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기록] 뿌리와 하늘을 찾아 다다른 곳 ‘강화도’

[천지일보천지TV=황금중 기자] 강 강(江), 빛날 화(華) 강 아래의 아름다운 고을 강화도(江華島). 사람이나 동물까지라도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는 귀소본능(歸巢本能)이 있다. 그만큼 근본과 뿌리가 중한 때문이 아닐까. 고조선 건국 신화의 성지 왕들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곳 해마다 개천절에 제천 행사가 거행되는 곳 국난이 닥칠 때마다 마지막 피난처였던 곳 왜 이곳이어야만 했을까? 강화도는 우리나라에서 4번째로 큰 섬으로 강화대교가 놓이기 전까지는 섬으로만 있었다. 왕래가 힘든 위치임에도 우리의 역사 시작부터 주조연으로 나타났다. 강화도 남쪽에 자리한 마니산은 백두산과 한라산의 중앙에 위치한다. 민족의 영산이라 불리며 기(氣)가 센 곳으로 유명하다. 그래서일까?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의 아들 단군왕검이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그런 연유에서 마니산 정상의 참성단에서는 매년 10월 3일이 되면 개천절을 되새기는 제례행사를 연다. 마니산은 마리산, 마루산, 두악산이라고도 불렸는데 그만큼 민족의 머리가 되는 산인 셈이다. 여러 코스 중 정수사에서부터 타는 암릉 구간 코스, 겹겹이 정교하게 쌓인 모습은 영락없는 명산이면서 신령한 산임을 느끼게 해준다. 해발 472m, 정상에는 참성단이 자리하고 있다. 둥글게 자연석으로 기초를 만든 하단은 하늘을, 네모나게 층층이 쌓은 상단은 땅을 뜻한다. 이는 예부터 우리 민족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상면 편집인) 지금 뒤에 보면은 석축으로 쌓아져 있는데 참성단이죠. 하늘에 제를 올리는 단이다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약 5m의 높이로 축성이 돼 있는데 저것이 자연석으로 돼 있어요. 위에는 원형, 밑에는 사각형 원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을 뜻하고 사각이 의미하는 것은 땅을 뜻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천지(天地) 간에 사람이 있는 거죠. 그래서 천지인(天地人)이 되는 거죠. 그래서 옛날에 상고시대 때부터 단군이 내려와서 하늘에 제를 올렸던 곳이고 개천절 날도 여기에 와서 하늘에 제를 올린다 개천(開天)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이 열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부터 하늘이 열렸고 하늘에서 내려와서 신시(神市)를 열고 우리나라가 시작이 됐다 고조선이라고 말을 하죠. 자 그럴 때 최초의 고대 국가 나라가 열릴 때를 우리는 생각하면서 개천(開天)이다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 와서 우리가 개천(開天)이라는 말을 조금 더 정확하게 확인해 볼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개천(開天)이 이미 고조선 시대에 하늘이 열렸다는 것으로 끝날 것이 아니고 그 하늘이 열렸고 제를 지내면서 기념을 해왔지만 그 기념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이 하늘이 언젠가는 열릴 것을 기원을 해왔다 그 제(祭)가. 그런 것을 알고 했든 모르고 했든 간에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사실은 지금 하늘이 열렸어요. 우주의 일주해를 맞아서 60갑자 되는 1984년 3월 14일, 이 개천(開天) 하늘이 이미 열렸다는 것을 이런 자리에 와서 한번 정확하게 알리고도 싶은 마음에서 이 자리에 서기도 했습니다. (중략) 최후의 순간에 다다르면 비로소 하늘을 찾는 것이 아니던가. 왕실의 중요한 기록을 보관하고 마지막 피난처가 되고 하늘에 기도를 드리기 위해 찾은 곳이 모두 강화도여야만 했던 이유는 우리 한민족의 뿌리, 근본이 시작된 곳이기 때문이었다. 때로는 불사 항쟁으로, 때로는 조금 물러서서 이 땅을 지켜왔다. 그러나 어찌 그것만 이겠는가?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긴 그 간절함이 하늘을 감동시켰고, 하늘은 어떠한 한 뜻을 두고 이 땅을 지금까지 보호해준 것이 아니겠는가. 덕분에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고, 세계에 우뚝 선 지금의 대한민국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글영상촬영: 황금중 기자, 취재지원: 이예진이시문김인우 기자, 내레이션: 이경숙 기자, 편집: 김미라 기자)

[영상기록] 동방의 빛(熙) 3부-요한계시록 실화 (하편)

