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탐방] 윤선도 보길도 탐방…“하늘이 나를 기다려 보길도에 멈추게 했다”

상(인조)이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三拜九叩頭)를 행했다. 1636년 인조 14년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다. 오랑캐가 쳐들어오고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는 소식을 해남에서 들은 윤선도는 노복과 가솔을 이끌고 왕을 구하러 나섰다. 그러다 1637년 1월 30일 도중에 왕자가 있던 강화도가 함락되고 왕은 삼전도에서 오랑캐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는 참담한 소식을 듣는다. 소식을 접한 윤선도가 다시는 이 땅을 밟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제주도(탐라)를 향해 뱃길을 돌렸다 머문 곳이 보길도다. 하늘이 나를 기다려 이곳에 멈추게 했다고 할 만큼 윤선도는 보길도와의 인연을 각별하게 여겼다. 전남 완도에서 남서쪽으로 18.3㎞ 떨어진 보길도는 땅끝 해남에서 30분 정도 배를 타고 노화도로 들어가 다리를 건너면 닿는다. 취재진이 그곳에 당도한 날도 삼전도 굴욕이 있던 때와 같은 1월말이었다. 윤선도가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을 고해라도 하듯 그날 보길도의 바람은 매서웠고 추운 날씨는 변덕스럽기까지 했다. ◆외로운 산, 고산을 자호로 삼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는 조선시대 중‧후기의 문신이자, 효종‧현종의 사부, 시조작가다. 그의 시조는 정철의 가사와 더불어 조선시대 시가의 쌍벽으로 평가된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어부의 생활을 노래한 어부사시사와 물, 돌, 소나무, 대나무, 달을 다섯 벗으로 비유하여 지은 오우가가 유명하다. 강직했던 삶과 달리 그의 작품들은 지극히 서정적이고 리드미컬하다. 윤선도는 사대부의 주류 문화였던 한시(漢詩)에 비해 홀대당하고 있던 시조에 우리말의 감성과 서정성의 숨결을 불어넣어 미학(美學)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윤선도는 1587년(선조 20년) 지금의 종로구 연지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해남,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이다. 그의 집안은 대표적인 동인 가계였으며, 그 중 윤선도는 동인 내에서 다시 갈라졌던 북인과 남인 중 남인을 대표하는 문신이었다. 그러다보니 서인으로 있던 송시열(宋時烈, 1607~1689)과는 각종 현안에 대해 사사건건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윤선도가 한양과 멀리 떨어진 땅끝 마을 해남과 관계를 맺은 시기는 나이 8세 때다. 1594년(선조 27년) 백부(伯父)인 관찰공(觀察公) 윤유기의 양자로 들어가 해남 윤씨 대종가(大宗家)의 대를 잇는 종손(宗孫)이 되면서부터였다. 실제 관계로는 작은 아버지였지만 족보상으로는 큰 아버지였던 윤유기에게 양자로 들어가면서 윤선도는 호남 제일의 명문가이자 대부호였던 해남 윤씨의 대종손(大宗孫)이 됐다. 고산이라는 윤선도의 호는 별장이 있던 양주에서 비롯됐다. 한강 주변에 위치한 양주에홍수가 나 강이 범람하면 사면이 물에 잠기곤 했는데 유독 퇴매재산만 우뚝 솟아 남았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물바다에 외로운 섬처럼 솟아 있는 이 산을 가리켜 고산(孤山)이라고 했는데, 윤선도는 이 고산이 세상의 비난과 비방에 맞서 홀로 선 자신의 고고한 기상은 물론 외롭고 고독했던 자신의 인생과 닮았다고 해서 자호(自號)로 삼았다. ◆강직한 삶이 부른 잦은 유배 윤선도는 1612년(광해 4년)에 진사과에 합격한 뒤 성균관 유생이 됐다. 성품이 강직하고 시비를 가림에 타협이 없어 자주 유배를 당했다. 30세(1616, 광해 8년)에 이이첨과 박승종유희분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경원기장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1623년(광해 15년) 인조반정 후 석방돼 의금부도사에 취임했으나, 곧 사직하고 향리에서 학문에 정진했다. 1628년(인조 6년) 별시 문과 초시에 장원급제한 후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가 되고 한양서윤과 예조정랑을 역임하는 등 수 차례에 걸쳐 나라에 중용됐다. 1638년 병자호란 때 인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죄로 영덕으로 유배당해 이듬해 풀려나기도 했다. 병자호란 후에는 주로 완도의 보길도와 해남의 수정동 및 금쇄동에 은거하며 원림을 경영했다. 1659년 효종의 죽음 이후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냐를 두고 복제 논쟁이 빚어졌다. 논쟁은 효종이 적통이냐 아니냐라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허목과 송시열의 논쟁에 효종의 사부였던 74세의 윤선도가 기름을 부었다. 윤선도는 복제논쟁과는 별도로 송시열을 공격했다. 윤선도의 과격한 상소로 인해 남인은 제1차 예송논쟁에서 패하고 자신은 1660년(현종 1년) 4월 함경도 삼수(三水)로 유배됐다. 1665년 광양으로 이배된 후 81세가 되던 1667년(현종 8년)에야 석방된 뒤 보길도에 은거하다가 85세인 1671년(현종 12년) 낙서재에서 세상을 마쳤다. ◆부용동세연정낙서재판석보 윤선도의 보길도 유적은 부용동(芙蓉洞) 일대에 있다. 이를 뭉뚱그려 부용동 유적, 혹은 윤선도 원림(명승 34호)이라 부른다. 윤선도는 1637년(인조 13년)부터 1671년 사망할 때까지 일곱 번이나 이곳에 드나들며 글을 쓰며 생활했다. 햇수로는 13년간 오가며 어부사시사 등 시가를 창작했다. 보길도 부용동원림은 담양의 소쇄원, 양양의 서석지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정원으로 꼽히는 세연정을 비롯해 살림집인 낙서재, 아들 학관이 휴식을 위해 지었다는 곡수당, 바위산 중턱의 단칸 정자 동천석실 등이 있다. 