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마루] 꽃과 문화⑤ 미세먼지 먹는 공기정화식물

공기정화식물은 미세먼지뿐 아니라 냄새까지도 잡는 효과가 있다. (제공: (주)단크) ⓒ천지일보 2018.10.10 물 먹고, 냄새 먹는 하마(?)가 있다면, 여기 미세먼지 먹는 식물이 있다. 미세먼지뿐 아니라 냄새까지 잡아먹는다. 대기오염의 주범이자 각종 폐질환을 유발하는 오염물질인 미세먼지는 건물 내부에 있다고 안심할 수 없다. 임산부가 초미세먼지를 흡입하면 태아에게도 영향이 미친다고 하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깨끗하게 쓸고 닦는 것도 중요하지만, 공중에 떠다니는 미세먼지를 잡는 데는 또 공기정화식물만한 게 없다. 자연이 준 공기정화기 광합성과 증산작용을 하는 모든 식물은 기본적으로 공기정화 기능을 갖추고 있다. 심미적, 정서적 기능 외에도 집안에 화분을 놓는 이유 중 하나다. 초록의 상큼함이 주는 시각적 효과도 있겠지만 화분이 많은 집에 들어가면 왠지 모를 편안함이 몰려온다. 심지어 공기마저 상쾌하게 느껴진다. 여기에 식물을 정성스레 키우면서 오는 심신의 안정은 마치 선물과 같다. 심신의 피로를 씻기 위해 삼림욕을 하러 가고 싶어도 시간과 거리가 만만치 않다. 바쁜 일상 속,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집에 오면 만사 제쳐 놓고 편히 쉬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다. 그 마음을 100% 만족시킬 수는 없지만 적재적소에 배치한 공기정화식물을 통해 쉼을 얻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보자. 먼저 공기정화식물은 오염물질이 잎에 흡수돼 대사산물로 이용된다. 이 과정에서 먼지가 제거되고 일부는 뿌리로 이동해 토양 내 근권부 미생물의 영양원으로 활용된다. 또한 음이온, 향, 산소 등의 방출물질에 의해 주위 환경이 정화되며, 증산작용으로 공중의 습도가 올라가 주변 온도를 조절해준다. 천연 가습의 효과가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실내 공기 중 휘발성유기화합물(VOC) 제거에도 좋다. 새집증후군, 화장실 냄새 등을 잡아주는 원리다. 집안에 식물을 많이 두면 안 된다는 말도 있지만, 식물에 대한 기본 정보만 알아두면 반려식물로서, 천연 공기정화기로서 좋은 벗이 될 수 있다. NASA도 인정한 인도고무나무 식물(나무)은 광합성과 호흡 작용을 통해 이산화탄소를 마시고 산소를 배출하거나, 또 그 반대의 작용을 한다. 낮에는 광합성으로 만들어진 산소 양이 호흡으로 소모된 산소의 양보다 많아 마치 산소를 배출하는 것처럼 보이고, 반대로 광합성을 거의 하지 못하는 밤에는 이산화탄소를 내뿜는 것처럼 보인다. 결론은 식물은 항상 호흡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밤 시간 동안 실내 공기를 정화하는 호접란이나 선인장, 다육식물 같은 것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식물이 밤에 내뿜은 이산화탄소의 양은 소량이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공기정화식물로 대표적인 것이 인도고무나무다. 잎이 크고 도톰하며 생명력이 강해 초보자들도 쉽게 키울 수 있다. 통풍이 잘되고 햇빛이 은은하게 들어오는 곳에 두고 키우면 좋고, 물은 흙이 말랐을 때 주면 된다. 포름알데히드나 벤젠 등 공기 중에 떠다니는 독소나 화학물질을 제거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미항공우주국(NASA)에서 선정한 100대 공기정화식물 중 4위를 차지할 만큼 휘발성 화학물질 제거능력이 탁월한 아주 기특한 식물이다. 한마디로 새집증후군 예방에 가장 적합한 식물로 집들이 선물로 안성맞춤이다. 이름도 귀여운 스투키 요즘 화분은 충동적으로 구매욕구가 솟을 만큼 인테리어 소품으로도 손색이 없다. 책상 위에 올려놓고 키울 수 있는 작은 화분부터 시작해 크기도 다양하다. 특히 요즘 눈에 띄는 것 중 하나가 스투키다. 길쭉길쭉, 끝이 뾰족한 스투키는 그 수형이 세련돼 인테리어 화분으로 인기다. 물론 뛰어난 공기정화 효능도 갖췄다. 스투키의 학명은 산세베리아 스투키로 한때 공기정화식물로 인기를 독차지했던 산세베리아를 물리치고 요즘 아주 핫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일단 물을 자주 주지 않아도 된다. 여름에는 2주에서 1달 간격, 겨울은 1달에 한 번 물을 흠뻑 주면 된다. 아프리카에서 살던 열대식물인 만큼 더위에는 강하지만 추위엔 또 약한 식물이다. 15~30도 사이의 온도를 유지해주면 거의 방치하다시피 키워도 혼자서도 잘 크는 자립심 강한 친구다. 덩달아 병충해에도 강하다. 스투키 역시 포름알데히드, 아세톤, 크실렌, 톨루엔 등 실내 화학물질을 제거하는 데 뛰어나다. 몸에 해로운 전자파도 차단해줘 컴퓨터나 TV가 있는 곳에 두면 좋다. 테마가 있는 ㈜단크 화분도 이제 디자인 시대가 됐다. 화훼분야 디자인 전문 기업 ㈜단크의 전사랑 대표는 이 디자인적인 부분에 초점을 뒀다. 부피와 크기가 큰 화분은 공간이 한정돼 있지만 전 대표가 제안하는 식물 중에는 언제, 어디서든 마음만 있으면 키울 수 있는 작고 귀여운 것들이 많다. 화훼조경학을 전공한 전 대표는 2016년 한국 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의 청년창업지원 프로그램 aTium(에이티움) 2기 과정을 통해 창업의 꿈을 이룬 당찬 청년 사업가다. 전 대표를 만나기 위해 경기도 하남에 있는 ㈜단크를 찾았다. 200평 규모의 대지에 아카데미 공간과 전시와 판매도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무리 작업에 들어가고 있었다. 전 대표의 작업실 겸 제품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스튜디오에 들어서니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살포시 흔들리는 공중식물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기자기한 맛이 느껴졌다. 시각적으로도 아름답고 반려식물로도 행복한 제품을 만들고 싶었어요. 바람을 좋아하는 공중식물에 맞춰 디자인한 에어배드는 예민한 공중식물을 오래 살게 하는 동시에 시각적으로도 훌륭한 소품이 되었죠. 전 대표는 이름 하나하나를 알려주며 이 작은 식물들이 미세먼지를 어떻게 빨아들이는지 등 공기정화식물로서의 역할에 대해 세세하게 설명했다. 이 친구는 수염틸란드시아라고 불러요. 잎에 있는 미세한 솜털을 이용해 공기 중 수증기와 유기물, 미세먼지 등을 먹고 자라죠. 기본적으로 틸란드시아는 낮에 뜨거운 열로부터 수분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밤에만 호흡을 해요.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고 야간에 산소를 만들어주기 때문에 사람에게 유익한 공기정화식물 이죠. 수염틸란드시아는 머리카락처럼 하늘하늘한 가느다란 잎을 가졌는데 중간에 잎이 상하거나 끊어져도 또 이어져 자라기 때문에 틸란드시아 중에서도 생명력이 강한 식물이에요. 공중식물은 어떻게 물을 줘야 하는지 궁금했다. 천장에 매달려 있으니 물을 주면 뚝뚝 떨어질 것이라 생각했던 기자에게 공중식물은 흙에서 자라는 식물들과는 달라요. 잎으로 수분을 보충하죠. 잎을 물에 충분히 적셔주거나 10분 정도 담그면 돼요. 분무기로 물을 뿌려줘도 되고요. 틸란시아는 에어배드를 이용해 공중에 매달아 키워도 보기에 좋지만, 각종 소품을 활용해 바닥에 내려놓고 키우면 인테리어 소품으로 손색이 없다. 이 두 가지 디자인에는 전 대표 의 화훼에 대한 철학이 녹아 있다. 누구나 쉽게 반려식물로 키울 수 있고, 또 인테리어 면에서도 보기에 좋은 것. 이것이 바로 화훼시장을 살리는 것일 뿐 아니라, 건전한 꽃문화가 형성되는 하나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인터뷰]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회원 확보가 곧 문화재 지키고 보존하는 일”

문화지킴이 회원 1만 명 목표로 동분서주하는 문화계 마당발 3백 명이던 회원, 7천 명 넘게 만들어 문화계의 마당발, 문화재 복원보존과 관련된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는 김종규(75)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그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일이 있다. 바로 문화유산국민신탁 회원 확보하는 일이다. 회원이 내는 기부금으로 문화재 복원 및 복구, 관리가 되어 지고 있으니 회원 한 사람 한 사람이 문화지킴이가 되는 것이다. 이는 곧 그가 발 벗고 나서고 있는 회원 확보가 문화재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실천으로 나타난 행동인 셈이다. 2009년 10월 문화유산국민신탁 제2대 이사장으로 취임하면서 활발한 회원 확보를 통해 우리 문화재를 지켜나가는 데 크고 작은 공을 세우고 있는 김 이사장을 중명전에서 만나봤다. 중명전은 고종황제가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을사늑약을 체결했던 근대사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장소다. ◆2009년 이사장 맡아 7천 명까지 문화지킴이 회원 늘려 김종규 이사장은 국내 유일의 출판전문 박물관인 삼성출판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는 관장이다. 1999년부터 10년가량 한국박물관협회 회장을 지내는 동안 우리나라 박물관 발전에 크게 힘썼다. 우리 어린 학생들에게는 박물관을 자주 찾아가도록 독려하고 여러 방면으로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이런 그가 2009년 10월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직을 맡고 나서부터는 회원 확보에 여념이 없다. 일단 어떤 일을 맡았다 하면 책임감 있게 크게 활성화 시키고 끌어 나간다. 아직 국민들에겐 문화유산국민신탁이란 단체가 다소 생소할 법하다. 그래서 먼저 잠깐 문화유산국민신탁을 소개하고자 한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은 민간기금으로 문화유산을 보존관리하는 법인이다. 영국에서 시작된 내셔널트러스트(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성금을 모아 보전가치가 큰 자연자산이나 문화유산을 매입해 영구히 보전ㆍ관리하는 운동)를 기초해 2007년 3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시절 설립됐다. 초대 이사장이었던 유영구 전 KBO(한국야구위원회) 총재가 2009년 2월 KBO 총재로 취임하면서 겸임이 어렵게 되자 사임을 했고, 그 후임으로 김종규 이사장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김 이사장은 설립 당시 설립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문화유산국민신탁의 산파 역할을 했으며, 후에도 고문을 맡아 신생조직이 기틀을 잘 만들어가도록 했다. 그가 이사장을 맡고 나서 300명 정도이던 회원은 5년이 흐른 지금 약 7천 명까지 늘었다. 크고 작은 행사이면 어디든 가서 가는 곳마다 누구를 만나게 되면 회원 가입을 권한다. 이는 그가 항상 문화유산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에 이같이 적극적인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더구나 다정다감하고 넉살 좋은 그의 성격 덕분에 가입권유를 받은 이들은 회원 가입을 마다할 수 없게 된다. 그는 어떻게 보면 상대에게 부담도 주고 결례도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개인적인 이익을 취하고자 함이 아니고 공익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적극 회원 확보를 하고 있는 것이라 말한다. 문화유산국민신탁 회원이 되면 일반인은 월 1만 원 혹은 5천 원을 기부하며, 청소년은 3천 원 혹은 1천 원을 기부한다. 현재 7천여 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회원들이 낸 기금으로 보전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을 보전관리하는 일을 문화유산국민신탁에서 한다. 그는 빠른 시일에 1만 명의 누적회원 확보를 목표로 하고 있다. 설립초기 2년간 300명밖에 되지 않던 회원을 5년간 6천여 명의 회원 숫자를 늘린 것도 대단한 성과로 평가받고 있는데, 이것으로는 아직 성이 차지 않는 모양이다. 앞서도 얘기했듯이 많은 회원 확보가 곧 많은 문화재를 지킬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문화재를 사랑하는 만큼 그가 회원 유치를 위해 이같이 크게 욕심을 내고 있는 이유다. 그러면서도 그는 영국은 내셔널트러스트 회원이 420만 명인데 우리는 이제 걸음마 단계라며 10만 명 회원 정도는 있어야 조금은 만족할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어 그는 회원이 많을수록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과 애착도 높아지고 문화재를 함부로 하는 일도 줄어들 것이라며 회원 확보의 이유를 재차 강조했다. 김 이사장은 특히 청소년들의 회원가입에도 관심이 많다. 청소년들이 21세기 문화지킴이의 주역이 돼 전통문화를 알게 되면 선조들에 대한 공경심이 생기고 자연스럽게 애국심으로 이어지는 인성교육이 될 것입니다. 기부금액이 많고 적고를 떠나 회원으로 많이 참여하는 것 자체가 우리 문화재를 아끼고 관심이 많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가 왜 유독 회원 확보에 애착을 가질 수밖에 없는지를 더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현재 문화재청이 종잣돈을 지원하고, 일반회원들의 기부로 뒷받침되는 민관협력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그렇지만 앞으로는 가급적 민간 주도로 넘어가야 한다. 미국도 40년대 정부 주도로 시작했지만 점차 민간 주도 체제로 바뀐 성공적 사례가 있다며 향후 장기적인 계획을 제시했다. 회원 중에는 각계각층의 유명 인사들이 꽤 포함돼 있다. 김황식 전 국무총리, 이어령 전 장관, 이인호 전 대사, 정세균 국회의원, 최광식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이건무 전 문화재청장, 이배용 한국학중앙연구원장, 배기동 전곡선사박물관장, 김원 건축환경연구소 광장 대표, 윤영달 크라운해태제과 회장, 연극배우 박정자, 작가 조정래시인 김초혜 부부, 소설가 김홍신, 한한국 세계평화작가윤소천 시인 부부, 임권택 감독, 이종상 화백, 신연균 아름지기 이사장, 김영명 예올 이사장, 김옥랑 옥랑문화재단 이사장, 나선화 문화재청장, 손진책 감독 등 정재계문화계의 다양한 인사들이 회원으로 문화지킴이에 참여했다. 심지어는 2010년경 중명전을 방문한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일본 총리도 기부하면서 회원으로 참여 중에 있다. ◆주미대한제국공사관 환수, 도난당한 백범 김구 친필 찾아 기증 이처럼 회원들이 기부한 기금으로 문화유산국민신탁이 관리하고 있는 문화유산은 여러 곳이 있다. 먼저 국가소유 문화유산으로 위탁관리하고 있는 곳은 소설 태백산맥의 무대였던 전남 보성여관(등록문화재 제132호), 울릉 역사문화체험센터로 활용되고 있는 울릉 도동리 일식 가옥(등록문화재 제235호), 부산의 대표적인 고급 일식 가옥인 부산 정란각(등록문화재 제330호), 그리고 중명전(사적 124호)가 있다. 그 외에 매입하여 관리하고 있는 곳이 통인동 이상의 집, 경주 윤경렬 옛집, 군포 동래정씨 동래군파 종택 및 그 일원 등이 있다. 특히 김종규 이사장이 진가를 발휘한 건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에 의해 소유권이 넘어갔던 미국 워싱턴 소재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을 2012년 8월 102년 만에 대한민국 품으로 완전히 돌아오게 한 일이었다.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은 고종황제가 워싱턴에 세워 1891년부터 1905년까지 운영됐고,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나서 일제가 강제로 빼앗아 1910년 헐값에 팔아 넘겼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대한제국 자주 외교의 상징인 이곳이 개인소유로 있다가 102년 만에 원래 주인에게 돌아왔다. 이같이 김종규 이사장을 중심으로 고종황제가 세웠던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을 되찾는 데 큰 역할을 했던 문화유산국민신탁은 지난해 여름 환수 1주년을 맞아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그는 대통령 표창을 받게 되면서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우리 문화유산을 더욱 지키는 일에 더 힘이 됐고 영광스럽게 생각하면서도 그만큼 책임이 더 커졌다고 잠시 당시의 소회를 밝혔다. 또 최근에는 1962년 도난당했던 백범 김구 선생의 친필 天君泰然(천군태연)을 되찾아 52년 만에 원래 주인인 강릉 선교장(중요민속자료 제5호)에 기증했다. 이 글씨는 백범 선생이 광복 후 귀국해 73세 되던 1948년 4월 당시 선교장 주인이었던 이돈의(李燉儀) 선생에게 보낸 글씨다. 이돈의 선생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을 남몰래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것에 대한 김구 선생의 감사 표시였던 글씨였다. ◆글마루, 많이 읽혀져서 문화를 아끼는 이들이 늘어나길 아울러 김종규 이사장은 지난 9월 창간 4주년을 맞이했던 글마루에 대해서도 축하의 인사를 잊지 않았다. 잡지가 4년까지 간다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죠. 그런데도 글마루가 4년이나 됐다니 한편으로는 놀랍습니다. 저도 글마루 독자인데, 글마루를 관심 있게 보고 있으며, 왜곡된 문화와 역사를 바로 잡아가는 데 역점을 두고 잘해나가는 것 같다고 판단됩니다. 종교도 제자리를 찾아가는 데 있어 빛을 발휘하고 있는 것 같아 뿌듯합니다. 또 그는 이런 점 때문에 글마루는 더욱 소장가치가 있고, 글마루가 은행이나 도서관 등 많은 곳에 비치된다면 독서운동이 됨과 동시에 문화를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이 더욱 늘어갈 것이라 봐집니다. 아무쪼록 글마루가 계속해서 비상하길 기원합니다라고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김현진 기자

