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친조카가 말하는 이봉창 의사, 윤주 매헌기념관장 인터뷰

건국훈장 2등급1등급 올려야, 생가복원 꼭 필요 일본 천왕에 폭탄 투척, 의거는 실패했으나 잠자고 있던 우리의 독립의지를 드높인 쾌거 일제의 탄압과 억압으로 독립항거는 잠잠하고 암울하던 일제강점기 1932년 1월 8일 오전 11시 44분. 일본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신년 관병식(觀兵式)을 마치고 돌아가는 일왕 히로히토를 향해 군중들은 열렬한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 무리 틈에서 숨을 죽인 채 일왕이 자신의 앞으로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한 청년. 일왕이 탄 마차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자 청년은 지체 없이 속주머니에 숨겨놨던 폭탄을 힘껏 던졌다. 일본인들에게 현인신(現人神)으로 추앙받는 존재인 일왕에게 누가 감히 폭탄을 던질 거라 생각했겠는가. 요란한 폭음과 연기로 주변은 온통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폭탄은 일왕을 빗겨간 채 수행하던 사람과 말만 부상을 당했다. 안타깝게도 의거는 실패로 끝났고, 청년은 자결을 시도했으나 일본 경찰에 붙잡혔고 결국 옥고를 치르다 그해 10월 10일 교수형으로 만32세의 젊은 생을 마감했다. 이 청년은 바로 이봉창 의사다. 일본인들이 신처럼 떠받드는 일왕을 제거하고 조선의 독립 의지를 천명하고자 죽음의 불구덩이로 뛰어들었던 이봉창 의사. 비록 뜻은 이루지 못했지만 잠자고 있던 우리의 독립의지를 깨웠고, 이는 훗날 윤봉길 의사의 의거(1932. 4. 29) 등을 비롯한 애국지사들의 활발한 항일 독립투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어쩌면 이 의사의 의거는 실패가 아닌 성공이었는지 모른다. 일왕을 응징하려 했다며 최고의 대역죄를 뒤집어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나, 그는 우리의 처지와 비슷하던 중국인들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큰 힘을 주게 된다. ◆ 추모 82주기, 저평가된 공로와 업적 재평가돼야 지난해 10월 10일은 애국지사 이봉창(1900.8.10~1932.10.10) 의사의 서거 82주기였다. 서울 용산 효창공원 이봉창 의사 묘전 앞에서 추모식이 진행됐다. 용산구 관내 기관장들은 다 빠진 채 조촐하면서도 다소 초라한 분위기 속에 마쳤다. 이곳에 모인 여러 민족단체장들은 이 의사의 고귀한 순국이 없었다면 윤봉길 의거나 여러 독립운동도 활발하게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라며 하나같이 저평가된 이 의사의 공로와 업적이 재평가돼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다. 그 가운데서 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가 지금 있기까지 모든 과정에 기여한 윤주 매헌기념관장을 기념관에서 따로 만나 이봉창 의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 기념사업회 발족하기까지의 우여곡절 과정 윤주 관장은 윤봉길 의사의 친조카이자 이봉창의사생가복원추진위원회 부회장이다. 윤 관장의 아버지인 윤남의(윤봉길 친동생) 선생은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를 1965년 설립하고 활발한 추모사업을 펼쳤다. 그에 비해 이봉창 의사는 1975년까지 어떠한 추모식이나 기념식이 따로 없었다. 1946년 5월 15일 윤봉길, 백정기 의사 유해와 함께 일본에서 발굴, 부산으로 봉안돼 오면서 추모제를 지냈고, 그해 7월 6일 해방 후 첫 국민장으로 모셔진 뒤 효창공원에 묻히게 된 게 전부였다. 상황이 이러하자 윤 관장의 선친은 이봉창 의사의 의거 의미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추모식과 기념사업회 발족을 제의했고,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원 주축으로 이봉창의사추모위원회를 구성해 이를 추진해 나간다. 당시 청년이었던 윤 관장은 심부름을 주로 하며 도왔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낼 탄원서의 초안을 작성했다. 탄원서에는 이봉창 의사의 비석조차 없고, 추모식 없는 현실을 담았다. 윤 관장은 박 대통령이 탄원서를 받아보고 난리가 났다. 최규하 국무총리를 시켜 44주기를 맞아 첫 추모식을 성대하게 치를 수 있도록 도왔다고 말했다. 이 추모식이 시초가 돼 윤 관장 선친은 남은 찬조금을 이봉창 의사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어 입금시키라고 지시해 계속해서 기념사업회 발족을 위한 노력에 발 벗고 나선다. 그의 선친은 추모사업을 위해 수년간 빈병과 깡통 등의 폐품을 주워 모아 팔았고, 그 돈은 고스란히 이 의사 명의 통장에 입금시킬 정도로 열성이었다. 윤 관장은 당시는 실명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 의사 명의로 통장을 만드는 것이 가능했고, 도장은 선친 이름으로 했다. 이 통장은 아직도 보물처럼 잘 보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애국지사들의 기념사업회가 몇 군데 밖에 되지 않아 1978년 이봉창의사추모위원회를 해산하고 동시에 효창원순국선열추모위원회를 구성한 뒤 1979년 4월 13일 임시정부수립기념일을 맞아 효창원 7위선열(김구, 이동녕, 조성환, 차리석 임시정부요인 4인과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3의사)의 첫 합동추모식을 지낸다. 그리고 윤 관장의 선친과 김재홍 선생의 꾸준한 선양사업으로 1981년 이봉창기념사업회가 드디어 발족됐다. 이봉창 의사가 거사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애국지사로서는 국민적 관심이 적었기에 윤 관장 선친은 이 의사 자료를 수집해 1992년 위인전기집을 발간한다. 이 의사의 의거를 기리고 널리 알리기 위해 읽기 쉽게 아동용 도서로 출판했다. 이로 인해 언론과 국민들의 관심을 얻었고, 각계각층의 도움을 얻어 1995년 동상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운영의 어려움으로 1997년 기념사업회가 없어졌다가 2001년 다시 부활시키고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윤 관장과 그의 선친을 중심으로 한 노력이 없었다면 이봉창 의사는 더 관심 밖으로 묻힐 뻔 했던 것이다. 2013년 생가복원추진위원회를 설립해 생가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이 의사 생가 터에는 비석만이 쓸쓸하게 남아 있다. ◆ 이봉창 의사 더 알리기 위해 순국 전 사진 공개 지난해 윤 관장은 이봉창 의사의 순국 열흘 전 사진을 공개했다. 1932년 9월 30일자 日아사히신문에 실린 사진이며, 그 옆에는 대역범인 이봉창(상) 그의 생가(우하)와 도쿄에 있는 숙박 장부에서 확인한 필적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윤 관장은 3년 전 발행한 윤봉길의사 전집 발행과정에서 해외를 다니며 자료를 정리하다가 나온 것이라 말했다.이 의사의 서거 82주기를 맞아 그를 국민들에게 알릴 필요성을 느껴 공개하게 됐고, 아직도 이 의사의 업적은 다른 독립운동가에게 묻혀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윤 관장은 사진만 봐도 양쪽 볼이 앙상한 게 상당히 수척한 얼굴이다. 심한 문초를 겪은 것을 예상할 수 있는 부분이라며 호외에는 이 의사의 생가 사진과 도쿄 숙박지에 남긴 이 의사의 필적 사진도 함께 실렸다고 설명했다. 윤 관장이 이봉창 의사를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꺼져 가는 임시정부와 조선의 위상을 살렸다는 데 있다. 3.1운동의 영향으로 임시정부가 수립됐는데, 파벌싸움에다 재정이 어렵게 되자 독립운동가들이 다 떠나는 상황에서 이봉창 의사는 일본에서, 윤봉길 의사는 시골에서 각각 자발적으로 임시정부를 찾아갔다는 점이다. 특히 이 의사는 일본인들의 심장이자 제국주의의 상징인 최우두머리를 제거하려 했다는 점에 존경스러워 했다. 비록 의거는 실패했으나 파장이 엄청났고, 당시 세계에서 존재 자체를 인식 못했던 한국의 존재와 독립의지를 만천하에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했다는 게 윤 관장의 설명이다. 아울러 중요한 것은 임시정부의 불씨를 살렸고, 이는 윤봉길 의사의 거사로도 이어질 수 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또 이 의사는 무대포로 일왕을 제거하기 위해 무작정 나선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치밀한 계획을 짰다.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고, 일본인 행세를 하며 법망에 빠져 나가기 위해 주요 관직에 있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며 기회를 엿봤다. 그리고 혼자 힘으로는 안됐기 때문에 임시정부의 김구를 찾아가 일왕 제거 의사를 밝히며 도움을 요청했고, 김구 선생 역시 어려운 재정 여건에서도 많은 돈을 들여 폭탄을 비롯한 일본까지 가는 비용을 제공했다. 거사를 앞두고 이봉창 의사는 환하게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사진은 안중근 의사의 친조카인 안낙생이 찍었다. 마음 아파하는 김구 선생을 오히려 위로하면서 영원한 쾌락을 얻으러 간다면서 기쁘게 같이 찍자고 했다. 당시 이봉창은 결혼도 안한 32살의 청년이었다. 설사 성공할지라도 죽을 것을 알고 각오한 거사였다. 그리고 짧은 생을 마감했다. ◆ 건국훈장 재심사, 생가복원 꼭 필요 그럼에도 이봉창 의사는 건국훈장 2등급을 받았다. 윤 관장은 이 의사의 의거가 독립운동사에 끼친 영향으로 평가한다면 1등급 이상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사 때 1등급에 오른 사람이 30여명인데, 이 의사는 아마도 의거가 실패했다는 이유로 2등급을 받은 듯하다. 윤 관장은 당시 어떻게 평가했는지 모르지만 심사가 잘못됐다. 재심사를 위해 여러 차례 국가보훈처에도 청원서를 올렸는데 답장이 오길 어느 개인만을 위해서는 심사를 다시 할 수 없다는 공문 답변이 왔다. 이건 말이 안 된다고 개탄했다. 그러면서 속히 1등급으로 올려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아울러 흔적조차 사라져가고 있는 이봉창 의사의 생가 또한 복원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의사가 독립운동사에 준 영향을 생각한다면 기념관 하나 제대로 없고 너무나 초라하다. 스포츠를 빗대자면 경기결과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땀 흘리고 피나는 훈련 과정 역시 결과 못지않게 인정하고 박수를 쳐줘야 한다. 이봉창 의사가 행한 의거 의미도 그런 맥락에서 되새겨 보는 건 어떨까 싶다. 김현진 기자

