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는 여성을 사랑하신다” 페오 알라다그의 ‘그녀가 떠날 때’

제60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최우수유럽영화상과 2011독일비평가 협회상 7개 부문 수상, 저먼필름 어워즈 2개 부문 수상, 2010 트라이베카 영화제 여우주연상. 세계 영화제에서 무려 35개 부문 수상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은 그녀가 떠날 때는 모슬렘 여성에 가해지는 명예 살인을 소재로 삼았다. 명예 살인은 아랍권 또는 이슬람권 뉴스를 접할 때 심심치 않게 들린다. 여성들은 이슬람 법도를 어기고 집안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가족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러한 관습 때문에 아랍권과 극소수의 모슬렘 여성은 늘 억압받는다. 영화 그녀가 떠날 때도 마찬가지다. 이스탄불에서 가정을 꾸린 터키계 독일 여성 우마이(시벨 케킬리 분)는 자기중심적이고 지나치게 가부장적인 남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아들 챔(니잠 실러 분)을 데리고 독일에 있는 친정에 간다. 처음엔 우마이를 반기던 가족들은 가정을 뒤로하고 독일에서 새로운 인생을 펼치겠다는 딸이자 언니, 누나의 결심에 반대한다. 친정은 독일에 있으나 이슬람 율법을 지키는 가족에겐 우마이의 결심이 낯설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가족들은 독일로 다시 올 수밖에 없었던 우마이의 심정을 이해하지만, 율법에 자유롭지 못해 결국 우마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가족이 바라볼 때 우마이는 이기주의자다. 우마이로 인해 가족들이 곤경에 처하기 때문이다. 여동생은 언니가 가정을 버리고 왔다는 이유로 파혼당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부모님과 오빠, 남동생들도 친지와 친구들에게 비난을 받는다. 우마이는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 이혼 여성을 돕는 쉼터에 머무른다. 취직하고 학업을 시작하면서 희망을 키운다. 언젠가는 친정 가족들이 자신을 이해하고 다시 받아줄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하지만 이는 그저 한낱 꿈일 뿐이다. 영화는 한 청년이 아이의 손을 잡고 가는 여자에게 권총을 들이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가려는 터키 여성과 체면과 주위의 시선으로 사랑하는 그를 외면할 수밖에 없는 가족의 고뇌를 담아낸다. 여기서 많은 이에게 질문을 던진다. 알라(신)는 여성을 싫어할까. 그 답은 이슬람 경서인 코란경에 있다. 알라께 복종하고 귀의하는 남녀, 믿음을 가진 남녀, 신앙이 독실한 남녀, 진실한 남녀, 신념이 확고한 남녀, 겸손한 남녀, 자선을 행하는 남녀, 단식을 하는 남녀, 정절을 지키는 남녀, 항상 알라를 기억하는 남녀에게 알라께서 용서와 커다란 보상을 마련하셨도다. 코란 33:35 남녀를 불문하고 선을 행하고 믿음을 지킨 자는 참된 삶이 확실히 주어질 것이며, 그들이 행한 바에 따른 최대의 보상이 있으리라. 코란 16:97 코란은 남녀 모두 알라의 피조물로 동등한 가치와 존엄을 지녔다고 밝힌다. 그리고 위에서 보았듯 모슬렘이라면 누구든지 행해야 할 권리와 의무를 적어놓았다. 교육에서도 남녀가 평등하다. 이와 관련해 이슬람 전문가인 이희수 한양대 교수는 코란은 물론,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에선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암송하고, 생각하고, 묵상하고, 배우도록 반복해서 가르치고 있다며 남녀 구분 없이 지식의 탐구를 위해서라면 중국까지 가라라는 유명한 구절을 찾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사실 여성 모슬렘의 인권은 서구보다 앞섰었다. 코란엔 여성을 보호하는 구절이 있다. 특히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 여성이 누리는 법적 소유권과 지위와 관련한 내용이 있다. 20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기혼 여성이 개인 재산을 소유하고 타인과 직접 계약을 체결하는 등 선진적인 문화를 형성해왔다. 이러한 특권이 주어지는 만큼 여성의 법적인 보호와 동등한 지위에는 책임의 완수라는 의무가 동시에 부과된다. 즉 여성의 과오에 대하여 꾸란(코란)은 남성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징벌을 명시했으며, 여성이 피해를 입었을 경우 남성과 똑같은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즉 꾸란 사회는 남녀동등을 장려하는 차원을 넘어 그 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이희수 교수의 이슬람 中 코란 곳곳에 여성 인권을 보장하는 내용이 있음에도 현대 이슬람은 왜 여성을 억업하고 있는가란 의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여성 억압은 코란에 의해서가 아닌, 이슬람 국가가 처해있는 사회적 관습과 환경에 관련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영화에서 우마이의 가족은 피를 나눈 가족이 아니라, 보호시설에서 만난 사람과 친구다. 