동 이후 문화통치를 시작하면서 국내 신문사들이 생겼고 동아일보도 그 중 하나였다. 이후 그는 중외일보 사장으로 취임했다. 중외일보의 전신은 시대일보로 최남선이 창간했다. 하지만 재정적인 어려워지면서 해산되고 말았고 이때 등장한 것이 이상협이었다. 이상협은 매일신보동아일보조선일보 등을 거치며 풍부한 신문제작 경험을 토대로 중외일보를 세웠다. 그는 유학파 이정섭을 논설기자로 영입했고 국외경험을 살린 이정섭은 세계 일주기행을 연재했다. 하지만 일제가 아일랜드의 독립운동 등 국외 독립국에 대한 기사를 계속 삭제하도록 하자 이정섭은 불만을 토로했고 일제는 중외일보에 들이닥쳤다. 결국 이정섭과 이상협은 각각 보안법, 신문지법을 위반한 혐의로 유죄판결을 내렸다. 그러자 안희제는 중외일보를 주식회사로 설립하기 위해 주주들을 모았고 1928년 11월 23일 창립총회를 진행했다. 창립총회에서 안희제는 사회를 맡았으나 주식을 소유하거나 임원은 맡지 않았다. 당시 총회를 통해 선출된 사장은 이우식이었으며 대주주로는 이우식, 허치구, 이진만, 최윤동 등이었다. 하지만 주식회사로 설립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총독부는 중외일보에 정간을 명했다. 42일 동안 정간됐던 중외일보는 재정상태가 지극히 나빠졌고 이를 타개하고자 안희제는 1929년 9월 1일 사장에 취임하면서 전면에 나서게 됐다. 현대사회에 있어서의 신문으로서의 커다란 사명은 실로 중대하고 이 복잡다단한 세상에 처하여 오인으로 하여금 능히 동정의 양면을 소상케 하고 나아가서는 이에 순응해야 할 길을 지시한다는 것은 실로 신문의 책임이다. 세인이 신문을 가리켜 사회의 목탁이라 하고 등대라 하고 내지는 미진의 보벌로서 부른다는 것은 결코 일미의 찬사라고만 보아서는 안 되는 동시에 신문의 경영자도 또한 이 중대한 책임을 감득하여 멀리는 세계 풍조의 추향과 국제 세력의 융체와 가까이는 목전생활의 대소파란에 이르기까지 가장 민감하게, 가장 심각하게 반영시킴과 동시에 거기에 처해야 할 진로의 지시를 올바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여의 취직에 제하여 공구의 감을 금치 못하는 바이며 또한 장래에 노력하고자 하는 목표도 또한 여기에 있는 것이다. - 9월 1일자에 게재된 취임사 中 그는 중외일보의 경영난을 타개하고자 파격적인 홍보와 영업을 했다. 조선박람회가 열리는 동안 관람객이 머무는 여관에 매일 2만 부씩 무료로 배포했으며(100만부 무료 배포) 조석간으로 4면씩 하루 8면을 발행했다. 하지만 이 같은 공격적인 영업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탄압으로 여러 번 압수되기도 하면서 경영은 날이 갈수록 어려워졌다. 결국 1931년 6월 19일 1492호를 종간호로 하여 중외일보는 끝을 냈고 주식회사 또한 9월 2일 주주총회에서 해산을 결의하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로부터 한달 후 10월 14일에 김찬성이 중앙일보로 발행허가를 얻으면서 안희제는 고문으로 물러앉고 노정일이 사장을 맡았다. 중외일보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1493호부터 중앙일보는 발행됐고 안희제는 신문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됐다.