[천지일보천지TV=황금중 기자] 예수님의 편지를 받고도 회개하지 않으므로, 장막성전은 결국 짐승 같은 이방 목자들에게 멸망당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어찌 이럴 수가! 예수님과 동맥을 잘라가며 피를 내어 언약한지 불과 14년 만에 말이다. (이상면 편집인) 하나님은 실상적으로 어떤 멸망의 길을 걷게 하느냐 75년도에 입교해서 전도사 된 오씨를 80년도 3월에 79년도를 지나 80년도로 넘어오는 거예요. 80년도 3월에 단에 세우는 일이 있게 되는 거예요. 그럼 왜 단에 세울 수밖에 없었느냐 그 시대의 상황을 우리는 잠시 살펴봐야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이렇게 진행돼 가는 것인가 하는 것을 보다 더 정확하게 알 수가 있는데 이 사람을 단에 세울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하나님은 만드는 거지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배도를 했으니까 이것을 멸망을 시켜버려야 하는 거예요. 심판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멸망자를 끌어들여야 하니 바로 이 멸망을 옷을 입고 들어온 마24:15~16의 말씀이 응해지는 대목이 되는 거예요. 이것을 겔44:7~8에도 할례를 받지 않고 이방을 끌어다가 직분을 맡겼다는 얘기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데 끌어다가 단에다가 세우게 되는 거예요. 오씨를 단에 세우는데 1980년 3월이에요. (중략) 오늘날 하늘이 택한 목자는 예수님으로부터 보고 들은 계시록 예언과 이룬 실상을 가감 없이 전해왔다. 또 서기동래(西氣東來)해 동방 땅끝에서 6천년만에 이룬 회복의 역사를 온 인류에게 다시 전하기 위해 동성서행(東成西行)의 역사를 이루어가고 있다. 동방의 빛! 새요한 모든 사람이 이 복된 소식과 자유와 평화를 가져오는 좋은 소식을 듣고 깨달아 구원에 이르길 바란다. (사52:7, 딤전2:4) ===================== 그동안 동방의 빛을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영상촬영: 황금중 기자, 취재지원: 장수경김인우 기자, 그래픽: 황금중 기자, 내레이션: 전재환, 편집: 김미라 기자)

[영상기록] “하늘이 나를 기다려 이곳에 멈추게 했다”… 고산(孤山)이 꿈꾼 이상향

[천지일보천지TV=황금중 기자] ※본 영상은 2018년 1월에 촬영한 영상입니다. 외로운 산, 고산 고산이란 호처럼 그는 외로움을 이곳에서 달랬다. 그가 사랑했고 그의 일부분이 되어버린 섬, 보길도다. 조선 중기의 최고 정치가 시가문학의 거장 하지만 순탄하지 않았던 그의 삶 그가 조정을 떠날 때 머무른 곳이자 여생을 마무리한 곳도 보길도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던 고산! 그래서 작은 섬에 자신만의 이상세계를 만들려 했던 사상가 고산 윤선도가 꿈꿨던 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전남 완도에서 남서쪽으로 18.3킬로 떨어진 보길도는 땅끝 해남에서 30분 정도 배를 타고 노화도로 들어가 다리를 건너면 만날 수 있다. 보길도하면 윤선도라 할 만큼 섬 곳곳에는 그의 사연이 담긴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고산 윤선도의 이야기는 낙서재에서부터 시작된다. 윤선도의 거처 낙서재다. 그가 처음 보길도에 들어와 짓고 살았던 집이다. 그는 이곳에 책을 쌓아두고 독서를 즐겼고, 아침에 닭이 울면 일어나 몸을 단정히 한 후 제자들을 가르쳤다. 낙서재(樂書齋)라는 집 이름에서도 책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다. 낙서재란 글을 읽는 즐거움이 있는 집이라는 뜻이다. 낙서재 앞에 있는 거북 모양의 바위 고산유고 귀암 시편에 나오는 4령 가운데 하나로 고산은 이 바위에 올라 달맞이를 즐겼다고 한다. 고산은 낙서재 뒤편의 큰 바위와 숲을 거닐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 소은병은 낙서재, 거북바위와 한 축을 이루고 있어 최근 낙서재 원형 복원에 중요한 자료로 쓰였다. 윤선도는 1587년(선조20) 지금의 종로구 연지동에서 태어났다. 8살 때 큰아버지에게 입양돼 전남 해남에 내려와 살았다. 해남 윤씨 가문의 녹우당 효종 임금이 스승이던 고산을 위해 수원에 집을 지어줬는데, 그 일부를 가져와 만든 사랑채가 바로 녹우당이다. 조선 중기 남인의 영수. 윤선도는 광해군 4년, 그의 나이 26세에 진사시에 합격해 성균관 유생이 된다. 그는 바른말을 곧 잘하는 강직한 선비였다. 당시 최고의 권력자 이이첨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귀양을 가게 된다. 인조반정 후 유배에서 풀려나 벼슬길에 올랐지만 3개월 만에 사직하고 본거지 해남으로 내려왔다. 윤선도는 관직에서 물러나 있을 때 대부분을 본거지인 해남과 이곳 보길도 부용동에서 지냈다. 