부용(芙蓉)은 연꽃이다. 격자봉 등 사방을 둘러친 산자락들이 내려와 맺힌 자리다. 윤선도는 이곳을 선계(仙界) 곧 신선의 세계라 이르고 말년의 은둔지로 삼았다. 부용동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명소는 부용동 유적 가운데 최고로 꼽히는 세연정으로 정원과 정자가 있다. 세연(洗然)은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해 기분이 상쾌해지는 곳이라는 뜻이다. 계류를 돌둑(판석보)으로 막아 연못(세연지)을 조성하고, 그 물을 끌어들여 사각형의 인공 연못(회수담)을 만든 뒤, 두 연못 사이에 세연정을 세웠다. 세연정의 문은 모두 위로 들어올릴 수 있는 구조다. 그 덕에 바람과 풍경, 사람과 시간이 정자 문지방을 무시로 넘나든다. 그야말로 자연을 벗삼은 정자다. 세연정에서 물길을 건너면 돌로 단을 쌓은 동대와 서대가 있다. 정원의 중심인 세연정에서 바라보기 가장 좋은 곳에 만든 무대다. 정원 안에 음악과 더불어 무희들이 춤을 추는 무대를 조성한 이 공간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아주 독특한 공간이다. 회수담의 물은 서대와 동대 뒤의 작은 개울을 거쳐 하류로 흘러간다. 이 낮은 개울가에는 토성처럼 둑을 쌓고 대나무와 상록수를 심어 숲을 이루었다. 담이 아닌 숲과 언덕이 그대로 울타리가 됐다. 동대를 돌아가면 개울을 막은 판석보(板石洑)로 이어진다. 우리나라 정원에서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유일한 석조보로 굴뚝다리라 불리며, 세연지의 저수를 위해 만들었다. 건기에는 돌다리가 되고, 폭우가 내리면 폭포가 되도록 고안한 판석보는 윤선도의 건축적 재능과 심미안의 산물이다. 판석보를 건너 산자락을 거슬러 오르면 옥소암이 나온다. 세연정 전경을 담을 수 있는 곳이다. 세연정에서 도로를 따라 좀 더 위로 거슬러 오르면 낙서재, 곡수당 등의 고풍스러운 건물과 만난다. 낙서재는 윤선도가 세상을 뜰 때까지 생활했던 곳이다. 낙서재란 학문이나 글을 하는 것이 가장 즐겁다는 뜻이다. 낙서재 내에는 조상의 위폐를 모신 무민당, 동서쪽의 휴식공간인 동와, 서와, 병풍처럼 아름다운 바위라는 소은병이 있다. 낙서재 맞은 편 절벽 바위 위에 동천석실이라는 초막이 있다. 하늘로 통하는 곳에서 마치 땅을 내려 본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이곳에서 윤선도는 독서를 즐겼다. 낙서재 앞에 있는 거북 모양의 바위는 고산유고 귀암 시편에 나오는 4령(봉황, 기린, 용, 거북) 가운데 하나로, 고산은 이 바위에 올라 달맞이를 즐겼다고 한다. ◆송시열의 흔적, 글씐바위 보길도는 난대림이 우거진 남도의 섬이다. 섬 곳곳의 난대림과 가장 잘 어우러진 풍경을 보여주는 곳이 예송리해변이다. 윤선도는 이곳에서 뜨는 해와 함께 배 띄우고 지는 해와 함께 희망을 채워 돌아오는 어부들을 보며 영감을 얻어 주옥같은 시조를 지었을 것이다. 보길도 백도마을 바닷가엔 송시열 글씐바위가 있다. 희빈 장씨가 왕자(경종)를 출생하자 숙종은 서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듬해 원자로 책봉했다. 우암은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제주도 귀양길에 오른다. 가던 중 풍랑을 만나 이 섬에 며칠간 머물면서 임금에 대한 서운함과 그리움을 시로 적어 바위에 새긴 것이다. 이 바위에 씌어진 시문은 우암 송시열이 사망하던 해(숙종 15년, 1689)에 지었다. 윤선도의 정적이었던 송시열이 귀양길에 보길도에 들러 자신의 흔적을 남긴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윤선도는 풍수학에서도 신안(神眼)이라고 평가받을 만큼 높은 안목을 지녔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난세에 운명처럼 만난 보길도. 그는 난대림이 우거진 사뭇 다른 느낌의 남쪽 섬에서 성리학적 이상세계, 무릉도원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취재진 역시 시베리아급 맹추위가 떨친 날 찾았음에도 보길도에서 꿈틀거리는 봄기운을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역사탐방] 인류 최고문화유산 ‘직지’ 탄생의 성지는 괴산 성불산 아닌가

직지 편찬 고려 법운화상 발자취 따라 [글 이재준 (대기자, 전 충북도문화재 위원) 사진 박준성]무심(無心)은 반야(般若)의 진리라고 했다. 이 세상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사람의 마음마저 형체가 없다는 것이다. 많은 불자들이 암송하는 반야바라밀다심경은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섭리를 담고 있다. 보이고, 느끼고, 맛보는 모두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공(空)이라고 정의한다. 흰 구름은 하늘에 떠 있다 홀연히 사라진다. 사람의 운명도 흡사 구름 같은 것인가. 지금으로부터 640여 년 전 고려 말의 큰 스님 백운화상(白雲和尙)은 평생 무(無)의 진리에 침잠, 선문을 오가다 흰 구름처럼 가신 고승이다. 그래서 백운이란 호를 얻었다. 스님은 경한(景閑)이란 법명으로 불리었으나 무심스님이란 별명이 더 어울릴 듯하다. 스님이 지은 무심가를 들어 보자. 깨끗한 뜬구름은 허공에 일었다 사라지고 잔잔히 흐르는 물은 동쪽의 큰 바다 한복판으로 흐른다. 물은 굽은 곳이나 곧은 곳을 흘러도 너도 없고 나도 없으며 구름은 스스로 뭉치고 스스로 흩어져도 친함도 소원함도 없네. 만물은 본래부터 고요하여 나는 푸르거나 누렇다고 말하지 않네 사람들이 스스로 시끄럽게 좋으니 나쁘니 하는 마음을 내는구나. 경계에 부딪혀도 마음이 구름이나 물 같으면 세상에 살더라도 무슨 거리낌이 있으랴 사람마음에 억지로 이름 짓지 않으면 좋고 나쁨이 무얼 좇아 일어나리오. 어리석은 사람은 경계를 버리되 마음은 비우지 않고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을 비우되 경계는 버리지 않네. 마음을 비우면 경계는 저절로 고요해지고 경계가 고요해지면 마음은 저절로 여여(如如)해지리니 이것을 무심진종이라 하느니라. 스님은 만년에 성불사(成佛寺)에 정처하며 팔만대장경의 경구가 될 만한 아름다운 가르침과 수많은 고승들의 언행을 모은 불서를 엮었다. 