우마이는 그래도 부모님과 오빠와 남동생, 여동생과 함께하기를 바라지만 전통적인 관습 때문에 끝끝내 이루지 못한다. 여성 감독 페오 알라다그는 데뷔작인 그녀가 떠날 때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이 영화에서 한 모슬렘 여성의 일생을 섬세하면서도 진중하게 다뤘다. 그는 가족과 사회의 억압에서 벗어나려 했던 여성들을 접하면서 영화를 만들게 됐다고 전했다.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자에겐 늘 고통이 뒤따른다. 주인공 우마이는 전통적 관습에서도, 그 관습을 벗어나서도 고통을 받는다. 언제쯤이면 그의 얼굴에 웃음꽃이 필까. 영화 원제는 이방인으로 국내에선 그녀가 떠날 때란 이름이 붙었다. 영화에서 우마이는 네 번 떠난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친정에서, 보호시설에서, 그리고 친구 집에서 나온다. 이스탄불에서 떠나는 장면은 두려움 반, 기대감 반으로 새롭게 시작할 인생을 나타낸다. 그리고 친정에서 보호시설로 가는 장면에서는 가족에게 느끼는 미안함과 절망감이 흘러나온다. 우마이가 오빠를 피해, 보호시설에서 친구 집으로 피신하는 장면은 위기에 해당한다. 제 핏줄에게 목숨을 위협받으리라 생각지도 못했을 터다. 그리고 친구 집을 떠나 새 보금자리로 가는 것은 다시 일어서는, 포기하지 않는 희망을 그려낸다. 그러나 우마이는 곧 절망에 빠진다. 아버지 병문안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혈육에게 아들을 빼앗기고 말기 때문이다. 영원히 만날 수 없도록 말이다. 오열하지는 않는다. 우마이는 가족의 외면 속에서도 아들과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그 끝은 허무함과 절망이다. 영화 밖의 모슬렘 여성 역시 마찬가지다. 강간을 당하면 피해 당사자가 명예 살인을 당한다. 집에서 반대하는 남자를 연모하는 것조차 허용이 안 된다. 물론 터키, 인도네시아, 인도 등에서 여성이 총리 후보로 출마하는 등 여권이 신장하고 있지만 아직도 바꿔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다. 슬프지만 크게 소리를 낼 수 없는 우마이의 눈물, 그 눈물이 맺히는 곳에서 모슬렘 여성들의 삶도 소리 없이 흘러내린다. 김지윤/ jade@newscj.com

‘성철스님 삶과 법어’ 원택스님 인터뷰

열반송, 그리고 법어[글마루=김명화 기자] 성철스님은 숨을 거두기 직전 열반송을 남겼다. 하지만 열반송과 1987년 초파일에 설파한 법어는 많은 이들의 논란의 대상이 됐다. 열반송은 서두에서 제시했으므로 초파일 법어를 아래에 소개한다. 이 내용은 1987년 4월 23일 조선일보와 경향일보에 실려 언론에 화제가 됐다. 왜 성철스님은 중생들에게 이러한 법어를 설파했을까.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김성철 교수는 현대 한국 사회와 퇴옹성철의 위상과 역할이라는 주제의 논문을 통해 위의 질문에 관한 답을 제시했다. 우리 사회의 시대적 현안을 구체적으로 지목하지는 않는 불이중도(不二中道)의 법문이다.화합하는 길에 대한 해석은 언론과 학계, 교계에 따라 차이가 있다. 그래서 이에 관한 해석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 놓겠다. 성철스님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같이 해탈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성불, 즉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도 필요 없고 조사도 필요 없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부처다, 조사다 하는 것은 다 중생의 꿈을 깨우치기 위한 약이기 때문에 견성성불(見性成佛, 본래의 천성을 깨달아 불도를 거둠)해 참다운 해탈을 성취하면 부처도 필요 없고 조사도 필요 없는 참다운 대자유자재가 된다는 설명이다. 이는 1982년 성철스님의 법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자기를 바로 봅시다.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려고 오셨습니다.이렇듯 크나큰 진리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성철스님은 부처님이 달리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든지 깨달음에 이르러 도(道)를 통달하면 바로 지금 여기에서 대해탈대자유의 생활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므로 따로 부처님을 구하지 말라고 말했다. 이러한 성철스님의 가르침은 부처님 최후의 설법과도 일맥상통한다. 부처님은 80세에 완전한 입열반(入涅槃)에 드는데 그때 북쪽 쿠시나가라국(Kusinagara, 인도 북부 카시촌)의 사라 나무숲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설법을 남긴다.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아, 결코 남을 등불로 삼지말라. 모든 생(生)한 것은 반드시 멸(滅)하는 법이다(無常). 그러므로 부지런히 힘써 해탈(解脫)을 구하라.오직 일생을 부처님의 뜻만 따라 살고자 했던 성철스님. 큰스님이 우매한 중생에게 바랐던 바는 한 가지가 아니었을까. 부처님의 뜻대로 참다운 이치를 깨달아 해탈에 이르는 길. 바로 구도자의 삶이다.

