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포커스] “부모님 뵙듯 정성 다해”… 어르신 웃음버튼 ‘뽕뽕부부’

전 세계적으로 대한민국 이혼율은 최상위에 속해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한눈에 보는 사회 2019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경우 이혼율(인구 1000명당 이혼율)이 2016년 기준 2.1명으로 OECD 주요 국가 평균인 1.9명을 넘었다. OECD 회원국 중 이혼율 9위다. 아시아에서는 이혼율 1위를 차지했다. 아시아 이혼율 1위 불명예를 안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결혼 생활에 귀감이 되고 있는 민희숙이정봉 실버체조 강사 부부를 만났다. 민희숙이정봉 실버체조 강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전까지 사회복지시설 등에 다니며 어르신들의 건강한 웃음을 담당하는 웃음 제조기였다. 실버체조 강사는 고령화사회 대비와 치매예방 관리 등을 위한 실버 책놀이, 실버체조 및 레크레이션, 음악활동 등 다양한 영역으로 구성된 교육프로그램을 어르신들에게 전달해주는 일을 한다. 부부는 한동안 코로나19로 활동을 하지 못하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풀리면서 조금씩 활동을 재개했다. 얼마 전 한 TV 프로그램에서 섭외가 들어와 방송도 찍었다. 이들 부부는 남뽕여뽕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음반도 준비하고 있다. 부인인 민희숙 강사는 자격증만 40여개다. 건강지도사뇌건강체조웃음체조세미나오프닝일본어 자격증 등을 취득했다. 민 강사는 일하다가 필요하다고 느껴지면 바로 공부해 자격증을 땄다. 민 강사는 처녀 시절 돈을 잘 벌어 어떻게 하면 돈을 잘 버는지, 성공하는 방법 등을 강의하러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차도 필요하고 운전기사도 필요했다. 차를 사기 위해 찾았던 곳에서 남편을 만났다. 선한 눈이 맘에 들었다고 한다. 아직도 남편 이 강사는 민 강사만 바라본다. 이 강사는 결혼 후 민 강사가 부탁하는 말에 한 번도 아니요를 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남편은 아무리 피곤해도 새벽에 아내가 여보 나 물 하면 어김없이 일어나 물을 갖다 준다. 부부를 옆에서 지켜본 작곡가가 곡을 만들어 줬다. 남뽕과 여뽕이 이 세상에 최고라는 내용으로 곡명은 뽕뽕부부다. 남뽕여뽕 별칭은 최윤정 가수가 지어준 별명이다. 민 강사는 이 강사를 향해 세상에서 우리 남편이 최고다. 아무리 봐도 이런 사람 또 없다. 금싸라기보다 귀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누가 봐도 영락없이 지금 막 연애하는 커플 같다. 민 강사는 가정형편이 좋지 않아 친척 집에 살았다. 그러다 보니 그는 어머님의 정이 그리웠다. 그렇게 자라서 직장을 다니며 돈은 많이 벌었지만 민 강사는 외로웠다고 한다. 남편의 형제는 남자만 넷이라 딸이 없던 터에 민 강사가 딸의 역할을 했다. 그는 어머님은 남편의 어머님이 아닌 나의 엄마였다고 회고했다. 한번은 옛 직장에서 민 강사가 1등으로 영업목적을 달성해 제주도로 연수를 가게 됐다. 그는 연수 갈 때 시어머니를 모시고 가고 싶다고 회사에 이야기했다. 회사에서는 난감해했다. 그러자 그는 사무실 층계에 앉아서 큰소리로 시어머님 보고 싶어 나는 연수 못 가네. 어머니 보고 싶어 못 가네하며 크게 울었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본 회사 직원들은 민 강사의 시어머니를 모시고 가는 것에 모두 찬성했다. 그의 전략이 회사에 통했다고 환한 웃음을 지었다. 민 강사가 셋째를 임신하고 8개월쯤 됐을 때 어려움이 찾아왔다. 전기세를 내지 못해 전기가 끊기자 궁여지책으로 촛불을 켜놨다. 그런데 퇴근해 집에 온 남편이 분위기가 정말 좋다. 촛불 켜놓으니 당신이 더 이뻐 보인다. 이런 순간은 잊지 못할 시간이다고 했다. 그 순간 민 강사는 내가 결혼을 정말 잘했구나.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는 마음에 눈물이 났다. 지금도 그 기억은 잊을 수가 없다. 남편은 나에게 최고의 엔돌핀이자 명약라며 미소 지었다. 남편인 이 강사는 나만 참으면 된다. 그러면 이해 못 할 것이 없다며 부인이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으면 밖에 나가서 막걸리 하나 사 온다. 그리고 힘들었지 하면서 한 잔 따라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웃어 보인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노래방을 간다. 가서 노래를 부르고 오면 싸울 일이 없다고 했다. 신혼 때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불렀다. 지금은 뿐이고를 부른다. 두 부부의 뽕뽕부부 음반이 나오면 뽕뽕부부를 열창할 예정이라고 한다. 성인이 된 자녀들이 요즘도 아빠는 엄마랑만 논다고 투덜댈 정도다. 남편인 이 강사는 원래 직장을 다녔다. 그러다 이 강사가 직장을 쉬는 날이면 아내인 민 강사가 도와달라는 말에 순순히 따라나섰다가 실버체조 강사가 됐다. 민 강사는 우리 두 부부가 찾아가면 어르신들은 부부라는 것만으로도 좋아한다. 우리가 가는 날이면 어르신들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계신다며 어르신들을 찾아갈 때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부모님 찾아뵙듯 정성을 들여간다고 했다. 민 강사는 지난 2019년 추석이 다가오는데 어르신들이 얼마나 외로울까 싶어 차례상 소품을 이 강사와 밤새 준비했다. 차례상에 올라가는 사진들을 찾아서 가위로 오리고 잘 붙을 수 있도록 뒤에 스티커도 붙여서 약 22가지 음식을 준비했다. 그리고 어르신들이 직접 조상님들께 놔드리고 싶은 것을 놓을 수 있도록 제사 때 쓰는 흰 전지도 준비했다. 그는 어르신들이 차례상을 진짜로 준비한 것처럼 좋아했다. 이번 차례상에는 소고기 산적이 빠졌으니 다음에는 꼭 해오라고 하기도 했다며 활짝 웃었다. 다양한 일을 해본 민 강사는 가장 기억에 남은 직업으로는 14년 동안 일한 명동 전주 곱돌비빔밥 식당에서 일할 때다. 식당을 찾는 일본 관광객들에게 더 친절을 베풀고 싶어서 일본어를 공부해 일본어 자격증을 땄다. 그리고 친절하게 해줬더니 일본인 관광객들에게 한국에 가면 명동 전주 곱돌비빔밥 집에 민 강사를 봐야 한다는 소문이 났다. 이후로 일본인들이 민 상이라고 부르며 민 강사를 보러 많이 찾아왔다. 찾아온 많은 일본 관광객들은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도 편지부터 선물까지 보내왔다. 지금도 수많은 편지와 선물들이 있다. 이로 인해 외국인 대상으로 영업 매출을 올리는 데 기여하고 더불어 친절로 한국을 좋게 알렸다고 국회의원 표창장도 받았다. 민 강사의 꿈은 교육 사업이다. 넓은 땅에 농사도 짓고 지인들과 사랑에 굶주린 아이들, 아픈 어르신들을 모시고 땅에서 키운 농산물을 먹으며 그동안 배우고 익힌 지식과 삶의 노하우를 온 이웃에게 나눠주고 싶다고 한다. 그는 우리 부부를 보고 행복을 느끼는 지인들이 정말 많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지요라며 웃음 지었다.

[피플&포커스] ‘현직 경찰 유튜버’ 李경감 “주체적인 삶 꿈꿔… 메타버스도 도전”

보통 경직된 조직문화를 말할 때 떠오르는 직업은 군인이나 경찰이다. 이러한 경직된 조직문화 속에 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맞아 메타버스 플랫폼을 만들어 변화를 이끄는 경찰이 있다. 그는 일산서부경찰서 교통홍보를 담당하는 교통관리계 이광수(53, 경감) 계장이다. 심지어 그는 경찰이면서도 유튜버로 활발히활동하고 있다. 이 계장은 최근 일산서부경찰서에서 가진 천지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경찰을 하면서 허용되는 직업이 2가지인데, 유튜버와 강사라며 겸직 허가를 지방청장한테 받았다. 현재 구독자가 4100여명인데 3만명 유튜버가 되는 게 꿈이라고 밝혔다. ◆직업 인터뷰 전문 유튜버의 삶 시작 이 계장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가 한창이었던 2020년 이후 3년째 호호아재TV라는 인터뷰 채널의 유튜버로 활동하고 있다. 매주 한 번씩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을 만나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인터뷰하고 구독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유명 정치인이나 연예인,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연령대와직종의 구분 없이 이 계장이 만난 사람은 150여명에 달한다. 그가 유튜버의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은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다. 이 계장은 40대 중반 이후 저의 인생을 돌아보고 정리하게 됐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산 적이 없는 것 같았다면서 고민 끝에 택한 것이 유튜버의 삶이었다. 현재 이 계장은 경찰의 일을 하면서 직업 인터뷰 전문 유튜버의 일을병행하고 있다. 그는 인터뷰할 때 제 신분을 숨긴다. 드러내서 좋을 게 없다며 부탁이나 청탁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계장은 유튜브를 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으로 출연자 섭외를 꼽았다. 그는 처음 인터뷰를 시작할 때 사람들에게 얘기하면 인터뷰 채널에 무조건 출연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며 출연을 제의한 대부분 사람으로부터 거절당했다고 말했다. 다행히 인터뷰에 응한 출연자들이 지인들을 소개해주면서 네트워크 마케팅의 효과를 실감할 수 있었다고 이 계장은 전했다. 그는 네트워크 마케팅이라는 것을 다단계로만 생각했는데, 사람이 사람을 소개하는 것이 너무 놀라웠다. 어떤 출연자는 6명까지 소개해줬다고 덧붙였다. 또 이 계장은 저는 돈을 좇지 않고 흥미 위주로 만들지 않는다. 조회수가 안 나오는 농민이나 종교인도 출연한다며 각양각색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필요한 정보가 있다면 그것을 보는 분들이 도움을 얻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1000명을 인터뷰하고 책을 쓰는 것이 목표라면서 기회가 있으면 유튜버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강의도 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메타버스 교통안전홍보관 자체 제작 이 계장이 근무하는 일산서부경찰서는 경기도 최초로 지난 4월 메타버스 가상 경찰서 교통안전홍보관을 자체 제작했다. 메타버스는 가상초월을 뜻하는 메타(Meta)와 우주를 뜻하는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로, 이용자의 아바타를 통해 현실 세계와 같은 사회경제문화 활동이 이루어지는 3차원의 가상세계를 말한다. 메타버스 가상 경찰서 교통안전홍보관 월드맵은 일산서부경찰서가 메타버스 플랫폼인 제페토(Zepeto)를 이용해 자체 제작한 가상의 경찰서다. 제페토 앱에서 일산서부경찰서 교통안전홍보관을 검색하여 홍보관 내부로 들어가면, 내부에 각종 교통사고 전시판넬과 교통사고 예방 홍보 포스터, 회의 공간 등이 마련돼 있다. 김상희 서장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메타버스 가상 경찰서 교통안전홍보관 월드맵을 만든 이 계장은 메타버스 경찰서 내부 동선을 따라 3차원으로 각종 자료를 시청할 수 있으며 자료들은 주기적으로 업데이트될 예정이라며 젊은 사람들은 경찰서에 와서 교육받을 필요가 없다. 간단한 안전교육은 영상으로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메타버스 교통안전홍보관 1층과 2층에는 각각 미팅룸이 마련돼 있는데 이곳에서 마이크를 이용해 교통경찰 내부회의협력단체 소통을 위한 간담회, 교통안전 강의도 이뤄진다. 이 계장은 교통사고 전시판넬과 교통사고 예방 홍보 포스터를 보면서 음주운전 등 사고의 위험성을 알려주고 경각심을 가질 수 있게 해준다며 월수금요일 오후 3~4시 사이에는 교통관리계 직원이 상주해교통민원상담을 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일산서부경찰서는 현재 네이버 제페토와 SKT 이프랜드 2개의 메타버스 플랫폼을 이용하고 있다. 최근에는 가상 경찰서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교통안전 생활화로 이어질 수 있도록 5월 9일부터 13일까지 가상 견학 이벤트를 진행했다. 이 계장은 메타버스에서 소통하면 서로의 얼굴이 안 보이기 때문에 진솔한 얘기가 오갈 수 있다며 싫은 말, 싫은 소리를 들을 수도 있어야 한다. 유튜버를 해보니깐 악플도 관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솔한 얘기가 메타버스에서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메타버스, 유행 아닌 거대한 파도 또한 그는 거리두기 해제로 이른바 메타버스 열풍이 식을 것이라는 예측에도 더 활성화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 계장은 코로나19와 메타버스가 같다고 생각하는 게 모순이다. 4차 산업혁명과 언택트가 같은 것이라며 앞으로 사회는 개인주의가 더 발달해서 사람과 사람 간의 접촉이 더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젊은 사람들이 언택트를 원하면 그렇게 가는 게 맞고 그게 시대의 뉴트렌드라며 아직 기존의 조직들은 사람을 보고 통제하려고 한다. 메타버스는 지나가는 하나의 유행이 아니라 다가오는 거대한 파도다. 올라타고 즐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 계장은 메타버스 플랫폼을 하루 미친 듯이 써보면 그 가치성을 깨달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메타버스 플랫폼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는 트위터와 페이스북, 라임, 유튜브 등에 익숙해있기 때문이라면서 기득권을 가진 사람이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다. 플랫폼이 정말 잘 돼 있어 제대로 사용해보면 가치와 재미를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피플&포커스] “드론 기술자라고 다 성공하는 건 아냐… 핵심은 융합 능력”