그러면 그가 보길도까지 오게 된 사연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42세에 문과에 급제해 인조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 곧 장차 효종 임금의 스승이 된다. 1636년 인조 14년에 일어난 병자호란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항전을 벌이고, 해남에 있던 고산은 의병을 조직해 강화도로 향한다. 고산은 보길도와의 만남을 하늘이 나를 기다려 이곳에 멈추게 했다고 표현할 만큼 각별하게 여겼다. 고산은 격자봉 아래 먼저 낙서재를 짓고 자신이 살아갈 터전을 하나둘 만들어간다. 높은 곳에 오르면 산세가 마치 연꽃처럼 보이는데, 부용동(芙蓉洞)이라는 마을 이름도 그가 지었다. 그가 첫눈에 반한 보길도의 풍광은 낙원을 닮은 듯 그를 사로잡았다. 과연 그가 꿈꾸던 낙원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자신만의 이상세계를 그린 고산 윤선도 그가 가꾼 정원, 세연정을 보면 그가 꿈꾸던 세계를 짐작해볼 수 있다.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해 세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뤄 자연스러우면서 아름다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세연정은 담양의 소쇄원, 영양의 서석지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정원으로 원림의 미학이다. 봄가을의 꽃피는 세연정도 아름답지만, 눈이 내려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 세연정에 감탄이 절로 난다. 고산은 남인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였다. 고산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자신이 추구하던 이상세계를 이 부용동에 고스란히 투영했다. 아름다운 경치는 사색에 빠지게 만든다. 고산은 이곳에 앉아 어떤 생각에 빠졌을까? 그는 맑은 날이면 가솔들을 데리고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연못에 배를 띄우고 자신이 지은 시조를 부르게 하고 동자들에게는 채색옷을 입혀 춤추도록 했다. 건기에는 돌다리로 우기에는 폭포가 되도록 고안한 판석보는 윤선도의 과학적건축학적 재능과 심미안의 산물이다. 그가 보길도에 세연정을 비롯한 건물 25동을 짓을 수 있었던 것은 해남 윤씨 가문의 막대한 재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고산의 이상주의는 그가 독서를 즐기며 신선처럼 차를 마셨던 동천석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동천석실은 낙서재 맞은 편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절벽 위에 한칸 자리 거처를 지어 신선이 머무는 곳이라 칭했다. 이곳은 고산이 보길도에서 가장 좋아했던 공간이었다고 한다. 고산은 이곳과 세연정 등지에서 여러 시와 문학을 탄생시켰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 어부사시사 어부사시사는 계절마다 펼쳐지는 어촌의 정취와 어부들의 생활을 잘 노래하고 있다. 앞강에 안개 걷고 뒷산에 해 비친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썰물은 밀려가고 밀물은 밀려온다./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강촌에 온갖 꽃이 먼빛이 더욱 좋다. 고산이 좇던 이상은 매번 현실 정치와 부딪히기 일쑤였다. 당파 싸움이 끊이지 않았던 당시 조정 그는 남인의 우두머리로 서인 세력과 맞서다 두 번이나 유배 길에 올랐다. 20년에 달하는 유배생활과 19년 가까운 은거생활 벼슬을 받고 사직한 것도 여러 번, 현실과 부딪혀 자신의 소신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고산 윤선도. 81세의 나이에 유배에서 풀려난 그는 보길도로 돌아와 4년을 보낸 뒤 85세의 나이에 낙서재에서 생을 마감한다. 보길도하면 빠질 수 없는 유적지가 또하나 있으니 바로 우암 송시열의 글씐바위다. 마치 하늘이 두 사람을 이곳에 오게 한 걸까. 윤선도의 정적이었던 서인의 영수 송시열도 운명처럼 이 보길도와 인연이 있다. 흔히 역사는 오늘의 거울이자, 내일의 길잡이라 말한다. 300년이 지난 오늘도 당파와 계파 싸움, 적폐 논쟁은 여전하다. 보길도에 자신만의 이상, 낙원을 건설하려 했던 고산 윤선도. 하나 그가 바라던 세계는 어쩌면 사람의 힘으론 불가능했던 것일지 모른다. 그가 따르던 성리학의 뿌리, 유교를 비롯한 종교의 경서들에는 신이 정한 때가 돼야만 이상세계, 천국, 무릉도원이 있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어쩌면 고산은 모두가 바라는 이상세계, 유토피아가 언젠가 이 땅에 나타날 것을 알리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영상촬영: 황금중김미라 기자, 글: 황금중 기자, 사진: 이지예 기자, 내레이션: 황금중 기자, 편집: 김미라 기자)

