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대문] 전남 고흥, 만물이 주는 최고의 선물 ‘깨달음’ ②

◆거금대교와 금산해안경관 녹동항에서 소록도까지는 소록대교가, 소록도에서 거금도까지는 거금대교(2028m)가 그 사이를 잇고 있다. 거금대교 개통 전에는 녹동항에서 거금도까지 배로 30분이 걸렸으나 대교 건설 후 차로 약 5분이면 거금도에 도착한다. 거금대교를 달려 거금도로 향하는 길, 차창 밖으로 보이는 다도해 풍경이 눈안으로 달려 들어온다. 거금대교 역시 고흥에서 또 하나의 볼거리다. 우리나라 해상교량 중 거금대교가 최초로 1층과 2층으로 나뉜 복층 교량으로 건설됐다. 1층은 보행자와 자전거가 다닐 수 있도록 했으며, 2층은 차들이 바다 위를 횡단한다. 거금대교를 건너면 바로 거금휴게소가 자리잡고 있다. 그곳에서 자전거도 대여할 수 있다. 시간만 허락된다면 직접 자전거를 타고 거금대교를 내달리며, 탁 트인 바다의 정취를 실컷 맛보았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그래도 잠시나마 대교를 거닐며 바다 풍경을 감상한다. ▲ 거금휴게소에 설치된 거인 조형물 ⓒ천지일보(뉴스천지) 거금도에 들어서면 사람 형상의 조형물이 눈에 띈다. 오른팔은 하늘을 향해 높이 쳐들고 있고 손은 무언가를 잡으려는 듯하다. 안내 표지판에는 고요히 잠들어 있던 고흥을 마침내 깨어난 거인으로 표현했다고 기록됐다. 거인의 손이 하늘 너머 우주의 별에 닿는 형상이란다. 조형물에서 거인의 손에 있는 것은 두원운석을 형상화한 것이다. 두원운석은 1943년 고흥군 두원면에 떨어진 것으로 낙하지점이 확인된 국내 유일한 운석으로 유명하다. 금산해안경관은 해안가 드라이브 코스를 따라 감상할 수 있다. 남해의 수많은 섬들은 마치 군주를 호위하는 무사들처럼 거금도를 겹겹이 감싸고 있다.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몽돌 해안가로 내려갔다. 동글동글하고 맨질맨질한 크고 작은 몽돌들이 지천에 널려 있는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어쩜 이렇게 예쁘고, 갖고 싶은 마음이 드는지. 몽돌은 오랜 세월 수많은 침식작용을 겪으며, 모났던 부분들이 이렇게 갈고 닦였을 것이다. 인내로써 아픔을 이겨내고 변화가 되니 누구나 갖고 싶어 할 만한 욕심나는 돌이 됐다. 사람도 그러하겠지. 그런 사람은 누구나 가까이 함께하고 싶을 것이다. ◆중국에까지 그 위세를 떨쳤다는 팔영산 고흥군 점안면에 위치하고 있는 높이 608m의 팔영산(八靈山). 1998년 7월 30일 전라남도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던 팔영산은 지난 2011년 1월 다도해해상국립공원 팔영산지구로 승격됐다. 산은 그리 높지 않지만 그 모양새가 독특하고 신비로워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그 위세가 얼마나 당당했는지는 산 이름의 유래에서도 알 수 있다. 옛날 중국의 위왕이 세수를 하던 중 대야에 비친 여덟 봉우리를 보고 감탄하게 된다. 즉시 신하들에게 여덟 봉우리의 실체를 찾게 하였으나 중국에서는 도저히 찾질 못하고 결국 우리나라까지 오게 되었다. 이곳 고흥에 이르러 비로소 여덟 봉우리의 실체를 접하게 되니, 왕이 직접 이 산을 찾아와 제를 올리고 팔영산이라 이름 지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팔영산으로 향하던 일행은 황금들판을 배경으로 팔영산이 은은하게 바라다 보이는 명당을 발견하곤 곧장 차를 세웠다. 한눈에 봐도 여덟 봉우리가 우뚝우뚝 솟은 것이 바로 팔영산임을 알 수 있다. 거참 독특하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추수가 한창인 때를 맞아 황금들판과 겹겹의 산이 어우러진 모습을 보니 참으로 한 폭의 그림과 같다. 위왕이 멀리 중국에서 팔영산을 찾았던 것처럼 우리 일행도 그와 같은 맘이 든 것일까. 어서 빨리 팔영산을 찾아 봉우리를 정복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현지 주민의 말에 의하면 팔영산의 봉우리를 하나하나 넘을 때마다 절을 올렸다고 전해진다. 무사히 잘 넘게 해줬기 때문일까. 그만큼 봉우리를 넘는 것이 험난하고 어렵다는 이야기일까. 팔영산을 처음 등반하는 사람으로서는 산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김정호(金正浩, 1804~1866년 추정)는 대동여지도에서 팔영산의 영자를 신령할 영(靈)으 로 표기해뒀다. 여덟 봉우리에 깃든 신령한 기운을 느껴서일까. 팔영산의 봉우리는 각각 이름이 붙여져 있다. 봉우리는 제1봉인 유영봉(儒影峰)에서 2봉 성주봉(聖主峰) 3봉 생황봉(笙簧峰) 4봉 사자봉(獅子峰) 5봉 오로봉(五老峰) 6봉 두류봉(頭流峰) 7봉 칠성봉(七星峰)을 거쳐 제8봉인 적취봉(積翠峰)을 마지막으로 한다. 탐방팀은 탑재에서부터 출발해 제1봉인 유영봉을 거쳐 8봉 적취봉까지 등반하기로 했다. 1봉까지 가는 데는 무리 없이 단숨에 올랐다. 유영봉에 올라서니 다도해 절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저 바다 멀리 작은 섬들이 곳곳에 보이고, 해안가를 곁으로 펼쳐진 황금들판의 물결은 바닷물결과 견준다. 하지만 이제 겨우 1봉에 올랐을 뿐이다. 다음 봉우리의 풍경이 더욱 기대된다. 2봉은 성주봉(538m)이다. 성주봉을 오르기 전 안내표지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씌어져 있다. 각종 기암바위들과 절벽, 다양한 봉우리의 모양새를 감상하며 참으로 명산임을 깨닫는 순간 6봉인 두류봉(596m)을 앞두고 섰다. 다른 봉우리에는 철제 계단이 마련돼 있어 쉽게 오를 수 있었다. 두류봉이 제일 험난하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다. 철봉만 의지한 채 기암바위를 올라야 한다. 암벽등반까지는 아니어도 다리를 있는 힘껏 들어 올려야만 한발 한발 정상에 오를 수 있다. 밑을 내려다보면 아찔하다. 그렇지만 오르는 중간 중간 적당한 자리를 잡고 다도해의 풍경과 지나왔던 봉우리들의 모양새를 꼭 조망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아찔한 비경을 맛 볼 수 있으며, 더불어 보람도 느낄 수 있다. 한점 바람이 불어올 땐 그간의 피로가 싹 가시는 듯하다. 이 또한 자연이 주는 선물이지 않은가. 두류봉을 올라야 하는 목적은 분명하다. 두류봉을 거쳐 하늘로 통하는 통천문을 지나야만 천국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두류봉을 올라야 한다. 험준한 산을 오르는 이유는 정상이란 분명한 목적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 정상을 밟기 위해선 현재의 고난 정도는 인내해야 하고, 때론 그 고난을 즐길 줄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걷는 그 길은 정도여야 한다. 조금이라도 꼼수를 부리려 할 때는 어긋난 길로 쉽게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이 주는 감동이란 단순히 시각적으로 느끼는 아름다움만은 결코 아니다. 바로 깨달음이다. 만물을 통해 얻는 깨달음이야 말로 자연에게서 또는 천지만물을 지은 창조주에게서 받는 감동의선물 아니겠는가. 깨달음은 내 마음에 지워지지 않고 깊게 새겨진 나만의 것이 된다. 다음 기회에 팔영산을 다시 찾는다면 그 깨달음의 폭이 한층 더해지리라 기대한다.

[마루대문] 전남 고흥, 슬프고도 아름다운 섬 ‘소록도’ ①

전라남도 동남단에 위치하고 있는 고흥군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지형으로, 전체 형상은 북부 남양면의 지협을 정점으로 동-서간의 폭이 좁아지다가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반도의 폭이 점차 넓어지면서 마치 오리발과 같은 모양을 이룬다. 소백산맥의 한 지맥이 벌교(筏橋)부근에서 계속 남하해 침강함으로써 형성된 고흥반도는 가장 좁은 부분의 폭이 불과 3㎞밖에 되지 않는 좁고 낮은 지협에 의해 육지와 연결된다. 동쪽에는 순천만을 사이에 두고 여수반도와 서쪽으로는 보성만을 사이에 두고 보성군장흥군완도군과 이웃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바다에 직면해 있다. 고흥은 유인도와 무인도 등 150여 개에 이르는 수많은 섬을 포함하고 있다. 고흥의 기후는 대륙성과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함께 받아 비교적 온난한 편이다. 여름에는 많은 양의 비가 내리고 습해 곡물쌀보리밀 등 주곡을 생산하기에 알맞으며, 겨울은 비교적 온난해 시설 원예 등의 농업을 하기에 적합하다. 산지는 저산성 구릉지형으로 팔영산(八靈山)이 608m로 가장 높고, 천등산 550m, 비봉산 447.6m, 마복산 538.5m 등으로 대부분의 산이 600m를 넘지 않는다. 지난 2011년 1월 10일 고흥 점안면에 위치한 팔영산지구가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편입승격되면서 더욱 많은 이들의 발길이 이곳 고흥 땅에 닿았다. 고흥이 품고 있는 다도해 풍경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은 출발 전부터 설레게 만든다. 늦은 오후 서울을 출발해 꼬박 6시간 이상을 달려 고흥에 도착한 일행은 숙소에 짐을 풀고 다음 날 일정을 점검했다. 오는 동안 어둠이 짙게 깔린 터라 고흥의 첫인상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내일이 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옥빛 푸른 바다 위 어린 사슴을 닮은 섬 소록도 하늘에서 내려다 본 섬의 모양새가 어린 사슴을 꼭 닮았다. 그래서 붙여진 섬의 이름은 소록도(小鹿島). 2009년 3월 2일 녹동항과 소록도를 잇는 소록대교가 완전히 개통되면서 섬을 찾는 관광객들이 늘기 시작했으며, 소록도 주민들도 내륙과의 왕래가 수월해졌다. 현재 소록도는 섬 전체가 국립소록도병원으로 지정돼 있으며, 한센병 환자와 가족들, 병원 직원과 자원봉사자 등 90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녹동항에서 소록도까지의 거리는 약 500m로 소록대교가 개통되기 이전에는 옥빛 푸른 바다를 사이에 두고 배를 타고 왕래했다. 아름답지만 슬프고, 슬프지만 아름다운 섬. 많은 이들이 소록도는 알고 있지만 과연 그곳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소록도에는 아름답기로 소문난 중앙공원이 있다. 잘 정리되고 가꿔진 조경들과 곳곳에 세워진 공덕비 등 여러 모양의 조형물들이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공원이 형성됐다. 푸르른 잔디 위와 나뭇가지 사이사이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들의 모습은 그저 평온해 보이기만 한다. ▲ 소록도 중앙공원 내 구라탑(救癩塔). 천사장 미카엘이 한센균을 박멸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탑 아래쪽에 한센병은 낫는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하지만 공원의 아름다운 경치만 감상하는 것으로 끝나선 절대 안 된다. 그것은 자칫 소록도에 얽힌 역사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는 수박 겉핥기식 관광행위에 불과할 수 있다. 그래서 소록도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한센병자료관을 둘러보길 권한다. 그리고는 발길을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검시실과 감금실로 옮겨 보면 어떨까 한다. 소록도는 과거 많은 한센인들의 피와 땀방울이 뿌려져 있는 곳으로, 그들의 고통과 외로움 그리고 피로 얼룩져 있는 아픈 역사의 한 페이지를 절대 잊어선 안 될 것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침략과 강탈 행위는 한반도 그 어떤 곳도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일본의 식민지배 초기 조선에는 광주부산대구 등 세 곳에 외국인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사립 한센병요양원이 있었으나 수용 규모가 너무 적었다. 그러다보니 당시 대부분의 한센병 환자들은 치료 받을 기회조차 없이 여기저기서 떠돌이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한센병 환자들이 국가 위상에 장애가 된다고 판단, 환자들을 한 장소에 격리 수용할 계획을 세우고 1916년 2월 24일 소록도를 선정해 소록도자혜의원을 설립했다. 그리고는 전국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끌어다 소록도로 몰아넣었다. 소록도자혜의원은 초기 한센병 환자들의 치료를 목적으로 건립됐으나, 일제 당시 그 안에서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인권유린과 학대감금강제노역 등 온갖 탄압이 가해졌다. 중앙공원 역시 한센병 환자들을 동원한 강제노역에 의해 공사가 이뤄졌다. 공원 입구쪽에는 검시실과 감금실이 있다. 검시실은 사망한 한센병 환자를 검시하는 해부실로 사용됐다. 현재 건물 안 내부에는 당시 검시대로 사용했던 차가운 흰 돌테이블이 중앙에 놓여 있고, 벽쪽으로는 수납장이 그대로 세워져 있다. 사망한 모든 환자들은 자신과 가족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곳에 눕힌 채 꼼짝없이 해부당해야 했다. 그리고는 화장 후 납골당에 유골로 안치됐다. 이러한 일로 소록도 환자들은 3번 죽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첫 번째는 한센병을 얻은 것이요, 두 번째는 죽은 후 해부당하는 것이요, 세 번째는 장례 후 화장당하는 것이다. 그들의 처절했던 상황을 표현한 일화가 가슴을 찢는다. 감금실은 1935년 제정된 조선나예방령 규정에 의해 설치됐으며, 일제강점기 인권탄압의 상징물이 되었다. 육중한 담과 붉은 벽돌로 둘러싸인 감금실에 들어서니, 싸늘한 바람이 몸을 뚫고 지나간다. 이 차갑디 차가운 감금실 보살핌과 치료가 절실했던 환자들이 이곳에 감금돼 학대를 받았다는 사실에 목이 메이고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소록도에 수용된 환자들은 일본인 원장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변론의 기회조차 없이 이곳에서 감금감식금식체벌 등의 징벌을 받아야 했다. 부당한 요양소 운영에 대한 저항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일제의 조치로 이곳에서 많은 환자들이 억울한 죽임을 당하거나 불구가 됐으며, 출감 시에는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모두 정관절제를 당했다. 형무소 같은 감금실 안으로 작은 철장 창문이 보인다. 철장 사이로 하늘이 올려다 보인다. 세상과 통하는 유일한 자유의 문이었으리라. 숨통 같은 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가족을 그리워하고, 자유를 갈망하고, 치유를 희망했을 것이다. 보리피리 보리피리 불며 봄동산 고향 그리워 필-리리 보리피리 불며 꽃청산 어릴 때 그리워 필-리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필-리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 눈물의 언덕을 필-리리 -한하운 시인(한센인)-