[기획] 항일 언론의 선구자 ‘배설’… 우리는 그를 잊을 수 없다

◆나는 죽더라도 대한매일신보를 영생케 하여 대한 동포를 구하라. 푸른 눈을 가진 37세의 배설(한국명, Ernest Thomas Bethell: 어니스트 토마스 베델, 1872~1909)은 이 말을 유언으로 남긴 채 1909년 이국땅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앞길이 구만 리 같았던 영국(英國) 언론인 출신의 청년 배설은 아무런 연고 없는 동방의 작은 나라 대한제국에서 일제의 탄압과 위협에 시달리다 옥고를 치른 후 조용히 숨을 거뒀다. 1909년 5월 1일 양화진으로 가는 배설 선생의 상여를 따라 조문객들의 끊임없는 발걸음이 뒤를 이었다. 1909년 5월 5일 서울 강남 영도사에서 배설 선생을 위한 추도식이 거행됐으며, 도산 안창호 선생이 추도사를 전했다. 양화진에 안장된 배설 선생의 묘지는 통곡하는 조문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으며, 신문은 전국에서 보내온 만사와 조문으로 전면을 덮었다. 영국인 베델에게 배설(裵說)이라는 한국명과 그가 하는 모든 일에 편의를 제공해주라는 특허장을 하사했던 고종황제는 하늘은 무심하게도 왜 그를 이다지도 급히 데려갔단 말인가!라는 조문을 남기며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혀 있는 배설 선생의 비문. 일제에 의해 비문(장지연 선생이 지음)이 깎여진 모습(오른쪽)으로 1968년 한국신문편집인협회 언론인들이 성금을 모아 원래 비문 내용을 다시 새겨 깎여진 묘비 옆에 새 비를 세웠다(왼쪽). ⓒ천지일보(뉴스천지)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암울했던 시대. 고종황제와 대한제국을 슬픔에 빠뜨렸던 푸른 눈의 청년 배설은 과연 누구인가? 올해로 광복 69주년을 맞아 대한매일신보 창간자였던 배설을 통해 국경도 초월해 평화와 정의를 이루고자했던 언론인의 시대적 소명에 대해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대한매일신보는 러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부터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까지 격동의 세월 가운데 대표적 항일 언론으로, 일제의 침략행위를 비판하는 논설과 기사를 연일 보도하고 국민의 애국정신을 고취시켰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무역가에서 항일 언론지 대한매일신보 사장에 이르기까지 1872년 11월 3일 영국 브리스톨에서 출생한 어니스트 토마스 베델(한국에서 신문 발행 후 고종황제로부터 한글 이름을 하사 받음)은 대학 수준의 머천트 벤처러스 스쿨(Merchant Venturers School)을 졸업하고, 1886년 일본으로 건너가 고베시에 니콜 엔드 컴퍼니(Nicolle & Co.)라는 무역상을 차려 운영했다. 그러던 중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1904년 3월 10일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Daily Chronicle)의 특별통신원에 임명돼 한국으로 파견됐다. 배설은 서울에 도착한 후 4월 14일 통신원으로서 일제의 방화로 불타버린 경운궁의 화재라는 제목의 기사를 최초로 송고한다. 하지만 배설은 기사 송고 후 데일리 크로니클지로부터 해고 통지를 받게 된다. 당시 배설 선생은 크로니클지는 편집방향이 일본에 우호적이기 때문에 내가 보내는 기사도 친일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조선의 실정을 직접 보고 나니 신문사의 지시를 그대로 따르는 것은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통신원 직책에 사의를 표하였고 이에 크로니클지는 나를 해고했다.그 후 크로니클지는 나를 특파원으로 임명하겠다고 제안하였으나 나는 이를 거절했다며 해임 이유에 대해 밝혔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영국은 일본과 우호적인 동맹관계로서 배설 선생이 자기의 명예와 생계를 먼저 생각했다면 신문의 편집 방향에 따라 친일적인 기사를 썼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신문사의 편파적인 논조를 좇지 않고 조선이 처한 불합리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도하며 언론인으로서 지켜야 할 양심을 꿋꿋이 지켜냈다. 배설은 크로니클지를 그만둔 후 우국지사 우강(雩岡) 양기탁 선생과 뜻을 같이 하여 1904년 7월 18일 대한매일신보와 영문판 Korea Daily News(KDN)를 창간했다. 이때부터 배설 선생은 양기탁 선생을 비롯한 백암(白巖) 박은식, 단재(丹齎) 신채호 선생 등 애국지사들과 함께 일제의 침략사를 낱낱이 폭로하는 항일 언론으로서 투쟁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항일 언론으로서의 본격적인 투쟁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됐을 당시. 대한 국민은 일본의 한반도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대한 반대운동을 격렬히 진행하고 있었다. 일본이 대장성관방장관을 역임한 나가모리 개인을 내세워 요구한 황무지 개간권은 대한 땅의 황무지 개척 및 경영에 관한 일체의 권리를 나가모리에게 50년간 위임하고, 그 후 다시 50년간 사용권을 연장해 달라는 것으로 일제의 침략 야욕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또한 일제가 나가모리 개인을 내세워 개간권을 요구했다는 것에 눈여겨볼 필요가 있는데, 이는 국제여론에서 日당국과는 무관하다는 주장을 펴기 위한일제의 얄팍한 꼼수였음을 꼬집을 수 있다. 당시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받아 들였다면 대한 국토 2/3가량이 일제에게 넘어가 실질적 식민지로 전락했을 것이다. 이뿐 아니다. 대한제국은 일본과 한 국가로서 계약을 맺은 것으로 국제법에 의거 국토 2/3가량을 100년 동안 일제에게 대여해줘야 하는 아찔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국제법의 경우 분쟁당사국 쌍방 합의 없이는 재판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특히 상대가 강대국일 경우 재판에 회부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즉 일제치하 36년 해방 후에도 일본이 빼앗은 국토를 순순히 내놓지 않는 이상, 해당 국토를 100년 동안 돌려받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의 요구가 부당한 한반도 침략 행위임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논설을 내고, 국민의 격렬한 반대운동을 여과 없이 보도했다. 대한매일신보는 항일 언론지로서의 투쟁을 그치지 않고 이어갔다. 1905년 11월 17일 일제의 한국 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는 궁중으로 군대를 끌고가 총칼로 고종황제를 위협하며 을사늑약을 강요했다. 배설 선생은 일제의 총칼에 의해 강제로 진행된 을사늑약을 상세히 보도하고, 애국지사들의 자결순국사건을 다뤄 국민의 항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또한 배설은 고종황제가 영국 트리뷴지(The Tribune)의 특별통신원 더글라스 스토리(Douglas Story) 기자에게 밀서를 주어 트리뷴지에 보도됐던 기사를 대한매일신보에 밀서의 사진과 함께 전재(轉載) 보도하며, 을사늑약의 무효를 적극 알렸다. 이처럼 대한매일신보는 항일 논조를 폈을 뿐 아니라 자발적으로 일어난 국채보상운동(1907년 2월 발기)의 총합소가 되었으며, 비밀애국결사대인 신민회본부로 중요한 비밀 거점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배설 선생은 우국지사들이 항일 운동을 펼칠 수 있도록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신보를 내주었던 것이다. ◆일제의 언론 탄압과 배설 선생의 재판 회부 ▲ 대표적 항일 언론지인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배설(한국명, Ernest Thomas Bethell: 어니스트 토마스 베델, 1872~1909). (사진제공: (사)배설(베델)선생기념사업회) 대한매일신보는 국채보상운동이 일던 1907년 국한문혼용판이 일반 대중을 계몽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그해 5월 23일 한글판을 간행한다. 이후 대한매일신보는 영문판, 국한문혼용판, 한글판 등으로 총 2만여 부에 이르는 신문을 발행해 국민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이러한 영향력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대한매일신보를 폐간시키기 위해 하지라는 영국인이 발행하던 서울프레스를 통감부의 기관지로 삼고 대외 홍보를 강화했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연설을 통해 나의 백 마디 말보다 신문의 한 마디가 한국인을 감동케 하는 힘이 크다고 통탄했다. 이는 그만큼 대한매일신보가 항일 민족지로서 국민 의식을 깨우는 힘이 대단했음을 짐작케 한다. 일본은 1907년 7월(광무 11년) 급기야 광무신문지법을 제정해 본격적으로 언론의 자유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당시 영국은 일본과 동맹관계에 있었으므로 영국인인 배설이 운영하는 대한매일신보는 치외법권(治外法權)상 검열을 피할 수 있었다. ▲ 대한매일신보사에 걸었던 영국기. 배설 선생은 영국인 소유의 치외법권 지역임을 표시하기 위해 신보사에 영국기를 게양했다. 이로 인해 일본 경찰의 출입을 막을 수 있었다. (사진제공: (사)배설(베델)선생기념사업회) 이에 일본은 영국 총영사를 통해 눈에 가시 같은 배설을 2차에 걸쳐 재판에 회부한다. 배설은 1차 재판(1907년 10월 14일)서 대한매일신보의 기사가 백성을 선동해 공안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고 하여 6개월간의 근신과 300파운드의 벌금을 부과 받았다. 2차 재판은 1908년 6월 15일 스티븐스 암살사건 보도 직후 소요와 무질서를 조장하여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3주간의 금고형과 6개월간의 근신, 400만환의 벌금을 부과 받게 됐다. 배설의 1, 2차 재판 벌금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답지한 성금으로 대납하고도 남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2차 재판 다음 해인 1909년 5월 1일 배설 선생은 일제의 위협과 신문발행의 방해, 자금난, 옥고 후 부작용 등으로 건강을 해쳐 37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대한매일신보와 배설 선생의 역사적 의의 대한매일신보는 구한말 발행된 항일 민족지로 항일의병운동, 애국계몽운동과 문화운동, 국채보상운동에 윤활유적인 역할을 하며 국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이었다. 배설은 치외법권 아래서 일본의 검열을 피해 일제의 침략정책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고, 항일운동을 자유롭게 보도하며 국민의 애국정신을 고취시켰다. 1968년 정부는 항일 운동을 펼쳤던 배설 선생의 공로를 인정해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배설은 한반도를 향한 일제의 부당한 침략 행위에 기자로서의 양심과 펜으로 맞서 싸웠던 대한민국 언론 인으로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100여 년 전 우리 선조들이 선생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동상과 기념관을 건립하겠다고 했던 약속은 아직까지 지켜지지 않고 있다. 현재 배설 선생의 자택이 위치해 있던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파동 2-1번지는 재개발 진행 중에 있다. 그의 자택을 지켜주지 못한 아쉬움도 크지만 당시 항일 언론운동 선구자로서의 업적을 기릴만한 동상과 기념관 하나 없다는 것이 더욱 안타깝기만 하다. (사)배설(베델)선생기념사업회는 100여 년 전 선조들이 배설에게 했던 약속을 기억하고 항일 언론운동의 선구자 4현(배설양기탁박은식신채호)을 기리기 위해 기념관 건립을 추진 중에 있다. 광복 70년을 바라보는 이 시점.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리는 이곳 대한민국에서 생명의 불씨가 꺼져갔던 배설 선생을 기억하며, 우리 선조들이 했던 약속을 이행해 그의 정신을 기리고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길이 속히 열리길 소원한다. 이경숙 기자/thetop80@newscj.com