[전설과 역사가 맞닿은 그곳 ‘백령도’②] 효녀 심청, 효자 예수를 만나다

▶[전설과 역사가 맞닿은 그곳 백령도①] 늙은 신의 마지막 작품 기사에 이어서 ◆장산곶과 백령도, 그 사이에 인당수가 있다 효녀 심청이 앞 못 보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공양미(供養米) 삼백 석에 몸을 던졌다는 인당수(印塘水). 백령도와 북한 황해도 장산곶 사이의 바다를 인당수로 보는 견해가 힘을 얻고 있다. 이는 백령도에 효녀 심청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 심청각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백령도와 대청도 중간에 있는 연봉바위는 용궁에 내려갔다 온 심청이가 연꽃에 싸여 물 위로 떠올랐던 곳이라고 한다. 소설이든 혹은 오래 전의 실화가 시간이 흐르면서 설화처럼 굳어진 것이든, 심청각에서 바라보는 인당수는 유난히 더 깊고 차가워 보인다. 아버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바친 효녀 심청. 사실 조금만 더 유심히 들여다보면 심청의 이야기는 효(孝)라는 메시지 외에도 어른들의 위선과 욕심, 종교인의 사기행각(스님), 뱃사람들의 인신공희 등 참으로 복잡다단한 문제들이 얽히고설켜 결국 한 소녀를 죽음으로 내민 슬픈 이야기가 함께 서려있다. 또한 심청이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이면,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던진 행위가 단지 아버지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심청의 희생은 당시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하고 불법을 당연한 듯 행했던 어른들과 그런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희생이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인당수인가. 사람이 희생의 제물로 바쳐지는 곳이라면 응당 사람 인(人)자를 떠올리기 쉬운데, 심청이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해 몸을 던진 곳은 도장 인(印)을 쓴 인당수(印塘水)다. 이는 초자연적인 무엇 혹은 누군가와의 무언의 약속을 상징한다고 해석 할 수 있다. 공양미 삼백 석에 눈을 뜨게 된다는 스님의 약속은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는 거짓이었지만, 그 약속을 철썩 같이 믿고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의 믿음이 결국 아버지의 눈을 뜨게 만든다는 복선은 아니었을까. ◆만고 효녀 심청, 만고 효자 예수를 만나다 어이 하나. 어이 하나. 이 일을 어이 하나. 불쌍한 심청이는 인당수에 빠지고. 푸른 물 인당수는 물결만 출렁이네 불쌍한 심청이는 인당수에 빠지고. 공양미 삼백 석에 제물이 되었다네. 조은아 작시, 이수인 작곡의 합창곡 인당수의 일부다. 소경인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진 효녀 심청과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먹먹한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아무리 아버지를 위한 희생이라고는 하지만,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깊고 차가운 바다 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소설에 따르면, 심청이 배에서 뛰어 내리기 전 선창(船艙)에 서서 두 손 모아 신령님께 우러러 빌 때 산천도 울었고 초목도 울었다고 한다. 이 심청은 인당수 깊은 물에 빠졌다가 3일 만에 부활해 왕비가 됐으며, 그 효심이 결국 아버지의 눈을 뜨게했다. 이는 마치 초림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생각나게 한다. 2000년 전 초림 예수 또한 하나님의 말씀도 그 약속도 알지 못하는 밤 같은 세상에서 소경들의 눈을 뜨게 하고자 은전(銀錢) 30냥에 팔려 십자가상에서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께 기도했다. 예수는 장사한 지 3일 만에 부활해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우편에 앉았으며, 다시 올 것을 약속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장 39절) 하나님의 아들 예수 또한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져야만 하는 사명 앞에서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자, 인류를 죄에서 해방하기 위한 길이었기에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것이 혹 죽음일지라도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 이 또한 효(孝)였다. 그렇게 백령도에서 만난 효녀 심청은, 2000년 전 초림 예수를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만고 효자 예수와 만고 효녀 심청이 이곳 백령도에서 조우(遭遇)한 것이다. 늙은 신의 마지막 작품이라 불릴 정도로 천혜의 비경을 자랑하는 섬 백령도. 운명의 장난처럼, 아니 운명처럼 우리의 품으로 들어온 서해의 외딴 섬. 어쩌면 더욱 외로운 섬으로 남았을지도 모를 그곳. 오랜 역사만큼 많은 이야기를 품은 섬두무진의 일몰 백령도. 그곳이 좋다.

[전설과 역사가 맞닿은 그곳 ‘백령도’①] 늙은 신의 마지막 작품

대한민국 땅의 서쪽 끝이자 북쪽 끝에 있는 백령도. 북한 땅과 맞닿아 늘 긴장감이 흐르는 섬이다. 섬 중에서도 외딴 섬에 속하다보니 독특한 자연과 문화가 잘 보존돼 있다. 천혜의 비경에 늙은 신의 마지막 작품이라고도 불리는 이 섬에는 얽힌 이야기도 많다. 인천을 떠나 대청도와 소청도에 잠시 들른 배가 4시간 만에 백령도에 다다른다. 푸른 하늘과 바다 중간 지점에 놓인 섬의 신비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북녘 땅이 바로 보이지만, 바닷가 풍경은 여느 섬과 마찬가지로 평화롭다. 따오기가 흰 날개를 펼치고 공중을 나는 모습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백령도(白翎島). 본래 황해도에 속했던 섬은 광복 이후 대청도, 소청도와 함께 38선 이남의 인근 옹진군에 편입되면서 경기도 옹진군으로 재편됐다가 1995년 인천광역시로 편입됐다. 지금은 화동과 사곶 사이를 매립해 면적이 늘어나 국내에서는 8번째로 큰 섬이다. 지리적으로 서울보다 북한이나 중국과 가까운 백령도는 군사문화적 요충지다. 특히 625전쟁 당시 군사 요충지로 주목받았던 탓에 휴전을 앞둔 전쟁 막바지에는 치열한 전투가 수시로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이렇듯 전쟁의 상흔의 남은 곳이지만 백령도는 종교적으로도 의미가 깊은 섬이다. 1832년 최초의 내한 선교사 귀츨라프가 백령도를 찾았고, 1898년 설립된 중화동교회는 국내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장로교회로 백령도에 있는 모든 교회의 모교회(母敎會)다. 중화동교회를 방문했다면 입구 계단에 핀 옹진 백령도 연화리 무궁화나무를 놓치지 말자. 높이 6.3m, 수령 100년 안팎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무궁화나무로 알려져 있다. 백령도는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도 중요한 곳이다. 한국인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는 1846년 백령도를 통한 선교사 입국 루트를 개척하다 관군에게 잡혀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그가 개척한 루트로 프랑스 선교사 17명이 입국하기도 했다. 1984년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맞아 내한한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김대건 신부와 당시 선교사 6명을 성인품에 올렸다. 백령면 진촌리에 있는 백령성당에는 김 신부의 유해 일부가 안치돼 있다. ◆늙은 신이 빚어낸 마지막 작품 백령도가 군사역사적으로만 중요한 공간은 아니다. 시간과 자연이 빚어낸 신비로움을 몸소 느낄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백령도에서도 두무진(명승 제8호) 일대는 신들의 조각품이라고 추켜세울 정도로 절경을 자랑한다. 섬 주변에는 다양한 기암괴석들이 늘어섰는데 이 거대한 암석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장군들이 서로 모여 회의를 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아니나 다를까. 이 기암괴석들이 무리 지은 장군들의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두무진(頭武津)이라고 불린다. 이곳은 또한 서해의 해금강이라고 불릴 정도로 웅장하고 아름다워 백령도 관광의 백미로 꼽힌다. 특히 두무진의 일몰은 보는 이의 넋을 잃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을 보며, 우리 민족의 통일과 진정한 평화를 염원해본다. 두무진은 황해도의 서쪽 끝인 장산곶과 불과 12㎞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모래알이 작고 모래 사이 틈이 좁아 여느 해안과는 달리 단단한 바닥을 가진 사곶해안(천연기념물 제391호). 단단한 백사장 덕에 전 세계에서 단 두 곳밖에 없는 천연비행장으로 유명한 이곳은 4㎞에 이르는 고운 모래사장과 완만한 수심으로 해수욕장으로 각광받고 있다. 남포리 콩돌해변(천연기념물 제392호)에서는 동글동글 작은 자갈들이 파도를 맞고 있다. 사그락 사그락 파도와 자갈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자연의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어느새 마음이 평온해진다. 백령도 용기포 신항과 마주하고 있는 용기원산 전망대에 오르면 섬의 전경을 한눈으로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날이 좋으면 북한의 장산곶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식상한 표현을 빌리자면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이건만 분단과 휴전이라는 시대적 상황이 만들어낸 비극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2010년 천안함 폭침으로 목숨을 잃은 천안함 46용사의 넋이 깃들어있기 때문인지 이곳의 애잔함이 더해진다. 백은영 기자 | angel@newscj.com ▶[전설과 역사가 맞닿은 그곳 백령도②] 효녀 심청, 효자 예수를 만나다이어서 보기

[인터뷰] 국악계의 새로운 물결 소리아밴드 “신(新)국악의 무한도전, 세계가 주목하다”

아름답고 매력적인 다섯 멤버가 무대에 올라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보컬의 파워풀한 가창력은 듣는 이들의 마음까지 시원하게 만든다. 강렬한 사운드와 화려한 무대 매너, 여기까지는 여느 걸그룹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 순간 가야금과 해금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게 된다. 이어 보컬과 함께 무대 한가운데서 장구를 치며 퍼포먼스를 벌이는 멤버가 눈에 들어오고, 대금을 부는 소리에 마음이 녹는 것 같다. 이들의 음악 중심에는 국악이 있다. 멤버들은 가야금, 대금, 해금, 장구 등 국악기를 연주하고, 가사와 곡에도 아라리가 났네 어기야디여라차 등 익숙한 우리 전통음악이 들어간다. 그런데 팝과 재즈, 일렉트로닉, 하우스음악 등이 그 속에 섞여 있다. 국악과 대중음악 요소를 접목한 트렌디한 사운드에 다채로운 퍼포먼스를 곁들인 신(新)국악의 무한도전이다. 한국음악의 현대화, 대중화 그리고 세계화를 외치며 국악 연주와 대중음악을 접목해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신국악 걸그룹 소리아밴드를 지난달 16일 만났다. 무대 위 강렬한 모습과는 달리 여느 20대 초중반의 아가씨들처럼 앳되고 순수한 모습들이다. Soul of KOREA라는 뜻의 소리아(SOREA)밴드는 지난 2006년 첫 선을 보인 이후 전 세계를 돌며 600회 이상의 공연을 가졌다. 현재 소리아밴드 멤버는 보컬을 맡은 쏘이, 타악과 거문고를 맡은 타야, 가야금의 혜정, 대금과 소금의 청아, 해금을 연주하는 하늬 등 국악과 실용음악을 전공한 실력파 아티스트 5명으로 구성됐다. 소리아밴드는 보사노바, 켈틱뮤직, 레게, 탱고 등 각국의 전통음악과 견주는 우리의 음악으로서 국악을 세계에 알리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 한국문화의 다양한 요소와 세계의 트렌드를 접목한 문화 콘텐츠 개발로 진정한 한류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목표를 갖고 있다. 유튜브에 공개된 이들의 독특하고 매력적인 음악과 전 세계를 누비며 가진 많은 공연으로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유명인사가 됐다. 대중에게 어필되는 소리아밴드의 매력은 무엇일까. 멤버들의 생각을 직접 들어봤다. 우리가 고루하게 생각하는 옛 시대의 국악이 당시의 대중음악이었으니, 지금 우리 국민들이 듣고 있는 음악은 현재의 국악(國樂)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요즘 케이팝과 일렉트로닉, 라운지 음악이 젊은 세대가 듣는 주류 음악인데, 소리아밴드는 그 현대적인 사운드에 우리 전통음악을 조화롭게 접목시키고 거기에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는 퍼포먼스를 가미한 신국악을 제시하고 있어요. 지난 10년간 꾸준히 발전시켜 온 소리아밴드의 신국악이 넥스트 케이팝이라고 자부합니다. 신국악 걸그룹은 아직 많은 분들에게 생소한 단어라는 것을 알아요. 그 점이 단점이지만 동시에 장점이기도 해요. 많은 걸그룹과 아이돌이 전 세계 팬덤을 확보하고 있지만, 국악적 요소와 접목해 젊은 음악을 펼치는 걸그룹은 아마 찾아보기 힘들 거예요. 국악기를 잠깐의소스로 활용하는 프로젝트성이 아닌 음악의 태생 자체에 한국적 요소와 현대적 트렌드를 지니고 있는 독보적인 음악이 신국악이예요. 그 독특함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최근 소리아밴드를 사랑하는 페이스북 팬이 2만 명이 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전통 국악에서 느껴지는 거리감과 국악의 변화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은 단점으로 여겨진다. 멤버들은 그런 이유로 차별화되는 그들의 음악이 오히려 장점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최근에는 아리랑을 모티브로 해서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아라리가.났.네(Araliga.Nat.Ne)를 발표해 한국적인 정서와 세계적인 트렌드를 잘 소화했다는 호평을 받으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현대적인 트렌드를 제시하는 민화작가로 정평이 나있는 라오미가 참여한 뮤직비디오 역시 파격적인 음악만큼이나 화제를 낳고 있다. 라오미와 소리아밴드가 공통적으로 지닌 최첨단의 기술로 무장한 전통문화를 하나의 작품을 통해 만날 수 있는 기회다. 소리아밴드는 대중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노력으로 국내외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소리아밴드만의 스타일로 커버한 UCC시리즈를 선보이고 있다. 한류열풍을 이어가고 있는 소녀시대, 빅뱅, 2NE1 등의 히트곡과 유명 팝송을 국악버전으로 연주한 영상을 유튜브에 올리고 있는데 반응이 좋다. 이를 통해 대중들은 친숙한 음악을 신국악으로 들었을 때의 신선함과 국악기의 매력에 쉽게 빠져들게 된다. 대중의 기호와 트렌드는 빠르게 변하고, 대중은 항상 새로운 것을 원하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것에는 한국적인 것이 들어있다고 생각해요. 지금껏 많은 공연을 해왔지만 특히 더 기억에 남는 공연은 무엇이었을까. 혜정은 지난달 3~4일 서울 올림픽공원 뮤즈 라이브홀에서 열린 소리아밴드의 단독콘서트 2014 리미티드 콘서트를 제일 기억에 남는 공연으로 꼽았다. 장구 가야금 거문고 대금 소금 해금 꽹과리 등 국악기와 멀티미디어 콘텐츠를 활용한 다채로운 퍼포먼스는 물론 그간 선보인 국악에 팝과 재즈 등 각종 대중음악 요소를 접목한 차별화된 공연을 펼쳐 팬들의 환호를 받았다. 이번 콘서트는 200명의 관객들과 가까이 밀착해 같이 호흡하고 느끼는 콘서트여서 더욱 좋았다고 회상했다. 청아는 지난달 11~12일 열린 2014 이태원 지구촌 축제에 초청돼 다양한 인종과 국적의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공연했던 것이 가장 인상 깊었다고 전했다. 타야는 대한민국 한복페스티벌 in 울산에 지난 1회에 이어 이번 2회 때도 초청받았던 것이 좋았는데, 신국악과 한복페스티벌의 취지가 비슷하다는 이유에서다. 벌써 3회 초청도 예약돼 있다. 하늬는 군부대 순회공연이 새로운 경험인 것 같다면서 장병들이 정말 좋아해주니까 오히려 저희가 기를 받고 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쏘이는 리스타트 더 쇼(Restat the show) 등의 곡이 수록된 앨범 Monsterious Story가 미국 공영방송 PBS의 다큐멘터리 김치연대기(Kimchi Chronicles)의 배경음악으로 쓰인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이를 통해 소리아밴드의 음악이 미국 전역에 퍼지게 됐고, 2011년 미국 백악관 영빈관에서 특별공연을 가진 데 이어 미국 순회공연까지 펼치게 됐다. 장난삼아 말씀드리지만, 월드스타 싸이보다 2년 먼저 백악관 공연을 갔다는 걸 계속 말씀드리고 있어요. 소리아밴드는 해외 유명 아티스트와 콜라보 프로젝트도 준비하고 있다. 아직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미국 메이저 아티스트 기획사와 계약을 하고, 준비를 하고 있어요. 최대 시장인 미국에서 국악을 알리고, 전 세계인이 즐겨듣고 찾아들을 수 있는 음악으로서의 신국악의 매력을 선보이고, 그렇게 쭉쭉 뻗어나가기를 희망해요. 그에 맞게 소리아밴드는 음악뿐 아니라 미술, 디자인, 영상에도 새로운 시도를 펼쳐 시각과 청각, 감성과 기술 등 모든 감각을 깨우는 음악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나아가 전 세계 음악시장의 중심인 미국에서 신국악을 알리고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싶은 꿈이 있다. 빌보드차트 1위를 하고 싶다는 당찬 포부를 밝히기도 한 소리아밴드의 음악이 널리 사랑받길 바란다. [박혜옥 기자]ok1004@newscj.com