[마루대문] 담양 누정, 그 속엔 선비의 ‘氣槪’가 있다②

◆문학 창작의 산실 면앙정 호남 제일의 가단(歌壇) 형성 면앙정은 조선 시가문학에 크게 기여한 면앙 송순(1493~1582년)이 관직을 떠나 1533년(중종 28)에 지은 정자다. 송순은 이곳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 이황박우임억령 등 유명 인사들과 면앙정에서 교우하며 학문에 대해 토론하고 시 짓기를 즐겼다고 한다. 그의 문하에는 기대승고경명정철임제 등이 있다. 이곳을 중심으로 호남 제일의 가단(歌壇)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다. 추녀 끝은 4개의 활주가 받치고 있다. 중앙에 방이 있으며, 현재의 건물은 여러 차례 보수한 것이다. 면앙정하면 면앙정 30영이 떠오른다. 송순이 이황김인후임제임억령 등과 함께 지은 것으로, 면앙정 주변의 빼어난 산세와 풍경을 노래하고 있다. ◆한국가사문학관 당대 문학가 유묵 소장 담양군에서는 가사문학 관련 문화유산의 전승 보전과 현재적 계승 발전을 위해 1995년부터 한국가사문학관 건립을 추진, 2000년 10월에 완공했다. 한국가사문학관은 본관과 부속건물인 자미정과 세심정, 산방, 토산품점, 전통찻집 등으로 구성돼 있다. 특히 전시관 앞 중앙에는 넓은 못과 정자 그리고 물레방아가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연출한다. 가사문학 자료를 비롯해 송순의 면앙집분재기 등과 정철의 송강집 및 친필 유묵 등 귀중한 유물을 소장전시하고 있다. 2002년부터는 영남의 규방가사를 비롯해 기행가사, 유배가사 등의 원본 및 필사본을 수집해 선보이고 있다. 담양은 16세기 조선 초, 숨 가쁘게 호흡하던 사화(士禍)와 당쟁(黨爭)의 정치적 변동 속에서 절의를 고집했거나 정쟁에 연루돼 유배됐다가 귀향하고 낙향한 사림들이 효충절의지심정(心情)의 인연 유대로 호남유학과 향촌의 사림문화 층을 형성하고 중흥기를 이룬 곳으로, 선비의 기개(氣槪)가 서린 곳이다. 이 선비들이 일상의 휴식과 세시가무(歲時歌舞), 유흥상경(遊興賞景)의 흥취를 시로 승화시킨 것이 곧 누정시(樓亭詩)이며, 누정을 무대로 누정시단이 흥성했다.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중심을 이뤘던 무등산 자락 성산 주변의 면앙정, 서하당, 식영정, 소쇄원, 환벽당, 송강정 등은 호남시단의 찬연했던 맥박의 공간이자 자연과 하나가 되는 시간의 거처라 할 수 있다. 즉 한국문학사에 있어 불후의 명류 문사들을 배출한 산실이요, 요람인 것이다.

[마루대문] 가사문학 꽃 피운 담양 ‘樓亭’①

담양은 호남문학의 대표적인 지역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누정(누각정자)을 보유하고 있다. 그만큼 누정문화가 가장 발달하고 활발했던 곳이 담양이다. 담양의 누정 대부분은 전망이 뛰어난 곳에 자리하고 있어 사계절 각각의 경치가 빼어나다.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던 조선시대 사림(士林)들은 불합리하고 모순된 정치 현실을 피해 따뜻한 기후와 풍부한 물산(物産, 생산물토산물)으로 인심이 넉넉한 호남지방으로 나남했다. 담양에 많은 누정이 있는 것이 이와 관련이 있다. ▲ 광풍각 후면 담장 뒤에서 바라본 모습ⓒ천지일보(뉴스천지) 사림들은 담양에 누정을 건립하고 인재 양성은 물론 시단(詩壇)의 결성과 시회(詩會)를 통해 심금을 울리는 훌륭한 시가문학을 창작했다. 이러한 시문학의 전통은 국문시가의 하나인 가사문학(歌辭文學)을 탄생시켰다. 당대 누정은 그냥 놀고 즐기는 곳이 아니었다. 사림들은 이곳에서 사상과 철학을 설파하고, 현실 정치를 비판하며 대안을 논했다. 그래서 온돌방을 둔 정자를 짓고 사시사철을 지내며 사상이 담긴 가사문학의 꽃을 피웠다. 특히 담양의 누정문화를 접할수록 다른 집안 선비들과의 인맥이 실타래처럼 엉켜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정치문학사회사가 함축돼 있기도 하다. ◆자연과 인공 조화가 완벽한 조선 중기 대표 원림 소쇄원 전남 담양에서도 남쪽에 위치한 소쇄원은 우리나라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정원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서울에서 출발하면 차로 경부고속도로를 달려 천안논산고속도로에서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창평 IC를 통과해 가사문학로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304호인 소쇄원은 맑고 깨끗하다는 뜻이 담겼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입구에서부터 보기만 해도 시원한 대나무숲길이 펼쳐지고, 성큼 들어서니 산수초목(山水草木)으로 푸름이 가득해 공기부터 남다르다. 소쇄원은 정원 전체를 통칭하는 말이다. 원래 12채의 누각과 정자가 있었으나 오랜 시간이 지나고 정원의 규모가 점점 축소되면서 9채가 사라지고 현재 대봉대, 광풍각, 제월당 3채만이 남아있다. 하서 김인후가 1548년에 쓴 소쇄원 48영을 통해 소쇄원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시원하게 쭉쭉 뻗은 나무들 사이로 계곡을 끼고 아름다운 정원이 발길을 멈추게 한다. 긴 담장이 동쪽에 걸쳐 있고, 북쪽의 산사면에서 흘러내린 물이 담장 밑을 통과해 소쇄원의 중심을 관통하니 산수초목이 어찌 어우러지지 않은 곳이라 할 수 있을까. 이곳 소쇄원은 자연과 인공의 조화가 매우 뛰어나다. 그래서일까. 가사 문학의 대가인 송순, 정철, 송시열 등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조선 중기 많은 문인들이 소쇄원을 자주 드나들었던 것도. 우리나라 전통 정원은 누가 만들었느냐에 따라 궁원과 향원, 민간정원으로 나눌 수 있다. 정원의 성격에 따라 별서정원, 산수정원 등으로도 분류하는데 별서정원은 선비가 낙향을 해 꾸민 정원을 의미하며, 산수정원은 자연을 감상하기 위해 만든 정자를 말한다. 보길도 윤선도의 부용동과 담양 양산보의 소쇄원 등이 대표적인 별서정원이다. ◆식영정환벽당송강정으로 나누고 정송강유적이라 부른다 담양은 광주(전남)와 매우 인접해있다. 소쇄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창계천을 사이에 두고 식영정(담양 권역)과 환벽당(광주 권역)이 마주하고 있다. ▲ 식영정 모습. 답사팀이 찾아 갔을 때는 이곳에서 머물며 심신수련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이 다른 이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천지일보(뉴스천지) 식영정은 환벽당, 송강정과 함께 정송강유적이라고 불린다. 소쇄원, 환벽당과 함께 한 동네에 있는 세 명승이란 의미의 일동지삼승(一洞之三勝)에도 속한다. 16세기 중반 김성원이 스승이자 장인인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자이며, 식영정 이름은 임억령이 지었는데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라는 뜻이다. 김성원은 송강 정철의 처외재당숙이다. 정철보다 나이가 11살이 많았으나, 정철이 이곳 성산에 와 있을 때 환벽당에서 같이 공부하던 동문이다. 당시 사람들은 임억령김성원고경명정철 네 사람을 식영정 사선(四仙)이라 불렀는데, 이들이 성산의 경치 좋은 20곳을 택해 20수씩 모두 80수의 식영정 이십영(息影亭 二十詠)을 지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이 식영정 이십영은 후에 정철이 지은 성산별곡의 밑바탕이 됐다. 식영정 정자의 규모는 정면 2칸, 측면 2칸이고 단층 팔작지붕이며, 온돌방과 대청이 절반씩 차지한다. 정자의 가운데에 방을 배치하는 일반 정자들과 달리 한쪽 귀퉁이에 방을 두고, 앞면과 옆면을 마루로 깐 것이 특징이다. 자연석 기단 위에 두리기둥을 세운 굴도리 5량의 헛집구조를 하고 있다. 식영정 건너편에 있는 환벽당은 광주광역시 북구 광주호 상류 창계천가의 충효동쪽 언덕 위에 있다. 어린 시절 정철의 운명을 바꿔 놓게 한 김윤제(15011572년)가 짓고 기거했던 곳이다. 푸르름이 고리를 두른다는 환벽(環璧)이란 이름의 뜻 그대로 환벽당을 둘러 있는 담장 안에 온통 푸름이 가득하다. 환벽당은 호남의 대표적인 누정문화를 보여주는 곳이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와가이며, 당호는 신잠이 지었다. 송시열이 쓴 제액(題額)이 걸려 있고, 임억령조자이의 시가 현판으로 걸려 있다. 김윤제는 1528년 진사가 되고, 1532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나주목사 등 13개 고을의 지방관을 역임했으나 관직을 떠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환벽당을 짓고 후학 양성을 했다. 그의 제자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 정철과 김성원 등이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덕령김덕보 형제는 그의 종손으로 역시 김윤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특히 정철은 16세 때부터 27세 관계에 나갈 때까지 환벽당에 머물면서 학문을 닦았다. 환벽당 아래에 있는 조대(釣臺)와 용소(龍沼)는 김윤제가 어린 정철을 처음 만난 사연이 전해지는 곳이다. 그 사연이라 함은 조부의 묘가 있는 고향 담양에 내려와 살고 있던 당시 14살의 정철이 순천에 사는 형을 만나기 위해 길을 가던 도중에 환벽당 앞을 지나게 됐다. 때마침 김윤제가 환벽당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꿈에 창계천 용소에서 용 한마리가 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꿈에서 깬 후 용소로 내려가 보니 용모가 비범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다. 김윤제는 소년 정철을 데려다가 여러 문답을 하며 그의 영특함을 알게 됐다. 그는 순천에 가는 것을 만류하고 정철을 슬하에 두어 학문을 닦게 했다는 내용이다. ▲ 송강 정철 시비ⓒ천지일보(뉴스천지) 정철은 이곳에서 김인후, 기대승 등 명현들을 만나 학문과 시를 배웠다. 김윤제는 정철을 외손녀와 혼인하게 하고, 그가 27세로 관계에 진출할 때까지 모든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환벽당은 정철의 4대손 정수환이 김윤제의 후손으로부터 사들여 현재 연일정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2013년 11월 6일에 환벽당을 비롯한 그 일원이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07호로 지정됐다. 식영정과 환벽당 그리고 송강정. 이들 정자의 사연 속에서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송강 정철(15361593년)이다. 정철은 호가 송강으로, 1561년(명종 16) 27세에 과거 급제했다. 그 뒤로 많은 벼슬을 지내다가 동인과 서인의 싸움으로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성산에 내려와 송강정을 짓고 가사 사미인곡속미인곡성산별곡 등의 문학작품을 지었다. 송강정은 정면 2칸, 측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측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정면에는 송강정이라는 현판이, 측면에는 죽록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마루대문] 영남의 알프스 울산, 산 좋고 물 좋아 마음마저 사로잡는 곳②

◆가지산의 사계(四季)를 노래하다 울산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와 경남 밀양시 산내면청도군 운문면에 걸쳐 있는 가지산. 바닷가에서 제일 높이 솟은 산이라는 의미가 담긴 이름이다. 예로부터 바닷가에서 제일 높이 솟은 산을 변산(邊山)의 의미인 가이산, 가시산이라고 불렀는데, 한자와 불교가 들어오면서 가지산(迦智山)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외에도 신라 흥덩왕 때에 전남 보림사에서 가지선사라는 중이 와서 석남사를 이 산기슭에 터 잡았다고 해 가지산으로 부른다는 설이 있으며, 까치산에서 유래한 지명이라는 설도 있다. 가지산의 사계는 울산 12경으로 지정됐다. 그도 그럴 것이 석남고개에서 정상까지 억새밭이 펼쳐지고 많은 기암괴석과 쌀바위 등이 등산객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하다. 무엇보다 영남의 알프스로 불리는 경남 북동부의 산악지대 중 최고봉으로 꼽히기에 가지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백두대간의 모습은 그야 말로 일품이요 명품이다. 태백산맥의 남쪽 여맥에 있는 가지산은 크게 세 방향으로 능선이 뻗어 있는데 그 가운데 문복산(文福山, 1013m)을 연결하는 북동 능선과 운문산(雲門山, 1188m)을 잇는 서쪽 능선은 경상남북도의 도계를 이루고 있다. 능동산(陵洞山, 982m)천황산(天皇山, 1189m)으로 이어지는 남서 능선은 밀양시와 울산시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남쪽 사면을 제외하면 대부분 완만한 경사를 이룬다. 특히 서쪽의 운문산과는 약 10㎞ 거리로 나란히 솟아 있어 멀리서 보면 하나의 산에 있는 쌍봉같이 보인다. 지질은 쥐라기에 관입한 화강암으로 되어 있어 곳곳에 기암괴석의 암봉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1979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가지산에는 수량이 풍부한 폭포와 아름다운 소(沼)가 많아 철마다 그 비경을 달리하며, 태곳적 화산 활동에 의해 생겨난 기암절벽들은 시공간의 벽을 넘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떠올리게 한다. 뿐만 아니다. 760여 종에 이르는 식물과 우리나라 전체 조류 450여 종 가운데 100여 종의 새가 살고 있어 자연이 만든 거대한 동식물원으로 불릴 정도다. 영남의 알프스에는 해인사, 송광사와 함께 삼보사찰로 꼽히는 큰 절인 통도사-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석가모니의 사리와 가사를 봉안해 불보(佛寶)사찰로 불린다-를 시작으로 운문사, 석남사, 표충사 등 문화유적지를 만날 수 있으며, 이 중 가지산에 있는 석남사는 비구니 도량으로 손꼽힌다. 가지산의 사계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것은 봄에는 진달래와 철쭉군락지(천연기념물 제462호)로 봄의 생명력을 한껏 뽐내고, 여름에는 석남사계곡, 학소대폭포, 호박소가 있는 요수골 등이 한여름의 무더위를 잊게 만들기 때문이다. 어디 이뿐이랴. 하늘 아래 있는 산이야, 철마다 옷을 갈아입겠지마는 가지산의 가을은 단풍으로 물든 오색의 화려함뿐 아니라 은빛 억색의 물결이 일대 장관을 이룬다. 석양에 붉게 물든 은빛 억새의 일렁임은 그야 말로 두고두고 못 잊을 추억을 남긴다. 겨울은 또 어떠한가. 혹자는 열매와 잎을 다 털어내 자신의 속살을 훤히 내놓은 겨울 산을 보며 운치가 없다고도 하지만, 나뭇가지 위로 사뿐히 내려앉은 눈송이와 온 산을 하얗게 물들인 설경을 보며 감탄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가지산의 겨울 또한 마찬가지다. 특히 쌀바위 주변에 눈 쌓인 풍경이 아름답다고 하니 사시사철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산이다.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1970~71년 동국대학교 불적조사단에 의해 발견돼 학계에 보고된 울산 대곡천의 천전리 암각화와 반구대 암각화는 한국의 대표적인 선사유적이다. 한국사와 미술사 관련 서적의 첫 부분을 장식하고 있을 만큼 유명한 암각화로 울산을 대표하는 곳이기도 하다. 암각화(岩刻畵)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자신의 바람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커다란 바위 등 성스러운 장소에 새긴 바위그림으로 대부분의 학자들은 종교적 제의에 사용되는 상징언어이며, 신과 인간이 소통할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이라고 본다. 울산은 근대 동북아시아 포경의 중심지로 이와 관련된 전통문화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그래서인가. 울산에는 아직 신앙의 대상으로서 고래를 숭배하는 사당(祠堂)과 제사를 모시는 전통의식이 이어지고 있다. 그 생김새가 마치 거북이 모양 같은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는 높이 3m, 너비 10m의 ㄱ자 모양으로 꺾인 절벽으로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된 고래사냥과 종교의식의 기원지로 인류사에 매우 중요한 가치와 의미를 담고 있는 문화유산이다. 반구대 암각화의 경우 대략 7000~3500년 전 신석기시대 유적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으며, 천전리 암각화는 우리나라 최초로 발견된 암각화 유적으로 대곡천 중류의 기슭 암벽에 새겨진 그림과 글씨를 이른다. 울주 천전리 각석(국보 제147호)은 신석기 말 혹은 청동기 초기 동물과 인물상 암각화, 청동기 중기 이후 것으로 보이는 추상 암각화, 철기시대 선각인물과 동물상 암각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에 이르는 글씨 등이 여러 층으로 겹쳐서 새겨져 있는 독특한 유적이다. 안타까운 것은 현재 반구대 암각화가 사연댐으로 인해 연중 물속에 잠겼다 나왔다 하는 침수와 노출의 반복에 의해 급속하게 훼손돼 그 원형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곡천 암각화군은 2006년 문화재청 주관으로 세계유산 등재 가능성 조사를 완료하고, 2009년 12월 문화재청 직권으로 등재 신청을 한 후, 2010년 세계문화유산 잠정 목록에 등재됐다. 그렇기에 무엇보다도 암각화가 더 이상 훼손되지 않도록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다. 이를 위해 문화재청은 현재 1년에 절반 이상 물에 잠겨 훼손되고 있는 암각화 주변에 가변형 임시 물막이 댐(카이네틱 댐) 설치를 추진 중에 있으며, 2017년까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외에도 참으로 많은 볼거리와 이야깃거리가 숨어있어 다시 또 찾고 싶은 곳이 되어버린 울산. 한 지역에 이리도 많은 유적지와 천혜의 절경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난생 처음 와본 곳이지만, 그 매력에 빠져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낯선 듯 결코 낯설지 않은 곳. 비단 울산 지역뿐 아니라 고국산천이 주는 매력이 아닌가 한다.

