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 고경명, 마상격문을 쓰다.

6월 22일에 고경명 의병은 전주에서 북으로 전진했다. 6월 24일에 고경명은 말을 타고 가면서 격문을 썼다. 소위 마상격문(馬上檄文)이다.

“옷소매를 떨치고 단상에 올라 눈물을 뿌리고 군중과 맹세하니, 곰을 잡고 범을 넘어뜨릴 장사는 천둥 울리듯 바람 치듯 달려오고, 수레를 뛰어오르고 관문을 넘어가는 무리는 구름 모이듯 비 쏟듯 한다”는 내용의 격문은 선비들의 심금을 울렸다.

6월 27일에 의병은 충청도 은진까지 진군했다. 이때 황간·영동의 왜적들이 금산으로 넘어 들어왔다는 소문이 들렸다. 막하의 장수들이 되돌아가서 전라도부터 구하자고 청하자 고경명은 군사를 돌려 진산으로 들어갔다.

# 고경명, 금산전투에서 순절하다.

7월 9일에 기병 8백명과 보병 6천명의 고경명 의병은 방어사 곽영의 관군 1천명과 함께 금산 성문 밖 10리 지점에 나가 진을 치고 작전을 개시했다.

고경명은 정예기병 수백 명을 내보내어 적을 공격했는데, 군관 김정욱이 말에서 떨어져 달아나자 우리 군사가 일시 후퇴했다.

석양 무렵에 왜군이 성안으로 들어가므로 고경명은 재인(才人) 30여명을 시켜 성문을 부수게 하는 한편 진천뢰를 쏘아 성안의 창고를 불태웠다.

날이 저물자, 양쪽은 각기 군사를 거두었고, 의병과 관군은 내일 같이 싸우기로 약속했다. 이때 고경명의 장남 고종후가 “오늘 우리 군사가 승리했으니 이 승리한 형세를 가지고 군사를 온전히 보전해 돌아갔다가 기회를 봐서 다시 나오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약 왜군과 진지를 마주 대하여 들판에서 잔다면 밤중에 습격을 당할 우려가 있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고경명은 “네가 부자간의 정으로 내가 죽을까 걱정하느냐? 나는 나라를 위해 한번 죽을 따름이다”라고 말하므로, 고종후는 다시 말하지 못했다.

7월 10일 동틀 녘에 관군은 북문을, 의병은 서문을 공격했다. 그런데 왜장 고바야카와는 관군이 약한 것을 미리 알고 관군을 총공격했다. 선봉장인 영암군수 김성헌이 말을 채찍질해 도망치자 관군이 일시에 무너졌다.

고경명은 의병만이라도 적과 대항코자 하였으나 몇 사람이 ‘방어사의 군사가 무너졌다’고 부르짖자 의병도 동요해 도망가 버렸다.

이때 고경명은 말이 달아나서 말에서 떨어졌고, 종사관 안영이 그의 말을 주어 다시 타게 하고 안영은 걸어서 호위하며 후퇴했다. 유팽로는 먼저 탈출했는데 종에게 ‘대장은 모면하였는가?’라고 물으니 아직 못 나왔다고 하자, 급히 말을 채찍질해 어지러운 군사들 속으로 들어갔다.

고경명이 돌아보며 ‘나는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그대는 말을 달려 빠져나가라’고 했지만 유팽로는 ‘어떻게 차마 대장을 버리고 살기를 구하겠는가?’라고 말하고 안영과 함께 고경명의 몸을 감싼 채 전사했다. 고경명의 차남 고인후도 싸우다가 죽었다(선조수정 실록 1592년 7월 1일).

#전라도 의병들, 다시 일어나다

고경명 순절 이후 전라도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화순에서 최경회의 전라우의병, 보성에서 박광전·임계영의 전라좌의병, 장성에서 김경수의 장성남문 의병, 영광 심우신, 남원 변사정, 태인 민여운 등이 일어났고, 고종후는 복수의병장이 됐다.

광주광역시 포충사에는 고경명의 영정과 신위가 모셔져 있다. 그 옆에는 고종후와 고인후 그리고 유팽로와 안영의 신위가 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