피어라, 정조가 살아있을 때처럼 (2)

전남 강진에서 만난 다산 정약용 ◆이치를 좇는 일, 선비와 스님의 길 다를 바 없었다 사람들은 나를 역병에 걸린 환자를 보듯 피했다. 강진 사람들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부모도, 나라 임금도 몰라보는 천주학쟁이 혐의를 받은 죄인에게 따뜻한 눈길을 기대할 수 있었으랴. 특히나 그를 밀착 감시하기 위해 강진현감으로 노론벽파의 골수 이안묵이 부임했을 정도인데 말이다. 하지만 죽으란 법은 없는 것. 강진읍 동문 앞에서 음식과 술을 팔던 주막 동문매반가의 주모 할머니가 좁은 골방 한 자락을 내주었다. 이곳이 낯설고 물 설은 강진에서 정약용이 처 음 몸을 의지한 곳 사의재이다. 사의재란 마땅히 해야 할 의로운 네 가지로 생각은 마땅히 담백해야 하니 담백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빨리 맑게 하고, 용모는 마땅히 장엄해야 하니 장엄하지 않으면 빨리 단정히 하고, 말은 마땅히 적어야 하니 적지 않으면 빨리 그쳐야 하고, 행동은 마땅히 무거워야 하니 무겁지 않으면 빨리 더디게 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정약용은 이 주막 한 칸에 서당을 열어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산석이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한 날은 산석이 자신의 둔함을 자책하자 약용은 천천히 입을 열어 말했다. 공부하는 자에게 큰 병통이 세 가지 있는데 너에게는 해당되는 것이 하나도 없구나. 첫째, 총명하여 외우기를 빨리하면 그 폐단은 소홀히 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글을 빨리 짓는 것 은 그 폐단이 부실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 깨달음이 빠르면 그 폐단은 거칠어지는 것이다. 무릇 둔하면서 파고드는 자는 그 구멍이 넓어지고, 막혔다가 소통이 되면 그 흐름이 툭 트 이게 되며, 미욱한 것을 계속 닦아 내면 그 빛이 윤택해지는 법이다. 파고들어가는 것은 어떻게 하느냐? 부지런함이다. 소통시키는 것은 어떻게 하느냐? 부지런함이다. 닦아내는 것은 어떻게 하느냐? 역시 부지런함이다. 이 부지런함을 어떻게 다 할 수 있겠느냐? 마음가짐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 정약용은 아이들을 가르치고 남는 시간엔 주역(周易)에 몰두했다. 4년쯤 지나자 귀양살이가 다소 완화돼 인근 산책이 가능해질 무렵이었다. 갇혀 지내던 생활에서 자유를 얻은 정약용에게 하루는 노인이 찾아와 만덕산 백련사 주지가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듣게 된다. 백련사에는 서른네 살의 혜장선사가 주지로 있었다. 혜장은 정약용보다 나이가 열 살 어렸고 승려였지만 유학에 조예가 깊었고 시에도 뛰어났다. 정약용은 어느 봄날 백련사를 찾았다. 주지 혜장은 만경루에서 다산을 맞았고 둘은 주역을 놓고서 밤늦도록 이야기를 이어 갔다. 혜장은 역(易)에 관심이 깊어지던 터에 스승을 만난 듯했고, 정약용은 혜장으로 인해 차와 불교에 심취하는 계기가 됐다. 정약용은 특히 차의 세계에 있어서만큼은 혜장을 임금처럼 여겼다. 혜장은 우리나라 차문화를 적립한 초의선사를 다산에게 소개해준 주인공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만덕산에 서 딴 찻잎을 발효시켜 만든 떡차를 마치며 수시로 학문을 논했는데 혜장이 정약용에게 보낸 시를 보면 얼마나 서로를 아끼고 존경했는지 짐작할 만한다. 은근한 말씨 속에 깊은 의미 담겨 / 두려운 마음으로 잘못을 고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다 / 주역의 상에 뛰어난 안목 있고 / 날카로운 필봉은 졸음을 몰아낸다 / 우연찮은 해후에 갖은 시름 다 잊다가 / 헤어지면 마음 아파 그저 생각뿐인데 / 때마침 들녘 절간 찾아 / 껄껄대는 웃음 속에 불법을 묻는다 정약용은 혜장의 성품이 의외로 급한 것을 알고, 노자의 가르침 중 부드럽기를 어린아이 같이 하라는 말을 인용해 아암(兒庵)이란 아호를 지어주기도 했다. 다산이 해배되기까지 10년 간 지냈던 다산초당 옆 동암 뒤에는 백련사까지 이어지는 오솔길이 나 있다. 그 길은 선비(유)와 스님(불), 숨통 막히는 유배지와 자유를 주는 세상의 경계를 넘나들게 했던 길이 었다. ◆죄인의 오명 벗을 때까지 다산 정약용. 실학을 집대성한 실학자이자 사상가이며 목민심서, 흠흠심서, 경세유표 등 유배기간 동안 500여 권의 책을 저술한 조선의 천재. 18세기 인물의 사상과 업적이 21세 기인 오늘에도 하루가 멀다 하고 언론에 등장하는 것을 보면 위대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는 듯하다. 헌데 그 위대한 인물이 가장 오래 머물었던 유배지 전남 강진에선 그를 포장하고 있는 수많은 말들보다 유배객의 초조함, 외로움과 고독함이 짙게 묻어있었다. 그가 제자들에게, 또는 가족에게 보낸 편지 머리말은 언제나 그리움과 걱정 근심어린 내용들로 시작된다. 그는 무엇보다 사람을 그리워했고, 편지에 답장을 보내지 않는 제자에게 섭섭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유배 초년엔 세상살 이를 덧없어 하며 이불개기를 게을리 한 날도 있었다. 승승장구했던 시절을 잊지 못해 강진의 월출산을 오르면서도 한양의 도봉산을 떠올렸던 그였다. 누리령 산봉우리 바위가 우뚝우뚝 (樓犁嶺上石漸漸) 나그네 뿌린 눈물로 언제나 젖어있다 (長得行人淚灑沾) 월남리로 고개 돌려 월출산을 보지 마소 (莫向月南瞻月出) 봉우리들이 어찌 저리 한양 도봉 같은고 (峰峰都似道峯尖) 그러다 마음을 다잡고 뜻을 세워 저술 활동을 펼칠 때는 어깨에 마비가 올 정도로 몰입했다. 사실 그는 죄인의 오명을 벗어 던지고 싶었고, 그 소원은 너무나 절박했다. 당대는 물론 후세사람들에게 조차도 제대로 평가받을 수 없다는 절박함. 이런 절박함 속에서 다산은 제자들을 길러냈고 역사상 전무후무한 500여 권의 책을 남기게 됐던 것이다. 최근 출간된 말콤 글래드웰의 다윗과 골리앗에선 세상은 상처받은 다윗에 의해 발전한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같은 맥락이다. 최고의 석학이자 임금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충신 이 하루아침에 대역죄인으로 몰려 받았던 상처와 좌절, 시련은 그를 위축시키기도 했지만 결국엔 당대 실세 노론벽파보다 더 열심히 유배지에서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되어줬다. 그리고 100년, 200년이 지나서도 그의 이름과 학문, 업적은 그가 기대했던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회자되며 평가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박미혜 기자 mee@newscj.com

피어라, 정조가 살아있을 때처럼 (1)

전남 강진에서 만난 다산 정약용 ◆천재성보다 뛰어났던 신중함 열흘마다 집안에 쌓여 있는 편지를 점검하여 번잡스럽거나 남의 눈에 걸릴만한 것이 있으면 하나하나 가려내어 심한 것은 불에 태우고 덜한 것은 꼬아서 끈을 만들고 그 다음 것은 찢어진 벽을 바르거나 책 표지를 만들었다. 그렇게 하면 정신이 산뜻해졌다. 편지 한 통을 쓸 때마다 두 번 세 번 읽어보고 마음속으로 빌었다. 이 편지가 큰 길가에 떨어져 나의 원수가 열어 보아도 내게 죄를 주는 일이 없기를 또 이렇게 빌었다. 이 편지가 수백 년을 전해 내려가 수많은 지식인들에게 공개되어도 나를 조롱 하는 일이 없기를 그런 다음에야 봉투를 붙였다. 이것이 군자의 신중함이다. 나는 젊어서 글씨를 빨리 쓰다보니 이런 경계를 무시하는 일이 많았다. 중년(中年)에는 재앙이 두려워 점차 이 방법을 지켰는데 아주 도움이 되었다. 다산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글 중에 하나다. 그는 편지나 일기 같이 지극히 사적인 글에도 도리에 어긋나는 사사로움은 절제했다. 세상모르게 쓰는 글이 일기요, 받는 이만 알게 하 는 게 편지라면 욕지거리 꽤나 소상하게 퍼부어도 될법한 공간인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기록으로 남겨지는 글 하나가 사람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일 찍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1801년 나라를 발칵 뒤집었던 황사영백서사건이 그 일이었다. 황사영은 정약용의 이복 맏형 정약현의 사위로 천주교 신자였고, 신유박해(1801년 천주교도 100여 명이 처형되고 400여 명이 유배된 사건, 이때 정약용의 셋째형 정약종이 처형되고 둘째형 정약전과 약용은 유배형에 처해진다) 전말 보고와 대책을 흰 비단에 기입해 중국 천주교회 북경교구에 보 내려다가 조정에 적발돼 능지처참을 당했다. 조선정부는 천주교가 인륜을 어길 뿐 아니라 나라까지 팔아먹는다고 생각하는 계기가 되어 더욱 탄압했으며 신유박해 때 간신히 목숨을 건졌던 약전과 약용은 다시 서울로 압송돼 혹독한 국문(鞫問)을 당했다. 황사영백서사건과 관련해서는 아무런 혐의를 찾을 수 없었지만 약용은 전남 강진으로, 약전은 흑산도로 다시 유배됐다. 정조가 죽고난 조정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정당화했던 노론벽파의 천하가 되어 그들의 정적이자 남인의 핵이었던 정약용을 제거할 기회를 놓칠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정약용은 그렇게 나이 마흔에 바닷가 강진까지 내몰리게 된다. 한때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전도양양했던 그였다. 스물여덟 살에 대과 장원으로 급제한 약용은 재능뿐 아니라 정조의 오래된 슬픔, 사도세자에 대한 그리움을 아는 신하였다. 정조는 약용에게 수원화성을 설계하라는 명을 내린다. 화성은 단순한 성이 아니었다. 열한 살에 잃어버린 아버지 사도세자를 가까이 모시려는 계획이자, 끊임없이 왕과 개혁정치를 흔드는 한양을 떠나 토지제도를 개선하고 상업 도시를 형성해 이상 정치를 펼치기 위한 꿈의 상징이었다. 약용은 이 엄청난 과업을 정조의 기대에 넘치도록 이뤄냈다. 과학적인 설계도와 기구 제작, 공사 실명제를 시행하고 정당한 임금 지불로 부역인부들의 사기를 높여 축조 경비를 절감했다. 또 10년 안팎으로 예상했던 공사기간은 3년으로 단축됐다. 성공적인 화성 설계 이후에도 암행어사, 병조참의, 정3품 우좌부승지 등을 거치며 이뤄낸 그의 업적과 천재성을 나열하고자한다면 끝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1800년 봄, 그는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한다. 그를 헐뜯는 노론의 상소가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리당략의 위력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당호를 여 유당(與猶堂)이라 짓는데 여는 겨울 냇물을 건너듯이, 유 는 너의 이웃을 두려워하듯 처신하라는 뜻이다. 몸을 낮추고 조심히 살고자 했던 그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늘은 조용히 살고자했던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낙향 몇 달 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뒤이어 순조가 즉위하자, 남인 출신이 많았던 천주교도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 작됐다. 형 정약종, 형수 문화 유씨, 매형 이승훈, 조카 정철 상정정혜, 조카사위 황사영이 한꺼번에 몰살당하고 정약전과 정약용은 돌아올 기약 없는 머나먼 귀양길에 오르게 됐던 것이다. 네 살부터 천자문을 읽기 시작해 열 살 전에 한시를 지었을 만큼 영특했던 그의 천재성이 선천적인 것에 기인한 것이라면, 집착에 가까울 만큼 자기성찰에 몰두했던 것은 후천적인 요인이었으리라. 능력이 뛰어난 인물에게 고난을 통해 신중함을 겸비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누구의 시나리오였을까. 어쨌든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모진 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에게 신중함을 더해줬고 눈부신 학문적 성취를 남길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됐다. ▶2편에 이어집니다 박미혜 기자 mee@newscj.com