이름 하여 직지심체요절.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란 글을 줄여 직지라 한다. 참선을 통하여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보면, 마음의 본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를 어찌하랴. 스님이 성불한 성불사는 지금 정확히 확인된 곳이 없다. 스님의 시호 백운처럼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성불사는 어디로 간 것인가. 스님은 성불사에서 직지를 편찬하고 경기도 여주 취암사로 거처를 옮긴다. 스님이 왜 취암사로 간 것일까. 방랑의 벽인가 그 무엇을 찾으려 한 것인가. 스님은 취암사에 의탁한 지 2년 후 홀연히 입적하신다. 스님이 마지막 향화를 올렸다는 취암사도 지금은 흔적이 없다. 허허로운 절터에는 이름 없는 잡초만 가득 자라 있다. 인류 최고의 정신 유산이며 혼탁한 이 세상을 구할 값진 유물로 평가되는 직지. 이 불서가 유명해진 것은 세계에서 최초로 금속활자로 찍었다는 데 있다. 현존하는 금속인쇄물 중 가장 오래 된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독일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금속활자보다 78년이나 앞선 것이다. 금속활자로 직지를 찍은 곳은 청주 무심천변인 고려시대 절 흥덕사(興德寺)다. 스님이 입적하신 2년 후 제자들은 비구니 묘덕스님의 출재로 직지를 찍어낸다. 왜 묘덕스님이 스폰서가 된 것일까. 묘덕의 정체는 누구이며 하필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된 것인가. 무심천은 옛 신라 서원경의 고지 청주의 젖줄로서 주변에는 많은 불교유적이 있다. 사직동에 남아있는 용화사, 그리고 운천동 일대와 흥덕사 유적은 그 대표적이다. 흥덕사는 청주읍성에서 조금은 떨어진 외곽지대에 자리 잡았다. 그래서 직지 간행기에도 청주목외(淸州牧 外) 흥덕사 운운이라는 표현이 나온 것이다. 묘덕은 당시 흥덕사의 주지로 상정된다. 그녀는 왜 많은 사재를 투입하여 백운스님의 저서를 정성스럽게 출판한 것인가. 몇 년 전 청주에서 공연된 직지 오페라는 스님과 묘덕을 이룰 수 없는 연인으로 그린 바 있다. 과연 두 사람이 연인이었을까. 이를 정확히 답변해줄 증거는 없다. 다만 그럴 것이라고 유추한 픽션에 불과하다. 이 픽션은 오페라로 공연됐으나 직지라는 성보를 탄생시킨 뜻을 폄하했다고 하여 문제가 되기도했다. 일부 학자들이 묘덕을 고려 후기 정안군(靖安君?.고려왕실)과 관련 지어 생각하고 있으나 정확하지가 않다. 괴산 성불산 성불사터를 가다 성불산은 충청북도 괴산군의 감물면 오성리와 괴산읍 기곡리 사이에 위치하는 고도 530m의 산이다. 산의 서쪽으로는 속리산에서 발원하여 청천을 휘감아 내려온 달천(達川)이 흐르고 있다. 달천은 달래강이라 하며 바로 한강으로 통하는 물길이다. ▲ 18세기 제작된 비변사인방안지도(괴산)의 성불산 표기 괴산에 있는 명산 35곳 중의 하나인 성불산은 이 산에 부처를 닮은 바위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성불사(成佛寺)터는 이 산의 정상 가까운 곳에 남아 있다. 18세기에 제작된 비변사인방안지도 성불산이란 표기가 보인다. 1911년 조선총독부가 경기도 광명시의 전신인 시흥군의 인문 정보를 포함한 전국의 지명(地名)과 지지(地誌) 사항을 작성한 자료 조선지지자료에서도 같은 지명으로 표기하고 있다. 임진전쟁 이전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 불우(佛宇) 조에는 성불산이 다른 이름으로도 불렸음이 나타난다. 의상암은 원성산에, 성불사는 송명산(松明山)에 있는데 송명산은 군동쪽 12리에 있다. 보광산(普光山) 군남쪽 26리에 있다. 산꼭대기에 작은 우물이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과거 괴산군 동헌에서 동쪽으로 12리면 바로 지금의 성불산을 지칭하는 거리다. 성불산은 본래 송명산으로도 불리던 것이 고찰(古刹) 성불사의 유명세에 힘입어 성불산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이 후에 여러 기록으로 성불산으로 나타난 것이다. 성불사터는 성불산 정상 가까운 지점에 자리 잡았다. 고려시대 후기 사암은 비교적 높은 산에 자리 잡는 것이 상례인데 성불사도 이런 유행을 따랐던 것 같다. 절터를 가려면 괴강 제월대를 지나 이탄(梨灘)에서 오르는 길이 완만하다. 약 30여 년 전에 지은 성불사(주지.淸潭)를 지나 계곡으로 오르니 옛 길이 나타난다. 수백 년간 이 길을 스님들은 오르고 내리고 했을 게다. 한 시간 남짓 산길을 오르니 제법 평평한 대지가 나타난다. 잡초로 뒤덮였지만 옛 건물이 자리 잡은 것을 상정해 보면 그리 작은 규모는 아니다. 절터를 안내한 괴산군청 문화관광과 양희근 담당관은 이곳이 성불사지라고 알려준다. 그는 지난 8월 말에도 절터를 확인하기 위해 답사했다고 한다. ▲ 성불사지터에 세워져 있는 선돌 민간신앙이 행해졌을 것으로 추정ⓒ천지일보(뉴스천지) ▲ 성불산 성불사지터에서 출토된 고려시대 후기~조선시대 초기 것으로 추정되는 와편ⓒ천지일보(뉴스천지) 건물지는 서북망(西北望)한 층단(層段)의 대지 위에 확인된다. 그 중 중앙의 제일 넓은 대지에 법당을 짓고 그 주변으로 여러 채의 요사채를 조성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산신당지로 보이는 대지에는 오래된 선돌 두 기가 자리 잡는다. 흡사 미륵 부처를 생각게 하는데 민간신앙의 경배대상이었던 것 같다. 건물지 아래에서 여러 점의 고와편(古瓦片)이 수습되고 있으며 그 와편은 고려말~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와편을 미루어 보아 근세까지 향화가 올려 진 것으로 추정된다. 사찰에서 내려다보니 북서쪽 괴강 일대의 가을 들녘과 한참 조성 중인 산업단지 공사현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전문기관에서 발굴을 한다면 성불사의 가람배치와 역사를 규명할 수 있을 게다. 성불사지는 과연 어떤 역사적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줄까. 직지가 태어난 성불산 성불사의 위치 착오 고려 말 직지가 엮어진 성적(聖跡) 성불사에 대해서는 충북 괴산, 경북 영천과 대구, 황해도 황주와 해주, 평산, 함북 길주 등이 문헌에 나와 그 위치를 두고 분분하다. 