[천지일보 영상뉴스] 자주국가 의지 담긴 고종의 국새, 돌아오다

[천지일보천지TV=김미라 기자] 거북이 몸체가 각각 은색과 금색으로 반짝반짝 영롱한 빛을 발합니다. 누군지 모를 손에 들려 이역만리 타향에 떠돌다가 대한민국 품으로 돌아온 조선 왕실의 유물입니다. 1882년(고종 19년)에 제작한 국새 대군주보와 1740년(영조 16년)에 제작한 효종어보(孝宗御寶). 지난해 12월 한 재미교포로부터 기증받아 최근 국내로 인도됐습니다. (녹취: 정재숙 | 문화재청장) 국새는 조선 왕실의 권위와 존엄을 한 몸에 압축한 그런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입니다. 이런 귀한 유물이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미국에 살고 계시는 우리나라 소중하게 우리의 물건을 지켜주신 분이 무상으로 기증해주시는 이런 아름다운 이런 이야기가 서려있는 그런 귀환입니다. (녹취: 이성주 | 유물 기증자 아들) (저는) 이번 유물의 기증자이신 이대수씨의 아들 이성주입니다. (아버지는) 그동안 귀중한 유물들을 볼 때마다 역사적인 귀중품들은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던 중 오늘 보고 계신 이 유물들을 한 경매장에서 매입하게 해주셨습니다. 아직도 많은 국새와 어보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소재를 알고 있는 분이 있다면 대한민국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이 협조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은색 거북이의 몸체 바닥에 정교하게 새겨진 대군주보(大君主寶). 이번에 귀환한 대군주보는 구한말 고종의 명으로 제작된 6점 가운데 처음으로 나타난 실물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큽니다. 구한말 외교 자주를 꿈꾸며 스스로 대군주(大君主)임을 나타내고 천자를 뜻하는 보(寶)를 국새에 처음 넣기 시작한 고종의 자취가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녹취: 이태진 | 전 국사편찬위원장) 일제강점기로 해서 흩어졌던 우리 역사를 다시 보듬어서 새롭게 우리 역사의 줄기를 삼는다는 위권 회복의 노력 성과로서.. 문화재 환수 노력에 힘입어 하나둘씩 귀환하기 시작한 국새와 어보. 조선이 독립주권국가임을 만방에 선포한 고종의 국새(國璽)가 고국의 품에 안겼습니다. (영상취재/편집: 김미라 기자)