[마루대문] 영남의 알프스 울산을 가다①

새벽 3시. 글마루 답사팀은 조금은 이른 아침을 맞았다. 울릉도를 목적지로 떠난 답사였기에 분주히 움직였으나 갑작스런 일기의 변화와 예상치 못한 변수로 스케줄을 조정해 울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나마 새벽길을 달려 왔던 터라 울산으로 목적지를 급선회했어도 첫날의 스케줄을 소화하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갑작스레 변경된 스케줄에 어디부터 답사를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던 것도 잠시, 울산이 이토록 많은 이야기를 지닌 도시라는 사실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포항에서 달려 도착한 울산은 중공업 도시라는 타이틀만 생각하던 기자에게 반전의 매력이 돋보이는 생태 도시로서의 이미지를 심어줬다. 게다가 영남의 알프스로 불리는 해발 1240m의 가지산까지 딱 버티고 있으니 그야 말로 산 좋고, 물 좋은 도시가 아니겠는가. ◆울산 12경, 태화강 선바위와 십리대밭 처음 답사팀이 발을 디딘 곳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읍 입암리에 위치한 태화강 선바위 일대다. 동해 경계에 위치한 태화강은 길이 46.02㎞, 유역면적 643.96㎢로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의 가지산과 고헌산(1033m) 등에서 발원하는 남천(南川)을 본류로 동쪽으로 흐른다. 2006년 울산발전연구원의 탐사연구에 따르면 태화강은 다른 강에서는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강물의 시원점인 원류가 두 곳으로 발표되기도 했다. 가지산은 역사적 개념의 발원지로, 백운산은 하구로부터 최장거리를 원류로 삼고 있는 지리적 개념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즉 가지산 쌀바위까지 유로(유역 길이)가 45.43㎞인데 반해 백운산 탑골샘까지는 47.54㎞로 실측되면서 백운산 탑골샘이 최장거리 발원지로 확정됐으며, 가지산 쌀바위는 상징적 발원지로 개념이 바뀌게 된 것이다. 태화강 상류를 따라 걷다 보면 백룡이 살았다는 전설이 깃든 백룡담 위로 마치 금강산 해금강의 한 봉우리를 옮겨 놓은 듯 기묘한 형상을 한 바위를 만날 수 있다. 높이 33.2m, 둘레 46.3m의 이 선바위는 뒤에 장엄하게 버티고 있는 절벽과 뚝 떨어져 있어 그 신비함이 더한다. 게다가 이 기묘한 형상의 바위는 주변 바위들과는 전혀 다른 재질이라고 하니 볼수록 신기하고 알수록 신비하다. 한참동안을 바라보고 있자니 속세에 물들지 않고 독야청청하겠다는 선비들의 올곧은 절개와 기개가 뿜어져 나오는 듯 위풍당당한 모습마저 느껴졌다. 그 깊이를 쉽게 가늠할 수 없는 강물 위로 우뚝 솟은 모습에서 태평성대를 꿈꾸는 임금의 모습이,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리라는 굳은 맹세를 한 장군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곳을 수없이 오고갔을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모습이 교차되며 한 구의 시조가 떠올랐다. 내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구름빛이 맑다하나 검기를 자주한다 바람소리 맑다하나 그칠 때가 많은도다 맑고도 그칠 때 없기는 물뿐인가 하노라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쉬이지고 풀은 어이하여 푸르른 듯 누르나니 아마도 변치 않음은 바위뿐인가 하노라 더우면 꽃이 피고 추우면 잎지거늘 소나무야 너는 어찌 눈서리를 모르느냐 지하의 뿌리 곧은 줄을 그것으로 아노라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 시키며 속은 어이 비었느냐 저렇고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 하노라 -윤선도의 오우가(五友歌)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조시인으로 유명한 고산 윤선도(1587~1671). 숱한 배신과 모함으로 여러 번에 걸친 귀양살이 도중 죽을 고비를 넘긴 그는 세상을 떠나 자연과 벗하며 사는 삶을 노래했다. 아마도 이곳 선바위를 찾았던 많은 시인묵객들 또한 그러했으리라. 검푸른 수면 위로 선명하게 투영된 선바위의 모습. 산인가 바위인가 하늘에 솟은 이 층암을 찾던 이들은 분명 이곳에서 자연을 노래하고 풍류를 즐겼으리라. 이들 선인들이 이곳에 정각을 세웠으니 바로 입암정이다. 정몽주, 이언적, 정구 선생 등이 이곳을 많이 찾았다고 한다. 선바위 뒤로 보이는 절벽 끝자락에는 용암정이라는 작은 암자와 선암사라는 자그마한 절이 있어 운치를 더한다. 답사팀이 찾은 날에도 선암사에서 흘러나오는 목탁소리와 염불 외는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며 평온함을 더했다. 조선 중기에 만들어진 용암정에는 제법 높은 담이 둘러있어 선바위의 경관을 가리는데, 이는 불가의 도리를 깨닫기 위해 용맹 정진하는 스님들의 마음을 선바위가 설레게 한다고 해 만들어진 담장이라고 한다. 백룡이 살았다는 전설이 있어서일까. 옛날 선인들은 날이 가물어 천지가 타오를 때면 이곳에서 머리 숙여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선바위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눈이 즐거울법한데 이 선바위를 기점으로 태화강변에 조성된 십리대밭 길은 마음 깊은 곳까지 시원하게 만든다. 4㎞에 이르는 긴 구간에 조성된 대나무 숲은 일제강점기 이곳에 살던 주민들이 홍수 방지용으로 대나무를 심은 것이 지금까지 온 것이라 한다. 반면, 울산 최초의 읍지인 1749년 학성지에 오산 만희정 주위에 일정 면적의 대밭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태화강변에 대나무가 자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국 수호의 염원이 깃든 대왕암 경북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에 신라 문무대왕의 수중릉(水中陵, 사적 제158호, 대왕암)이 있어 동해를 수호한다면, 울산에는 문무대왕의 뒤를 이어 세상을 떠난 문무대왕비가 남편처럼 동해의 호국룡이 되고자 큰 바위 아래로 잠겼다는 전설이 깃든 대왕암이 있다. 울산 대왕암은 울주군 간절곶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해가 가장 빨리 뜨는 곳이다. 한반도 동남단에서 동해 쪽으로 가장 뾰족하게 나온 부분의 끝 지점에 해당하는 대왕암공원은 동해의 길잡이를 하는 울기항로표지소로도 유명하다. 공원입구에서 등대까지는 600m 송림이 우거진 길로 수령이 100년이 넘는 1만 5000그루의 아름드리 해송이 우거져 있다. 한눈에 보기에도 웅장한 자태를 뽐내는 해송은 사시사철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며, 해풍을 막아줄 뿐 아니라 대왕암을 찾는 여행객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울산 12경 중 하나인 대왕암공원은 신라 문무대왕비가 죽어서도 호국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바위섬 아래 묻혔다는 전설에 걸맞게 거대한 바위(대왕암)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옅은 황토색과 붉은 기운을 살짝 감도는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군집을 이뤄 일대 장관을 이루는 대왕암공원은 예부터 경치가 아름다워 해금강이라 불렸다. 마치 호국용이 돼 대왕암 아래 잠든 문무대왕비를 호위라도 하듯 군집을 이뤄 검푸르고 짙푸른 바다 위에 떠있는 기암괴석들은 장엄하기까지 하다. 파도의 세기와 높낮이에 따라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감추기도 하는 주변 바위들을 보며 전설의 섬으로 불리는 이어도(파랑도)가 언뜻 떠올랐다. 죽음의 섬이면서 또한 구원의 섬인 이어도.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대왕이었지만 통일 후 불안정한 국가의 안위를 위해 죽어서도 용이 되어 국가를 평안하게 지키겠다던 그와, 남편을 따라 호국용이 돼 조국을 수호하겠다는 뜻을 밝힌 문무대왕비. 잠시 사라졌다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내는 바위의 모습이 마치 나라를 위기로부터 구해 평온한 세상을 만들어 달라는 문무대왕비의 간절한 외침 같았다. 대왕암은 육지에서 200m 정도 떨어진 바다에 있어 점점이 이어진 바위를 기둥 삼아 가로놓인 철교를 건너야 다다를 수 있다. 대왕암은 댕바위, 혹은 용이 승천하다 떨어졌다 해 용추암이라고도 불린다. 이외에도 괴이하게 생겼다 하여 쓰러뜨리려다 변을 당할 뻔 했다는 남근바위, 탕건바위와 자살바위 등이 보는 재미를 더한다.

[마루대문] 전북 고창, 다양한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곳 ②

선운사에 가신적이 있나요 바람불어 설운날에 말이에요 동백꽃을 보신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말이에요 나를 두고 가시려는 님아 선운사 동백꽃 숲으로 와요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맘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 떠나실거예요 선운사에 가신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동백꽃 지는 그곳 말이에요 노래 선운사 가삿말 - 송창식 천오백년 고찰 선운사는 백제 27대 위덕왕 24년(577), 검단스님이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검단스님의 선운사 창건 관련에는 여러 가지 설화가 등장한다. ▲ 선운사 대웅보전(보물 제290호)ⓒ천지일보(뉴스천지) 본래 선운사의 자리는 용이 살던 큰 못이었는데, 검단스님이 용을 몰아내고 돌을 던져 연못을 메워나가고 있었다. 그 무렵 마을에 심한 눈병이 돌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못에 숯을 한 가마 갖다 부으니 눈병이 씻은 듯이 낫게 됐다. 이를 기이히 여긴 마을 사람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숯과 돌을 못에 갖다 부었고, 큰 못은 금방 메워지게 되었고, 이 터 위에 선운사를 세웠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설화로는 이 지역에 전쟁 난민이 많았는데, 검단스님이 불법(佛法)으로 이들을 선량하게 교화시켜 소금을 구워서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스님에게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보답하기 위해 해마다 봄가을이 되면 절에 소금을 갖다 바쳤다고 한다. 이를 보은염(報恩鹽)이라고 불렀다. 선운사가 위치한 곳은 해안과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염전이 일궈졌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염전을 일궈 재력을 확보해 사찰을 창건했다는 설화도 전해진다. 검단스님은 오묘한 지혜의 경계인 구름(雲)에 머무르면서 갈고 닦아 선정(禪)의 경지를 얻는다하여 절 이름을 선운이라 지었다고 한다. 답사팀이 선운사를 찾은 날은 마침 구름이 선운산을 뒤덮고 있어 구름 속에 자리한 듯했다. 검단스님의 오묘한 표현에 중생의 깨달음은 더디나, 스님도 구름이 감싸고 있는 선운산의 경치에 매료되지 않았을까. 조선 후기 선운사가 번창할 무렵에는 89개의 암자와 189개에 이르는 요사(寮舍)가 산중 곳곳에 흩어져 있을 정도로 장엄한 불국토를 이뤘다. 또한 선운사는 오랜 역사와 함께 대웅보전(보물 제290호),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보물 제1752호), 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 제279호), 도솔암 마애불(보물 제1200호) 등 많은 불교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선운사는 동백꽃 군락지로도 유명해 많은 시인 묵객들에게 영감을 주어 사랑 받는 명소이기도 하다.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했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니다. - 선운사 동구 모두 - 서정주 ◆기암바위와 푸르름이 조화를 이룬 선운산 고즈넉이 자리잡은 선운사(禪雲寺)를 감싸 안은 선운산. 선운산은 고창군 아산면에 위치해 있으며, 해발 336m로 그리 높지 않은 산이다. 본래 그 이름은 도솔산(兜率山)이었으나 백제 때 창건한 선운사로 인해 선운산으로 고쳐 불리게 됐다. 주변으로는 경수산(444m)천마봉(284m)국사봉(346m)낙조대배맨바위 등이 우뚝우뚝 솟아 있어 사계절 뛰어난 절경을 이룬다. 일행은 선운사를 지나 도솔암으로 향했다. 도솔암 근처에 도착하면 천연기념물 제354로 지정된 장사송(소나무)을 볼 수 있다. 장사송 뒤쪽의 기암절벽에는 굴이 하나 있다. 바로 진흥굴이다. 진흥굴은 평소 불도에 관심이 많았던 진흥왕이 왕위를 물려주고 승려가 된 후 불도를 닦았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조금 더 걸으니 바로 도솔암이 눈에 들어왔다. 찜통 같은 더위를 물리치기 위해 일단 시원한 약수부터 한 잔 떠 마셨다. 도솔암에는 동불암지에 부조로 새겨진 마애여래좌상이 유명하다. 전체 높이 15.6m, 폭 8.48m로 조각된 마애여래좌상은 고려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마애여래좌상의 얼굴을 묘사하자면 가느다란 실눈과 유난히 우뚝 솟은 코, 일자형으로 꽉 다문 입술. 화산암의 특성으로 인해 섬세하고 부드럽게 조각됐다고는 보기 어렵지만 나타내야 할 것들은 충분히 표현된 듯하다.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주름, 무릎에 가지런히 놓인 두 손, 가부좌 튼 자세, 연꽃무늬를 새긴 계단 모양의 받침돌까지 암벽에 나타나 있다. 마애여래좌상의 명치 끝에는 검단선사가 쓴 비결록이 있었던 감실이 있다. 조선 말 전라도 관찰사로 있던 이서구가 감실을 열자 갑자기 풍우와 뇌성이 일어 그대로 닫았는데 책머리에 전라도 감사 이서구가 열어본다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고 한다. 이 비결록은 19세기 말 동학의 접주 손화중이 가져갔다고 전한다. 도솔암을 거쳐 천마봉을 찾아 올랐다. 어려운 코스는 아니었기에 산책하는 기분으로 한발 한발 걸음을 옮겼다. 드디어 보이는 해발 284m의 천마봉. 천마봉에 오르니 정면으로 내원궁과 동불암지에 새겨진 마애여래좌상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그리고 사방 곳곳에서 형체를 드러내고 있는 기암바위들은 절경을 연출해낸다. 선운산은 중생대 백악기(약 1억 3500만 년~6500만 년 전) 화산활동에 의해 생겨난 화산암으로 이뤄져 있다. 그래서인지 바위의 생김새가 역동적이며, 무언가 흘러 내릴 듯한 협곡형태의 모양도 생성돼 있다. 과연 선운산은 호남의 내금강이라 불릴 만한 비경을 자랑한다. 화산암은 용암이 지표에서 냉각될 때 포함돼 있던 가스가 빠져 나가면서 곳곳에 구멍이 생겨난다.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풍화작용을 겪은 화산암은 흙이 쌓이고 쌓여 가스로 인해 생겨난 구멍이 메워지게 된다. 그 자리에 씨앗이 날아들어 뿌리를 내리고, 바위에서 한송이 꽃이 피게 된다. 자연이 빚은 아름다운 조형물이 탄생하게 되는 배경이다. 가만히 들여다 보면 선운산의 바위들은 끈질긴 생명체들로 똘똘 뭉쳐져 있는 듯하다. 천마봉을 지나 다음 코스로 이어지는 곳은 낙조대이다. 낙조대에서 바라보는 서해일몰이 일 품이라 하는데 답사팀은 아쉽게도 직접 감상할 순 없었다. 하지만 꼭 일몰은 아니어도 신록이 찾아든 선운산의 풍경을 즐기기에 낙조대는 부족함이 없다. 그저 여기가 좋사오니