4차 산업혁명의 핵심 중 하나로 꼽히는 드론에 관한 관심이 커지고 있습니다. 특히 드론을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수 있는가하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저는 보통 자기가 가진 기술과 드론을 융합시킬 줄 알아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경기 고양시에서 드론 조종사를 양성하고 있는 유윤열 ㈜꿈소 대표는 이같이 말했다. ㈜꿈소는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인 드론 전문 교육기관으로 드론 국가자격증 교육, 민간자격증교육, 항공 촬영, 코딩, 정비 등을 전문으로 하는 교육기관이다. 자율 항법 장치로 자동 조종되거나 무선으로 원격 조종되는 무인 비행 물체를 의미하는 드론은 우리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게 됐고 그 활용 영역도 넓어지고 있다. 특히 공중에서 영상을 촬영하거나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장소에서 활용도가 높으며 밭에 농약을 뿌리거나 산불을 감시하고 물건을 나르는 등 산업 전반에서 접목할 수 있어 주목받고 있다. 유 대표는 기존 무선 장난감과 드론의 차이를 제어 기술에 있다고 설명했다. 드론은 자동차와는 달리 공중에 떠 있다. 따라서 2차원이 아닌 3차원 기동을 해야 하는데 이는 주변 물체를 감지하거나 수직수평위치 등 자세를 교정해주는 센서가 요구된다. 오늘날 기술의 발전으로 센서가 소형화해 드론에 달 수 있게 됐고 상용화에 속도가 붙었다. 또 공중에서 정밀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됐는데 이 때문에 다양한 분야에 접목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보안업체서 수리점 거쳐 교육까지 유 대표는 현재 민간 교육기관에서 드론 자격증 취득 및 활용 등 전반을 가르치고 있지만 처음부터 드론의 세계에 깊게 발을 들여놓은 것은 아니었다고 전했다. 그의 첫 직장은 보안업체의 출동직이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출동업무를 쭉 해오던 중 CCTV 관제업무를 해 보겠냐는 제의가 들어왔었다고 설명했다. CCTV와 관련된 기술들이 막 나오기 시작하던 시기였는데 유 대표는 평소 카메라에 관심이 많았고 카메라 기술만 있는 사람들보단 현장 출동 경험이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용기를 냈다고 했다. 이후 그는 관제부서를 거쳐 CCTV 관련 기술을 다루는 사내 TF 기술 지원팀에서 활동했다. 주 업무는 CCTV의 기능을 개발하는 것으로 문이 열리면 실내 등이 자동으로 켜지는 시스템 등 개발에 참여했다. 유 대표는 일을 계속하던 중 휴가 때 제주도 친구집에 방문했었다며 그때 친구가 드론을 날리는 것을 보여줬는데 카메라에도 관심이 있어 유심히 봤었다. 항공뷰가 무척 매력적이었다고 회상했다. 지인의 집엔 수리해야 할 드론이 가득했는데 유 대표는 구조 자체가 어렵지 않아 금방 배울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아이들 셋을 키우고 있던 그는 회사 월급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느꼈고 드론 수리점을 열기로 했다. 유 대표는 이후 고양시로 돌아와 드론 수리점을 열었다. 수리점에서 수리와 함께 고객들을 상대로 조종 기술을 알려주고 장비를 추천해주다 보니 판매를 병행하게 됐고, 결국은 교육과정을 여는 것으로 이어졌다. 교육은 입소문을 타고 시내 초등학교 방과 후 수업으로 이어졌다. 선생님들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했던 교육은 자격증 교육으로 커졌고 이후 창업 및 취업준비생을 컨설팅하는 지금의 꿈소가 됐다는 것이 유 대표의 설명이다. ◆드론만 배워선 한계 봉착할 것 유 대표는 드론 자격취득 시 유의할 점으로 드론만 배운다고 끝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드론이 주목받는 이유는 다양한 분야에 활용 가능하다는 부분인데 활용할 분야에 대한 지식기술 없이 드론 기술만 있다면 활용성이 크게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는 비행 영상 촬영을 목적으로 드론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다면서도 촬영의 기본기가 없는 상태로 드론만 배우려는 사람은 난관에 봉착할 것이라고 말했다. 촬영 기술이 없는 상태에서 드론만 배울 경우 드론으로 영상을 찍을 순 있어도 영상 자체의 질이 떨어져 상품화가 어렵다는 것이 유 대표의 설명이다. 또 드론을 농사에 접목하려는 교육생의 일화를 예로 들기도 했다. 해당 교육생은 드론을 배워 밭이나 논에 농약을 뿌리는 농약 방제 사업을 구상했다. 하지만 농약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던 교육생은 농사에 쓰이는 수십여 가지의 농약에 대해 새롭게 공부한 끝에 드론 기술을 활용할 수 있었다. 유 대표는 최근 청년들이 취업을 위해 드론 자격증 취득을 준비하는 경우가 늘어났다면서도 흔히 자격증을 취득하면 끝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는 시작일 뿐이며 자신이 가진 기술과 이를 융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자격증 세분화로 목적 따라 준비해야 유 대표는 드론을 활용하는 사람이 늘면서 추락 사고도 같이 늘어 자격증 제도가 강화됐다며 이를 알고 준비해야 목적에 따라 제대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020년 3월 드론 추락 사고가 늘자 관련법이 개정돼 12㎏ 초과 150㎏ 이하의 드론을 조종하기 위해선 초경량비행장치 조종자 자격증을 취득해야 한다. 또 체급이 다양한 드론이 출시됨에 따라 지난해에는 국가자격증도 세분됐다. 항공안전법 개정안에 따라 지난해 3월 1일부터 250g을 초과하는 드론 비행 시 초경량비행장치 조종자 자격증이 필요하다. 자격증은 드론의 무게에 따라 250g~2㎏은 4종, 2~7㎏은 3종, 7~25㎏은 2종, 25~150㎏은 1종으로 분류되며, 관련법 위반 시 과태료 300만원이 부과된다.

[Interview] “Romania, impetus for enhancing Strategic Partnership with Korea”

A Written Interview with Cezar Armeanu, Ambassador of Romania in Korea Persuit of future-oriented cooperation with Korea Plans to have regular bilateral talks with Korea “Exchange visits between the Friendship Parliamentary Groups” “Opposition” about the war between Russia and Ukraine “One of the darkest moments in our recent history” Romania with the European natural scenery Hidden historical sites all over the country The demand of travel is exlpoding due to Corona 19 endemic, and the travel industry’s visit to Korea is increasing. The expectations for overseas travel have been amplified as the COVID-19 incident, which began in February 2020, has increased the thirst of travelers who couldn’t travel abroad due to the closure of the sky. Travel demand is also expected to be huge. According to the survey of CICI, the thing people want to do the most is ‘traveling abroad’ when the COVID-19 becomes stable. Furthermore, there are countries where you can immigrate freely without certificates related to Corona 19 in Europe. Those countries are Norway, Liechtenstein, Hungary, Iceland, Ireland, Romania, etc. There are embassies showing their countries’ charm for travelers who want to feel the romance of Europe. For this issue, Cheonji Daily News had a written interview with Cezar Armeanu, the Ambassador of Romania in Korea to hear about the recent situation in Romania as an Eastern European republic, and the culture of Romania. ◆“Opposition” about the ‘Ukraine-Russian War’ in the Near Distance The recent issue is the war between Ukraine (where borders northern Romania) and Russia. Romania is bordered by Ukraine to the north, Moldova to the east, Hungary and Serbia to the west, and Bulgaria to the south by the Donau River. The border distance between Romania and Ukraine is 649.4㎞, and Romania is directly affected by the recent intensified war between Ukraine and Russia. Where war breaks out, no one can enjoy peace. Since the outbreak of the war, Romania has criticized Russia’s attack on Ukraine as unjustified and unreasonable, citing its illegal military attacks violating national security and international agreements. “There are worrisome developments in Ukraine which may have emboldened other leaders,” Ambassador Armeanu said. “Romania supports all efforts aimed at de-escalating the situation and protecting civilians. We hope the ongoing negotiations between Ukraine and the Russian Federation will lead to concrete results,” he stressed. “In order to prove faith in the negotiations, Russia must immediately stop all military operations,” he said. “Romania believes it is very important to join efforts to prevent illegal wars between Ukraine and Russia,” he explained. He considered the current war in Ukraine as one of the darkest moments in our recent history, not just for Ukraine, but also for all the world. He also criticized the murders in Buka, outside of Mariupol, Ukraine, for proving Russian crimes and genocide against humanity committed on Ukrainian territory. Romanian Ministry of Foreign Affairs had a cooperation with Korean Embassy on supporting the plans for evacuations of Korean co-nationals from Ukraine, as well as the members of Korean diplomatic mission. Romanian Consular Department and the National Department for Emergency Situations provided the necessary assistance on the matter. The cooperation of Romania with South Korea to support South Korea’s joint Ukrainian national and diplomatic mission members is an important step in the long-term exchange between the 2 countries. Ambassador Armeanu suggested that ▲the 2 countries enhance the dialogue at the level of the Ministries of Foreign Affairs ▲organizing regular bilateral meetings and giving a new impetus for attaining the goals of the Strategic Partnership, in order to encourage a more pragmatic, future-oriented bilateral cooperation, updated to the new economic and geopolitical environment. He expressed a plan to promote continuous cooperation between the 2 countries. “We are working to prepare this year the exchange visits between the Friendship Parliamentary Groups and to organize, as soon as possible, the 10th session of the Joint Committee for Industrial Cooperation, back-to-back with a business forum,” he said. ◆About Romania and ’Fellowship’ with Korea Ambassador Armeanu wants to let many Koreans know the beauty of Romania. “Romanian natural features are unique in Europe,” he said. “Our country enjoys the Carpathians, with their areas of true wilderness, and the beauty of the Danube Delta, as well as extensive plains scattered with little natural and cultural treasures and of course the Black Sea,” he explained. He said that Romania has medieval castles, a lot of alpine landscapes to enjoy hiking in summer and skiing in winter. He also stressed that there are old villages and internationally recognized painted churches in Bucovina. “Romania has millions of beauties of which few know,” he said. “Romanians are well known for their hospitality and friendship and for their good sense of humor. The stories of these places will surely fascinate the Korean people,” he said. Armeanu said Korean culture and products are popular in Romania, and explained that Korean classical musicians have won the most prestigious trophy at the George Enescu International Festival in Romania in recent years. “We have already sent the Romanian National Opera a proposal to be signed an Agreement of partnership with the Korean National Opera,” he said. He stressed friendly cultural exchanges between the 2 countries. “The K-pop artists performed as well on the Romanian stages. In June a K-pop band will travel to Bucharest for a concert,” he said. ◆How Ambassador Armeanu thinks about Korea Ambassador Armeanu said the first place he visited in Seoul was Namsan Tower. He kept the moment as a precious memory because he could see the wonderful view of Seoul from the rooftop. He also visited various places in Korea, including Gyeongbokgung Palace, Changdeokgung Palace, and Bukchon Hanok Village. “I visited the Insadong district, with authentic art exhibitions and traditional handcraft shops, then Myeongdong district. Here I was happy to watch the Nanta show, a burlesque performance with acrobatics and comic moments,” he said “I remember my favorite museums that I visited: National Museum of Korea with impressive collections of history and culture, and the Museum of the Craft Art Seoul, with galleries that bring together traditional and modern crafts,” he explained. He said he tested and enjoyed bulgogi, bibimbap, samgyeopsal, doenjang jjigae and the diversity of kimchi. He recalled the delicious food he ate at a Korean restaurant. “I remember the amazing first experience of a Korea BBQ restaurant with grilled meat slices and lots of bowls with side dishes, salads, pickles and all kinds of spices. It was great,” he stressed.

[인터뷰] 주한 루마니아 대사 “루마니아, 한국과 전략적 동반관계 강화 추진”

체자르 아르메아누 주한 루마니아 대사 서면 인터뷰 韓과 미래지향적 협력 추구 정기적 양자 회담 조직 계획 “친선의회그룹 간 교류 준비” 러-우크라 전쟁에 즉시 “반대” “역사적으로 어두운 시기” 유럽 자연풍광 갖춘 루마니아 숨은 역사 담긴 유적지 곳곳에 코로나19 엔데믹으로 세계적으로 관광 수요가 폭발하는 가운데 국내를 찾는 해외 여행업계의 방한도 최근 줄을 잇고 있다. 2020년 2월부터 시작된 코로나19 사태로 하늘 길이 닫혀 해외여행을 나서지 못한 여행객들의 갈증이 커진 가운데 최근 출입국 자가 격리 방침이 완화되면서 해외여행에 대한 기대감이 증폭되고 있다. 여행 수요도 클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이미지커뮤니케이션연구원(CICI)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코로나19가 안정됐을 때 가장 하고 싶은 일 1위는 ‘해외여행’이었다. 더군다나 유럽 국가 중에서는 코로나19 관련 증명서 없이 출입국이 자유로운 나라도 있다. 노르웨이, 리히텐슈타인, 슬로베니아, 아이슬란드, 헝가리, 아일랜드, 루마니아 등이다. 유럽의 낭만을 느끼고 싶은 여행객들을 위해 자국의 매력을 발산하는 대사관들이 있다. 천지일보는 이번 호에서 체자르 아르메아누 주한 루마니아 대사와 서면 인터뷰를 통해 동유럽 공화국인 루마니아의 최근 상황과 루마니아의 문화를 들어봤다. ◆지척에서 터진 ‘우크라-러’ 전쟁 “반대” 최근 이슈는 단연코 루마니아 북쪽과 국경을 맞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 발생한 참혹한 전쟁이다. 루마니아는 북쪽으로 우크라이나, 동쪽으로 몰도바, 서쪽으로는 헝가리와 세르비아, 남쪽으로 도나우강을 끼고 불가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 간 국경 거리는 649.4㎞인데, 최근 격화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 전쟁으로 루마니아는 전쟁에 관한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 전쟁이 발발하는 곳에서는 누구든 평화로운 여유를 누릴 수 없다. 전쟁이 발발한 직후부터 루마니아는 러시아의 불법 군사 공격이 국가 안보와 국제 합의를 위반한다는 점을 들어 우크라이나를 향한 러시아의 공격이 정당하지 않고 이유 없다고 비난했다. 아르메아누 대사는 “우크라이나에는 다른 지도자들을 대담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걱정스런 상황이 더 악화되고 있다”며 “루마니아는 상황을 완화하고 민간인을 보호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지지한다. 현재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협상이 구체적인 결과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어 “협상에 대한 신의가 입증되기 위해서는 러시아가 모든 군사 작전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며 “루마니아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불법 전쟁을 막기 위한 노력에 동참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재 우크라이나에 일어나고 있는 전쟁이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전 세계 역사 가운데 있었던 가장 어두운 시기 중 하나라고 봤다. 또 우크라이나 마리우폴 외곽 부카 시내에서 일어난 학살과 관련해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자행된 러시아 범죄와 반인륜적 대량학살을 입증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루마니아 외무부가 한국대사관과 함께 한국의 우크라이나 공동 국적자 및 외교사절단원들에 대한 대피 계획을 지원하기 위해 협력을 맺었고, 루마니아 영사부와 국가비상사태부는 그 문제에 대해 필요한 지원을 제공했다는 점을 들어 양국의 공조 관계를 강조했다. 그는 “루마니아가 한국의 우크라이나 공동 국적자 및 외교사절단원들을 지원하기 위해 한국과 협력을 맺은 것은 양국의 장기적인 교류에 있어 중요한 진전”이라며 “한국과 루마니아가 상호협력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아울러 상호 협력 방향으로는 ▲코로나19 기간 이후 정치적 수준에서 양국이 보다 실용적이고 미래지향적인 협력을 위해 외교부 대화를 강화할 것 ▲정기적인 양자 회담을 조직해 전략적 동반관계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새로운 추진력을 제공할 것 등을 제시했다. 그는 “올해 친선의회그룹 간 교류방문을 준비하고 가능한 한 빨리 제10차 산업협력공동위원회 회의를 비즈니스 포럼과 연달아 개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양국 간 지속적인 협력 추진 계획을 밝혔다. ◆한국과 ‘유대감’ 루마니아는 어떤 나라 아르메아누 대사는 루마니아의 아름다움을 많은 한국인들에게 알리고 싶어했다. 그는 “루마니아의 자연 특성은 유럽에서 독특하다”며 “루마니아에는 카르파티아산맥의 진정한 야생, 다뉴브강 삼각주의 아름다움과 함께 자연·문화적인 보물이 산재한 광활한 평야, 그리고 물론 흑해도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루마니아에 중세 성곽이 있고 여름 하이킹과 겨울 스키를 즐길 수 있는 많은 고산들도 있다고 했다. 또 부코비나에는 오래된 마을들과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벽화교회들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루마니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며 “문화적·행동적 관점에서 루마니아인들은 환대와 우정과 좋은 유머 감각으로 잘 알려져 있다. 루마니아의 이야기는 분명 한국 사람들을 매료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아르메아누 대사는 한국의 문화와 제품이 루마니아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다며 최근 몇 년 동안 한국의 클래식 음악가들이 루마니아의 조지 에네스쿠 국제 축제에서 가장 권위 있는 트로피를 거머쥐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미 루마니아 국립오페라단에 제안서를 보내 한국 국립오페라단과의 파트너십 협정에 서명하도록 했다”고도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 대중음악(K-pop) 아티스트들은 루마니아 무대에서도 공연을 펼쳤다. 오는 6월에는 K-pop 밴드가 콘서트를 위해 부쿠레슈티(루마니아 수도)로 갈 것”이라며 양국의 우호적인 문화 교류를 강조했다. ◆아르메아누 대사가 생각하는 한국은 아르메아누 대사는 서울에서 처음 방문했던 곳이 남산타워였다고 했다. 남산타워 옥상에서 멋진 서울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때의 기억을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에서 경복궁과 창덕궁, 북촌 한옥마을 등 다양한 곳을 방문했다. 아르메아누 대사는 “훌륭한 예술 전시회와 전통 수공예품 가게가 있는 인사동, 그리고 명동을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난타 쇼를 볼 수 있어서 행복했고, 그 공연은 곡예와 재미있는 순간들이 있는 익살스런 공연이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또 “방문했던 곳 중에 가장 좋았던 박물관 두 곳도 기억난다. 그곳은 역사와 문화의 인상 깊은 소장품이 있는 국립중앙박물관과 전통 공예품과 현대 공예품을 한데 모은 서울공예박물관”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 음식으로는 불고기, 비빔밥, 삼겹살, 된장찌개, 그리고 다양한 김치를 먹어 봤다고 했다. 한국 식당에서 먹었던 맛있는 음식을 회상한 그는 “불에 구운 고기와 다양한 그릇들에 담긴 반찬, 샐러드, 피클 그리고 모든 종류의 향신료가 있었던 한국 바비큐 식당에서의 놀라운 경험을 기억한다. 그것은 아주 훌륭했다”고 강조했다.