[천지일보 영상뉴스] 설 연휴 극장가 3파전… ‘남산의 부장들’ vs ‘미스터 주’ vs ‘히트맨’

[천지일보천지TV=김미라 기자] 영화 미스터 주: 사라진 VIP 어느 날 동물의 말이 들린다면? 사람과 동물의 합동수사라는 색다른 소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미스터 주. 국가정보국 에이스 요원 주태주. 갑작스런 사고로 온갖 동물의 말이 들리기 시작하는데요. 주태주의 충실한 파트너 군견 알리를 비롯해 동물의 제왕 호랑이부터 귀여운 매력의 판다까지. 갖가지 동물들과 함께 펼치는 최고의 팀플레이. 여기에 유인나, 김수미, 이선균, 신하균 등 배우들의 목소리 연기 라인업도 색다른 재미를 선사합니다. 영화 히트맨 웹툰 작가가 된 전직 암살요원 준. 그리지 말아야 할 1급 기밀을 술김에 그려버리는데요. 영화 히트맨은 국정원과 테러리스트의 더블 타깃이 돼 벌이는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코믹 액션으로 그려냈습니다. 전설의 암살요원과 짠내 폭발 웹툰 작가를 오가는 준역활의 배우 권상우. 이밖에 정준호, 황우슬혜, 이이경 등 출연배우들의 캐미도 극의 활력감을 더합니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 논픽션 베스트셀러 원작 속 이야기가 스크린에 부활했습니다. 남산의 부장들(감독 우민호)은 1979년, 제 2의 권력자로 불리던 중앙정보부장 김규평이 대통령을 암살하기 전 40일의 기록을 담은 작품인데요. 김충식 작가가 집필한 논픽션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대통령 암살 사건뿐 아니라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실세들의 이야기를 함께 다뤘습니다. 내부자들의 우민호 감독과 두 번째 만남인 배우 이병헌. 이번 영화를 통해 인생 연기를 경신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요. 이에 이성민, 곽도원, 이희준까지 내로라하는 연기파 배우들이 가세합니다. 개봉 전부터 가족 관객들의 열띤 예매가 이어진 가운데 설 연휴 독보적인 흥행 강자로 떠오를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영상편집: 김미라 기자)

[탐방에세이] 봉황의 날개 주작산을 오르다

[천지일보천지TV=김미라이예진 기자]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이 부러울쏘냐. 능선을 따라 삐쭉삐쭉 솟아 있는 바위들이 그 위용을 드러낸다. 멀리 강진만에 펼쳐진 다도해가 그 빛을 발하고 아침 안개를 살포시 밀어낸 햇살이 산능선까지 찬란히 밝아온다. 모든 것이 하나로 통일되고 회복된다는 경자년 새해. 희망찬 기운이 샘솟듯 솟아난다. 붉은 봉황을 뜻하는 주작. 이 붉은 봉황이 날개를 펴고 활짝 나는 형세를 닮았다 하여 이름 붙여진 주작산(475m). 탐방팀은 도암면 봉황천을 따라 떨어져 있는 소석문에서 첫 새해맞이 등산을 시작했다. 변화무쌍한 기후에 미끄럽고 거친 낙엽과 잔설의 속살 끝도 없이 밀려오는 험준한 바위들까지. 주작산의 화려한 자태 속에 가려진 위험요소에 등산 내내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시작부터 가파른 등산로를 따라 얼마 오르지 않았는데 벌써 눈호강이 시작됐다. 일렬로 도열한 듯한 장중한 암봉들이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할 만큼의 위력으로 우리의 발길을 붙잡았다. 힘껏 다리를 옮겨 등산로를 올라가니 낮은 산이라고 쉽게 보지 말라는 듯 떡하니 내려뜨려진 밧줄, 아찔한 수직 암벽, 매어져 있는 밧줄을 유일한 안전 장비로 삼아야 하는 현실 앞에 눈앞이 깜깜해온다. 조금 위험하다 싶으면 모두 철계단을 설치한 여느 산들관 차원이 다르다. 힘껏 밧줄을 타고 동봉을 오르니 이제 반기는 것은 공룡능선. 이빨처럼 날카롭게 치솟은 흰 암봉이 병풍처럼 길게 늘어선 범상찮은 산세가 시선을 압도한다. 주작을 한 마리의 봉황에 견준다면 덕룡산은 주작이 펼치고 있는 거대한 왼쪽날개. 정말 설악산의 공룡능선을 능가할 만큼의 암릉 구간들이 이어졌다. 동봉에서 서봉으로 가는 길은 바로 눈앞에 있듯 가까워 보였지만 산세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참으로 사신(四神) 중 하나인 주작의 날개를 오르는 일은 험하고 용기가 필요한가 보다. 그렇게 동봉을 지나고 덕룡산의 최고봉인 서봉 정상에 오르면 강진만 일대의 풍광이 죄다 발아래로 펼쳐진다. 이만한 높이에선 맛볼 수 없을 것 같은 아찔한 고도감과 힘찬 바위의 기운이 몸속 깊이 스며든다. 이 순간만큼은 마치 주작이 금방이라도 날개를 쳐 올라 하늘로 올라갈 것만 같은 묘한 상상도 불러일으킨다. 하늘과 땅, 말없이 흘러가는 구름과 바람. 저멀리 아스라이.. 다문다문 바다를 향해 질주하는 작은 섬들. 그리고.. 돌꽃으로 피어난 주작산. 한고비를 넘었는가 했는데 또 다른 바위가, 그걸 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쯤 또 날 선 암봉이 휘몰아치듯 버티고 서있다. 높고 영화롭지만 좁고 협착한 피안의 세계.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지 않으면 그 문에 절대 도달할 수 없음을, 어쩌면 우리네 인생길과 너무도 흡사한 이치를 자연은 말없이 말해주고 있다. 귀한 진주를 얻기 위해 거친 모래를 참고 견디는 조개처럼 피안의 세계로 향하는 인생들의 걸음 또한 그렇지 않을까. 남쪽으론 바다인 강진만이 동서북으로는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의 지맥으로 둘러싸여 있는 전라남도 강진. 산맥들이 험하다 보니 예로부터 다른 지역과 교류하기가 힘든 데다 서울과 멀리 떨어져 있는 탓에 유배지로도 많이 이용됐다. 하지만 천혜의 자연만큼은 단연 으뜸. 남도의 수려한 비경은 유배 온 선비들의 마음을 달래주기에 충분했을 터. 다산과 선인들의 숨결이 묻어있는 주작산의 겨울이 그토록 따뜻했던 이유다. (고프로 촬영: 이상면 편집인, 글: 이예진김미라 기자, 사진: 강수경 기자, 내레이션: 이예진 기자, 자막: 황금중 기자, 영상편집: 김미라 기자)

