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 영어섹션지 global news CheonJi를 새롭게 선보입니다. 이번 호에는 △표류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의 드레스덴 선언 ▲실질적 결과로 주목 받는 세계평화운동가 이만희 대표의 평화행보 ▲100년 전 동북아 평화의 해법을 제시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과테말라에서 시작돼 멕시코까지 전해졌던 놀랍고 미스터리한 마야문명의 변천사 ▲최근 뜨고 있는 ‘성경’을 소재로 한 영화의 특성과 논란 등 다양하고 흥미로운 내용을 담았습니다. 영어섹션지에 실린 한글 기사 원문은 인터넷 뉴스천지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안중근이 쓴 시구 “동양대세를 생각하매 아득하고 어두운데 / 뜻있는 사나이가 편한 잠을 어찌 자겠는가 / 평화로운 시국을 이루지 못함이 더욱 강개한데 / (일본이) 정략을 고치지 않으니 참 가엾도다.”와 안중근이 단지동맹을 맺고 손가락을 단지한 후 찍은 왼손바닥 도장(대한국인 안중근/ 大韓國人 安重根), 안중근(본명: 안응칠), 2014년 1월 중국 하얼빈시 하얼빈역에 세워진 안중근 의사 기념관 (사진출처: 천지일보 DB, 뉴시스)
 

영문판 ▶ [global news CheonJi] An Joong-Geun, a Pioneer of World Peace, Alerts through the Unfinished Dongyang-Pyeonghwaron

노골적 침략정책 펼친 일본제국주의 향한 일침
평화, 동양공동체ㆍ세계공동체 ‘연합’으로 실현

[천지일보=박선혜 기자] 1909년 7월 6일 일본 내각회의에서 조선을 병탄하기로 한 후 약 4개월이 지났다. 10월 26일 중국 하얼빈 역 앞에서 대한국인 의병참모중장 안중근이 쏜 총알을 맞은 이토 히로부미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이는 동아시아 각국을 진동시킨 중대한 사건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안중근은 민족의 적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영웅이다. 하지만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한 것도 그의 자각(自覺)에서 나온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에 입각한 실천 중 하나였다. 당시 하얼빈 역은 중동철도의 중추였다. 따라서 안중근의 이토 저격 사건은 국제사회로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 이후 일본 군정당국은 국제법을 준수하는 자태를 보이면서 안중근에 대한 일방적인 재판을 진행했다. 의거 후 며칠이 지나지 않은 10월 30일에 열린 제1차 검찰관의 심문에서 안중근은 이토를 저격한 15개 조항의 이유를 열거했다. 그중 열두 번째 조항에서 안중근은 “이토는 동양평화를 교란했다. 러일전쟁 때부터 그는 한국의 독립을 수호한다고 양언했지만, 그는 한국 황제를 내쫓았다. 그 결과가 당초의 선언과 전혀 반대된 것이므로, 이천만 한국 국민은 이에 분개해 마지않았다”고 밝혔다.

일본은 11월 3일 안중근을 뤼순 감옥(현재 중국 여순)으로 이동시킨 후에도 검찰관 신문과 취조를 계속했다. 이윽고 해를 넘겨 1910년 2월 7일 공판을 시작해 네 차례의 개정을 거쳐 14일에 사형을 선고했다. 일본학자 시카노 다쿠미루는 1994년 ‘안중근 무죄론’이란 글을 통해 “(안중근에 대한) 이러한 심판은 완전히 불공정하고 비법이며, 안중근은 응당 무죄로 판결돼야 했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안중근이 남긴 동양평화론은 그가 사형선고를 기다리며 1910년 3월 옥중에서 동양평화 실현을 위해 쓴 미완성의 책이다. 옥중에서 안중근이 의연하고 담담하게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자 일본인 간수는 고개를 떨어뜨렸다고 한다. 동양평화론은 제2차 세계대전의 주역, 독일의 나치즘,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함께 세계침략전쟁으로 변질해가는 일본 제국주의를 향한 일침이었다.

안중근은 일본이 조선을 발판으로 침략의 야욕을 불태우고 있었던 1910년 경술년(庚戌年) 당시, 노골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침략 정책의 잘못을 지적하고, 고칠 것을 촉구하며, 일본인 집정자들을 향해 야욕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자 했다.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옥중에서 쓴 글이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이다.

자서전 안응칠 역사는 완성됐지만, 논문형식의 논설집 동양평화론은 ‘서문’과 ‘전감 1’만 지어졌다. 나머지 ‘현상 2’ ‘복선 3’ ‘문답’은 목차만 제시된 채 미완성으로 남았다. 당시 안중근은 동양평화론 마무리 집필을 위해 사형집행 날짜를 한 달여 늦춰 달라고 고등법원장 히라이시에게 부탁했고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안중근의 목적은 오직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수호하는 것이었다. 그는 동양평화를 시작으로 세계평화의 앞날을 내다보고 있었다.

안중근이 동양평화론을 통해 아시아, 더 나아가 세계에 남기고 싶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1919년 3월 1일에 발표된 기미년 독립선언문과 독립선언문을 바탕으로 제정한 대한민국 제헌헌법 또한 이 관점에서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다.

제헌헌법의 전문 서두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해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중략) 안으로는 국민 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한다”고 결의하고 있다.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前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는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100주년이었던 지난 2010년에 ‘안중근의거100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논문 엮음집에 실은 발표문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에 피력된 사상은 국내적으로도 미래지향적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그가 (동양평화론에서) 세계평화의 바탕으로서 자주생존권을 보장하는 국가의 공존관계라고 언급했던 것은 1919년 기미독립선언서에 ‘공존동생권(共存同生權)’으로 곧 동양평화, 세계평화, 인류행복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표현됐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곧 다른 지식인들이 강제병합 이후에 절감(切感)했던 세계를 옥중에서 미리 정리해낸 선구적 업적이었다.”

한반도는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으로 남아 있다. 중동과 내륙 국가들은 아직도 내전(內戰)으로 고통 받고 있다. 지금 세계는 ‘평화’를 절실히 외치고 있다. 선각자 안중근이 미완성으로 남긴 동양평화론은 동양공동체와 세계공동체의 연합을 강조하고 있다. 동양평화에서 나아가 세계평화를 이끄는 것은 민족의 독립과 평등한 구성원 사이의 관계가 보장되는 국가 연합체의 실현에서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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