그동안 황해도 황주군 주남면에 있는 정방산(해발 480m, 전 이름은 성불산으로 불렸다 함)에 위치한 성불사가 바로 백운화상이 직지를 편집한 곳이라는 설이 유력했다. 한 연구가는 목판본 직지와 백운화상어록의 서문을 함께 작성한 목은 이색(李穡)의 시집인 목은시고 중 용두의 대선(大選)이 황주에 가서 새로 절을 얻었다고 말하다라는 시에서 성불산 안에는 옛 절들이 많기도 한데라고 읊은 대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들고 있다. 황해북도 사리원시 성광리 정방산에 있는 성불사는 898년(신라 효공왕 2)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도선은 정방산(正方山)이 진호(鎭護)의 땅이어서 이곳에 성불사라는 절을 짓고 승려들의 거처로 삼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의 사찰령(寺刹令) 반포 때 본산의 하나로 꼽혔다. 현재는 극락전, 응진전, 명부전, 청풍루, 운하당, 산신각 등 여섯 채의 건물과 5층석탑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곳이 직지를 엮은 백운화상이 만년에 거처한 성불사였을까. 스님은 성품이 크고 번잡한 곳을 싫어하신 분이었다. 정처하는 곳이 모두 작은 암자이거나 보잘 것 없는 곳이었다. 공민왕 6년(1357) 스님은 공민왕으로부터 입궐하라는 명을 받는다. 그러나 스님은 아직 최상의 법을 이루지 못했다면서, 꺾인 병든 나무에 자신을 비유하는 선시(禪詩)를 지어 보내며 사양했다. 스님은 이 시기에도 전국을 돌며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로부터 8년 후인 공민왕 14년(1365) 6월 21일에는 왕명을 받고 할 수 없이 해주(海州) 신광사(神光寺) 주지를 맡았다. 그러나 두 달 뒤에 공민왕에게 사퇴를 간곡히 요청하는 글을 올렸다. 그리고 4년 후 공민왕 18년(1369) 72세 때에는 경기도 김포 망산(望山)에 위치한 고산암(孤山菴. 김포시 고산 추정)에서 머물렀다. 이 곳도 사찰이라기보다 산속에 자리 잡은 작은 암자다. 그 이듬해인 공민왕 19년(1370) 스님은 왕이 친림한 가운데 납자들의 수행 정도를 시험하는 공부선(功夫選)을 시행할 때 시험관으로 참석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스님은 국가적인 행사였던 공부선을 마친 4년 후인 공민왕 23년(1374)에 경기도 여주 혜목산 취암사(慧目山 鷲岩寺)에서 77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여기서 가장 의심이 가는 것은 스님의 마지막 4년간의 행적이다. 스님은 이 기간 어디서 참선하며 불후의 명작 직지를 찬술한 것일까. 직지 발문(跋文) 3에 매우 주목되는 내용이 나온다. 스님이 법린(法隣)선인의 정성스런 도움으로 직지를 엮으면서 쓴 기록이다. 여기에는 스님의 나이 75세인 임자년 9월 성불산에서 노비구 경한백운수서(歲在壬子年九月 成佛山居 老比丘 景閑白雲手書)라는 기록이 보이는 것이다. 이 기록을 보면 스님이 입적하기 2년 전 직지가 완성되었으며 그 제작이 성불산에서 이루어졌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 시기는 스님이 왕경인 개경이 가까운 해주나 김포등 사암이 아니고 비교적 먼 거리인 지역의 사암에서 제자들과 직지를 완성했음이 상정되는 것이다. 스님이 입적한 취암사에서도 제자 법린이 주역으로 등장한다. 금속활자로 찍은 직지가 발간 된 2년 후 여주 취암사(鷲巖寺)에서도 법린의 주도로 목판본 직지 간행이 이루어진다. 이 해가 우왕(禑王)4년(1378). 제자(弟子)인 법린과 흥덕사(興德寺)의 주자본(鑄字本) 인출 때 시주자였던 비구니 묘덕(妙德) 등이 참여했으며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 김계생(金繼生) 등이 새로운 시주자(施主者)로 나섰다. 금속활자에서 썼던 성사달(成士達) 서문(序文)에 당대 최고의 유학자였던 목은 이색(李穡)의 서문(序文)을 새로 덧붙여 펴낸 것이다. 이 목판본 글씨는 일암, 선화(禪和), 천선 등이 썼고 종건(宗乾), 참, (창(昌))여(如), 신명(信命) 등이 각수(刻手)로 참여하였다고 기록된다. 스님의 정처 없는 방황 성불사에 머물다 왕명을 피해 해주에서 도망치듯 나온 스님은 제자 법린, 석찬(釋瓚)과 함께 김포 망산 고산암에 거주하다 다시 남하하여 괴산 성불산에 머문 것은 아닐까. 그리고 제자 법린이 있는 여주 취암사를 뱃길로 왕복한 것은 아닌지. 취암사는 성불산에서 달천 뱃길로 멀지 않은 거리이다. 현재 충주박물관에 소장된 성불사 석조보살좌상은 조사결과 괴산 불정면 전(傳) 성불사지에서 옮겨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불정면 성불사지도 이곳 성불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괴산군청 문화담당자에 따르면 이 불상은 성불사지에 방치돼 있던 것을 마을 주민의 기증으로 수 십년 전에 현재의 박물관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머리에는 크고 긴 원통형의 보관을 쓰고 있는데 보관 정면에는 작은 화불의 조각이 희미하게 나타나고 있다. 상호는 원만하며 자비가 넘친다. 좌불상의 가슴에는 화려한 경식(頸飾)이 조각돼 있어 보살상의 예를 따르고 있다. 좌수는 무릎에 상장(上掌)하였는데 본래는 정병(淨甁)이 놓여 졌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불상은 조각기법이나 원만한 상호(相好)등으로 미루어 고려 중기 이후의 소작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불상의 확인으로 미루어 불정면 성불사지도 조사할 필요성을 느낀다. 스님은 괴산에서 한나절 거리인 흥덕사도 왕래했을 것으로 상정된다. 무심천(無心川)이란 이름은 스님이 흥덕사에서 무심을 설하며 머문 때문인지도 모른다. 흥덕사 묘덕스님은 스님의 제자가 되어 직지에 대한 열망으로 후에 모든 사재를 들여 금속활자를 만들어 책을 출간하였을 것이다. 인류최고의 문화유산 직지탄생의 성지 정화를 괴산 성불산 성불사지(址)는 앞으로 발굴 등 학적 조사가 필요하다. 사역의 규모를 밝히고 유물을 찾아 역사적 의문을 규명해야 한다. 