[피플&포커스] 대한민국 최남단 섬마을 이장 “‘마라도’의 참 모습 보여주고파”

마라도는 오후 4시 마지막 배로 관광객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나면 그제야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사람들이 없는 고요함 속에 온전히 내 세상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게 하죠. 마라도 토박이 김춘구(57) 이장은 마라도에 대해 한마디로 표현해달라는 기자의 요청에 이같이 말했다. 마라도를 몸과 마음의 안식처로 삼고 마라도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사는 김 이장을 만나 그가 마라도에 정착하게 된 사연과 마라도 마을을 책임지는 이장으로서 목표하는 바가 무엇인지 들어봤다. 마라도는 대한민국 최남단에 있는 섬으로 제주도에서 남쪽으로 약 11㎞ 떨어져 있다. 면적은 0.3㎢, 해안선의 길이는 4.2㎞, 최고점은 39m다. 마라도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1시간 남짓이면 섬 한 바퀴를 돌아볼 수 있을 만큼 작고 아담한 섬이다. 바람이 거세고 파도가 높게 일렁이는 날이면 바다가 온 섬을 덮어 버릴 듯하다. 이 때문에 키 큰 나무 하나 없는 척박한 곳이다. 하지만 김 이장에게 마라도는 넓은 품으로 포근하게 안아주는 어머니와 같은 곳이다. 김 이장은 마라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때까지 마라도에서 지냈다. 이후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마라도를 나오게 됐다. 축구선수가 꿈이었던 그는 축구부에 들어가 학생선수 생활을 했다.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모두 축구선수로 생활했지만 운동 중 부상을 입게 됐고 군 입대 문제까지 겹치면서 꿈을 접게 됐다. 이후 대학에서 만났던 사랑하는 지금의 아내와 결혼해 아이들을 갖게 된 그는 제주도에서 횟집을 운영하며 사업을 했고 아이들이 독립할 때까지 뒷바라지했다. 당시 마라도에서의 생활은 아니었지만 늘 그의 마음은 마라도를 향해 있었다. 몸은 마라도를 떠나있어도 마음으로는 늘 생각했죠. 마라도는 제가 태어난 고향이기도 하고요. 마음이 힘들 때면 항상 찾았던 곳이었어요. 마라도는 늘 저에게 안식처가 됐어요. 김 이장의 말처럼 그에게 있어 고향인 마라도는 늘 포근한 안식처였다. 축구선수를 꿈꾸며 운동 생활을 할 청소년기에도, 성인이 돼 가정을 꾸리고 살아갈 때도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김 이장은 마라도를 찾았다. 김 이장은 밤하늘에 반짝이는 은하수 아래 시원한 파도 소리를 벗 삼아 마라도의 넓은 초원을 조용히 거닐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했다. 이런 그의 마라도 사랑은 마라도를 떠나있을 때도 식지 않았다. 그가 마라도 밖에서 운영했던 횟집의 이름에서도 마라도는 빠지지 않았다. 개울을 떠나 바다로 나갔던 연어가 다시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오듯 김 이장도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 자연스럽게 마라도로 돌아왔다. 입도 당시 마라도에 있었던 형제들과 가족들이 김 이장과 그의 아내의 험난한 섬 생활을 걱정하는 마음에 만류하기도 했지만 김 이장의 아내는 오히려 마라도에서 생활해보고 싶다며 입도를 결심했고, 김 이장도 그런 아내의 마음에 고마움을 느끼며 마라도에 함께 들어오게 됐다. 김 이장은 마라도는 내가 태어난 곳이고 부모도 형제도 이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다시 들어오는 데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며 환경만 조금 더 나아진다면 자식들도 모두 마라도에 들어와 살라고 하고 싶을 정도로 나는 이곳이 너무나 좋다고 말했다. 마라도를 대표하는 마을 이장으로서 김 이장에겐 반드시 이루고자 하는 숙원사업이 있다. 그것은 바로 마라도에 항구를 만드는 것이다. 현재 마라도에는 항구가 없다. 단지 배를 잠시 댈 수 있는 선착장이 고작이다. 파도를 막아줄 항구가 없으면 배를 안전하게 정착시킬 수 없다. 배를 정착시킬 수 없다는 것은 섬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이다. 배를 정착시킬 수 없으니 배를 소유할 수 없고, 배가 없으니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을 수도 없다. 고기를 잡을 방법은 오로지 낚시밖에 없다. 하지만 낚시를 생업으로 삼을 순 없는 노릇이다. 마라도가 섬인데 왜 여기 횟집보다 짜장면집이 이렇게나 많이 생겼겠어요? 짜장면이 유명세를 탔던 점도 있지만 사실은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없으니 그런 겁니다. 마을 사람들이 생업을 위해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너도나도 짜장면집을 운영하니 여기가 마라도가 아니라 짜장도가 됐다는 말까지 나옵니다. 항구가 없으면 의료문제도 커진다. 배가 섬에 머물 수 있다면 배를 통해 언제든지 환자를 데리고 인근 큰 섬으로 갈 수 있지만, 배가 없고 날씨가 나빠진다는 예보가 있으면 인근 큰 섬에서 아예 배를 띄우지 않아 환자를 이송할 수 없다. 환자를 데리러 마라도에 왔다고 하더라도 예보대로 날씨가 나빠지면 항구가 없는 마라도에는 머물 수 없고 그렇다고 나빠진 날씨 속에 다시 바다로 나갈 수도 없어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기 때문에 아예 배를 띄우지 않는다는 게 김 이장의 설명이다. 또 다른 문제는 불법 어업에 대한 단속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김 이장에 따르면 마라도는 그 어느 곳보다 해산물이 풍부한 곳이다. 자연산 전복과 소라, 고둥과 떡조개, 톳, 미역, 해삼 등 각종 해산물이 넘쳐난다. 하지만 섬에 배가 없다 보니 허가 없이 섬 가까이 찾아와 불법적으로 어업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제지할 방법이 없다. 바로 눈앞에서 버젓이 불법이 성행하는데도 전화로 신고를 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이다. 김 이장은 마라도 하면 다들 짜장면을 떠올린다. 그런데 마라도의 대표 먹거리는 짜장면이 아니라 신선한 해산물이라면서 항구만 제대로 개발됐어도 짜장면 가게보다 해산물 가게가 더 많이 생겼을 것이고, 관광객들이 마라도의 매력을 더 제대로 느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표했다. 그는 아내와 함께 마라도 해산물로 차리는 해녀밥상 어부밥상을 개발했다. 관광객들에게 마라도의 진짜 맛을 보여주고자 했던 김 이장의 의지가 담겼다. 그러나 배를 타는 시간에 쫓기는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해녀밥상, 어부밥상을 차리기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항구가 만들어져 언제든 출항할 배가 있다면 마라도는 관광객들에게 그저 잠시 왔다 급히 떠나가는 섬이 아니라 누구나 머물고 쉼을 얻을 수 있는 안식처가 될 겁니다. 마라도는 짜장도가 아닙니다. 저는 마라도를 머물 수 있는 섬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하늘을 수놓는 은하수, 바다 너머로 보이는 제주도의 야경, 고요함 속에 스치는 바람과 파도 소리, 섬이 품고 있는 각종 해산물 등 마라도의 참 모습을 느끼게 해주고 싶습니다.

[피플&포커스] 광개토대왕비 세워진 너른마당… “천년 갈 문화 만들고 싶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흥동에 통오리밀쌈으로 유명한 문화 명소 너른마당 식당 앞에 광개토대왕비가 실물 크기(6m)로 복제돼 들어서 있다. 매년 음력 9월 29일이면 거대한 비석 앞에서 합동 추모제가 열린다. 너른마당 뜰 앞 서문에는 우리는 위대한 선조들의 자랑스러운 후예임을 잊은 채, 늘 약소민족인 양 스스로 비하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 선조들의 불굴의 기계와 웅혼한 기상을 후손에게 길이 전해주고자 5년여의 노력 끝에 광개토대왕비를 모셔 오게 됐다. 우리 민족의 끓는 피는 반도에만 머물 수는 없을 것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본지는 실물 크기의 광개토대왕비를 세우고 17년째 추모하고 있는 임순형 너른마당 대표를 인터뷰했다. 임 대표는 30년 전 어머니와 함께 너른마당을 시작했다. 처음 시작할 때는 꿩 요리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통오리밀쌈이라는 차별화된 메뉴를 앞세워 손님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아름다운 한옥으로 지어진 너른마당 앞에 광개토대왕비가 웅혼한 기상으로 우뚝 서 있어 고양시를 넘어 전국적으로 문화 명소로 알려졌다. 일반식당과는 다른 특별함을 간직한 식당을 차린 임 대표에겐 어떤 사연이 있을까. 임 대표는 정직하게 일했고 그 땀과 노력이 지금의 너른마당을 만들었다며 광개토대왕비를 보고 느낀 우리 민족에 대한 벅찬 자긍심으로 대왕비를 모시게 됐고 그 덕분에 너른마당이 전국의 문화 명소가 됐다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다음은 임 대표와의 일문일답. ◆ 광개토대왕비를 모셔 오게 된계기는? 중학교 때 교과서에서 광개토대왕비를 아주 조그마한 사진으로 봤다. 1990년 말쯤인가 고구려 국내성에 여행을 갔다. 광개토대왕비를 보고 충격을 금할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했었는지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인들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위대한 선조들의 기운을 받아야 했기에 현지에서 고구려의 기상을 그대로 담아 광개토대왕의 혼을 한국으로 실어서 가자는 마음이 솟구쳤다. 오로지 드넓은 고구려의 기상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광개토대왕비를 모셔 올 준비를 했다. ◆만드는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나? 광개토대왕비를 모셔오는 데 약 5년이 걸렸다. 광개토대왕비가 모셔져 있는 지방현은 북경 공항에서 차를 타고 1600㎞, 약 23시간 걸리는 곳에 있다. 광개토대왕비를 가져온다는 소식을 들은 국내 한 석공이 자신에서 맡겨 달라고 했다. 석공에게 국내서도 잘 만들 수 있지만, 고구려의 현지 기상과 정신을 모셔 와야 했기에 현지의 돌과 솜씨로 만들어야 한다고 정중히 말씀드렸다. 그렇게 만주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작업을 시작할 때 사진을 보여주고 수치를 재어 사진대로 만들어 달라고 했다. 현지에서 비석이 완성됐다고 해 가서 보니 이들은 비석이라고 생각하고 납작하고 넓적하게 만들어 놨다. 두께도 얇게 만든 것이다. 현지 석공에게 화가와 함께 광개토대왕비를 직접 보고 오라고 했다. 현지 석공들도 광개토대왕비 웅장함에 놀랐다. 하지만 크기와 모양, 글자 등을 실물처럼 만드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완성 직전에 비가 깨지는 사고가 발생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2004년 비로소 거대한 4면 돌기둥 비석이 제작됐다. 높이 6.3m, 둘레 6.6m, 무게 47t으로 실물 크기와 비슷하고 한자도 원형과 같은 1775자가 새겨진 비석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언제부터 추모제를 지냈나? 비석을 세워놓으니 학생들이나 공무원 임용되신 분들이 와서 비석의 기상을 보고 갔다. 광개토대왕은 영웅임에도 영웅 대접을 못 받고 있다. 광개토대왕이 다스리던 땅이 남한과 북한, 조선족으로 흩어져 있고 북만주땅 요동벌을 다 내어줬다. 또 고조선의 단군 역사와 고구려 역사가 중국 변방국의 일부 역사로 왜곡이 되고 있으니 광개토대왕의 넋이 헤매고 다닐 것 같아 넋을 달래드리기 위해 추모제를 시작했다. 고구려 제법을 몰라서 하늘에 지내는 천제 제법으로 지내고 있다. 그런데 반응이 너무 뜨거웠다. 추모제를 보러 왔다가 광개토대왕비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분들도 많았다. ◆돈은 얼마나 들었고, 집안의 반대는 없었나? 돈이 얼마 들었는지, 이런 것을 묻는 것은 불경죄다. 우리 가족에게 그렇게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나를 낳아서 지금껏 키워주셨으니 약 10억짜리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되는 것이지 않나? 이것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얼마 걸렸다. 이 정도만 이야기한다. 그들이 우리의 문화를 도굴하면서 돌아가신 유골을 돌아보았겠는가. 그 유골들이 이곳에 다 떨어져 어딘가로 흩어졌겠지. 인생이 꼭 늙고 병들어 죽어야 하는가. 훌륭하신 분들은 영원히 살아 신선같이 돼서 우리에게 교훈을 주면 좋겠다. ◆너른마당을 어머니와 함께 어떻게 시작했나? 어머니는 배우지 않았지만 지혜롭고 예절을 중시했다. 바느질 솜씨와 음식 솜씨가 정말 좋았다. 동네 두레가 있는 날 우리 집 순서가 되면 형님 이름이 순철인데 순철네 두레가 있는 날은 잘 먹는 날이라고 동네 분들이 좋아했다. 아버지는 음식 드실 때 까다로웠다. 꼭 소스가 있어야 했다. 고추장도 그냥 고추장이 아닌 초를 쳐야 했고 간장도 그냥 간장이 아닌 초라도 쳐야 했다. ◆너른마당에 오니 소중한 우리 문화를 보는 것 같다 이 터전은 앞으로 천년을 가게 하려고 만든 터전이다. 몸에 좋은 음식도 있고, 광개토대왕비도 있고 추모제도 하고 있다. 연못은 신라의 안압지를 모태로 꾸미고 있다. 안압지를 만들 때는 백제사람들이 와서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은 삼국의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곳이다. 모든 것은 하늘에서 돕지 않으면 안 된다. 조상이 돕고 주위에서 도와줘야 한다. 서로 조화와 상생으로 만들어지는 터전이 바로 너른마당이다. 나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 부모님들께서 해 오신 방법대로 정화수 떠 놓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수신(修身)하고 있다. 맘 편히 배고프지 않고 조상 잘 모시고 살면, 천년이 아니라 만대도 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나의 수신(修身)이다. 이것이 바로 효의 마음 아닐까.