[탐방에세이] 정석(丁石)의 삶, 다산 정약용을 말하다

[천지일보천지TV=김미라 기자] 강진만의 드넓은 평야와 구강포의 푸른 물결이 한눈에 펼쳐진다. 겨울에도 푸르름을 간직한 대숲과 잔설을 이기고 피어나는 붉은 동백꽃. 처연하도록 아름다운 강진의 풍광. 그리고 그보다 더 진한 선인들이 남긴 발자취를 따라가봤다. 개혁과 개방을 통한 부국강병을 꿈꾸며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던 다산. 정조의 두터운 신임 아래 두루 요직을 지낸 그는 실학자로서 배다리를 고안하고 거중기를 발명하는 등 큰 기술적 업적을 남겼다. 특히 도르래 원리를 이용한 거중기로 정조가 10년 계획으로 수립했던 수원 화성 건축을 단 2년 6개월 만에 완공시키면서 조선 과학 발전에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찾아온 일생일대의 위기. 얽히고설킨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그의 정치 생명도 끝이 나고 젊은 시절 받아들였던 서학(西學, 천주교)으로 인해 1801년 신유사옥(辛酉邪獄)에 휘말리게 되면서 기약 없는 유배기를 보내게 된다. 하늘이 장차 어떠한 사람에게 큰일을 맡기려 할 때에는 반드시 그 마음과 뜻을 괴롭히고 육신의 고난을 준다는 맹자의 명언처럼 다산은 인생 최대의 시련을 통해 18년 강진 유배생활 중 5백여 종의 방대한 저서를 완성하여 조선 최고의 사상가로 우뚝 서게 된다. 예로부터 차나무가 많다 하여 다산(茶山)이라 불린 만덕산. 그곳에 다산이 10년간 기거하며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초당이 있다. 과연 그는 이곳에서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 초당에 이르는 길은 수백 년 된 소나무 뿌리들이 서로 뒤엉켜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여북하면 다산의 굴곡진 삶을 뿌리의 길이라 했을까. 위정자들의 부정부패와 당파 싸움, 지배층의 백성 착취가 만연했던 시절. 숙명처럼 받아들인 고난의 길이라 마음먹었을지라도 인생의 번민과 고뇌는 그를 한순간도 놓아주지 않았을 터. 다산이 매일 같이 걸었을 이 길에서 처연함이 묻어난다. 초당 곳곳에는 유배생활의 흔적과 정취가 그대로 서려있는 이른바 다산 4경이 눈에 띈다. 솔방울을 태운 불로 찻물을 우려 마셨다고 전해지는 다조와 호젓함이 흐르는 작은 연못인 연지석가산. 긴 유배생활로 지치고 피폐해진 마음을 이곳에서 달래지 않았을까. 그는 2000여권의 책을 동암에 가득 채울 정도로 학문을 깊게 탐구했고 후학을 양성했다. 다산은 초당에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 동암에 머물며 집필에 몰두했는데 목민관의 지침서이자 다산의 애민정신이 그대로 묻어난 목민심서(牧民心書) 또한 이곳에서 완성했다. 하지만 학문에 심취하면 할수록 형제를 그리워하는 마음만큼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 같은 하늘 아래 어찌 한 피를 나눈 형제들을 볼 수 없단 말인가! 흑산도로 귀양 가 있는 둘째 형 정약전을 그리워하는 다산의 애절한 뒷모습이 오버랩 되는 순간이다. 모든 도(道)는 하나로 통한다고 했던가. 사상가로서 당대 최고 경지를 자랑하는 두 거목이 서로를 알아봤다. 다산이 깨달았던 서학과 혜장의 불교 경전 그리고 공통적으로 심취해있던 주역까지. 하룻밤에 서로의 학식을 다 나누는 것은 불가능했으리라. 이후 다산과 혜장은 각자의 종교와 학문을 뛰어넘어 절친한 벗이 되었고 언제든지 왕래하며 교류했다. 특히 다산은 초당에 은거하면서 항시 문을 열어놓고 혜장이 지나가길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고 전해진다. 동백나무와 조릿대가 있는 길을 함께 발맞춰 걸으며 차와 시국담을 논했을 그들의 모습이 자연스레 그려진다. 그들은 서로 다른 이념과 사상의 길을 걸어왔음에도 서로를 흠모하고 인정하면서 세상의 진리 곧 유불선 역시 결국 하나였음을 깨닫게 된다. 그들이 왕래하던 조릿대가 무성한 그 나지막한 오솔길을 필자는 유불선 삼도의 길이라 명명해 봤다. 그렇다. 모든 것이 원래 하나에서 나왔으며, 다시 하나로 회복될 때 우리가 사는 지구촌은 다시는 분탕질 없는 고요와 평화의 세계로 회복될 것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돌 하나에 심겨진 절제미. 자신의 성씨인 정(丁), 자신이 곧 돌임을 나타내는 석(石)자에 오롯이 그의 사상과 정신이 녹아있다. 당시 피비린내 나는 정쟁에만 골몰하던 권문세도가들에게 엄중한 경고의 메시지를 던지며 도탄에 빠진 민초들의 편에 섰던 정약용. 유배중에도 흔들림 없는 나라에 대한 충성심과 백성을 위하는 애민사상은 정석이라는 간단명료한 두 글자에 선명히 투영돼 있다. 그가 곧 돌이요, 돌이 곧 다산이며, 삶이며, 정신이며, 사상이다. 몇 날이 지나면 모든 것이 하나로 통일되고 회복된다는 경자년(更子年)이 돌아온다. 다산과 선인들이 그토록 꿈꾸던 새로운 세상은 어쩌면 우리들에게 더욱 가깝게 와 있을지도 모른다. 다산과 멀어진 세월. 다시금 다산에게 배운다. (고프로 촬영: 이상면 편집인, 글: 이예진 기자, 사진: 강수경 기자, 자막: 황금중 기자, 영상편집: 김미라 기자)

