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정부 들어 첫 제안
예견된 결과 속 의견 분분
북 수용과 거부 사이 묘수 찾기
북러 밀착 관계가 ‘뒷배’ 분석도
李대통령 외교 보폭에 北압도 당해
결국 남북 대화에 나설 가능성 높아

[천지일보=김성완 기자] 우리 정부가 남북 군사적 긴장 완화를 위한 실무 회담을 제안했으나 북한이 사흘째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남북 단절이 심화된 상황이라 예견된 결과이기는 하지만 북한이 처한 대내외적 환경이 예전 같지 않다는 관측이 많다.
불과 몇 개월 만에 한국의 위상이 국제무대에서 전례 없이 높아진 가운데 이를 지켜보는 북한의 속내가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분석이다. 이 상태로 강경하게 밀고 나갈지 남한을 활용할지 난감한 처지라는 것이다.
◆북, 일절 호응 없어
북한은 지난 17일 남측의 MDL(군사분계선) 기준선 설정 문제 관련 군사 회담 제안에 사흘째 침묵을 지키고 있다.
지금까지 담화나 논평 등 어떠한 반응도 내놓지 않았고, 조선중앙통신이나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 등 관영 매체에서도 일절 언급이 없었다.
우리 군의 제안은 1953년 정전협정 체결 당시 설치한 1000여개의 MDL 표식물이 상당수 유실돼 북한군이 작업을 하다 MDL을 침범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고 자칫 우발적 군사 충돌로 이어질 수도 있으니 방지책을 마련하자는 것이다.
남북 군사회담은 이재명 정부 들어 첫 공식 제안이다. 마지막 남북 군사회담은 문재인 정부 당시인 2018년 10월 제10차 장성급군사회담이었다.
문 정부는 2019년에도 북한 측에 군사회담을 제안했으나 북한 측은 무반응으로 일관했다. 윤석열 정부 들어선 공식 제안 자체가 없었다.
국방부에 따르면 남북 군사회담은 국방장관회담(총 2회), 장성급군사회담(10회), 군사실무회담(40회) 등의 형식으로 열렸다.
◆북한 침묵 배경은
북한의 무반응은 예견된 결과이기는 하지만 실상은 내부적 전략 수립에 상당한 진통을 겪고 있음을 시사한다는 일각의 시선도 있다.
과거 북한은 남측의 제안에 대해 즉각적인 거부 성명을 발표하거나 되려 역제안을 통해 주도권을 쥐려는 패턴을 보여왔다.
그러나 이번의 침묵은 이전과는 그 결이 다르다는 의견인데,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천명한 ‘적대적 두 국가’ 관계 설정과 실무 회담 수용 사이의 논리적 모순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 아니냐는 것이다. 북한 자신들의 자존심을 세우면서도 실리를 챙길 수 있는 묘수를 찾기 위한 침묵일 수 있다는 얘기다.
북러 간의 군사적 밀착 관계가 북한 무반응의 배경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러시아가 경제적 뒷배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북한군의 파병에 대한 대가로 러시아는 북한에 상당한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북한으로 하여금 남한과의 대화 필요성을 덜 느끼게 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북한의 정치 일정도 변수로 꼽힌다. 북한은 내달 하순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시작으로 내년 초 제9차 당대회 등 연속된 정치 일정을 앞두고 있는 만큼 남북 관계에서 불필요한 새 변수를 만들 유인이 크지 않다는 관측이다.
◆南과의 격차에 압도되다
북한이 남한의 높아진 외교적 위상 등 격차에 압도되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결국 남한과의 관계 개선에 명분을 찾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력갱생 운운하지만 대북 제제에서 탈피하지 못한다면 한계로 작동할 수밖에 없어 가장 가까운 남한을 활용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더욱이 최근 남한은 한미 안보 협력을 공고히 하는 것은 물론, 방산 수출과 경제·문화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글로벌 중추 국가’로서의 입지를 굳히고 있다. 경주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과 중동 순방에서 이미 확인됐다.
반면 북한은 러시아와의 밀착을 통해 돌파구를 찾으려 하고 있으나 이는 되려 서방 세계와의 대립각을 세우며 외교적 운신의 폭을 좁히는 결과를 초래했다. 북한이 내년 봄 북미대화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과거에는 남북 관계가 북한의 벼랑 끝 전술이 통하는 비대칭적 구조였다면 지금은 남한이 북한의 우방인 중러까지 포함한 국제 사회의 지지를 바탕으로 압도적인 레버리지(지렛대)를 쥐고 있는 형국이다. 이재명 대통령의 실용 외교가 외교 보폭을 넓히고 있고 북한이 압도당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진단이다.
북한 지도부가 남측의 회담 제안에 응하는 것 자체가 남한 주도의 질서에 편승하는 것으로 비칠까 우려할 수 있다는 견해가 나오는 이유다. 북한이 섣불리 대화 테이블로 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억제제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군 “당장 추가 제안은 없어”
북한의 침묵이 계속되더라도 우리 정부는 대화의 문을 열어두는 일관된 입장을 유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정부는 일단 추가적인 회담 제안이나 후속 메시지를 내지 않겠다는 방침을 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도 제안 직전 북한의 호응 가능성을 크게 생각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남북은 과거 판문점 채널과 동·서해 군통신선 등 3개의 연락채널을 유지해 왔지만 북한은 2023년 4월 7일 이후 모든 채널을 끊었고 지금까지 한번도 접촉이 없었다.
군사회담 제안과 별개로 DMZ(비무장지대)에서의 군 대응은 원칙대로 유지하고 있다. 군은 북한군이 MDL을 침범할 경우 경고방송·경고사격 등 규정된 절차를 그대로 적용하며 추가 조치가 필요할 때는 유엔사와 협의할 계획이다.
북한의 목표가 체제 안정과 경제 발전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정상국가로 나가길 원한다면 인접 국가인 남한과의 대화와 협력이 장기적으로 필수적인 부분임을 인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풀이가 많다. 현재의 강경한 태도에서 벗어나 결국 대화를 통한 유리한 입지 확보를 위한 과정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무력 도발을 통한 행동으로 응답할 가능성이 높다고 점치기도 한다. 말로 하는 거절보다 물리적 행동이 그들이 주장하는 ‘강대강’ 원칙에 더 부합하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연말 새로운 정책 방향을 제시할 정치 일정과 내년 북미 대화를 염두에 둔다면 높지는 않다는 쪽에 더 힘이 실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