3천년 화폐 역사, 공학도의 마음을 흔들다

풍산 화동양행 이제철 대표 머니가 뭐니라고 물으면 눈물의 씨앗이라 하겠어왁스 2집 머니(Money)의 가사다. 장기 불황 속에서 공감백배인 말이지만 머니 입장에선 억울한 일일 수도 있다. 머니는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유물이자 기록물의 측면도 있으니까. 풍산 화동양행 이제철 대표를 만나 화폐의 역사 문화적 가치에 대해 들어봤다. 그는 중앙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해 동아건설 원자력부에서 근무했다. 사우디, 리비아 등 공사현장을 누비며 1계급 특진에, 월급도 대폭 올라갈 때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짐을 싸서 직원 다섯 명 남짓한 작은 사무실로 직장을 옮겼다. 동아건설의 상사와 동료, 친척 모두 하나같이 미친놈 중에 미친놈이라 했지만 이미 정한 마음을 돌이킬 수 없었다. 그리고 젊음을 담보로 달렸다. 일주일 동안 밤을 꼴딱 새도 피곤한줄 몰랐다. 30대 잘나가던 청년이 들어갔던 회사는 그 이름도 낯선 화폐수집 전문업체 화동양행, 지금의 풍산 화동양행이다. 그를 설득한 건 화동양행의 창업주 이건일 전 회장이었다. 이건일 회장 역시 한양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공학도다. 그런데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화폐와 관련된 3천 년 동서양의 역사와 주조 지식을 거의 섭렵하다시피 했던 것이다. 이 회장에게서 들었던 세상은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세상이었다. 화폐가 가지고 있는 역사성뿐 아니라 그 나라 최고 기술진과 디자이너가 만나 탄생하는 화폐에 청년 이제철은 매료됐다. 1986년 그렇게 화동양행에 첫발을 내디뎠고 27년 동안 묵묵히 한길을 걸었다. 그리고 2004년 이 회장으로부터 화동양행은 내자존심이다. 자존심을 지켜 달라는 말과 함께 최고경영자가 되어 책임을 맡고 있는 상태. 지난 2012년에는 주화용 소전(음각을 넣기 전 반제품 동전) 제조업체인 풍산그룹이 화동양행을 인수, 자회사로 편입해 공식 회사명은 풍산 화동양행이다. 전 세계 20여 개 주요 조폐국의 한국 내 판매권자인 풍산 화동양행은 현재 온오프라인 시장에서 세계 각국의 화폐나 기념주화를 국내에 소개하는 다리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나라님 걱정 유별났던 흔적이 별전에 고전화폐 수집은 역사 수집이다 천만년이 다되도록 영원토록 덕망의 향기를 세상에 펼치소서 조선별전에 새겨져있는 어천만년 세세생향(於千萬年 世世生香)이란 글의 뜻이다. 별전은 엽전 시제품의 일종이었다. 완제품 압박이 덜해서였을까. 시제라는 것에 머물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한껏 멋을 부린 별전은 다양한 형태로 주조돼 애장품이나 패물로 사랑을 받았다. 구도, 도안, 세공까지 단연 최고죠. 요즘에도 이렇게 구멍을 낸다는 게 쉽지가 않은데 당시는 주물로 만들었거든요. (중국, 일본의 별전과) 비교가 안 돼요. 안에 담고 있는 의미는 말할 것도 없고요. 그래서 어르신들께 가끔 표준한국별전열쇠패 목록책을 드려요. 시간되실 때 한번씩 보시라고요. 좋은 뜻이 얼마나 많은지요. 정말 그랬다. 별전에 새겨진 한자성어들은 개인의 장수나 가정의 평화를 바라는 내용뿐 아니라 국가, 나라님에 대한 기원도 많았다. 어천만년 세세생향을 비롯해 구오복강녕(九五福康寧)-임금의 오복과 평안, 장수를 기원하다천추만세-(天秋萬歲) 임금이 천년, 만년 동안 장수하기를 기원하다등 나라님을 생각하는 글귀들이 넘쳐났다. 또 예의염치(禮義廉恥)-예의를 지키고 염치를 지녀야 군자의 자격을 갖출 수 있다금슬우지(琴瑟友之)- 부부간의 금슬이 좋아 마치 친구처럼 지낸다수복강녕(壽福康寧)-오래 살고 복되며 건강하고 편안하다등 인격수양과 가정의 화목을 위한 다양한 표현들을 담고 있었다. 조선시대 상평통보가 나올 때 주조된 게 별전인데 이런 좋은 글귀들이 새겨져있다는 것이 대단히 자랑스러워요. 우리 조상들이 이런 정신세계, 혼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곧 우리의 국력을 말해주는 게 아닐까요. 화폐 속에는 문화뿐 아니라 역사의 희로애락도 고스란히 담겨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 때 지폐 금권 100원의 도안에 일본의 부엌신 대흑천상이 그려져 있고, 구한말 30여 년 동안 근대주화가 50여 개나 만들어졌다. 격변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서양의 화폐도 역사를 반영하기는 마찬가지인데 중세시대 암흑의 그림자는 화폐에도 드리워져 주화의 두께가 양철판 정도로 얇아지고 귀금속의 순도는 낮아졌으며 색깔은 대부분 어두웠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기계가 돈을 찍기 시작하면서 돈의 모양새 자체가 바뀌었고 섬세하고 복잡한 도안도 표현할 수 있게 됐다. 이처럼 엽전이나 별전, 옛날 지폐 등 고전 화폐의 수집은 역사를 수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공부도 해야 하니 그만큼 성취감도 남다르게 된다. ◆기념주화 가격 경쟁력 갖출 때 문화수준 격상될 것 수집은 동서양의 옛날 돈뿐 아니라 올림픽, 월드컵, 동식물, 건축물 등 주제별로 다양한 현재의 기념주화도 포함한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열렸던 88서울올림픽에선 당시 32종의 주화가 발행돼 국내 화폐수집 활성화에 큰 기여를 했다. 최근엔 각국에서 앞다투어 발행하고 있는 십이간지 시리즈가 인기다. 올해는 청마의 해로 전통적인 느낌의 캘린더 메달을 제작해 판매하고 있는데 십이간지는 12년 동안 꾸준히 수집해야 하니 기다림을 요하는 수집분야이기도 하다. 화폐가 가지고 있는 역사성과 수집의 재미, 그 가치도 알만한데 제왕의 취미라고 불리는 화폐 수집을 일반사람들도 즐길 수 있을까. 지금 호주머니 속에 있는 10원, 50원, 100원부터 모으면 돼요. 다 수집 가치가 있는 것이거든요. 또 화폐의 가치는 희소성, 인기도 그리고 보존 상태에 따라 달라져요. 참고로 5가 들어간 화폐를 한 번 모아보세요. 5는 보조화폐이기 때문에 많이 안쓰이거든요. 그러니 희소성이 있죠. 그래서 은행의 지점장님 가운데 해마다 5천원, 5만원 신권을 한 다발씩 보관하고 있는 분들도 있을 거예요. 풍산 화동양행은 주화를 발행하는 기관은 아니다. 세계의 조폐국에서 발행하는 기념주화와 수집용 화폐를 국내 시장에 소개하며 화폐시장의 저변확대를 꾀하고 있는 회사다. 그래서 화폐수집가들을 위해 코인클럽을 운영하고, 월간 화동뉴스를 만들어 화폐계의 동향과 최신 소식 등을 제공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러시아 중앙은행이 발행한 2014 소치 동계 올림픽공식 기념주화를 유통시켰고, 비엔나 필하모닉 불리온 주화(Bullion Coins)를 선보여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기도 했다. 세계의 조폐국들은 국내 화폐시장보다 기념주화 발행이 수월한 편이라 국가 간에 동일한 주제로 만들어진 기념주화의 경쟁이자연스럽다. 반면 우리나라는 법률적으로 주화발행이 제한돼 있어 화폐수집 시장 또한 크지 않다. 독도 수호의지 표명(2005년, 우간다), 김수환 추기경 선종 추모(2009년, 라이베리아), 김연아 선수 금메달 수상(2010년, 투발루) 등의 기념주화 뒷면에 다른 나라의 상징물이 새겨졌던 이유 역시 외국에서 제조한 외국화폐를 국내에 유통했기 때문이다. 기념주화 앞뒷면을 한국의 상징물로 채우려면 한국은행에서 발행한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기념주화 발행권을 가지고 있는 한국은행은 연간 4건 정도의 기념주화를 발행하고 있다. 캐나다(연간 100건)와 프랑스(연간 60건)는 물론 가까운 일본(연간 12건), 중국(연간 10건) 등에 비해서도 굉장히 저조한 편이다. 경쟁력 있는 상품이 경쟁력 있는 가격으로 나온다면 많은 국민들이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 예술성을 홍보하는데 나쁠 게 없잖아요. 게다가 수출까지 하게 되면 외화도 벌 수 있고요. 우리나라는 예부터 예술적, 기술적 자질이 충분하기 때문에 화폐 역시 세계시장에서 경쟁해도 살아남으리라 믿습니다. 88올림픽 이후 30년이 지난 시점인 2018 평창동계올림픽 때는 전 세계가 인정할 만한 기념주화를 선보여야 하지 않을까요. 경제대국의 반열에 올라선 대한민국, 이제 그 문화적 우수성을 보여주는 척도는 기념주화 발행에 있으리라 봅니다. 이 대표는 국내 화폐시장이 더 확대되지 못한 현실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치는 한편 유통 및 마케팅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우리가 기념주화를 발행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면 어떤 화종을 몇 개 만들어야 하는지, 또 어떤 방식으로 홍보해야하는지 등은 풍산 화동양행이 다년간 쌓아온 노하우를 통해 얼마든지 제시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화폐 수집은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전 세계의 문화와 역사를 아주 적은 공간에 모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고급 취미다라며 성숙한 화폐시장을 위해 수집가와 화폐발행기관, 공인기관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미혜 기자 mee@newscj.com

香庭에서 느낀 만남의 중요성 (3)

한무숙문학관 신(神)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주장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믿느냐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것이 이해도 되지 않을 것이고, 그런 사람들이 한없이 어리석어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존재를 위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내놓았을까? 논술에서 말하는 오류 중에 무지에 호소하는 오류라는 것이 있다. 이는 어떤 주장이 증명되지 못했기 때문에 거짓이라고 추론하거나, 반박되지 않았기 때문에 참이라고 추론할 때 발생하는 오류인데 예를 들어서 아무도 신을 본 사람이 없기에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거나 피고인이 무죄라는 증거가 없으므로 유죄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그렇다. 하지만 무지에 호소하는 오류에서 중요한 것은 검증할 수 없거나 검증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곧 대상의 비존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검증되지 않았다고(눈에 보이지 않는다고)해서 그 것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무신론자들이 신(神)의 존재에 대해 부정할 때 자신은 신을 못 보았기에 신은 없다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자신의 눈에만 의지하는 자여, 당장 가서 수돗물을 한 컵 받아보라. 그 물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과연 아무 것도 그 안에 없다고 생각하는 게 맞는가? 환경부 자료에 의하면 수돗물 한 컵에는 4종의 미생물, 11종의 무기물질, 17종의 유기물질, 10종의 소독제 및 16종의 심미적영향물질이 들어 있다. 하지만 아무리 컵을 뚫어지게 쳐다봐도 이것들은 보이지 않는다. 이제 이야기를 다시 인생에서 중요한 다섯 번째 만남으로 가져가보자. 종교지도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길(道)을 알려주는 존재다. 그러기에 그는 밝은 영적인 눈(靈眼)을 가져야 하겠다. 하지만 작금의 세태를 보면 참으로 한심하다. 형이상학적인 가치를추구해야 하는 종교지도자가 오히려 범인(凡人)보다 더 형이하학적인 경우가 수없이 많다. 쉽게 말해 진리가 아니라 돈이나 권세를 위해 산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들이 믿는다고 하는 종교의 경전(經典)에서 무엇을 말하는지 속 시원히 말해주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다. 영안(靈眼)이 감긴 소경인 것이다. 이에 대해 인류 최대의 베스트셀러인 성경(聖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마태복음 15장 14절) 자신의 눈이 감긴 사실도 모른 채(경서의 참뜻도 모른 채) 그저 느낌으로 이것은 이럴 것이다라고 추측하다가 이윽고 그 추측이 신념이 되어 진리로 믿고서 누군가가 사실(진리)을 알려주어도 여전히 눈 감고 귀 막으며 들으려고 하지 않고 우기는 존재와, 어둠에 갇힌 불꽃들에 등장하는 박노인은 닮았다. 그들의 공통점은 단지 이것만이 아니다. 신약성경의 맨 끝인 요한계시록에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이 나온다. 그런데 그 성에 들어가는 존재와 들어가지 못하는 존재가 있다. 이중 점 치는 자(술객)는 성 밖에 있는 존재들이다. 이 점이 무엇일지는 생각해봐야할 문제다. -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요한계시록 22장 15절) 인간과 종교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지난 몇 달간 시국(時局)문제에 대해 분명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종교계가 생각난다. 그 중 천주교가 가장 먼저였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잘못된 것은 잘못 되었다고 용감하게 말하는 그들에게서 어둠과 함께하지 못하는 빛의 밝은 면을 본다. 암흑 속에서는 성냥불 하나도 밝게 보이는 법이다. 나는 비록 약하고 내가 가진 빛은 그리 밝지 못하나 나로 인해 내 주변은 조금이라도 더 밝아질 것이고 나와 같은 존재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어둠은 점점 물러갈 것이기 때문이다. 빛을 가진 존재가 빛을 가진 또 다른 존재를 만날 때 악(惡)을 이기고 선(善)을 이루게 된다. 이것이 만남이 중요한 이유이다. 김응용 객원기자

香庭에서 느낀 만남의 중요성 (2)