[탐방에세이] 즐거운 도가 흘러나오는 단양 도락산

[천지일보천지TV=김미라이예진 기자] 도를 즐기는 산 도락산(道樂山). 깨달음을 얻는 데는 나름대로 길이 있어야 하고 거기에는 반드시 즐거움이 뒤따라야 한다는 이 오묘하고도 기품이 담뿍 담긴 산의 이름은 조선 후기 대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지었다고 전해진다. 천고지가 넘는 소백산과 월악산의 중간쯤 위치한 도락산(965.3m). 북쪽으론 사인암, 서쪽으론 상중하선암 등 이른바 단양팔경의 4경이 인접해있어 주변 경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출발 지점부터 도락산 정상까지 약 3㎞. 시작부터 보이는 암릉들을 마주하니 깨달음을 즐겁게 얻을 수 있을지 의구심마저 든다. 하지만 일단 오르자. 단양 8경, 도락산이 가져다줄 즐거움을 기대하며! (이상면 | 편집인) 시온산을 오르는 길은 초반부터 험준한 길이네요. 역시 시온산이네. 잠깐 뒤를 볼까요? 힘겹게 뿌리를 내려 지켜낸 생명력이란 저런 것일까. 장구한 세월이 만들어낸 기묘한 모양의 암벽과 암봉들. 그 사이사이 장대한 소나무들이 자리 잡아 한 폭의 웅대하고 수려한 산수화를 보여준다. 어떻게 저 거대한 암반을 뚫고 뿌리를 내렸을까 하고 신기하게 바라보는 순간, 세월의 더께를 더한 사람의 인품처럼 도락산을 굳건히 지킨 노송들이 독야청청 고고한 자태를 여과 없이 뽐낸다. 막강 기운 뽐내며 걸출한 바위산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오르고 또 올라도 또 넘어야 할 산. 이쯤 되면 내가 산이 되고 산이 내가 되는 무념무상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 (이상면 | 편집인) 도락산 900고지 약 천고지의 정상을 향해서 올라가다가 2차 후식 장소에서 동지들이 땀을 식히고 있습니다. 이 산을 도락산이라고 하는데 왜 도락산이라고 하는지 아세요? 남사고가 태고이후 초락도 사말생초 신천지라는 말을 격암유록에 마지막 절에다가 남겨놨는데 초락도 즐거운 '도'가 세상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있는 즐거운 도. 여기 지금 무슨 산? 도락산 즐거운 도가 이 산에서 지금 흘러나오고 있데요. 이게 무슨 말일까? 가서 확인해보기 위해서 우리 탐방팀은 지금 도락산 정상을 향해서 한발 한발 나가고 있습니다. 돌과 흙, 무수히 많은 나무들로 이루어진 것이 산이라지만 도락산은 유독 바위와 함께 하고 있는 나무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마치 도를 깨닫기 위해 수행하는 사람들의 신성스러운 모습처럼. 도를 즐겁게 깨닫는다는 도락산엔 이러한 나무들이 그 깨달음을 더해주고 있다. 정상으로 내달린 길 끝에서 만난 고사목(枯死木)의 풍경. 푸르름을 뽐내며 생명력을 발휘하는 나무 곁에 앙상하게 말라버린 고목. 아이러니하게 대비된 이 한 폭의 그림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묵직한 메시지. 마치 정상을 목전에 두고 힘들어 중도에 포기해버린 사람이나 환경에 부딪혀 의지가 꺾여버린 사람, 참 이치를 깨닫지 못해 스러져간 수많은 사람들의 잔상이 고목에 그대로 투영돼 보이는 듯하다. 산은 그렇게 살아있는 존재나 죽어있는 존재나 조화롭게 살아가고 있음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다. (이상면 | 편집인) 도락산. 여기가 즐거운 도가 흘러나오는 정상 도락산 여기는 속리산이라고도 하는데 비산비야 인산인해 바로 그리운 금강산, 시온산 속세를 떠난 산 바로 그곳 도락산이요. 수많은 암릉을 지나 넘어온 고비 고비. 이전의 고생을 씻겨주는 말간 수채화 같은 풍경. 도락산 정상이 내어주는 즐거움이다. 연단조양(鍊丹調陽)에서 유래된 단양은 신선이 먹는 환약을 뜻하는 연단과 골고루 따뜻하게 해가 비춘다는 의미의 조양을 합쳐 신선이 다스리는 살기 좋은 고장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그래서일까. 단양은 김홍도정선 등 조선시대 유명 화가들이 멋진 풍경에 반해 그린 그림들이 많고 정도전이황이이 등 많은 문인들도 즐겨 찾아 풍류를 즐겼던 곳이기도 하다. 자연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했던 선인(先人)들의 마음을 생각해보며 변함없이 아름다운 자연 속에 깃들인 신의 마음 또한 생각해본다. (고프로 촬영: 이상면 편집인, 글: 이예진 기자, 사진: 강수경 기자, 자막디자인: 황금중 기자, 영상편집: 김미라 기자)

[탐방에세이] 늦여름 붙잡는 황홀함, 문경 부봉과 선유동계곡

[천지일보천지TV=김미라 기자] ◇문경 부봉(釜峰)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에 위치한 부봉(935m)은 문경새재 제2관문인 조곡관 뒤에 우뚝 솟아 있는 바위산으로, 모두 6개의 암봉으로 이루어져 있다. 부봉은 백두대간이 품어 키운 절경으로 유명한데 하늘재를 지나 조령(鳥嶺)까지 이어진 주능선에서 가지를 뻗은 문경의 진산(鎭山) 주흘산(主屹山)과 연결돼 있다. 넘실거리는 산너울의 장관과 스릴 있는 암릉의 묘미까지 부봉의 장쾌한 멋을 영상으로 만나보자. ◇문경 선유동계곡 선유동계곡은 문경시 가은읍에 위치한 계곡으로 아름다운 경승을 아홉구비로 나누어 선유구곡이라고도 하며 곡마다 아름다운 정취를 자랑한다. 거대한 암석 사이로 맑은 옥계수가 흐르며 굽이마다 옥하대, 영사석, 활청담, 세심대, 관란담, 영귀암, 난생뢰, 옥석대 등 선인들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경승지가 있다. 용추동에는 조선 후기 학자인 도암 이재를 기리는 학천정이, 계곡의 하류 끝지점에는 의친왕이 이름을 지어 줬다는 칠우정이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늦여름 붙잡는 선유동계곡의 황홀한 정취를 영상으로 만나보자. (고프로 촬영: 이상면 편집인, 사진: 강수경이지예 기자, 자막디자인: 황금중 기자, 영상편집: 김미라 기자)