[피플&포커스] “사연 담긴 소중한 ‘가죽 구두·부츠’ 고쳐드립니다”

첫 직장에서 첫 월급을 받고 50만원이 넘는 구두를 저에게 선물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합니다. 그때는 신발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구두가 2년도 못 갔지만 이젠 제가 사람들 구두를 수리하고 관리해주는 입장이 됐네요. 코로나19가 휩쓸고 간 서울 명동 거리, 구두수선 전문점 블랙샤인슈케어샵(블랙샤인)의 김태준(43, 남) 대표는 여느 때와 같이 가죽용 망치와 구두못을 이용해 묵묵히 누군가의 구두를 손보고 있었다. 김 대표는 슈케어샵에는 사람들이 각자의 사연이 담긴 구두와 부츠를 의뢰한다. 훼손 정도가 심한 것도 의뢰하는데 오게 된 사연은 각각 다르지만 말끔해진 신발을 받았을 때 손님들의 미소는 다들 비슷한 것 같다고 말했다. 블랙샤인은 슈샤인을 넘어 슈케어전문샵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통상 소규모 공방에선 굽을 갈거나 구두에 광을 내는 것에 그치지만, 블랙샤인은 낡고 망가진 가죽 구두부츠를 수선하고 고객의 요청에 따라 외관을 변경하는 커스텀까지 수행한다는 것이다. 김 대표는 특히 구두를 신으실 때 고무로 된 뒷굽이 갈리다 못해 가죽으로 된 힐까지 손상시키는 경우가 있어, 힐을 통째로 교체하거나 밑창의 모양종류를 바꾸기도 한다고 부연했다. ◆日서 배운 기술로 슈케어샵 오픈 김 대표는 과거 영업직으로서 구두를 즐겨 신던 본인이 슈케어샵 대표가 되기까지는 쉽지 않은 길이었다고 말했다. 20대 시절 김 대표의 첫 직장은 벤츠였다. 영업직이었던 그는 차량을 판매하는 일을 했는데 항상 구두와 정장을 입어야 했다. 그는 영업맨의 자존심은 구두라는 말이 있다며 당시 복장에 더욱 신경을 썼다고 회상했다. 김 대표는 첫 월급으로 테스토니(a.testoni)의 구두를 샀는데, 당시 50만원이 넘는 고가의 가죽 구두는 부담이 됐지만 비싸니까 좋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만 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는 관리에 대한 개념이 부족했고, 구두는 1년을 조금 넘기고 가죽이 터져버렸다. 김 대표는 그때를 떠올리며 그 구두는 관리만 제대로 했다면 아직까지 신을 수 있을 정도로 좋은 구두였다고 말했다. 이후 수년을 영업직으로 활동한 그였지만 영업을 계속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제2의 삶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고른 것은 음식점이었다. 김 대표는 요리할 줄 모르는 상태에서 사람을 고용하면 되겠지라는 생각이 실수였다며 당시 결혼도 하고 아기도 있었는데 완전히 망해버렸다고 말했다. 이어 내 기술이 없다면 어떤 사업을 하든 굉장히 리스크가 크고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이후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고, 일본 유학 시절 관심 있게 봤던 슈케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당시는 무일푼이었던 때라 회사에 다니고 있었던 아내의 지지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라고 부연했다. 김 대표가 일본에서 1년 동안 기술을 배우고 한국으로 돌아와 슈케어샵을 열었지만, 그에게 수입이 생기기까지는 2~3년이 걸렸다. 그는 일은 혼자 했기에 인건비는 없었지만, 가게에 월세를 내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며 2년 후에는 달에 50만원을 가져갔지만 이마저도 마이너스 통장을 채우기 급급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슈케어샵에도 구두 애호가 위주로 단골이 생기기 시작했고, 입소문을 타면서 수요도 늘어나 현재는 서울에만 3개의 체인점을 운영하고 있다. ◆대기업 회장님 구두, 의외로 평범 김 대표는 슈케어샵을 운영하면서 여러 분야의 손님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일례로 누구나 알만한 그룹의 직원이 그룹 회장 구두를 들고 오는 경우가 있다. 그는 보통 회장님들의 구두는 낡고 오래된 것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일반인들도 흔히 신는 평범한 것들이 많다며 그렇게 낡지도, 닳지도 않은 채 오곤 한다고 설명했다. 또 근대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아가씨의 촬영진이 구두를 복원해 달라며 찾아온 일화도 있었다. 김 대표는 어찌나 낡은 구두를 가져왔던지 완전 폐급이었다며 수선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영화에서 배우 김민희씨가 신었던 장면을 보니 신기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가죽은 시간 흐를수록 매력적 김 대표는 가죽으로 만든 구두나 부츠에는 색다른 매력이 있어 이를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고 했다. 그는 신발의 밑창을 바느질로 고정하는 굿이어 웰트 공법을 사용하는 구두들이 있다며 이런 구두들은 만들기가 어려워 가격은 조금 비쌀 수 있지만, 밑창만 갈면 다시 새 신이 되며 반영구적으로 신을 수 있다고 말했다. 또 가죽은 시간이 흐르면 색이 조금 짙어지고 부드러워지는 에이징 과정을 거치는데, 이 과정에서 착용자의 발 모양에 맞게 변형된다며 이런 과정을 거친 신발은 운동화만큼 편하고 애착이 생긴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요즘 나오는 신발은 대부분은 오래신지 못한다. 특히 시멘티드 슈즈(접착제로 밑창을 고정한 신발)는 구조상 밑창을 갈지 못해 오래 신기 어렵다며 가죽 구두나 부츠를 제대로 관리하면 가죽이 딱딱해지거나 터질 일도 없어 훨씬 오래 신을 수 있다. 본인에 맞게 에이징 된 부츠를 신어보고, 그 매력을 느낄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피플&포커스] 김호일 대한노인회장 “노인 행복한 세상 위해 ‘노령수당’ 보편화해야”

100세 시대라고 불릴 만큼 장수하는 시대가 왔는데 오래 사는 것이 기쁨과 축복이 되려면 경제적인 뒷받침이 따라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건강생활과 문화생활을 마음껏 즐길 수 있죠. 저는 노인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야 되겠다는 목표를 갖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65세 이상 노인이 800만명을 넘어서며 고령화 사회에 진입했다. 2025년에는 초고령사회에 들어설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하지만 빠른 고령화 속도에 비해 아직까지 노인복지에서 미흡한 점이 많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자료에서 한국의 노인 빈곤율은 43.4%(2018년 기준)로 OECD 회원국 중 1위를 기록했다. 회원국 평균 15.7%에 비해 3배가량 높아 심각한 상황이다. 노인 자살률도 OECD 회원국 중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노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누구보다 앞장서 뛰고 있는 인물이 있다. 바로 김호일 대한노인회장이다. 3선 국회의원(제14, 15, 16대, 마산 합포)인 김 회장은 지난 2000년 마지막 국회의원 당선 당시 우리나라가 유엔(UN)에서 지정해놓은 고령화 사회 진입 기준인 노인 인구 7%를 넘어선 것을 보게 됐다며 예감적으로 우리나라 노인 나이 증가 속도가 빨라지고 앞으로는 노인 문제가 큰 숙제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국회의원들의 연구 모임인 노인복지정책연구회를 창립했다. 그는 연구회 발기 취지문을 299명의 모든 국회의원에게 우편전화방문으로 전했고, 이에 여야 의원 100여명이 연구회에 동참했다. 김 회장은 국회의원을 그만두고 나서도 21년 동안 오로지 노인 문제를 다루는 데 전념해왔다. 김 회장은 제16대와 제17대 선거에서 낙방한 끝에 제18대 대한노인회장에 당선됐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다고 밝혔다. 긴 시간 끝에 회장직을 맡게 된 그는 대한노인회장으로서 노인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이를 이루기 위해 김 회장은 무엇보다 경제적 뒷받침 마련이 가장 중요하다고 봤다. 그는 경제적인 부분이 해결되지 못하면 오래 사는 것이 기쁨과 축복이 아닌 고통과 재앙으로 다가온다고 강조했다. 김 회장은 지난 1년간 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노인 주차공간 마련을 꼽았다. 그는 과거 전국 대의원들을 만나기 위해 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주차장에 장애인과 여성을 위한 공간이 마련돼 있지만 노인을 위한 주차공간은 없는 것을 봤다. 그는 곧바로 공간 마련을 건의했다. 김 회장의 제안을 받아들인 김포시와 창원시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 노인을 위한 주차공간이 만들어지고 있다. 노인 복지를 위한 김 회장의 아이디어는 또 있다. 그는 주말 노인 사원 제도의 도입을 위해 한국노인인력개발원 원장과 논의 중에 있다. 이 제도는 직장인들이 토요일과 일요일에 출근하지 않고 쉬는 기간에 노인이 근무하도록 하는 노인 일자리 창출의 일환이다. 예를 들어 주민센터에 컴퓨터를 다룰 수 있는 노인이 주말 근무를 하게 되면, 평일에 여러 문제로 센터에 방문하지 못하는 직장인의 불편을 해결할 수 있다. 노인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얻을 수 있고 60만원가량의 월급을 받으며 경제적 수익도 확보할 수 있다. 김 회장이 우리나라 노인복지의 변화를 위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노령수당의 보편화다. 김 회장은 노령수당 보편화에 대해 해도 되고 안 해도 그만인 선택이 아닌 반드시 해야 하는 필수라고 강조했다. 노인이 행복한 경제적 뒷받침을 위해 그가 처음부터 강조해왔던 것도 바로 노령수당 보편화다. 정부는 작년까지 기초생활 수급자에게 월 30만원을 지급해오다가 올해부터 기준을 변경해 하위 소득 70%의 노인에게 월 30만원을 지급하고 있다. 이러한 정부의 노력에도 김 회장은 미흡한 부분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는 해당 제도가 기초연금과 연결돼 있어 약간의 소득만 있어도 30만원이 그대로 지급되지 않고 공제된 상태로 지급된다며 말은 하위 소득 70%에게 30만원을 준다고 하지만 빛 좋은 개살구가 되고 실제로 다 받는 경우는 많지 않다고 지적했다. 노인이 자녀에게 용돈을 받는 경우에 대해서도 월급을 받아 살아가는 가장일 경우 자기 자녀의 학자금이나 결혼 자금 같은 것들도 비축해야 하는데 월급쟁이 봉투로 60만원이 빠져나가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설명했다. 김 회장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노령수당을 보편적 복지의 개념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내년 당선을 목표하는 대통령 후보들은 월 50만원부터 시작해 매년 10만원씩 인상해 임기가 끝날 때까지 최대 월 100만원의 노령수당이 지급되도록 하겠다는 선거 공약을 내걸어주시기 바랍니다. 한 나라의 국민이자 노인의 대표로서 그가 대선 주자들에게 전한 말이다. 노인이 행복한 노후를 만들고 싶다는 김 회장은 끝으로 국민에게도 이 같은 말을 전했다. 노인 문제는 국민 전체의 문제입니다. 노인이 되고 싶어 노인 된 사람은 없습니다. 세월에 떠밀려서 만 65세의 노인이 되는 것입니다. 64세는 1년 후 노인이 되고, 63세는 2년 후 노인이 됩니다. 65세 이상은 노인 정회원이고 나머지는 예비 노인입니다. 내가 은퇴했을 때 사회 보장이 바로 지금의 노인 문제라는 인식을 갖고 젊은 사람들도 함께 노인복지를 응원하고 연구하며 협력하길 바랍니다.

[피플&포커스] 재범 방지 ‘미란다 불교 민영교도소’ 건립 박차… “수용자 처우개선, 사회복귀 관리”

