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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이하응, 1820~1898). 고종황제의 부친으로 12세에 왕위에 오른 그를 대신해 정권을 장악한 후 강력한 쇄국정책을 폈다. 사진에서 긔의 관복에 장식된 흉배는 용이 아닌 장수를 기원하는 ‘거북이’ 문양이다. 얼굴 광대부분 흉터는 세도정치로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안동김씨 집안사람들로부터 건달행세를 하다 맞아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 (제공: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 ⓒ천지일보 2022.09.29

[천지일보=김현진 기자] 19세기 조선은 안으로는 세도 정치의 폐단과 밖으로는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탐욕으로 인해 대내외적으로 혼돈을 겪었다. 이번 호에서는 이 시기 역사의 격변기에 그 중심이 됐던 인물들의 모습이다. 흥선대원군(이하응), 덕혜옹주·순종과 함께 찍은 고종황제, 동학 제2대 교조 최시형, 동학 농민운동가 김개남 장군, 동학 녹두장군 전봉준의 사진이다. 이 사진은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가 소장하고 있는 원본사진이다. 정 연구가는 자신의 사재를 모두 팔아 40여년간 전 세계를 돌며 외국인 선교사나 외국인이 찍은 약 7만장의 근현대사 기록사진을 모았다.

흥선대원군(1820~1898)은 위정척사사상에 의거해 단호한 쇄국정책으로 외래 자본주의 나라들의 침략을 저지하려 한 인물이다. 흥선대원군은 혈통으로 보면 조선의 16대 왕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8대손으로 왕권과 가까운 왕족은 아니었다. 부친 남연군이 정조의 이복형제인 은신군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영조로부터 이어지는 왕가의 가계에 편입돼 왕위와 가까워졌다. 당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상황에서 이들의 눈을 피해 조대비에게 접근, 철종이 후사 없이 죽게 되면 자신의 둘째 아들 명복(고종)을 왕위 계승자로 지명하도록 설득했고, 그의 계획대로 고종이 12세에 왕위에 올라 왕의 아버지 대원군이 됐다.

사진 속 흥선대원군의 관복에 장식된 흉배는 용이 아닌 장수를 기원하는 ‘거북이’ 문양이다. 고대부터 거북은 주술적인 효능이 있는 것으로 믿었으며 용의 머리와 같이 벽사귀면 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흥선대원군은 원래 기린 문양인 대원군 흉배를 거북 문양으로 바꿔 사용하기도 했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십자훈장을 걸었다. 얼굴 광대부분에 있는 약간의 흉터는 안동김씨 집안사람들로부터 건달행세를 하다 맞아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

대원군은 고종 대신 정권을 장악해 쇄국정책을 폈다. 그는 “서양 오랑캐의 침입에 맞서서 싸우지 않는 것은 화평하자는 것이며 싸우지 않고 화평을 주장하는 자는 매국노다(洋夷侵犯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글을 새긴 척화비를 전국 각지에 세워 단호한 쇄국정책을 천명했다. 이에 1866년(고종 3) 천주교 탄압과 당시 우리나라에 들어온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한 사건으로 프랑스와 전쟁을 했으며, 1871년에는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계기로 미국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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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 덕혜옹주·순종과 함께. 고종황제가 덕혜옹주의 생일을 기념하며 찍은 사진이다. 뒤에는 명성황후가 낳은 고종의 둘째아들이자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이다. 덕혜옹주는 고종의 뒤로 수줍은 듯 살짝 숨어 영락없는 어린아이의 모습이다. 덕혜옹주는 고종이 귀인 양씨에게 환갑 때 얻은 딸이라 애지중지했다고 전해진다. (제공: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 ⓒ천지일보 2022.09.29

이와 반대로 고종은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후 1880년대 서구 근대문물에 관심을 갖고 받아들이며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다. 1897년 기울어져가는 조선을 다시 세우고 나라의 위신을 다시 세우고자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조선은 황제국임을 대내외에 알렸다. 또한 연호를 광무로 정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원구단(환구단)을 만들어 이곳에서 황제 즉위식을 했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일제의 강요로 인해 왕위에서 물러났다.

1894년(고종 31)에는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중심이 돼 부정과 외세에 항거하고자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동학농민운동은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지나친 가렴주구에 항거하는 농민층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시작됐다.

전봉준은 전주에서, 손화중은 공주에서 척왜(斥倭)를 부르짖자 각처에서 동학농민군이 봉기하기 시작했다. 10월 말을 전후해 전라도 삼례역에 모인 동학농민군의 수는 11만에 가까웠다. 동학 제2대 교조인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충청도의 동학교도인 북접은 처음에는 종교적 입장을 고수해 무력항쟁에 가담하기를 꺼려 남접의 전봉준 등과 대립했으나 항일구국투쟁이라는 명분 앞에 남접과 북접이 극적으로 화해하기도 했다.

고부민란으로부터 1년여에 걸쳐 전개된 동학농민운동은 관련자들의 처형으로 결국 실패했으나 여기에 참가했던 동학농민군은 뒤에 항일의병항쟁의 중심세력이 됐으며, 그 맥락은 3.1독립운동으로 계승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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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제2대 교조 최시형(1827~1898). 최시형은 1861년 동학교도가 된 후 최재우의 뒤를 이어 제2대 교조가 됐다. 손병희에게 도통을 전수한 후 1898년 원주에서 체포돼 서울로 압송, 6월 2일 교수형을 당한다. 사진을 보면 동상에 의한 여독으로 발이 퉁퉁 부어 있고, 상투도 잘려 있다. 곤장을 맞은 여독으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모습이다. (제공: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 ⓒ천지일보 2022.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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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농민운동가 김개남 장군(1853~1895). 전북 정읍에서 태어난 김개남은 1890년경 동학을 믿기 시작해 1891년 동학의 지역 책임자인 접주가 됐으며, 1893년 보은 집회 후에는 대접주가 됐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 농민군을 이끈 지도자로 조선 조정이 전주 화약에서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아 봉기했다가 처형됐다. 그의 모습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가 촬영했다. (제공: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 ⓒ천지일보 2022.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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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장군 전봉준 압송(1855~1895). 전봉준이 압송당하는 장면으로 사진 우측에는 ‘동학당가형’이라고 써져 있다. 1890년경에 동학에 입교했고, 얼마 되지 않아 최시형으로부터 고부지방의 동학접주로 임명됐다. 그는 부패한 관리를 처단하고 시정개혁을 도모했다. 전라도 지방에 집강소를 설치해 동학의 조직강화에 힘썼으며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가 체포돼 교수형을 당했다. (제공: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 ⓒ천지일보 2022.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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