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이탈리아가 배출한 르네상스 시대의 세계적(世界的)인 거장(巨匠)이었으며 화가로서 ‘최후의 만찬’과 ‘모나리자’를 그렸을 뿐만 아니라 과학자(科學者), 발명가(發明家), 건축가(建築家)로서도 탁월한 재능(才能)을 발휘하였다. 그는 1452(문종 2)년 이탈리아 피렌체 빈치에서 탄생(誕生)하였으며 1519(중종 14)년 프랑스 중부지역에 위치한 앙부아즈성에서 향년(享年) 68세를 일기(一期)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세상을 떠난 1519(중종 14)년은 조선시대(朝鮮時代) 4대 사화(士禍) 중 하나인 기묘사화(己卯士禍)가 발생한 해였다는 사실을 주목한다. 기묘사화는 1519(중종 14)년 가을에 훈구파(勳舊派)와 사림파(士林派)의 갈등으로 인하여 발생하게 된 참화(慘禍)인데 이 사화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세상에 펼쳐 보이려고 하였던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를 중심으로 한 사림파의 포부가 좌절되었으며, 그해 12월 능주로 유배(流配)갔던 정암이 사사(賜死)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무렵에 명나라에 성절사(聖節使)로 간 인물이 있었으니 본 칼럼에 소개하는 십청헌(十淸軒) 김세필(金世弼)이다. 김세필이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491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어떤 발자취를 남겼는지 구체적인 생애를 소개한다.

김세필의 본관(本貫)은 경주(慶州)이며 휘는 세필(世弼)이고 자(字)는 공석(公碩)으로 시조(始祖)는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이며, 고려(高麗) 때 김인관(仁琯)은 검교 태자태사(檢校太子太師)를 역임했는데 김세필의 10대조가 된다.

또한 김자수(自粹)는 문과 장원(文科壯元)으로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비롯해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와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하였으며 효행(孝行)으로 정려(旌閭)가 내려지고 호는 상촌(桑村)인데, 김세필의 고조부(高祖父)가 된다.

특히 김자수는 고려(高麗)의 충신(忠臣)으로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으니 475년의 고려 왕조(高麗王朝)가 멸망(滅亡)한 이후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서 충절(忠節)을 지켰다는 것이다. 그 이후 다시 고향(故鄕)인 안동(安東)에 은거(隱居)하여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으나 태종(太宗)이 세 차례나 형조 판서로 부르자 고려에 대한 충절을 표현한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장렬하게 순국(殉國)하였다.

증조부 김근(根)은 조선(朝鮮)이 건국된 이후 한성 소윤(漢城少尹)으로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고, 조부(祖父) 김영유(永儒)는 성종(成宗) 때 명신(名臣)으로 벼슬은 지중추(知中樞)에 이르고 시호는 공평(恭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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