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정위(丁謂)는 북송 진종(眞宗)시대 유명한 권신으로 시, 그림, 음률에 능했지만, 시세에 영합하는 소인배였다. 왕흠약(王欽若)이 세력을 누릴 때는 그가 좋아하는 짓이라면 무엇이든 서슴지 않다가, 세력을 잃자 새로운 재상 구준(寇準)의 앞잡이로 변했다. 진종에게는 태산에 봉선(封禪)을 거행해야 한다고 충동질했으며, 천하의 부를 모두 지닌 황제가 궁전 하나를 짓는 것이 무슨 문제냐고 떠들었다. 궁전 건설의 총괄책임자가 되자 최고의 궁전을 짓기 위해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즉시 다시 지었다. 재목을 얻기 위해 남방에서 대규모의 벌목사업을 시행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보다 못한 장영(張咏)이 정위를 죽여 천하에 사죄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구준까지 옹호하고 나섰다.

1015년 겨울, 정위와 조이용(曹利用)이 추밀사가 되어 군기대권을 장악했다. 조이용과 구준은 원수지간이었다. 구준의 추천으로 입궁한 정위는 신하들의 면전에서 구준이 자기의 얼굴이 노예와 같다고 놀렸다는 이유로 원한을 품었다. 중병에 걸린 진종이 정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자 황후 유(劉)씨가 조정에 간여했다. 구준은 불법을 저지른 유황후의 친척들을 인정사정없이 징벌했었다. 황후는 집권하자마자 복수할 기회를 노렸다. 조정에는 유황후가 중심인 구준의 반대파가 결성됐다. 위기감을 느낀 구준은 사직을 요청하는 자리에서 황태자에게 양위하라고 권했다. 구준은 술에 취하면 아무렇게나 지껄였다. 그는 진종과의 대화를 술김에 털어놓고 말았다. 정위가 그 사실을 황후에게 알려주었다. 황후는 구준이 태자를 끼고 권력을 장악한다면 황상은 있으나마나 할 것이라고 무고했다. 병약한 진종은 구준의 사직을 재가했다. 재상으로 승진한 정위는 유황후의 세력을 업고 순식간에 조정 내외로 세력을 확대했다. 다른 재상 이적(李迪)은 구준과 가까웠다. 정위는 유황후와 짜고 이적을 내쫓았다. 누군가가 이적이 죽는다면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하자, 정위는 말하기 좋아하는 서생이 ‘천하에 애석한 일이 벌어졌다’고 한 마디 기록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정위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자 모두 곁눈질하며 미워했다. 1022년 2월, 진종이 병으로 서거하고 인종(仁宗) 조정(趙禎)이 즉위했다. 재상 왕증(王曾)은 정위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정위는 자신의 결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정위는 한사코 황제에게 단독으로 접근하는 것을 방해했다. 왕증은 우선 정위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절대로 반대하지 않았다. 하루는 왕증이 정위에게 불행히도 아들이 없어서 형제의 아들 가운데 하나를 양자로 삼으려고 하니 같이 황제를 찾아가자고 권했다. 정위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생각하고 무심코 조정을 떠났다. 혼자 인종을 만난 왕증은 정위와 그 일당의 악행을 밝혔다. 인종은 다음날 정위를 하옥시키고 재상직도 박탈했다. 정위는 왕증을 홀로 남겨두었던 것을 후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좌천되어 가는 도중에 구준이 있는 곳을 지났다. 구준은 삶은 양 한 마리를 보내며 자신의 마음을 넌지시 전했다. 정위는 더욱 겁을 먹고 재빨리 도망쳤다가 나중에 간신히 좌천된 곳을 떠날 수 있었다.

정위는 은인 구준을 공격했으며, 홀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강력한 맞수와 정면충돌이 어렵다고 판단한 왕증은 고심 끝에 일단 구미를 맞추며 적대시하지 않았다. 같은 재상이었지만 항상 그의 말에 순종했으며, 심지어는 충직한 사람이라는 명예마저 버리고 간악함으로 악명을 날리던 상대를 정중하게 대접했다. ‘위호시화(僞好示和)’의 첫 단계였던 것이다. 황제에게 직간할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아들이 없는 자신의 불행을 이용했다. 2번째 ‘위호시화’였다. 기민한 정위를 속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 배경에는 자신의 절대 권력을 위협하는 정위를 제거하려는 인종의 차도살인계가 숨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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