[마루대문] 고령 중심의 대가야(大伽倻), 독자적 문화 형성②

대가야국(大伽倻國)은 가야산신 정견모주와 하늘신 이비가지 사이에서 태어난 장자 뇌질주일이 42년경 경북 고령(高靈)지방을 중심으로 세운 나라로 알려졌다. 뇌질주일(또는 내진주지)은 대가야를 세우고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이 됐다. ▲ 대가야 토기 ⓒ천지일보(뉴스천지) 16대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약 520년 동안의 찬란한 역사를 이어온 대가야는 562년에 신라 진흥왕이 이사부(異斯夫)와 사다함을 앞세워 공격해오면서 멸망했다. 하지만 대가야는 멸망하기 전까지 정치문화 영역에서 가야 중의 최전성기를 이끈 나라다. 순장문화, 철기문화, 가야금, 토기 등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해 고대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6세기까지 대가야의 도읍지로 번성을 누렸던 고령(高靈)은 영남의 젖줄 낙동강과 가야산이 둘러싸여 있는 곳이다. 높을 고(高) 신령할 령(靈). 지명 자체만 봐도 신령한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 예로부터 양반들이 살기 좋은 곳으로 불렸으며, 이중환의 택리지에 종자 한 말을 뿌리면 고령에서는 흉년이 들어도 최소 80말은 나온다고 기록될 정도로 토양은 비옥했고, 물은 충분했다. ▲ 대가야 고분 축조 모습 모형 ⓒ천지일보(뉴스천지) 특히 고령의 지산동고분군은 대가야국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이 고분이 발굴되면서 묻혀 졌던 가야사가 드러나게 됐기 때문이다. 대가야인들은 사후세계에 대한 내세적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죽어서도 지금의 삶이 그대로 연장된다고 믿었던 대가야인들은 많은 껴묻거리를 시신과 함께 묻었다. 순장(殉葬)도 행했는데, 순장이란 물건을 껴묻는 외에 한 집단의 지배 계층에 속한 인물이 죽었을 때 그 뒤를 따라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하위계층의 사람을 같이 묻는 행위다. 이러한 풍속은 결국 피장자가 죽은 뒤에도 생활이 지속된다는 내세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산동고분군은 대가야의 왕, 왕족, 귀족, 통치자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대가야 무덤은 주로 뒤에는 산성이 있고, 앞에는 망루와 평야가 내려다보이는 산마루와 산줄기에 위치한다. 왕 무덤은 한가운데 왕이 묻히는 큰 돌방을 하나 만들고, 그 주위에 부장품을 넣는 돌방 한두 개와 여러 개의 순장자들 무덤을 만들었다. 돌방은 길이에 비해 폭이 아주 좁은 긴네모꼴인데, 깬 돌을 차곳차곳 쌓아 벽을 만들고 그 위에는 큰 뚜껑돌을 여러 장 이어 덮었다. 무덤 둘레에는 둥글게 돌을 돌리고, 그 안에 성질이 다른 흙을 번갈아 다져 가며 봉분을 높게 쌓았다. ▲ 금동관(모조품)ⓒ천지일보(뉴스천지) 대가야는 유구한 역사를 이어왔음에도 유물이 많지 않다. 일부 학자들은 고분이 온전한 채로 눈에 띄어 95% 이상이 도굴됐기에 찬란했던 대가야의 역사가 신라보다 많은 부분 감춰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나마 대가야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지산동고분군에서 나온 금동관, 토기 등의 껴묻거리는 도굴꾼이 미처 캐내지 못하고 남은 유물의 일부다. 고령읍 주산(해발 321m)을 중심으로 남쪽까지 능선을 타고 분포한 고분은 현재 704기로 확인됐다. 남북을 통틀어 가장 많은 고분이 분포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돼 있다. ◆가야금 소리로 흩어진 7개 가야 통일 염원 삼국사기 악지(樂志)에는 가야국 가실왕이 중국의 악기를 보고 가야금을 만들었으며, 가야 여러 나라의 방언이 각각 달라 소리음(聲音)을 하나로 하기 위해 성열현(省熱縣) 출신의 악사(樂師) 우륵에게 명하여 가야금곡 12곡을 만들게 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가야금은 오동나무를 통째로 깎아 만들었는데 위판은 하늘을, 아래판은 땅을 상징하며, 중간에 빈 공간은 사람이 사는 삼라만상을 뜻한다고 한다. 12줄은 1년 즉, 12달을 의미하는데 1600년 전 이미 12달을 뜻하는 12줄을 생각해 냈다는 것은 분명 문화를 앞서 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가야금의 머리는 양이두(羊耳頭) 즉, 양의 머리를 형상화한 것이다. 우륵과 가실왕은 대가야 551년 국운이 기운 때에 왜 가야금을 만들었을까. 가실왕은 흩어진 7개 가야를 소리로 통일해 보고자 가야금을 만들고 우륵에게 곡을 쓰라 명했다. 즉, 가야금은 소리로 통일을 이루려는 가실왕의 염원이 담긴 악기다. 우륵은 185곡을 쓴 것으로 알려졌는데, 지금은 12곡의 가사만 남았다. 하가라도 상가라도 등 2곡은 불교가사이며, 나머지 10곡은 지역 이름이다. 우륵이 지은 12곡은 ▲하가라도(下加羅都) ▲상가라도(上加羅都) ▲보기(寶伎) ▲달이(達已) ▲사물(思勿) ▲물혜(勿慧) ▲하기물(下奇物) ▲사자기(師子伎) ▲거열(居烈) ▲사팔혜(沙八兮) ▲이혁(爾赤欠) ▲상기물(上奇物)이다. 한편 가실왕은 일반적으로 대가야의 왕으로 보고 있는데, 두 가지 설이 있다. 대가야의 왕 중에서도 우륵이 대가야 멸망 직전의 인물임을 들어 대가야 마지막 왕이었다고 보는 설과, 479년에 중국 남제(南齊)에 조공해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이란 작호를 받은 바 있는 하지왕(荷知王)으로 보는 설이다.

[마루대문] “만 가지 형상에 감탄사가 절로” 가야산 만물상(萬物相)①

가야산 만물상 구간은 가장 아름다운 비경을 자랑한다. 운이 좋아야 전설이 깃든 신비로운 비경을 볼 수 있지만, 운이 따라주지 않더라도 만물상만의 매력을 발산하며 힘겹게 산을 오른 이에게 끝내 미소를 허락한다. 가야산은 대륙성 기후로 기온의 연교차일교차가 매우 커서 날씨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여름에는 지형성 강우로 연강수량이 1100㎜ 이상이며, 하계 집중 현상도 높은 곳이다. 다행히 답사팀이 만물상을 찾은 날은 비교적 좋은 날씨였다. 전날 내린 비로 땅이 약간 젖어 있었지만, 코끝을 스쳐오는 시원한 산바람에 땀 흘릴 겨를 없이 산행할 수 있었다. 이렇게 가야산은 반갑게 우리를 맞아주었다. ▲ 기암괴석이 산세와 어울려 장관이다. 본지 발행인이 손을 펼쳐 보이고 있다.ⓒ천지일보(뉴스천지) ◆기암괴석이 산세와 조화 이룬 만물상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형승(形勝)은 천하에 뛰어나고, 지덕은 *해동(海東)에 짝이 없다고 가야산을 칭송하고 있다. 조선 중기 문신 한강 정구(15431620년)의 가야산기행문에는 유람객의 구경거리가 되는 산의 훌륭한 경치는 인자(仁者)로 하여금 산의 오묘한 생성의 이치를 보고 자성(自省)하게 하는 것이며, 높은 곳에 오르는 뜻은 마음 넓히기를 힘씀이지 안계(眼界) 넓히기를 위함이 아니다라고 적고 있다. 그래서 정구 선생은 가야산 정상에 오른 심회를 천 년 처사의 마음, 말 없는 가운데 합하네라고 읊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10대 명산에 속하는 가야산에서 최고의 능선이자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만물상. ▲ 물고기 입 모양을 닮은 바위ⓒ천지일보(뉴스천지) 만물상은 수많은 기암괴석이 산세와 어울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장관을 연출한다. 규모부터 남다른 수많은 사람 형상 바위, 동물 형상 바위 등이 산세를 더욱 웅장하게 만든다. 이 기암들이 없는 만물상은 상상 조차 안 될 정도다. 만물상 구간(백운동탐방지원센터~상아덤, 2.8㎞, 2시간 20분)은 초입부터 경사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큰 오르막과 내리막을 일곱 차례 반복해야하는 험준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 위에 놓인 바위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데, 영겁의 세월에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다행히 이곳 바위들은 대체로 둥그스름한 형태를 띤다. 네모 형이라도 결코 뾰족하지 않다. 그만큼 날씨와 체력만 잘 받쳐 준다면 오를 만한 산이 성주팔경 중에 제1경인 만물상이다. 계절마다 다른 옷을 입는 산이라지만, *녹음(綠陰)이 짙은 여름에는 그 많던 바위가 수풀에 숨었다고 할지라도, 이번에 답사팀이 오른 만물상은 참으로 오를 만한 산이었다. 특히 산 정상에 가까워지면 바위틈에 자란 야생 식물, 고수목 등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데, 바위틈에 뿌리를 내고 자라난 질긴 생명력에 경이로움 마저 느껴진다. 지난 6월 답사팀이 만난 녹음의 가야산은 왜 이제야 왔느냐며 감춰뒀던 비경을 한껏 내어 보였다. ▲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난 야생화 ⓒ천지일보(뉴스천지) 기독교 경서인 성경에서 신약 로마서 1장 20절에는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고 기록돼 있다. 기자는 만물상을 오른 순간 창조주가 만든 만물 앞에서 다시 한 번 인간의 나약함을 느꼈다. 대자연 앞에 서니 어느새 근심과 걱정,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사라졌다. 그리고 이내 마음은 차분해졌다. ◆가야산 여신과 하늘신이 만난 상아덤 ▲ 녹음의 가야산에 운무가 끼어 신비로운 장관을 연출한다.ⓒ천지일보(뉴스천지) 가야산은 대가야국의 시조설화가 서려 있는 산이다. 예부터 *해동(海東)의 10승지 또는 조선 8경의 하나로 유명하다. 특히 만물상 정상인 상아덤에는 가야산 여신인 산신(山神) 정견모주(正見母主)와 하늘신인 천신(天神) 이비가지(夷毗訶之)가 노닐던 곳이라는 설이 전해진다. 상아덤의 어원은 상아는 여신을 일컫는 말이고, 덤은 바위를 지칭해 여신이 사는 바위라는 의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최치원이 저술한 석이정전에 상아덤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 성스러운 기품과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가야산 산신 정견모주는 가야산 자락에 사는 백성들이 가장 우러러 믿는 여신이었다. 정견모주는 백성들에게 살기 좋은 터전을 닦아주려 마음먹고 큰 뜻을 이룰 힘을 얻기 위해 밤낮으로 하늘에 소원을 빌었다. 그 정성을 가상히 여긴 천신 이비가지는 어느 늦은 봄날 오색구름 수레를 타고 상아덤에 내려앉았다. 정견모주와 이비가지는 상아덤에서 부부의 인연을 맺고, 이후 옥동자 둘을 낳았다. 첫째는 아버지인 이비가지를 닮아 얼굴이 해와 같이 둥그스름하고 붉었으며, 아우는 어머니 정견모주를 닮아 얼굴이 갸름하고 흰 편이었다. 그래서 첫째는 뇌질주일(惱窒朱日), 둘째는 뇌질청예(惱窒靑裔)라 이름 붙였다. 후에 첫째 뇌질주일은 대가야의 시조인 이진아시왕이 됐고, 둘째 뇌질청예는 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이 됐다. 답사팀이 상아덤에 오른 순간은 지금도 생생하다. 답사팀을 반겨주기라도 한 것일까. 상아덤 앞에 다다르자 처음 느껴보는 신비로운 바람결이 온 몸을 스쳤고, 우리는 높은 산 위에 올랐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생각했다. *형승(形勝)-지세 또는 풍경이 뛰어남 *해동(海東)-우리나라를 발해의 동쪽에 있다는 뜻으로 일컫던 이름 *녹음(綠陰)-푸른 잎이 우거진 나무나 수풀 *해동 10승지(정감록에 기록)-풍기 예천, 안동 화곡, 개령 용궁, 가야, 단춘, 공주 정산 마곡, 진천 목천, 봉화, 운봉 두류산, 태백 ▶이어서 고령 중심의 대가야(大伽倻), 독자적 문화 형성②