새 세상을 향한 대찬 도전(挑戰) (2)

◆용의 눈물과 같은 느낌 다른 느낌 드라마 정도전은 96~98년에 방영된 드라마 용의 눈물을 떠올리게 한다. 두 작품은 조선건국을 배경으로 다뤘으나, 용의 눈물은 이성계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용의 눈물에서 이방원과 충녕대군으로 연기한 유동근과 안재모가 이번 정도전에서는 이성계와 이방원을 연기한다. 90년대 후반 국민적 인기를 끌었던 용의 눈물을 시청한 이들이라면 이번 정도전이 반가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왜 정도전일까. 21세기에 정도전이 다시 주목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강병택 피디는 정도전은 역사적으로 조선을 설계한 사람, 혹은 반역자라는 평가를 듣는다. 하지만 실천하는 지성인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으며 이는 난세라면 난세라 할 수 있는 2014년에도 필요한 화두가 아닌가 싶다고 밝혔다. 정현민 작가는 정도전은 역적으로 몰려 죽었으나 민초들이 핍박받던 시대에 새로운 사고를 한 정치가이자 무혈혁명을 이뤄낸 정치가였다. 정도전이인임정몽주최영 등 난세를 헤쳐 가고자 했던 대정치가들의 고뇌를 그리므로써 결국 꿈을 갖는 게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 고 싶다고 했다. 600여 년 전 한 개혁가의 바람은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네 바람과 꼭 같다. 각종 리더상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떠한 리더를 원하는가. 정도전이 만능형이 아닌 백성의 마음을 살피는 왕을 원했던 것처럼, 독재자가 아닌 재상과 소통하는 왕을 원했던 것처럼 오늘날 역시 이러한 리더가 우리 앞에 있기를 바라고 있지 않은가.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의 집안은 봉화 지역의 향리였다. 고려시대 향리는 지방의 토착세력으로 드라마에서 비춰진 것과 달리 그는 부유층에 속했다. 부친 정운경의 뒤를 이어 과거에 급제한 그는 22세 때 충주사록에 임명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또한 성균관 교관으로서 공민왕의 유학 육성 사업에 적극 참여했다. 시해된 공민왕의 뒤를 이어 우왕이 즉위했다. 우왕이 오르면서 정도전의 반대 세력인 이인임 등이 정국을 주도했다. 원나라의 세력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외친 정도전은 결국 원나라 사신의 마중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오늘날 전라도 나주에 있는 회진현에서 유배생활을 한다. 유배 생활은 그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줬는데, 백성의 삶을 직접 보면서 위민의식을 키웠다. 한 농부가 정도전에게 마음에 두고 있던 말을 했다. 관리들이 국가의 안위와 민생의 안락과 근심, 시정의 득실엔 관심을 두지 않고 녹봉만 축내고 있소! 이는 정도전이 어떤 것이 백성을 위한 일인가를 다시 마음에 새기는 계기가 됐다. 김지윤 기자 jade@newscj.com

새 세상을 향한 대찬 도전(挑戰) (1)

KBS1 대하드라마 정도전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 감명 깊은 대사가 나온다. Beautiful things don't ask for attention(아름다움은 관심을 바라지 않는다) 주옥같은 대사는 KBS1 대하드라마 정도전에서 주인공인 삼봉 정도전(조재현 분)에게 어울리는 말이지 싶다. 그는 오직 바라는 것은 민심을 알아주는 나라와 정치일 뿐 그 외는 소원하지 않는다. 오로지 목표만을 이루기 위해 상대가 누구든 상관하지 않고 돌직구를 날리는 정도전. 그래서 당대 최고 권문세력 이인임(박영규 분)과 대립한다. ◆민심이 곧 천심 임금은 존귀한 존재지만 그보다 더 존귀한 것은 천하민심이다. 천하 민심을 얻지 못하는 정권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정도전 조선경국전 서문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새 왕조를 설계한 인물이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뀌는 격동의 시기, 그 중심에 그가 있었다. 그러나 훗날 이방원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해, 그가 꿈 꿨던 성리학적 이상세계의 실현을 보지 못하고 삶을 마감했던 비운의 인물이다. 그는 선비다운 강직한 기개가 체화된 사람이다. 드라마 정도전은 공민왕이 시해되기 직전인 1374년 가을부터 정도전이 죽음을 맞는 1398년까지 24년간의 이야기다. 내용상 크게 3부로 나뉘는데 제1부는 천명(天命)으로 공민 왕 사후 정도전이 이인임의 눈 밖으로 나게 되고 유배와 유랑살이를 전전하면서 혁명을 결심하고 이성계와 뜻을 함께하는 내용이다. 제2부 역류(逆流)에는 정도전이 이성계와 급진파를 만들어 숱한 장애를 헤치고 조선을 건국하고 제3부 순교(殉敎)에서 조선왕조 건국 이후 나라를 정비하는 그가 요동정벌을 눈앞에 두고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렇다면 실제 정도전의 행적은 어떠할까. 정도전 하면 토지개혁이 떠오른다. 고려 말엔 부익부 빈익빈이었다. 한마디로 양극화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권문 세족의 토지는 산과 강을 경계로 할 정도로 넓었다. 반면 백 성은 땅을 가질 수 없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중산층이 턱없이 없는 나라 경제구조는 위험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도전은 모든 논밭을 몰수해 인구비례로 백성에게 나눠주자고 목청껏 외쳤다. 그러나 기득권층의 반발로 농민에게 경작권을 주는 수조권(收租權)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정도전에게 아쉬움이 남는 토지개혁이었으나, 백성은 자신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준 정도전을 응원하고 지지했다. 이는 곧 새 왕조를 여는 기반이 됐다. 그는 백성의 목소리가 곧, 하늘의 뜻이라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도 백성의 원성을 듣는 시기는 국운이 쇠할 때가 아니던가. 이러한 이치를 깨달은 정도전은 정치 개혁에도 목소리를 높였다. 정도전은 재상 정치를 바랐다. 즉 왕이 아닌, 재상이 통치하는 나라다. 재상은 어떠한 자리인가. 임금을 돕고 모든 관원을 지휘하고 감독하는 자리가 아닌가. 덕장(德長)과 폭군 모두 재상의 정신과 역량에 달려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조선경국전〉에 왕의 자질에는 어리석은 자질도 있고 현명한 자질도 있으며 강력한 자질도 있고 유약한 자질도 있어 한결같지 않으니, 재상은 왕의 좋은 점은 순종하고 나쁜 점은 바로잡으며, 옳은 일은 받들고 옳지 않은 것은 막아서 왕으로 하여금 대중의 경지에 들게 해야 한다라며 재상의 역할을 명시했다. ◆이성계를 만나다 우왕 10년(1384) 정도전은 이성계를 찾았다. 관직에서 물러난 정도전이 이성계의 군대를 본 후 자신의 꿈을 실현해줄 이가 바로 이성계임을 확신했다. 당시 이성계는 여진족 호발 도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함경도 동북면도지휘사로 있었다.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의 세력이 커져만 갔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 때 조정에는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온건세력이, 그리고 정도전과 같은 급진적 개혁세력이 있었다. 급진적 개혁세력의 중심엔 이성계가 있었다. 1392년 정몽주가 이방원의 세력에 사살당하면서 고려의 국운은 끝이 났다. 그리고 새로운 나라, 조선이 들어섰다. 정도전은 개국공신이었다. 나라가 세워진 후에도 여러 사업을 펼쳐 나라의 기반을 탄탄히 했다.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는 것뿐만 아니라 경복궁 및 도성 자리를 정했고, 수도 건설 공사의 총책임자로 그 역할을 다했다. 또한 성리학으로 이상세계를 만들고자 했던 염원대로 경복궁을 비롯한 성문과, 각종 상징물에 유교의 덕목이 담긴 이름을 붙였다. 그는 조선의 최고법전인 〈경국대전〉의 전신 〈조선경국전〉을 지어 태조에게 올렸다. 태평성대 요순시대를 꿈꾸며 임금과 신하가 소통하고 조화를 이루는 왕도정치를 표방했다. ▶2편에서 이어집니다 김지윤 기자 jade@newscj.com

하동 삼성궁, 홍익인간의 출현을 기다린다 (4)

고조선은 홍익인간 이념으로 뭉친 하늘나라의 대인들 삼성궁 건국전에 들어서기 전에 구름 위에 떠있는 듯한 돌계단을 지나면 홍익인간대장군과 이화세계여장군이라고 적힌 돌장승을 만난다. 환인 하나님의 아들 환웅이 창조하고자 했던 홍익인간은 어떤 사람이고, 이화세계는 어떤 나라를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먼저 단군 신화 속에 등장하는 곰과 호랑이는 실제 곰과 호랑이를 말함이 아니라 곰족과 범족 즉 사람으로 보아야 해석이 가능해진다. 한단고기에 나타난 홍익인간의 모습을 엿보면 사제가 쑥과 마늘을 주면서 너희들이 이를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자유와 참된 평등을 이루어 만물을 구제하고 쉽사리 사람까지 교화하는 도리를 아는 대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설중환 고려대 교수는 그의 저서를 통해 한단고기에 보면 고통을 인내로 참아내어 스스로 주인이 되고 남과 나를 하나로 볼 수 있게 되어 만물을 구제하며 사람을 교화할 도리를 아는 대인이야말로 참 홍익인간이라고 분명히 정의하고 있다.고 말한다. 마치 예수가 하나님의 보좌에서 내려오고, 부처가 왕좌의 자리를 박차고 내려오고, 환웅천왕이 하늘에서 태백산 신단수로 내려오듯이 말이다. 대인은 하늘의 덕을 인간 세상에 실현시키고자 한다. 이는 새하늘 새땅을, 불국토를, 홍익인간의 세상을 만들고자 하기 때문이다. (중략) 환인이 태백산을 내려다보며 인간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지라라고 말한 것은 환웅천왕에게 나라를 열어 인간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대인이 되라고 가르친 것이다. 그래서 홍익인간은 우리 조상의 건국이념이 되었다. 모두 함께 홍익인간의 세상을 한 번 만들어보자는 그 뜨겁고 순수한 마음으로 첫 나라를 열었던 것이다. -단군신화 中, 설중환 저- 뿌리 깊은 나무 바람에 아니 휜다했으나, 한국이라는 나무는 뿌리가 송두리째 뽑힐 위기를 겪었어도 아픈지 몰랐고 이 나무가 원래 그 나무가 맞는지, 맞다면 제대로 자라도록 뿌리내리게 해야 하는데 아직도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했다. 그래서 한 나라의 건국이념이라기보다 온 인류의 창조이념과 같은 홍익인간의 목표를 가지고서도 그 나라 사람들 마음속 깊이 자리 잡지 못한 채 허공만 울려왔다. 하지만 한풀선사의 선대 스승의 말과 같이 1984년 이후부터 국운이 돌아와 새로운 시절이 펼쳐질 것을 천명했으니 지리산 삼성궁, 고조선의 정기가 흐르는 이 도량에서 홍익인간이 만들어가는 이화세계를 꿈꿔보자. 나아가 그 이화세계를 만들어가는 주인공이 되어보는 것은 어떨까.