정부의 교도소 민영화 방침에 국내 교정행정이 일대 전환을 맞고 있다. 우리나라 교도소는 과밀수용의 문제점을 안고 있으며, 이러한 열악한 환경에 처하다보니 결국은 그 자리가 새로운 범죄의 온상이 되고, 한번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다시 범죄를 저지르는 이른바 재범률도 70% 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 20대 전후의 떼강도 대다수가 감방에서 만나 범죄 수법을 서로 가르치고 배워 출소한 이후 몰려다니는 이른바 감방동기생이 생기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교도소의 교정행정이 계속 개선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과거의 형무소 수준에 머물고 있으며, 또한 교도소에서 사회정착을 위한 직업교육을 실시하고 있지만 보다 적극적이고 근본적인 개선안이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교도소 과밀화 따른 인권침해 해결에 나서 이에 불교계에서도 이 같은 문제점을 다소나마 해결하고자 재범이 없는 불교 민영교도소를 설립 추진하게 됐다. 그 중심에는 진각미란다재단의 이용도 이사장이 있다. 이용도 이사장은 불교계 진각미란다 민영교도소 건립을 위해 오래 전부터 재단설립과 함께 적정한 부지 선정 및 필요한 재원 마련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 결과 현재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소재에 약 3만평의 부지를 확보했다. 충청북도와 법무부의 긴밀한 협의를 거쳐 도시계획 시설결정 등을 거쳐 내년 1월 공사를 진행하기로 확정했다. 이에 앞서 올해 12월 12일부터 20일까지 열리는 평화의 길 국제대전에 각국 귀빈과 고승을 초대한 자리에서 진각미란다 민영교도소의 건립을 선포하는 출정식을 가질 예정이다. 교도소 부지에 들어설 교도소 시설은 수용사동(거실), 작업장 및 직업훈련시설, 접견실, 교육집회시설, 위생의료시설, 운동장, 취사장, 후생복지시설(목욕탕, 이발관 등)이며, 사업비는 700억원으로 잡혀있다. 이 이사장은 진각미란다 불교민영교도소의 설립 취지에 대해 범죄 재범의 제도화를 목적으로 하며 과밀도 형식의 수용생활과 비생산적 운영 방안을 활기 넘치는 생산적 수용 시설로 완성해 시대적 흐름에 걸맞은 방안을 프로그램화 하는 한편 불교의 가르침을 이 시대에 가장 어두운 자리에 포교의 문을 열고 어둠이 아닌 밝음으로 인도하는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일익을 담당하고자 한다고 소개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범죄 발생은 꾸준한 증가 추세에 있으며 이로 인해 교정시설의 과밀수용을 촉진하고 있다. 교도소의 과밀화는 수용자의 인권침해 등의 폐해를 초래하고 있다면서 또한 가장 취약점으로 지적되는 점이 재소자 출소 후의 관리대책이 미흡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불교계의 사회적 기업을 적극 활용해 불자 출소자들의 재범 방지에 힘쓰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양질의 수용생활을 완성하기 위해 명상수련 시스템을 도입하고, 불교적 가르침에 의한 기초적인 마음수련으로 출소 이후에도 사회적응도를 높이고 사회기초 정착금 제도를 만들어 운영해 기술적 종교적 인성을 높여나가는 프로그램을 개발 육성할 방안으로 추진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또한 미란다 불교민영교도소는 그 운명에 있어 민간경영 기법과 회계 관리방법 등을 적용함으로써 업무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제고하고자 방안을 강구하고, 수용자 관리, 교화, 상담, 교육 훈련 등에서 민간의 탄력적인 프로그램 개발을 유도해 수용자의 처우 향상과 사회복귀 추진을 위함에 두고 그 계획을 추진할 계획이다고 설명했다. ◆범죄재범 제로화 목표 위해 사업 적극 추진 이 이사장은 범죄재범의 제로화 방안의 목표를 완성하기 위해 수용기간 일정의 금액을 저금해 출소 후 사회정착 기초자금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 축조된 기술력으로 사회적 생산을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취업을 알선해 계속적인 지도와 관리로 조금도 범죄적 마음이 유발되지 않도록 후속 조치를 취한다. 또 기업과 연계해 운영을 하면 수용인들이 놀고 있는 인력이 아닌 생산성을 추구하는 수용생활로 이끌어 사회의 기초적 성장생활을 만들어 나가도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특히 이 이사장은 범죄자라 외면하지 않고 가족과 형제처럼 따뜻하게 받아드릴 줄 아는 것이 건강한 사회가 되는 첫 걸음이다라며 사업추진 목적을 말했다. 이 이사장이 이처럼 민영교소를 추진해오게 된 계기는 11년 전이다. 지난 2010년 진각사(김포시 월곶면 소재) 큰스님으로부터 민영교도소 설립계획을 들었다. 하지만 장소 물색부터 쉽지 않았다. 김천에서 의성, 그리고 보은까지 오는 데 걸림돌도 많았고 마음고생도 있었다. 그간 진각사 큰스님으로부터 18억원이라는 자금은 받아놓은 상태였고 2012년 3월 재단까지 설립했지만 차일피일 시기가 늦어졌고 그 사이에 큰스님은 작고했다. 이 이사장은 큰스님의 유지를 받들고자 노력한 덕분에 충북 보은군에 12만 8천평의 부지를 매입할 수 있었다. 민영교도소는 1년에서 3년 미만의 형량을 받은 수형자들만 생활할 수 있다. 이 이사장은 민영교도소 설립의 첫 번째 목적은 이들을 교화해 재범을 방지하는 것이다. 또한 교도소 안에 공장을 설립해 그들이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고 매달 일정금액의 급여를 받아 출소시 목돈을 만들어 자립 기틀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고 말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12년간 추진해온 그는 기술과 돈이 있으면 재범이 일어나지 않고 그들에게도 삶의 희망과 의욕이 생길 것이라고 믿고 있다. 민영교도소를 설립하기 위해서는 먼저 민간업체가 자기부담으로 교도소 부지를 확보한 후 건물을 신축해 국가에 기부체납하고 국가로부터 수용자를 위탁받아 운영하는 포괄위탁방식이기에 재원확보가 가장 어려웠다고 그는 그간의 심경을 밝혔다. 그는 앞으로 교정포교에 대한 인식을 제고시켜 불교 각 종단 차원에서 지원과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불자들도 함께 참여하는 모금 운동도 병행할 계획이며 또한 교도소 건립 추진과정에서 교도소 설립에 반대하는 일부 지역주민들도 있겠지만 주민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 주민이 공감할 수 있는 주변지역 개발도 적극 추진할 계획이다고 강조했다. ◆다양한 후원사업 적극 전개 이밖에도 그는 나라와 사회 발전을 위해 다양한 사회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새로운 정신문화 창조와 계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사회 각 분야에서 맡은 바 직분을 충실히 수행하고 노력하는 사람을 찾아 그 공로를 치하하고 표창하는 시상식(충효대상, 시민대상, 위대한 한국인 대상 등) 행사를 추진해 건강하고 밝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힘쓰고 있다. 또 ㈔한국백혈병새생명후원회 회장직을 맡아 백혈병과 소아암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을 위해 후원금을 전달하고 사람과 나눔의 생명운동을 전 국민적 차원에서 십시일반으로 모우는 운동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또한 ㈔경사 변순기봉암 변진설 기념 장학재단을 설립해 충효예를 묵묵히 실천하고 있는 청소년을 발굴해 장학금을 지급하는 등 역사의식 고취와 문화계승 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야구 스포츠 종목을 통해 유소년 선수들에게도 꿈과 희망을 전달하고 있다. 백인천 전국클럽야구단과 인연을 맺고 본격적인 생활야구에 빠져 유소년세계야구클럽 야구대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고, 이제 그 범위는 더 커져 세계 18개 나라에서 참가하는 대규모 대회를 앞두고 있다. 그리고 충북 보은군에 한국불교 미란다 민영교도소 설립을 위해 열정을 다하고 있다. 백인천씨가 만든 전국 클럽야구단과 인연을 맺은 그는 건강이 안좋은 백씨로부터 야구단을 활성화시켜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에 중국, 대만, 홍콩 등에서 유소년 야구단이 참가해 비교적 소규모의 대회를 개최했다. 작게 시작했지만 점차 한국, 홍콩, 대만, 중국, 일본, 필리핀까지 총 6개국이 참가해 대회 규모는 점점 커졌고, 올해부터는 18개국이 초청돼 경합할 예정이라 대규모 국제행사로 확장될 전망이다. 이 이사장은 코로나19와 함께 마스크 제조사업도 시작했지만 크게 이익을 보지 못했고, 이제는 나눔의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보은군 노인복지회, 김포 감정중학교 등 중고교에 6천장 정도를 기부했으며, 그 외에도 서울경찰청과 기동대에도 전달했다. 지금까지 그의 크고 작은 봉사활동은 200여개의 감사패와 100여개의 표창장으로 보답을 받았다. 이 이사장은 앞으로 코로나19가 종식돼 모든 국민들이 건강을 되찾길 바라며 특히 자영업자들에게 좋은 날이 오길 바란다는 응원의 말도 잊지 않았다.

[피플&포커스] 혼다 토모쿠니 박사 “피를 나눈 우정의 나라 한국서 남북통일 꿈꿔”

한 번의 헌혈로 4명을 살릴 수 있다고 하는데 저는 80회째이니까 벌써 수백명을 살린 게 되지 않겠어요? 제 피가 한일관계에 있어 화해와 우정을 다지게 되는 피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올해로 34년째 한국생활을 하면서 남다른 한국사랑을 실천하는 일본인이 있다. 그는 한국인도 쉽게 얻지 못하는 독도명예주민증을 일본인 신분으로 소유한 특이한 이력도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종결되면 한국국적에 비해 제약이 없는 일본국적으로 자유롭게 북한을 왕래하며 통일의 가교 역할도 하고 싶다는 그는 바로 혼다 토모쿠니(60) 박사다. 봉사하는 기쁨, 위하여 사는 삶을 인생의 모토로 삼고, 외발 자전거처럼 한 번 멈추면 쓰러질 것을 알기에 열정과 초(超) 긍정 마인드로 힘차게 달려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자신감 넘치게 말하는 혼다 박사를 지난 23일 기자가 만나봤다. 혼다 박사는 일본 초등학교 2급, 중학교 1급, 고등학교 2급, 특수학교 1급 교사 자격에 서울대 국어교육학 석박사, 서강대 일본어 강사, 서일대 교수, 배화여대 겸임교수, EBS 일본어 회화 강사, 대한민국 국회 일본문화특강 강사, 대한적십자 헌혈봉사 50회 금장 수상, UN합창단 한국실행위원회 국제협력위원장 등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이력을 가졌다. 특수교육자의 집안에서 태어나 자신도 교육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그가 어떻게 일본이 아닌 한국에 정착해 이같이 다양한 이력을 가지며 지금까지 살게 된 것일까. 혼다 박사가 한국을 처음 방문한 시기는 지난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학교 교사였던 그는 동료 교사들과 함께 답사 차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던 그는 38선과 제3땅굴 등을 보며 한국이 분단국이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혼다 박사는 그때 한국에서 88올림픽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으며 한국이 기회의 땅이구나라고 생각했다며 그러던 찰나 울고 넘는 박달재로 유명한 충북 제천의 박달재에서 아내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계기로 한국에서 살 것을 결심하게 됐다고 했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혼다 박사는 학교 교무부장으로의 승진도 마다한 채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고국을 떠나 한국으로 넘어왔다. 하지만 일본인으로서 한국에서 살아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낯선 사람에게 난데없이 뺨을 맞기도 했다. 사랑하는 아내와의 결혼도 아내 집안에서의 반대로 쉽게 이룰 수 없었다. 아내의 집안에서 그는 예비사위가 아니라 속칭 일본놈이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다. 이미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한국에 온 것이기에 다시 일본으로 갈 순 없었다. 시간이 걸렸지만 그는 결국 아내 집안 식구들의 마음을 사 결혼에 골인했다. 그에게 한국이 실제 기회의 땅이 된 사건도 찾아왔다. 한국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던 IMF 외환위기로 모두가 낙담하고 좌절할 그 시기가 오히려 그에겐 기회였다. 혼다 박사는 대규모 실업 사태 속에 넥타이 부대들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일본어를 공부하기 위해 학원으로 몰려들었다며 당시 일본어 학원 강사였던 나는 몰려드는 수강생으로 인해 아침 6시부터 밤 11시까지 쉴 틈 없이 일했다. 그때 꼬박 3년을 일해 집도 마련하게 됐다고 했다. 학원생 중엔 배화여대 교수도 있었는데 그 교수는 혼다 박사를 보고 학원에 머무를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 그에게 대학에서 일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제안을 받아들여 교수의 길을 걷기 위해 학위를 따러 서울대 대학원에 입학했고 국어교육학을 전공하게 됐다. 이후 석박사 학위를 받아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게 됐다. 서울대에서 공부하는 7년 동안엔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다녔다. 혼다 박사는 이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서울대에서 헌혈을 시작했다. 이것이 계기가 돼 지금까지 80회째 헌혈을 하고 있다. 그는 70세까지 헌혈 100회를 목표하고 있다. 혼다 박사는 내 피가 한국인의 몸속에 흐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서 이것이 한일관계에 있어 화해와 우정을 다지게 되는 피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결코 쉬운 길은 아니었지만 돌아보면 한국에서 얻게 된 것이 많다는 혼다 박사는 한국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독도를 사랑하는 마음, 통일에 대한 염원도 품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일본인 신분임에도 독도에 입도하거나 선회 관람한 사람 등 일정 조건을 갖춘 사람에게만 지급되는 독도명예주민증을 소유하고 있다. 독도에 입도해 정확한 발음으로 애국가를 불러 함께 간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지난달엔 독도의 날 행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혼다 박사는 한국인으로 귀화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선 한반도 통일을 언급했다. 그는 (국적을) 일본인으로 있어야 북한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며 코로나19가 잠잠해지면 남한과 북한을 오가며 가교 역할도 하고 싶다고 말했다. UN합창단 한국실행위원회 국제협력위원장이기도 한 혼다 박사는 UN합창단과 함께 평양에서 공연하는 목표를 이루고 싶다며 당장은 어렵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지금은 (통일을 앞두고) 남북한이 진통을 겪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통일은 반드시 올 것이라고 했다. 저는 제 자신을 소개할 때 반반치킨과 외발 자전거 타기를 말합니다. 반반치킨이 양념 반, 후라이드 반인 것처럼 제 인생은 일본생활이 반, 한국생활이 반입니다. 외발 자전거 타기는 멈추면 자전거가 넘어지기 때문에 계속 움직여야 하듯 제 인생도 멈춤 없이 계속 달려왔습니다. 저의 삶은 앞으로도 계속 멈춤 없이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피플&포커스] 김득의 금융정의연대 대표 “금융사고 예방하려면 종합검사 유지해야”

최근 금융감독원 종합검사가 폐지 수순을 밟고 있다. 정은보 신임 금융감독원장이 위규사항 적발이나 사후적 처벌보다 금융사고 사전 예방을 위한 금융사 검사를 상시 진행하겠다고 밝히면서다. 금감원은 대내외 경제금융환경의 불확실성이 커진 만큼 금융사의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고 설명했지만, 금융시민단체는 금감원 본연의 기능을 포기하는 동시에 금융소비자 보호에 역행하는 조치라고 거세게 비판하고 있다. ◆종합검사 유보는 억제력 포기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못 하는 이유가 뭡니까. 핵이라는 무기가 억제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포기를 못 하는 것인데, 지금 금감원은 억제력을 가진 종합검사를 포기하고 사전예방 조치를 하겠다고 나선 겁니다. 김득의 금융정의연대 대표는 서울 영등포구 소재 사무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진행하며 금감원장의 결정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조치라고 지적했다. 금융정의연대가 추정한 바에 따르면 사모펀드 사태로 인해 약 6조 5000억~7조원의 피해가 발생했다. 금액 규모도 크지만 손해를 입은 금융소비자도 상당하다. 김 대표는 금감원이 이에 대한 논의를 금융지주 회장과의 간담회에서 진행했어야 함에도 역으로 금융사가 원했던 선물 보따리를 풀어준 격이라며 꼬집었다. 그는 정 원장이 사전예방을 하겠다고 밝혔는데 이를 위해선 비대칭적으로 힘이 있어야 한다며 종합검사가 금감원이 가진 사전예방을 위한 억제력으로 적용되는데, 이를 풀어주겠다 하니 금융지주 회장들의 입가에 미소가 다 번졌을 것이라며 분통을 터트렸다. 김 대표는 지난 2013년 금융정의연대 설립 당시부터 대표로 일해왔다. 그는 안진걸 당시 참여연대 사무처장의 제안으로 금융정의연대에 참여했다. 김 대표가 금융사를 다녔고, 금융소송 경험이 높은 것에 대해 좋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흥국생명 재직 시절 모회사인 태광그룹 이우진 회장의 비리를 검찰에 제보해 보복성 징계를 받기도 했다. 징계 이후에도 노조 활동을 계속하다 2005년에는 해고를 당하기까지 했다. 이후 금융사를 대상으로 소송을 진행하면서 노조 활동만으로는 금융 문제의 핵심을 다루기 어렵다고 생각한 것이 시민단체활동에 적극 참여한 계기가 됐다. 김 대표는 특히 사모펀드 사태 등 금융사고에 주로 관심을 갖고 금융소비자의 입장을 대변해왔다. 굵직한 금융사건사고가 터질 때마다 그는 피해를 본 소비자들을 위해 발 벗고 나섰다. ◆머지 사태, 금감원 무능 보여줘 머지포인트가 전금법 대상인지 아닌지 몰랐다면 금감원이 무능한 것이고, 불법인지 알고도 봐줬다면 머지 사태의 책임은 머지포인트 운영사와 이를 예방하지 못한 금감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도 예방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금융사고를 사전 예방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지 모르겠어요. 사실상 금감원의 무능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번 사태라고 생각합니다. 김 대표는 대규모 환불 대란을 빚은 머지포인트 사태에 대해 금감원의 무능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라고 평가했다. 그는 머지 사태는 금감원이 적발을 안 한 것이라며 전금법상 머지포인트는 금융당국에 전금업자로 신고해야 했음에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미 불법회사인데, 금감원은 고발대상 유무를 논의하며 시간을 끌어 피해자를 양산했다고 비판했다. 다양한 제휴처에서 최대 30% 할인율로 인기몰이를 했던 머지포인트는 지난 8월 돌연 서비스를 중단했다. 이후 포인트 사용처를 음식점업으로 한정해 소상공인과 소비자의 피해를 낳았다. 이에 머지 사태와 관련, 한국소비자원이 소비자분쟁조정위원회에 신청한 집단분쟁 조정건수는 2달 만에 8200건을 넘어섰다. 분쟁조정은 통상적으로 소비자가 신청하지만,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소비자원이 직접 분쟁조정위에 신청했다. 접수된 상담 건수가 많고 신속한 처리가 필요한 사안이라고 판단해서다. 다만 피해 보상 가능성은 사실상 미지수다. 머지포인트가 서비스 정상화를 약속했지만 여전히 상품권을 사용할 수 있는 가맹점은 소수에 그치고 있다. 또 머지포인트가 운영을 중단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어 소비자의 불안이 커지고 있다. ◆실수요 대출, 내년에도 못 막을 것 실수요 대출을 내년부터 막는다는 말이 나오고 있지만, 이를 막으면 내년 대선과 지자체 선거에서 심판받을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투기를 위한 대출과 2주택자 대출을 막는 것은 누구나 동의하죠. 그러나 실수요자 대출을 내년에도 예외로 하지 않는다면 지지자 내에서도 반대투표가 나올 수 있다는 점에서 이를 막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달 26일 금융당국이 가계부채 관리 강화방안을 발표한 가운데, 오는 12월 말까지 전세대출이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 대상에서 빠진다. 그러나 내년에도 가계부채 증가세가 꺾이지 않을 경우, 전세대출이 DSR 40% 산정에 포함될 수 있어 실수요자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 전세대출을 포함한 내년 가계부채 증가율 목표는 4~5%대다. 올해 증가율이 약 7.5%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 것을 감안하면 반절 이상을 줄여야 목표치 달성이 가능한 것이다. 사실상 올해가 전세대출 막차라고 여기는 세입자들은 서둘러 전셋집 구하기에 들어갔다. 가뜩이나 공급이 부족한 전셋집의 수요가 많아지면서 연말 전세값의 오름세가 더 가팔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김 대표는 최근 부동산 가격이 가파르게 오르면서 전세대출과 부동산 대출이 증가했는데, 정부가 총량규제를 펼치다 보니 실수요자가 대출이 필요해도 받을 수 없는 경우가 생겼다며 실제 전세자금 수요자, 첫 주택 구입자 등은 규제에서 예외로 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부동산 가격은 2018년 이후 폭등해 2배 이상 오른 반면, 은행권에 할당된 가계대출 총량은 부동산 가격 폭등 전과 같은 수준이라며 은행에서 정한 한도로 수도권 등에서 주택을 살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 자금이 필요한 경우 정책자금대출을 통해 한도를 정하거나 맞는 정책을 내놓는 것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금융소비자 접근성 위해 지점 남겨야 저도 인터넷을 할 줄 알지만, 필요한 업무에선 은행을 내방하거든요. 옛날만 해도 동네 앞에 있어서 그냥 걸어가면 됐는데, 지금은 버스를 타고 가야 합니다. 이런 것처럼 인구가 없다고 은행 점포를 폐쇄하면 강원도의 경우, 시민들이 산을 넘거나 경기도, 충청도까지 가서 은행 업무를 봐야 하는 상황이 생깁니다. 최근 4차 산업혁명을 비롯해 인구가 전반적으로 감소하면서 은행들이 점포 폐쇄를 선택하고 있다. 이에 따라 최근 4년간 문을 닫은 은행점포는 472개로, 내년 초 100개가량 추가로 은행지점이 사라질 예정이다. 특히 한국씨티은행이 소매금융을 청산하기 위해 지점을 70% 이상 폐쇄하고 단계적 폐지에 들어가면서, 씨티은행을 이용하던 고객이 불안을 호소하고 있다. 은행법에선 최소한의 업무를 위해 적정 점포를 유지할 것을 규정했지만, 적정 점포의 수를 명시하지 않아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김 대표는 노사정과 소비자사회단체가 서로 만나 최소 점포를 유지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씨티은행의 단계적 철수를 계기로 다른 시중은행도 지점 폐쇄와 인터넷은행 전환으로 방향을 틀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씨티은행이 돈 되는 기업금융만 남기고 소매금융을 없애겠다고 하고 있는데, 다른 시중은행이 안 할 이유가 없습니다. 만약 소매금융을 담당하는 점포를 조금 남기고 모두 인터넷으로 금융소비자의 접근성은 어떻게 됩니까. 1980~1990년에 제정된 은행법으로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은행의 비대면 전환으로 발생하는 금융사고도 많습니다. 간편함은 좋지만, 이 간편함으로 금융사고가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사고를 예방할 장치가 필요합니다.