[마루대문] ‘통영’ 자연과 벗한 예향(藝鄕) 도시②

아름다운 경치가 예술이라면 글 쓰는 사람, 그림 그리는 사람에게 더없이 좋은 재료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통영에는 유독 많은 예술문학가의 삶이 공존한다. ◆한국 현대문학의 어머니, 박경리 소설가 통영 출신 예술가는 많지만 그 중에서도 통영에서 태어나 통영에 묻힌 한국 현대문학의 어머니 박경리 소설가는 고향 통영을 글 속에 담아 자신의 내면을 들췄다. 작가는 외갓집이 이야기의 배경이었다는 소설 김약국의 딸들에서 통영은 다도해 부근에 있는 조촐한 어항이다. 부산과 여수 사이를 내왕하는 항로의 중간 지점으로서 그 고장의 젊은이들은 조선의 나폴리라 한다. 그러니만큼 바다 빛은 맑고 푸르다라고 고향 통영을 소개하고 있다. ▲ 박경리기념관에 전시된 선생의 생전 모습과 친필 원고 ⓒ천지일보(뉴스천지) 박경리 작가에게 통영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아버지와 남편, 아들을 잃은 영원히 아물지 않는 아픔으로 남았다. 그럼에도 짙푸른 바다의 역사가 남긴 충렬사, 세병관, 해저터널 등은 어린 시절 작가에게 민족주의를 싹트게 한 배움의 장소였다. 생전에 박경리 작가는 고향 통영은 어머니의 태와 같은 곳이다 자연이 아름다운 것은 작가에게 큰 충격을 준다. 통영은 예술가를 배출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진 곳이라고 극찬했다. 이번 탐방에서 박경리 작가의 예술혼을 쫓아 답사팀이 찾아간 곳은 세병관과 박경리기념관이었다. ◆평화 의미 담긴 세병관 ▲ 하늘의 은하수를 끌어다가 병기를 씻는다는 뜻의 세병관. 통제영의 중심 건물로 사용됐다. 박경리 작가가 어린 시절 민족주의 의식을 키운 의미 있는 곳이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지난 2004년 50여년 만에 통영을 찾은 박경리 작가(당시 79세)는 세병관을 마주하고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세병관은 사명감을 갖고 태어났다. 눈에 눈물이 돌았다. 우리에게 세병관은 마음의 의지이자 두려움 그 자체다. 세병관의 완벽성이 놀랍다라고. 답사팀이 찾은 통제영 내 세병관은 출입문부터 창을 거둔다는 뜻의 지과문(止戈門)이 경건한 마음으로 들어서게 하고, 정면에 걸린 크기부터 남다른 세병관 현판이 이곳의 깊이를 더했다. 은하수를 끌어다가 병기를 씻는다는 뜻의 세병관은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름 붙인 곳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전쟁 없는 평화의 세상을 바라는 마음은 한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깃발의 시인, 청마 유치환 ▲ 청마 유치환 시인 흉상 ⓒ천지일보(뉴스천지) 우리가 깃발의 시인으로 기억하는 청마 유치환 시인도 통영 출신이다. 답사팀이 찾은 청마문학관 입구에서부터 그의 대표적인 시 깃발이 마주한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청마의 시에는 한과 애상, 자기 성찰과 외로운 투쟁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그의 시 가 한국현대시의 맥락에서 벗어나 있다고 비평할 수도 있다. 청마는 현재 친일파 논란의 중심에 있다. 하지만 시인이 처한 당시 상황을 알고도 친일파로 구분한 것인지 묻고 싶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당시만 해도 문인보국회 같은 친일단체가 앞장서서 유명 예술인의 친일을 강요했다. 또 조선총독부는 각 경찰서의 정보과장을 앞세워 문학과 연극은 물론 모든 예술을 친일 도구로 이용하려 했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청마와 같은 예술인이 친일 문학단체와 총독부의 강요를 벗어나는 것은 힘들었을 일이다. 그럼에도 청마는 그 누구보다도 글로나마 일제와 대항하며 자신의 회한과 내적 갈등을 극복해 가려는 의지가 분명했던 시인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깃발처럼 살다간 청마야말로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근대사에 있어 진정 바위처럼 살다가 갔다고 말할 수 있다. 문학관 마당 위편에는 유치환 시인의 생가가 복원돼 있다. 원래 생가가 있던 곳에서 복원에 어려움이 있어 지금의 청마문학관과 함께 자리한 것이다.

[천지매거진] ‘통영’ 아름다운 대자연 품은 동양의 나폴리①

섬이 많은 바다, 다도해(多島海)를 품은 아름다운 도시 통영. 조선의 바다를 지킨 삼도수군통제영사가 있던 데서 비롯된 통영이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바다를 빼놓고는 통영을 이야기할 수 없다. 아름다운 자연이 곧 예술이 된 통영에는 시(詩)소설음악그림 등 한국 문학과 예술을 대표하는 인물도 많이 배출됐다. 봄기운이 살며시 다가온 지난 3월 둘째 주, 답사팀은 따뜻한 남쪽의 예향 도시 경상남도 통영을 찾았다. ◆미륵산에서 다도해와 마주하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도시로도 잘 알려진 통영은 아름다운 리아스식 해안과 526개의 섬으로 이뤄졌다. 유인도 41개, 무인도 109개 총 150개의 섬이 부속도서인데, 통영에서 가장 큰 섬인 미륵도 중앙에는 해발 461m의 미륵산이 우뚝 솟아 수많은 섬과 이웃하고 있다. 미륵산을 오르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다. 길이 1975m의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약 400m 길이의 산책데크를 따라가면 어렵지 않게 미륵산 정상까지 오를 수 있는데, 정상에 오르면 한려해상의 다도해와 통영시가 눈앞에 펼쳐져 절경을 뽐낸다. 통영 미륵산에 설치된 한려수도 조망 케이블카는 한국에서 유일한 2선(bi-cable) 자동순환식 곤돌라 방식으로, 국내 일반 관광객용 케이블카 중에서는 가장 길다. 긴 길이에도 불구하고 친환경적인 설계에 따라 중간지주는 1개만 설치해 환경보호를 생각한 노력이 돋보인다. ▲ 해발 461m 임을 알리는 미륵산 정상 표지석 ⓒ천지일보(뉴스천지) 답사팀이 미륵산 정상에서 펼쳐지는 다도해의 비경을 보기 위해 찾아간 날은 비교적 좋은 날씨였다. 하지만 산 위의 날씨는 예상할 수 없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이니, 가벼운 옷차림으로 오른 답사팀에게 미륵산 정상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미륵산 정상에 오르니 통영시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고, 통영이 품은 크고 작은 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장관이다. 저 멀리 충무공이 이끈 조선 수군과 왜의 격전지가 거짓말 보태 손에 닿을 듯하고, 이곳의 지형을 이용해 기지를 발휘한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이 놀라울 따름이다. 한산대첩, 당포해전 등 격전지를 바라보면 잠들어 있던 호국정신이 절로 깨어난다.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다도해의 짙푸른 바다를 보며 대자연의 위대함에 감탄, 또 감탄하게 된다. 미륵산은 미륵불이 사바세계에 출현해 용화수 아래에서 심회설법으로 모든 중생을 제도하리라는 불교설화에서 유래한 지명인 것으로 전해진다. 불교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미륵산에는 943년(고려 태조 26년) 도솔선사가 창건한 도솔암, 1732년(조선 영조 8년) 창건된 관음사, 42년(조선 영조 18년) 통제사 윤천빈이 산 일대에 축성한 산성과 함께 창건한 용화사 등 사찰이 있다. ◆비경(祕境)에 이끌려 곳곳을 누비다 미륵도 해안을 일주하는 23㎞의 산양일주도로를 달려 도착한 달아공원. 산양일주도로는 다도해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해안 드라이브 코스로, 도로의 중간 지점이자 미륵도 남쪽 끝에 달아공원이 있다. 완만한 공원길을 따라 올라가면 관해정(觀海亭)이라 부르는 정자가 하나 서 있는데, 이곳에서는 한려해상국립공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특히 일몰이 장관이다. 관해정을 비껴 바다 쪽으로 걸어가면 대장재도소장재도저도송도학림도연대도추도 등 수많은 섬이 눈앞에 펼쳐진다. 산 정상에서 보는 것과 또 다른 풍경을 볼 수 있다. 경치를 조망하는 테라스 한쪽에는 친절하게 섬들의 이름과 위치를 알려주는 대형지도가 마련돼 있다. 달아공원의 달아라는 이름은 이곳 지형이 코끼리 어금니와 닮았다고 해서 붙여졌는데, 지금은 달구경하기 좋은 곳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답사팀은 달아공원을 들렀다 오는 길에 당포항을 찾았다. 이곳에서 항구를 끼고 드넓게 펼쳐진 한려해상을 바라보니 겨우내 움츠렸던 마음이 시원하게 트이는 기분이었다. 줄줄이 늘어선 배들은 출렁이는 물살에 어와 둥둥 몸을 맡기고 출항할 때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다. ▲ 통영대교 ⓒ천지일보(뉴스천지) 통영대교, 통영운하, 해저터널. 타지 사람들이 통영에 오면 빠지지 않고 들린다는 곳. 답사팀도 사진과 영상으로 담았다. 통영대교는 통영시 중앙동에서 일자로 뻗어있는 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일방통행으로 만든 길을 통해 어렵지 않게 가까이 볼 수 있는데, 운 좋으면 통영운하를 통해 통영대교 밑을 지나가는 배와 함께 저물어가는 일몰과 노을 진 운하의 모습도 볼 수 있다. 통영대교 아래를 흐르는 통영운하는 원래 육지였던 것을 인공적으로 파서 만든 것으로, 폭이 약 55m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이끈 수군에게 패배하고 도주하던 왜군이 육로를 파 물길을 낸 뒤 도주했다는 역사가 있다. 이후 1931년에 길이 1420m, 수심 3m의 운하로 정비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저터널은 길이 483m, 높이 3.5m, 너비 5m로, 일제강점기인 1932년 충무운하와 함께 만들어진 동양 최초의 바다 밑 터널이다. 특별히 바다 밑이라는 게 눈에 보이지 않아도 바다 속 찬 기운이 체감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대표 관광지라 하기엔 큰 아쉬움이 남는다. 수압에도 거뜬한 통유리를 써서 전체는 힘들더라도 일부분은 바다 그대로를 볼 수 있다면 모를까. ◆사량도 지리산 주상절리암이 장관 상도하도수우도 등 3개의 유인도와 학도잠도목도 등 8개의 무인도를 포함하고 있는 사량도는 통영시 남해 해상에 있는 면 행정지다. 통영 가오치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40분간 이동하면 사량면 하도에 내려 본격적인 옥녀봉지리산(지리망산)불모산 등을 오를 수 있다. 섬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해안도로가 잘 돼 있어 마을버스나 택시, 또는 승선한 차량을 타고 원하는 산행 출발지로 갈 수 있다. 옥녀봉지리산(지리망산)불모산 등은 산행을 즐기는 사람들의 단골 코스다. 특히 지리산을 바라볼 수 있는 산인 지리망산 즉 지리산 정상에 다다르면 주상절리암이 넓게 분포해 바위가 장관을 이룬다. 지리산은 해발 398m로 그리 높지 않은 산이다. 하지만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사량면 마을을 곳곳에 끼고 넓게 펼쳐진 한려해상의 조망을 눈에 가득 담을 수 있어 많은 등산객에게 사랑받는 명소다. 기암으로 이뤄진 능선을 따라 여러 봉우리를 넘으며 끝없이 펼쳐지는 다도해의 비경은 가파른 산을 오르느라 찡그렸던 얼굴 대신 미소만 절로 짓게 하는 매력적인 산이다. ▲ 사량도 지리산의 주상절리암 ⓒ천지일보(뉴스천지) 답사팀이 사량도 지리산을 오른 날은 전날 우기로 인해 해무가 낀 상태였다. 날씨가 화창한 날에는 지리산, 옥녀봉 등 정상에서도 다도해의 수많은 크고 작은 섬이 선명하게 보인다고 한다. 진짜 지리산은 두말할 것도 없다. 미륵산을 오르고, 지리산을 오르고 보니 비로소 알 것 같았다. 보석 같은 수백 개의 섬으로 이뤄진 도시 통영이 아름다운 것은 그 옛날 영웅 이순신 장군이 이곳의 지형을 이용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역사도 깊지만, 어디를 둘러보아도 자연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라고.

[마루대문] 하늘이 내린 재상 서애 류성룡 ‘징비록(懲毖錄)’ 참혹한 전쟁 다시 일지 않길-②

유교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곳, 안동하회마을 ◆난세영웅(亂世英雄) 서애 류성룡 ▲ 조선의 명재상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 류성룡은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아버지 류중영과 어머니 안동김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21세에 이르러 당대의 대학자인 퇴계 이황에게 나아가 성리학을 배웠으며, 동문수학했던 학봉 김성일과 함께 이황의 양대 제자로 꼽히고 있다. 이황은 제자 류성룡을 가리켜 이 사람은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며 그가 대성할 인물임을 알아보고 예언을 남겼다고 한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 했던가. 류성룡은 1591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왜란의 조짐을 감지하고 선조에게 건의를 올려 이순신을 정읍 현감에서 전라 좌수사로, 권율을 형조정랑에서 국경지대의 요충지인 의주 목사로 천거했다. 견제 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애가 단행했던 파격적인 인재등용은 패색이 짙던 전란을 승리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류성룡의 뛰어난 혜안(慧眼)과 선견지명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어찌 두 영웅을 만날 수 있었을까. 이 땅을 우리가 어찌 밟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무엇보다 당파에 휘둘리지 않고 오로지 나라와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철저히 전란에 대비했던 그의 빛나는 업적은 명재상으로서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1598년 류성룡은 관직에서 물러난 후 옥연정사에 은거하며 징비록을 비롯한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후학을 양성하는 데 정진하다가 1607년 고향에 있는 농환재 초당에서 66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자연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 병산서원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위치한 병산서원(屛山書院)은 하회마을에서 반대 방향으로 4㎞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다.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 선생의 위패가 모셔진 곳으로,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이 서원은 고려 말 풍산류씨를 교육하던 풍악서당에서 비롯됐으며, 1572년 류성룡이 학문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는 조용한 장소를 찾아 병풍 모양의 아름다운 병산이 있는 현재의 위치로 자리를 옮겼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산수가 없으면 감정을 순화하지 못하여 사람이 거칠어진다. 산수란 멀리서 대하면 사람으로 하여금 큰 포부를 갖게 하여 인물을 만들어내고, 가까이 대하면 심지를 깨끗하게 하고 정신을 즐겁게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일까. 병산서원은 성리학적 가치관이 잘 반영된 건축구조로 자연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뛰어난 풍경을 자랑한다. 이곳에서 유학을 익혔던 유생들은 자연을 벗 삼아 심신을 달래며 큰 포부를 가졌으리라 상상해 본다. 병산서원을 자세히 둘러보니 비로소 안동에서 훌룡한 인재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병산서원의 솟을대문인 복례문(復禮門)을 지나면 서원의 백미로 꼽히는 만대루(晩對樓)를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다. 만대루의 만대는 당나라 두보의 시 백제성루(白帝城樓)에 나오는 푸른 절벽은 오후 늦게 대할 만하다(翠屛宜晩對)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보름달 빛이 병산과 서원에 내려앉으면 신비롭고 오묘한 절경을 이루게 됨을 표현한 듯하다. 정면 7칸, 측면 2칸의 만대루는 덤벙주초와 함께 18개의 통나무 기둥이 떠받들고 있으며, 2층 누마루는 사방이 탁 트여 있어 자연과 일치하고자 하는 성리학적 이념이 반영된 공간임을 알 수 있다. 건축자의 의도대로 누각의 텅 빈 공간은 건물 밖의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또 다른 풍경을 연출해 낸다. 병산서원 앞을 가로막고 있는 병산의 절벽과 강물은 만대루 지붕을 떠받들고 있는 기둥 사이사이로 들어와 7폭 병풍에 그려진 산수화로 승화된다. 만대루에 앉아 잠시 눈을 감으니 큰 뜻을 품은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가 귓전에 울리는 듯하다.