‘성철스님 삶과 법어’ 원택스님 인터뷰②

깨달음을 향한 구도의 길 [글마루=김명화 기자] 깨달음을 얻기 위한 정진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라고 큰스님은 항상 말씀하셨지요. 이어 원택스님은 성철 스님의 주요 사상인 돈오돈수(頓悟頓修)에 관해 설명했다. 돈오는 단박에 깨닫는다는 말이고 돈수는 단박에 닦는다는 뜻. 즉,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은 곧바로 깨우쳐야 제대로 된 깨달음에 다다를 수 있다는 의미다. 이와 반대로 한 계단 한 계단씩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는 수행은 제대로 행하는 깨달음의 길이 아니라고 성철스님은 설명했다.성철스님은 화두를 들고 참선에 전념해 한꺼번에 깨달음을 얻으면 더 이상의 닦음은 무의미하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결국 깨달음을 얻기 위한 정진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라는 뜻이라 생각합니다.원택스님은 1947년 한국불교를 바로 세우기 위해 개혁을 펼쳤던 성철스님의 봉암사 혁신운동에 관해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 당시 한국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세속적인 모습으로 변해있는 상황. 이러한 모습을 보다 못한 성철스님은 한국불교 개혁을 위해 뜻이 맞는 스님들을 봉암사로 모아 공주규약을 하고 한국불교 정화운동에 나섰다.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고 성철스님이 말씀하시자 우봉보문자운향곡월산스님을 비롯한 많은 스님들이 그 뜻에 동의하며 결의를 다졌지요. 스님들은 복장부터 바꿨어요. 입고 있던 비단 가사를 벗고 불교의 가르침에 맞게 괴색 옷을 입었습니다. 또 탁발동냥하여 검소한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 자주적으로 절 살림을 꾸려갔어요.원택스님은 그 당시 성철스님이 엄격한 규율과 수행을 하도록 스님들을 이끌었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불교계에 큰 어른들이 계실 수 있다는 말을 남겼다.부처님 가르침은중도예수교는 성경, 유교는 사서삼경, 회교는 코란이면 됩니다. 그런데 불교는 통칭 팔만대장경이라 하니 너무많아 공부하기에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성철스님은 불교 경전이 복잡하고 어려워서 머리 깎은 스님이나 부처를 믿는 신도들이 부처님 말씀을 너무 모른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토로했다고 원택스님은 말했다. 성철스님은 부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불교가 뭘 가르치는 건지 모르고 무슨 발전이 있겠나며 그동안 자신이 공부한 내용들을 압축해서 우선 급한 대로 꼭 알아야 할 것들만 골라 정리하는 작업을 했다. 그 결과물이 백일법문. 설법의 중심 교리는 첫째, 부처님의 윤회설은 방편이 아니고 정설이다. 둘째, 불교는 과학적인 종교다. 셋째,부처님의 가르침은 중도에 있다. 백일법문은 동서고금을 오가는 해박한 지식과 적절한 비유가 있어 늘 새로운 깨달음을 준다고 원택스님은 말했다.노자와 장자, 공자와 맹자, 그리고 이들 동양 사상을 설명한 석학들의 얘기에서부터 서양 물리학과 수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일관성이 있는 인용을 담고 있어요. 이런 인용들이 전부 불교 경전의 가르침과 적절히 연결돼 궁극적으로는 불교적으로 해석이 되지요. 35년이 지난 지금 성철스님의 법문을 들어도 전혀 진부하지 않고 늘 새로워요. 성철스님의 지적 편력은 유명해 동서고금을 막론해 다양한 서적을 탐독했다고 한다. 철학사전 논리학통론 동서사조강화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신구약성경 철학체계 유물론 자본론 등이 바로 그것이다.

‘성철스님 삶과 법어’ 원택스님 인터뷰①

깨달음을 향한 구도의 여정 [글마루=김명화 기자] 우리 시대 큰 어른 성철스님. 치열하다 못해 혹독한 참선 수행으로 참다운 구도자의 모범을 보여주셨던 큰스님은 1993년 11월, 중생들 곁을 떠나 열반에 들었다. 20년간 성철스님을 시봉(侍奉, 부모나 스승을 받들어 모심)했던 원택스님에게 큰스님의 참선과 법어, 그리고 삶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나의 스승, 성철 큰스님 내 인제 갈란다. 내 할 일은 다 했다. 1993년 입동이 들어설 무렵, 성철스님은 팔십 평생 걸치고 다녔던 육신을 털고 열반에 들었다. 법랑 58세, 세수 82세가 되던 해였다. 편안히 누워 입적하는 방법 대신 앉아서 숨을 거두는 좌탈(坐脫)의 자세로 숨을 거두신 성철스님. 큰스님은 떠나시면서 마지막으로 열반송을 남겼다. 涅槃頌(열반송) 生平欺男女群(생평사광남녀군)하야 彌天罪業過須彌(미천죄업과수미)라 活陷阿鼻恨萬端(활도아비한만단)인데 一輪吐紅掛碧山(일륜토홍쾌벽산)이로다.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 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데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말씀을 마치시고 큰스님은 스르르 눈을 감으셨지요. 말릴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그 순간저는 참 무기력했어요. 원택스님은 20여 년 동안 성철스님 곁에서 시봉하며 살았다. 열반에 든 지 1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스승에 대한 존경과 그리움은 쉬 사그라지지 않는 듯하다.마음을 다해 시봉한다고 했지만 살아 계시는 동안 왜 좀 더 잘 모시지 못했을 까. 다비장에서 한줌의 재로 돌아가시는 큰스님을 바라보니 만감이 교차했었지요. 아직도 가야산을 쩌렁쩌렁 울리던 벼락같은 큰스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한데. 원택스님, 그리고 성철스님의 길고도 짧은 인연은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처님과 맺은 언약 출가 야, 이 곰 새끼야. 밥 도둑놈, 밥 값 내놔라. 성철스님은 가르침에 어긋난 일을 했거나 마음에 차지 않는 일을 하면 어제 온 행자나 20년 된 스님이나 가리지 않고 질책하셨다고 한다. 원택스님이 성철스님을 처음 만났을 그때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웬 놈들이고? 스님이 된 친구를 만나러 우연히 해인사에 들른 28세 앳된 청년 원택을 본 성철스님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처음 뵙게 되었습니더. 기념으로 평생 지남(指南, 이끌어 가르침)이 될 좌우명 한 말씀 해주이소. 당돌한 청년의 답에 성철스님은 대뜸 좌우명을 받으려면 법당에 가서 부처님께 일만 배를 하라고 했고, 오기가 발동한 청년 원택은 좋심더라며 수습하지 못할 약속을 하고 말았다. 인연은 이치 없이 생기지 않는 다던 연기설(緣起說)처럼 이 사건을 계기로 대학을 갓 졸업한 대구 청년 원택과 해인사 주지 성철스님은 사제간의 연을 맺는다. 큰스님의 가르침대로 도(道)를 이룰 때까지 해인사 백련암에서 다시는 내려가지 않을거라 굳게 마음먹고 출가했지요. 느리고 느긋한 심성을 가진 제자와 급하고 격한 성품을 가진 스승의 20년 동행은 이어졌다.