하동 삼성궁, 홍익인간의 출현을 기다린다 (3)

1984년에 민족혼이 샘솟는 우물, 삼성궁을 짓다 환인 하나님, 우편에 아들 환웅, 좌편에 단군을 모시다 단군에 대한 논란을 마음 한편에 두고 환인, 환웅, 단군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경상남도 하동군 청학동에 있는 삼성궁을 찾았다. 삼성궁(三聖宮)은 환인, 환웅, 단군 세 성인을 모시는 성전이란 뜻이다. 삼성궁에 들어서면 사람보다 먼저 크고 작은 돌들이 맞이한다. 주차장 뒤로는 거대한 새 모형과 푸른 날개를 지붕삼은 집들이 있는데 솟대가 많은 곳이니 오리가 아닌가 싶었지만 푸른 학을 상징한다고 했다. 놀이공원에서 볼 수 있는 새 모형과 돌로 쌓은 담 중간 중간에 박힌 둥글둥글한 맷돌, 절구통이 왠지 친근하게 느껴진다. 맷돌과 다듬잇돌은 음과 양의 기운이 함축된 한민족의 생활도구로 우주의 기운을 끌어 모아 한민족의 염원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삼성궁에는 성벽에 박힌 맷돌도 많고, 탑으로 쌓아올린 맷돌도 많았다. 절이나 교회와 같은 종교 시설은 아니지만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만들어진 민족성전이니 경건한 분위기가 유도될 법도 한데 돌의 표정과 풍기는 분위기가 하나같이 순박하다. 단군할아버지도 조선을 건국한 위대한 분이시지만 그 영정에 근엄함보다는 왠지 친절하고 푸근해 말붙이기 쉬운 할아버지 인상을 하고 계신 것처럼 삼성궁도 그리 느껴졌다. 또 삼성궁엔 돌탑이 많은데 이는 고대의 소도를 복원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소도는 삼한 때 천신(天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성지로 신단(神壇)을 설치하고, 그 앞에 방울과 북을 단 큰 나무를 세워 제사를 올리던 곳이었다. 또 죄인이 이곳으로 달아나더라도 잡아가지 못했으며 후대 솟대가 여기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삼성궁의 돌탑을 보고 있니 마이산의 돌탑이 자연스레 연상됐다. 이 같은 삼성궁은 누가 언제 짓게 된 것일까. 이곳은 한풀선사가 1984년 갑자년 음력 3월16일에 기존의 삼성사를 삼성궁이라 개명하고 꾸미기 시작했다. 한풀선사는 낙천선사(1902~1984) 문하생으로 천부경 등을 공부하고 스승으로부터 우리 춤과 노래, 선가무예인 선무와 본국검을 사사받았다. 낙천선사는 제자 한풀에게 한풀아, 너는 앞으로 민족혼을 샘솟게 하는 우물을 파거라. 그러면 누군가 일부러 갖다 넣지 않아도 거기에는 작은 피라미가 생길 것이고, 미꾸라지나 붕어도 생기고, 못된 가물치나 메기도 생길 것이다. 하지만 목마른 자들이 샘을 찾듯 뿌리를 잃은 수많은 자들이 쉬어서 목을 축이게 하라를 말을 전했다. 스승에게 이러한 유지를 받은 한풀선사는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하며 칡넝쿨, 다래넝쿨 등을 거두기 시작했다. 삼성궁 건립을 시작한 1984년이란 연도도 임의로 정한 해는 아니었다. 한빛선사의 스승 공공진인(1807~1910)이 훗일 갑자년이 되면 국운이 돌아와 새로운 시절이 도래할 것이니, 뒷일을 도모함을 게을리 하지 말아라는 예언적인 가르침에서 비롯된 날이었다. 삼성궁 입구에서 팻말이 안내하는 대로 한걸음씩 내딛다보면 돌성이 드넓게 펼쳐진 평지가 나타난다. 그 한가운데 건국전이 세워져있다. 이 건국전에 환인, 환웅, 단군의 영정이 모셔져있다. 먼저 한 가운데가 환인, 그 오른쪽에 환웅, 왼쪽에 단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세 영정 가운데 환인과 환웅은 광채를 발하고 있고 특히 환인의 광채는 환웅과 비교했을 때 훨씬 빛이 강하고 두터웠다. 또 환인은 오른 손에는 책을 움켜쥐고 있고 왼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근엄한 모습으로 서있다. 단군신화 속 환인은 곧 하나님을 뜻하는데, 이 모습은 성경 요한계시록 5장 1절에 묘사된 보좌에 앉으신 이가 안팎으로 썼고 일곱인을 봉한 책을 들고 있는 모습과 비슷했다. 또 사도행전 7장 55절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 계신다는 말과 같이 환인의 우편에 환인의 아들 환웅이 서있었다. 예로부터 하늘을 섬겨왔던 우리 민족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와 알고 보면 닮은 구석이 많다. ▶ 4편으로 이어집니다.

하동 삼성궁, 홍익인간의 출현을 기다린다 (2)

조선을 건국한 단군할아버지, 어디 가셨어요? 민족말살정책은 곧 고조선말살정책 1920년대 일제는 조선인의 민족정기를 말살하지 않고는 도저히 한반도를 자신들의 영원하고도 온전한 식민지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1300년 역사를 가진 일본이 5000년 역사를 가진 민족의 정신력을 이겨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민족말살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은근하면서도 치밀하게 우리나라의 역사를 날조하기 시작했다. 그 식민사학의 핵심에 바로 한민족 역사의 시작 단군이 있다. 드라마 속 주인공을 가장 손쉽게 방황과 혼란의 구렁텅이로 빠트리는 것이 출생의 비밀이듯 조선인들의 구심점, 정신세계를 흩뜨려놓기 위한 최적의 무기가 바로 뿌리를 건드리는 것 곧 뿌리를 의심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단군역사에 대한 논란은 광복 60돌을 맞는 오늘날까지 여전히 진행형이다. 몰라도 되는 역사, 알수록 골치 아픈 역사, 특히 국조 단군은 신화요, 미신이요, 우상숭배라는 생각들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일제 강점기 초대 조선총독 테라우치 마사타케는 조상 단군을 부정하게 하라. 조선인을 뿌리가 없는 민족으로 교육하여 그들의 민족을 부끄럽게 하라고 외쳤다. 3대 총독 사이토마코토는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와 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그들의 외침이 아직도 한반도에 호령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은 곧 단군이 다스렸던 고조선말살정책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는 조선의 정체성과 사상의 뿌리를 말살하기위해 고조선의 존재를 부인했다. 또 임나일본부설 등 한민족의 역사가 일본에서 파생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선 고조선은 없어져야하는 나라였다. 일제는 고조선의 건국과정을 담은 단군신화를 조작된 것이라 생떼를 쓰기 시작했고 이 일에 일본의 사학자, 한국의 사학자들이 투입됐다. 그들의 주장은 이렇다. 단군신화와 고조선에 대해 기록한 일연의 삼국유사와 이승휴의 제왕운기는 고려 말기에 써졌는데 고려 말은 몽골의 침략을 겪었을 때라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단군신화와 고조선을 허위로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제의 주장이 지금까지도 우리들의 잠재의식 속에 남아있는 것은 아닐까. 단군신화에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 가운데서도 그 내용 자체를 역사적 사실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한민족의 사상이 상징적으로 나타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 역시 잘못된 것이라고 고대사 원로 학자 윤내현 교수는 말한다. 옛 사람들은 인간만사는 물론 모든 자연현상을 신이 관장한다고 믿었어요. 예컨대 어느 한 씨족이 다른 씨족과 싸워서 이겼을 경우 그것은 그 씨족의 수호신이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했죠. 이와 같이 모든 일을 신과 연결시켜 생각했고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들은 사람을 주체로 하지 않고 신들을 주체로 한 내용으로 후세에 남겨 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신화는 허황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야기가 신들의 이야기로 변형된 것이죠. 단군신화를 인간들의 이야기로 바꾸면 우리 민족의 성장과정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화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었던 것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 단군사화(史話)라고 부르려 합니다. 또 일연스님은 불교 승려였고 이승휴 선생은 유교 학자였습니다. 이들의 학문 경향은 서로 매우 달랐을 것임에도 그들의 저서에 거의 동일한 내용의 단군사화가 실려 있습니다. 이는 단군사화가 오래전부터 전해져왔으며 고려시대에 일반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조선사편수회는 고조선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전설이나 신화로 만들었다. 백제와 신라 초기 이전의 역사는 아예 없애고자 했다. 일본서기에 백제의 근초고왕과 신라의 내물왕이 처음 등장했는데 일본의 역사가 조선보다 앞섰다는 조작을 하기 위해선 그 이전의 역사는 믿을 수 없는 신화 같은 이야기로 전락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의 사학자들을 제자로 길러냈다. 그중 한 사람이 사학계의 대부 이병도 박사다. 이 박사는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로 깊숙이 관여했고 일제의 시각으로 조선사를 집필했다. 또 조선사편수회의 실무책임자였던 이마니시 류의 제자였다. 이마니시 류는 한국고대사 왜곡에 이론을 제시하며 서울대의 전신 경성제국대학에서 한국고대사를 가르쳤던 인물이다. 그의 사관은 광복 후에도 사학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한편 이병도 박사는 사망하기 3년 전인 그의 나이 아흔에(1986년) 역대왕조의 단군제사가 일제 때 끊겼다며 단군은 신화가 아닌 시조라는 제목 아래 장문의 글을 조선일보에 기고했다. 조선일보는 이병도 박사의 글을 1면 머리기사로 싣고, 같은 날 5면 전면에 실어 당시 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단군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는데 서론이 너무 장황하다고?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국조 단군에 대한 시각은 천 갈래 만 갈래로 나뉘어져있거나 아예 관심없음이 요즘의 실태다. 그리고 기자가 고등학생 때 통일기원국조 단군상이 교정에 세워졌는데 당시 일부 학교에 세워진 단군상의 얼굴, 코, 목이 잘려나가고 그 자리에 십자가가 그려지거나 교회에서 단군상 철거를 위해 학생들의 등교거부를 주도해 논란이 됐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나라를 세운 분에 대한 논란이 이토록 극심한데 건국은 왜 했는지, 홍익인간 이화세계는 무슨 뜻인지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었을까. ▶ 3편으로 이어집니다.