[인터뷰] 최영수 도전한국인 중부지역본부 회장 “소외된 이웃에게 꿈과 도전정신을 심어주고 싶어요”

여기 일상에서 봉사와 나눔을 실천하며 이웃사랑을 전파하고 있는 이가 있다. 주어진 환경에 안주하거나 포기하는 것이 아닌, 끊임없는 도전정신으로 꿈과 희망을 품을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주는 디딤돌 같은 존재. 바로 도전한국인 중부지역본부 최영수 회장이다. 인생의 삶 자체가 도전의 연속입니다.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 씨앗만이 아름다운 봄꽃을 통해 소중한 열매를 맺듯 시련을 이겨낸 사람 또한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전한국인 중부지역본부 최영수 회장의 말이다. 더불어 최 회장은 한 사람의 발걸음보다 열 사람의 발걸음이 소중한 가치를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말한다. 1957년생인 최 회장은 검정고시 합격 후 서울대학교 부설 방송통신대 행정학과 2학년을 마쳤다. 이후 복싱선수, 한국권투위원회 총괄 본부장, 대전광역시 생활체육 서구연합회 복싱연합회 회장, 챌린지 뉴스대표, 건설교통신문 충청지사장 등을 역임해 왔다. 최 회장 역시 살아온 삶 자체가 도전의 연속이었던 만큼 이웃과 지역 사회에 희망과 도전정신을 심어주는 데 앞장서고 있다. 그가 몸담고 있는 도전한국인 역시 일상의 삶 속에서 크고 작은 도전을 해나가는 이오니아(개척자)를 발굴하고 도전정신 확산을 목표로 설립된 NGO 법인이다. 이와 관련 그가 회장으로 있는 도전한국인 중부지역본부는 오는 12월 8일 대전시 교육청 본관 대강당에서 도전 장학금 시상식을 가질 계획이다. 이날 장학금은 중고등학생, 체육특기생, 경제 사정 곤란자 등 20여명에게 총 1000만원의 장학금을 수여한다. 지역 사회의 크고 작은 행사 때마다 후원을 아끼지 않는 이유에 대해 최 회장은 나 혼자가 아닌 이웃과 더불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추구한다며 평소에 힘이 닿는 대로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 사회가 너무 어렵다. 코로나19 시대에 서민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며 남은 인생도 그렇게 살고 싶다며 말을 건넸다. 최 회장은 지난 3월에 오랫동안 교직생활을 한 이송원 전 교감과 함께 대전시노인복지관을 방문해 (사)대한노인회 대전시연합회, 대전시노인복지관, 샛별재가노인복지센터 독거노인을 위해 약 1억 500만원 상당의 발열 방한내의 3000벌을 기부했다. 4월에는 청년희망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국제 스포츠공학원 최비송 원장과 함께 실버랜드 어르신들에게 발열내의를 기증해 지역 사회에 온기를 전하고 있다. 험한 세상에서 부대끼고 시달리며 살아가는 인생 자체가 도전의 연속이라고 말하는 최영수 회장. 그는 편안하고 안정된 현실에 안주하기보다는 조금은 고단하더라도 끊임없이 도전하며 정의롭고 의리 넘치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고 전했다. 사람이 곧 희망이고 꿈이며 국력이라고 믿는 그이기에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웃과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또한 이제 60대 중반인 최 회장은 이전보다 더 노력하고 성실하게 진돗개 근성으로 인생의 승리자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한편 최 회장은 현재 셀트리온화장품 대전 대리점 및 정관장 영동대리점 공동 대표이사이자 4전 5기 신화창조의 주인공인 홍수환 복싱 챔피언의 특별 보좌관을 맡고 있다. 그가 이 일을 하는 이유도 어려운 아이들을 돕고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다. 마지막으로 최 회장은 필리핀 대통령으로 출마한 복싱 영웅 매니 파퀴아오를 2022년 5월 필리핀에서 만나 한국과 필리핀 간의 정치경제교육스포츠와 관련해 전반적으로 이야기할 계획이다.

[피플&포커스] 에어로빅에서 ‘애니멀플로우’까지… 이제승 “빨리 보단 꾸준하게”

모든 운동은 각각의 목적과 장단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운동이 일상생활에서 도움을 주고 라이프스타일의 한 부분으로써 안착한다면 삶이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고, 저는 이를 돕고 싶습니다. 기능성 전신 운동 애니멀플로우(Animal Flow) 마스터 이제승 트레이너는취재진이 운동에 대한 철학을 묻는 말에 멋쩍게 웃으며 이같이 말했다. 팬데믹으로 확산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생활양식 전반에 변화가 생겼다. 일각에선 코로나19 이후 대면 활동이 줄었고, 앉아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퇴행성 질환자가 늘어났다는 분석이 나온다. 또 이를 예방하기 위한 기능성 운동인 필라테스, 요가 등을 찾는 수요가 늘어날 것이란 전망이 제기되고 있다. 맨몸운동을 좋아하고 가르치는 전문가인 이 트레이너는 코로나19로 실내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늘어난 것과 관련해 애니멀플로우가 신체를 골고루 발달시켜 생활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 2014년 미국 LA에서 애니멀플로우 자격증을 취득한 후, 국내에서 해당 세미나와 워크샵을 진행하면서 애니멀플로우 강사를 양성하고 있다. 또한 퍼스널 트레이너로서 사람들에게 라이프스타일로써의 운동을 전하고 소통을 이어가고 있다. 애니멀플로우란 동작이 동물의 움직임을 닮았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진 맨몸운동의 일종이다. 플로우(flow, 흐름)라는 이름처럼 여러 가지 동작을 물 흐르듯 이어서 수행하기 때문에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마치 무술 같다고 말한다. 특히 애니멀플로우에는 네발로 기는 자세를 기본으로 하는 동작들이 많아 신체의 협응력을 키워주고, 코어(척추골반복부의 근육)와 함께 온몸 구석구석을 단련시켜준다. 이 트레이너는 운동은 결국 몸을 쓰는 일이고, 트레이닝은 이를 잘 쓰게 만드는 것이라며 다이어트나 근력을 키우는 것도 좋지만, 일상과 동떨어진 운동보다는 일상의 활동을 더욱 잘 할 수 있도록 개선하는 운동이 삶을 직접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전국 1등 선생님이란 역설을 발판으로 그는 자신이 애니멀플로우 같은 맨몸운동 전문가가 된 과정을 두고 내 삶을 돌아봤을 때는 다른 사람들보다 느리게 살지 않았나 했지만, 지금은 그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고 말했다. 성룡의 폴리스 스토리(1985년)를 보며 맨몸운동에 대한 꿈을 키운 이 트레이너는 어린 시절 항상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란 생각을 했다. 그는 학창 시절 합기도를 했고, 20대에는 7~8년간 스포츠에어로빅 선수로서 활동했다. 하지만 스포츠에어로빅은 2003년부터 서서히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져갔고, 그는 생업을 위해 퍼스널 트레이너로서 활동을 이어가야 했다. 이 트레이너는 스포츠에어로빅 선수 시절을 회상하며 빠른 템포에 음악과 퍼포먼스는 지금도 매력적이지만, 협회가 부실했고 프로스포츠로써 성장하지 못해 부득이하게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합기도에서 스포츠에어로빅으로, 또 에어로빅의 유행이 끝나고 퍼스널 트레이너로서 활동을 이어가야만 했을 때도 긍정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 트레이너는 2000년대 초반부터 국내에도 헬스장이 많이 생기기 시작했다면서 30대 중반의 트레이너도 거의 없던 시절, 업계에선 30대가 되면 체육관을 열고 관리직으로 일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그는 이 같은 분위기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진 않았다. 이 트레이너는 그때의 난 운동지도자는 수명이 짧다는 얘기가 싫었고, 미개척 분야이지만 오래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면서, 자신을 두고는 대단한 능력이 없었지만, 좋아하는 것을 계속 찾아다니고 시도해보는 근성은 있었다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언젠가 들었던 전국의 1등 선생님이 누구냐는 역설에서 많은 위로를 받았다고 했다. 최고의 선수는 정해져 있지만 최고의 교육자는 한 사람이 아니며, 최고가 아니더라도 트레이너로서 나를 찾는 수요가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는 것이다. 그는 2014년 유튜브를 통해 접한 애니멀플로우에 매력을 느꼈고, 곧장 미국 LA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고 전했다. 이 트레이너는 합기도, 스포츠에어로빅으로 맨몸운동이 익숙했고, 기구도 필요 없이 공간만 있으면 할 수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면서 요가필라테스 등과는 달리 힘과 스피드가 느껴진 부분도 좋았다고 말했다. ◆운동선수에서 교육자로서 한 발자국 이 트레이너는 운동선수에서 교육자로서 활동하면서, 배움과 소통에 대해 돌아보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운동을 배울 때는 쉽고 재밌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힘들지만, 결국은 몸에 익고 잘하게 된다면서도 수행하는 입장에선 내가 노력함에 따라 결과가 나오는 것과 달리 알려주는 입장에선 고려할 게 많다고 말했다. 교육생의 신체 구조와 생활방식, 식습관, 목표 등이 달라 지식을 획일적으로 적용할 수 없고, 소통을 통해 이를 맞춰가야 한다는 게 이 트레이너의 설명이다. 그는 애니멀플로우를 가르치면서도 사람마다 신체 구조가 조금씩 달라 해부학을 접목해 자세를 교정해야 하며, 근본적인 라이프스타일 개선을 위해 운동뿐 아니라 식습관과 꾸준함에 대해서도 생각을 나눠야 했다고 설명했다. 이 트레이너는 이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 그런 일을 계속 찾았고, 잘되든 안 되든 꾸준하게 했다면서 다른 사람보다 느리게 살았지만, 현재에 만족한다. 빠르게 가는 것도 좋지만 오래 버티는 사람이 더 낫지 않을까 한다고 전했다.

