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칼럼니스트

‘목련꽃 그늘 아래서/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구름꽃 피는 언덕에서/피리를 부노라//아, 멀리 떠나와/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돌아온 사월은/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빛나는 꿈의 계절아/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아’

박목월의 ‘4월의 노래’다. 목련의 계절이 돌아오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시(詩)다. 1954년 4월, <학생계>가 창간됐다. 편집주간이었던 시인 박두진이 같은 청록파 시인으로 친하게 지냈던 목월에게 창간시를 부탁했다. 목월은 ‘4월의 노래’를 지어 보냈고, 후에 우리나라 최초 여성 작곡가 김순애가 곡을 입혀 노래로 만들었다.

1954년이면 한국전쟁이 끝난 이듬해다. 전쟁의 참화로 피폐해진 국민들은 새로운 희망과 용기가 필요했다. <학생계>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청소년들에게 위안과 꿈을 심어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전쟁 전 이화여고 교사로 재직했던 목월은 교정에 목련꽃이 피면 학생들이 괴테의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던 장면을 시에 담았다. 사랑의 열정이 봄꽃처럼 피어나는 청춘들의 내밀하고도 달콤한 사연들을 편지로 쓰는 모습도 그려졌다.

죽음과 광기로 얼룩진 전쟁의 시기가 지나고, 교정에 다시 꽃이 피고 그 꽃그늘 아래에서 수줍은 아이들이 연애 소설을 읽고, 사랑의 편지를 쓰는 풍경은 말할 수 없이 평화롭고 감미롭다. 해서 시인은 ‘돌아온 사월’을 ‘생명의 등불’ ‘빛나는 꿈의 계절’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이라 했다.

4월을 잔인한 계절이라고 표현한 시(詩)도 있다. 미국 태생 시인 T・S 엘리엇(1888~1965)은 ‘4월은 잔인한 달’이란 시를 썼다. 1922년에 발표한 433행의 장시 ‘황무지’의 첫 번째 구절이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우며/ 추억과 욕망을 섞으며/ 봄비로 생기 없는 뿌리를 깨운다’

엘리엇이 우리나라를 염두에 두고 예언을 한 건 아니겠지만, 희한하게도 우리들의 4월도 가장 잔인한 달이다. 1948년 제주 4.3사건, 1960년 4.19혁명, 2014년 세월호 참사 등 끔찍하고 비통한 일들이 목련꽃 피는 4월에 유독 많이 일어났다.

세월호 참사는 2014년 4월 16일 빚어졌다. 소풍 간다며 신나게 웃고 떠들던, 착하고 맑은 아이들이 떼로 목숨을 잃는 참담하고도 어이없는 일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다. 세월은 무심하게 흘러 돌아오는 4월 16일이면 세월호 참사 10주기가 된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지만,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아이들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고, 유족들의 눈물도 마르지 않았다. 안전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다짐도 공염불이었다.

‘세월호를 건져 올려라, 진실을 건져 올려라’, 목소리가 험악하고 결기가 넘쳤다. 떼로 모여 촛불을 들었고, ‘혁명’을 이뤄냈다. 마침내 세월호가 들어 올려졌고, 사람들은 이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운’ 세상이 오는 줄 알았다.

벌거벗은 채 흉물처럼 모습을 드러낸 세월호는 앞으로 옆으로 거꾸로 포즈를 취하고는 어느 날 사라지고 말았다. 작별의 인사도 없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었을 법도 한데, 한 마디 말도 없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세월호를 건져 올려 진실을 밝히라는 외침은 속된 야욕의 수단이었고, 그 야욕이 채워지자 세월호는 고물처럼 버려지고 잊혀졌다.

목련이 피고, 장미가 꽃을 피우고, 여름에 매미가 울고, 가을에 산들바람이 불고, 겨울에 첫 사랑처럼 눈송이가 내리는,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더 이상 볼 수도 만질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없게 된, 봄 같고 꽃 같고 천사 같은, 가엾고 애달픈 그 아이들은 저 세상에서 미안하고 고맙다는 헛된 인사만 듣고 말았다.

‘하얀 목련이 필 때면 다시 생각나는 사람, 봄비 내리는 거리마다 슬픈 그대 뒷모습…’ 가수는 이렇게 노래라도 하지만, 슬픔에 겨워 겨우 숨 붙이고 사는 사람들은, 노래 한 자락도 제대로 못 부른다.

또 목련이 피었다. 곧 스러지고 떨어질 꽃들이지만, 제 명대로 살다 가는 게 순리고 사명이고 도리다. 4월, 이제 좀 아프지 말자. 잔인하지도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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