하동 삼성궁, 홍익인간의 출현을 기다린다 (1)

알지 못하게, 무관심하게, 부끄럽게 일제의 시나리오대로 역사를 바라보는 대한민국 지난 5월 온라인상에 역사를 배워야하는 이유라는 제목으로 교사와 학생의 짧은 대화가 올라와 시선을 사로잡은 적이 있었다. 학생은 역사는 왜 배워야하나요?라고 물었고 교사는 꿀밤을 주며 배워야지라고만 했다. 학생은 왜 때리냐고 항의했고 교사는 어쭈 이것봐라. 잘 피하는데?라며 꿀밤세례만 날렸다. 학생은 왜 자꾸 때려요. 역사는 왜 배우냐고요라고 항의했고 이에 교사는 네가 나한테 맞았던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면 두 번째로 때렸을 때 피할 수 있었을까라고 대답한다. 게시물 마지막 줄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는 신채호 선생의 글로 마무리를 했다. 요즘 역사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다. 무관심으로 내팽개쳤더니 오히려 관심을 받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 역사의 중요성은 누구나 알지만 용기를 내서 역사를 제대로 배우고자 하는 이는 많지 않다. 그런데 이상하다? 5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 언제부터 역사에 무관심했던 것일까. 특히 어느 나라보다 전통을 중시해온 민족인데 말이다. 또 우리의 고대사는 왜 그렇게 혼란스러운지. 전쟁, 식민지 등을 겪으며 상처투성이인 역사를 되찾기도 모자란 판에 우리네 사학자들은 강단재야 그리고 식민사관 등으로 어찌나 대립하고 있는지. 항상 그런 의문을 간직해 오던 중 새삼 놀라운 내용을 발견하게 됐다. 역사를 대하는 현재 대한민국의 모습이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쓴 시나리오와 유사하다는 것. 1922년 조선총독이었던 사이토오 마코토는 조선 사람을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해 아래와 같이 말했다. 먼저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라. 그럼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 악행을 들추어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쳐라. 조선인 청소년들이 그들의 부조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라. 그러면 조선인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에 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게 될 것이며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때 일본의 사적, 일본의 문화, 일본의 위대한 인물들을 소개하면 동화(同化)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일본이 조선인을 반(半) 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 ▶ 2편으로 이어집니다

삼천궁녀 눈물에 가려진 백제 멸망의 진실(5)

모든 일에는 조짐이라는 것이 있다. 문제는 그 조짐을 읽어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차이인데 사심에 사로잡혀 있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백제는 망하기 1년 전까지도 정복전쟁에 여념이 없었다. 망할 수도 있는 조짐을 감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승승장구의 이면에는 방심과 안일, 자만이라는 감정들이 슬그머니 자리 잡기 시작한다. 연일 승전보를 울리며 빼앗긴 땅을 되찾는 데만 급급한 나머지, 급변하고 있는 국제정세를 소홀히 여겼던 것은 아닐까. 만약 의자왕이 좀더 몸을 낮추고, 생각을 낮춰서 노련한 김춘추의 외교술을 읽어냈다면, 초강대국 당나라의 입장 변화에 촉을 세우고 유연하게 대응했다면 판세는 바뀌었을 것이다. 의자왕이 강대국과 맞붙었다간 하루아침에 망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못이기는 척 신라 공격을 잠정 보류했더라면 멸망이라는 극단적인 결과를 비켜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주 부여에서 출발해 한강에 뿌리를 내리고 국가터전을 세웠던 백제, 700년의 오랜 역사 속에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며 강성했던 백제는 결국 외교실책으로 멸망했다고 조심스레 단언해 본다. 그리고 승자의 집권으로 백제는 삼천궁녀 의자왕과 같이 왜곡되거나 그 흔적들이 사라져버렸다. 땅속에 묻혀 말이 없는 나라. 감춰진 진실이 드러나는 백제의 부활을 기대하며 오늘날 우리나라를 둘러싼 주변국과의 외교정책에 눈길을 돌린다. 박미혜/ mee@newscj.com

삼천궁녀 눈물에 가려진 백제 멸망의 진실(4)

나제동맹을 저버리고 왕을 죽인 원수를 갚고, 한강을 회복하는 일은 백제왕들이 피해갈 수 없는 숙명적인 과제였다. 그러니 성왕 이후 87년이 지나 즉위한 의자왕 역시 왕이 되자마자 줄기차게 신라를 공격했다. 끊임없는 정복전쟁이 가능했을 만큼 안정적인 국정 운영도 뒷받침되어줬다. 의자왕 당시의 국력은 정림사지 5층 석탑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 탑의 탑신 기단부를 자세히 보면 당나라 소정방이 660년 백제를 멸망시키고 쓴 전승기념문인 大唐平濟國碑銘(대당평제국비명)이 빼곡히 새겨있다. 그 가운데 백제의 인구가 5도독 37주 250현 24만 호 계산한 즉, 620만 명이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 수가 얼마나 정확한지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어쨌든 새겨진 인구수를 통해 백제가 강성한 국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선제공격도 백제, 승리도 백제. 642년 의자왕은 경남 합천 지역에 있는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는데 이 전투에서 신라 김춘추(신라 29대 왕)의 딸과 사위가 죽게 된다. 딸의 사망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기둥에 기대어 종일토록 눈을 깜빡이지 않고서 사람이 지나가도 알지 못할 정도로 슬퍼했다고 한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 백제를 큰 나라요, 자신들을 작은 나라에 비유했던 신라가 대야성 전투 참패를 계기로 백제 정벌의 뜻을 세우게 된다. 김춘추는 당의 군사 원조를 얻기 위해 신라의 제도와 연호, 복식을 모두 당나라의 것으로 바꾸는 등 사대외교정책을 전면에 내세웠고 적국이었던 고구려에까지 협상을 제안했다. 당나라가 신라와 군사연합을 맺었을 초기까지만 해도 백제는 당나라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해마다 조공과 사신을 보내며 우호관계를 다져왔다. 하지만 당나라는 고구려를 정복하려는 숨은 야욕이 있었다. 때마침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정벌하자는 제안을 했다. 당나라는 신라를 이용해 백제를 정벌한 뒤 고구려를 치고 나아가 한반도 전역을 통치하려는 욕심으로 백제 대신 신라를 택했다. 격동의 동북아시대, 신라 김춘추는 사활을 건 대당외교를 펼쳐 당시 초강대국 당나라를 우군으로 만들었고 이런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했던 백제는 당나라의 노골적인 신라 편들기와 신라에 대한 공격을 멈추라는 주문에 당혹해하다 652년에 당나라와 관계를 청산하고만다. 그로부터 8년 후인 660년 13만의 당군과 5만의 신라군 합이 18만 대군과 맞닥뜨리게 된다. 당군은 서해를 건너 백제로 진군했고 김유신이 거느린 신라군은 육로로 백제를 공격했다. 이때 사비로 가기 위한 최후의 관문 황산 앞 벌판에서 백제의 계백장군이 이끄는 5천 결사대가 신라군과 싸우다 장렬한 최후를 맞게 된다. 계백은 처자를 죽이고 비장한 각오로 출전했고, 장군의 정신을 따라 5천 결사대 역시 치열한 사투를 벌였지만 중과부적으로 대패하고 말았다. 사비성으로 가는 길은 뚫리고 결국 백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박미혜/ mee@newscj.com ▶ 다음 (5)편으로 이어집니다.

삼천궁녀 눈물에 가려진 백제 멸망의 진실(3)

백제의 끝을 이야기하기 전에 백제의 시작부터 짚고 가자. 한강에서 시작한 백제가 왜 백마강 유역까지 내려가게 됐던 것인지 말이다. 백제는 도읍지의 위치에 따라 한성백제 493년 (BC18년~AD475년), 웅진백제 63년(AD475년~ AD538년), 사비백제122년(AD538년~AD660년)으로 나뉜다. 초기 백제는 한강유역을 끼고 있는 한성 곧 지금의 서울에 수도를 두고 한반도의 가장 풍요로운 지역을 차지하며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 특히 4세기 근초고왕의 맹활약을 통해 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이룩하며 고대 국가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그러나 AD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으로 왕도인 한성이 함락되고 21대 백제왕인 개로왕이 전사하게 되면서 위기를 맞게 된다. 왕도를 빼앗긴 백제는 한성을 버리고 웅진 곧 지금의 공주로 수도를 옮긴다. 500년의 한성시대를 마감하고, 웅진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주변이 험한 산세로 둘러싸인 웅진은 적을 방어하기에 매우 유리한 곳이었다. 그러나 웅진 천도 후엔 한성시대 만큼 중앙집권적 정치를 펼치지 못했다. 개로왕이 전사한 후 그의 아들 문주가 즉위하여 웅진으로 천도하고 다시금 국방에 힘을 기울였으나 실추된 왕권을 세우고 국력을 강화하는 일이란 쉬운 게 아니었다. 결국 문주왕을 비롯해, 삼근왕, 동성왕까지 63년이라는 기간 동안 세 명의 왕이 모두 유력 귀족에 의해 피살되고 말았다. 웅진시대를 살았던 왕들에게 웅진은 아마도 비극의 땅이었을 것이다. 동성왕 이후 즉위한 무령왕은 선대왕들이 귀족에 의해 살해되는 것을 목격해왔다. 그래서 특히 신구 귀족세력들의 균형유지에 힘썼다.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해 지방에 대한 통제력도 강화했다. 백제를 다시 강국으로 만들며 중흥을 이뤄낸 무령왕, 비로소 백성과 왕실은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이때 백제 문화도 꽃피게 된다. 하지만 늘어나는 인구와 좁은 땅, 금강의 범람으로 인한 피해 그리고 왕실의 위신을 회복하기 위해선 새로운 땅이 필요했다. 그래서 무령왕의 아들 성왕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비로 천도를 단행한다. 성왕은 왜 사비를 새 도읍지로 삼고자했던 것일까. 당시 사비는 도읍지로서 불리한 점이 많은 곳이었다. 지반이 낮았으며 수시로 물이 차오르는 습지였기 때문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버려진 땅이었다. 하지만 토호 세력이 없어 왕권을 강화할 수 있고, 넓은 땅이 펼쳐져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또 백마강을 휘감아 도는 지형으로 배들의 정박이 자유롭기 때문에 바다를 이용해 더 넓은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었다. 대륙의 끝자락이 아닌 해양의 중심 백제. 무엇보다 사비를 감싸고 있는 백마강은 외부의 침공을 막을 수 있는 자연 해자(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밖을 둘러 파서 못으로 만든 곳)역할을 했다. 모든 조건을 갖춘 땅이 어디 있을까. 성왕은 사비의 가능성에 올인했다. 도읍지는커녕 사람이 살기 어려운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땅이었으나 약점을 역으로 이용하거나 보완해 새로운 도성, 계획 신도시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습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흙을 파내고 주변의 물을 한 곳으로 모으는 인공 저수지를 만들었다. 그 예가 궁의 남쪽에 있다하여 이름 붙은 궁남지다. 저수지에 모인 물은 농경수나 홍수를 조절해주었을 것이고, 파낸 흙은 도성을 쌓는데 사용했을 것이다. 또 무른 토양을 다지는 데는 판축공법을 썼는데, 마치 시루떡을 여러 장 쌓아올린 것 같이 서로 다른 흙을 교대로 부으면서 절구 같은 도구로 꾹꾹 다져서 만들었다. 돌보다 강한 흙성을 쌓았던 것이다. 성왕은 538년 사비천도 이후 왕권강화와 백제중흥을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했다. 중앙의 16관등제와 22부제, 불교 교단 정비 등 체제정비를 위한 개혁정치를 실현해 나갔다. 551년에는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해 70여 년 만에 한성 고토를 회복했다. 그러나 비밀리에 고구려와 동맹을 체결한 신라의 배신으로 한강유역을 다시 신라에게 빼앗기고 백제의 성왕은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 매복병에 의해 시해되고 만다. 영원한 동맹은 없다는 진실이 확인되는 대목이다. 백제 비극의 시작은 나제동맹의 결렬에서 오는 배신감과 성왕의 죽음 그리고 비옥했던 땅 한성에 대한 그리움에서 그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박미혜/ mee@newscj.com ▶ 다음 (4)편으로 이어집니다.