[피플&포커스] “약 2만명 우리나라 간이식인 권익보호 위해… 혜택 누리게 하고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모든 일상이 멈췄지만 협회 회원들은 별일 없이 건강한 모습으로 잘 지내길 바라요. 코로나19 사태 이후 한국간이식인협회 회원들의 모임은 멈춤 그 자체였다. 이춘실 한국간이식인협회 수석부회장은 24일 인천 중구 연안동에 있는 고은장례식장에서 이같이 말했다. 협회에서 간이식 환자들의 권익 보호와 장기기증에 대한 인식변화, 관련 정책 마련을 위해 봉사하는 그는 부인과 함께 장례식장을 직접 운영하고 있다. 이 수석부회장은 우리 간이식인들은 코로나 이전엔 행사나 모임을 통해 회원 간 친목을 다지고 즐겁고 신나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며 현재 코로나로 인해 모이지 못해 힘들고 어렵지만 회원들이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건강한 삶을 지켜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 수석부회장은 김동식 고려대 안암병원 간담췌외과 교수의 권유로 간이식 환자 모임에 들어가 12명의 환자로 간사랑회가 결성됐다. 이것이 한국간이식인협회와의 첫 인연을 맺게 된 계기였다. 한국간이식인협회는 2009년 7월 31일 보건복지가족부(현 보건복지부)의 비영리 민간단체로 승인을 받아 활동하고 있는 단체다. 간이식인들의 권익 보호와 장기기증자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2001년 5월 간이식 수술을 시행하고 있는 강남성모병원, 삼성서울병원, 서울대병원, 서울아산병원, 신촌세브란스병원 등 5곳의 간이식인들로 협회를 처음 구성했다. 이 수석부회장은 우리나라의 간이식 수술은 1988년 처음 시작했다며 약 2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간이식 수술을 통해 새생명을 얻어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당초 간이식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의료진은 말기 간 질환 환자들을 위해 최첨단 의료기술인 간이식 수술을 도입했고, 끊임없는 연구로 많은 말기 간 질환 환자들에게 새 생명을 선물로 주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의료진의 노고와 비통한 상황에서도 장기기증을 해주신 뇌사자와 그 가족들의 희생과 사랑으로 간이식인들은 다시 태어난다고 말했다. 이 수석부회장은 협회 초기 회장인 이상준 회장을 떠올리며 이 회장님은 협회 초기에 간이식인들의 의료보험 정책 개선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신 분이라며 간이식인 의료보험 문제 해결을 위해 애쓰셨는데 당시 뇌사자에 대한 관련법이 제정돼 있지 않았기 때문에 법적인 근거가 없어 의료보험 적용이 안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 전 회장님과 함께한 많은 분이 이뤄낸 간이식인의 권익 보호와 정책 기반 마련 등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런 노력의 결실로 2001년 7월 1일 국민건강보험재정안정 및 의약분업 정책 종합대책이 발표됐다며 그간 50%의 보험적용이 됐던 고가의 혈액제제 헤파빅이 20%로 경감됐다. 현재는 10% 본인 부담이라고 설명했다. 이 수석부회장은 우리나라의 모든 간이식인은 5년 후 중증환자로 산재특례 대상자로 분류돼 관리받는다면서 정부에 간이식 환자는 모두 등록돼 있으나, 병원 소속 간이식환자 모임에 소속이 돼야 협회로 명단이 제출된다고 했다. 이어 협회 가입을 안 하거나 못 하는 사람은 1차 병원 환자모임을 통해 연락하고 2차는 협회에서 연락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가입을 거절당하는 경우도 많아 안타깝다고 했다. 아무 조건 없이 마음의 고통을 위로하고 이 혜택을 소개하려고 연락했을 때 내 핸드폰 번호, 내 주소를 어떻게 알았냐?며 불쾌한 반응을 보이며 거절당하는 경우도 많아요. 아직 모임에 소속되지 않는 간이식인들이 용기를 내어준다면 서로간의 격려와 보다 좋은 혜택을 누릴 수 있을텐데. 고향인 충북 음성을 떠나 서울에서 축산업으로 왕성한 성공 가도를 달리던 이 수석부회장은 식당을 쉬는 날 건강검진을 통해 B형간염 판정을 받고 고대 안암병원에 다니게 됐다. 이 대표는 일상생활 속에서 피로감, 식욕체중감소 등 증세가 나타났으며 가족력이 있음에도 사업을 위해 축구모임을 갖고 과음하는 경우가 많았다. 계속 병원을 다니던 중 김동식 교수가 조그마한 것이 보인다며 정밀검사를 권했고, 조직검사를 한 결과 간세포 암이 발견됐다. 암이란 소리에 놀라 아내도 울고 눈앞이 정말 캄캄했다는 그는 간암 판정을 받은 뒤 생사를 오가는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그는 집중치료실에서 55일간 지냈고 산소호흡기를 달고 있어야 했다. 이후 산소호흡기를 떼고 회복 절차가 시작됐지만 걷는 것은 물론 손도 사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체중까지 크게 줄었다. 이 수석부회장은 김동식 교수 간이식팀을 만나 수술 받은 것은 내 삶에서 최고의 기회였고 간이식 수술을 위해 두 아들이 조직 검사를 받았는데 기적적으로 둘 다 조건에 부합했다며 기쁘면서도 아들에게 미안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는 아들과 수술실에 같이 들어갈 때 마음이 정말 너무 아팠다. 결혼을 앞둔 막내아들의 간을이라며 간 이식 당시를 회상하며 눈물 흘렸다. 큰 아들은 아버지를 대신해 축산사업을 물려받기로 했고 작은 아들이 간을 이식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막내아들은 결혼하기로 약속한 상태였지만, 처가 부모님이 너그럽게 양해했고 지금의 며느리도 이 수석부회장의 수술이 먼저라며 결혼 전 간 이식 수술을 당연히 받아들였다. 다행히 아들은 회복 수준도 비교적 빠르고 합병증도 없어 무사히 결혼식을 치렀다. 이 수석부회장은 간이식은 정말 쉬운일이 아니다라며 수술할 수 있었던 것도 다행이고 새 생명을 선물해준 아들과 곁에서 힘든 과정을 함께 해준 아내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이어 간이식 수술을 집도한 김 교수에게 정기적으로 간암 전이 여부를 확인하는 검사를 받았고 병원 지시대로 따랐다며 수술 후 1~5년 매년 1회 간 생체 검사를 받기 위해 2박 3일 입원했다고 했다. 그는 특히 간 초음파로 가는 바늘을 간에 찔러 놓고 하는 검사로, 모레주머니 같은 것을 4시간 동안 눌러서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검사가 매우 힘들었다고 설명했다. 수술 후 병원 생활과 혼자 병마와 싸우며 지낸 순간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들이 함께 해 새로운 삶의 버팀목이 돼 줬다. 죽음을 이기는 과정을 거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 이 수석부회장은 올해 3월부터 인천 중구 연안동에서 가족들과 함께 장례식장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죽음 직전에서 삶과 죽음을 생각했고 죽음이 자신의 인생 가까이에 있는 사실을 깨닫고 내 이웃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어 장례문화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현재 모든 순간이 눈물 나게 고맙고 감사해 동네 마을을 위해 봉사도 하고 있다는 그는 지역사회 지자체와 봉사단체 등과 고독사를 포함한 저소득 무연고사망자의 장례를 위한 업무협약도 추진하고 있다. 고독사는 주변과 단절된 채 홀로 살다가 아무도 모르게 생을 마감하는 것을 지칭한다. 이 수석부회장은 부두가에 와서 살다보니 정확한 사유는 알 수 없지만 바다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의 장례나 무연고자에 대한 장례를 보게 됐다며 이 지역의 고독사 장례 대행에 본격적으로 나서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최근 사랑하는 가족 곁에 머물게 해준 신께 대한 감사함에 신앙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이 수석부회장은 우리는 늘 삶에서 실감이 나지 않았던 일들, 우리에게 오지 않았으면 하는 일들이 매 순간 오간다며 현재 코로나와 같은 감염병의 시대에 불안과 두려움이 마음속에 들더라도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한다면 이겨낼 수 있다고 말했다.

[피플&포커스] 차경남 대표 “세계적 청년 소잉마스터 양성의 꿈, 반드시 이룰 겁니다”

데님 관련 기술은 배우는 즉시 전 세계 시장을 상대로 합니다. 데님 하나만 가지고도 리바이스, 뱅뱅 등 국제적인 브랜드를 만드는 것을 보세요. 우리 청년들을 데님 전문가로 양성해서 우리도 얼마든지 세계적인 의류기업을 만들 수 있습니다! 청년과 기성 봉제사의 상생을 꿈꾸며 소잉마스터(봉제사) 아카데미를 운영하는 봉제 장인이 있다. 바로 소잉마스터 46년 경력의 차경남 데님 647 대표(디자이너)가 그 주인공이다. 서울봉제산업협회장을 역임한 차 대표는 패션의 메카 동대문을 주름잡던 한국 봉제산업의 1번지 창신동 봉제거리에서 데님을 연구하는 청년들의 꿈을 키워가고 있었다. 기자는 차 대표를 만나 데님과 소잉마스터 아카데미에 대한 배경성과 등을 들어봤다. 데님은 면섬유인조섬유혼방섬유를 능직으로 짜서 만든 면직물을 말한다. 데님 종류 가운데 진이라고 하면 대표적으로 청바지가 꼽힌다. 청바지는 6.25때 처음 유입됐다. 미군에 의해 처음 소개된 청바지는 당시 생소하고 독특한 멋을 지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반면 일각에선 격식과 예절을 갖추지 못한 옷이라는 비판적인 시각도 있었다. 데님은 일반 소재보다 질겨 쉽게 찢어지지 않는 특성이 있다. 실제로 청바지는 광부들이 잘 찢어지지 않는 바지를 생각하다가 텐트용 천을 이용해 광부용 바지를 만든 것에서 유래됐다. 우리나라에서는 경제 성장과 더불어 작업복 등으로 더욱 각광 받는 옷이 됐고, 1980년대에는 젊음청년자유의 상징으로 꼽히기도 했다. 현재 국내 패션 중 약 70%가 데님 소재다. 데님을 포함한 의류시장에 있어 봉제산업과 같은 뿌리산업은 필수적인 요소로 꼽힘에도 인건비 등의 문제로 국내에서 점차 해외로 빼앗기는 상황이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차 대표는 청년과 기성 봉제사가 협력해 사업 모델을 만들어간다면 위기 극복은 물론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기업들을 탄생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이러한 기대감 속에 열린 소잉마스터 아카데미는 창신동 봉제 장인의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찾던 청년들에게 마치 단비와도 같은 것이었다. 소잉마스터 아카데미는 국내에서 봉제 전문가들의 지원 속에 데님 관련 전문 봉제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학원이나 학교에서 데님을 가르칠 수 없는 이유는 교육하기 위해 필요한 기계와 시스템을 다 갖추기 어렵기 때문이에요. 디자인 학원이나 학교에서 데님 한 과목을 가르치기 위해 모든 시스템을 다 바꿀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데님 전문 교수가 없다는 점도 데님을 가르칠 수 없는 이유 중 한 가지죠. 우리나라에는 디자인 교수들은 많지만 그 옷을 실제 제작할 수 있는 데님 엔지이너 교수들은 없는 게 현실입니다. 소잉마스터 아카데미의 시작은 지난 2019년 서울시가 창신동 봉제거리를 도시재생 1호사업으로 지정하면서부터였다. 본래 창신동은 세계 최고수준의 기술력을 갖춘 봉제사들이 한 곳에 모여 있던 봉제산업의 클러스터로 꼽혔다. 동대문 시장과 근접했고 공장들의 밀집도는 서울 시내에서 단연 으뜸이라, 봉제산업의 1번지라는 타이틀도 붙었다. 하지만 사양화로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한 봉제기술의 현실 앞에 좌절하는 봉제사들도 많아 역사와 애환이 담긴 곳이 됐다. 이러한 창신동의 문화적 유산과 수많은 봉제 장인들의 노하우를 청년들에게 전수하고 싶었던 차 대표는 서울시로부터 기회를 부여 받아 소잉마스터 아카데미를 열게 됐다. 소잉마스터 아카데미 초창기 차 대표는 이 공장 저 공장을 찾아다니며 봉제사들의 협력을 요청했고, 이러한 그의 모습에 감명을 받은 원단업체, 워싱업체 등의 대표들은 적극적으로 그를 도우며 팀워크를 만들어갔다. 서울시에선 교육비와 재료비 등을 지원했다. 원단업체 사장님들과 워싱업체 사장님을 직접 만나 우리나라 최초로 청년들을 위한 데님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했지요. 그랬더니 이분들이 흔쾌히 청년들을 돕겠다고 했어요. 원단도 샘플을 무상으로 제공키로 하고, 워싱도 소량이라도 청년들을 위해서라면 1장이라도 하겠다고 했죠. 이 교육은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차 대표의 열정에 부흥하듯 청년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소잉마스터 아카데미를 수강한 학생들은 당시 서울시 부시장과의 간담회에서 이 교육이 지속되길 원한다는 메시지를 던지기도 했다. 단순히 교육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교육을 수료한 이들 가운데 디자이너 브랜드를 차리는 이도 있는가 하면 소호창업에 나선 이들도 상당수 생겨났다. 그 중 대표적인 청년 창업 사례로 소잉마스터 아카데미 1기 수강생들이 모여 결성한 데님 브랜드 G.M.H(구미호)가 있다. 이 브랜드는 차 대표가 등록해두었던 것을 청년들에게 기증한 것이다. 차 대표는 G.M.H는 언젠가 이런 일이 있을 때를 염두에 두고 미리 만들어 두었던 상호라며 여우(구미호)처럼 변화무쌍하라고 지은 이름이라고 설명했다. 소잉마스터 아카데미에선 단순히 봉제기술만 전수하는 게 아니다. 차 대표는 데님은 별도의 데님 디자인을 따로 배워야 한다. 하지만 이것만 가르치는 게 아니다라며 원단구매와 워싱, 샘플제작, 시장유통, 마케팅, 실제 판매에 이르기까지 데님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친다고 밝혔다. 소잉마스터 교육은 단순히 한번 경험해보고 싶은 가벼운 마음으로 배울 수 있는 교육이 아니다. 소잉마스터라는 이름에 걸맞게 진지하게 데님에 관해 연구할 수 있는 자세가 된 청년들에게 주어지는 교육 기회다. 교육생 16명을 선발하는데 3배수가 지원했어요. 그만큼 배우고 싶다고 해서 다 배울 수 있는 교육이 아니죠. 데님 전문가를 양성하는 일인 만큼 아무나 받을 수는 없지요. 정말 데님에 관해 관심이 있는가? 얼마나 열정이 있는가? 등을 고려해서 1차 서류로 걸러내고, 2차까지 검증을 거쳐 교육생을 선발합니다. 데님이라는 차별화특화된 교육이 진행되다보니 창업을 꿈꾸는 청년들 사이에서는 입소문도 많이 난 상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글로벌 청바지 업체에서 일하며 데님 창업을 꿈꾸던 청년들도 소잉마스터 아카데미의 문을 두드리는 경우도 있다. 다만 청년 데님 전문가 양성이라는 큰 목표를 두고 있는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차 대표에게도 난제는 있었다. 그에겐 한정된 예산과 공간의 제약 속에 재정적 어려움까지 더해졌다. 서울시의 도시재생 1호사업이 종료되면서 재정적 지원도 끊어졌다. 다행히도 청년 사업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의 지원으로 교육비 일부를 지원 받을 수 있었지만, 여전히 교육 장소 임대료 등을 차 대표가 감당하고 있어 비용 부담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저는 데님에 대해 패션계의 김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실제로 우리나라 의류시장의 70%가 데님과 관련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나라에 데님 전문가들, 특히 세계시장을 선도할 젊은 데님 연구가들이 극소수하다는 점은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하루 빨리 장소여건 등이 마련돼 청년 데님 전문가들이 더 많이 양성되길 소망합니다.

[피플&포커스] 최병관 사진작가 “DMZ에서 ‘꽃으로 핀 녹슨 철모의 주인’을 만난 날 펑펑 울었습니다”