이곳이 법운화상이 제자 법린, 석찬 등을 데리고 직지를 편찬한 성지로 밝혀진다면 국가의 중요 사적으로 지정 보존해야 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청주 흥덕사와 더불어 정신적 교육의 도량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충북도내 많은 절터를 조사 발굴해온 충청대학교 박물관장 장준식(불교미술) 박사도 필자와 같은 견해를 보이고 있다. ▲ 임각수 괴산군수가 성불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천지일보(뉴스천지) 괴산군은 아름다운 산수와 청정한 수변 공간을 자랑하는 한국의 명군(名郡)이다. 첫 국가중요문화재 명승으로 지정된 화양구곡을 위시한 산막이 옛길, 각연사, 외사리 사지, 만동묘 등 숱한 사적과 명승을 지니고 있다. 괴산 산막이 옛길에는 연간 140만 명이 힐링을 하고자 다녀간다. 괴산군은 전국에서 가장 깨끗한 건강을 장담하는 유기농의 메카이다. 2015 세계유기농엑스포가 괴산에서 열리는 것도 바로 이런 괴산의 장점이 인정받은 것이다. 꼼꼼하기로 소문난 괴산 임각수 군수의 고향사랑, 고향발전의 열정에서 비롯된 성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임 군수는 직지가 태어난 성불사가 괴산 성불산이길 기대하며 올해는 이를 고증하는 여러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의욕을 보인다. [본 기사는 월간 글마루 10월호 기사입니다]

[전북] 역사와 전통, 풍류를 이어가는 고장 (5)

일행이 여정의 마지막으로 택한 곳은 완주군 고산 자연휴양림 일원이다. 이곳은 자연휴양림 외에 완주 에코어드벤처 서바이벌 체험장 오토캠핑장 밀리터리 테마파크 등의 시설이 인접해있어 볼거리도, 체험할 것도 많다. 에코어드벤처 코스는 자연지형물을 이용해 공중에서 와이어와 로프 등을 활용해 안전하게 이동함으로써 자연 속에서 모험심을 기를 수 있는 친환경 레포츠 시설이다. 어린이 코스와 청소년 이상의 코스로 나뉘어져 있어 어린이도 안전하게 레포츠를 즐길 수 있다. 일행이 남다른 관심을 보인 시설 중 하나가 밀리터리 테마파크였다. 시가지 형태의 장애물을 설치한 곳에서 시가지전투훈련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으로, 이용객은 모의 전투장비를 착용하고 편을 나눠 상대편을 향해 사격하면 된다. 완주 밀리터리 테마파크의 경우 실제 타격감과 사격감을 줄수 있고 근접전투에 특화된 무선네트워크 기능이 탑재된 최첨단 GPR시스템을 도입해 실전과 같은 근접모의 전투를 경험할 수 있다. 무엇보다 탁월한 안전성을 보장해 어른이 동반할 경우 어린이들도 즐길 수 있어 가족 체험으로 많은 사랑을 받는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아쉽게도 이날 직접 체험할 수는 없었지만 일행은 꼭 한 번 오자! 회사 워크숍 장소로 추천하자! 스트레스 팍팍 풀리겠다 등의 대화를 나누며 방문자센터로 향했다. 이곳 방문자센터의 안내를 받아 무궁화 테마식물원 만경강 수생식물관찰원 고산자연휴양림 에코어드벤처 등을 돌아볼수 있었다. 사전에 약속된 방문이 아님에도 친절하게 이곳저곳 안내하며, 자세한 설명을 곁들여준 완주군 산림공원과 최우식, 박정은 선생님께 다시 한 번 감사인사를 전한다. 여러 테마관 중에서도 유독 마음이 가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나라꽃 무궁화 테마식물원이다. 이곳은 무궁화를 테마로 한 우리나라 최대의 나라꽃 식물원으로 무궁화 품종만 180여종을 보유하고 있다. 무궁화동산, 아열대식물원, 난대성식물원, 무궁화 품종원, 전시관, 세계의 정원, 무궁화 화계(花計) 등이 한데 어우러져 대규모 테마식물원을 이루고 있다. 매년 8월에는 전국 나라꽃 무궁화 축제가 열린다고 하니, 때를 맞춰 방문하면 무궁화가 화려하게 수놓아진 풍경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4D영화를 경험하지 못한 기자가 이곳 만경강 수생식물관찰원에서 4D영화를 접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만경강 수생식물관찰원에서는 수생식물 외에도 어린이들에게 자연생태계에 대한 관심과 소중함을 일깨워주기 위해 4D영화를 상영하고 있다. 중간 중간 바람도 나오고 의자도 흔들리니 너무 놀라지 않기를 당부한다. 완주군은 고산 자연휴양림의 다양한 특징들을 살려 무궁화휴양레저랜드로 거듭나기 위한 절차를 밟고 있다고 한다. 전라북도 여행의 모든 일정을 마친 일행은 서울로 올라오기전, 남은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첫째 날 미처 마치지 못한 순례길의 마지막 행선지인 송광사로 향했다. 송광사에 들어서니 그제야 첫날 여행을 완전하게 마무리한듯한 느낌이 들었다. 2박 3일 일정으로 전라북도의 명소를 다닌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다만 바쁜 일상 가운데 없는 시간이라도 만들어 여행을 떠나는 이들에게 짧은 시간 동안 돌아볼 수 있는 곳을 소개하고 싶었다. 시시각각 시간을 확인하며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사는 것이 아니라 느리게 걷고, 오래 생각하며 혹은 아무 생각 없이 온전히 나를 내려놓을 수 있는 시간. 때로는 수학여행을 통해 우리네 역사와 전통을 배우고 체험하며, 공부하느라 서로를 돌아보지 못했던 친구들과 마음껏 어울릴 수 있는 시간. 이번 글마루 답사팀이 발길이 머물던 곳이 아니어도 좋다. 매서운 겨울이 지나고 찾아온 반가운 이 봄에 맛과 멋이 어우러진 고장, 전북 그 어디라도 마음 닿는 곳, 발걸음 닿는 곳으로 훌쩍 여행을 떠나는 것도 좋은 추억일 것 같다. [백은영 기자]

[전북] 역사와 전통, 풍류를 이어가는 고장 (1)