[마루대문] 하늘이 내린 재상 서애 류성룡 ‘징비록(懲毖錄)’ 참혹한 전쟁 다시 일지 않길-①

유교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곳, 안동하회마을 ◆하회마을,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명당 경상북도 정중앙에서 북으로 약간 치우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안동은 유교의 고장이자 전통문화를 잘 간직하고 있는 도시로 유명하다. 안동시에서 차로 40분 정도 달리다 보면 풍산류씨가 600여 년간 대대로 살아온 대표적인 동성마을인 하회마을에 다다른다. 하회(河回)란 이름은 안동시 중심에서 서쪽을 향해 흐르는 낙동강 물줄기가 'S'자로 마을을 호위하듯 감싸고 돌아나가는 형태에서 유래됐다. 하회마을은 산을 등지고 마을 앞쪽으로 물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으로 풍수지리설에 의해 살기 좋은 명당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하회마을은 수태극과 산태극이 그려진 곳에 자리해 마치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형상이라 하여 풍수지리에 따라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도 한다. 이중환은 택리지에 조선인물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인물의 반은 안동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명당인 이유에서 일까. 이중환의 말처럼 이곳 안동하회마을에서는 조선의 대학자 겸암 류운룡(謙庵 柳雲龍, 1539~1601)과 명재상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 형제를 비롯한 주요 관직자 및 유학자가 많이 배출됐다. 탐방팀은 실학의 대가이자, 선구자요, 정치가요, 개혁가의 대명사로 불리는 류성룡 선생의 흔적을 따라 하회마을을 찾았다. 916번 지방도로를 타고 하회마을에 다다르자 마을을 감싸며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물줄기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어 강 건너에 우뚝솟은 부용대(芙蓉臺)를 마주 하니 탄성이 절로 나온다. 태백산맥 줄기 맨 끝부분에 위치한 부용대는 높이 64m의 기암절벽으로 낙동강 물줄기에 의해 오랜 시간 침식작용을 받아 형성됐는데, 그 깎여진 모습이 마치 산을 반으로 잘라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 듯하다. 부용대 절벽에 겹겹이 쌓인 지층은 억겁의 세월을 이겨낸 흔적으로 고스란히 남아 소나무와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부용이란 명칭은 중국 고사에서 따온 것으로 연꽃을 의미하는데 부용대 정상에 오르면 연꽃모양을 닮은 하회마을을 한눈에 볼 수 있다고 해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하고, 절벽의 정상이 연꽃 봉오리를 닮았다 하여 부용대라 불리기도 한다. 일행은 부용대에 오르기 위해 하회마을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낙동강을 건넜다. 채 5분도 되지 않아 부용대 절벽 앞 나루터에 도착했다. 부용대 아랫 자락에 자리한 화천서원 뒤로 솔길을 따라 약 200m 오르면 금새 부용대 정상이 보인다. 짧은 코스를 오르는 동안에도 한눈에 내려다보일 하회마을의 모습을 상상하니 마음이 그저 설렌다. 부용대 정상에 오르자 조선 유교문화의 산실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하회마을 전경이 한번에 들어온다. 양반이 살았던 기와집에서부터 시작해 평민들이 지냈던 초가집, 서원, 서당 등에 이르기까지 유교정신이 반영된 전통가옥이 옹기종기 잘 유지되고 있었다.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며 흐르는 모습은 말 그대로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형상으로 보는 이에게 신비로움 마저 느끼게 한다. ◆징비록(懲毖錄)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 부용대 정상을 중심으로 낙동강 상류 쪽에는 겸암 류운룡이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길러내기 위해 지은 겸암정사(謙菴精舍)가 자리 잡고 있으며, 하류 쪽으로는 류성룡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은거하며 학문을 연구하기 위해 지은 옥연정사(玉淵精舍)가 자리하고 있다. ▲ 옥연정사 현판 옥연정사에서 절벽 쪽으로 난 간죽문(看竹門)을 나서면 강 건너편으로 하회마을이 내다보인다. 발걸음을 조금만 옮기면 절벽 허리 부근에 층간 사이로 소로(小路)가 있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얼핏 보면 길인지도 모르고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좁고 협착한 길이다. 절벽을 가로지르는 소로가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 마치 비밀 통로를 발견한 것처럼 호기심이 생겼다. 한 사람이 다니기에도 아슬아슬해 보이는 층길의 거리는 약 400m로 겸암정사와 옥연정사를 이어주고 있다. 낭떠러지 아래로는 낙동강 물줄기와 기암괴석들이 자리하고 있어 이 길을 걸을 때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류성룡 선생은 절벽에 나 있는 층길을 오가며 형님인 류운룡 선생에게 매일 아침 문안을 올렸다고 한다. 또한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류성룡은 형님에게 드릴 물건이 있을 때 직접 지게를 짊어지고 짐까지 나르기도 했다. 홀로 걷기도 위태한 이 길을 지게까지 지고 갔다니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탐방팀도 400여 년 전 류운룡·류성룡 형제가 오갔을 층길을 따라 함께 걸어본다. ▲ 국보 제132호 징비록 (사진제공: 한국국학진흥원) 옥연정사는 1586년(선조 19) 류성룡이 지은 것으로 흐르는 강물이 부용대에 이르러 깊어지는데 깨끗하고 맑은 물빛이 옥색을 띤다 하여 정사의 이름을 옥연(玉淵)이라 지었다고 한다. 옥연정사는 류성룡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국보 제132호인 징비록(懲毖錄), 1598을 저술한 장소로 유명하다. 징비록은 시경 소비편(小毖篇)의 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여기징이비후환, 予其懲而毖後患)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로 류성룡이 임진왜란(1592~1598, 선조 25) 7년의 기간 중 몸소 체험한 사실을 기록한 친필 회고록이다. 당시 류성룡은 모든 것을 진두지휘했던 총사령관으로서 당파 싸움으로 인한 공론 분열, 전쟁의 발발 원인, 전쟁 진행 과정, 전쟁으로 인함 참혹함과 피폐해진 백성들의 생활 등을 징비록에 상세히 기록했다. 류성룡은 왜란을 막지 못했던 과오를 반성하고, 이와 같은 참혹한 전쟁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염려하는 마음으로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교훈을 후대에 남기고자 했다. 오늘날 전 세계는 난세를 맞은 듯 곳곳에서 분쟁과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때에 류성룡 선생이 참혹한 전쟁을 막기 위해 미리 징계하였던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오늘의 우리는 피의 역사를 더 이상 되풀이 하지 않길 기대해 본다.②편에 계속

[마루대문] 밀양아리랑의 변신, 무죄!

일제강점기엔 독립군의 희망가로 [글마루=김지윤 기자] 이 아리랑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무려 광복군아리랑이라고 불리는 노래. 대체 어떤 장단과 가락으로 불리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정선아리랑 가락으로 불러보기도 하고, 본조아리랑으로 불러보기도 하지만 어색하다. 알고 있는 아리랑을 다 동원해서 불러보지만 곡조가 어울리기는커녕 장단이 맞지 않는다. 고민하던 중 밀양아리랑의 가락에 가사를 붙이니 제 옷처럼 딱 맞다. 그렇다. 일제강점기에 살던 독립광복군들은 흥겨움과 한이 담긴 밀양아리랑 곡조에 자신들의 애환을 실었다. 시대 반영하는 아리랑 아리랑 가운데 밀양아리랑은 팔색조다. 시대와 목적에 따라 다양하게 불리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본 것같이 광복독립군에게는 희망가로 불렸고, 정부에는 의전가, 민주화 운동이 한창일 땐 통일가 등으로 모습을 조금씩 달리해왔다. 60여 종의 아리랑 가운데 밀양아리랑은 정선아리랑, 본조아리랑, 진도아리랑과 함께 4대 아리랑으로 꼽힌다. 게다가 밀양에서만 불리던 아리랑은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한민족의 대표 아리랑으로 자리매김했다. 밀양아리랑을 포함한 아리랑은 한(恨)과 낙(樂)이 함께 담겼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한민족은 아리랑을 찾았다. 민족의 희로애락이 아리랑에 담긴 셈이다 . 아리랑이 곧 한민족의 정서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많고 많은 아리랑 가운데 왜 밀양아리랑이 유명할까 . 이와 관련해 차상찬(1887~1946) 교수는 밀양의 아리랑타령은 특별히 정조가 구슬프고 남국의 정조를 잘 나타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구슬픈 이야기를 담고 있는 밀양아리랑은 아랑처녀에 대한 이야기다. 억울하게 살해당한 처녀가 원한을 알리기 위해 원귀로 나타나 동네에 해를 끼쳤다. 이 소문을 들은 담대한 사람이 원귀를 만나 그 설움을 듣고 해결해 주었다는 전설이 밀양아리랑의 바탕이다. 태생부터 한을 지닐 수밖에 없는 밀양아리랑이었기에 독립군들 사이에서 불렸나 보다. 일제의 감시하에 모든 아리랑은 수모를 겪었다. 아리랑이 한민족의 애국심을 일으킨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중국과 로령지역에선 독립군아리랑과 임시정부에선 광복군아리랑, 한유한의 창극 아리랑이 동포들 사이에서 밀양아리랑의 곡조로 불리고 있었다. 밀양아리랑의 흔적은 의외의 곳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바로 6.25전쟁 당시 미국을 대적하고 북한을 지원하는 중국이 밀양아리랑의 곡조를 이용해 심리전을 펼친 것이다. 이 아리랑은 1954년 중공군이 발행한 조선가요집(朝鮮歌謠集)에 실렸다. 투박하면서도 쾌활한 아리랑 밀양아리랑의 매력은 음악성과 형식보다 밀양이라는 지역성을 꼽을 수 있다. 서정매 부산대(국악과) 교수는 지역성에서 형성된 아리랑으로 사설의 투박함과 선율의 쾌활함이 밀양아리랑의 특징이라며 수용과 변용론에 따라 현재 대부분 지역에서 경기소리로 밀양아리랑을 부르고 있지만, 밀양에서는 지게목발로 소리를 내면서 밀양적인 아리랑을 부르고 있어 정체성을 확립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밀양에서 부르는 아리랑은 날 좀 보소의 질러대는 선율에 가사를 붙인 것이다. 소리를 지르는 것은 긴장과 강조이며, 이는 맺힘에서 풀림으로 이끈다. 밀양아리랑이 지닌 독특한 맛이다. 여기에 지게목발소리라고도 불리는 아리당다꿍 쓰리당다꿍은 밀양 특유의 사투리로 즉흥적인 흥을 돋우고 있어 생동감을 일으키고 있다. 끊임없이 진화하는 아리랑 1900년대 초에 태어났다는 밀양아리랑은 시대에 발맞춰 진화한다. 그러면서도 한민족을 배반하지 않고 지조를 지킨 아리랑으로 불린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이 아리랑을 강압적으로 훼손해 변질된 아리랑을 만들었지만 밀양아리랑만큼은 독립군들이 그 곡조를 차용해 결연한 의지를 담은 아리랑을 부르고 다녔다. 그렇다면 21세기형 밀양아리랑은 어떻게 진화해야 할까. 김연갑 (사)한민족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는 밀양아리랑의 가치는 오늘이 아닌 내일에 있다며 밀양아리랑은 통일을 전망하고 세계화를 이끄는 노래로 계승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아울러 아리랑은 기본적으로 삶의 노래이기에 자연 상태로의 회귀와 생태 문제를 감당하는 문화에 밀양아리랑이 중추역할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아랑 처녀의 원귀설부터 독립군들의 노래까지 밀양아리랑은 수난과 환희, 격동이 엇갈린 한민족사와 함께했다. 다른 아리랑이 친일화로 변질됐을 때에도 밀양아리랑은 독립군들의 입에서 입으로 불리고 사기를 높이는 매개체가 됐다. 억울한 사연을 지닌 아랑처녀가 목 놓아 날 좀 보소를 내지를 때 나도 모르게 어깨가 들썩인다. 슬픔을 기쁨으로 표현할 때 그 애잔함은 더욱 깊은 법. 이는 한(恨)을 낙(樂)으로 승화하는 민족성을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정서가 이어져 광복군아리랑과 독립군아리랑 등이 나타난 것은 아닐까. 끝으로 밀양아리랑의 원래 가사를 한 글자씩 음미하면서 그 가치를 곱씹어 본다.