한무숙문학관 이제 남은 것은 종교지도자와의 만남이다. 종교지도자의 머리 위에는 종교가 있다. 그러니 종교(宗敎)와 그 종교의 본질(本質)에 다가갈 수 있도록 바르게 이끌어 주는 종교지도자와의 만남이 인간(인생)의 중요한 만남 중 맨 끝인 5번이자 가장 상위에 있는 만남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미션스쿨에 계신 목사님의 말씀이어서 종교가 들어갔다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꼭 그렇게만 생각할 일이 아니다. 1900년대를 살다간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 중 매슬로(Abraham H Maslow)란 사람이 있다. 인본주의 심리학의 창설을 주도했다고 평가받는 그는 매슬로의 욕구단계설(Maslow'shierarchy of needs)을 주장했다. 인간욕구의 5단계설로도 불리는 이 이론은 인간은 하나의 욕구가 충족되면 위계상 다음 단계에 있는 다른 욕구가 나타나서 그 충족을 요구하는 식으로 체계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한 다섯 가지 욕구는 바로 생리안전소속존경자아실현이다. 물론 생리, 안전, 소속, 존경, 자아실현과 부모, 동성 친구, 이성 친구, 배우자, 종교(종교지도자)를 일대일로 연결 짓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자아실현을 하는 삶과 그렇지 못한 삶은 그 수준이 천지(天地) 차이다. 그런 것처럼 형이상학(形而上學)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의 삶과 형이하학(形而下學)적인 것에만 머무는 사람의 삶은, 하늘에 속한 사람과 땅에 속한 사람이 걷는 길처럼 다르다고 하겠다. 한무숙의 장편소설 만남은 자신이 믿는 종교를 위해 순교자의 길을 당당히 걷는 것으로 자아실현을 이룬 초창기 한국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와 박해 사건을 다루고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과 그의 형인 약전(若銓)약종(若鍾)은 모두 세례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한다.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던 그는 전통 유교 사상 안에 있는 천명 의식과 천주교의 하느님 신앙이 상충되지 않는다고 이해한 것이다.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은 유교에 통달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조선에 왕조적 질서를 확립하고 유교적 사회에서 중시해 오던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념을 구현함으로써 국태민안(國泰民安)를 실현하고자 했다. 그런데 현실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정치가들은 성리학적 전통에만 매달려 민생은 외면한 채 소모적인 논쟁만 거듭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산이 접한 서학(천주교)은 유교와 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학문은 인간에게 이로움을 주어야 한다는 실학적 입장과도 맞아 떨어졌다. 우물 안 개구리와 같던 사람들은 볼 수 없었던 큰 세상을 천주교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이 땅의 천주교는 피로 얼룩진 역사를 갖고 있다. 천주교도들에 대한 박해는 정조 때부터 시작했다. 정조 15년(1791)에 전라도 진산의 선비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이 윤지충의 모친상 때 유교적인 전통을 거부하고 신주(神主)를 불사르고 가톨릭식 제례를 지낸 것이 문제가 되었다. 당시 전주는 전라감영이 있던 곳이어서 이들은 전주에서 처형되어 한국 천주교에서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하지만 정조는 천주교에 관대하여서 일이 크게 확대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시 집권 세력은 새로운 학문을 용납할 수 없었다. 천주교 신자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단지 자신들의 기득권을 흔드는 불순한 세력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정치적인 목적으로 모진 탄압을 가하였다. 특히 순조 1년(1801)에 있었던 신유박해(辛酉迫害)와 헌종 5년(1839)에 일어난 기해박해(己亥迫害)가 대표적이다. 먼저 신유박해는 벽파(派)가 시파(時派)를 제거하기 위해 꾸민 것이다. 갑작스럽게 승하한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가 11세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그간 숨을 죽이고 있던 영조의 계비(繼妃) 정순대비(貞純大妃)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통해 섭정을 하게 되었다. 정순대비는 벽파와 시파의 대립에서 벽파의 편에 섰던 사람이다. 급기야 순조 1년 대왕대비의 명으로 사교(邪敎)와 사학(邪學)을 엄금한다는 명이 내려졌다. 이를 계기로 벽파는 시파 계통의 천주교도들에게 무차별적인 탄압을 가한다. 정약전(丁若銓)약종(若鍾)약용(若鏞) 3형제도 이 때 체포된다. 정약종은 순교하고 정약전과 정약용은 귀양길에 오르게 된다. 기해박해 역시 겉으로는 천주교에 대한 박해였으나 안으로는 시파(時派)인 안동 김씨에게서 권력을 빼앗으려는 벽파(派)인 풍양 조씨가 일으킨 사건이었다. 1834년에 헌종이 8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순조의 비(妃)인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역시 수렴청정을 통해 정사에 개입한다. 정국은 순원왕후의 오빠인 김유근(안동 김씨)이 주도하고 있었는데 그는 천주교 세례까지 받은 인물이라서 안동 김씨는 천주교에 대해 관용적이었다. 그러다가 김유근이 은퇴하고 난 후 천주교를 적대시하던 우의정 이지연이 정권을 잡으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다시 시작되고 이것이 기해박해이다. 이때 다산의 조카인 정하상(정약종의 아들)도 순교한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응용 객원기자

香庭에서 느낀 만남의 중요성 (1)

한무숙문학관 한 사람과 어떤 사건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다룬 영화가 연말연시 극장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가난한 것이 한(恨)이 되어서 그저 돈이나 많이 벌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세상 돌아가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자신의 일만 열심히 하던 세무 변호사가, 고시공부 하던 시절 따뜻한 정(情)을 느낀 국밥집 모자(母子)의 기막힌 상황을 알게 된 후 그 집 아들의 변호를 맡으면서 인권 변호사로 거듭나는 내용의 영화 말이다. 자신이 승승장구하던 사이 어느 한쪽에서는 억울하게 죄인으로 몰려 불법감금을 당한 상황에서 온갖 고문을 당하고 있는 등 자신이 사는 세상이 결코 안녕하지 못 한세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처럼 만남은 우리네 삶에서 중요한 것이다. 송구영신(送舊迎新).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와 만났다. 올해는 특히 청마(靑馬)의 해라고 하니, 푸른 꿈(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질주하는 해가 될 것이다. 만남이란 가능성이 있기에 좋다. 새로운 만남에 대해 상념하다 보니 올해 1월 30일로 서거 21주기를 맞는 한국 문학계의 대모(代母) 향정(香庭) 한무숙(韓戊淑) 소설가의 장편소설 만남이 생각난다. 더욱이 1986년 대한민국문학상 수상작인 이 소설이 최근 체코에서 번역 출판되기도 했다는 소식도 들은 뒤여서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 있는 한무숙문학관을 찾았다. 마침 눈이 내려 기와집의 고풍스러움이 한결 더했다. 한무숙 소설가의 장남인 김호기 관장의 안내로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펄 벅(Pearl Sydenstricker Buck)이나 가와바타 야스나리(Kawabata Yasnari) 같은 유명한 문인들이 와서 차를 마신 곳에서 특별한 커피를 대접 받으면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병약한 몸에 엄격한 사대부가의 며느리의 역할을 감당하느라 몹시도 힘이 들었지만, 완전한 여성이 되기 위해 집안일에 충실하면서도 틈틈이 소설을 써서 굵직굵직한 작품들을 많이 내놓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선 완전한 여성이라는 면에서는 그녀가 받은 신사임당상을 들 수 있겠다. 거기에 훌륭한 소설가로서의 면모는 데뷔작인 일본어로 쓴 장편 등불 드는 여인을 비롯하여 역사는 흐른다 만남을 들 수 있겠다. 역사는 흐른다는 하와이대학 출판사에서 영역되어 출판되었고, 만남은 폴란드, 미국, 프랑스, 체코에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기자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교목(校牧, 100년을 훌쩍 넘긴 유구한 역사를 가진 미션 스쿨로 목사님이 계심)님이 하신 말씀이 있다. 인간은 다섯 가지 만남을 잘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중 먼저는 부모와의 만남이고, 친구(동성, 이성), 배우자, 그리고 맨 끝에 종교지도자와의 만남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목사님의 말씀이니 다섯 번째를 그렇게 했겠지만 20여 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그렇다. 부모와의 만남은 자신이 선택할 수 없다. 누군가는 전생에서 가장 큰 빚을 진 사람을 자식으로 만난다고 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내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기야 부모는 자식에게 평생 문서 없는 종노릇을 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하지만 부모에게 자식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 그 자체다. 이토록 어마어마하고 값진 만남이기에 부모와의 만남이 인간의 중요한 만남 중 1번이다. 품안의 자식라고 어느 정도 손발에 힘이 생기면 시선을 밖으로 돌려 친구를 찾는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친구들과 또래 집단을 형성하고 어울리면서 많은 것을 배운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른 행성(行星)에서 온 것처럼 다르다는 말이 있듯이 남녀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러기에 동성(同性)의 친구와 이성(異性)의 친구가 다 중요하다. 여기에서는 과연 이성(異性) 사이에 친구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논외에 두기로 한다. 그 답은 생각하기에 따라 또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친구(벗,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동성 친구와 이성 친구가 주는 영향이나 깨우침은 그 출신 별(화성과 금성)의 거리만큼이나 다를 것이다. 그러니 이 둘이 인간의 중요한 만남 중 2, 3번이 된다. 배우자와의 만남 역시 중요하다. 아니 이것은 부모와의 만남처럼 중요하다.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다라는 말에는 결혼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담겨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결혼은 혼자로서의 삶이 죽는 것이고 둘로서의 삶이 태어나는 일이다( 물론 이 둘의 만남으로 인해 수많은 새로운 만남도 생긴다). 결혼이 새로운 탄생이기에 배우자와의 만남은 부모와의 만남과 같이 중요한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대부분의 경우에 결혼은 선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선택을 두고 현실에서도 또 현실을 모방했다는 드라마에서도 많은 일들이 얽히고설키게 된다. 배우자와의 만남은 인간의 중요한 만남 중 4번이 된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응용 객원기자

시련은 신의 한 수, 그날의 눈물이 안목을 키웠다 (2)

창업신화 이뤄낸 불세출의 거상(巨商) 교귀발 ◆덕이 있는 자만이 복(福)을 오래 누린다 포두에서 자리를 잡은 귀발은 10여 년 만에 고향을 찾았다. 귀발은 부모님 묘소에서 뜻밖에 과부가 된 금환을 만나게 된다. 금환은 아이를 혼자서 기르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다. 고향을 떠나리라 결심하게 만들었던 여자, 금환. 금환과의 재회는 이 책 내용 가운데 가장 극적인 장면이나 스포일러의 위험 탓에 자세히 말할 수 없다. 어쨌든 귀발은 고향에서 금환과 혼례를 하고 정식으로 부부가 됐다. 또 고향사람들에게 당했던 모욕과 수치를 갚아 주리라 했지만 큰 인물은 소인배의 허물을 탓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그들을 너그럽게 용서하고 더불어 살았다. 귀발은 지독한 가난뱅이였지만 당대 최고의 거상이 됐다. 이 뿐만 아니라 소유와 경영의 분리, 종업원의 이윤분배제, 관리자의 권한과 책임 이양 등 당시로선 획기적이고 선진적인 사업방식을 취했다. 단순히 사업적인 성공을 이룬 것에 그치지 않고 고객과 상인의 마음을 모두 사로잡는 군자상인의 면모를 완벽하게 갖췄다. 그 대표적인 예가 귀발이 사용했던 이상한 저울이다. 보통은 저울을 속여서라도 적게 주려하지만 귀발은 오히려 저울을 별도로 제작해 손님들이 더 많이 가져갈 수 있도록 했다. 또 부자들이 먹는 최상급 밀가루는 정량으로 팔되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최하급 밀가루에는 최상급 밀가루를 섞어서 팔았다. 친척집에서 노동을 하며 더부살이를 하는 아이들을 보면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고, 고생에 찌든 아낙네의 모습을 보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힘겹게 사셨던 귀발의 어머니와 혼자서 아이를 키웠던 금환의 생각에 측은한 마음이 절로 생겨났다. 귀발은 돈을 벌 때는 온갖 지혜를 다 짜내서 벌었지만 쓸 때는 누구보다 멋있게 썼다. 직원, 거래처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게까지 말이다. 한편 귀발은 연이은 성공에 도취해 방심하다 전 재산을 잃다시피 한 적도 있었다. 그때도 자신이 손해를 볼지언정 투자자들에게는 약정 이익금을 배상해주며 끝까지 신의를 지켰고, 그때 쌓았던 신용 덕분에 재기도 할 수 있었다. 교씨 집안에는 장사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면 가정은 황금알을 보관하는 금고다는 가훈이 있다. 귀발은 어떤 업적을 이루기도 어렵지만, 그 업적을 지켜나가는 것은 더 어렵다는 말을 깊이 생각했다. 귀발은 자식들과 손자 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또 귀발이 세운 광성공(廣盛公)이라는 대상단 조직의 유지를 위해 상 도리와 관련된 원칙을 붓 끝에 담아 글로 남겼다. 손 사장은 교귀발의 후손들 역시 덕과 선을 베푸는데 인색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교귀발의 손자 교치용 때에는 중국 전체 상권의 절반이 진상(교귀발이 태어난 지역 산서성의 옛 이름)에서 주물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후 청나라 말기 서태후가 산서성으로 도망 왔을 때도 자금을 지원하며 의리를 지켰다. 쑨원(손문)이 신해혁명을 일으켰을 땐 자금을 쾌척하기도 했다. 중화민국이 들어서 지주계급이 척결 영순위가 됐을 때도 귀발의 사람들은 피해를 입지 않았고 오히려 등용됐다. 나라에서도 의로운 부자라 보호해줬다. 교귀발의 후손들은 현재까지도 금융계에서 일하거나 학자가 되는 등 크게 번창해왔다. 결핍은 사람을 만든다. 간절한 자가 상황을 지배한다. 교귀발은 격한 시련과 실패 속에서도 꿈을 저버리지 않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신의를 저버리는 일도 하지 않았다. 뛰어난 사업수완과 열정, 그리고 그가 가진 재주만큼이나 넓은 도량으로 20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모범 상인이자 최고경영자로서 귀감이 되고 있다. 박미혜 기자 mee@newscj.com

시련은 신의 한 수, 그날의 눈물이 안목을 키웠다 (1)