삼천궁녀 눈물에 가려진 백제 멸망의 진실(2)

백마강의 고요한 달밤아 고란사의 종소리가 들리어 오면 구곡간장 찢어지는 백제 꿈이 그립구나 아~ 달빛 어린 낙화암의 그늘 속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백마강의 고요한 달밤아 철갑옷에 맺은 이별 목메어 울면 계백장군 삼척검은 임 사랑도 끊었구나 아~ 오천결사 피를 흘린 황산벌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백마강』가사 아름다운 이 땅에 금수강산에 단군할아버지가 터 잡으시고 홍익인간 뜻으로 나라 세우니 대대손손 훌륭한 인물도 많아 고구려 세운 동명왕, 백제 온조왕 알에서 나온 혁거세 만주벌판 달려라 광개토대왕, 신라장군 이사부 백결선생 떡방아 삼천궁녀 의자왕 황산벌의 계백 맞서 써운 관창 역사는 흐른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가사 천 명의 후궁을 뒀다는 솔로몬보다 세 배나 많은 삼천 궁녀를 거느린 의자왕. 백제 역사는 몰라도 의자왕 모르는 사람은 없다. 방탕군주, 한량의 대명사가 된 인물이니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1950년대를 풍미했던 가수가 부른 백마강이란 노래에서 삼천궁녀가 등장해 대중들의 인식 속에 깊이 자리 잡는 계기가 됐고, 자라나는 새싹들이 부르는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서도 의자왕은 삼천궁녀와 함께 등장한다. 그러니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역사가 되어버렸다. 한번쯤은 궁녀가 삼천 명이나 되는 것은 좀 심하지 않을까?하는 의구심이 들긴 해도 생각은 거기까지, 패망국의 마지막 왕이 허랑 방탕했을 것이라는 가정에 크게 문제될 것은 없어 보인다. 게다가 궁녀들이 투신했다고 알려진 낙화암 고란사라는 절에는 삼천궁녀를 묘사한 그림이 있는데 그 그림은 또 얼마나 사실적인가. 치마를 뒤집어쓰고 강물 속으로 뛰어드는 궁녀, 떨어져야할 순서가 다가오자 뒷줄에 서있는 궁녀와 부둥켜안고 눈물짓는 궁녀, 뒤에선 번뜩거리는 칼을 들고 신라 군사들이 쫓아오는데. 그런데 그림 속에서도 삼천 명이나 되는 궁녀가 줄서서 기다리기엔 낙화암 면적이 좁아 보인다. 실제 낙화암도 그렇고. 한번만 더 생각해보면 동화 속 이야기 같은 삼천궁녀를 아무런 의심 없이 역사의 한 장면으로 생각해온 것은 아닐까. 만약 의자왕이 삼천궁녀의 치맛바람에 휘둘렸던 것이 아니라면, 실추된 의자왕의 명예는 어떻게 회복해야할까. 또 백제가 망한 진짜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삼국사기에는 의자왕에 대해 훌륭하고 용감하였으며 담력과 결단력이 있었다 효로서 부모를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가 깊어 해동의 증자(공자의 제자 중 효성과 우애가 깊었던 제자가 증자임)라 불리었다 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의자왕과는 사뭇 다른 기록들이다. 뿐만 아니라 의자왕은 재위 20년 동안 신라를 10여 차례 공격하고 40여 개의 성을 함락시키기도 했다. 660년 멸망하기 1년 전까지도 신라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을 만큼 정복활동에 여념 없는 군주였다. 의자왕에 대한 진면모가 가리어져 있었다는 것은 그의 왕명에서도 엿볼 수 있다. 왕의 시호는 왕이 죽은 후에 사가에 의해 붙여지는데 의자왕은 의롭고(義) 자애로운(慈) 왕이란 뜻이다. 의자왕이 알려진 대로 방탕군주였다면 그와 같은 왕명은 붙지 않았을 것이다. 사비천도를 단행했던 성왕을 거룩할 성(聖)을 붙여 떠받드는 것처럼 의자왕 역시 성왕만큼이나 백제중흥과 한성 고토 회복을 위해 공을 세우며 백성들의 신임을 두텁게 받았던 왕이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삼천궁녀는 사서에 기록된 내용이 아니었다. 학자들은 조선시대 문인 민재인 선생의 시어 중 구름 같은 삼천궁녀 바라보며 후궁들의 고운 얼굴에 눈이 어두웠네라는 표현에서 비롯됐을 것으로 추측한다. 즉, 시어에서 비롯된 표현이 대중가요 속으로 들어가 구전으로 이어지면서 역사로 자리를 굳혔던 것이다. 백제의 멸망이 의자왕의 인간적인 결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면 백제는 왜 망한 것인가. 박미혜/mee@newscj.com ▶ 다음 (3)편으로 이어집니다.

삼천궁녀 눈물에 가려진 백제 멸망의 진실(1)

가만히 있어도 땀이 주르르 흐르는 땡볕 더위 8월 중순, 답사 일행은 사비 백제의 흔적을 찾기 위해 산정상도 마다하지 않고 올랐다. 먼저는 지금의 부여로 도읍을 옮긴 성왕이 천도의 꿈을 키우며 올랐을법한 해발 107m의 부산(浮山). 부산 정상에 오르니 백마강이 휘감고 있는 부여 군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천혜의 방어선을 가진 땅 부여가 한 눈에 펼쳐져 있으니 천도의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었으리라. 두 번째, 삼천궁녀가 몸을 던졌다고 전해지는 낙화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서 겹겹이 서있는 바위들과 그 어딘가에서 몸을 던졌을 궁녀들을 생각하며 백마강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이번엔 강에서 낙화암을 바라보기 위해 배를 타니 망국의 슬픔을 감추는 듯, 푸른 잎들이 낙화암 절벽을 뒤덮고 있다.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는 겨울이 오면 절벽의 거친 바위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1400년 전 백제 멸망의 진실을 말해주려나. 절벽 끝으로 내몰린 백성들, 절박했던 그 순간들을 상상해본다. 세 번째, 백제가 망하기 직전 신라와 혈전을 벌였던 황산벌 전투. 전적지를 찾던 중에 웃지 못 할 에피소드 하나. 황산벌전적지가 어디냐고 묻는 필자에게 이 무더운 날에 논산까지 와서 황산벌을 찾는 것을 보니 계백장군 시절에 태어났던 여인이 환생한 것 같다며 아주 진지하게 말을 건네는 분이 있었다는 것. 뜬금없이 환생한 여인이 되어 신라 5만 대 백제 5천이 싸웠던 현장에 도착했다. 군사들의 터질 듯한 함성이 들리는 것만 같다. 그 외에도 백제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정림사지오층석탑, 궁남지, 능산리 고분군, 국립부여박물관, 백제역사문화관 등을 통해 백제의 왕들,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만나고 느끼고 체험해본다. 부여답사는 1400년 전 역사를 찾아 나선 여행이었지만, 사실은 미래를 열기 위한 여행이었다. 학창시절 달달 외워도 시험이 끝나면 아무것도 기억에 남지 않는 그런 역사가 아니었으니까. 깨알같이 얽히고설킨 전후관계를 생각하며 왜 그랬을까?하는 물음표를 마음에 품고, 땀범벅이 되며 발로 찾은 역사의 현장에서 얻은 것은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였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처럼, 수천 년 전의 일을 찾아 나선 길이었지만 언제나 마지막은 현실과의 비교였다. 박미혜/mee@newscj.com ▶ 다음 (2)편으로 이어집니다.