개벽을 꿈꾸며-②

▲ 임형진 교수(사진제공: 본인) 동학, 남북화해의 단초 [글마루=김명화 기자] 현재 한민족학회와 동학학회 연구이사며 고려대학교 정치학과 겸임교수인 임형진 교수를 만나 동학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임 교수는 동학을 다양한 각도에서 심도 있게 연구한 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동학의 평등주의 사상은 근대적 의미의 민권 사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동학의 어떤 점이 민권 사상을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동학의 인내천 사상이 그것입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의미의 인내천은 최고의 인권선언이자 근대적 의미의 민권사상이라고 할 수 있지요. 동학이 탄생하기 이전의 조선 백성의 삶은 그야말로 최저하층의 인간이하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동학 이후의 사람들은 인내천을 습득하고 스스로 하늘을 모신 존재로 소중한 역사의 주인이라는 자각을 하게 되지요. 한국적 차원의 근대적 자각은 바로 여기서 출발합니다. 그러한 자각을 바탕으로 1894년 거대한 동학혁명이 가능했던 것이고 연이은 민족운동에 동학이 나서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요. -동학은 한민족의 천신숭배 신앙에서 승화한 것이라는 의견이 있는데, 천신숭배 사상과 동학의 유사점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민족에게는 전래적으로 천신숭배의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교, 불교, 도교와도 다른 차원의 숭배사상이지요. 그런데 동학에는 그것이 계승됩니다. 이를테면 하늘과 인간이 하나라는 의식이 그것이지요. 하늘에 스스로 동화된 인간들의 모습이 동학의 인내천사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는 단군의 이야기에서 나오는 하늘의 한웅이 땅의 웅녀와 결합해 단군을 낳았다는 천지인 삼위일체의 결합과 신인미분화의 현상에 대한 근대적 계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몰론 오늘 동학의 한울님 사상은 꼭 하늘이라는 개념과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천신숭배의 신앙에서 출발한 것은 맞습니다. -동학의한울님과 기독교의하나님은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하십니까? 기독교의 하나님은 절대성을 가진 유일무이한 신이지요. 그러나 동학의 한울님은 만물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천지를 모두 포괄하는 우주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지요. 物物天 事事天(물물천 사사천)이라는 경전 구절에서도 나오듯 동학에서는 만물에 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인간만이 아닌 자연 환경과 더불어 사는 상생의 개념이 출발한다고 할 수 있지요. 이는 초월적 유일신이 아닌 내재적 범신(凡神)관을 모두 극복한 신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학에서 말하는 후천개벽사상과 선천개벽사상에 관해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동학은 세상을 선천과 후천으로 나누는데 선천은 혼란과 다툼이 끊이지 않는 시기로 그 운이 다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천은 후천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는 개벽으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후천개벽은 인위적이거나 자연적인 물질적 천지개벽만이 아닌 인문개벽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각자가 모두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각자위심의 사람들이 시천주를 자각함으로써 한울님의 마음과 기운으로 바뀌는 즉, 삶의 양태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하지요. 인문개벽은 다시 민족개벽과 사회개벽 그리고 정신개벽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신개벽입니다. 즉, 개벽의 주인공인 인간들의 정신 개벽을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동학의 창도자인 수운 최제우는유불도의 운이 다했다 서학으로 몰려가는 사람들을 보면 개탄스럽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동학과 유불도, 서학의 차이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동학은 기본적으로 당시까지의 지배적 도그마였던 유, 불, 도를 거부합니다. 또한 당시 사회를 어지럽히고 있던 서학까지를 모두 뛰어넘는 사상으로서의 동학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어지러운 선천의 시대에 적합한 이론들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동학이야말로 새로운 후천의 시대를 여는 학문이자 도(道)라고 했지요. 유교와 불교 그리고 도교가 그동안 조선사회를 지배해 오면서 역할을 다 했지만 이제는 혼돈의 시대를 야기한 원인이 되었기에 이제는 폐기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고 서학 역시 그 혼돈에 가세하는 것이기에 거부되는 것이지요. 