창업신화 이뤄낸 불세출의 거상(巨商) 교귀발 교귀발(喬貴發). 교는 성이요, 귀발은 귀한 부자가 된다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교씨도 낯설거니와 이름에 발자가 들어가서인지 어감이 썩 좋지만은 않다. 그런데 교귀발을 알아본 두 사 람이 있었다. 교귀발 전기를 한국어로 번역해 출판한 왕인북스의 손용식 사장과 퇴임 시 임직원에게 이 책을 선물한 최원표 전 한진해운 사장이다. 교귀발은 2004년에 한국 독자에게 처음 소개됐다. 당시 출판사 대표였던 손 사장은 책을 내기 위해 2000년도부터 여러 차례 중국을 방문했다. 중국에는 이미 교귀발에 대한 책이 7~8종 이상 나와 있었고 손 사장은 그 책들을 몽땅 사서 번역할 사람에게 맡겼다. 번역자들은 여러 종의 책 가운데 하오루춘이 쓴 책이 가장 잘 돼 있다고 판단했다. 4년의 잉태기간을 거쳐 2004년 7월에 하오루춘의 교귀발이 한국어로 출판됐다. 같은 해 9월 최원표 전 한진해운 사장이 퇴임을 하면서 6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을 100여 명의 임직원에게 선물했다. 한국의 두 남자 마음을 사로잡았던 교귀발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수소문 끝에 찾은 손 사장은 당시 책을 출판했던 동기를 한국이 중국을 너무 모르고 뛰어들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1992년 한중수교 이후 한국 기업이 중국에 굉장히 진출을 많이 했다. 그런데 100개 중 98개는 실패했다. 중국을 너무 쉽게, 만만하게 봤던 거다. 그래서 중국 상인 가운데 가장 모범적이고 매력적인 사람을 소개해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엿볼 수 있게 하자, 그렇게 찾았던 인물이 교귀발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책의 원제목은 진상제일교 중국 발음으로 찐상띠이치아오. 진상에서 으뜸가는 교(교귀발)란 뜻이다. 보통 부자가 3대를 가기 어렵다는데 교씨 집안은 7대까지 갔다. 또 유일하게 창업자의 유지가 후대까지 잘 전해진 모범 케이스다. 교씨 집안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컸고, 당시 중국 국영방송 CCTV에서도 춘절(우리나라의 설날)특집 프로그램으로 여덟 명의 상인을 재조명했는데 그 첫 번째가 교귀발이었다고 말했다. ◆하늘이 길들인 혈혈단신의 고아 귀발은 여덟 살에 아버지를 병으로 여의고, 열한 살에 어머니마저 여의었다. 가난했지만 행복하고 단란한, 남부러울 것 없는 집안의 외동아들이 하루아침에 고아가 됐다. 교씨 집안에 남은 사람이라곤 귀발 하나였기 때문에 결국 외삼촌댁에서 살게 됐다. 더부살이의 서러움, 귀발은 일찍이 인생의 쓴맛을 알게 된다. 사촌형은 놀고먹으면서 서당 가서 공부해도 귀발은 그럴 수 없었다. 콩 갈고, 두부 만들고, 두부 팔고, 돼지 먹이고, 청소하고. 사람이 맷돌을 가는 것인지, 맷돌이 사람을 가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일하고도 어린 게 어찌나 잘도 먹어대는지!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밥을 먹을 땐 외숙모에게 돼지 취급 받아야 했고 항상 거친 밥, 남은 밥이 귀발의 몫이었다. 어쩌다 밥이 부족하면 굶어야 하는 것도 귀발이었다. 똑똑한 것도 남의 집에선 흠인지라 도둑으로 몰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귀발은 5년 뒤 외삼촌댁을 나와 자신이 살던 집, 짧지만 행복했던 그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금환이라는 소녀를 사랑하게 된다. 금환은 귀발의 아버지와 교분이 두터웠던 친구의 딸이자 그 동네에서 손에 꼽히는 야무지고 참한 처자였다. 금환 역시 귀발을 좋아했지만 돈도 부모도 없는 귀발과의 혼인을 금환의 부모는 허락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도 결국 돈 때문에 부잣집 아들에게 빼앗기고 만다. 귀발은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성공해서 돌아오리라는 굳은 각오를 안고. 귀발도 몰랐으리라. 왜 그토록 상처와 앙금으로 범벅이 됐어야만 했는지. 하지만 시련은 신의 한 수, 귀발의 어린 시절 고통은 성공이라는 목표를 향해 전진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됐다. 또 가난 때문에 뼈에 사무치도록 아파본 만큼 부를 축적한 후에도 가난으로 고통 받는 자들을 배려할 줄 알았다. 귀발은 많이 배우지 못했다. 글을 읽을 수 있을 정도가 다였다. 다만 귀발 아버지의 유언이었던 근검절약, 적덕행선(부지런하고 사치를 피하며 아껴 쓰라, 덕업을 쌓고 선을 베풀라)이 여덟 글 자를 평생 좌우명으로 삼았다. 귀발은 부지런했고 영리했다. 고향을 떠나 처음 했던 일은 낙타몰이. 낙타몰이는 생명을 담보로 해 큰 수입을 얻는 일이었다. 계속한다면 경력도 쌓이고 돈도 모을 수 있을 테지만 평생을 낙타몰이꾼으로 살 수는 없었다. 그는 북방의 작은 마을에서 적은 자본으로 나물장사, 두부장사 등을 통해 자립할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마음 맞는 동업자와 함께 북방의 다른 마을 포두에 자리를 잡아 건초장사와 객점을 운영했다. 귀발은 두 사람에게서 은근한 적대감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그들의 적대감은 매우 편협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예로부터 같은 업종의 가게가 어느 정도 몰려있을수록 더욱 발전할 수 있는 법이다. 귀발은 자신을 경계하는 상대방을 보며 저 정도 안목이면 경쟁대상이 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발이 포두에서 사업을 시작하려했을 때 기존 상인들은 그를 경계했다. 하지만 귀발은 장사를 배운 것도 아닌데 모두가 더 잘될 것이라 호언장담했다. 두 사람이 작은 그릇의 밥을 나누어 먹는 것보다 세 사람이서 큰 솥의 밥을 나누어 먹는 것이 더 이익이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귀발의 말대로 촌락에 불과하던 포두는 밥그릇 자체가 커져 교역의 중심지, 상업도시로 변모했다. 귀발은 매사에 사리판단이 빨랐고 선견지명이 있었기 때문에 하는 일마다 승승장구했다. 그런데 그의 총명함보다 더 빛났던 것은 그의 도량(度量)이었다. 귀발에겐 적이 없었다. 부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은 누구보다 간절했지만 그는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지 않았다. 넓게 멀리 내다보는 안목이 있었다. 서로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 장사고, 반드시 신의를 바탕으로 협력해야 한다는 원칙을 철저하게 지켰다. 귀발은 장사를 나무에 비유한다면 신의는 뿌리이다. 서로를 의지해 물건을 사고파는 것은 잎이 되고, 그 결실이 바로 돈이다라고 생각했다. ▶2편에 이어집니다 박미혜 기자 mee@newscj.com

‘lIeodo(Ieo Island)’ is not a legendary island

Korean Ver. ▶이어도는 전설의 섬이 아니다 There is a fantasy island where residents of Jeju island longed to visit. For them, the island was an imaginary world that gave people hope to get away from their tough lives. Furthermore, it was an island where people believed that their parents and sons are still alive and residing there. It is Ieodo, an island that appears among legends of Jeju island. An official name for Ieodo is 'Parangdo.' According to a legend, Ieodo was an imaginary world, and at the same time, it was the island of the dead. Thinking of those people who went out to sea to support their lives and those who lost their lives at sea, 'Ieodo' might be a refuge and comforting figure for left ones who lost their loved ones at sea. Since the second half of last year, a legendary island 'Ieodo' has been gathering massive attentions from three major Asian countries; South Korea, China, and Japan. It is was not because of the aesthetic value found in literature nor a legendary story. Ieodo drew attentions of the Asian countries due to 'The Air Defense Identification Zone (ADIZ),' an another symbolic figure that can represent the power of nations in the region. In last November, as China declared its Chinese Air Defense Identification Zone(CADIZ) with the inclusion of the airspace of Ieodo, countries including Korea, the U.S and Japan started to pay special attentions to this issue. Especially for the S. Korean government, which is now practically controlling the airspace around Ieodo thanks to the previously built Ocean Research Station around Ieodo by its nation, the declaration from Chinese government may bother the S. Korean government. Based on what intentions did China include the airspace of Ieodo in its Chinese Air Defense Identification Zone(CADIZ)? In addition, why didn't the S. Korean government include the airspace of Ieodo in its own Air Defense Identification Zone? After the provocative action was taken from China, the Korean government is having repercussions due to its lenient attitude towards the controversial issue. ◆Ieodo, is submerged rock not territory To be exact, Ieodo is not a territory that could be claimed as a nation's territory with jurisdiction. In order to be regarded as an official territory, an island must be surrounded by water and should be a land that was created naturally. Furthermore, an island must be above water permanently. In regards with the definition of an island, Ieodo is a submerged rock, not a territory of a nation. Ieodo, a submerged rock, is located 4.6 meters below sea level. Furthermore, based on the 40 meters below the sea level, the rock has the width of 600 meters from the north to the south and 750 meters from the west to the east. It shows a steep slope in eastern and southern side of the Ieodo and moderate slope in northern and western part of the rock. Ieodo was also called as Scotra Rock and it was named after a ship that firstly discovered Ieodo. In 1938, with the purpose of constructing seafloor transmission facilities and lighthouses, Japan was planning to set up an artificial structures made with concrete that has 15 meters in diameter and the height of 35 meters. However, the plan was demolished due to the outbreak of the Pacific War. It was 1951 when the actual existence of Ieodo, long been an imaginary and legendary island, started to be identified as an actual figure. The Korean Alphine Club and the ROK Navy, which were in charge of territory research project at that time, jointly explored Ieodo and identified its actual figure despite of facing high tides. They placed a cooper plate on its submerged rock. Afterwards Jeju Univ.-KBS Parangdo research team identified the location of the rock once more in 1984 and its depth of water, 4.7 meters, was measured by a research ship of National Oceangraphic Research Institute in 1986. The first structure placed in Ieodo was a light buoy by the Korea Maritime and Port Administration in 1987 and this was internationally declared. ◆Declaring new KADIZ in 62 years with Ieodo After China declared its Chinese Air Defense Identification Zone(CADIZ) over the airspace of Ieodo, the South Korean government scrambled to include the airspace of Ieodo as Korea Air Defense Identification Zone(KADIZ), thus criticized by people as a "late" response. It was an action taken in 62 years and could be regarded as 'mending the barn after the horse is stolen.' Then, why the S. Korean government did not include the airspace of Ieodo as its Korea Air Defense Identification Zone(KADIZ)? Regarding this matter, Mr. Kwon (Ph.D in Law), a senior research fellow at Korea Oceanographic and Technology Institute, said "KADIZ was set 62 years ago and it was declared by the US Pacific Command(PACOM). Furthermore, there was an attempt by the South Korean government to include Ieodo in its KADIZ via a government announcement from the Ministry of National Defense(MND)." He also explained, "...since it could lead Japan to include Dokdo islets in its JADIZ, as a result, the announcement was decided not to be made." He added, "It is disappointing since a resolute external responses and adjustments were not made by the S. Korean government since Japan's JADIZ also included the airspace of Ieodo, even before the declaration of CADIZ by China." Mr. Kwon also said, "From the perspectives of national defense and security issues, it seems that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U.S. played a partial role." As it was mentioned previously, disputes over Ieodo are not about territorial disputes but about the delimitation of maritime boundaries between S. Korea and China. In other words, areas near Ieodo overlap for both S. Korea and China in terms of the delimitation and a consent was already made by the both countries' foreign ministries in 2006." Regarding the issue of having a jurisdiction on Ieodo by the S. Korean government, Mr. Kwon said, "Ieodo is located from both countries less than 400 nautical miles away and both countries could also be regarded as having a same continental shelf in their maritime territories. In other words, it is possible to determine the delimitation of maritime boundaries by using mid-line method which considers special circumstances rather than considering geographical and geological factors. l He also emphasized saying, "Despite the consideration of diverse factors from both countries' claims, since the relevant region is clearly belongs to the S. Korea's exclusive economic zone, it is natural for the S. Korean government to control Ieodo even before the delimitation. In addition, he added, "Since the delimitation issue was not solved yet, fisheries from the region are accessible to both countries' citizens. ◆Why Ieodo matters? Overlapping Air Defense Identification Zone among S. Korea, China, and Japan One of the reasons that Japan provokes S. Korea by mentioning Dokdo islets as its own territory is due to rich fishery and maritime resources around the region. The dispute over Ieodo is in line with the same context. Mr. Kown explained that "It is highly likely that those interests from S. Korea, China, and Japan on Ieodo were created due to a strategic importance of the region in terms of military and availability. Ieodo is often regarded as a major area that could be used as China's deep sea policy and utilization its Naval forces." Furthermore, he added, "As this region can be used as a defense line for Japan to minimize the influence from China, thus, Ieodo is not just a dispute over the jurisdiction. It is exacerbating the dispute as an essential space for both countries to secure the initiative in Northeast Asia." Anyways, S. Korea became a nation stuck in the middle of dispute between two superpowers' power game. Thanks to the interests from Japan and China over Ieodo, Ieodo itself became the Air Defense Identification Zone for all three nations. Regarding this matter, Mr. Kwon said, "The overlap of ADIZ by all three nations could trigger a crisis in the region depending on the future relationship between China and Japan, which is unstable now. Ieodo is not a region relevant to issues of maritime jurisdiction nor sovereignty over islands. However, because of the power game outside of this disputed region, it is possible that areas around Ieodo could be used as a venue for the extension of power game and the test site for conflicts." In addition, he added that, "In these days, Northeast Asia are directly related to conflicts created from each country to seize its own power and initiative such as conflicts between the U.S. and China, China and Japan, or China - the land state, and Japan -the maritime state, and the U.S." Last year, as the Chinese government included Ieodo in its Air Defense Identification Zone, the South Korean government suffered in pains once before. A miserable truth is that the S. Korean government had the time of 62 years to include Ieodo in KADIZ. It is impossible to know why Ieodo was not selected as KADIZ, whether it was due to the ignorance of the S. Korean government or the government couldn't do anything because of surrounding countries' influences. However, I want to ask myself that if China did not include Ieodo in its CADIZ, would Ieodo also be included in KADIZ or not. To make Ieodo not a legendary island again, from now on, I hope the S. Korean government and S. Koreans to pay more attention to what already belongs to S. Korea and keep in mind to protect them. by Paek Eun-Young(angel@newscj.com) translated by Hur Misun