[기고] 3·1절 기념 행사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서

31정신구국운동범국민연합 김동환 상임총재 천도교 전 교령 삼일절은 우리 민족이 일제 식민지로부터 독립을 되찾기 위하여, 온 겨레가 하나로 뭉쳐 독립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던 날을 기리는 정부의 4대 국경일 중 하나이다. 만세를 부르다가 수많은 인명을 빼앗겼던 이 날은 역사적으로 오직 한번 있었던 중대한 날로 온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 용감한 한민족의 행동을 통하여 일본 외교의 허위성이 드러났고 한민족은 생명을 받쳐가며 독립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어 2차 세계대전 종전을 앞두고 참전국들이 가진 카이로 회담과 포츠담 선언에서 종전 후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기로 확정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31운동은 당시 의암 손병희 선생을 주축으로 10년 전부터 치밀한 계획을 세웠던 운동이다. 특히 천도교를 중심으로 일본 헌병의 날카로운 감시를 피해가며 막대한 자금을 모았고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 33인이 민족대표로 서명한 독립선언문을 작성하여 전국 방방곡곡에 사전 배포하였다. 또 1919년 3월 1일 정오를 기해 전국 각처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비밀 연락을 취하였다. 당초 탑골(파고다) 공원에서 민족대표 33인이 선언문을 발표하기로 했으나 거사 당일 민중과 학생들의 우발적 선동으로 희생이 커질 것을 염려하여 일본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독립국과 자주민임을 천명하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파고다 공원에서는 학생 대표가 낭독했다. 화산이 폭발하는 듯 울려퍼진 독립만세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고 태극기의 물결은 온 천지를 누볐다. 왜경이 휘두르는 장검과 쏘아대는 총탄에 무참히 쓰러지는 동포들의 비명을 들으면서도 조금도 겁내지 않고 만세를 외쳤던 엄청스러운이 역사는 세계 역사에서도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운 우리 민족만이 할 수 있는 위대한 행동이었다. 그로부터 시작된 독립만세 운동은 끝없이 펼쳐져 산간벽촌까지 번져 갔다. 한 달 뒤인 4월 1일에는 16세의 어린 소녀의 몸으로 천안의 아우내 장터에서 용감하게 민중을 선도하며 만세를 부르다 감옥에서 비참한 최후를 마친 유관순 열사와 같은 인물도 나타났다. 그의 업적은 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그런데 최근 유관순 열사와 관련된 행사를 주관하는 단체들과 이를 취재하는 보도진들에게 특별히 묻고 싶은 말이 있다. 31절 행사와 관련한 취재와 특집 방송 및 언론 기사가 대부분 유관순 열사에만 치중되어 있으며 손병희 선생을 비롯한 민족대표들의 치밀하고도 계획적인 거사 준비, 희생, 이후의 독립운동 등에 대해선 아주 잠깐 다루거나 아예 다루지 않고 있느냐하는 것이다. 이에 뭔가 주객이 전도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유관순 열사의 만세 시위와 희생은 31운동사에서 한 송이 꽃과 같다면, 손병희 선생과 민족대표들은 씨에 해당한다. 그런데 씨 없이 꽃이 필 수 있겠는가. 꽃이 아무리 아름답더라도 먼저 뿌려진 씨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씨가 뿌려졌기 때문에 수천 송이의 꽃떨기가 이루어져 거족적 운동으로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인데, 왜 유관순 열사만 31독립운동의 영웅처럼 다루고 있는 것인가. 온 겨레가 한 마음으로 뭉쳤을 때가 언제 있었으며, 그 때만큼 용기 있는 민족이었을 때가 언제 있었으며, 이 운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치밀하게 계획하고 추진해 왔던 의암 손병희 선생 같은 분과, 목숨을 초개 같이 버리기로 작정하고 선언문에 용감하게 서명하신 애국선열들이 언제 또 있었던가. 유관순 열사의 고향 아우내를 찾기 전에, 31독립만세운동이 거족적으로 일어날 수 있도록 모의하고, 목숨 건 만세 선창자를 길러낸 봉황각을 먼저 찾아보고, 그 곁에 있는 의암 손병희 선생의 묘소와, 거국적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 모금의 진원지인 천도교중앙대교당과 파고다 공원의 동상들도 살피면서 유관순 열사를 극찬함이 옳지 않은가. 그리고 훌륭하신 사학자님들에게도 당부 드린다. 3.1운동의 실체를 왜곡하면서까지 자기네 종파와 자기고향의 특정 인물만을 부각시키는 아전인수격 해석을 하지 말고 학문적 양심으로 정확한 사실을 밝혀주기를 주문한다. 불과 90년밖에 되지 않은 민족적 거사 3.1운동의 역사적 의의가 제대로 정립되지 못하고 있다면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해방 후 미군정은 민족적 행사와 민족종단의 업적을 의도적으로 폄하하거나 누락시켰으며, 그 미군정의 힘을 등에 입은 정권과 그 종교 조직들이 집권하면서 그런 현상은 더욱 심화되었다. 지금도 그런 류의 학파나 종파에서는 비오는 날 장독 뚜껑 덮은 공을 내세우며 그것을 부각시키려 할 뿐 장을 만들어 모두가 먹을 수 있게 한 주인공의 역사적 사실은 왜곡하고 있으니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2005년에는 삼일절에 정부기념 행사를 유관순 기념관에서 한 적이 있어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의 3대 종단 대표들이 역사왜곡이라고 강력히 항의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2010년 제91주년 기념식을 또다시 유관순기념관에서 하기로 결정했다가 3.1절을 불과 이틀 앞두고 독립기념관에서 하기로 전격 변경한 일이 있었다. 앞으로는 두 번 다시 이런 오류를 범하는 일이 없기를 다시 한번 촉구하는 바이다.

[3.1절 특집] 한민족 평화 미래학 ‘기미독립선언문’

할 말 다 하는 감성 자극 선언문 양심에 호소하여 스스로 깨우치게 하는 글 [글마루=박혜옥 기자] 해마다 3월이 되면 3.1운동 기념행사로 전국이 떠들썩하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누리는 자유를 당연한 듯 여기며 살다가도 일제강점기 시절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나면 그런 착각에서 벗어나 지금의 자유는 순국선열들의 목숨과 바꾼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3.1운동의 의의, 국가보훈처에서 인정한 독립운동가 등 다소 분명한 역사와 인물은 크게 고민할 거리가 없다. 하지만 가치판단이 엇갈리는 역사는 현기증이 날만큼 난해하고 고민스럽다. 예를 들어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상황과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이 만나 독립운동과 친일행위의 선을 넘나들었던 역사가 그러하다. 그래서 다시 주목하게 되는 것이 기미독립선언문 내용 그 자체이다. 선언문의 내용을 기초한 최남선과 민족대표 33인에 대한 평가는 많이 엇갈린다. 한편에선 민족대표 33인 절반 이상이 변절되었고, 만세운동을 했던 것도 민중과 학생들이었기에 그들의 역할은 선언문을 작성하고 낭독했던 것까지였다고 말한다. 또 한편에서는 그렇게 평가하는 것은 죄받을 행동이라며 민족대표 33인은 목숨을 걸고 독립을 열망했던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인물들에 대한 평가는 엇갈릴지언정 최초로 독립운동을 기획하고 수년전부터 준비했던 의암 손병희와 나아가 천도교를 비롯한 각 종교의 이상향이 반영된 기미독립선언문의 내용만큼은 3.1정신의 요체로서 변함이 없다. 1919년 기미년에 낭독되었다하여 붙여진 이름 기미독립선언문. 대부분 사람들에겐 중고등학교 국어시간에 별다른 감흥 없이 한자 풀이에 집중하다 잊혀진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다시 세 번만 읽어보시라. 처음엔 설렁 설렁 훑어 읽기로, 두 번째는 이해를 동반하여, 세 번째는 그 시대를 상상하면서 정성을 다해. 특히 일본인의 입장에선 곱씹을수록 은근히 화나게 하는 글이었을지 모른다. 그들을 흥분시키는 과격한 표현 하나 없이 전략적 돌려치기로 정곡을 콕콕 찌르는, 그야말로 촌철살인의 명문이기 때문이다. 열강이 일본과 손을 잡고 있는 국제 정세 속에서 조선의 억울함을 들어주고, 편이 되어줄 나라는 한 곳도 없었다. 오히려 조선의 독립운동이 일본의 심기를 건드려 마치 폭동이 일어난 것처럼 세계에 알려진다면 세계 사람들의 동정을 얻지도 못할 뿐더러 일본군에 의해 희생자만 속출하게 될 것이 뻔했다. 그러니 일본의 행위는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에 의한 것이며, 신의 없는 행위요, 일본 정치가들의 공명심에 희생된 부자연스럽고 불합리한 것임을 스스로 깨닫고 양심에 준하여 돌아갈 것을 은은한 가운데 감성에 호소하고자 했던 것이다. 기미독립선언문의 마지막 바람 새천지와 도의(道義)의 시대 도래 선언문의 내용은 암담한 그늘에서 쓴 글이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미래지향적이다. 아아! 새 천지가 눈앞에 펼쳐지도다. 힘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오도다. 지난 온 세기에 갈고 닦아 키우고 기른 인도의 정신이 바야흐로 새 문명의 밝아오는 빛을 인류의 역사에 쏘아 비추기 시작하도다. 새 봄이 온누리에 찾아들어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는도다. 얼어붙은 얼음과 찬 눈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것이 저 한때의 형세라 하면, 화창한 봄바람과 따뜻한 햇볕에 원기와 혈맥을 떨쳐 펴는 것은 이 한때의 형세이니, 하늘과 땅에 새 기운이 되돌아오는 때를 맞고, 세계 변화의 물결을 탄 우리는 아무 머뭇거릴 것 없으며, 아무 거리낄 것 없도다. 우리의 본디부터 지녀온 자유권을 지켜 풍성한 삶의 즐거움을 실컷 누릴 것이며, 우리의 풍부한 독창력을 발휘하여 봄기운 가득한 온 누리에 민족의 정화를 맺게 할 것이로다. 조선의 독립은 동양의 평화뿐 아니라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에 필요한 단계이니만큼 감정상의 문제가 아님을 주장하며 힘과 무력의 시대가 가고 도의 시대가 올 것이라 예견했다. 낡고 후패한 시대의 가치관을 던져버리고 도의의 시대 곧 인류평등과 세계평화 정신이 세계를 이끌어나가기에 머뭇거릴 것도 없고, 거리낄 것도 없노라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기미독립선언서가 기대했던 도의의 시대는 과연 도래한 것일까. 지구촌 유일 분단국으로 오히려 인류의 생존까지 위협하며, 물질만능의 노예가 되어 위력의 시대를 살고 있지는 않는가. 약 100년 전 독립이라는 대의 앞에서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로 뭉쳐 독립운동의 분수령이 되었다. 오늘날도 한반도의 통일과 인류평화라는 대의 앞에서 세계의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로 뭉쳐 평화운동의 분수령이 되어야 할 때인 듯하다. 결국 그 일을 해내는 자가 도의의 시대, 새 천지의 시대를 펼치며 화창한 봄바람과 따뜻한 햇볕이 되어 기미독립선언문의 마지막 바람을 이루지 않겠는가. 참고문헌 기미독립선언문의 현대적 의의/윤치영 기미독립선언서의 미래지향적 조명/하인호

[3.1절 특집] 근정전에 오른 일본기(旗)

