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코스모스와 소매 끝을 스치는 가을바람이 왠지 슬픈 계절. 슬프다 못해 서럽도록 아름답고 왠지 억울하기까지 한 가을. 이 계절이면 어김없이 기억나는 목소리가 있다.

“모슬포에서 제 고향 해남으로 왔지라!” “글을 써봐!” “저는 글을 쓸 줄 모른당께요!” “정말이야? 이 자식이 (군기가) 빠져 갖고!”

그는 약간 어눌하고 어리버리한 목소리와 함께 왔다. 30년 전 일이었다. 우리 부대에 전입해오던 날, 그로 인해 온 병영 전체가 시끌벅적했다. 후임 병사들이 그에게 얼차려를 주고 있었다. 말년 병장이었던 필자가 이를 뜯어말렸다. 그러자 제주도에서 전입 온 신참에게 기합을 주고 있었던 후임 병사가 필자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저 녀석이 지금 거짓으로 문맹인 척 하는지 어떤지를 알아내려고 하는 중입니다.”

당시 필자의 보직은 대대 인사과 방위계였고, 그는 막 훈련을 마치고 자대에 온 방위병이었다. 그는 인사과에서 자필 인사기록카드를 작성할 때부터 ‘고문관’이었다.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까막눈이었다. 원래 문맹자는 입대가 안 된다. 한글도 전혀 모르는 그가 입대하게 된 이유는 학력이 초등학교 졸업자로 돼 있었기 때문. 사회활동을 할 때 초등학교 졸업장이라도 있어야 도움이 될 것이라며 졸업장을 내준 학교 측의 엉뚱한 ‘배려’ 탓이었다.

권투 선수였던 그는 마음이 급했다. 면담 결과 그의 머릿속에는 군에서 하루라도 빨리 제대해 권투를 계속해 보고 싶다는 단순한 생각뿐이었다. 제대 안 되면 금방이라도 사고를 칠 것만 같았다. 일단 해안 경계 초소 근무로 인사 발령을 냈다. 그리곤 곧바로 소집해제 신청서를 작성해 사단으로 올려 보냈다. 사단에서 면접을 실시할 테니 병사를 인솔해 오라고 연락이 왔다. 그를 데리고 사단으로 갔다. 면접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둘은 무척 배가 고팠다. 버스터미널에서 부대가 있는 곳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식당에 들렀다. 당시 한 그릇에 250원 했던 라면 두 그릇을 시켰다. 필자는 그에게 막걸리도 한 잔 권하며 “군대 생활이 많이 힘들겠지만 잘 참고 지내라”고 당부했다.

“한 병장님, 너무 고맙소잉!”

그는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가리고 고개를 뒤로 숙인 채 담배 한 개피를 맛있게 피웠다. 어른들의 잘못으로 오지 않아야 할 군대를 온 이가 그였다. 둘은 잠시 마주 앉아 얘기꽃을 피웠다. 그는 제대 후 국가대표 권투선수의 꿈을 반드시 이루고 말겠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돌아오는 버스의 라디오에서는 당시 유행하던 노래인 하사와 병장의 ‘해남아가씨’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소집해제 명령서가 사단으로부터 내려오지 않았다. 감감무소식이었다. 대대에 잠시 들른 해안부대 전령이 그의 소식을 전해왔다. “한 병장에게 안부 전해달라고 했다”고. 다음에 또 전령이 왔다. “지금 군대가 너무 싫고 괴롭지만 참고 지낸다”고. 그러나 그는 그로부터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농약을 마시고 말았다. 처음에는 일종의 시위였던 것 같았다. 필자가 출장이라도 나가 달래보려 했지만 계속되는 부대 훈련 탓에 여의치 않았다. 잠시 의식을 회복했던 그는 아무 소식이 없자 또다시 농약을 구해 들이마셨다.

그에 관한 소식은 그 후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당시 언론에 기사 한 줄 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가 왜 죽음을 택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그러나 들려온 얘기에 따르면 그는 군대생활에 전혀 적응하지 못했고, 단체생활에 몹시 서툴렀다. 이른바 왕따였다. 오로지 제대할 날만 손꼽아 기다리다 뜻이 이뤄지지 않자 자살한 것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자살한 병사에 관한 기사를 보면 그가 생각난다. 대한민국 군대, 병영문화 개선이 아직도 필요함은 물론이다. 군 입대자 수부터 대폭 줄여야 한다. 첨단 무기를 도입·개발하는 한편, 점차 직업 군인제와 모병제를 확대해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오늘 아침 신문 피플면에서 한 후배 언론인의 부음을 접했다. 몰랐지만 평소 우울증을 앓았다는 후문이다. 우울증은 아직도 치료하기 어려운 병인가. 그는 겉으론 정상이었지만 속으론 무언가에 많이 시달리고 있었던 것 같다. 가수 토이의 ‘여전히 아름다운지’를 유난히 잘 불렀던 그였다. 술도 잘 하고 취재도 잘 하는 기자였다. 후배가 남긴 빛나는 웃음, 언어들, 기사들이 폐부를 찌르는 것만 같다.

다시 가을. 올해도 속절없이 개울은 흐르고, 서러운 풀꽃도 저만치 피어나 있는데. 필자는 많은 사랑하는 이들을 이 계절에 떠나보냈다. 눈물 없이는 뒤돌아볼 수 없는 날들, 아름다운 사람을 홀연히 보내야 했던 계절이 서럽다. 이래저래 참 억울한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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