[마루대문] 석가와 만나는 양산 통도사, 해탈을 노래하는 밀양 만어사

마루대문 양산 통도사밀양 만어사 [글마루=김일녀 기자] 통도사는 모든 불자에게 마음의 고향으로 통한다. 어떤 것으로도 깰 수 없고 그러면서도 모든 것을 깰 수 있는 다이아몬드(금강석)와 같은 것이 진리이다. 불법을 통해 일체중생 에게 깨달음을 주고자 했던 부처의 사리가 모셔진 금강계단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절터의 유래 속에는 우리나라가 불교와 필연적인 땅임을 드러내려는 의도에 따라 석가의 삶이 투영돼 있다. 밀양 만어사와 함께 두 사찰에 숨겨진 인연담을 찾아가보자. 오랜 세월 넘어 석가와 통하는 통도사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아침, 서울을 출발해 경남 양산 통도사로 향했다. 서서히 밝아오는 여명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통도(通度)라 하면 법도를 통했다는 것인데 무엇을 깨달았기에 통도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궁금해졌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성경 한 구절도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불교의 핵심인 자비도, 기독교의 진리인 구원도 모두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디선가 들은 바를 토대로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번 여정을 통해 얻을 깨우침이 기대가 됐다. 이른 출발 덕분인지 예상했던 시간보다 일찍 양산 땅을 밟았다. 통도사로 가는 길, 저 멀리 펼쳐진 산맥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속세가 범접할 수 없는 웅장함이 감돌면서도 물결치듯 부드러운 능선이 겹겹이 이어져 일행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바로 통도사 뒤편으로 병풍처럼 둘러선 영축산이다. 영축산은 원래 석가모니 당시 인도 마가다국(Magadha) 왕사성의 동쪽에 있던 산 이름이다. 이 산에서 석가는 묘법연화경을 설법하여 많은 중생을 구제했는데 이 장면은 불교에서 가장 추앙받는 광경으로 꼽힌다.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율사는 이 산의 모습이 인도의 영축산과 통한다(닮았다)는 의미에서 절 이름을 통도사로 지었다. 신용철 통도사박물관 문학박사에 따르면 실제 두 산의 위쪽에 있는 바위의 생김새가 서로 비슷하다고 한다. 통도사 입구로 들어서니 소나무숲길이 시원스레 나 있다. 길 양쪽으로 늘어선 소나무의 짙은 초록빛에 청량감이 감돌았다. 숲길은 차도와 보행자도로로 나뉘어져 있어 보행자도로를 따라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묵언의 수행을 하는 듯 가벼운 말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여느 사찰에서도 볼 수 없는 불자들의 모습에 행동이 조심스러워졌다. 소나무숲길을 지나오니 반달 모양의 아담한 삼성반월교가 통도사로 들어가는 첫 문, 일주문으로 가는 길을 안내했다. 사찰 주변은 깨끗하고 아늑했다. 번잡한 마음까지 정돈되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마음을 엿보기라도 한 듯 스쳐 지나가는 한 무리의 관광객이 절이 어쩜 이리도 아늑한 지, 첫눈에 반해버렸어라며 감상을 쏟아냈다. 일주문과 천왕문을 지나 사찰 안으로 들어서니 곳곳의 불전에서 불경 외는 소리와 목탁 두드리는 소리가 경내를 가득 메웠다. 속세의 소리는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치열함마저 느껴졌다. 범종루와 삼층석탑 등을 지나 통도사의 주 건물인 대웅전에 이르기 전 마지막 문인 불이문(不二門)에 다다랐다. 불이(不二)는 둘이 아닌 경지 즉 생과 사, 만남과 이별과 같은 상대적인 모든 것들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뜻이다. 궁극적으로는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음을 상징한다고 한다. 일명 해탈문으로도 불리기 때문일까. 여기까지 이르러서도 버리지 못한 속세의 작은 번뇌조차 다 털어버리라는 주문이 들려오는 듯하다. 불경 외는 소리와 목탁 두드리는 소리가 경내를 가득 메웠다. 속세의 소리는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치열함마저 느껴졌다. 크고 작은 전각들을 지나 드디어 대웅전에 이르렀다. 닫힌 문을 조심스레 열어 보았다. 안에는 열댓 명의 불자들이 절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바라보는 곳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불상이 없었다. 어두운 대웅전을 희미하게 밝혀주는 직사각형 모양의 작은 유리창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곳을 향해 연신 절을 올렸다. 그들의 시선을 따라 까치발을 들어 빼꼼히 살펴봤다. 어스름한 가운데 시선을 사로잡는 곳이 있었다. 아! 저 거구나.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유리창 너머로 뾰족한 탑의 일부처럼 생긴 것이 보였다. 바로 석가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금강계단의 윗부분이다. 순간 내가 선 이곳에서 석가가 있는 저곳까지 오랜 세월이 넘어갔다.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이 불자들의 믿음과도 통(通)하는 순간이었다. 신용철 박사는 금강계단은 불제자가 될 사람에게 그 이전에 행했던 죄를 물로 씻는 관정의식과 또 앞으로 부처의 법을 지키며 살겠다고 다짐하는 수계의식을 행했던 장소라고 설명했다. 예수가 물가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준 것과 같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부처든 예수든 그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죄를 씻어야 했던 것이다. 그 이후에야 제자로서 지켜야 할 법도 받고, 또 그것을 지키겠다는 약속도 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는 이러한 율법정신을 담고 있는 금강계단이 통도사의 핵심이며 그렇기 때문에 통도사가 우리나라 계율종의 중심사찰이 된 것이라고 했다. 자장이 법사가 아닌 율사(계율을 정한 스님)로 불리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신 박사는 또 금강계단에서 금강은 다이아몬드를 말하는데 이는 다이아몬드의 특성처럼 어떤 것으로도 깰 수 없지만 또한 어떤 것도 깰 수 있을 만큼 단단한 부처의 진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잠깐, 대웅전 동쪽 방향에 섰다면 이제까지 지나온 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려보자. 통도사 건축에서만 느낄 수 있는 한국건축의 백미를 발견할 수 있다. 일주문부터 천왕문, 그리고 불이문과 대웅전 동쪽 방향까지 완만한 곡선으로, 마치 활이 휘어진 듯 이어져있다. 그야말로 통(通)했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순간이다. 이러한 시각적 효과 덕분에 통도사 초입인 천왕문에서도 사찰의 가장 안쪽에 자리한 대웅전의 꽃창살을 볼 수 있다. 이는 남북은 좁고 동서로는 강을 끼고 길게 이어진 절터의 지형상 특징을 그대로 살려지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구룡지 전설 본래 통도사 절터는 9마리의 용이 사는 큰 연못이 있던 곳이다. 그런데 이 용들이 곡식을 상하게 하고 백성을 괴롭게 하자 자장율사가 이들에게 설법하여 여덟 마리는 승천케 한 후 그 연못을 메워 금강계단을 쌓았다. 지금의 구룡지는 나머지 한 마리가 굳이 남아 터를 지키겠다고 하여 연못 한 귀퉁이를 남겨두어 머물도록 한 곳이라고 한다. 만어사 만어떼가 들려주는 해탈의 종소리 이어 통도사와 마찬가지로 부처와의 필연을 유래로 간직한 사찰이자 밀양의 3대 신비 중 하나인 만어사(萬魚寺)를 찾았다. 해발 670m 정도의 만어산에 위치한 만어사는 통도사의 말사이기도 하다. 만어사로 가는 비포장도로를 따라 구불구불 오르다 보면 푸른 이끼를 입은 너덜겅(돌이 많이 깔린 비탈)의 돌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어느 산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돌이 아니다. 어디서 깎였는지 모르게 대체로 둥그스름하고 자동차 크기만한 바위부터 맷돌만한 돌들까지 모두 파도가 넘실거리듯 만어사를 향해 있다. 멀리서 보면 마치 바닷속 물고기 떼와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 만어석(萬漁石)이다. 만어사 앞쪽으로 펼쳐진 만어석의 여정이 궁금해진다. 바다에서 올라온 것인지, 땅에서 솟아난 것인지 이 산중턱에는 어쩐 일이냐고 조심스레 두드려본다. 둔탁한 소리가 난다. 그렇게 옮겨 다니며 청하기를 몇 차례, 이번에는 두드린 흔적이 남아 있는 돌을 골라 두드려 본다. 순간 맑은 쇳소리가 난다. 이거다!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나도 모르게 탄성이 절로 나온다. 수억 년 전 고기떼가 들려주는 심해(深海)의 소리다. 부처의 설법을 듣기 위해 바다에서 올라온 이들이 이렇듯 종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표시가 아닐까. 저 멀리선 이보다 더욱 청아한 종소리가 들려온다. 실제 돌들 가운데 3분의 2가량은 맑은 쇳소리나 종소리, 옥소리를 낸다고 한다. 세종대왕 때 편경(돌을 깎아 만든 조각들을 매달아 두드려 소리를 내는 악기)을 만들 때도 이곳의 돌을 가져다 쓴 것으로 전해진다. 지질학적으로 이 돌들은 2억 년 이전의 고생대말 중생대 초 생성된 녹암층이라 불리는 퇴적암의 일부다. 그래서 청석(靑石)이라고도 한다. 해저에서 퇴적된 지층이 반복된 해침과 해 퇴로 풍화작용을 일으킨 후 빙하기를 몇 차례 거치는 동안 지금과 같은 암괴들을 형성해 벌 판을 이루게 됐을 것이라는 게 학자들의 추론이다. 실제 젖은 옷을 이 만어석에 널어 말리면 바닷가의 비린내가 난다고 한다. 만어사의 전설 중에는 흑룡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수로왕 때 사람을 잡아먹는 나찰녀(악귀)가 본래는 바다에 살다가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만어산에 머물면서 옥지에 살고 있는 독룡(흑룡)과 서로 왕래해 뇌우와 우박을 내려 4년 동안 오곡이 결실치 못하게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독룡이 지나간 자리는 가을 역시 궁핍한 봄이다라고 하여 다된 일을 망쳤을 때를 독룡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이에 수로왕이 부처를 청해 설법했더니 흑룡과 나찰녀가 돌로 변했고 때마침 큰 홍수가 일어 동해의 용들과 수많은 물고기가 이곳으로 올라와 돌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는 통도사 구룡지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과도 비슷하다. 그러고 보니 올해가 60년 만에 한 번 찾아온다는 임진년 용의 해, 그것도 흑룡의 해다. 이 때문에 상서로운 일들이 많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는 분위기가 곳곳에 만연하다. 그런데 만어사의 전설처럼 예전부터 내려오는 속담이나 설화를 보면 용이 꼭 숭배의 대상이나 유익한 존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임진년 새해를 전후로 사람들의 기대심리와 맞물려 흑룡 마케팅 열기가 뜨거운 가운데 일각에서는 상술에 지나지 않는다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이기도 한다. 재약산 사자평 고원에서 만난 하늘 길 밀양시 단장면에 위치한 통도사의 말사 표충사. 사찰 내로 들어서니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라는 표현이 딱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충사를 둘러싼 산세는 기골이 장대한 의병들이 병풍처럼 믿음직스럽게 서 있는 모습을 떠오르게 할 만큼 웅장했다. 이곳에 모셔진 3대 선사의 기개가 절을 감싸고 흐르는 듯 범상치 않은 기운마저 느껴졌다. 표충사란 명칭은 헌종 5년, 사명대사의 8세 법손인 천유선사가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 헌신한 사명청허기허대사 등을 기리고자 밀양시 무안면 표충사 사당에 있던 세 승려의 진영과 위패를 옮겨와 모시면서 고쳐 부르게 됐다. 사자평 고원 재약산 산마루 약 800m 지점에 있는 18만여 평의 넓은 고원에 펼쳐진 들판이다. 재약산은 수미봉(해발 1108m)과 사자봉(1198m)으로 이뤄져 있고 사자평은 두 봉우리 사이에서 완만한 타원형의 언덕들로 이어진다. 일행의 시선을 사로잡은 표충사 뒤로 펼쳐진 재약산에 오르기로 했다. 신라 흥덕왕 4년에 흥덕왕의 셋째 왕자가 병을 얻어 전국 방방곡곡의 명산과 약수를 찾아 두루 헤매다 이곳에 이르렀단다. 왕자는 영정(靈井)약수를 마시고 병이 낫게 됐는데 그 뒤로 이 산을 재약(載藥)산이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일행도 산 어딘가에 있을 영정약수를 찾아 산행에 나섰다. 겨울산행이라 하지만 이상하게도 일행 외에는 등산객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지금은 폐쇄된 산행코스를 따라 일행이 올라간 것이었다. 약수는커녕 길조차 찾지 못할 뻔했다. 길이 난 듯 나지 않은 듯 흔적만 남아 있는 산행코스에는 다행히 이 산을 올랐던 이들이 남겨놓은 이정표가 있었다. 드문드문 나뭇가지에 매인 산악회 리본이 일행의 유일한 안내자가 됐다. 두려움과 걱정으로 수많은 생각이 마음을 짓눌렀다. 그래도 지체 없이 올라야 했다. 그렇게 길을 찾아 가다 보니 어떤 일이든 처음으로 길을 만들어 가는 이의 고충이 얼마나 심했을지 생각하게 됐다. 그 길이 얼마나 외롭고 두려울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할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조금 더 올라가니 이제는 리본마저도 보이지 않는다. 가파른 산세를 헉헉거리며 오르자니 이러저러한 잡생각도 잊은 지 오래다. 오로지 빽빽한 나뭇가지와 바위틈 사이로 어렴풋하게나마 보이는 하늘만 바라보고 오를 뿐이다. 하늘이 활짝 열리기를 간절히 고대하면서 말이다. 드디어 재약산 정상으로 향하는 능선 길에 들어섰다. 오솔길처럼 길이 뚜렷하게 나 있다. 길이다! 길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이제 이 길만 따라가면 목적하는 정상에 이를 수 있다. 앞서 걸어간 이들이 만들어 놓은 이 길이 참으로 소중하게 다가왔다. 능선 양쪽으로는 푸른 하늘과 맞닿아 채색화를 그린 듯 부드럽게 이어지는 산맥이 장관이다. 이것이 영정약수가 아니겠는가. 능선을 따라 걷다보니 천황산 정상을 알리는 돌비석 앞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동남쪽으로 펼쳐진 사자평 고원은 이곳이 정상임을 잊게 할 만큼 드넓었다. 가을이면 장관을 이룰 억새 군락지가 고된 산행에 지친 일행을 반겨주었다. 사자평이라는 이름은 사자가 뛰어내리려고 잔뜩 도사린 모습과 닮았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사자봉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불법의 진의 헤아려 나라를 구한 사명대사 마지막으로 이번 탐방에서 가는 곳마다 뒷 배경처럼 따라다니는 인물이 있어 그가 태어난 곳으로 향했다. 구국의 승장 사명대사다. 사명대사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적에 약탈당했던 통도사 금강계단의 진신사리를 일본에서 찾아와 계단에 다시 모셨다. 그리고 표충사는 임진왜란 당시 3000여 명의 승병을 이끌고 호국불교 의 중심이 됐던 사명대사의 본거지다. 또 그가 승병들을 훈련시킨 곳이 사자평이기도 하다. 사명대사는 금강산에서 수도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각처에서 승의병을 모아 700여 명의 승군을 훈련시켰다. 의승도대장이 된 사명대사는 1593년 명나라군과 더불어 평양성~개성~서울을 되찾는 공을 세운다. 전쟁이 끝난 뒤인 선조 37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일본의 새로운 위정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8개월 동안 머물면서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얻었고 3000여 명의 조선인 포로를 데리고 귀국했다. 그때 대사는 일본 조정에서 천주교 신부를 처음 만나 서로 염주와 은제 십자가를 교환했다고 한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최초의 십자가다. 한가지 재미있는 점이 있는데, 스님들의 영정 대부분은 그 얼굴에 수염이 없는데 사명대사의 영정에만 덥수룩한 수염이 그려져 있다. 신용철 박사에 따르면 사명대사는 승려임에도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고자 했고 일본으로 건너가 사로잡힌 백성들을 구해오기까지 하자 이에 감동한 선조가 그에게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당시 유생들은 승려인 사명대사가 말도 타고 다니고 수염까지 기르는 모습을 보면서 못마땅해 했지만 선조는 끝까지 사명당을 지켜줬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긴 수염을 가진 사명대사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명대사는 불법에서 금하는 살생(殺生)을 문자 그대로 보지 않았다. 임진왜란 당시 그는 중생의 구제 없는 법맥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며 임금에게 승병 모집을 허락해달라는 상소문을 올려 직접 의병을 모았고 훈련을 시켰다. 즉 불법을 지식적인 차원에 가둬두지 않고 그 진의를 헤아려 몸소 행했던 것이다. 지식과 문자가 넘쳐나는 오늘날, 이를 대하는 우리도 사명대사와 같이 진의를 헤아리고자 하는 의식적 행함이 필요하지 않을까.