구체적으로 유학은 계급적 신분질서를, 불교는 고답적이고 탈세속적이며, 도교는 미신적 요소를 가지고 있고 서학은 오늘의 어지러움의 주범이기에 거부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동학은 이들을 거부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들의 장점을 수용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즉, 유교로부터는 수행의 기초가 되는 이론을, 불교로부터는 수행의 기법을, 도교로부터는 전래 신앙적 요소를 그리고 서학으로부터는 신관을 수용해 창조적으로 재해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학의 사상 중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동학의 핵심사상은 역시 인내천입니다. 인내천 사상은 3대 교조인 의암 손병희 선생 때 이르러 완성된 것인데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명제는 동학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지요. 이것은 수운 최제우가 만든 시천주 사상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모두가 한울님을 모신 존재라는 시천주 사상은 이후 2대 교조인 해월 최시형에 의해 사인여천(事人如天: 사람섬기기를 하늘 대하듯 하라)이라는 방법론으로 발전되었고 이것이 인내천 사상으로 자리 잡은 것이지요. 이것으로부터 동학은 만민평등의 사회를 구현하는 데 앞장을 서는데 이른바 동학 창도 이후의 민족운동이 바로 그것입니다.1894년의 동학혁명을 필두로 1904년의 갑진개화혁신운동, 1919년의 3.1운동, 1920년대의 어린이운동과 여성운동 그리고 노동운동 등 천도교 청우당을 중심으로 한 민족문화운동이 그것이지요.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동학, 천도교의 이름으로 순도(殉道: 도를 지키지 위해 희생된 사람)한 사람들이 약 100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어쩌면 동학의 역사는 곧 우리 근대사라고 할 수 있지요. 그만큼 큰 희생과 업적을 남긴 종교도 드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동학은 매우 미약합니다. 천도교로 계승되었다고는 하지만 미약한 교세와 민족종교라는 이름 아래 숱한 종파와 교단으로 갈라져 있지요. 그 원인은 어디에 기인할까요. 아마도 그들이 전개한 민족운동에 답이 있을 것입니다. 즉,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치열하게 민족운동의 전위에 섰던 그들에게 내려진 것은 탄압과 억압 그리고 분열조작뿐이었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마치 미신을 믿는 종교단체로, 또는 북한에 있는 천도교로 인해 반공제일주의에 일방적으로 몰리고 억압받는 탄압의 대상이 되고 말았지요. 비록 오늘날 천도교는 미세하고 빈약하지만 그들이 가졌던 사상과 이념은 남아있고 또 계승될 것입니다. 더욱이 남북화해에 있어서 천도교는 역할이 있습니다. 즉, 북한에 있는 천도교 청우당이 남아서 남쪽과 교류를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종교성을 넘어서 보국안민을 위한 민족화해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 연결고리가 잘 살려져서 남북화해 협력의 단초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동학 속에는 한민족의 역사와 정신이 꿈틀대고 있다. 우리가 동학을 올바로 이해한다면 한국 근대사를 바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갖출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남북화해의 기틀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호에서는 동학의 정신을 계승한천도교에 관해 게재할 예정이다.

수운 최제우(崔濟愚)의 동학-①

[글마루=김명화 기자] 수운 최제우 선생은 동학의 창도자다. 동학은 한국 민족 종교의 시발점이며 동학농민혁명의 근본 사상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수운 선생이 동학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이상사회는 현실에서 실현되는 새 세상이었다. 그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다시 개벽을 통해 인간평등을 이루어 낡은 선천세상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후천세상으로 회복하기를 꿈꿨던 것이다. 1894년부터 시작한 동학농민혁명도 이러한 맥락에서 일어난 것이라 볼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과 동학을 통해 수운 최제우 선생의 삶과 사상을 조명해 본다. 탐학하는 관리를 없애고 그릇된 정치를 바로잡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사람으로서 사람을 매매하는 것과 국토를 농락하며 사복을 채우는 자를 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 내 너희를 쳐 없애고 나랏일을 바로 잡으려다가 도리어 너희 손에 잡혔으니 너희는 나를 죽일 뿐이요. 다른 말은 묻지 말라. 내 적의 손에 죽기는 할지언정 적의 법을 받지는 아니하리라. -전봉준 1895년 3월 29일.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이날 일본군은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했던 녹두장군 전봉준의 교수형을 집행했다. 살려달라고 말하면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겠다고 일본군은 제의했지만 전봉준 장군은 이를 뿌리치고 의연하게 죽음을 택했다. 그토록 꿈꿔왔던 조선의 개벽을 눈으로 보지 못한 채, 41세의 짧은 생을 형장의 이슬로 마감했다. 전봉준이 주도했던 동학농민혁명은 동학을 하는 인물들의 지도하에 일어났던 반봉건적, 반외세적 농민 항거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100만 명이나 되는 농민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바치며 뛰어들었던 최고의 민족민중운동 동학농민혁명. 이렇게 치열한 혁명을 가능하게 했던 원동력은 바로 동학이었다. 모든 사람이 한울님처럼 대접받을 수 있는 세상을 꿈꿨던 동학. 그 뿌리와 정신이 무엇인지 조심스럽게 접근해 본다. 