힐링어울림즐거움이 함께하는 그 곳으로 여행을 떠나자 삼천리강산 금수강산이라는 말이 있듯이 전국방방곡곡 돌아다니다보면 우리나라처럼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나라도 없다. 광활한 대지를 소유한 것도, 보는 것만으로 사람을 압도할 만한 거대한 폭포나 원시림 같은 자연을 가진 나라도 아니지만 자연의 4계가 주는 자연스런 아름다움은 조물주에 대한 경이로움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이번에 글마루 답사팀이 찾은 곳은 자연이 주는 4계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뿐 아니라 역사와 전통, 풍류 그리고 쉼(힐링)을 얻을 수 있는 전라북도 일원(一圓)이다. 1월의 막바지에 찾은 전라북도 전주를 시작으로 임실, 남원, 격포, 고산자연휴양림에 이르기까지 각 지역에서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여행스토리를 소개한다.마음의 휴식을 찾기 위해 혼자 떠나는 힐링여행에서부터 연인, 친구, 가족과 함께 떠나는 동행 그리고 수학여행처럼 단체로 떠날 수 있는 여행까지 자신에게 맞는 안성맞춤형 여행에 당신을 초대한다. 새벽 5시. 마을버스가 다니기에는 이른 시간, 10분 정도 걸어 나와 이른 새벽부터 운행하는 시내버스를 타고 가까운 지하철역에 내려 서울 용산역으로 향했다. 새벽 6시 35분, 용산역에서 전주로 향하는 첫 무궁화호 기차를 타기 위해서다. 용산역에서 동료 기자를 만나 아침 대용으로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어묵과 김밥을 사서 기차에 올랐다. 오랜만에 타보는 기차라 그런지 전날 잠을 이루지 못했음에도 눈이 말똥말똥하다. 준비한 먹을거리로 간단하게 허기를 채우고 나니 몸이 노곤해진다. 그렇게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보니 어느새 목적지인 전주역에 도착했다. 도착시간은 오전 9시 55분. 10시가 채 안 되는 시간이다. 뚜벅이인 두 기자의 기동력을 위해 답사 일정을 함께할 또 다른 기자 한 분이 전주역에서 기자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숙소에 짐을 풀고 간단하게 답사일정에 대해 논의한 뒤 전주에 오면 꼭 한 번은 먹고 가야 한다는콩나물국밥을 점심으로 먹은 뒤 전주한옥마을로 발걸음을 옮겼다. 국제슬로시티 전주한옥마을을 걷다 전주한옥마을은 세계적인 여행안내북 미슐랭 그린 가이드가 소개한 별 3개 만점짜리 관광지로 선정된 곳으로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자리 잡고 있다. 미슐랭 그린 가이드의 소개가 아니더라도 전주한옥마을은 그 역사와 전통만으로도 이미 많은 이들이 찾은 곳이며, 앞으로도 많은 이들이 우리의 전통문화를 찾고 경험하기 위해 찾을 곳임에는 틀림없다. 게다가 2010년에는 슬로시티 국제연맹이 전주한옥마을을 국제슬로시티로 지정하는 등 전주는 역사와 전통 그리고 쉼이 있는 곳으로 세계에서도 주목받고 있는 도시로 떠오르고 있다. 연간 3백만 명이 찾는다는 말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답사 일행이 찾은 날에도 전주한옥마을은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유독 추웠다는 겨울, 아직 그 한파가 채 가시지 않은 날씨임에도 친구 혹은 연인, 가족끼리 그 어느 모양, 어떤 모습으로 와도 낯설지 않고, 외려 조화를 이루는 곳, 바로 전주 한옥마을이다. 잘 닦이고 정돈된 한옥마을의 골목마다 그 이름도 이채롭다. 어진길동문길경기전길향교길최명희길오목대길술도가길 등 각 골목을 대표할 만한 인물이나 건물, 역사적 배경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전주는 그 자체만으로 역사와 전통의 도시, 예향의 도시로 불리는데 이는 이곳 전주와 조선(朝鮮)을 세운 태조 이성계와의 특별한 인연 때문이기도 하다. 한옥마을에는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과 어진박물관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성계와 정몽주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오목대와 이목대가 전주한옥마을 일대를 내려다보고 있다. 경기전 뒤편에 자리한 어진박물관은 국내 유일의 어진(御眞) 전문 박물관으로 태조 어진을 비롯해 어진 봉안과 관련된 유물 등을 보관하고 있다. 어진박물관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날 보따리를 풀기로 하자. 전주한옥마을 몇 골목을 거닐던 일행은 오목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었던 눈이 살짝 녹아 땅이 질퍽하니 미끄럽기도 하고, 비록 낮은 언덕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언덕인지라 느린 걸음으로 오목대에 올랐다. 오동나무가 많은 언덕이라는 뜻으로 오목대(梧木臺)라 불렸다고도 하며, 영조 때까지는 목조(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가 자연의 풍광을 즐기며 놀던 곳이라는 의미로 오목대(吳穆臺)로 쓰였다고도 한다. 일행끼리 앞서거니 뒤서거니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며 오른 오목대에서 내려다본 한옥마을은 마치 오래 전 우리네 삶의 모습을 보는듯 했다. 상투 틀고 갓 쓰고, 도포자락 휘날리며 살던 그 시절의 모습은 아니지만 오랜 세월을 지나며 우리에게 각인된 그 시절의 역사와 전통, 문화는 숨길 수 없는 것 같다. 이곳 오목대에 올라서야 새벽부터 달려온 여정의 피곤함을 잠시 내려놓는다. 차가운 공기 속에 느껴지는 신선함이라고 해야 하나. 크게 심호흡을 하고서는 그 옛날 이성계가 왜구를 물리치고 이곳에서 잔치를 베풀었다는 이야기에 빠져든다. 우왕 6년(1380)에 충청도경상도전라도를 관할하는 삼도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 이성계가 황산에 출몰한 왜구 아지발도를 무찌르고 개경으로 돌아가던 길에 일가친척을 비롯해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잔치를 베풀다 한고조의 대풍가(大風歌)를 읊었다는 곳. 바로 이 곳 오목대다. 오목대에서 내려오는 길, 혹은 오목대로 오르는 길에서 만난 국제슬로시티 표지판에 잠시 눈이 머문다. 다름 아닌 달팽이 때문이다. 살아있는 달팽이는 아니지만 국제슬로시티를 상징이라도 하는 듯 주황색 달팽이 한 마리가 떡하니 표지판에 붙어있는 게 아닌가. 느릿느릿 기어가는 이 달팽이의 이름은 느바기다. 느바기는 느리게, 바르게, 기쁘게라는 단어의 합성어다. 게다가 순수한 우리말로 표현하면 느림보 바보 기웃때보라는 뜻을 가진 말로 한국 순례문화연구원의 아이콘이라고 한다. ▶ (2)편에 계속됩니다. [백은영 기자]

‘태고의 비경 열어보는 열쇠’ 울산 울주 대곡천 암각화군, 세계문화유산 등재 바라보다-②