‘이어도’는 전설의 섬이 아니다

영문판 ▶lIeodo(Ieo Island) is not a legendary island 제주도민들이 가고 싶어 했던 환상의 섬이 있다. 그들에게는 고달픈 현실을 벗어난 피안의 세계이자 바다로 나갔다 돌아오지 못한 지아비와 아들이 살고 있을 것이라 믿은 위안의 섬이었다. 제주도 전설에 나오는 섬, 바로 이어도다. 이어도의 정확한 명칭은 파랑도다. 전설 속 이어도는 피안의 세계이면서 동시에 죽음의 섬이었다. 삶을 위해 바다로 나갔던 사람들, 그리고 그 바다가 삼켜버린 사람들. 이어도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홀로 남은 이들이 살아갈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이자 위안이었을지도 모른다. 전설 속의 섬 이어도가 작년 하반기부터 한중일 세 나라의 뜨거운 관심사로 떠올랐다. 문학적인 감수성 때문도, 전설 속 이야기 때문도 아니다. 국가의 권력을 나타낼 수 있는 또 하나의 상징 방공식별구역 때문이다. 중국이 지난 11월 이어도 상공을 방공식별구역으로 설정하자 한미일 세 나라가 촉각을 곤두세웠다. 특히 종합해양과학기지를 건설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이어도를 관할하고 있는 우리 정부로서는 중국의 이번 조치가 여간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중국은 과연 무슨 이유로 이어도 상공을 방공식별구역으로 설정했는가. 또한 우리 정부는 관할권이 있으면서도 사전에 이어도 상공을 방공식별구역에 넣지 못했는가. 중국의 이번 이어도 방공식별구역 설정으로 한국 정부의 안일한 태도가 또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이어도, 영토 아닌 수중암초 이어도는 엄밀한 의미에서 국가의 영토주권이 미치는 영토가 아니다. 섬이 영토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토지로서 물에 둘러싸여 있어야 하며 1년 365일 수면 위에 떠있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어도는 영토가 아닌 수중암초에 해당된다. 수중암초인 이어도는 수면에서 가장 가까운 부분이 해수면 아래 4.6m에 있으며, 수심 40m를 기준으로 해서 남북으로 약 600m, 동서로 약 750m에 이른다. 정상부를 기준으로 남쪽과 동쪽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북쪽과 서쪽은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한중일 세 나라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는 이어도는 1900년 영국 상선인 소코트라(Socotra)호가 처음 발견했다. 이어도를 소코트라 암초(Socotra Rock)라고 불렀던 것도 처음 이어도를 발견한 선박의 이름을 딴 것이다. 1938년 일본은 해저전선 중계시설과 등대시설을 설치할 목적으로 직경 15m, 수면 위로 35m에 달하는 콘크리트 인공구조물을 이어도에 설치할 계획을 세웠다. 허나 일본의 이러한 계획은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무산됐다. 우리에게는 전설의 섬이요, 피안의 섬으로 불렸던 이어도의 실재론이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1951년이다. 국토규명 사업을 벌이던 한국산악회와 해군이 공동으로 이어도 탐사에 나서 높은 파도 속에서 실체를 드러낸 이어도 정봉을 육안으로 확인하고 이어도라고 새긴 동판 표지를 수면 아래암초에 가라앉혔다. 이후 1984년 제주대학교-KBS 파랑도 학술탐사 팀이 암초의 소재를 다시 한 번 확인했으며, 1986년에는 현 국립해양조사원 조사선에 의해 암초의 수심이 4.6m로 측량됐다. 이어도 최초의 구조물은 1987년 해운항 만청에서 설치한 이어도 등부표(선박항해가 위험한 곳임을알리는 무인등대와 같은 역할을 하는 항로표지 부표)로서 그 당시 이 사실을 국제적으로 공표한 바 있다. ◆이어도 62년 만에 KADIZ 설정 중국이 이어도 상공을 중국방공식별구역(CADIZ)으로 설정한 후에야 우리 정부는 뒤늦게 이어도 상공을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에 넣었다. 62년 만의 일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다. 그렇다면 정부는 왜 그동안 이어도 상공을 KADIZ에 넣지 못했는가. 이와 관련 권문상(법학박사) 한국해양과학기술원 해양정책연구소장은 62년 전의 KADIZ는 미국 태평양사령부에 의해 취해진 것으로 2008년 우리 정부가 국방부 고시를 통해 KADIZ를 선고할 때에 이어도를 포함시키려는 시도가 없었던 바는 아니었다며 당시 독도의 JADIZ 포함 여부 문제가 야기될 가능성이 있어 성사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중국의 CADIZ 설정 전에 일본의 JADIZ 역시 이어도 상공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정부의 강한 대외적 대응과 조정력은 아쉬움으로 남는다면서도 국방안보적측면에서 미국과의 관계가 일부 작용했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전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이어도는 영토문제가 아닌 한국과 중국 간 해양경계획정의 문제에 해당된다. 다시 말해 이어도는 한중 간 해양경계획정의 대상이 되는 해역이며 이는 한중 외교부가 2006년 이미 합의한 바가 있다. 우리 정부의 이어도 관할권에 대해 권 소장은 양국 간 동중국해 대안(對岸) 거리는 400해리가 안 되는 해역이며 또한 해당 수역에서 양국은 동일한 대륙붕을 향유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즉, 지형 및 지질적 요소가 고려되기보다는 특정 사안을 고려한 중간선 방법으로 경계선을 획정할 수 있다고 판단된다며 이때 양국이 주장하는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도 해당 해역은 명백하게 우리나라 배타적 경제수역의 범위에 포함된다는 점에서 경계획정 전이라도 우리나라가 관리를 행사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아직 양국 간 경계획정이 해결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해당수역에서의 어업자원에 대한 접근은 양국 국민 모두에게 접근이 가능하도록 되어있다고 전했다. ◆왜 이어도를 탐내는가? 한중일 방공식별구역 중첩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이유 중 하나는 풍부한 수산자원과 해양자원이 있기 때문이다. 이어도를 둘러싼 한중일의 관심 또한 마찬가지 맥락이다. 권문상 소장은 한중일의 이어도를 둘러싼 관심은 이 지역이 갖는 군사전략적 활용 가치와 무관하지 않다며 이어도는 조어대 주변수역 및 남중국해 공간과 연계돼 중국의 대양진출과 해군력 활용의 핵심 공간으로 판단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이는 반대로 일본에게 중국의 세력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어선으로 활용된다는 점에서 이어도는 단순한 관할권 다툼이 아닌 동북아에서의 두 세력 간의 갈등과 주도권 확보를 위한 핵심 공간으로 부각되고 있다는 점에서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고 전했다. 이래저래 중국과 일본의 힘자랑에 한국만 샌드위치신세가 된 것이다. 이어도에 대한 중국과 일본의 관심으로 이제 이어도는 한중일 삼국의 방공식별구역이 됐다. 이와 관련 권 소장은 이어도는 한중일 삼국의 방공식별구역 중첩으로 향후 중국과 일본의 긴장관계에 따라 해당 공역에서의 위기가 보다 제고(提高)될 수 있는 구역이라며 이는 중일의 해양관할권 혹은 도서 영유권과 관련되는 공간은 아니나 오히려 그 외측에서의 힘겨루기로 확대 혹은 시험적 갈등 무대로 활용될 가능성도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현재의 동북아는 미국과 중국, 중국과 일본, 혹은 대륙세력인 중국과 해양세력인 일본, 미국과의 거대한 동북아 패권 확보의 갈등과 직결된다며 우리나라의 정책대응 방향 역시 이들 거대 세력 간 갈등구조를 적절하게 혹은 필요시 우리나라의 위기관리 매뉴얼을 별도로 수립하고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우리 정부는 지난해 중국이 이어도를 자국의 방공식별구역에 포함시키면서 한 차례 진통을 겪었다. 안타까운 것은 이어도를 한국방공식별구역으로 설정할 수 있는 62년이라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주변국의 눈치를 보느라 수수방관했던 것인지, 무관심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나 묻고 싶은 것은, 만일 중국이 이어도를 중국방공식별구역에 포함시키지 않았다면 지금 이 순간 이어도는 과연 한국방공식별구역에 포함돼 있을까 하는 의문이다. 이어도가 전설의 섬이 되지 않게 지금부터라도 우리 것에 관심을 갖고, 지킬 줄 아는 정부 그리고 국민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백은영 기자 angel@newscj.com

겨울 푸른 멋에 빠지다 (2)

◆영양, 문향을 피우다 청송에서 차로 약 1시간을 달리면 영양이 나온다. 영양은 문향의 고장으로 통한다. 그런 만큼 근현대 문학사에 발자취를 남긴 문인이 많이 출생한 곳이다. 영양 주민들 스스로가 자연과 문학이 함께 어우러진 고장이라고 부른다. 일제강점기 서정시인 오일도에서부터 청록파 시인 조지훈, 현대 소설가 이문열, 최근에는 정재숙과 황명자, 강용준 등에 이르기까지 결코 적지 않은 문학인들이 영양 출신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오일도의 감천마을, 조지훈의 주실마을, 이문열의 두들마을 등이 지역 문학인들의 출생지와 지역 문화재를 엮어 만든 문학마을이 곳곳에 있다. 지난달 21일, 주실마을의 겨울 아침은 차분하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가지를 하늘로 치켜 벌린 나무 한 그루가 주실마을의 시작을 알리는 듯하다. 마을은 조선 중기 때 환난을 피해 온 한양 조씨의 집성촌이다. 시인 조지훈도 한양 조씨로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한양 조씨가 오지로 내려온 배경엔 기묘사화가 있다. 중종 14년(1519) 훈구파는 조광조 등의 신진 사류를 경계하면서 급기야 숙청했다. 조광조의 친족인 호은공 조전은 한양을 떠났고 1629~1630년 사이 가족들과 함께 지금의 영양 주실마을에 정착했다. 마을 한복판엔 조지훈의 생가인 호은종택(경상북도 기념물 제178호)이 있다. 영남 북부지방의 전형적인 양반 저택인 ㅁ자형이다. 호은종택 대문에서 정면을 바라보면 붓 모양의 봉우리를 볼 수 있다. 이 봉우리는 문필봉으로 불린다. 풍수지리학적으로 봤을 때 문필봉이 있는 곳에 문인, 학자가 배출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시인이자 국문학자인 조지훈 역시 이러한 기운에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환경뿐만이 아니다. 조지훈의 가족력을 보면 그가 왜 곧게 살 수밖에 없었는지 단번에 알게 된다. 조부인 조인석(1879~1950)은 625 당시 인민군에 항거하다가 자결했다. 그리고 그 위로 올라가면 구한말 의병장 남주 조승기가 있다. 이처럼 시대에 굴복하지 않고 지조를 지킨 선인들은 자연스레 어린 동탁(조지훈의 본명)의 마음과 생활에 영향을 주었다. 이 즈음해서 조지훈이 국문학적으로 어떠한 위치였는지, 어떻게 지조론을 쓰게 됐는지 한번 짚고 가보자. 시인 조지훈을 던져놓으면 곧 청록파승무가 따라온다. 그렇다. 앞서 말한 것 같이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청록파로 유명하고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익숙한 승무를 작시(作詩)했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에 황촉 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은 손이 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 조지훈 승무전문 - 청록파 가운데서도 그는 전통적인 운율과 선(禪)의 미학을 현대적인 방법으로 조화롭게 결합시켰다. 한국 현대시의 주류를 완성한 인물이며, 20세기 전반기와 후반기를 이어주는 다리역할을 한 시인이다. 그리고 지조론에서 볼 수 있듯 당대의 논객이요, 한국민족운동사와 한국문화사서설 등 한국학 연구에 있어서도 큰 획을 그은 학자라고 평가받고 있다. 특히 그의 지조론이 눈에 들어온다. 골자는 선비이고 지식인이고 지도자라면 지조가 있어야 한다라는 것이다. 변절자를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여진 수필은 해방 후에도 친일파들이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은 채 오히려 정치계를 쥐락펴락하는 당대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한 글이다. 조지훈은 진리와 허위, 정의와 불의를 판별하고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엄격하게 구별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지조는 역사의 객관적 상황을 냉철히 인식해 올바른 길을 판단하고 이를 초지일관 밀고 나가는 것이다. 만약 삶의 기준과 가치관을 바꾸더라도 그것이 오히려 좋은 방향일 때에 도리어 지조를 찾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지훈은 민영환, 이용익처럼 후에 자신의 잘못을 반성한다면 그 변절을 용서할 수 있다며 유연한 태도를 보인다. 그렇다면 변절은 무엇인가. 단순히 가치관이나 노선을 바꾼다는 뜻이 아니라 사리사욕을 위해 옳은 신념을 버린 경우를 말한다. 조지훈과 관련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근면하면서 여유 있고 정직하면서 관대하고 근엄하면서 소탈한 현대의 선비이자, 그리고 사람들은 조지훈을 숨이 다하는 그 순간에도 창공을 비추는 촛불로 죽음을 관조한, 그래서 조지훈은 나라 잃은 시대에도 태초에 멋이 있었다는 신념을 지니고 초연한 기품을 잃지 않은 인물로 기억한다. 조지훈은 멋을 중요하게 여긴 동시에 신념 역시 매우 강조했다. 그에게 멋은 곧 신념이다. 어쩌면 조지훈이 승무, 무고 등 우리네 이야기를 하는 것도 우리네 참다운 미학을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 것을 지키겠다는 욕심은 일찍이 그 아름다움을 찾고 느꼈기 때문이다. 예부터 외세에 굴복하지 않고 우리 것을 지켜왔기에 그 저항과 신념의 유전자가 조지훈의 정신과 작품에 고스란히 묻어나는 것은 아닐까. 김지윤 기자 jade@newscj.com

겨울 푸른 멋에 빠지다 (1)

이번 여행의 주제는 시인 조지훈(19201968)과 주왕산이다. 둘의 공통점은무엇일까하고 한참을 고민했더랬다. 겨우 떠오른 것은 청(靑)이었다. 여정은 여느 때보다 간단했다. 청송군 주왕산과 영양군 주실마을, 이 두 곳에 발 도장을 찍으면 됐다. 시인 조지훈(19201968)을 조금 더 생각하게 됐다. 자연스레 시인도 주왕산에서 시감(詩感)을 얻었겠지란 생각이 들었다. 앞서 말한 것 같이 주왕산과 시인 조지훈을 공통으로 말할 수 있는 단어는 청(靑)이다. 그렇다면 청(靑)이란 무엇인가. 푸른색과 더불어 젊음, 봄, 동쪽을 상징하고 있지 않은가. 시인에게 청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단어다. 일제강점기에 등단한 조지훈은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청록파(靑鹿派)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고 무엇보다 지조론을 통해 절개와 지조를 논했다. 그야말로 푸른 소나무 같은 삶을 살아간 이가 조지훈이다. 주왕산은 청송군에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 청송군의 뜻도 푸른 소나무(靑松)다. 소나무가 많아 청송인가 했더니 역시나 주왕산에서 눈을 두는 곳마다 소나무가 있었다. 우리나라가 소나무 천국이긴 하지만 최근 잘 보지 못한 점을 생각했을 때 겨울 주왕산에서 만난 소나무들이 정겹고 반갑다. 만물이 쉬는 겨울에도 소나무의 푸른 기운이 산 전체를 덮는다. 경상북도 BYC(봉화, 영양, 청송)로 유명한 청송과 영양은 경상북도뿐만 아니라 전국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로 알려졌다. 그만큼 사람의 손때가 타질 않아 청정고장으로 유명하다. 경북 동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두 고장 모두 산이 많다. 영양의 북쪽에는 일월산(1218m)이 솟아올라 그 아래로 봉우리들을 만들고 있다. 청송 역시 주왕산을 둘러싼 900m 내외의 산들이 있다. ◆주왕을 기억하는 산 먼저 청송군 부동면에 위치한 주왕산이다. 산은 해발 721m이며 설악산, 월출산과 더불어 3대 돌산(바위산)으로 유명하다. 태백산맥 남쪽에 위치하며 600m가 넘는 봉 12개가 주왕산과 어울린다. 1976년 국립공원, 2003년 명승 제11호로 지정됐다. 산은 화산폭발로 만들어졌다. 폭발 당시 생긴 돌 부스러기들이 쌓여 굳은 응회암 지대가 비바람을 맞고 견디며 만들어진 자연의 작품이다. 바위로 둘러싸인 산들이 병풍과 같다고 해 석병산(石屛山)이라고도 한다. 계곡 일원에는 연꽃 모양의 연화봉, 떡을 찌는 시루 모양의 시루봉 등이 눈에 띈다. 지난달 20일, 눈(雪)이 쌓인 터라 정상은 눈(目)에 담고 폭포 주변을 거닐었다. 우뚝 솟은 암벽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모습을 아래에서 위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지만 수만 년 또는 수천 년간 비바람을 맞이한 바위들이 부드러우면서도 장중하다는 게 느껴진다. 평소엔 암벽 사이로 맑은 물이 흐르지만, 겨울인 탓에 밑으로 내리다 꽁꽁 언, 그래서 공중부양한 얼음을 볼 수 있다. 따뜻한 봄기운이 느껴질 때까지는 물이 아닌 얼음이다. 왜 주왕산인가. 중국 당나라 때의 일이다. 주도(周鍍)가 주(周)나라를 다시 일으켜 왕이 되겠다(後周天王)고 하여 당나라의 도읍지 장안에 들어가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패배한 주도는 신라에까지 들어오게 됐다. 주왕(周王)이 되어 보겠다고 한 그는 신라 땅을 밟고 이름 모를 산에서 기거하다가 당의 요청으로 정벌에 나선 신라 마 장군의 화살에 쓰러졌다. 주왕(편의상 주왕이라고 하겠다)이 깃발을 꽂았다는 기암(期巖), 그가 군사를 숨겨뒀다는 무장굴, 그가 최후를 맞은 주왕굴 등이 주왕을 기억하고 있다. 주왕의 최후는 덧없는 인생을 그대로 보여준다. 주왕은 굴(주왕굴)에 숨어 살면서 위에서 떨어지는 물로 세수하다가 마 장군이 쏜 화살과 철퇴에 맞아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주왕의 후주천왕(後周天王)은 한낱 꿈으로 날아갔지만 주나라 초기의 옛 명성을 다시 돌리고 싶은 염원은 이국의 산에 고스란히 남았다. 주왕산 곳곳에서 소나무를 소개하는 안내판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니 그보다 소나무의 푸름이 겨울 주왕산에서 단연 돋보인다. 특히 한국인은 소나무와 일생을 함께한다는 문구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출생을 알리는 것이 금줄이며, 금줄에 거는 것이 소나무 가지다. 금줄의 금(禁)이 금하다라는 뜻을 가졌듯 잡스럽고 삿된 기운을 막는 힘이 소나무에 있다고 믿어왔다. 그리고 소나무의 푸른빛은 생명의 상징이니 갓 태어난 생명에게 소나무는 의미가 매우 크다. 딸이면 오동나무를, 아들이면 소나무를 심는데 딸이 시집갈 때 장롱을 해보내고, 아들이 장가들 때 관을 만든다고 한다. 그리고 죽은 사람이 묻힌 묘 주변에는 소나무들을 둘러 심었다. 집 또한 소나무로 지었다고 한다. 또한 소나무 근처에서 퇴비를 만들지 않는다라는 말이있다. 소나무엔 항균작용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송편을 만들 때 시루 밑바닥에 솔잎을 깔아 놓는데 송편은 솔향을 머금기도 하지만 항균 처리된 먹을거리가 된다. 우리는 예부터 소나무에 인격과 신성을 부여했다. 민간과 도교에선 소나무는 영원불멸을 상징하고, 장엄하고 장대한 노송은 하늘의 신이 땅에 내려올 때 이용하는, 하늘과 땅을 서로 이어주는 영물로 여겼다. 그리고 매섭게 추운 겨울에도 푸름을 잃지 않아 기개 있는 군자와 선비의 덕을 나타냈다. 그래서 소나무와 관련된 시조와 시가 많다. 생각이 바르면 말이 바르다. 말이 바르면 행동이 바르다. 매운바람 찬 눈에도 거침이 없다. 늙어 한갓 장작이 될 때까지 잃지 않는 푸르름. 영혼이 젊기에 그는 늘 청춘이다. 오늘도 가슴 설레며 산등성에 그는 있다. - 유자효 소나무 전문 - 주왕산의 자랑거리엔 기암(奇巖), 소나무와 더불어 깊은 계곡이 있다. 암봉들을 한 차례 구경하고 나면 그 끝나는 곳에 제1폭포를 시작으로 제2폭포와 제3폭포가 등산객을 맞이한다. 겨울이라 공중부양을 한 얼음이 반겨주었지만 그래도 좋다. 전국에서도 오지라고 알려진 청송. 그래서 다행이다. 찾는 이가 드물어 제 색을 간직하고 있으니 말이다. 자연의 푸른빛을 마음에 담고 푸른빛을 띠는 한 시인을 만나러 영양으로 발길을 돌렸다. 영양 주실 마을이다. 2편에 이어집니다 김지윤 기자 jade@newscj.com