동학은 종교가 아닌 도(道) 동학은 종교가 아니다. 박맹수 교수는 일반적인 종교 학자들의 의견과 사뭇 다른 주장을 했다. 그는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해월 최시형 연구로, 일본 북해도대학 대학원에서 동학사상에 관해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에 재직 중이다. 박 교수는 동학을 서양 종교(宗敎, religion)의 관점으로 보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 선생이 동학을 하나의 교리로, 혹은 신앙의 대상으로 체계화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수운 선생이 쓴 동경대전(東經大全)을 보면 동학은 동쪽 나라인 조선 땅에서 받은 도(道)라고 표현돼 있다. 수운 선생은 동학을 사람이 마땅히 배워야 할 길이며, 실천해야할 학문으로 창도한 것이지 신(神)을 대상으로 하는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종교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때는 1900년대부터다. 독립신문 황성신문과 같은 근대적 신문과 대한학회와 기호흥학회등이 발간했던 잡지에서 쓰기 시작하면서 대중에게 알려졌다.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동양 사상들을 유도(儒道), 불도(佛道), 선도(仙道)라 불렀고 서양종교인 그리스도교까지 서도(西道)라고 불렀다. 서양 종교는 동양의 사상들과 달리 신을 종교의 핵심으로 삼지만 동양 사상은 사람을 교화해 변화하게 할 수 있게 만드는 신념체계와 수행과정을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위와 같은 의미에서 볼 때 수운 선생이 창도한 동학은 종교가 아닌 동양적인 도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수운, 한울님을 만나다 1860년 음력 4월 5일, 경주 구미산 아래 용담정에서 37세의 수운 선생은 천계(天啓), 즉 한울님과 문답을 통해 동학을 창도한다. 잦은 민란과 자연재해, 관리들의 횡포로 도탄과 위기에 빠져 있던 조선 사회를 바꿔보고자 1854년 수행에 들어갔던 수운 선생이 6년 만에 드디어 종교체험을 한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몸이 몹시 섬뜩해지고 떨리더니 밖으로부터 신령(神靈)한 기운이 접해왔고 안으로부터 가르치는 말씀이 내렸다. 무슨 병에 걸린 듯 했으나 증세를 집어낼 수 없었다. - 논학문- 수운 선생은 자신이 만난 존재는 세상 사람들이 상제라 부르는 이였으며 그를 통해 선약인 영부와 주문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 결과 한울님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이 하나가 됐으며 새로운 의미의 세계가 환하게 열렸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일을 겪은 후 수운 선생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사명감이 일어났다고 덧붙였다. 수운 선생은 1861년 4월경 주문과 심고법을 만들어 수행하는 방법을 정하고 사상체계를 세운다. 그는 자신의 세운 신념체계를 무극대도(無極大道) 또는 천도(天道)라고 불렀다. 그러면 수운 선생이 말하는 천도란 무엇이며 한울님은 어떠한 존재인가? 일찍이 동학에 입도해 조부로부터 도를 전수받아 오로지 동학 외길만을 걸어온 천도교 선도사 고 표영삼 선생은 자신의 저서 동학에서 천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무극대도니 천도니 하는 것은 살아가는 신념의 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세계관, 인간관, 가치관, 역사관, 사회관 등을 말합니다. 결국 동학에서 말하는 도란 모든 신념의 틀인 신념체계를 총칭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수운 선생이 말하는 한울님은 어떤 존재인가? 표 선도사는 수운이 말하는 한울님은 온 천지생명체계에 인격성을 부여해 인격화한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말로 바꾸면, 한울님은 어떤 특정한 존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전체를 이르는 개념이라는 뜻이다. 후천개벽 통해 시천주 모신 새로운 인간으로 회복 수운 선생은 인간이면 누구나 천(天)을 모신 존재라는 시천주사상을 주장했다. 시천주 사상은 인간이 곧 하늘이라는 인간평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 고려대 임형진 교수는 시천주(侍天主) 사상은 한민족이 아득한 옛날부터 믿어왔던 천신숭배 신앙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설명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하늘과 관련시켜 생각해 왔던 한민족의 전통사상이 동학에 와서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대담한 주장에 이른 것이라고 말한다.이러한 수운 선생의 사상은 유교적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했던 봉건 양반 질서에 일대 변혁을 몰고 왔다. 동학의 가르침은 인간이면 상하귀천을 막론하고 시천주자로서 모두 대등하므로 한울님처럼 대해야 한다는 인간평등 사상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수운이 동학을 창도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그는 현실 속에서 인간의 도덕성을 회복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목적으로 동학을 창도한 것이다. 수운 선생은 현실 안에서 삶의 변혁을 통해 이루어진 새로운 사회를 후천개벽이라 말했으며 이 단계를 통해 인간은 한울님을 만나기 전의 모든 질병으로부터 벗어나 다시 태어나는 삶 군자사람의 삶을 살아 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동학은 내세보다는 현세를 위주로 한 사상이다. 현재의 삶 속에서 한울 사람으로 자아를 완성해 가는 것을 지향하는 인간 중심 사상인 것이다. 또한 낡은 선천세상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후천 새 세상을 여는 창조적 변혁을 추구했다. 하지만 수운 선생의 가르침은 유교 질서를 중요시했던 기존의 보수적 유생들과 기득권층에게는 안정적 체제를 뒤엎는 위협적 사상으로 다가온다. 결국 수운 선생은 삿된 도로 민중을 현혹했다는 이른바 좌도난정(左道亂政)이라는 죄목으로 대구 경상감영 안의 관덕정 뜰 앞에서 처형당한다. 득도 후 4년이라는 기간 동안 짧은 공적을 남기고 1863년 12월에 체포돼 41세 때 삶을 마감했다. 동학은 수운 선생이 죽은 후 수제자 해월 최시형이 재건했으며 한국 근대사 중 최고의 민족민중운동인 동학농민혁명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본격적인 만남을 위해”―②