슬픈 현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네 [글마루=김지윤 기자] 1년 가운데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3월이다. 본격적으로 생명의 기운을 돋우는 봄의 알림에 마음이 설렌다. 하지만 완연한 봄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모르게 겨울의 냄새가 난다. 바람 내음이 꽤 봄다워졌지만 말이다. 아직은 도톰한 옷을 입은 내외국인들이 경복궁 이곳저곳을 보느라 여념 없다. 궁 곳곳엔 봄을 알리는 생명들이 얼굴을 빼곰히 내밀며 방문객을 맞는다. 궁을 둘러본 이들은 단아하면서 화려한 근정전을 보며 사진기의 셔터를 누르기에 바쁘다. 부지런하게 정사를 돌보겠다(勤政)란 신념이 건물 태(態)에서 묻어난다. 조선과 대한제국을 대표하는 5대 궁 가운데 단아하면서 위엄이 느껴지는 궐은 경복궁(景福宮)이다. 오죽하면 이름마저도 복스러울까. 빛나는 복이 깃든 궁이라니 의미부터 찬란하다. 사실 명칭은 시경 주아(周雅)에서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두 자를 따서 지었으나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가장 큰 복인 태평성대를 이루는 것이 위정자와 백성의 가장 큰 소망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바람을 고스란히 담은 건물이 경복궁(景福宮)근정전(勤政殿)이다. 근정전은 어느 궁에서도 볼 수 없는 기품을 뿜어내고 있다. 근엄한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 모습을 모두 담고 있다. 그래서 국왕의 즉위식, 세자 책봉식, 문무관의 조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국가 공식행사나 의례를 이곳에서 펼쳤다. 정종을 비롯해 세종, 단종, 세조, 성종, 중종, 명종, 선조 등 여덟의 임금이 근정전에서 즉위했다. 문무관의 조례는 월 4번 열렸다. 이때 한성에 거주하는 문무백관이 참여했다. 94년 전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나다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한반도에서 하늘과 가장 맞닿은 이들은 근정전 기와에 터를 잡은 삼장법사를 앞세워 손오공과 저팔계, 사오정 등 어처구니가 아닐까 싶다. 고종 때 중건된 이래 한 세기 가까이 근정전과 함께하고 있다. 눈비가 내려도, 햇볕이 내리 쬐어도 어처구니는 바지런히 전각을 지킨다. 조선 최고(最高)의 궐이기에 그들은 한눈을 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제 자리가 좋은지 여태 떨어지지 않고 꼭 붙어있다. 근엄한 궐에 우스운 모습을 하고 있어 오가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하지만 사실 그들에게도 아픈 기억이 있다. 바야흐로 1910년 8월 29일한일강제병합 조약이 발효되던 날이다. 근정전을 배경 삼아 일장기가 버젓이 올라갔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후 본격적으로 일제는 대한제국의 국권을 찬탈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만으로도 치욕스러운 일이거늘 300여 년 후에 왜(倭)에게 국권을 빼앗기게 되니 당시 백성의 마음은 이루어 말할 수 없이 침통했을 것이다. 이렇게 근정전엔 슬픈 사연이 있다. 자연과 어울리다 다포식 팔작지붕으로 화려함의 극치를 자랑하는 근정전. 이곳에서 더 이상 외국 사신을 맞지도, 경연을 베풀지도 않지만, 그 대신 수많은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그중 대부분의 사람은 근정전이 자연과 어우러진 멋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북악산을 배경으로 우리나라 최대의 목조건축물로 왕의 품격을 고스란히 느끼고 가는 듯하다. 특히 근정문에 들어서 오른쪽 모서리에서 전각을 바라보면 북악산과 인왕산을 양옆에 끼고 듬직한 월대 위에 날개를 활짝 편 근정전의 팔작지붕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 이러한 뷰포인트(View point)에 대한 감상을 함께 나눈 이가 바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 교수다. 그는 답사객을 안내할 때 근정문 행각 오른쪽 모서리에서 근정전을 바라보게 한다고 한다. 근정전을 높이는 데 월대의 공로가 크다. 월대엔 벽사의 역할을 하는 어처구니, 십이지신상, 해태상과 함께 화재에 대비해 물이 항상 채워진 무쇠드므가 있다. 그리고 곳곳에 정교한 조각들이 근정전의 품위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무조건 왕의 권위만 내세운 궐은 아니다. 다른 곳과 달리 잘 다듬어지지 않은 박석들이 가득한데 이는 그 사이사이에서 풀이 돋아나는 모습을 보며 생명의 존엄성을 느끼며 작은 미물일지라도 귀하게 여기라는 뜻이 담겨 있다. 위정자는 백성의 작은 것 하나라도 보살필 줄 알아야 한다는 교훈이 곳곳에 담겨있다. 근정전엔 역사도 담겨있으나 조상들의 교훈과 지혜를 함께 느낄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손으로 직접 근정전 모형을 만들면서 그 정신을 되짚어 보는 것은 어떠할까. (사진제공 영공방)

평화로울 땐 직언으로, 국난 앞에선 목숨으로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영웅으로 이순신, 권율, 곽재우는 알아도 1592년 8월 18일 금산성 전투에서 700명의 의병과 함께 순절했던 중봉조헌은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그는 스승이었던 율곡 이이와 함께 문묘에 배향된 동국 18현 중 한 분이다. 중봉은 부모에 대한 효심이 깊었다. 그래서 공부할 때는 전심(專心)으로 해야 한다는 아버지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아무리 밖에서 요란스럽게 떠들어도 홀로 단정히 앉아 글을 읽었다. 또 친모가 중봉 나이 10살에 돌아가시고 이후 계모가 아무리 그에게 까다롭게 굴어도 그는 항상 웃는 얼굴로 새어머니를 대하며 끝까지 부모 봉양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효심에서 비롯된 전심 어린 글공부는 평생 그를 책에 파묻히게 했다. 농사를 지을 때도,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도 중봉은 언제 어디서나 책을 손에서 떼지 않는 독서광이었다. 또 중봉은 오직 배운 것을 실천했을 때만이 학문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실천하지 않는 학문은 필요가 없다는 것이 분명한 그의 지조였다. 중봉은 실천궁행의 표본이었던 것만큼 언사도 강직하기로 유명했다. 그의 직언은 학문의 깊이에서 나온 자신감이요, 충(忠)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거듭된 상소는 선조 임금의 노여움을 사 함경도 길주에 유배되기도 했다. 그리고 끝내 그는 옥천으로 내려와 은거하게 된다. 그가 관직에서 물러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전국 각지에서 중봉에게 학문을 배우기 위해 유학생들이 몰려들었다. 결국 그들이 임진왜란 때에 중봉과 함께 의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주역이 된다.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영웅으로 이순신, 권율, 곽재우는 알아도 1592년 8월 18일 금산성 전투에서 700명의 의병과 함께 순절했던 중봉조헌은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그는 스승이었던 율곡 이이와 함께 문묘에 배향된 동국 18현 중 한 분이다. 중봉은 부모에 대한 효심이 깊었다. 그래서 공부할 때는 전심(專心)으로 해야 한다는 아버지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아무리 밖에서 요란스럽게 떠들어도 홀로 단정히 앉아 글을 읽었다. 또 친모가 중봉 나이 10살에 돌아가시고 이후 계모가 아무리 그에게 까다롭게 굴어도 그는 항상 웃는 얼굴로 새어머니를 대하며 끝까지 부모 봉양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효심에서 비롯된 전심 어린 글공부는 평생 그를 책에 파묻히게 했다. 농사를 지을 때도,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도 중봉은 언제 어디서나 책을 손에서 떼지 않는 독서광이었다. 또 중봉은 오직 배운 것을 실천했을 때만이 학문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실천하지 않는 학문은 필요가 없다는 것이 분명한 그의 지조였다. 중봉은 실천궁행의 표본이었던 것만큼 언사도 강직하기로 유명했다. 그의 직언은 학문의 깊이에서 나온 자신감이요, 충(忠)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거듭된 상소는 선조 임금의 노여움을 사 함경도 길주에 유배되기도 했다. 그리고 끝내 그는 옥천으로 내려와 은거하게 된다. 그가 관직에서 물러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전국 각지에서 중봉에게 학문을 배우기 위해 유학생들이 몰려들었다. 결국 그들이 임진왜란 때에 중봉과 함께 의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주역이 된다.

[역사 속 오늘] 1965년 1월 김기수, 대한민국 첫 프로복싱 챔피언 탄생

[글마루=글마루] 도시는 열광하고 있었다. 잡음으로 끊기는 라디오와 동네에 몇 안 되는, TV 앞에 모인 사람들은 동양챔피언 타이틀을 우리나라 선수가 거머쥐었다는 뉴스에 흥분하고 있었다. 일본 선수들의 독무대 동양타이틀에서 미들급 챔피언 가이즈 후미오를 6회 만에 KO시키고 여유 있게 링에 기대는 모습은 보는 이들을 매료시켜 버렸다. 그는 아마전적 88전 87승 1패, 프로 전적 49전 45승(16KO) 2무 2패의 위대한 기록을 세운 김기수 선수이다. 그가 대한민국에 첫 프로 동양챔피언 벨트를 선사했다. 하지만 동양챔피언은 시작에 불과했다. 아마추어 시절 87전승의 그에게 첫 패배를 안겨준 세계챔피언 이탈리아의 벤베누티를 판정승으로 꺾어 우리나라 선수로는 처음으로 프로복싱 WBA주니어 세계챔피언을 따냈다. (1966). 판정이 김기수 선수의 승리로 내려진 후, 경기장 내에서 관전 중인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뛰어가 승리를 전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재떨이에는 담배꽁초로 가득하였다고 한다. 그에게는 항상 한국 최초라는 단어가 따라 다녔다. 58년 한국 복싱계 최초로 아시안게임에서 복싱으로 금메달을, 65년 동양 챔피언타이틀에 이어 66년 6월 25일 WBA세계챔피언 벨트를 조국에 안겨 주었다. 그를 시작으로 많은 선수가 복싱 세계타이틀매치에 도전하면서 80년대까지 대한민국은 많은 세계챔피언들을 배출한 복싱강국으로 불리었다. 전 38 따라지(38선을 넘어온 피란민을 부르던 속어)였죠! 김기수 선수는 당시 가난한 60년대의 젊은이들에게는 세계챔피언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선사했다. 특히 자신이 유복자로 태어나 1.4후퇴 때 함경북도 북창에서 38선을 넘어 여수로 피난 온 피란민으로 배고픈 시절을 복싱에 대한 열정으로 이겨 헝그리 정신 의 산 증인이 되었다. 그의 복싱 데뷔는 화려했지만 은퇴는 더욱 아름다웠으며, 철저한 자기 관리와 절제로 은퇴 후 사업가로 성실한 삶을 살았다. 생전 김기수 선수는 자기 관리를 못하여 현역이나 은퇴 후 무너지는 후배들을 보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모 신문에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남겼다. 그의 메시지는 오늘날 냉혹한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주는 것일 것이다. 프로의 세계는 냉정하다. 삶의 현장은 더욱 냉정하다. 약육강식의 정글이다. 4각의 링과 세파 속에서 뼈가 굵은 나는 이 비정한 세계를 이겨내는 무기가 무엇인지 잘 안다. 자기 자신과 싸워 이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