드라마 ‘기황후’ “재미냐 사실(史實)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MBC 드라마 기황후는 첫 방송이 되기 전부터 뜨거운 감자였다. 특히 실력파 여배우 하지원이 기황후 역을 맡는다는 소식에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배우의 연기에 진실이 묻히면 어떡하느냐라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이에 제작진은 픽션(허구)이 가미된 팩션(사실+허구)의 성격이 짙다며 역사 다큐멘터리가 아닌 드라마로 봐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인기 배우들이 등장하니 청소년들도 시청하고, 이로 인해 잘못된 역사관이 심어질 수 있다며 드라마를 보지 않겠다는 이들이 생겨났다. 제작진의 의도는 기록이 많지 않은 역사 인물에 드라마적 요소를 가미해 그야말로 드라마를 만드는 데 있다. 일례로 지난 2003년에 방영된 대장금이 있다. 이 드라마는 조선왕조실록에 10군데 정도 나와 있는 기록을 바탕으로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져 만들어졌다. 이때만 하더라도 역사 왜곡의 논란이 크지 않았다. 오히려 한류 문화 콘텐츠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는 분위기가 대다수였다. 이후 성균관 스캔들을 비롯해 장옥정, 사랑에 살다 제왕의 딸, 수백향 등 다양한 픽션 사극이 등장했다. 그야말로 픽션 사극의 명암이 갈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논란의 절정에 선 드라마가 바로 기황후다. ◆기황후이기 때문에 기황후를 둘러싼 역사적 논쟁은 끊이지 않고 있다. 고려 출신으로 원나라의 황후 자리까지 오른 그가 과연 애국자인지 매국노인지에 대한 답이 아직 내려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인으로서 원의 황후 자리까지 오른 면은 진취적으로 높이 사겠으나 이후 야욕에 휩싸여 도리어 고려를 공격했던 악행 역시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드라마 기황후는 역사적 논쟁이 아닌 고려 출신의 여인이 황후 자리에 오르는 과정에 초점을 맞췄다. 기황후가 고려 여인이라는 기본 설정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졌다. 사실(事實)과 허구로 된 팩션임에도 역사 왜곡 논란이 지속되는 이유는 사실(史實)과 다른 등장인물 때문이다. 드라마에서 기황후는 낯선 이국의 황실에서 자신의 조국을 잊지 않으며 고려의 자긍심을 지키는 여인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고려사절요에는 기황후와 기철 4형제는 갖은 횡포를 일삼고 경쟁적으로 악행을 벌였다며 기황후의 악랄함을 드러냈다. 기황후와 기철(?~1356)은 남매로 기자오(1266~1328)의 자녀들이다. 막내 여동생이 원나라의 황후가 되자 기철은 대표적 친원파가 돼 동생만 믿고 권세를 휘둘렀다. 과연 기황후의 악랄함을 어떻게 드라마로 표현할 것인가. 상상력과 사실(史實)의 간격은 여기서부터 벌어진 셈이다. 기승냥이 연심을 품는 가공인물 왕유(주진모)를 보자. 원래대로라면 고려의 28대 왕, 충혜가 등장해야 했다. 기록에 따르면 충혜왕은 주색에 빠져 계모와 신하의 부인을 겁탈하고, 눈물을 흘리는 여자를 철퇴로 죽이는 등 악행이란 악행은 다 일삼는 폭군이었다. 하지만 배우 주진모가 연기할 충혜왕은 현명하고 나랏일을 걱정하는 남자 주인공이다. 기승냥이 연심을 품을 만한 인품이다. 이러한 상상력은 촬영 전에 논란거리가 됐고 제작진은 충혜왕을 가상인물 왕유로 수정했다. 그리고 첫 화에 실제 역사와 다르다란 내용의 공지를 자막으로 내보냈다. 하지만 자막만으로 다소 부족하다는 목소리가 있다. 이들은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는 제작진의 입장과 달리 팩션이라도 역사의 근본은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드라마 기황후가 높은 관심을 받고 있기에 더욱이 사실에 근거해야 옳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으면 시청자에게 혼란을 준다는 이유에서다. 대다수 역사학자와 전문가는 연구되지 않은 부분을 미디어에서 소개하는 것은 시청자 또는 국민에게 역사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는 부분으로 이는 긍정적이라면서 하지만 사료에 있는 것과 다른 묘사는 시청자들이 그대로 인식할 수 있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제작진이 자막으로라도 설명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다른 팩션 사극은? 종영된 SBS 월화 사극 장옥정, 사랑에 살다 역시 역사 왜곡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장옥정이 패션디자이너라는 설정부터 하이힐, 푸른 곤룡포 등으로 작가의 상상력을 담아냈기 때문이다. 기황후와는 다른 시각에서 역사 왜곡 드라마라는 인식이 많았다. 기황후와 달리 장희빈(장옥정)에 관한 기록은 많다. 다시 말해 많은 사실(史實)이 있는 상황에서 상상한 것을 억지로 끼워 맞췄다는 이야기다. 기황후는 사실이 적어 나머지 부분에 허구성을 가미했다. MBC에서 방영하는 사극 제왕의 딸, 수백향 역시 꾸며진 이야기가 사실보다 많다. 드라마는 일본의 계체왕의 정실부인이자 백제 공주인 수백향 이야기를 다뤘다. 하지만 역사서 어디에도 수백향이 백제의 공주라는 기록이 없다. 역사학자 문정창(18991980)이 집필한 일본상고사에서 수백향이 백제의 공주일 것이라는 가설이 있을 뿐이다. 팩션 사극에는 사실과 허구의 비율을 각각 어느 정도로 정해야 한다는 기준은 없다. 작가의 상상력을 얼마만큼 허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 역시 없다. 하지만 팩션 사극이 계속 나오는 한 역사 왜곡의 논란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하면 논란을 잠재우고 유익하고도 재밌는 사극을 접할 수 있을까. 제작진과 전문가, 시청자들이 대안을 모색해봐야 할 때다. 박혜옥 기자 ok1004@newscj.com 기황후(?~?) 기황후는 고려 출신으로 원나라 조정에 공녀로 보내졌다(기자오의 막내딸이다). 그리고 혜종의 총애를 입으면서 황후로서 입지를 다진다. 이후 원나라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원나라에서 고려 풍속을 크게 유행시키는 데 기여한 업적이 있다. 하지만 기황후는 고려를 공격했다. 오빠 기철이 권력을 휘두르다가 1356년 공민왕의 반원 개혁정책으로 죽임을 당하자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원나라에 있던 충숙왕의 아우 덕흥군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1364년 고려 출신인 신유에게 고려를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2013년 비무장지대의 단상… DMZ, 평화를 꿈꾸다(2)

◆이야기가 흐르는 곳 DMZ가 지뢰밭이 아닌 자연 생태지로 거듭나기 위해 지방자치단체와 민간의 홍보는 필수적이었다. 개발제한지역인 이곳은 문화 관광지로 제2막을 열고 있다. 이 같은 흐름은 특히 민통선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민통선은 1954년 2월 미국 제8군 사령관이 민간인 출입을 금지하고 농사를 규제했다. 당시 경기도 480㎢, 강원도 1048㎢이었다. 휴전선 방어 임무를 국군이 맡으면서 귀농선이 민통선으로 바뀌었고, 이로 인해 부분적 농업을 할 수 있었다. 2008년 현재 경기도 파주시에서 강원도 고성까지 민통선 이북지역에 실제로 민간인이 생활하는 마을은 10개 마을로 총 1049가구, 2615명이다. 철원 민통선 마을 주민들을 인터뷰한 다큐영화 경계에서 꿈꾸는 집에 따르면 지금이야 민통선에서 비교적 아무런 문제 없이 살고 있지만 사실 전란 직후엔 지뢰가 터질까 전전긍긍하며 살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말해왔던 것처럼 지금의 DMZ나 민통선의 이미지는 빠른 속도로 개선되고 있다. 더는 문제아가 아닌 평화를 위한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를 위해 관광과 행사, 참 여예술 등으로 국민이 함께 고민하고 새로운 미래를 그리는 경계지역으로 새로 나는 것이다. 이러한 일환으로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 당시 공약으로 DMZ 내 세계평화공원 조성을 내걸었다. 이와 관련해 정부는 2014년 공원 조성 예산으로 402억 원을 편성했다. 그리고 통일부가 DMZ 세계평화공원기획단을 구성해 공원 조성을 국정 과제로 추진하고 있다. 예산 가운데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지뢰 제거비용(240억 원)으로 전체 예산의 60%에 달한다.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진행될지 꽤 기대되는 바다. 우리는 무엇을 평화라고 부르는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가장 큰 평화는 자연밖에 없는 것 같다. 남과 북, 두 진영 사이에서 아무도 모르게 평화의 장을 만들어 나가고 있는 비무장지대. 이름 그대로 무장 해제가 될 수밖에 없는 듯하다. 물론 그 면적이 줄어들어 아쉽지만. 경계에서 꿈꾸는 집에서 젊은 여인은 말한다. 통일되면 이곳(철원)이 한반도의 중심이니까 수도가 되지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기도 했어요. 그러면 이곳(민통선)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편리하게 살지 않을까요? 김지윤 기자 jade@newscj.com

2013년 비무장지대의 단상… DMZ, 평화를 꿈꾸다 (1)

지난 10월 중순 경기도 고양시에서 특별한 영화제가 열렸다.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비무장지대(DMZ)와 가까운 고양시 일대에서 제5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가 열렸다. 영화제는 부산국제영화제처럼 아직 활성화되지 않았지만 이름이 주는 공간의 특수성으로 해를 거듭할수록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DMZ가 점점 민간인과 가까워지고 있다. 이를 증명하듯 관광, 자전거 대행진, 세계평화공원 건립 등 다양한 문화콘텐츠와 접목되고 있다. 강원도 철원 민간인통제구역. 그런데 민간인들이 옹기종기평화롭게살고 있다. 한 주민은 북녘땅이 바로 코앞에 있지만, 전혀 무섭지 않단다. 오히려 군인들이 있기에 철원이 다른 지역보다 더 안전하게 느껴진다고 한다. 이는 김량 감독의 다큐멘터리영화, 경계에서 꿈꾸는 집에서 실제 등장하는 주민의 말이다. 두 가지 깨달음에아~하는 소리가 나온다. 하나는 민간인통제선(민통선) 안에서도 민간인이 생활할 수 있다는 점, 다른 하나는 민통선 안이 무서운 곳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하기야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DMZ 관광을 독려하고 있으니 철원군 주민의 말처럼 잘만 한다면그리 위험한 곳은 아닌가 보다. ◆전쟁 속 평화의 싹 모 기업은 60년 가까이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청정지역 DMZ 생수라며 자사 물을 홍보하고 있다. 그렇다. 비무장지대는 천혜의 자연경관을 몸소 느낄 수 있는 곳이 됐다. 어떠한 무장을 할 수 없는 이곳에선 말 그대로 군대가 주둔하거나 군사시설을 설치할 수 없다. 그래서 전 세계에서도 가장 자연에 의한, 자연을 위한 곳으로 이름났다. 우리나라 비무장지대는 서쪽 예성강에서 개성 남방의 판문점을 지나 강원도 철원, 인제를 거쳐 고성까지 이른다. 그 길이만 250㎞ 정도요, 완충지대는 약 991.74㎢(약 3억 평, 1953년 기준)이었다. 이는 서울시(605.21㎢)보다 약 1.5배 더 넓은 면적인 셈이다.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은 이곳은 세계적인 자연생태지로 거듭났다. 아직 남북은 전쟁 중이지만 자연은 그 속에서 스스로 회복하고 평화를 싹 틔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포스트(post) 평화를 비웃기라도 하듯 DMZ 면적이 줄고 있다. 환경단체 녹색연합의 보고서에 따르면 비무장지대의 현재 총면적은 60년 새 43% 감소한 570㎢다. 북한이 1968년, 1986년 유리한 능선 고지를 차지하려 북방한계선을 밀고 내려오자 우리도 일부 남방한계선을 북진시킨 결과다. 더군다나 북한은 1986년 북방한계선 밑으로 내려오면서 최대 1만 볼트의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책선을 설치했다. 남쪽의 침입과 탈북자를 막으려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고라니, 반달가슴곰, 산양 등 희귀동물들이 고압선에 감전돼 죽는 피해가 자주 일어나고 있다. 녹색연합은 남북이 DMZ 공간을 잠식해 야생동물의 서식지가 줄면서 생존에 위협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면적은 반가량 줄었지만, DMZ의 의미는 작아지지 않았다. 문화행사를 통해 오히려 평화를 기원하는 우리에게 더 크게 다가오고 있다. DMZ엔 평화의 봄바람이 시나브로 불고 있다. 남북이 오랜 기간 대치하는 동안 그 시간을 담고 있으며, 또한 전쟁 속에서도 희망의 메시지가 있는 상징적인 곳이다. 과거 전쟁 당시만 하더라도 DMZ는 세계 각국에서 만든 무기의 성능을 시험해보던 곳이다. 갖은 군사 전략과 기술이 이뤄진 장소다. 지금도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는 전시 상황이다. 이러한 가운데서 평화가 고요하게 찾아든 것이다. 이와 관련해 한국DMZ연구소 함광복 소장은 1953년 7월 27일 오전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을 한 지 반세기 만에 나라 반쪽을 잃은 남북한은 반사적 이익으로 자연 생태계의 보고를 얻었다고 설명한다. 어디 이뿐인가. 비무장지대 한가운데 들어선 궁예도성과 관방(關防) 유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DMZ는 자연 생태지와 더불어 거대한 역사유적지다. 또한 함 소장의 말에 따르면 철원에서 북한 노동당사, 한탄강 승일교 등 북한의 건축물을 볼 수 있으며, 철원 제일감리교회, 얼음창고, 동주금융조합, 철원역,월정역의 잔해가 널려있는 옛 철원읍 등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도시유적을 만날 수 있다. 그는 (철원은) 근현대사의 내용을 속속들이 간직하고 있는 세계적인 건축토목사 박물관인 것이라며 오리산에서 분출한 용암이 빚어낸 철원평야와 운석이 떨어져 파인 해안분지가 있는 지리학 교실이 되는 등 DMZ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고 말한다. 김지윤 기자 jade@newscj.com ▶2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