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정치권에서는 중요한 정치적 흐름을 말할 때 비유적으로 ‘열차 타기’ 표현을 더러 쓴다. 정치인은 정국 흐름상 타야 할 열차는 때를 놓치지 않고 올라타야 하고, 내려야 할 열차는 내려야 한다. 또한 되돌아올 때는 과감하게 되돌아오고 갈아타야 할 땐 타임리하게 갈아탈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즈의 칼럼니스트 제임즈 레스턴은 지난 70년대 한 칼럼에서 “사랑과 정치는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한 바 있다. DJ나 YS가 이 같은 ‘타이밍’을 읽는 ‘감(感)’이 뛰어난 정치인으로 회자된다. ‘감(感)’이 있느냐 없느냐는 일차적으로 위정자 본인의 몫이다. 또한 좋은 참모들을 옆에 두고 그들로부터 정확하고 냉철한 보고를 받아야 한다. 소통이 안 된다면 막힌 언로를 뚫어야 한다. 필자는 지난해 대선 과정을 지켜보면서 어디론가로 향하는 열차가 출발하는데, 누군가에 떼밀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이 열차에 올라타는 느낌이 들었다.

“증거도 없고 잘못 짚었다고 생각한다면 지금이라도 국민 앞에 사과하고 (국정원 여직원을) 즉각 감금에서 풀어야 한다.”

민주당이 ‘국정원 직원 여론조작 의혹’을 제기한 직후인 지난해 12월 13일 박 후보가 한 말이다. 이같이 야당을 비판한 박 후보의 입장은 사흘 후 대선 마지막 TV토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국정원 여직원 사건을 ‘여성 인권 침해’ 사안으로 규정하고 야당을 강하게 몰아부쳤다. ‘성폭행범이 쓰는 수법’이라는 자극적인 용어와 함께. 물론 여성 인권 문제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수사 중인 사안에 앞질러 수사결과를 예단할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국가기관의 권력남용 내지 선거 개입 의혹에 대해 한마디도 나오지 않은 것은 의외였다. 함께 토론을 지켜본 지인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당시 3% 이상 넉넉히 앞선 것으로 알려진 예상 지지율이 혹시 박빙이 되거나 뒤집혀지는 것은 아닐까하는 성급한 추측을 하는 친구까지 있었다. 도대체 선거 참모들이 누구인지, 왜 이 같은 대응방침을 후보에게 올렸는지 모두들 궁금해 했다. 박 후보는 국가기관의 정치 개입 의혹도 중요한 사안이므로 철저히 조사해 국민 앞에 낱낱이 공개해야 한다고 당연히 언급할 줄 알았다. 이 때 후보의 시국인식에 편향됨은 없었는지, 후보가 사태를 균형감각 있게 정확히 판단하도록 하는 데 소홀함은 없었는지, 스텝들이 후보의 눈을 가린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는 의견들이 많았다. 

TV토론 직후 국정원 여직원이 ‘정치댓글’을 달았다는 증거는 없다는 경찰 발표가 있었다. 이 발표가 표심에 영향을 전혀 미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 후 대선 투표가 진행됐고, 결과는 박 후보 51.6%, 문재인 후보 48%. 예상대로 득표율 차이가 3%선을 넘었다.

새 정부 출범 후 열차는 계속 달렸던 것 같다. 여권은 여권대로 야당은 야당대로.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은 전임 정부에서 빚어진 일로 자신을 압박하는 게 내심 억울한 듯 침묵 모드로 일관했다. 적어도 28일 정홍원 국무총리의 첫 대국민담화가 발표될 때까지는 그랬다. 여야 모두 날카롭게 대응했다. 속된 표현인지는 모르지만 ‘다 죽어가는 야당’의 기세를 살려준 것은 오히려 여권이다. 칼자루를 든 자가 제 발등을 찍는 꼴이었다. 여론이 들끓었다. “국정원사건 수사는 의연히 지켜보면 될 일이었다. 검찰이 엄정 수사해 의법조치하도록 맡겨 둬야 했던 것 아닌가. NLL 문제나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문제는 또 무엇인가. 자연발생적인 것인가. 수사 결과를 물타기하려는 의도는 포함되지 않았는가. 대통령이 유감을 표시하고 성역 없는 수사 의지를 밝혀야 하는 것 아닌가. ‘보이지 않는 손’이 있는 것은 아닌가. 침묵 행보만 계속하다 때를 놓치면 앞으로 정국이 어디로 흘러갈지 모른다”는 것 등등.

결국엔 문재인 의원이 나선다. 대선 직후 선거 결과에 깨끗이 승복한다고 했던 그다. 국정원, 군 사이버사령부 등 국가기관의 선거 개입 의혹 등에 대해 그는 박 대통령이 직접 책임질 것을 촉구했는데 ‘불뚝골’처럼 발언 수위가 오버되고 만 느낌이다. 무엇보다도 ‘정치댓글’은 과거 정부의 것이며 박 후보가 관여됐다는 수사결과도 없기 때문이다. 선거 불복이나 정권타도 투쟁은 언감생심 과반수 표심이 용납하지 않을 듯한 자기 부정이다. 그래도 문 의원이 ‘책임’ 운운한 것은 오죽하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검찰 수사는 신뢰를 잃었고 제도 개선으로 재발 방지가 가능할지 의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검찰의 최종수사결과 발표 시점까지 때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활고에 시달리는 민초들은 신문 1면 톱에 매일 쏟아지는 낯선 정치 뉴스에 짜증이 난다. 복지나 민생과는 무관하게 달려가는 증기기관차가 꽥꽥 소리 지르며 자꾸 신경을 건드리는 것만 같으므로. 이제는 묻고 싶다.

열차는 떠난 후 돌아왔는가. 아직도 박 대통령은 대선 때 오른 과거열차에 마지못해 몸을 실은 채 침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희망열차, 미래열차로 지혜롭게 갈아타야 할 때는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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