[이달에 만나본 名家] 전통 막걸리의 품격, 진천 덕산양조장

[천지일보천지TV=김미라장수경 기자] 충북 진천군 덕산면 용몽리. 길가에 독특한 건물 하나가 취재진의 눈에 들어왔다. 거무스름한 나무 벽, 함석으로 된 합각지붕 운치 있는 오르내리창. 덕산양조장이라는 나무간판이 걸린 목조건물은 마치 옛 영화의 한 세트장처럼 고색창연하기만 하다. 한국 근현대사의 아픈 역사 속에서도 꿋꿋이 90년을 지켜온 술도가. 이곳은 덕산양조장이다. 술도가의 보물이라 할 수 있는 발효실에 들어서자 시큼털털한 누룩내가 진동을 한다. 3대째 가업을 이어가며 세월의 더께만큼이나 농익은 술이 익어가고 있는 그곳에서 이방희 대표를 만났다. 양조장의 막걸리는 보통 13~16도의 알코올 도수를 가지는데 우리가 마시는 막걸리는 이 원주에 물을 타 6도로 희석한 것이다. 물의 비율이 달라지는 탓일까? 보통의 양조장에선 이 진땡이(원주, 다른 말로 모로미)를 잘 보여주지 않는다. 막걸리 원주를 한잔 할 수 있냐는 호기심 섞인 기자의 질문에 이 대표는 1초의 망설임도 없다. 감칠맛 나는 원주가 옹기에 찰랑찰랑. 귀한 손님에게만 내준다는 술 맛은 과연 어떨까. 대대로 이어오는 종갓집에 그 집안의 맛을 결정짓는 씨간장이 있듯 덕산양조장엔 술의 어미 격인 씨주모(밑술)가 있다. 엄마 품에 잠든 아이가 새근새근 잠을 자듯 구순을 훌쩍 넘긴 빛바랜 독안에서 막걸리가 보글보글 익어간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왕겨의 비밀. 날씨가 덥고 습할 땐 습기를 빨아들였다가 건조해지면 다시 내뿜어 최적의 온도와 습도를 유지해준다. 70센티미터 두께로 왕겨가 덮여있는 이 방은 술 항아리가 있는 발효실 바로 위쪽 천장과 바로 맞닿아 있다. 술은 그렇게 하늘의 시간과 땅의 기운이 조화를 이루고 바람과 사람의 손길 속에 조심스럽게 익어간다. 사람이나 술이나 발효라는 농익음 끝에 맛있는 향기를 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이치인가 보다. 우리 인생의 시간도 그렇게 향기롭게 익어가길 바래본다. 고구려 건국담에 술에 얽힌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우리 민족의 술의 역사는 300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중에서도 막걸리는 우리 역사상 가장 중요한 술 중 하나며 우리의 생활 속에 면면이 이어온 전통이다. 막걸리가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고려 때로서 고려시대 뛰어난 문장가였던 이규보(李奎報)는 나그네 창자를 박주(薄酒-막걸리)로 푼다고 시구절을 읊었고 고려 시대 문인이자 학자인 이달충(李達衷)의 시에도 뚝배기 질그릇에 허연 막걸리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를 보아 예나 지금이나 막걸리는 서민의 술로서 사랑받아왔음을 알 수 있다. 가벼운 주머니로 끼니를 해결하고,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이며 인생의 애환을 달랬던 그때 그 시절. 그래서 막걸리는 우리의 삶이자 문화이다. 세계 어느 누구도 모방할 수도, 만들어낼 수도 없는 우리만의 콘텐츠인 막걸리. 이제는 막걸리의 가치를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일이 우리의 몫으로 남아있다. 오늘도 한잔 막걸리로 고향을, 추억을 소환해본다. (영상취재: 김미라장수경이시문 기자, 편집: 김미라 기자) (촬영협조: 진천 덕산양조장)

[천지일보 영상뉴스] 고국의 품으로 돌아온 ‘백자 항아리’와 '인장(印章)’

[천지일보천지TV=김미라장수경 기자] 작지만 단아한 기품이 흐르는 사각 모양의 백자 항아리. 그 곁에 상서로운 느낌을 주는 사자 형상 손잡이의 도장. 이역만리 해외를 떠돌다 고국의 품에 안긴 조선 시대 유물 두 점입니다. 문화재청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조선왕실 유물로 추정되는 백자이동궁명사각호와 중화궁인을 공개했습니다. 이들 유물은 지난 3월 미국 뉴욕 경매에서 사들여 온라인 게임회사인 라이엇게임즈의 후원으로 국내 환수에 성공했습니다. (녹취: 정재숙 | 문화재청장) 오늘이 더욱 뜻깊은 것은 그 과정이 굉장히 어려웠는데도 무난하게 특히 라이엇게임즈의 큰 기부로 무사히 우리 품으로 국외로 나가서 떠돌던 우리 문화재를 안전하고 귀하게 다시 모실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조선시대 정조의 서차녀이자 수빈박씨의 소생인 숙선옹주(1793~1836). 숙선옹주가 살던 궁가에서 사용한 백자임을 알 수 있는이동궁이라는 청화 명문이 또렷합니다. 조선 시대 백자 대부분이 제작자와 사용연대를 알 수 없다는 점에서이번 유물은 백자 연구사에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녹취: 최경화 | 서강대 전인교육원 강사) 이 항아리의 경우에는 구체적인 제작 시기를 알 수 있어서 도자사 연구의 기준점 역할을 합니다. 이를 통해 양식 선후 순서로 배열하다 보면 전체 흐름이나 양상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선 왕실의 인장인 중화궁인은 한자 서체의 일종인 전서와 해서가 함께 사용된 독특한 서체를 자랑합니다. (녹취: 서준 |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 인(印)자는 전서체를 했고 나머지는 글자는 해서체가 아닌 약간의 획이 들어가 있을 뿐이지 기본적인 바탕은 예서체인 독특한 글자체입니다. 대체로 왕실에서는 전서체가 많이 쓰입니다. 이러한 중화궁인의 글자체는 극히 드문 건데 앞으로 조사와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해외 경매시장을 떠돌고 있을 수많은 우리 문화재들. 이를 환수하기 위한 정부와 민간기업의 노력뿐 아니라 국민적 관심이 필요해보입니다. (영상취재: 김미라장수경 기자, 편집: 김미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