[천지일보 기자=정다준 기자] 비무장지대(DMZ)에서 꽃으로 피어난 녹슨 철모의 주인을 만난 날 펑펑 울었습니다. 민간인 최초 DMZ 횡단 사진작가로 불리는 최병관 작가. 그는 분단 반세기 만에 휴전선 155마일을 2년여간 3번 횡단하며 10만컷 가까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 사진을 기점으로 세계적인 사진작가 반열에도 올랐다. 하지만 DMZ 사진작가라는 다소 강한 이미지와 달리 그가 찍은 많은 사진은 수채화처럼 담백하고 아름답다. 등단 시인이기도 한 그의 사진 캡션은 사진의 내면까지 보게 만든다. 38년 전 그림보다 더 아름다운 사진을 찍으리라 하늘과 약속했다는 최병관 작가를 인천 소래포구 인근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서 만났다. ◆사진을 시작한 이유 어머니와 고향 아파트 거실에 들어서니 어스름한 새벽에 한복 차림으로 철로 위를 걷는 어느 여인의 뒤태를 담은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사진의 주인공은 최 작가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그가 사진을 시작한 이유다. 어머니의 인생을 사진으로 남기고 그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고 싶었어요. 그의 어머니는 45세에 홀로 됐다. 3남 4녀 중 다섯째로 자란 그는 감수성이 남달랐다. 사진작가가 된 뒤 약속대로 틈틈이 어머니의 삶을 사진에 담았다. 그렇게 찍은 어머니의 사진을 모아 2005년부터 약 2년간 어머니의 실크로드, 바다가 그리워질 때라는 제목으로 월간 객석에 연재했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어머니가 지켜온 땅 인천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져 그는 인천의 다양한 모습도 사진에 담고 있다. ◆민간인 최초 DMZ 횡단 사진작가 그를 세계에 알린 DMZ 사진은 육군사관학교 개교 50주년 사진작업이 인연이 됐다. 육사 교정을 힘차면서도 서정적으로 담아낸 최 작가의 사진에 육사 관계자들이 감동해 먼저 DMZ 촬영을 제안했다. 1997년부터 2년여간 휴전선 155마일을 3번 횡단하며 사진작업을 했다. 언제 지뢰가 터질지 모르는 그야말로 목숨 건 작업이었다. DMZ 곳곳을 누비며 촬영하는 동안 그는 비무장지대가 전쟁의 아픔을 넘어 평화와 희망, 생명을 품은 땅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어느 봄날 들꽃으로 피어난 녹슨 철모의 주인을 보며 그는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이 땅에 평화의 꽃을 활짝 피워달라는 절규를 그의 사진에 고스란히 담았다. 그는 비무장지대의 긴장감과 평화를 향한 소망을 담은 사진을 모아 휴전선 155마일 최병관의 450일간 대장정이라는 제목으로 사진책을 발간했다. 그의 DMZ 사진은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2000년 일본 NHK TV는 한국의 사진가 최병관편을 전 세계에 방영했다. 2004년 한국 사진작가로는 처음으로 일본 동경사진미술관의 초청을 받아 비무장지대의 비경 개인 사진전을 열어 국제적인 관심을 불러모았다. 평화와 생명의 메시지를 담은 DMZ 사진은 특정국 작가의 전시는 하지 않는다는 유엔의 전시 원칙도 깼다. 2010년 유엔본부에서 한국의 DMZ, 평화와 생명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주관으로 최병관 사진전이 진행됐다. 미국 CNN방송이 최 작가의 DMZ사진 유엔전시를 소개했다. 2019년 주인도네시아 한국문화원은 문화체육관광부 해외문화홍보원이 2019국가브랜드사업으로 선정한 한국의 DMZ 평화와 생명의 땅 최병관 사진전을 1개월간 인도네시아 국립박물관에서 개최했다. 이어 아세안연합 갤러리에서도 초청 전시회가 성황리에 치러지면서 인도네시아에는 K-photo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그림보다 아름다운 사진을 찍으리라 1983년 사진을 시작한 이후부터 사진전을 많이 다녔지요. 그런데 사진이 예술작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카메라를 부숴 버리고 사진을 그만뒀습니다. 그리고 2년 후 그는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 세계적인 사진작가들의 책을 보면서 자신이 경솔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이후로 그는 그림보다 더 아름다운 사진을 찍겠노라 굳게 다짐했다. 실제 그의 어떤 사진은 마치 수채화나 추상화를 보는 느낌이다. 피사체만 돋보이게 찍어내는 그만의 사진 기법은 담백한 그의 성품과도 닮았다. 일체의 포토샵 없이 오직 사진 원판으로 이 모든 것을 해낸다는 것이 놀랍다. 자연이 주는 깊은 울림과 내면까지 사진에 담아내는 느낌이다. ◆작가는 오직 작품으로 말한다 33살에 사진으로 삶을 바꾼 후 그는 수많은 고난을 겪었다. 그의 형제들조차도 미쳤다며 괴롭혔다. 오직 어머니의 삶과 고향을 사진으로 남기려고 택한 사진작가의 길을 어머니만은 묵묵히 응원했기에 버틸 수 있었다. 그는 1992년 문예한국 신춘문예 시부문으로 당선한 시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돈도 명예도 관심 없었던 그는 지금까지 사진작가협회나 문인협회, 시인협회에 등록조차 하지 않았다. 제 뜻이 옳았기 때문에 오늘날 국내외적으로 인정받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작가는 오직 작품으로 말한다 그게 제 좌우명입니다. 그는 기성 사진작가들과 다른 길을 걸었기에 더 자유롭고 창조적인 자신만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수개월 수년간의 노력 끝에 얻어진 한 장의 사진이 폄훼 당하고 멸시당할 때는 참을 수 없는 고통도 느꼈다. 창작의 고통은 극단적 선택을 하고 싶을 만큼 그를 괴롭히기도 했다. 그의 창조적인 사진은 고통의 산물이다. 새벽이고 낮이고 영감이 떠오르면 그는 사진 장비를 들고 뛰쳐나가는 일을 수십년 반복했다. 새벽에 벌떡 일어나 뛰쳐나가는 남편을 보며 놀랐던 그의 아내도 이젠 익숙해졌다. ◆마음의 병 치유되는 사진 찍고파 그는 요즘 양귀비꽃에 반해 다양한 양귀비꽃을 찍는다. 꽃에 반해 찍다 보니 꽃의 내면으로 들어가 보고 싶어졌단다. 그래서인지 그의 사진 속 양귀비는 때론 수줍고 때론 자유롭고 때론 애달파 보인다. 사물과 공감하는 탁월한 감수성이 사진에 고스란히 전해진다. 피사체와 소통하는 듯한 그의 사진은 다시 봐도 색다르고 놀랍다. 조금 다르게 걸어와서 조금 더 특별하게 찍어낸 그의 사진은 그 자체로 독보적이고 아름답다. 특히 남다른 구도와 색감을 잡아내는 그의 능력은 때 묻지 않은 순수함과 열정의 산물인 듯싶다. 적어도 그림보다 아름다운 사진을 찍겠다던 38년 전 그의 약속은 이미 지킨 것이 아닌가 싶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최 작가에게는 작은 바람이 있다. 마음의 병이 깊은 현대인들이 제 사진을 보면서 치유가 되는 그런 사진을 찍는 게 소망입니다. 이 소망 역시 그림처럼 아름다운 그의 사진을 통해 이미 이루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최병관 작가는 인천광역시 논현동 산뒤마을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그곳에 살아오면서 갯벌, 염전 등 사라져 가는 아름다운 풍경을 쉼 없이 카메라에 담고 있는 사진가이며 시인이다. 민간인 최초로 휴전선 155마일을 1997년부터 2년여간 3번 횡단하며 사진을 찍었다. 2010년 유엔본부 초청전을 비롯해서 45회의 개인전을 열고 29권의 책을 출간했다. 어린이를 위해 발간한 DMZ 사진책 울지마 꽃들아는 초등학교 5-6학년 교과서에 실렸다. 2000년 일본 NHK TV에서 아시아의 작가로 선정해 전 세계에 방영했다. 2019년 인도네시아 국립박물관과 아세안연합 갤러리에서 초청 전시를 했으며 인도네시아에 K-photo 신조어를 남겼다.

[피플&포커스] 파독광부에서 꿈을 캐는 교수 된 권이종 박사… “막장에서 제 운명이 멋지게 바뀌었죠”

2014년 12월 중순 개봉해 1426만명의 관객을 불러모은 영화 국제시장.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격변의 시대를 관통하며 살아온 우리 시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로 많은 중년 아버지들이 이 영화를 보며 추억을 떠올렸다. 그중에서도 영화 국제시장을 더 특별하게 마주했던 이가 있었으니 바로 스토리의 실제 인물인 권이종(81) 한국교원대 명예교수다. 그는 해보라대안학교 이사장, 한국파독광부협회 부회장, 파독근로자기념관 초대 관장, 한국청소년개발원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파독광부 시절부터 독일에서 교육학 박사가 되고, 나눔과 봉사의 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에 이르기까지를 재정리한 자서전 파독광부 꿈을 캐는 교수로를 지난달 초 출간했다. 권이종 교수는 전북 장수군 지리산 산골 한 오지마을 빈농(貧農)의 아들로 태어나 굶은 날이 부지기수였던 가난한 소년으로 자랐고, 파독 광부가 돼 3년간의 광부의 일을 마치고 독일에 16년간 머무르며 교육학 박사가 된 인물이다. 곧 대한민국이 전쟁폐허로 인해 가난한 시절 막장광부로 독일에 왔으나 꿈을 캐는 교수가 돼 삶이 바뀐 인물인 것이다. 1960년대 당시 독일에 파독 광부와 간호사로 간 한국인이 2만여명 됐는데, 권 교수는 그중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으로 자타공인 인정되고 있는 이다. 그는 메르크슈타인 아돌프 광산에서 3년간 일한 후 독일 아헨 공대 교원대학에서 학사, 석사 및 교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독일에서 최초로 한글학교를 설립하는 등 16년간 청소년운동에 힘을 기울이다가 한국에 귀국해서도 청소년운동과 교육발전을 위해 평생을 헌신해왔다. ◆영화 국제시장 스토리에 담기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흘린 땀방울과 이들이 벌어들인 외화로 한강의 기적 곧 한국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된 업적들을 후세에 영원히 기억되게끔 하고 싶었던 그는 앞장서서 기념관을 추진했고, 그 결과 2013년 5월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 파독근로자기념관을 개관하게 된다. 그곳에서 바로 영화 국제시장의 파독광부와 간호사의 스토리가 완성되는데, 영화 스텝들이 기념관에 왔다가 초대관장이었던 권 교수를 만난 것이다. 스텝들이 그에게 영화에 파독광부 이야기를 넣고 싶으니 도와달라는 부탁에 권 교수는 2012년 출간한 자신의 자서전 막장 광부 교수다 되다라는 책을 참고하라고 건네주게 된다. 영화 스텝들이 그의 자서전을 참고로 해서 영화 속에 파독광부의 삶이 생생하게 재연된 것이다. 영화 속 덕수(황정민 역)와 영자(김윤진 역)가 머나먼 타국에서 만나 부부의 연을 맺은 것처럼 권 교수의 아내가 파독 간호사 출신이다. 약간 과장된 것도 있지만 그의 독일 파독광부 시절을 중심으로 영화 내용에 삽입된 것이다. 그는 집이 가난해 중고등학교를 겨우 졸업 한 후 대학 진학은 엄두도 못 냈기에 곧바로 입대했고, 제대 후에도 할 수 있는 것은 농사밖에 없어 농사를 지내며 평범하게 살았다. ◆가난 벗어나게 되는 운명의 순간 좀처럼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그에게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맞았다. 바로 파독광부 모집광고를 알게 된 것.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살고 있었던 그에게 서울에 있는 오촌 여조카가 서울 공사판에서 사람을 많이 뽑는다고 올라올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고, 그는 농사보단 낫겠다는 생각에 서울로 상경해 공사판에 가서 막노동을 했다. 그 현장에서 알게 된 동료가 한양대 공대생이었는데, 파독광부 모집 신문기사를 보여주며 함께 독일에 가자고 했다는 것이다. 그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지원해야겠다고 마음먹었고, 이것이 그의 운명이 바뀌게 되는,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파독광부는 1963년 12월 1진이 파견됐고, 그는 2진 모집에 지원했는데 수천명이 몰렸을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다. 영화에서처럼 60㎏짜리 쌀가마니를 머리 위로 드는 장면이 나온 것처럼 당시에도 똑같았다고 한다. 기본적인 신체검사와 달리기, 모래가마니 어깨 위로 들기 등의 체력검사에 통과해야 했고, 영어국사 과목 필기시험도 통과해야 했다. 권 교수는 이를 다 합격했으나 마지막 남은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돈이었다. 독일까지 가는 기본준비 경비가 있어야 했는데, 그는 이 돈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형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얘기했고, 농사지으며 가난하게 살았던 그의 형은 전 재산인 소 한 마리와 보리 열다섯 가마를 팔아서 독일에 갈 경비를 대줬다. 동생을 위해 기꺼이 전 재산에 가까운 큰 비용을 대준 형이 있었기에 지금의 권 교수도 있었던 셈이다. 이 때문에 그는 1964년 10월 5일 독일로 떠나는 날 형님에 대한 미안함과 감사함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꼭 많은 돈을 벌어오겠다고 다짐하며 독일로 떠났다. 독일에 도착한 순간 그는 그저 독일의 모든 모습들이 부러웠다고 한다. ◆목숨 건 파독 막장광부의 삶 독일 탄광 안에 일하러 들어갈 때면 모두가 클뤽 아우프(행운을 가지고 위로 올라오라)로 인사를 했다. 탄광일은 목숨을 걸고 하는 위험한 일이었고, 무사히 끝내고 올라오라는 뜻에서 행운을 비는 인사였다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이것이 그대로 재연됐고, 그는 영화에서 탄광 막장광부의 일하는 장면들이 자신이 실제 일했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를 정도로 흡사하게 잘 재연됐다고 말했다. 광부의 일은 말로는 표현이 안될 정도로 고됐다고 한다. 지하에 내려갈수록 온도가 올라가 더워서 땀은 비오듯 쏟아지고 속옷만 입고 일하는 경우가 많았고, 석탄가루가 코와 입에 들어가지 않게 보호하는 마스크가 있지만 더워서 쓰지 못할 정도라 숨을 쉴 때마다 석탄가루와 돌가루가 몸속 모든 곳으로 들어온다. 이를 빼내기 위해 고춧가루보다 더 매운 코담배를 코로 들이마시면 콧속을 자극해 그때 석탄가루가 콧물과 함께 다시 밖으로 빠져나온다. 이런 행위를 매일 수차례 해야 하는 것도 탄광일과 별도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남자들은 군대 시절 대부분 화생방을 겪어봤기 때문에 그 고통을 알 것이다. 군 제대할 때까지 매일 수차례 화생방을 한다고 생각해 보면 아마도 치를 떨지 않을까싶다. 광부의 일은 육체도 고됐지만 죽음까지 이르게 되는 사고도 끊이지 않아 두려운 직업이었다. 권 교수는 파독광부 시절 가스폭발, 매몰, 기계에 손가락이나 다리가 절단되는 등의 사고들이 허다했다고 한다. 그가 작업을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천장붕괴 사고로 친한 동료까지 잃게 되면서 그 역시 언제 자신도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매순간 두려움과 외로움에 맞서 싸웠다. 그러던 어느 날 그도 실제 큰 사고를 당했다. 일하던 도중 머리 위에 집덩이만한 바위가 떨어지는 것까진 봤는데 그 이후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손이 잘려져 나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고, 정신이 흐려지기 시작하면서 점점 눈이 감겼다. 그대로 죽는 건가 싶어 그는 가족들의 얼굴과 고향을 떠올리며 눈이 감겼는데, 깨어보니 병원이었다. 광부 전용병원에서 수차례 대수술을 받았고 한 달간 병상에서 보내며 손을 잘라야 할까봐 눈물의 나날을 보냈다. 다행히 뼈와 신경에 큰 이상이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다만 지금도 다친 왼손은 힘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 권 교수는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광부에서 교수가 된 사연은 그는 퇴원 후 광산에 복귀했고, 독일인 감독관이 그래도 그를 불쌍하게 봤는지 회복될 때까지 수월한 일을 시켰다고 한다. 그만큼 독일인 감독관은 외국인에게도 인간적인 존중과 배려를 해줬다고 하면서 우리나라 근로현장이 본받아야 할 대목이라고 권 교수는 말했다. 독일에서 광부 고용계약 3년이 끝나고 대다수가 귀국했고, 그도 귀국을 위해 모든 짐을 미리 고향에 보냈다. 비행기표까지 끊어서 공항까지 와서 비행기를 타려는 순간 그의 운명을 바꾸게 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수양어머니로 모셨던 오스트리아 출신의 독일인 로즈마리 여사가 그를 붙잡은 것. 우연히 동료 광부의 소개로 알게 됐는데, 늘 다정하게 대해주자 고마움에 양어머니로 모시며 가족같이 지냈는데 그가 귀국하려고 하자 공항까지 와서 가지 말라고 붙잡았던 것이다. 권 교수는 수양어머니가 광부 일만 하고 돌아가기 에는 아무 의미가 없지 않냐며 독일에서 공부하라고 붙잡으며 나를 비행기에서 끌어내렸다고 당시를 회상하며 고마워했다. 어릴 적부터 교사가 꿈이었던 그는 열심히 공부한 끝에 사범대학(아헨교원대학교)에 입학했는데 해당 대학교에서는 개교 이래 최초로 외국인 학생으로서 입학했다고 한다. 그는 낮에는 학교에 다니고 밤에는 호텔 등에서 알바하면서 박사학위를 따냈고, 평생을 고학으로 꿈을 이뤄냈다. 독일에서 평생교육과 청소년 분야를 전공한 뒤 16년간의 생활을 끝내고 1979년 귀국한 그는 한국 교육에 접목해 국내 평생교육원과 청소년 교육환경을 바꾸는 데도 기여하고 헌신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