진정한 한민족의 뿌리를 찾아라 [글마루=신정미 기자] 2008년 7월 11일자 KBS 방송(부산방송총국, 울산방송국) 내용을 짚어보면 세계 학계가 반구대 암각화에 주목하며 비상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최근 서양 사학계에 작살로 고래를 잡거나 배로 포획한 고래를 끌고 가는 장면 등 명백한 포경 증거가 반구대 암각화에 기록돼 있다는 사실이 보고됐다. 영국 BBC 등이 이를 확인 보도하면서 선사시대에는 기술 수준이 낮아 적극적 포경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서양 학계의 기존 통념을 일거에 무너뜨렸다. 세계 포경사 첫 장을 반구대 암각화가 새롭게 연 셈이다. 다니엘 호비노 국립파리자연사박물관 교수는 고래 그림이 새겨진 몇몇 노르웨이 유적이 있긴 하지만, 반구대 암각화는 초기의 고래 사냥을 표현한 세계 최초의 그림이라고 말했다. 그뿐 아니라 세계 생물학계도 암각화에 그려진 60여 점의 고래가 현대 생물학에서 적으로 정리한 고래 종 분류와 정확하게 일치된다는 사실에 그 가치성을 발견하고 놀라고 있다. 또한 암각화가 새겨진 반구대 주변의 독특한 지형 구조도 학계의 새로운 주목을 받고 있다. 음향 실험결과 반구대 주변의 소리 전달 효과가 첨단 음향장비가 갖춰진 콘서트홀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이는 반구대 암각화 주변이 세계 최초로 화려한 포경 문화를 꽃피운 한반도 선사인들의 종교 행사장으로 사용됐음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 암각화의 또 다른 시사점은 무엇일까. 이상목 울산암각화박물관장은 우리는 여전히 우리 민족의 뿌리를 농경이나 기마민족에서 찾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한민족의 뿌리를 고조선이나 알타이 청동기문화의 한 갈래인 타가르-스키타이-오르도스로 지칭되는 북방 초원의 청동기문화를 기원으로 보는 연구자들이 많다 고 언급했다. 이어 그러나 이 땅에는 국가가 출현하기 이전이나 농경민이나 기마민보다 훨씬 오래 전 오랜기간 수렵어로민이 이미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며 민족 형성이란 큰 틀에서 보면 원사시대는 줄기에 해당하고, 초기 국가는 가지에 매달린 열매라고 할 수 있다. 인식의 지평을 좀 더 넓혀볼 필요가 있는데 반구대 암각화는 진정한 민족의 뿌리를 찾는 열쇠라 고 할 수 있다 고 밝혔다. 한국 대표 유적을 넘어 세계 대표 유적을 꿈꾸다 대곡천 암각화군의 핵심인 반구대 암각화로부터 대곡천 상류 1.5㎞ 지점에는 천전리 각석이 있고, 두 암각화 사이로 굽이치는 물길과 산세는 절경으로 꼽힌다. 대곡천 상류 지역은 선사시대 암각화뿐만 아니라 자연사 자원과 신라시대와 조선시대의 문화재가 밀집한 곳이다. 그리고 오랜 기간 독특한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형성된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삶의 흔적이 잘 보존된 지역이다. 신라시대 화랑들이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면서 호연지기를 기르고 심신을 단련하던 때, 이곳에서 훈련하고 야영생활을 했다. 또 고려 말 포은 정몽주, 조선 초기 회재 이언적, 한강 정구 등 삼현이 이곳에서 명시를 남기고 백성을 가르쳤다. 정몽주가 언양에 유배됐을 때 천혜의 절경을 즐기며 귀양살이의 괴로움을 달랬다 해서 포은대(圃隱臺)라고 불린다. 반구대 아래의 소구인 포은대에는 이 삼현의 행적을 기록한 반고서원 유허비와 포은대 영모비가 세워져 있고 또 맞은편에는 중건한 반구서원이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화가 겸재 정선이 이곳에서 그린 산수화 반구가 최근 발견돼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대곡천 일대는 수많은 자생식물 270여 종이 서식하고 있는 생태자원의 보고이기도 하다.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앞두고 걸어야 할 여정 대곡천 암각화군은 2006년 문화재청 주관으로 세계유산 등재 가능성 조사를 완료하고, 2009년 12월 문화재청 직권으로 등재 신청한 후, 2010년 세계문화유산 잠정 목록에 등재됐다. 이 유적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제도에서 규정하고 있는 조건인 세계유산의 유형에 부합하는 기념물, 탁월하고 보편적 가치(OUV, outstanding universal value) 진정성(authenticity)과 완전성(integrity)을 갖춘 문화유산으로 평가 받고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 11번째 세계유산 등재 준비에 들어가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반구대 암각화 보존대책에 대해 십년 가까이 문화재청과 울산시가 서로 입장이 달라 협의안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연댐 상류에 위치한 반구대 암각화는 현재 물속에 잠겨있는 상태로 매년 물에 잠기면서 급속하게 훼손돼 원형을 잃어가고 있다. 반구대 암각화의 보존 방안에 대해 울산시 문화예술과 최평환 주무관은 문화재청은 사연댐 수위조절안을 주장하고 있고, 울산시는 터널형 물길 변경안을 주장하는 등 의견이 상이하므로 계속협의해서 바람직한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문화재청은 암각화가 사연댐으로 인해 연중 물속에 잠겼다 나왔다 하는 침수와 노출의 반복에 대한 근원적인 해결을 통해서만이 세계유산 등재가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울산시는 대곡천 암각화군의 보호를 위해 금년 중으로 반구대 암각화 및 천전리 각석 일원에 영상보안 시스템을 설치할 계획이며, 종합정비계획을 수립해 중장기적으로 추진해 나갈 방침이다. 종합정비계획에는 암각화 가치 재조명, 보호지역 재획정, 지속 가능한 관광자원화 계획 등이 포함될 것이다. 문화재청과 울산시가 하루 빨리 문화유산 보존의 기본대책을 수립해서 반구대 암각화군이 향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한국의 위상을 세계에 드높일 날을 기대해본다.