[코로나&코리아] 넷플릭스 타고 부는 한류의 새 바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되자 전 세계적으로 문화업계는 큰 타격을 입었다. 강도 높은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시사회를 진행할 수 없었고 극장은 문을 닫아야 했으며 완성된 작품들은 줄줄이 개봉을 미뤘다. 그러자 집콕족들은 영화관 대신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찾았다. 특히 OTT 선발주자로 꼽히는 넷플릭스는 한류의 새바람을 일으키는 창구가 되고 있다. ◆ 세계로 뻗어 나가는 K좀비 지난 2016년에 개봉한 부산행은 K좀비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해외 영화와 드라마에서 보여줬던 좀비와 다른 K좀비는 영화 부산행과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킹덤 시리즈를 통해 해외로 뻗어갔다. 해외에서 보여줬던 좀비들은 시체와 아주 비슷한 분장과 떼로 달려드는 공포감을 통해 영화에서 스릴감을 표현했다면 K좀비들은 관절 하나하나 움직이는 역동성과 신파가 더해져 새로운 캐릭터로 완성됐다. 특히 인간에서 좀비가 되는 과정에 드러나는 신파 스토리는 K좀비가 가진 특성으로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시켰다. 부산행과 킹덤의 힘입어 코로나19 유행 중에 개봉한 영화 반도와 #살아있다는 해외로 순풍의 닻을 달고 순조롭게 나가고 있다. 반도의 경우 부산행의 후속작으로 큰 기대를 받은 데다 코로나19로 인해 전 세계 대형 작품들이 줄줄이 개봉을 미루면서 올 여름 전 세계에서 히트한 유일한 블록버스터로 꼽혔다. 이에 반도는 대만, 싱가포르, 베트남 등 아시아뿐 아니라 캐나다, 미국 등의 북미에서도 흥행에 성공했다. 지난 6월 국내에서 개봉한 #살아있다는 넷플릭스를 통해 해외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국내 극장에서 190만명의 관객을 모아 조금은 아쉬운 성적을 냈지만 지난 7일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에 공개되면서 해외 순위권에 쏙쏙 들어가고 있다. 영산 콘텐츠 순위 차트를 제공하는 플릭스패트롤에 따르면 #살아있다는 넷플릭스 공개 3일 만에 글로벌 무비차트에서 1위를 기록하면서 K좀비의 흥행을 드러냈다. 공개 일주일이 지난 16일에도 글로벌 무비 차트 2위를 지켰고 현재도 10위권 안에 들어있어 오랜 흥행이 될 것으로 보인다. ◆ 한국은 보이콧재팬, 일본은 한류 지난해 한일 관계는 차갑게 얼어붙었다. 한국은 일본산 불매 운동에 들어갔으며 이에 유니클로와 일본산 맥주는 매출이 급감하면서 철수를 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하지만 일본에 부는 한류 바람은 여전했다. 특히 한국 드라마는 여전히 강세를 보이면서 일본 아사히신문은 제4차 한류붐으로 보는 분석까지 했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이번 일본에 부는 한류의 특징은 주요 수요층이 여성에서 남성까지 확대됐고 드라마 외에 음악, 문학에 이르기까지 더 많은 분야에서 사랑 받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영화 개봉까지 됐던 82년생 김지영은 일본에서도 약 20만부가 팔리면서 한류 문학에 날개를 달았다. 드라마에서 한류는 여전히 강세를 보였다. 특히 코로나19로 회원 수가 늘어난 넷플릭스는 한류에 더욱 힘을 실었다. 지난 2월 넷플릭스에 공개된 사랑의 불시착은 아직까지도 인기순위 톱10에 들고 있으며 이태원 클라쓰 사이코지만 괜찮아도 배급을 시작하자 톱10에 안착했다. 특히 사랑의 불시착은 일본의 외교수장인 모테기 도시미쓰 외무상이 전부 봤다고 밝힐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 극장대신 넷플릭스로 극장이 문을 닫자 영화업계는 줄줄이 개봉을 미뤘다. 하지만 대유행이 사그라지지 않자 영화업계는 집콕족들이 찾는 OTT로 눈을 돌렸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4월에 개봉한 사냥의 시간. 사냥의 시간은 2월에 개봉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의 확산으로 4월까지 개봉을 미뤘고 넷플릭스 개봉이라는 초강수를 뒀다. 당시 해외 배급을 맡았던 회사와 잡음으로 공개를 한 차례 더 미루는 사태도 발생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4월 23일 오후 4시에 서비스가 오픈됐다. 사냥의 시간은 파수꾼 이후 윤성현 감독이 10년 만에 만든 장편 영화였고 이제훈최우식안재홍박정민 등 충무로의 기대주들이 대거 모여서 만든 작품이었기에 국내 팬들의 이목이 한껏 집중됐던 터였다. 공개 후 호불호가 극명하게 드러나긴 했지만 넷플릭스는 사냥의 시간을 품으면서 국내 사용자 수를 늘릴 수 있었다. 3월 국내 넷플릭스 결제 금액은 362억원이었던 것에 반해 사냥의 시간이 개봉됐던 4월 국내 넷플릭스 결제 금액은 21%가 늘어난 439억원으로 추산됐기 때문이다. 사냥의 시간 외에도 앞서 말한 #살아있다 역시 국내 개봉 후 해외 극장으로 가지 않고 넷플릭스로 바로 향하면서 인기를 얻고 있기에 OTT는 코로나19 시대 새로운 한류의 개척지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