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김현진 기자] 19세기 조선은 안으로는 세도 정치의 폐단과 밖으로는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탐욕으로 인해 대내외적으로 혼돈을 겪었다. 이번 호에서는 이 시기 역사의 격변기에 그 중심이 됐던 인물들의 모습이다. 흥선대원군(이하응), 덕혜옹주·순종과 함께 찍은 고종황제, 동학 제2대 교조 최시형, 동학 농민운동가 김개남 장군, 동학 녹두장군 전봉준의 사진이다. 이 사진은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가 소장하고 있는 원본사진이다. 정 연구가는 자신의 사재를 모두 팔아 40여년간 전 세계를 돌며 외국인 선교사나 외국인이 찍은 약 7만장의 근현대사 기록사진을 모았다.
흥선대원군(1820~1898)은 위정척사사상에 의거해 단호한 쇄국정책으로 외래 자본주의 나라들의 침략을 저지하려 한 인물이다. 흥선대원군은 혈통으로 보면 조선의 16대 왕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8대손으로 왕권과 가까운 왕족은 아니었다. 부친 남연군이 정조의 이복형제인 은신군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영조로부터 이어지는 왕가의 가계에 편입돼 왕위와 가까워졌다. 당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상황에서 이들의 눈을 피해 조대비에게 접근, 철종이 후사 없이 죽게 되면 자신의 둘째 아들 명복(고종)을 왕위 계승자로 지명하도록 설득했고, 그의 계획대로 고종이 12세에 왕위에 올라 왕의 아버지 대원군이 됐다.
사진 속 흥선대원군의 관복에 장식된 흉배는 용이 아닌 장수를 기원하는 ‘거북이’ 문양이다. 고대부터 거북은 주술적인 효능이 있는 것으로 믿었으며 용의 머리와 같이 벽사귀면 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흥선대원군은 원래 기린 문양인 대원군 흉배를 거북 문양으로 바꿔 사용하기도 했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십자훈장을 걸었다. 얼굴 광대부분에 있는 약간의 흉터는 안동김씨 집안사람들로부터 건달행세를 하다 맞아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
대원군은 고종 대신 정권을 장악해 쇄국정책을 폈다. 그는 “서양 오랑캐의 침입에 맞서서 싸우지 않는 것은 화평하자는 것이며 싸우지 않고 화평을 주장하는 자는 매국노다(洋夷侵犯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글을 새긴 척화비를 전국 각지에 세워 단호한 쇄국정책을 천명했다. 이에 1866년(고종 3) 천주교 탄압과 당시 우리나라에 들어온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한 사건으로 프랑스와 전쟁을 했으며, 1871년에는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계기로 미국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와 반대로 고종은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후 1880년대 서구 근대문물에 관심을 갖고 받아들이며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다. 1897년 기울어져가는 조선을 다시 세우고 나라의 위신을 다시 세우고자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조선은 황제국임을 대내외에 알렸다. 또한 연호를 광무로 정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원구단(환구단)을 만들어 이곳에서 황제 즉위식을 했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일제의 강요로 인해 왕위에서 물러났다.
1894년(고종 31)에는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중심이 돼 부정과 외세에 항거하고자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동학농민운동은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지나친 가렴주구에 항거하는 농민층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시작됐다.
전봉준은 전주에서, 손화중은 공주에서 척왜(斥倭)를 부르짖자 각처에서 동학농민군이 봉기하기 시작했다. 10월 말을 전후해 전라도 삼례역에 모인 동학농민군의 수는 11만에 가까웠다. 동학 제2대 교조인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충청도의 동학교도인 북접은 처음에는 종교적 입장을 고수해 무력항쟁에 가담하기를 꺼려 남접의 전봉준 등과 대립했으나 항일구국투쟁이라는 명분 앞에 남접과 북접이 극적으로 화해하기도 했다.
고부민란으로부터 1년여에 걸쳐 전개된 동학농민운동은 관련자들의 처형으로 결국 실패했으나 여기에 참가했던 동학농민군은 뒤에 항일의병항쟁의 중심세력이 됐으며, 그 맥락은 3.1독립운동으로 계승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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