[마루대문] 두타의 길을 지나 무릉도원에 살리라

백두대간학교 최창남 교장 인터뷰 산, 하늘의 지혜를 배우는 학교 [글마루=이지수 기자] 백두대간 하늘 길에 서다 등 다수 책을 집필한 백두대간학교 최창남 교장은 단순히 산에 오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진정으로 산을 느끼며 산으로부터 지혜를 얻는 습관을 갖는 것. 백두대간학교를 세운 것도 산행을 위한 산행이 아닌 산에 오르며 마음을 닦는다는 취지에서였죠. 우리에게 산은 곧 학교예요. 산이 학교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 마음을 수양하고 하늘의 지혜, 그리고 자연과의 조화를 배우기 때문이라고 한다.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한반도에서 가장 크고 긴 산줄기. 이를 우리는 백두대간이라 한다. ▲ 백두대간학교 최창남 교장 ⓒ천지일보(뉴스천지) 최창남 교장은 이곳을 여러 번 종주했다. 우리나라 산은 이름마다 의미가 있어요. 백두대간의 시작점인 백두산은 지혜의 머리가 되는 산이라는 뜻이며 백두대간 남쪽 끝의 지리산은 머물면 사람 사는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지혜와는 다른 지혜를 얻게 되는 산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죠. 그가 백두대간학교를 만들고 많은 사람과 종주하게 된 이유가 궁금해졌다.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과 다르고 행동이 다르면 쉽게 서로 비판하는 것 같아요. 산을 보면 그렇지 않거든요. 나무는 다 다르잖아요. 다른 나무들이 공존하며 각자의 삶을 살아가지만 숲을 이루고 결론은 서로를 살리죠. 또 새가 와서 노래도 부르니 사람들은 새소리를 들으러 산을 찾고요. 옛사람들은 자식을 점지받기 위해 산에 들어가 기도를 하고 먹을 것과 연료를 얻기 위해 산을 찾았다. 이러한 이유로 최 교장은 산을 가리켜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생명줄기라고 말한다. 수행 길을 지나 극락세계로 백두대간 산꾼들 사이에서 감춰진 진주로 회자되는 산이 있으니 바로 두타산과 청옥산이다. 두타산은 동해시와 삼척시 경계에 있으며 삼화동에서 서남쪽으로 약 10.2km 떨어져 있다. 태백준령의 주봉을 이루고 있으며 북쪽으로 무릉계곡, 동쪽으로 고천계곡, 남쪽으로 태백산군, 서쪽으로는 중봉산 12당골을 품고 있다. 4km 떨어져 있는 청옥산까지 포함한 이곳을 두타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최 교장은 두타산과 청옥산에도 우리 민족의 신앙심이 담겨 있다고 했다. 그는 불교에서 쓰이는 용어 두타가 세속의 모든 번뇌를 버리고 불도의 가르침을 따라 마음과 몸을 닦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예로부터 두타산은 삼척시의 영적 뿌리가 됐기 때문에 가뭄이 심하면 이 산에서 기우제를 지냈어요. 신앙의 대상인 영산이 된 것이지요. 청옥산은 동해시 삼화동과 삼척시 하장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청옥이 발견됐다고 해서 청옥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청옥은 불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보석이다. 청옥은 아미타경에 나오는 극락을 상징하는 일곱 가지 보석 중 하나예요. 일곱 가지 보석은 금 은 수정 적진주 마노 호박 그리고 청옥이에요. 그는 청옥산은 곧 이 땅에 있는 극락을 상징하며 이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바로 두타산이라고 했다. 곧 두타산을 지나 마음과 몸을 닦은 수행자들이 들어가는 산이 바로 극락의 세계인 청옥산이라는 것. 다시 말해 두타산을 지나 청옥산으로 들어가는 것은 수행을 통해 극락에 이른다는 의미다. 왜 두타와 청옥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옛 사람들은 수행의 삶을 살아야 극락세계에 이른다고 믿었고 그 믿음을 산의 이름으로 형상화했죠. 최 교장은 그 명칭과 같이 두타는 울툭불툭하나 날렵한 골산(骨山)이고 청옥은 완만하여 듬직한 육산(肉山)이라고 말했다. 수행자가 가는 고행의 길이 완만할 리 없고 극락 세상을 상징하는 산이 울툭불툭할 리 없죠. 두타는 두타답고 청옥은 청옥다운 모양을 하고 있어요. 최 교장은 두타의 길은 청옥이 있으므로 완성되고 청옥의 문은 두타의 길로 말미암아 열린다고 했다. 신선이 노니는 별유천지무릉도원 최 교장은 두타산과 청옥산도 절경이지만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바로 무릉계곡이라고 했다. 무릉계곡은 조선 선조 때 삼척 부사 김효원이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지며 신선이 노닐었다는 전설에 따라 무릉도원이라 불리기도 한다. 두타산과 청옥산을 배경으로 하는 이 계곡은 기암괴석과 무릉반석, 푸른 못 등으로 유명하다. 고려 시대에는 이승휴가 머물며 제왕운기를 집필한 곳으로 알려졌고 이곳을 찾았던 수많은 사람은 5000평 되는 무릉반석에 자신의 이름이나 시(詩)를 새겨 넣었다. 두타산과 청옥산은 궁예시대부터 새 세상을 그리워하던 이들이 몸을 숨긴 채 때를 기다렸던 곳으로 전해진다. 무릉계곡은 두타산과 청옥산이 가진 아름다움을 모두 쏟아 부어 천국인 무릉도원을 이 땅에 만들어 놓은 것이죠. 수행의 삶이 바로 그런 것 아닐까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어 극락세계를 만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도를 닦는 수행자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곧 신선이 노니는 별유천지(別有天地, 속계를 떠난 특별(特別)한 경지에 있다는 뜻으로 별세계(別世界)를 말함) 무릉도원에 이르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이 수행이라는 것이다. 두타는 불교용어로 벗다 씻다 닦다는 뜻을 지녔다고 한다. 두타산과 청옥산은 그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철저히 씻고 부수는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어 정화되고 깨끗해져야만 이 땅의 무릉도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마루대문] 두타산을 향해 발걸음을 하다-②

▲ 두타산의 하늘문(사진=최성애 기자) ⓒ천지일보(뉴스천지) 우리네 뿌리를 찾다 [글마루=김지윤 기자] 재야학자들 사이에서 겨우 명맥을 잇고 있는 상고사가 두타산에서 그 뿌리를 내렸다. 정확히 두타산성 동쪽 쉰움산(688m)에 있는 천은사(天恩寺)다. 하늘의 은혜가 내리는 곳에서 동안거사(動安居士) 이승휴(1224~1300)는 고려가 단군의 적통이자 정통이라는 것을 정립했다. 천손 단군을 천은사에서 조명했다는 점은 눈여겨볼만하다. 이승휴는 당시 원나라의 간섭하에 있었던 고려를 보며 민족과 국가, 문화가 역사 저편으로 사라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제대로 된 우리 역사를 제왕운기(帝王韻紀)로 엮었다. 단군조선이 고려의 뿌리요, 더 나아가 고려 민족이 천손임을 강조했다. 역사서는 단군조선에서 시작해 기자조선, 삼한, 삼국, 통일신라발해에서 고려가 비롯됐고 그 정통성을 잇고 있음을 주지시켰다. 특히 발해사를 우리나라 역사서 중 최초로 민족사에 넣어 북방 고토에 대한 회복을 강조했다. 이승휴와 두타산, 이 둘은 절묘한 관계에 있다. 이승휴가 조정에 출사한 때는 불혹을 넘긴 41세였다. 그는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으며 올곧은 선비였다. 당시 조정의 비리에 맞서 왕에게 신랄한 상소를 올리고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실력가였던 그는 이후 몇 번이나 조정에 불려나가지만 지나칠 만큼 올곧은 업무처리와 직설적인 상소로 결국 파면당해 천은사에 거하게 됐다. 조정에 있을 때도 그는 민족의 자긍심을 생각했다. 다음 예화를 보자. 원나라의 두 번째 사행에서 이승휴는 왕 원종의 부음 소식을 접했다. 이때 그는 원나라에 있던 세자가 고려식 상복을 입고 상을 치를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이는 고려의 주체성을 확립시킨 중요한 일이었다. 또한 고려왕실이 독자적인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배경이 됐다. 이승휴는 민족을 위해 홀로 험한 길을 걸었다. 아무도 관심을 쏟지 않는 상고사를 정립하기 위해 두타산에 들어앉았다. 겨울 두타산의 경치를 보며 그는 어떠한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마음을 산경에 대입하지는 않았을까. 험한 두타 넘으니 극락 청옥에 다다르네 두타산과 이웃한 청옥산은 산세가 비교적 부드럽다. 두타산이 고행이었다면 청옥산은 극락이다. 청옥이라는 이름은 나물 청옥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불경 아미타경에 나오는 극락을 상징하는 일곱 보석 중 하나도 청옥인지라 산은 고행의 길(두타산) 끝의 극락, 피안의 세계로 불린다. 그래서 산행하는 이들은 고행을 상징하는 험한 두타산을 넘어야만 완만한 청옥산, 곧 극락에 다다른다고 한다. 태백산령을 타고 나온 두 산이지만 박달령을 두고 서로 다른 모습이다. 조금 더 살피면 암릉과 절벽으로 이뤄진 두타산을 골(骨), 능선으로 비교적 완만한 청옥산을 육(肉)으로 본다. 하지만 청옥산이 완만하다고 하지만 해발고도 1403m로 두타산보다 50m가량 높고 눈이 쌓여 있는 터라 산행이 녹록하지만은 않다. 청옥산 능선을 따라 내려오는 길은 편안하다. 가족이 기다리고 있을 따뜻한 집을 향한 발걸음은 가볍다. 올라갈 때 자연이 주는 신비로움의 설렘과 다르다. 안식의 설렘이다. 산자락에 청옥과 두타가 만나는 계곡이 있다.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무릉도원이 딱 이곳일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무릉계곡과 반석은 극락의 극치다. 두타산을 오를 때에도 봤지만 산행이 끝난 후에야 무릉세계의 참맛을 맛본다. 무릉계곡과 반석 뒤로 두타산과 청옥산의 설경이 함께 어우러져 장관이다. 고행과 극락이 하나이듯 두타와 청옥 역시 하나라는 게 단번 느껴진다. 산은 우리네 인생과 닮았다 골짜기, 능선, 비탈길 등이 있어야 산의 구조가 갖춰진다. 좋든지 싫든지 사람은 홀로 살지 못하고 서로 유기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 산 역시 흙, 물, 돌, 각종 동식물이 있기에 비로소 산다운 산이 된다. 산행은 인생을 살아가는 것과 같다. 인생에 희로애락이 있듯 산 굽이굽이마다 풍경이 각각 다르다. 비탈길을 오를 때는 힘들지만 천혜의 경치를 보면 즐겁다. 각각의 사연과 우여곡절이 이어져 한 사람의 이야기가 완성되듯 산행 역시 이야기이며, 한 편의 드라마다. 여기엔 앞서간 산행인의 발자국을 뒤따르는 이들처럼 역사를 만드는 우리가 있다. 극도로 즐겁거나 또는 평안한 상태는 어느 날 갑자기 오지 않는다. 고통과 인내의 과정을 겪어야 달고 단 열매를 맺는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이때 노력은 새것을 받아들이기 위한 연구도 있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그 목표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때의 과정은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목적을 이뤘을 때의 그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렇게 산에서 삶을 보았다.

[마루대문] 두타산을 향해 발걸음을 하다-①

[글마루=김지윤 기자] 산이 아름다운 이유는 능선과 골짜기, 그리고 정상이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자연이 주는 선물을 온전히 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 직접 산을 탔을 때 비로소 산경의 가치를 알 수 있다. 2012년을 앞두고 강원도 동해시 두타산을 찾은 이들은 감탄한다. 고행의 길이라는 이름의 뜻과 달리 설산(雪山)은 아름다울 뿐이다. 하지만 산마루로 걸음을 향하면서 가파른 산세와 산속에서 바라본 경치로 두타의 의미를 되뇐다. 거창하지만 불가(佛家)식대로 뜻을 풀이하면 세속의 번뇌를 버리고 고행의 길을 걷는 것이다. 암릉과 신선이 머무를 법한 암반계곡으로 이뤄진 두타산은 절경으로 꼽힌다. 산자락에서 바라보는 경치도 멋있지만 중턱과 마루에서 바라보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가파른 산세로 오르기엔 힘들지만 태백준령에서 전해오는 정기와 산에서밖에 볼 수 없는 진풍경, 그리고 한 편의 대서사극이 조화를 이뤄 산행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특히 무릉계곡, 무릉반석, 삼화사, 하늘문, 두타산성, 박달령계곡, 청옥산 등 뛰어난 문화유적지와 자연경관지에서 오 래 머무르는 이들이 많다. 차가운 기운이 옷깃으로 스며든다. 무릉계곡에 다다랐을 때 써늘한 공기가 머릿속까지 들어온다. 코가 시큰거릴 정도다. 하지만 산을 오르며 맛보는 찬 공기는 그 어느 때보다 상쾌하다. 경관은 어떠한가. 자연이 만든 기암괴석은 거북이, 장군 등 다양한 모습으로 매력을 뽐내 웃음을 자아낸다. 걷느라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걸음을 잠시 멈추자. 그리고 경관을 보며 산의 정기와 해학을 감상한 후 떠나는 것은 어떨까. 그렇게 걷다 보면 두타산이 희로애락을 담은 인생과 닮았음을 체감하게 된다. 눈이 내린 다음 날 아침, 두타산에는 발목 위로 올라올 만큼 눈이 쌓였다. 산행 초입, 눈으로 덮여 길이 보이지 않고 인적도 드물다. 삼화사에서 등산로가 두 갈래로 나뉘는데 학소대로 가는 왼쪽 길과 관음암으로 가는 오른쪽 길이다. 하늘문을 통과하기 위해 오른쪽 관음암 길을 택했다. 이 길은 학소대보다 덜 알려졌다. 관음암까지는 철계단을 의존해야 하는 구간도 있지만 길이 그리 험하지 않다. 관음암을 지나 하늘문에 이르는 길이 힘들다. 이 길을 걷는 이는 마치 작은 극락에 도달하기 위해 고행하는 어느 수행자의 모습과 같다. 깎아지른 벼랑 아래로 펼쳐진 반석에 서면 몸가짐이 조심스러워진다. 좁고 험한 길을 따라 다다른 하늘문. 이름만 들으면 정상과 가까울 듯하지만 두타산 정상의 1/4 지점이다. 이곳 정상은 신선바위와 함께 풍광이 가장 좋은 전망대다. 건너편에 마주 보이는 봉우리는 두타산 정상과 청옥산이다. 그 아래로 펼쳐진 300여 개의 경사진 계단이 보인다. 장정들도 다리가 후들거리는 계단이다. 90도 가까이 되는 급경사이다 보니 안내판엔 노약자나 어린이는 통행 시 안전에 유의해달라는 주의 문구가 있다. 철제 난간을 잡고 층계를 내려가면 피마름골이 나온다. 명칭은 피나무가 많아서 피마름골이라고도 하고 임진왜란 때 목숨을 잃은 이들의 피가 흘러 붙여졌다고도 전해진다. 하늘문을 밑에서 올려다보면 숙연해진다.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위해 희생한 이들의 넋이 이 문을 통과해 저 피안의 세계로 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임진왜란의 흔적은 두타산성에서도 찾을 수 있다. 신라 102년에 축조된 산성은 지금은 남아 있는 터로 그 길이를 짐작할 뿐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과 피란민들이 모여 이 지방으로 쳐들어온 왜군 5천여 명을 물리쳤다. 이때 피해자도 약 2천 명이라고 하니 7천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의 피가 두타산에서 흘러내렸다. 그리고 두타산성의 비극은 1950년에 발발한 6.25전쟁으로 다시 나타났다. 이 일대에서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그래서일까. 김지하 시인은 무릉계곡에서 귀신의 울음소리를 들어 도망치듯 골짜기에서 떠났다고 한다. 그리고 무릉계곡에서 두타산을 검은산으로 표현했다. 우리네의 아픈 역사를 나타낸 셈이다. 두타산은 선조들의 희생을 수백 년이 지나도 고스란히 안고 있다. 산성을 지나 정상을 오르는 길이 좁고 험하다. 하늘문을 통과하면 편한 길이 나올 것이라는 생각은 일찍이 접는 게 좋다. 어느 곳을 보더라도 쉬운 길은 없다. 청옥산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두타산에서 편안한 길을 찾는 게 어렵다. 두타산성에서 햇대등을 지나 도착한 두타산 정상. 하늘과 맞닿은 산마루 설경은 머리가 시릴 만큼 상쾌하다. 차디찬 바람이 피부에 달라붙는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 고행의 길을 걸었다. 산을 오를 당시는 몰랐으나 정상에 다다르니 산의 이름이 왜 두타인지 그제야 깨닫는다. 겨울 두타산행은 오로지 나와 산의 관계에 집중하게 된다. 한계가 찾아왔을 때 정상에 도달할지, 가는 걸음을 멈추고 하산할지가 가장 큰 관건이다. 그러면서 오르는 이는 자신을 생각한다. 그리곤 깨닫는다. 산을 오를 때의 모습과 평상시 제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불가(佛家)에서는 고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때 비로소 극락에 다다른다고 한다. 다시 말해 고행은 현재의 세계에서 더 나은 세계에 나아가고자 할 때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