―가톨릭 교리와 불교 교리는 어떤 점에서 다르다고 생각하십니까? 불교의 역사는 2500년이고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약 2천 년입니다. 너무 방대해서 쉽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예전에는 무식의 용기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어느 정도 알기 시작하니 쉽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불교 안에서 이것을, 그리스도교에서 저것을 끄집어내서 비교한다면 굉장히 국한된 비교입니다. 그래도 조심스럽게 접근해본다면 불교의 출발점은 고통의 문제입니다. 인생은 온전히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서 고제(苦諦)라고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길, 팔정도를 따라가면 고통의 원인을 끊어버릴 수 있다고 불교는 말합니다. 팔정도(八正道)란 바른 말을 하고 바른 행동을 하고 바른 생활방식 가져야 한다는 것, 또 바른 집중을 하고 바른 노력을 하고 바른 명상과 바른 생각을 하고 바르게 가는 것을 말합니다. 8가지 길을 가면 고통의 원인에서 벗어나 생사윤회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합니다. 즉, 열반에 들 수 있다는 것이죠. 예수 그리스도교가 해결하려고 했던 문제는 고통의 문제 그리고 최고 고통인 죽음의 문제입니다. 그 부분에 있어서 비교를 한다면 둘 다 고통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고통의 문제는 죽음을 포함해서 생각하셔야 합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굉장히 비슷합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불교는 부처님의 깨달음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지는 수행체계인 반면에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님의 사건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진다는 차이가 있지요. 이렇게 글로 정리하는 데 10년 넘게 걸렸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극락정토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천국과 같은 개념이라고 봐도 무방할까요? 그리스도교가 가르치는 것은 부활의 세계입니다. 죽으면 다른 사후세계가 있다는 것이죠. 불교에서는 열반의 세계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근데 똑같지는 않아요.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똑같다는 이야기를 좋아해요. 문화의 특징 중 하나죠. 한국 사람들은 종교와 종교 사이에서 다양성, 차이성을 강조하기보다는 유사성을 곧잘 강조합니다. ―종교의 목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종교의 목적은 진리 탐구지요. 머리가 아니라 실천을 통해서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열반을 얻는 것이지요. 종종 종교적 체험을 배제하고 종교를 공부의 대상으로만 놓고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는 이러한 관점을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종교는 생쥐들의 꼬리를 대상으로 놓고 연구하듯이 과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교리에 관한 이해와 체험이 하나가 돼야만 종교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종교학자의 관점에서 봤을 때 현재 한국 종교계의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저는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는 스타일이니까 제가 파악한 범위 내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물론 예외도 있겠지만 한국 종교계는 더불어 함께하기보다 각자 따로 노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완력이 세고 암암리에 경쟁이 치열해요. 어떤 경우는 개신교와 불교 사이처럼 폭력으로 넘어가기도 하지요. 이러한 문제의 원인은 타종교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저처럼 불교를 연구하는 그리스도인이 한반도에는 거의 없어요. 또 불자로서 그리스도교를 본격적으로 공부하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그러면서 서로의 종교에 대해 상당히 가볍게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수많은 한국 사람들이 이러한 문제를 인정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이웃 종교와의 소통에 관해 이야기하면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지요.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 말씀해 주십시오. 현재 인터넷을 통해서 불교를 깊이 사귀고자 하는 동서양의 그리스도인들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아직 실험단계지만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수행법을 만들었어요. 앞으로는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본격적인 만남을 위해 불자와 그리스도인이 만날 수 있는 수련원이나 센터를 국내에 만들 계획입니다. 뜻이 비슷한 사람들과 오래전부터 준비했고 가지고 있는 것들을 다 모아서 땅도 구입했습니다. 앞으로 수행을 통해 더 성숙해지고 성화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경전의 원래 가르침을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최근 팔리어와 히브리어를 공부하고 있다는 서 신부. 진리를 탐구해 생로병사의 해답을 찾아 영생, 혹은 열반에 이르고자 하는 그의 노력이 건강한 열매 맺어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본격적인 만남을 위해”-①