천혜의 요새 남한산성,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바라보다-②

남한산성의 새 단장 [글마루=이지수 기자] 현재 남한산성 보수작업이 한창이다. 1975년경부터 시작한 남한산성 보수정비는 세계 문화유산 등재가 본격적으로 추진된 2000년부터 활발해졌다. 남한산성 관리는 현재 민간인 전담기구인 경기문화재단의 남한산성관광문화사업단에서 맡고 있다. 사업단 세계문화유산 담당 조두원 박사는 현재 성곽 유실 구간 등을 지속적으로 보수해가고 있다며 국제기준에 따라 문화재 진정성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정비하는 것을 주안점으로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중건은 서구적 의미에서 재건이라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무거울 중(重)을 사용한다. 이는 문화유산 자체를 중요시해 그 가치를 계속 이어나가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 한때 남한산성 남쪽 성곽 탐방로를 철근구조물로 설치했다. 하지만 문제가 제기돼 현재는 공사를 중단한 상태다. 조 박사는 관리 행정기관 간에 세밀한 협의가 이뤄지지 않아 생긴 문제라며 건축이나 문화유산 전문가들에게 자문과 함께 유용한 재료들을 추천받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는 건축기술이 첨단화됐기 때문에 원재료의 화학적 분석을 통해 원형에 가깝게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형태만을 만들기 위해 시멘트나 일반 벽돌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전돌(구운 벽돌)과 전돌 사이 들어가는 줄눈 등의 원형분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향하여 유네스코는 남한산성을 세계문화유산 2010년 1월 11일 잠정목록으로 확정했다. 이후 세계문화유산위원회는 올해 2월 세계문화유산 우선 추진 대상 선정 경합에서 남한산성을 우선 추진 대상으로 선정했다. 조 박사는 남한산성이 등재준비 현황이나 그 가치를 입증할 수 있는 자료정리가 잘 돼 있었기 때문에 우선순위로 선정된 것이라며 2012년 6월까지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서 작성을 마치고 반년 동안 영문으로 번역해 재검토하는 시간을 계속 갖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남한산성은 유네스코가 요구하는 세계유산으로서의 3가지 조건인 보편적 탁월한 가치(OUV: Outstanding Universal Value)와 진정성(Authenticity) 그리고 완전성(Integrity) 등의 강점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남한산성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물망에 오른 것은 지난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경원대에서 제출한 남한산성 종합발전방안 수립연구 보고서에서 처음 세계문화유산으로 추진하자는 제언이 있었다. 이후로 남사모(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가 결성되는 등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국민의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도와 이해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또한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발굴해 세계무대에 올리는 것은 문화강국으로서의 위상을 드높이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남한산성이 우리나라 11번째 세계문화유산이 될 날을 기대해본다.

천혜의 요새 남한산성,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바라보다-①

[글마루=이지수기자] 역사적으로 단 한 번도 함락되지 않았던 곳. 남한산성은 수많은 외세침략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히 나라를 지켰다. 병자호란의 역사를 품은 가슴 시린 역사의 현장이지만 모진 굴욕과 핍박을 이기고 이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나라를 지킨 든든한 성벽 남한산성은 백제, 통일신라, 고려, 조선 등 오랜 시대에 걸쳐 한강 유역 및 수도를 방어한 곳으로 병자호란 때 인조(조선의 제16대 왕, 재위 1623~1649)가 피신해 항전하다 결국 청나라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한 곳으로 알려졌다. 축조한 지 10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임진왜란 때 선조임금이 평안북도 의주까지 피난 가는 치욕을 당하자 조선 조정은 남한산성을 다시 축조하기로 했다. 남한산성은 둘레 6297보, 여장 1897개소, 옹성 3개, 대문 4개, 암문 16개, 포대 125개를 갖춘 성이었다. 여기에 왕이 거처하는 행궁과 9개의 사찰이 성 안에 자리했다. 남한산성은 단 한 번도 함락당한 적이 없는 천혜의 요새다. 아무리 사료를 뒤져도 함락됐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인조도 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었다. 청나라는 남한산성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느껴 청나라 군대가 물러가고 난 후 어떠한 경우라도 산성을 보수하거나 새로 쌓아서는 안된다는 조항을 항복문서에 넣었다. 실제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나라는 해마다 사절을 보내 남한산성을 보수한 흔적이 있으면 문제를 삼았다고 한다. 문화유산이 살아 숨 쉬는 곳 산성 내에는 행궁을 비롯해 수어장대, 지수당, 연무관 등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문화유산이 자리하고 있다. 남한산성 행궁은 인조뿐만 아니라 숙종과 영조, 철종이 임시 거처로 삼았고 고종도 여주와 이천 등의 능행길에 머물렀던 곳이다. 행궁은 현재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 사무실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다. 1963년 국가 사적 제57호로 지정된 남한산성과 달리 행궁은 2007년 국가 사적 제480호로 지정됐다. 이는 1907년 8월 1일 행궁이 병참기지가 될 것을 두려워한 일본이 폭파해버렸기 때문. 현재 행궁은 폭파 전 사진을 토대로 복원 중이다. 특히 남한산성 행궁은 종묘와 사직을 두고 있는 유일한 행궁이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서쪽 주봉인 청량산 정상부에 세워져 있으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돼 있다. 이 건물은 남한산성의 지휘 및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어진 누각이다. 성내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며 2층 누각과 건물 외쪽에 2동의 사당인 청량당으로 이뤄져 있다. 청량당은 성을 쌓은 벽암 각성대사와 함께 이회와 그의 부인의 영혼을 모신 사당이다. 이회는 동남쪽 축성의 책임자로 충직한 인물인데 그를 시기한 무리의 모함으로 교수형을 당했다고 한다. 그 후 이회의 무고함이 밝혀져 수어장대 서쪽에 그와 부인의 영혼을 위안할 목적으로 청량당을 세웠다. 청량은 맑고 서늘한 기운을 뜻한다. 자동차를 타고 남한산성을 올라가다 보면 좌측 편 울창한 숲 속에 정자 하나가 보인다. 이곳을 지수당이라 한다. 지수당은 현종 13년(1672년)에 부윤 이세화가 건립한 정자로 건립 당시에는 정자를 중심으로 앞뒤에 3개의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2개만 남아 있다. 이곳 정자의 남쪽에는 서에서 동으로 계곡물이 흐르고 있으며 정자 옆 연못은 ㄷ 자형으로 파서 연못이 정자를 둘러싼 형태를 하고 있다. 그 밖에도 산성 내에는 군사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곳 연무관, 백제 온조왕과 산성 축성 책임자였던 이서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창건한 숭렬전 등 소중한 문화유산이 살아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