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흔적과 십자가에 못 박힌 자국 뚜렷
수의에 혈흔 지워도 형상 여전히 남아

[천지일보=이지수 기자]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막달라 마리아는 아직 어두울 만큼 이른 아침 예수의 무덤을 찾아갔다. 그러나 예수는 거기에 없었다. 다만 그를 감쌌던 세마포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2000년 전 예수의 시체를 감싸던 세마포. 일명 ‘토리노의 수의(성의)’로 불리는 이 세마포에 대한 논란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토리노 수의 논란은 1898년 이탈리아 고고학자이자 사진가 세콘도 피아가 왕의 허락으로 수의 사진을 촬영하면서 시작됐다. 가시면류관을 쓰고 채찍으로 얻어맞고 십자가를 매고 갔으며 손목에 못 박혔던 상황과 일치한 그 사진은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러나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이 수의를 놓고 예수를 실제로 감쌌다는 주장과 후대에 매우 정교하게 그려진 모조품일 것이라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이 수의를 진품으로 인정했다.

영화 속 예수의 모습은 큰 키의 건장한 체격, 그리고 금발에 푸른 눈을 가졌다. 과연 실제 모습도 이와 같을까. 사진을 분석한 결과 키는 약 176cm이며 피부는 거무스름했다. 금발과 푸른 눈의 예수는 아니었다.

고문을 당했던 흔적과 함께 손목 부분엔 십자가에 못 박힌 뚜렷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눈 부위로 추측되는 부분에선 동전 모양이 발견됐는데 이 동전은 로마의 렙튼으로 빌라도 총독이 발행했고 팔레스타인이나 다른 지역에서는 다시 발행된 적이 없었다. 이는 수의의 정확한 시대를 알려준다.

1205년 4차 십자군의 기사 오손 드 라 로쉬는 수의를 아테네로 옮겼다고 한다. 그 후 1353년 오손의 먼 후손 잔느 드 베르지가 처음으로 수의를 소장하고 있던 제프리 드 샤네이와 결혼해 공동소유했다.

샤네이의 후손들은 1452년 수의 소유권을 이탈리아 사보이 왕가에 넘겼다. 1532년에는 프랑스 상베리의 사보이 대성당의 화재로 수의가 손상돼 8년여 동안 복원 기간을 거쳤다.
1578년 사보이 왕가는 토리노를 수도로 정했다.

이때 수의도 옮겨와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 1578년 이후로 수의는 400년간 11차례 정도만 공개됐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화학처리로 수의에 묻은 혈흔을 지워도 형상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혈흔이 아니라면 무엇이 이런 형상을 가능하게 했는지는 불분명하다. 1988년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수의 연대는 1260년~1390년 사이인 중세로 나왔다.

이 결과로 수의가 진품이 아니라는 주장이 거세졌다. 그러나 표본 3개를 연구소 3곳에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의 신뢰도를 검사해봤는데 측정 결과 이때까지 밝혀진 사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수의가 진품이더라도 연대측정의 오차는 발생할 수 있다고 지지자들은 주장한다. 현재까지는 과학자들도 진위 논란을 잠재울 결정적 증거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가톨릭 관계자들은 “진위여부를 떠나 십자가형에 대한 고통을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묵상할 수 있는 자료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토리노 수의는 현재 이탈리아 토리노대교구에 보관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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