불교와 열애 중인 캐나다 출신 신부 베르나르 스네칼[글마루=김명화 기자] 부처님을 만나신 예수 그리스도님.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은 이 책의 저자는 베르나르 스네칼 신부다. 한국에서는 그를 서명원 신부라고 부른다. 서 신부는 현재 서강대 종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23년 동안 불교의 진리를 탐구한 신실한 불자이기도 하다. 불교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더욱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서 신부. 첫눈에 반한 한국 땅에서 생로병사의 해답을 찾고자 오늘도 수행에 매진하고 있는 서 신부를 서강대 연구실에서 만났다. ―프랑스 보르도에서 의과대학을 다니다 1979년 예수회에 입회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 의사의 길을 접고 수도생활을 택했는지 궁금합니다. 생로병사에 관해 엄청나게 궁금했습니다. 사람이 왜 고통을 겪고 또 병들어 죽어야 하는지의 문제가 어렸을 때부터 저에게 수수께끼였어요.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입학한 의과대학에서 오히려 의학의 한계를 많이 느꼈지요. 모르는 병도 많고 오진을 내려 환자를 잡는 경우도 봤어요. 생로병사의 문제를 풀기 위해 진학한 의과대학에서 그 해답을 찾지 못하자 저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러던 중 내적인 체험, 즉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부르심을 경험하고 1979년 의학공부를 중단했습니다. 그리고 사제가 되기 위해 예수회에 입회했지요. ―프랑스 예수회의 수련과정은 어떠셨습니까? 굉장히 까다롭고 죽도록 어려워요. 2년 동안은 수도회에서 수도생활을 체험합니다. 독신생활을 택하고 여러 가지 경험을 합니다. 수도의 기초인 기도생활을 집중적으로 배워 통달해야 하고 명상도 배워야 합니다.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수련 받고 있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테스트해요. 앞으로 수도원에서 함께 살 수 있을지 없을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죠. 일부러 괴롭혀서 싸우도록 유도하기도 합니다. 예수회 수련과정은 상당히 어렵고 힘들기 때문에 견뎌내지 못하고 많이 나가기도 해요. 저희 때도 10명이 들어갔는데 4명만 남았어요. 그렇게 2년 동안의 수련과정을 마친 저는 이후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1985년에 한국에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행을 결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랑에 빠지는 일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한국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고 표현하면 적당할 것 같아요. 당시 제가 있었던 프랑스 예수회 최고 책임담당자인 관구장이 저에게 한국행을 제안했어요. 사실 저보다 관구장이 한국에 더 오고 싶어 했었지요. 그는 동아시아를 방문하던 중 한국을 알게 됐는데 그때 한국에 완전히 빠져버렸거든요. 한국은 보통 나라가 아니라며 위치나 현황, 정치 경제종교적으로 봤을 때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었죠. 제안을 받은 후 지도를 펴놓고 한국의 위치를 파악했습니다. 일본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 사이에 끼여 있는 반도. 둘로 갈라져 있고 미국 주둔군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 관심이 가기 시작했어요. 이성에 대한 애정과 같이 한국에 애착이 갔어요. 인연인지 신비인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한국에 와서 어떤 연구를 하셨습니까? 1985년에 한국에 와서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에서 3년 동안 언어만 배웠습니다. 그 후 2년 동안 한국의 종교에 관해 배우기 시작했죠. 한국에 와서야 제가 가진 종교 말고도 또 다른 종교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상당한 도전을 받았습니다. 여태껏 제가 믿는 종교가 최고라고 생각했었는데 들어보지 못한 다른 종교가 있다는 것을 알고 관심을 쏟기 시작했죠. 내가 최고라는 주장을 버리고 남에 대해서 배우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서강대 대학원에서 종교학과 수업을 들으며 사찰을 방문해 스님들과 이야기를 나눴어요. 노자의 도덕경을 비롯해 불교 서적도 많이 읽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당시 5년간은 정말 죽도록 고생했어요. 한국어 실력이 부족해서 너무 힘들었고 한국 사람들의 고유한 사고방식, 감수성과 싸우느라 힘들었습니다. 상처를 받기도 했고, 상처를 주기도 했고 이제 떠나겠다고 마음먹기도 했고 떠나려고 하다가 돌아오고. 한국에 대한 사랑과 관심, 한국과 끝까지 사귀려는 마음이 없었다면 아마 못했을 거예요. ―가톨릭 신부로서 불교를 구체적으로 연구하게 된 배경은 무엇입니까? 교계의 반대가 있지는 않았습니까?한국에서 5년을 지낸 후, 가톨릭 사제가 되기 위해 파리로 가서 5년 동안 공부했습니다. 한국에서 5년 동안 살다가 파리로 갔더니 서구적인 공부가 너무 시시하고 답답했습니다. 사실 불교에 대한 관심이 커서 불교와 함께 신학을 공부하고 싶었거든요. 교계에서는 이런 저의 이야기를 듣고 상당한 반발을 했지만 가장 높은 분이 그걸 허락해 주셔서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석사논문은 부처님을 만나신 예수그리스도님, 박사논문은 성철스님의 전서 및 생애에 관해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